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회)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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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윤재가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은것은 근 한해밖에 안되였다. 그러니 사람들과 사귈 겨를도 별로 없었지만 리승훈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그가 오산학교의 설립자로서 또 지난날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평북도 총감까지 한 독립운동자로서 지닌 사회적명망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소박하고 평민적인 됨됨이때문이였다. 그는 이미 환갑나이였으나 사업가다운 패기와 정열을 잃지 않고있었다. 오랜 교육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고리타분한데가 없었고 유생출신처럼 현학적인데도 없었다.

그는 원래 자수성가한 사람이였다. 가난한 집안에 태여난데다가 어려서 어머니까지 여의고 살길이 없어 일찍부터 남의 집 사환군노릇을 했었다. 젊어서 놋그릇장사를 하다가 종이장사를 크게 하여 엽전으로 5만원이라는 큰돈을 벌기도 했고 장사에서 큰 실패를 보기도 했다. 40살에 장사를 그만두고 2년동안 글공부를 했다. 그의 학력은 이것이 다였다. 그는 평양에서 안창호를 만나고 그의 영향을 받아서 상투를 깎고 고향인 정주에 돌아와서 학교를 설립했다. 이것이 오산학교의 창립이였다. 그는 민족후비인 청년의 교육이 나라를 구원하는 길이라는 일념으로 일생을 교육에 바쳐왔다. 1911년 12월에 왜놈들이 데라우찌총독암살음모사건이라는것을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들을 전국적으로 체포투옥할 때 그는 왜경에게 잡히여 근 5년동안 감옥살이를 했고 3.1인민봉기때에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33인중의 한사람으로 또 체포되여 3년간 징역을 살았다. 여러해에 걸치는 이런 수난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기는 꺾이지 않았고 왜적에 대한 증오심과 반항심은 그의 가슴속에 사무쳐있었다.

그는 리윤재와 초면인사를 나누자 대뜸 말했다.

《왜놈들이 조선어과목을 양념처럼 남겨두고는 있지만 저희들이 만든 조선어교과서를 지정해주니 그것을 뜻풀이나 해서 우리 학생들에게 무엇을 주겠소. 그따위 교과서에 구애되지 말고 우리 말에 담긴 민족의 얼을 젊은이들에게 심어줘야겠소.》

그것은 리윤재가 바라던바였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게 말했다.

《이 변변치 않은 사람을 불러주시고 격려까지 해주시니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강(리승훈의 호)선생의 뜻대로 국어강독을 교수하면서 시간이 있는대로 한글의 력사를 학생들에게 이야기해줄 생각입니다.》

《그런 강의라면 나도 청강하겠소. 사실 나야 어디 배운게 있소.》

《원, 별말씀을.》하고 리윤재가 얼굴을 붉혔다.

리승훈은 잠시 입을 다물고있다가 개탄하듯 말했다.

《우리가 처음 이 학교를 세울 때의 취지가 차차 허물어져가고있소. 왜놈들의 간섭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던. 왜놈을 학감자리에 들여앉히고 교육행정전반을 틀어쥐게 하고있소. 교직원, 학생들의 동향을 살피는건 두말할것도 없소. 그러니 그놈들에게 언질을 잡히지 않도록 주의는 해야겠소.》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나 한해가 지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도학무당국에서 리윤재의 교원임명을 취소하고 교단에 설 자격을 박탈해버렸다. 그 리유인즉 그가 당국에서 지정해준 과정안에도 없는 수업을 진행하여 학생들에게 불온한 사상을 고취했다는것이다. 그것은 그가 고등과 학생들에게 해준 《한글의 력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글의 력사》의 한 대목은 이렇다.

세종의 고심어린 노력과 집현전학자들인 정린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 등의 집체적지혜에 의하여 훈민정음은 1444년 1월(양력)에 완성되였고 세종 28년 9월(음력) 즉 1446년 10월에 드디여 반포되였습니다.

훈민정음은 음성리론에서나 철자원리에서 체계가 과학적이고 정연하며 평이한것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훈민정음은 1자 1어의 한자나 1자 1음절의 일본글자와는 달리 1자 1음의 자모식문자로서 28자의 자모로써 어떤 음이나 표기할수 있으니 이는 훈민정음의 큰 우월성의 하나입니다.

