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 회)

 

제 1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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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휘몰아치고있었다. 모든것을 들부실듯 우엉우엉 통곡소리같은것을 내며 휘뿌려지는 바람에 거리의 가로수들이 엇비스듬히 나가눕고있었다. 습기 한점 없는 메마른 바람, 온몸을 싸늘하게 식히는 차거운 가을바람이였다. 몸에 걸친 회색두루마기가 나래처럼 퍼덕인다. 산도 바위도 날려보낼듯 한 격렬한 공기의 소용돌이였다. 그래도 성시백은 가고있다. 꿋꿋이 허리를 펴고 앞을 향해 주저없이 걷고있다.

그는 지금 수색에 주둔한 괴뢰1사단의 사단장 김석원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였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괴뢰군부에서도 반공정신이 가장 투철하기로 소문난 김석원을 만날 결심을 내리게 된것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성시백은 다르게는 행동할수가 없었다. 때로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참기 어려운 슬픔이 가장 위력한 힘과 정열을 폭발시켜주기도 하는것이다.

김정숙동지의 서거소식이 전해지자 온 남조선땅이 슬픔에 휩싸이는 가운데 안해인 민순임은 며칠동안 자리에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했었다. 그이의 다심한 사랑을 그 누구보다 많이 받아안은 안해는 물론이거니와 성시백자신도 한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었다.

그이께서 생의 마지막순간에 바라신것은 무엇이였을가? 그이께서 남기신 유지는 무엇이였을가?

성시백은 그것을 생각하며 자신을 가다듬었다. 그는 김정숙동지께서 한생을 초불처럼 깡그리 불태우시며 바라신 미래의 통일조국을 앞당겨오기 위하여 자기 한몸을 그이처럼 깡그리 바칠 결심을 다지고 또 다지였다.

그는 눈물을 씻고 분연히 일어섰다. 슬픔의 눈물로 얼룩졌던 그의 눈가에 새로운 불꽃이 일었다. 그 불꽃은 비단 성시백개인에게서만이 아니라 남조선전역에서 타오르는것이였다.

이미 조국전선의 평화통일선언서가 남조선각지로 파급되여 선언서를 지지하는 반미구국투쟁이 전국적규모에서 힘차게 벌어지고있었다.

7월 20일에는 서울시안의 여러곳에서 조국전선의 평화통일방책을 지지하는 로동자들의 대중적시위가 벌어지고 수십만매의 삐라가 뿌려졌으며 경상북도 달성에서도 로동자들의 시위운동이 벌어졌다.

이날의 투쟁을 계기로 단 20일사이에 파업투쟁에 참가한 로동자들의 수는 수만여명에 달하였고 조국전선 선언서를 지지하여 뿌려진 삐라는 수백만매에 이르렀다. 이 투쟁의 격류를 타고 통일촉진협의회 성원들과 조소앙의 사회당이 기본주력을 이루고있던 남북협상파에는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의 저자인 신진당 부장 최일천과 괴뢰정부의 초대농림부 《장관》이며 《국회의원》인 조봉암, 전《림정》요인이며 근로인민당 부위원장인 장건상과 전 《민정장관》 안재홍, 3. 1인민봉기때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였던 감리교 목사 오하영이 새로운 지도급인사로 더 망라되였다.

김구의 장례식이 있은 뒤 경교장에서 남북협상파의 앞으로의 정치활동문제를 놓고 김규식, 조완구, 엄항섭, 최동오와 함께 모여앉은 조소앙은 국민들속에 명망이 있는 조봉암, 최일천을 비롯한 그 5명의 정치활동가들까지 합쳐 남북협상파의 계승세력인 새로운 평화통일세력을 형성할것을 제의하여 일치한 찬동을 받았었다. 조소앙은 그 회의에서 리승만이 쳐놓은 정치적올가미인 《국가보안법》에 걸려들지 않으면서도 남북협상파를 확대발전시키기 위하여 평양에서 결성된 조국전선결성과 그 선언서에 대하여 대외적으로는 《불참가, 불반대》한다는 립장을 주장하면서 새로 망라된 5명의 민주인사들까지 합쳐 형성된 평화통일세력의 10인지도급인사들이 앞으로 조국전선의 선언서에 제시된대로 미군의 완전철거와 남북총선거를 통한 통일국가창설을 위해 보다 주동적이고 공격적인 정치투쟁을 벌릴것을 제의하였다.

