(제 33 회)

 

제 10 장

 

1

 

2월 초순이니 아직 추위가 한창인데 난로에 불도 지피지 않은 방안은 바람질만 안할뿐이지 바깔 못지 않게 추웠다. 그러나 아침에 약간 때나마나 하여 이미 싸느랗게 식은 난로나마 마음에 위로라도 되는듯 그 주위에 어학회회원들이 빙 둘러앉아있었다. 중용을 미덕으로 삼고 회로애락을 표면에 나타내기를 꺼려하는 학자들이라 얼핏 보기에는 모두 한결같이 무표정해보이나 실은 그렇지 않고 그들의 됨됨이와 생각에 따라 표정과 거동이 각이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있는 신명균의 넙적한 얼굴에는 분명히 피로와 우수가 어려있다. 인쇄의 길이 막혀버린 《한글》잡지의 발행인으로서 전도가 밝지 못한 이 책무를 남에게 넘겨주는 마음의 고충때문인것 같다. 김윤경은 은테안경을 벗어서 천천히 닦고있다. 숱이 많은 눈섭아래 움푹 들어간 갸름한 눈에는 언제한번 웃음을 담아본 일이 없는듯 차디차다. 공교롭게도 가장 덩지가 큰 리극로와 가장 체소한 리희승이 나란히 앉아있는데 리희승이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신중한 얼굴을 하고 앉아있는가 하면 그보다 목기장 하나는 더 큰 리극로는 그 큰 몸을 자주 움씰움씰하며 그 커다란 눈을 디룩거리는것이 마음의 흥분을 감추지 못해서 그러는것 같다. 방금 발언을 하고 자리에 앉은 리윤재는 《한글》잡지의 새 편집방향에 대한 자기의 제안에 사람들이 너무도 담담하게 대하는데 좀 놀란 기색이다.

최현배가 일어섰다. 간사장으로서 월례회를 사회하던 그가 사회자의 립장을 떠나 리윤재의 제안을 반박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높지 않으나 야무지고 때때로 그의 버릇이 튀여나와 말에 가시가 돋군 한다.

《<한글>잡지는 명실공히 우리 어학회의 학보입니다. 전문연구기관의 학보라면 응당히 그에 맞는 체모를 갖추어야 하고 높은 리론수준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학보를 2권 1호부터 한글보급을 위한 대중계몽잡지로 개편하겠다는 리윤재님의 제의는 학보로서의 권위를 떨어뜨리는것으로 되지 않을가요? 그럼 우리 학보로써 한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몽매한 사람들과 아녀자에게 <가갸거겨>부터 가르치자는건가요?

물론 나는 맞춤법통일안이 발표된 오늘 그 보급이 초미의 과제라는 리윤재님의 의도를 모르는바는 아니고 그 필요성도 잘 알고있습니다. 그러니만치 맞춤법에 대한 원리적리론을 더 연구심화하고 그것을 더 널리 소개선전하는것이 우리가 할바, 긴절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대중계몽을 위주로 <한글>잡지를 통속지로 만들어 학술적연구를 소흘히 다룬다면 농군이 우리의 일을 대신하겠습니까?

<한글>잡지는 우리 조선어학자의 학술잡지이지 결코 대중계몽을 위한 통속지로는 될수 없습니다.》

리윤재가 다시 일어섰다.

《최현배님은 잡지의 통속화를 학문의 비속화로 여기시는 모양인데 잡지를 통속화하려는 나의 계획은 이렇습니다. 우선 2권 1호부터 최현배님의 <조선말본의 강의>를 련재하겠습니다. 이런 리론적안받침이 없는 통속화란 있을수 없으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일안의 보급도 기대할수 없는것입니다.

지금 한글보급에서 일선교원들의 소임이 자못 무겁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맞춤법의 옳은 인식을 주기 위하여 <보통학교 조선어독본지도례>를 련재할 계획입니다. 잡지의 통속화는 어떻게 하든 대중의 실용에 더 많은 도움을 주자는데로부터 출발하는것입니다.