우리 민족의 빛나는 문화전통과 슬기의 정화라고 할수 있는 이 훈민정음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사대주의에 중독된 봉건사대부들속에서는 그것을 거부하려는 시도로서 세종 26년 2월 20일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의 6개 조의 장문상소가 제출되였습니다.

이 상소문은 사대주의사상이 인간을 어느 정도까지 고루하고 부패한 정신불구자로 만드는가 하는것을 보여주는것입니다.

훈민정음반대상소는 훈민정음의 연구보급에 한때나마 부정적영향을 주었고 특히 세종의 마음을 몹시 괴롭혔습니다.

다른데도 아닌 집현전에서 중요한 직책에 있는 7명의 관리들이 무리를 지어 왕자신을 반대하여 들고일어났기때문입니다.

당대뿐아니라 력사상 영구히 씻어버릴수 없는 수치의 한페지를 남긴 이 상소사건을 세종은 어떻게 처리했는가?

임금에게 상소를 한 후 광화문밖에서 처분을 기다리다가 의금부에 잡혀가있던 최만리 등 7명을 이튿날 궁중에 불러들여 세종이 친히 국문하게 되였습니다.

궁중이 숨을 죽였고 잡혀온자들도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세종이 얼마나 진노했는가 하는것을 알기때문입니다. 최만리일파의 상소는 단순한 실정에 대한 간언이 아니라 세종의 필생의 활동에 대한 훼방이였고 절대군주의 권위에 대한 모독적인 훼손이였던것입니다. 더우기 이것이 한 개인의 상소가 아니라 무리를 지어 일으킨 저항이니 벌써 역모에 가까운 성격을 띠여 더욱 엄중시하지 않을수 없는것입니다. 이제 세종의 입에서 어떤 무서운 말이 떨어질지, 임금에게 항거한자들에게 어떤 가혹한 징벌이 가해질지 누구도 짐작하기 어려웠습니다.

세종의 얼굴에는 노여운 기색이 어리였습니다.

《한개 글자로 한개의 음만 나타내는 한자나 한자로 우리 말을 쓰는 리두는 글자이고 합자해서 여러 음을 나타내는 언문은 글자가 아니란 말이냐?》

세종은 몹시 진노했습니다.

《너희들은 임금의 하는 일에 일일이 훼방을 하고 방자한 비방도 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게 어찌 신자의 도리이며 유자의 식리의 말이라 하겠느냐. 심히 무용의 속유(지식과 견문이 변변하지 못한 속된 유학자)들이다!》

그리고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다시 담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맺었습니다.

《과인이 너희를 부른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것이 아니고 다만 소중의 한두가지의 말을 물어보려 할뿐이였다. 그러나 너희는 사리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말을 변하여 대답하는구나. 너희의 죄는 면하기 어렵겠다.》

물론 세종은 무제한한 임금의 권한으로 이 가증스러운 무리들을 가혹하게 징벌할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량이 넓은 세종은 고쳐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행위가 국가변혁을 위한 역모가 아니라 임금을 비난한데 불과하다, 비난에 대하여 일일이 벌을 주는것으로 응수한다면 그들의 우에 선 군주답지 못하다. 그리하여 세종은 의금부에 갇혀있던 그들을 이튿날 고스란히 놓아주게 했습니다. 다만 그중에서 정창손은 면직되고 김문은 전후에 말을 바꾼 사유를 해명하게 했을뿐입니다. 보잘것 없는 인간들에 의하여 력사에 큰 오점을 남긴 최만리일파의 상소사건은 이렇게 조용히 막을 내렸습니다.

봉건사대부들의 소동으로 우여곡절은 겪으면서도 국력으로 시행장려되여오던 훈민정음이 창제된지 61년만에 연산군(1495-1506)조에 이르러 된서리를 맞고 무서운 시련을 겪게 되였습니다.