성시백은 바로 이 평화통일세력의 단합과 투쟁을 배후에서 적극 방조하여 남조선전역을 조국전선 선언서관철투쟁에로 불러일으키는 정치활동을 멈추지 않고 계속 벌려나가리라 결심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 김정숙동지께서 서거하시였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그이의 서거소식은 마치 불무지우를 휩쓰는 가을바람과도 같이 사람들의 심장을 격렬하게 불태웠다. 남조선전역에서 조국전선의 선언서를 관철하기 위한 투쟁은 더더욱 고조되여 이번에는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의 농민들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구호를 들고 대중적봉기에 떨쳐일어났다.

11월에 이르면서 투쟁에 나선 농민들의 수는 수만명에 달하였고 그 투쟁회수는 50여회에 이르렀다.

날에 날마다 받아안는 정치적타격으로 하여 남조선괴뢰정부와 괴뢰군내부는 자체모순이 격화되여 와해약화되여갔고 괴뢰군의 수많은 병사와 하층장교들이 련이어 의거입북하여 인민군대에 편입하였다.

바로 이러한 환경속에서 성시백은 송악산을 비롯한 38연선 북측지대들에 대한 끊임없는 무장침공행위에서 주력을 이루고있는 괴뢰 1보사의 사단장 김석원을 만나기로 결심하였던것이다.

김정숙동지께서 서거하시기 하루전에도 김일성동지께서 중환에 계시는 녀사의 곁을 떠나 38도선주변의 농촌마을들과 경비대초소들을 돌아보시였다는 소식이 성시백으로 하여금 이런 단호한 결단을 내리게 한것이였다.

그날 김석원은 담배연기가 꽉 들어찬 식당의 구석진 좌석에서 독한 소주병을 앞에 놓고 앉아있었다.

성시백이 그의 앞에 다가가 가볍게 목례를 해보이자 김석원은 눈을 한번 힐끗 치떠보고나서 손을 내저었다.

《난 지금 손님을 만날만 한 계제가 아니니 후에 찾아오시오.》

그러거나말거나 성시백은 반죽좋은 술군처럼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들었다.

《그렇습니까? 심정이 리해됩니다. 하긴 어느 나라에서든지 국토를 지키라고 쥐여주는것이 총인데 그것으로 동족사냥을 하는 사람의 심리야 언제이든지 불안하기마련이지요.》

소주잔을 입에 가져가던 김석원은 성시백의 차겁고도 랭랭한 대답에 흠칠했다. 그의 치째진 눈확속에서 회백빛으로 변하는 싸늘한 눈이 성시백을 이윽토록 올려다보았다. 그러거나말거나 성시백은 걸상을 끄당겨놓고 김석원과 마주앉아 자기 말을 엿들을수 있는 사람이 없는가 하여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김석원은 그때까지도 그냥 성시백을 지켜보다가 입가에 가져가던 술잔을 마저 기울여 한모금 마시고나서 묵묵히 안주를 집었다. 정예를 자랑하는 괴뢰1사단의 사단장다운 침착성을 되찾으려 애쓰고있다는것이 알렸다. 그러나 성시백은 그가 침착해지도록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내가 누구인가 묻고싶지 않은 모양이지요? 당신이 소문난 반공산주의자라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내가 바로 당신이 일생을 두고 증오하는 공산주의신봉자요.》

김석원의 얼굴빛이 해쓱하게 질렸다. 성시백은 그가 고개를 숙이고 상우의 음식그릇을 살피는듯 하고있지만 손은 어느새 허리춤에 가있는것을 보았다. 어느사이 김석원의 손에는 살기를 풍기는 권총이 쥐여졌고 그것이 곧바로 성시백의 가슴언저리로 향했다.

《손들엇! 반항하면 당장 쏴죽이고말겠다. 일어서라, 일어서!》

마침내 김석원이 사단관하 수많은 장병들앞에 나서서 호령하던 그 기세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성시백은 눈섭 한오리 까딱하지 않고 맞받아 소리쳤다.

