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회)

 

제 7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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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1월 10일 제11회 정기총회에서 그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고치였다. 이름을 고치였을뿐아니라 새 현실에 맞게 사업전반을 새롭게 뜯어고치기 위하여 새 규칙을 제정했으니 이것은 조선어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조선어학회를 새로 창립했음을 의미하는것이였다.

새 규칙에 의하면 회의 목적부터가 달라졌다. 조선어연구회의 규칙에서는 《본회는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를 연구함을 목적함.》(2조)이라고 했다면 조선어학회의 규칙에서는 《본회는 조선어문의 연구와 통일을 목적으로 함.》(2조)이라고 하여 단지 조선어의 학술적연구에만 그치지 않고 어문의 일치성을 위한 실천활동을 특히 강조했다. 3조에서 지방에 지회를 둔다는것을 규정한것과 함께 이는 조선어학회의 사업대상과 범위가 이전보다 훨씬 넓어진것을 반영하고있다.

회원의 입회절차와 자격을 명확히 규정하고 회원, 별회원 그리고 찬성원을 설정한것은 이전에 없었던 일이다.

한해에 한번씩 정기총회에서 임기 1년의 간사 세명을 뽑고 그중에서 간사장을 호선하여 회를 대표케 한다는 규정(8조)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학술상토의와 사업운영에서 사제관계, 선후배관계에 의한 어느 한사람의 권위와 독단을 막기 위하여 간부 특히 간사장의 임기를 한해로 정하고 서로 돌려가며 맡기로 한것이다.

조선어학회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강연회, 강습회, 강의록 확보, 연구총서, 조사보고서, 관계고문헌 기타 서적출판을 규정하였다. (11조)

규칙에 미비한것은 간사회 또는 총회의 결의로 집행한다고 규정하며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사업을 전개해나갈수 있게 하였다.(13조) 그리하여 조선어학회 제15회 정기총회에서는 간사 세사람이 아니라 경리부, 서무부, 회계부, 출판부, 도서부 간사들을 두기로 한것이 그 실례이다.

조선어학회의 기본사업도 확정되였다. 그것은 사전편찬을 지속적으로 끌고나가며 그 기초작업으로서 맞춤법통일안의 완성과 표준말의 사정, 외래어표기법의 제정을 시급히 다그치는것이였다. 그중에서도 이미 검정한 맞춤법통일안의 완성에 모든 힘을 기울이기로 한것이다.

지난해 년말에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12명이 모여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작성원칙과 방향을 토의확정한 후 그 초안작성을 리윤재에게 위임했다.

