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회)

 

제 8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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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에서 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기로 결의하고 맞춤법통일위원희가 구성된 후 만 2년후인 1932년 12월에야 간고한 토의를 거쳐 비로소 그 원안이 륜곽을 갖추게 되였다. 이제 이것을 맞춤법통일위원회의 독회에서 재삼 심의를 거듭하게 되였다. 이같이 맞춤법통일안을 세상에 내놓는다는것은 조선어학회의 모든 힘을 모은 매우 장기적이고도 최대의 신중성을 기한 사업이였다.

그 당시 우리 나라에서 통용되는 철자법은 크게 세가지가 있었다. 총독부의 언문철자법, 성경식철자법, 조선어학회의 신철자법이 그것이다. 이 세가지 철자법과 문체가 혼탁을 이루어 쑥밭처럼 되여버린 국문은 갈피를 잡을수없이 어지러워져있었다.

나라가 왜적에게 빼앗긴 후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보통학교 조선어독본의 철자법을 평이하게 한다고 표방하여 총독부 통역관, 시학관, 어용학자들로써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1912년에 소위 《보통학교용언문철자법》이라는것을 규정했으며 그를 보통학교교과서에 도입했다. 이것은 전문학자들의 학리적인 연구에 기초한것이 아니였고 조선어철자법의 완전한 정리를 위한것도 아니였다. 이 언문철자법의 불합리성이 사회에서 크게 론의되자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1921년에 개정언문철자법을 내놓았지만 그것도 전번것과 대동소이한것이였다.

20년대에 조선어연구회 학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철자법에 대한 학리적연구가 심화되고 새로 제정한 신철자법이 출판물들에 널리 쓰이게 된 조건에서 교과서에 쓰인 총독부의 철자법은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질곡으로 되고 교육자들에게는 큰 애로로 되였다. 교과서철자법의 시정을 요구하는 교육계와 사회계의 여론에 못이겨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1930년에 제3회 언문철자법개정을 발표했는데 이 개정안심의에는 조선어학회의 일부 회원들이 참가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적지 않게 관철하여 그것을 조선어학회 신철자법에 접근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ㅎ받침을 보류하는 등 일정한 제한성이 있는것이였다. 그나마도 그것은 최근의 일이고 총독부의 언문철자법이 나온 후 20여년동안 그릇된 철자법을 보통학교 교과서에 도입하여 어린 학생들에게 모국어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주고 잘못된 서사생활을 굳혀놓은 그 해독은 자못 큰것이였다.

성경식철자법이라는 서사에서의 기현상이 생긴것은 우리 나라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된것과 관련된다. 지난 세기에 서양선교사들은 포교를 위하여 성경을 비롯한 그리스도교문헌들을 우리 나라 말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최초에 고종18년(1881년)에 루가복음(신약성서의 세번째 복음서)과 요한복음(신약성서에서 가장 늦게 씌여진 요한의 글)이 번역출판되였고 1884년에는 마가복음(가장 오래된 복음서로서 마가가 쓴 신약성서의 한개 편)이 일본 요꼬하마에서 번역되여 국내에 반입되였다. 이렇게 성경을 단편적으로 번역출판하다가 신약성서가 완역된것은 광무4년(1900년)이였고 구약성서는 륭희4년(1910년)에 번역출판되였다. 성서가 번역되던 이 시기로 말하면 우리 나라에서 서사생활이 지극히 란맥을 이루고있던 시기이고 성경번역자인 서양선교사들과 조선인교인들은 조선말과 글에 대한 옳은 인식과 지식이 전혀 없었으므로 성경번역에 쓴 철자법과 문체는 우리의 문법과 어법에는 맞지 않는것이여서 이를 성경식철자법, 그리스도교식문체라고 일컬으게 되였다.

이렇게 번역된 성경이 1934년까지 1 600만부나 출판되여 그리스도교교회를 통하여, 교회에 설치된 주일학교, 성경학교를 통하여, 각급 그리스도교계렬학교를 통하여 신자와 아동들속에 침투해들어갔으니 성경식철자법과 그리스도교식문체에 의한 해독은 종교자체의 해독에 못지 않는것이였다.

성경식철자법과 문체가 이미 시대의 추세에 맞지 않는다는것은 자타가 공인하는것이지만 그릇된것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그것을 기정사실로 인정하는 그리스도교계의 보수성으로 하여 그 시정은 이루어지지 않아 조선어학회의 철자법통일운동에 커다란 장애로 되고있었다.