《총을 걷어넣소! 정말 동족사냥에 환장이 되였는가!》

성시백의 눈에서 불이 펄펄 일었다. 그 시각 성시백의 넋을 지배하고있는것은 김석원이 추켜든 총구가 아니라 김정숙동지를 잃고 아픔에 잠겨계실 장군님에 대한 근심과 걱정뿐이였다. 성시백을 애국적인 통일혁명가라고 불러주시며 겨레의 해방과 자유에 대하여, 인민이 주인된 새세상에 대하여 열정에 넘쳐 말씀하시던 장군님과 서울에서의 생활에서 불편한 점이 있을세라 마음쓰시며 살림살이에 필요한 옷가지들과 필수품들까지 장만하여 안해의 손에 들려 보내주신 김정숙동지. 그런데 그처럼 통일된 조선을 념원하시던 김정숙동지께서는 통일의 날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시였다. 이 땅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민중이 주인이 된 통일된 조국을 일떠세워야 할 우리 장군님의 가슴에 옹이같이 박혀든 그 아픔이 어떻게 가셔질수 있으랴.

성시백은 그처럼 커다란 상실의 고통을 안으신 장군님을 위해서 벼랑끝에라도 서슴없이 나서고싶은 심정이였다. 그러지 않아도 뼈를 깎는 아픔에 잠겨계실 장군님께 무엄하게 도전해나서는자들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 하늘끝에까지 따라가서라도 결산할 각오가 불타올랐다. 그것은 곧 원쑤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이였고 그것이 김석원과 마주선 성시백의 온몸에서 무서운 기운을 한껏 내풍기게 하였다. 김석원도 그것을 느꼈는지 성시백에게 총을 내들기만 했을뿐 함부로 접어들지는 못했다.

당신은 언제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비렬한 추태를 계속 부릴셈인가, 도대체 언제까지 나라와 겨레를 배반한 민족반역자로 남아있겠는가, 력사와 민족의 준엄한 심판이 과연 당신에게는 두렵지 않단 말인가. …

김석원은 너무도 태연자약하게 나서서 자기를 준렬하게 단죄하는 성시백의 도도한 기상앞에서 차츰 주눅이 들고 위압되여갔다. 담배연기가 뽀얗게 들어찬 식당의 구석진 좌석에서 김석원은 점점 자기 인생의 구석으로 몰려들었다.

사실 성시백은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김석원을 찾아왔던것이다. 이런 사람앞에서 제아무리 반공정신이 꽉 들어찬 《용장》이라 해도 추켜든 총구가 떨리지 않을수가 없는것이였다. 성시백의 도도한 기상과 인품은 마침내 김석원으로 하여금 꺼내들었던 총을 제자리에 꽂아넣게 하였다.

《당신은… 당신은 도대체 어쩌자고 나를 찾아왔소? 대체 요구하는것이 무엇이요?》

성시백은 그에게 자기 운명을 진정으로 걱정한다면 이제라도 동족상쟁을 몰아올수 있는 도발행위를 그만두라고 권고했다.

《37년도에 간삼봉에서 왜놈의 련대를 이끌다 봉변을 당한 당신이 어떻게 아직까지도 그때의 교훈이 어떤것인지 알지 못하고있는가말이요. 당신은 그래 정말 북조선과 전쟁을 하면 이길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북조선을 이끄는 령수가 어느분인지 그래 당신은 생각해보았소? 그이는 전체 조선민족만이 아니라 세계가 공인하고 우러르는 김일성장군님이시오.》

김석원의 얼굴은 험상하게 이그러지고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렇다, 김일성장군님이시다. 김석원은 자기가 도전해온 북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떤 위대한 인간, 탁월한 령수의 이끄심을 받고있는가를 다시금 돌이켜보지 않을수 없었다. 송악산에서, 은파산에서, 황해도와 강원도에서 38연선 전지역에서 끊임없이 치렬하게 벌어진 무장충돌과정이 번마다 실패로 끝난 원인이 무엇인가를 비로소 깨닫게 된것이였다. 아니, 이미전부터 그것을 알고있으면서도 그것이 곧 자신의 파멸을 의미하는것이기에 애써 회피하여왔다. 허나 성시백의 이야기처럼 김일성장군님이시야말로 전체 조선민족은 물론 온 세계가 공인하는 탁월한 정치가이고 천재적인 전략가이시며 가장 위대한 인간이시라는것을 부인할수는 없는것이다. 그이의 비범한 예지와 지략에 맞설수 있는 능력이 이 남한땅은 물론 100여년간의 전승사를 자랑하는 미국에도 존재할수 없는것이다. 바로 이것이 김석원이 이미전부터 알고있으면서도 의식적으로 회피하여온 패배의 진원인인것이다. 김석원은 자기가 더 이상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북조선과 리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대항할수 없으며 대항해서도 안된다는 진리를 페부로 절감하였다. 김석원의 앞에 서슴없이 나타나 자기를 드러내놓은 이 성시백의 존재가 그것을 실증해주고있는것이였다.