리윤재는 지난해 4월 12일에 월례회에서 《문자 및 철자법에 대한 신연구》라는 론문을 발표하여 신철자법의 기초리론을 피력한바 있었다. 이 론문에서 그는 말의 줄기와 끝을 구별하여 적는 동시에 항상 동일한 표기형식으로 고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글자마다의 특색을 마련해야한다.》고 하면서 낫, 낮, 낟, 낯, 낱을 례로 들었다. 또한 《오늘의 글자의 맞춤법은 그 기초를 오늘의 실제의 말에도 두어야 할것》을 강조했다. 특히 ㅎ의 받침으로서의 가능성을 력사적으로 고증하고 그것을 반대하는 박승빈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ㅎ의 받침이 음성학적, 문법적으로 타당함을  력설했다. 철자법의 기초를 오늘의 실제의 말에다 두어야 한다는것은 철자법연구에서의 그의 기본립장을 밝힌것이고 철자법의 기초리론으로 되는것으로서 박승빈의 소위 《력사주의적원칙》에 의하여 오늘의 실제의 말을 외곡하며 쓰는 철자리론(례컨대 조선을 됴션으로 기사하는따위)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리윤재는 새해에 들어와서도 벌써 몇달째 그 초안작성에 신고를 거듭하고있었다. 하나의 원칙이나 정해놓은 법에 묶이지 않는것이 사람들이 자유롭게 쓰는 다양한 말이다. 문법이란 그 테두리를 대개 정해놓은것이고 실지 말에는 허다한 불규칙들이 존재하는것이다. 이 불규칙한 말을 무리하게 규칙에 얽어매놓으면 억지가 생기고 실지로 쓰는 말과는 거리가 먼 새로운 말이 생기게 될것이다. 이러한 무리와 억지가 없이 철자법을 작성하고 정리하는것은 실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철자법을 작성함에 있어서는 일반문법지식뿐아니라 우리말의 어원학적인 연구, 음성학상, 어법상특징에 대한 연구 등 다방면적인 지식과 연구가 요구되였다. 뿐아니라 철자법은 누구나 접수하고 쉽게 리해하고 쓸수 있어야 하며 허다한 불규칙언어들을 될수록 정리하고 줄이면서도 현재 쓰는 말과 리탈함이 없이 쓰도록 해야 한다는 어려운 조건이 첨부된다. 그러니 철자법원칙 한개 조항을 서술하는데도 수없이 고쳐쓰며 신고를 했고 낱말 하나 정리하는데도 끝없는 연구와 사색을 거듭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실로 맞춤법통일안초고 61항목을 작성하는 과정에 이미 반백이 되기 시작한 그의 머리가 완전히 셀 지경이였다.

이렇게 정신적부담이 센 나날에도 리윤재의 생활조건에서는 하나도 달라진게 없었다. 낮에는 학교에 강의하러 나가거나 조선어학회에 나가고 밤에는 아이들이 잠들고 식솔이 많은 살림살이의 온갖 소음이 잦아든 다음에 담요우에 책들과 원고지를 펴놓고 썼다지웠다 하며 밤잠을 잊고 일하는것이다. 이제는 맏딸이 벌써 열다섯살이라 배화녀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고 네살아래인 둘째딸과 그밑의 셋째딸도 다 소학교에 다니니 아래방을 그들에게 내주고 건너방에서는 김해댁이 얼마전에 다시 돌아온 누이동생 금옥과 함께 거처하고있으며 안방에서는 어린 아들들과 안해가 있게 되니 리윤재는 언제한번 조용한 자기 방을 가져볼수가 없었다. 이 비좁은 방에 늘어나는것은 책들과 원고뭉치뿐이였다.

초저녁잠이 많은 정씨가 한잠 자고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새벽 한시인데 남편은 여전히 요우에 웅크리고 앉아서 글을 쓰고있다.

《아니, 지금이 몇시라고 아직도 안 주무시오. 그러다가 또 토혈이나 하면 어쩔려고 그래요.》

정씨가 이렇게 푸념을 했지만 대답이 없다.

《이봐요. 아까 저녁녘에 김해의 동생이 인선이를 데리고 왔더군요.》

《…》

《제 말을 들어요?》 하고 정씨가 어성을 높였다.

《응, 뭐라고 그랬소?》 하고 리윤재가 생뚱같은 대답을 한다. 그는 자기 생각에 골똘할 때는 아무리 소란스러운데서도 전혀 소리를 듣지 못하는듯 했다.

정씨는 기가 막힌듯 방금 한 말을 되풀이했다.

《그런데 왔다는 사람이 어딜 갔소?》

《아무리 붙들어도 려관에서 묵고 래일 아침에 오겠다고 뿌득뿌득 나갔어요. 집이 이렇게 비좁으니까요.》

《원, 사람도.》하고 리윤재는 한마디 할뿐이였다. 그리고 다시 펜을 쥔다.

《아이참, 저이하곤 말할 재미가 있어야지. 이봐요, 동생이 인선이를 서울에서 고등보통학교에 넣어 공부시키려고 데리고 왔는데 고모라는게 서울에서 살고있으면서 조카를 어떻게 하숙에 보내겠어요. 아무래도 우리가 그 애를 맡아야 할것 같은데…》

《당신 좋도록 하구려.》 하고 리윤재가 한마디로 안해의 말을 중둥무이해버렸다. 그는 학문이외의 모든것에 거의 무관심했다.