철자법통일운동에 조성된 애로는 그뿐이 아니였다. 총독부의 언문철자법이나 성경식철자법처럼 광범히 보급된것은 아니지만 괴이한 리론을 들고나와 조선어학회의 철자법통일운동에 분렬을 조성한 인물이 곧 박승빈이였다.

박승빈이 주시경의 학설을 반대하는 자기 류의 학설을 들고나와 조선어학회에 맞선것은 그 연원이 오래지만 그 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한것은 1930년 1월에 있은 신명균의 《박승빈씨 경음변증론에 대한 비판》이라는 강연과 같은 해 4월에 한 리윤재의 《문자급 철자법에 대한 신연구》라는 강연으로부터였다.

이듬해 7월에 박승빈은 《조선어학강의요지》라는 책을 출판하고 조선어학회의 철자법리론에 도전해나섰으며 거듭거듭 강연회를 열고 동조자들을 긁어모아 마침내 그해 12월 10일에는 조선어학연구회라는 단체를 따로 조직하고 조선어학회와 맞서게 되였다. 이 단체의 간사로서 리긍종, 백남규, 신남철, 문시혁, 정규창 다섯명을 선출했는데 이들가운데는 어느 하나도 조선어학자로 알려진 사람은 없다. 더우기 이 단체의 조직자인 박승빈은 간사에도 들지 않고 뒤에 서있는것이 무슨 음모가 같기도 하다.

박승빈이 조선어학연구회를 조직하면서 내놓은 조선어학연구회 취지서를 볼것 같으면 《무릇 어문의 기사법으로 과학적으로 론거가 명확하고 체계가 정연함을 요하며 종래에 관용하여온 력사적제도에 기거함을 요하며 민중이 일상으로 실용함에 편이함을 요할것.》이라고 전제하고 조선어학회를 이렇게 공격했다.

《한글파학설이 과연 민중의 요구에 응할만큼 얼마나의 학술적진지가 있는가. …그것은 결과적으로 대중의 생활과는 얼이 멀게 소격되고 동떨어진 집안에서 스스로 존귀를 동경하는것이고… 교육에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있음은 물론 상당한 문식을 가진 신사나 부녀자가 졸연히 문맹이 되였음을 고사하고 초고급의 학식이 있는 사람도 그 기사법을 리해하는 사람은 아주 희소하다.》 그리고 그 결함은 《력사상의 기초적제도의 몰각》, 《어문과 부합되지 않는 기사의 롱간적강요》, 《발음불능의 기형문자의 사용》, 《국부적관철에 구애되여 전체에 회동하지 못하는 편견적견해》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조선어학회의 철자, 법리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박승빈일파가 발표한 철자법리론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된시웃(ㅅ)은 쓰고 쌍(ㅆ)으로 된것은 배격하고 글자에서 ㅎ의 받침을 부인한것이고 한음절문자에서 두개 받침(ㄶ, ㄺ, ㅀ, ㅄ 등)은 발음이 나타나지 않기때문에 안된다는것이다. 그 리유는 한글이 한음절문자가 아니라 1자 1음 문자라는것이다.

또한 용언의 어미활용만 시인하고 그것이 고정어미변화를 부인한것이다. 례를 들면 《온다》의 어미변화로 《오니, 오고, 온, 와서》 등이다. 이것은 학술활동을 등대고 벌린 조선어학회에 대한 도전이였다. 그러나 소리는 요란한데 내놓은 리론은 보잘것없고 학리에 맞지 않을뿐아니라 력사적제도에 의거하고 철자법의 간명을 위주로 한다고 지난날의 혼란된 철자법으로 되돌아갈것을 주장하는것에 불과했다.

조선어학회에서는 박승빈일파의 이 도전에 어떻게 대처할것인가, 가뜩이나 간고한 국문운동에서 이와 같은 분렬행위를 어떻게 막을것인가 하는것을 가지고 론의가 분분했다.

그러나 결국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말이 아니면 탓하지 말랬다고 아예 무시해버리는것이 상책이라는 의견이 모아졌고 그것을 한글반대파에 대한 행동방침으로 정했다.

그러나 국문운동의 통일을 위하여 한번 더 아량을 보여 박승빈에게 협동을 종용해볼 필요는 있다고 인정하여 이 일을 간사장인 리극로에게 위임하자는 의견이 제의되였다. 리극로는 1931년 11회 정기총회에서 간사장으로 선거되였던것이다. 그러자 리윤재는 이런 일에 기관을 대표하는 간사장이 나설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계명구락부 사전편찬소때부터 다소 면식이 있는 박승빈을 차라리 자신이 개인자격으로 만나보겠다고 맡아나섰다. 하긴 그도 박승빈을 만나봐야 무슨 보람이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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