김석원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가쁜숨과 함께 토막토막 끊어지는 말마디들을 겨우 짜냈다.

《당신은…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나는 김일성장군님의 조국통일사상을 받들고 싸우는 사람이요.》

김석원은 마치 사형판결을 받은 죄수처럼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 어떤 리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 하나의 향락과 명예욕, 더 나아가서는 로년기의 안온한 생활을 위해 친일도 하고 반공도 해온 김석원은 10여년전에 있은 간삼봉전투때 벌써 이 땅, 이 민족을 비치는 태양에 대하여 깨달았어야 하였음을 통한속에 느꼈다. 자기는 물론 패망한 일본도 그렇고 맥아더요, 로버트요 하는 미국의 책략가들, 리승만과 같은 늙은 미치광이들도 자신들이 결코 김일성장군님과 어깨를 견줄만한 위인이 되지 못한다는것을 깨달았어야 하였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상 그들은 언제 가도 조선에 대하여 알지 못할것이며 조선의 힘에 대하여 알지 못할것이며 세상을 움직이는 정치의 진수에 대하여서도 알지 못할것이다.

민족이 낳은 이런 걸출한 위인의 뜻을 받드는 성시백을 김석원은 공경과 공포의 전률을 안고 바라보았다.

성시백은 그에게 평양에서 결성된 조국전선의 평화통일선언서를 내놓으며 이것을 읽어보고 차후결심은 자신이 선택하라고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후 성시백은 김석원의 집으로 찾아가 그와 다시 만났다. 선언서를 다 보았는가고 묻는 성시백에게 김석원은 무겁게 고개를 끄떡이였다.

성시백은 그에게 선언서의 내용은 그대로 김일성장군님의 뜻이라고, 그이께서는 나라의 통일과 조선의 장래를 위해 민족의 대단합을 이룩하려 하신다고, 그래서 극단한 반공분자였던 김구, 김규식도 용서해주시고 포옹해주신것이며 이제 김석원이도 용서해주실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에 김석원은 오히려 입술을 푸들푸들 떨었다.

《나는… 나는… 김구 같은 사람과는 또 다른 사람이요. 나는 말이 아니라 총으로… 만행으로 김일성장군님께 도전해나선 사람이요. 더우기 간삼봉에서 김일성장군님부대를 〈토벌〉하겠다고 왜놈련대를 이끌고…》

《난 실없는 소리를 하려고 찾아온게 아니요. 당신보다 우리의 김일성장군님에 대하여 더 잘 알고있는 사람이요. 그이께서 진정으로 나라와 겨레의 리익을 위하려는 사람이라면 과거를 따지지 않겠다고 하신것은 그 과거의 죄악이 어떤것인가 경중을 따져 골라가며 손을 잡으시겠다는 뜻이 아니요. 김일성장군님은 말그대로 장군이시오. 당신도 평화통일선언서를 다 보았으니 하는 말이지만 그래 이런 정의로운 웅지를 지니신 위인이 일구이언하리라고 생각하오?》

성시백이 며칠간에 걸쳐 계속 찾아와 들려주는 김일성동지의 넓은 도량과 포옹력, 뜨거운 민족애에 대한 이야기는 극악한 반동이고 친일친미분자이며 남조선군부의 중진인물인 김석원의 마음을 점점 더 세차게 흔들어놓았다.

나중에 김석원은 머리를 싸쥐였고 성시백의 앞에서 자기 역시 동족상쟁의 비극은 원하지 않는다고 고백하였다. 앞으로 더는 미국과 리승만의 장단에 춤을 추어 동족을 반대하는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노라 맹약도 했다. 그는 리승만이 도발하려고 하는 북침전쟁이 현실로 된다면 자기의 운명이 어떤 비참한 종말에 이르게 되겠는지 너무나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김석원을 만난 뒤 성시백은 남조선에서의 반미투쟁을 더욱더 고조시키면서 특히는 래년도에 있게 될 괴뢰 2대국회선거를 준비있게 맞이하여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히며 지금 그 조직사업을 하려고 필운동에 있는 림시거처지로 가고있었다. 지금쯤 그곳에서 리병우형제가 그를 기다리고있을것이였다.

바람은 여전히 기승스럽게 불어치고있었다. 가을맛을 보고 주접이 들었던 가로수의 잎사귀들을 사정없이 아지에서 떼여내여 길바닥에 너저분히 던져버리고있었다. 성시백은 가랑잎들이 발치에서 떠도는 모양을 내려다보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이때였다.