《부자집에서 호의호식하던 외아들을 거두기가 수월치 않을것 같아서 그래요. 아이가 약질이던데.》

리윤재는 더는 대답하지 않고 원고에 달라붙었다. 안해는 낮에 다듬이질한 남편의 옷을 차곡차곡 개여서 보에 싸가지고 지근지근 밟기 시작했다.

리윤재는 원고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했지만 이 많은 식솔을 먹여살리기에 눈코뜰새 없는 안해가 또 하나의 까다로운 식구를 붙여놓으면 그 심신의 고달픔이 얼마나 더 클것인가 하는것을 속으로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정성택이 아들 인선을 데리고 찾아왔다. 정성택은 이제 마흔살에 들어선 한창나이의 장년이고 단단한 몸에서도, 목소리에서도 쇠소리가 날듯 한 점은 전과 다름이 없는데 전에 비하여 몸이 좀 난것이 알리였다. 이 야무진 아버지와 허우대 크고 성격이 드센 어머니와는 달리 인선은 목이 길고 여위고 키만 꺽두룩한 소년이였다. 하얀 얼굴이 균형있게 생겼는데 퍽 과묵하고 어딘지 내성적이였다. 그는 두벽을 꽉 채운 서가의 장서에서 눈을 뗄줄 몰랐다. 그속에는 소년들을 위한 책은 하나도 없었지만 조선의 력사, 문화, 언어 등에 관한 다양한 책들이 서가에 꽉 차있었고 서가가 모자라 《동광》, 《진생》 등 잡지들과 옛 신문들은 한쪽벽에 무둑히 쌓여있었다. 그 책들을 황홀하게 바라보는 인선의 눈은 류달리 반짝이였다.

《저애는 나가놀줄 아나 동무들 하고 섞일줄 아나. 그저 책밖에 모르지 않아요. 원, 가문에 없는 중놈이라더니.》하고 정성택이 자랑반, 꾸지람반으로 말하고 아들에게 아래방에 가서 누이들과 놀라고 일렀다. 인선은 순경이와 동갑이지만 생일이 몇달 아래였다. 인선이 방에서 나가자 정성택이 말을 이었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소는 시골로 보내랬다고 아무래도 인선이를 서울에서 공부시켜야 할것 같아 데리고왔어요.》

《그래, 어느 학교에 넣으려나?》

《제1고보나 제2고보 같은 공립학교에 어떨가 하는데 공부는 잘하니까.》

《왜 하필이면 왜놈의 공립학교야. 제1고보에서는 왜놈의 아이와 조선아이가 함께 공부한다는걸 모르나?》

《그러니까 교육시설이 좋고 상급학교입학률이 높지 않아요.》

《그런 학교에서 왜놈의 종자와 조선아이를 똑같이 대할것 같은가. 이 세상에서 사람을 차별하는것처럼 못된짓은 없는데 왜놈의 민족차별이란 이루 헤아릴수 없는거야. 광주학생사건이 그걸 얼마나 똑똑히 보여주었나. 인선이를 어릴적부터 얼간을 만들지 말고 제정신을 가진 인간으로 키우게. 그건 조선사람으로 키우는거야.》

정성택은 잠자코 듣고있었다. 오늘은 될수록 자형(손우 누이의 남편으로서 매부를 말함.)과 마찰을 피하려는 심산같았다.

리윤재가 말을 이었다.