<물음과 대답>, <긴급동의> 같은 고정란을 설정하여 독자대중을 잡지에 활발히 참가시키는것은 어학회의 사업발전을 위해서도 유익할것입니다.

<한글>잡지가 전문가를 위한 전문가의 리론잡지로 된다면 대중은 리해할수도 없는 이 잡지를 보지도 않을것입니다. 맞춤법통일안이 발표되기 전에는 <한글>잡지가 동인지형식으로도 국문연구에 일정한 기여를 했지만 통일안이 나간 오늘에는 <한글>잡지의 대상이 일부 전문가가 아니라 대중입니다. 대중이 맞춤법통일안을 받아들이고 너나없이 알고 쓰게 될 때 그것이 이 땅에 정착될것입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것도 백성의 문맹을 없애기 위함이였고 우리가 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한것도 대중에게 바른 한글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였습니다. 우리 말과 글자가 대중의것인만큼 또 맞춤법통일안의 보급이 절실한 문제로 나선 오늘 <한글>잡지의 대중화, 통속화는 불가피합니다.》

김윤경이 천천히 안경을 쓰며 물었다.

《그럼 투고되는 학술연구론문들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

리윤재가 대답했다.

《배합하여 편집하거나 따로 특집을 만들어 필요한이들에게 제공할 생각입니다.》

《보나마나 특집은 어려울겁니다. 그러니 리론물과 통속물을 적절히 배합하여 학보로서의 체모도 갖추는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리희승이 김윤경의 이 절충론을 반대했다.

《<한글>잡지를 리론잡지로 유지하느냐, 통속잡지로 개편하느냐 하는것이 문제인데 이 문제를 한개의 잡지로 얼버무려 해결할수는 없고 두개의 잡지를 낸다면 그이상 없겠지만 현재 잡지 하나도 내기 어려운 우리 형편에서 어느 하나를 희생시킬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통속지를 택하고 리론지를 당분간 보류할것을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현시점에서 한글일반의 연구보다 맞춤법통일안의 보급이 급선무로 나서고있기때문입니다.》

최현배가 다시 발언했다.

《맞춤법통일안의 보급이 현재 급선무라는것만은 사실이지만 우리 국문운동전반에서 볼 때 그것은 한부분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표준말을 사정해야 하고 외래어표기법도 제정해야 하며 종국적으로 사전편찬에 착수해야 합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한글>지는 응당 국문운동전반을 촉진하는 대변지로 되여야 할것입니다. 그런데도 <한글>지를 맞춤법보급을 위한 통속지로 만든다는것은 너무도 근시안적인 처사가 아닐가요?

그런데 현재 나가지도 못하는 잡지를 놓고 그 성격문제나 론의하는건 죽은 자식 나이 세는 격이 아니요? 신명균님, 잡지발간은 어떻게 됩니까?》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다물고있던 신명균이 그제서야 눈을 번쩍 뜨고 최현배를 쏘아보며 되물었다.

《그거야 최현배님이 자신에게 물어야 할 문제가 아니요? 내가 간사장을 인계할 때 잡지발행인의 명의도 분명히 넘겨주었는데 소임이 끝난 나에게 그걸 따지면 어떻게 하오? <한글>지가 1권 10호까지 나간것도 순전히 리중건씨의 후의의 덕분이였지요. 그분도 나도 이이상 더 끌고갈 힘이 없었어요. 앞으로는 다른 대책이 서야 될거요. 그건 최현배님이 맡아서 해야 할 일이요.》

최현배는 잠시 노여운 기색을 띠고있다가 곧 신명균의 추궁을 무시해버리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간사장이 기관잡지발행인을 겸한다는건 어학회의 어느 회의에서도 결정된 일이 없습니다.》

《그거야 이미 관례로 되여온 불문률이 아니요.》하고 신명균이 한마디 더했다.