그 가랑잎들을 가벼운 회오리속에 몰아넣으며 달리던 승용차 한대가 성시백의 곁에서 급기야 멈춰섰다. 차문이 열리고 거기서 빠져나온 두명의 사나이들이 다짜고짜 성시백을 량팔에 끼고 승용차안으로 끌어들였다.

눈깜짝할사이에 벌어진 일이여서 주변을 지나가던 다른 많은 사람들도 미처 눈여겨볼 사이없이 승용차는 다시금 너저분한 가랑잎들을 휘몰며 전속으로 달려갔다.

달리는 차안에서 성시백은 집게처럼 자기의 량옆을 조이며 틀고앉은 리병우와 리창우의 비장한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요?》

리병우가 운전사에게 속도를 높이라고 지시하고는 창우에게 사연을 설명해주라는 뜻의 눈짓을 했다.

《필운동에 있는 숙소가 로출되였습니다. 반시간전에 경찰들이 그 집을 습격했습니다. 거기 있던 등사기랑 타자기랑 모두 몰수해갔습니다. 합동수사본부가 무슨 낌새를 챈것 같습니다.》

《뭐요?》

《필운동에 오기 전에 거주하고있던 삼척동도 놈들의 기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앞집에 거처하고있던 녀자가 경찰의 밀정이였던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합동수사본부의 본격적인 추격이 시작되겠는데 선생님은 속히 북으로 들어가셔야 하겠습니다. 오제도는 선생님의 행처를 꼭 밝혀낼겁니다.》

성시백은 자신의 신변보다도 함께 투쟁해오던 동지들에 대한 위구심이 부쩍 갈마들었다.

《사람들은?… 그래 사람들은 체포되지 않았소?》

《보다싶이 우린 무사합니다. 그리고 사모님도 엊그제 창신동으로 자리를 옮기고 거기 있던 문서원도 타곳에 나가있었기때문에 인원손실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됐소.》

성시백은 차가 시교외로 빠지려 한다는것을 눈치채고 운전사에게 자기를 여기서 내려놔달라고 부탁했다.

《아니, 어쩌자는겁니까?》

리창우가 성시백을 따라 날렵하게 내리며 앞을 막아섰다. 뒤따라 리병우도 다가들며 한마디 했다.

《제 생각에도 성선생은 빨리 입북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조금이라도 형세가 위험할것 같으면 즉시에 북으로 들어오라고 당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다. 성시백이 지난해와 그 전해에 여러차례에 걸쳐 평양으로 찾아가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을 때 그이께서는 무엇보다 귀중한것이 성시백선생과 같은 애국자들의 생명이라고 하시며 아무리 중대한 일이 앞에 있어도 절대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고, 아무때건 북에 들어와 자신과 함께 손잡고 일을 하자고 절절하게 당부하시였었다.

성시백은 자기가 이제 북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곳에서 영웅으로 떠받들리우고 김일성장군님의 온갖 혜택과 은총이 차례지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고향 평산에도 들려 년로한 아버지를 모셔다 지금껏 하지 못했던 자식의 효도를 마음껏 바칠수 있었고 안해와 자식들을 거느리고 제 사람들속에서 마음편히 일하고 웃으며 살아갈수 있었다. 허나 성시백의 눈앞에 떠오른것은 자기앞에 차례질 그러한 미래보다도 김정숙동지의 령구앞에 눈물짓고 서계시였을 장군님의 비통한 모습이시였다. 그것은 성시백에게 있어서 일생을 두고 잊혀지지 않는 쓰라린 회한으로 남을것이다.

성시백은 리병우형제의 앞을 천천히 거닐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창우, 최일천선생이 괴뢰군장성들을 통하여 알아냈다는 미군철퇴의 내막에 대해서 다시한번 이야기해보게.》