《내가 보니 인선이가 좀 약질이지만 재주는 있어보이는군. 우리 집에 맡겨놓게.》

《그러지 않아도 내 생각이 많아요. 마음이 약한 저애를 여느 하숙집에 넣었다가 불량한 아이들의 꼬임에 넘어가도 야단이고, 자형댁에 맡기면 그럴 근심은 없는데 누님에게 너무 부담을 줄것 같고 해서 말이요. 아무리 구차하게 살아도 고모가 낫겠지. 저 애에게 드는 비용은 내가 당하리다.》

《뭐, 비용을 당하겠다고? 이 사람아, 동기간에 무슨 돈흥정이야. 순경 에미가 인선이의 근심을 하기에 내가 말했을뿐이야. 자네 이제는 부자소리를 듣게 됐는데 그 돈은 뒀다가 뭘하겠나. 우리 조선어학회에 기부나 좀 하게. 돈이 없어 사전편찬을 중단했어.》

정성택이 손을 홰홰 저었다.

《자형, 이런 말을 한다고 나를 욕하지는 마시오. 자형이 하는 조선어학회의 일이 왜놈의 비위에는 안 맞는 일이겠지요. 그놈들은 조선말을 깡그리 없애버리려고 하는데 자형과 같은이들은 그것을 지키겠다고 하니 그놈들이 바로 볼턱이 있어요. 세상에 왜놈처럼 악독한 식민지통치자가 어디 있어요. 그놈들이 언제까지나 조선어학회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거예요. 두고보시오, 내 말이 틀리나.》

《그러니 돈을 냈다가 련루자가 될가봐 겁이 난단 말이지.》

《까놓고 말해서 오늘과 같은 세상에서 조선어를 연구하고 지켜서 돈이 생기오, 명예가 얻어지오. 생길건 고생뿐이지요. 그런 점에서 자형은 세상 모르는 바보예요. 자형, 이 많은 가족들도 생각해야지요.》

끝내 정성택의 처세철학이 나오고말았다. 참고 듣고있던 리윤재도 불끈했다.

《그러니 나도 자네처럼 살라는건가. 자넨 자신뿐아니라 자식도 생각해야 하네. 자식이 커가면 부모에 대해 비평적으로 보게 되네. 부모가 자라나는 자식의 마음에 그늘을 던져줘서야 쓰나. 부모를 존경하지 못하는 자식, 자식을 믿지 않는 부모, 이 얼마나 큰 불행인가!》

이야기는 더이상 벌어지지 않았지만 매부처남간의 사이에는 그전보다 더 멀어졌다.

이 좁은 집에 고루고루한 아이들이 이제는 여섯이 살게 되였다.

리윤재는 바쁜 나머지 아이들의 교육과 교양에는 거의 등한했지만 그들의 각이한 개성이 눈에 띄지 않을수 없었다. 우의 딸 둘은 속을 태우며 손수 기른 일이 없고 오래 헤여져살아 그런지 아버지를 어려워하여 자연 거리 비슷한것이 생겼지만 막내딸과 두 아들은 강보때부터 정이 들어 그런지 그런 거리가 없었다. 성미가 순하여 두살아래인 동생한테도 늘 져서 잘 운다고 울보라는 별명까지 붙은 종갑보다 장난과 떼가 심하고 제가 하고싶은짓은 무엇이건 주저함이 없는게 종주였다. 외탁을 하여 남달리 곱게 생긴 종주를 늘 데리고가는 이웃집 과부가 하루는 아이의 뺨을 깨물어 이발자국을 내가지고 데려와서 할머니의 노여움을 샀지만 리윤재는 도리여 남의 사랑을 받을수 있는 성미와 생김새를 가졌다는것을 만족하게 생각했다.

어린 종갑, 종주와는 말할것도 없고 제 또래인 누이들과도 어울리지 않는것이 인선이였다. 음식에는 조금도 욕심이 없는 그가 독서에는 탐욕스러울 정도였다. 고모부의 책들과 오랜 잡지들을 제 방에 날라다놓고 두더지처럼 방안에 처박혀있는것이였다. 그는 새 학년도에 고모부의 권고로 전통이 가장 오랜 배재고보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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