연산군은 네로와 견줄만 한 폭군으로 알려져있는 인물입니다. 우리나라 력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장의 하나인 사화(이것이 나중에 당쟁으로 번집니다.)도 바로 이 연산군시기에 시작되였습니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의하여 조신들의 무리죽음이 거듭되였습니다. 연산군의 극도에 이른 향락과 사치로 인한 재정의 파국을 내수사를 통한 수탈, 백성들의 공납의 증가로 메꾸려 했습니다. 잔인하고 무도한 이 폭군에 대한 원성이 백성들속에서 물끓듯 했습니다. 1504년에 연산군의 부화방탕한 행위를 비방하는 내용의 벽서를 훈민정음으로 적어 거리에 내붙였는데 이 벽서는 사람의 이름외에는 모든 내용을 국문으로 씀으로써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도 다 알아볼수있었습니다. 이에 당황한 연산군은 주모자를 잡으라고 하면서 이러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금후로는 언문을 가르치지도 말고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운 사람이라도 쓰지 말며 언문을 알던자는 한성부 5부로 하여금 고발하게 하라. 만일 알면서도 고하지 아니한자는 이웃사람과 함께 벌하라.》

훈민정음은 이렇게 지독한 탄압을 받아 연구는 고사하고 내놓고 읽고 쓸수도 없게 되였고 이미 간행된 훈민정음관계의 책들이 불속에 들어가거나 흔적을 감추게 되였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 훈민정음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지켜왔습니다.

그후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고 그의 《언문금란》도 해제되기는 했지만 훈민정음의 보급과 발전 등에 심중한 후과를 남기였습니다. 허나 봉건사대량반들속에서는 우리 글이 천시되여왔어도 여전히 민간서사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길동무로 널리 씌여왔는바 특히 17세기에 와서 우리 인민들속에서 널리 읽히우고있는 중세소설국문가 김만중(1637-1692)의 국문소설들인 《사씨남정기《구운몽》과 박경수에 의해 구전전설로 되여있는 《장화홍련전》 등을 보고도 잘 알수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서사생활에서 한자를 사용하고 우리 말과 글의 쓰임에서 규범화가 잘되지 못한데다가 이러저러한 열사람이 쓰면 열가지 철자법이 생기는 기현상이 벌어지고있어 우리의 문자생활에서 페단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세상에 자랑할만 한 민족글자 훈민정음을 가지고있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남의 글자에 중독되여 제것을 업수이 여기고 돌아보지 않아 훈민정음이 이러한 상태로 되였으니 이보다 더한 민족의 수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훈민정음을 규범화하여 철자법을 바로잡아 우리의 서사생활을 갱신하는것은 우리 민족과 더불어 력사의 간고한 길을 헤쳐온 민족의 말과 글을 지키는 길이며 민족갱생의 길입니다.

 

《한글의 력사》강의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정병순이라는 학생은 학교안에 국문연구모임이라는 소조를 꾸리고 조선어연구의 한계를 넘어서 활발한 활동을 벌리였다.

몸이 체소하고 얼굴이 새하얗고 말도 달변이 아니지만 학생들속에서 강력한 통솔력을 지닌 이 20대의 청년을 리윤재는 유심히 주시했다. 그러나 그와 더 접촉할 겨를이 없었다.

리윤재가 철직된지 며칠후에 리승훈이 격분하여 리윤재에게 말했다.

《왜놈종자와 절충하느니 차라리 개하고 말하는게 낫지.》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제가 학교를 그만두면 되지 않습니까.》하고 리윤재가 도리여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럼 리선생은 앞으로 뭘하시려오.》

《저는 우리 말과 글자의 연구를 필생의 사명으로 삼겠습니다. 이것만이 조선말을 없애려는 왜적에게 저로서 할수 있는 유일한 저항입니다. 이 길에서 필요하다면 목숨도 바칠 각오입니다.》

《나는 리선생의 그 곧은 의기에 감복했소.》

《사실 저는 남강선생같은분을 모시고 오래 일하고싶었습니다. 허나 모든게 뜻대로 되지 않는게 우리의 일이 아닙니까. 저는 래일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말고 이번에 나와 함께 서울로 갑시다. 동아일보사에서 언제부터 사장으로 오라는걸 사양하고있었는데 이젠 가는수밖에 없어요. 리선생도 신문사에 자리를 잡거나 교원자리를 더듬어보기로 합시다. 서울은 대처이니 이런 시골보다야 좀 낫겠지.》

《고맙습니다.》하고 리윤재가 흔연히 동의했다. 그는 이 기회에 서울에 가서 조선어연구회와 관계를 가지고 국문운동에 참가하리라 결심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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