최현배는 여전히 제 말만 계속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불합리한 일입니다. 간사장을 해마다 선거하여 바꾸는데 잡지발행인도 해마다 바꾸겠습니까? 이 잘못된 관례는 고쳐야 합니다.》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있던 리극로의 황소같은 눈이 디룩거렸다. 최현배의 말은 언제나 조리가 있고 사리에도 맞는다. 그러나 나무랄데없는 그의 말이 어딘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글》잡지에 대한 그의 주장도 옳기는 하지만 어딘지 고답적이고 자기본위적이다. 간사장이 기관잡지발행인을 겸할수 없다는 말의 론거도 옳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신이 그 시끄러운 잡지에 직접 끼여들어 잡사에 시달리고 시간을 빼앗기고싶지 않다는 그의 저의가 엿보이는것이다.

그는 엉거주춤해서 일어섰다.

《나는 리윤재님 댁에 자주 찾아갑니다. 물론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과객으로서지요.》

과객이란 말에 누군지 피식 웃었다. 리극로가 아직도 가족을 서울로 데려오지 못해 뜨내기로 과객질을 한다는것을 알고있었기때문이다. 근엄한 김윤경은 리극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한담같은 말을 꺼낼가 하고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리극로가 말을 이었다.

《하루는 그 댁에 찾아가니 마침 중앙인쇄소에서 인쇄한 <한글>잡지를 실어왔는데 저녁식사후에 온 가족이 달라붙어 발송하기 위해서 포장을 하더란 말이요. 잡지를 한권씩 종이에 싸서 풀로 붙이고 거기에 받는 사람의 주소성명을 써넣고 우표를 붙이고 하는 일을 머리가 하얀 자당으로부터 열살안짝의 막냉이에 이르기까지 각기 맡은 일을 수걱수걱 하더란 말이요. 갈데 없는 마누팍뚜라수공업장이지요. (또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온 가족이 밤늦도록 일한다고 보수가 있나요, 누가 알기나 하며 수고한다는 말 한마디 한 일이 있는가요.

리윤재님은 날로 힘겨워지는 <한글>잡지편집을 위하여 새 학기부터는 강의를 못하겠다고 연희전문학교에 사표까지 냈습니다. 그 결과로 빈약한 그 집 생활비의 절반이 없어집니다.

<한글>잡지는 리윤재님의 이런 자기희생에 의하여 한호한호가 나갔던것입니다.

<한글>잡지를 대중판으로 하자는데는 대중계몽을 목적으로 함은 두말할것도 없지만 여기에는 실로 딱한 사정 또한 깔려있다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30~40페지로 엮던 잡지를 15~16페지로 대폭 줄이는 대신 국판을 사륙배판으로 판형을 크게 하고 횡서 2단을 종서 4단으로 하여 페지당 글을 많이 넣으면서도 인쇄비를 극력 줄여 값을 15전 하던것을 5전으로 낮추어 누구나 손쉽게 살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잡지의 경영난을 타개해보자는것입니다. 그야말로 출혈적인 잡지경영입니다.

잡지편집자의 이와 같은 피타는 노력과 고충을 먼 산 불보듯 하며 배부른 사람의 흥타령같은 빈소리나 하는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페일언하고 잡지를 대중판으로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와 발행책임을 간사장이 지느냐, 편집주간이 지느냐 하는 문제를 다수가결로 결정하는게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리극로의 제의에 의하여 다수가결에 붙인 결과 《한글》잡지를 대중판으로 개편하며 잡지발행인을 편집주간이 겸하기로 결정되였다.

마지막으로 리윤재가 일어서서 말했다.

《잡지는 어떻게 하든 두달안에 내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리윤재의 생활을 속속들이 알고있는 리극로조차 그가 무슨 타산으로 이런 약속을 하는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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