《네?!》

창우는 성시백의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기억력이 비상한 성시백이 엊그제 이야기해준 그 정보를 잊어서 다시 물어볼리는 없었던것이다. 어떻든 대답을 요구했으니 당장은 대답을 해주는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우선 첫째로, 만약 미군이 남조선에서 물러난다고 하면 불피코 북에서 〈남정〉하려 할것이므로 이에 대하여 리승만으로 하여금 〈북진통일〉을 고창케 하자는것이였으며 둘째로는 그렇게 되여 남하하는 인민군과 북진하는 괴뢰군사이에 전쟁이 붙으면 유엔에서 북의 〈남침〉을 규탄하고 형식상 철퇴하는척 한 미군 2개 사단 4만명보다 몇배 더 되는 미군을 비행기와 함선으로 긴급투하하여 전쟁에 참가시키려는것입니다. 〈미군철퇴〉라는 외피를 쓰지 않고서는 〈미군철거〉, 〈전쟁반대〉의 기운이 고조되고있는 남조선땅에서 미군을 도저히 더 증강하기 곤난하였으므로 일단 〈미군철퇴〉흉내를 낸것이니 〈미군철거〉에 락심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국군〉이 더욱 〈북진통일〉을 고창케 하라는 지령이 군부의 고위장성들에게 비밀리에 하달되였습니다. 리승만이 언젠가 공개석상에서 〈남북의 분렬은 전쟁에 의하여서만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 하면서 〈나는 우리들이 3일이내에 평양을 점령할수 있다고 확신하고있다. 〉라고 말한것도 바로 이런 미국의 고무추동이 있었기때문이였습니다.》

성시백은 눈을 감고 리창우의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채로 중얼거리다싶이 말했다.

《보라구, 미군이 철퇴했다고 하지만 미제에 의한 전쟁위험은 오히려 더 가증되고있소. 이런 때 내가 사업을 피해 어디로 가야 한다는거요? 평양으로? 이 성시백이 지금 어디에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오?》

《성선생, 그러나…》

리병우가 성시백에게 바투 다가섰다. 그 역시 자기의 주장을 쉽게 철회하려 하지 않았다.

《욕망이나 의욕만 가지고 모든 일이 되는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적들의 마수에서 벗어날 어떤 묘책이라도 있습니까? 지금 선생은 평소의 선생답지 않습니다. 모든것을 객관적으로, 리성적으로 따져보고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리군 하던 선생이 오늘은 왜 이렇게 감성에 휩싸여있는겁니까?》

성시백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의 얼굴에는 최후를 각오한 사람에게서 찾아볼수 있는 비장함이 어려있었다. 그의 눈빛에서 타오르는 섬광이 리병우의 속을 짓태워 한줌의 재로 만들어버릴것만 같았다.

《오해하지 말아주시오. 난 지금도 모든것을 리성적으로 보고있고 객관적으로 분석하고있소. 난 석가모니처럼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소리치며 남들을 과소평가하는 사람이 아니요. 사실 우리가 맞서고있는 원쑤들은 모든 측면에서 우리보다 더 로회하고 교활하며 더 머리를 쓰고 더 품을 들이고있소. 그래서 우리의 싸움이 어려운것이고 그래서 이 성시백이도 언제인가는 적들의 마수에 걸려들어 죽을수도 있는거요. 나는 이것을 부인하지 않소.》

성시백은 별안간 헉! 하는 느낌소리와 함께 쌀쌀하게 불어치는 바람을 페부에 한껏 들이켰다.

그는 눈을 똑바로 뜨고 리병우를 쳐다보았다.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했소. 그러나 떳떳이 죽을거요. 지금 당장 죽지도 않을것이요. 옛말에 까마귀도 반포의 효도가 있다고 했는데 나는 아직도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녀사앞에 다진 맹세를 실천하지 못했소.》

성시백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 열기를 세차게 내뿜었다.

《그분들이 그토록 념원하던 통일성업을 위한 디딤돌을 마련하는데서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사람이요. 내 설사 고향땅을 다시 밟아보지 못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위해 김일성장군님께 다진 맹세는 끝까지 지키겠소.》

리병우는 성시백의 드팀없는 목소리에서 더는 그를 돌려세울수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의 뜨거운 열기를 고스란히 받아들인 페부에서 솟구치는 불뭉치같은것을 삼키느라 고개를 틀었다.

젊음이 끓고있는 리창우는 거의 울상이 되여 고개를 마구 흔들다가 성시백에게 와락 달라붙었다.

《안됩니다. 안됩니다, 선생님! 잡힐줄 알면서… 죽을줄 알면서 여기 남아있겠단 말입니까? 김일성장군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가슴아파하시겠는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선생님은 지금…》

《창우야!》

별안간 성시백은 허물없이 부르며 리창우의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는 물기가 어른거리는 리창우의 눈가에 손수건을 가져다댔다.

성시백은 침착하면서도 격정이 흐르는 조용한 음성으로 달래듯 말했다.

김일성장군님께선 이미 나라의 부강과 통일을 위한 길에서 가장 가까운 혁명전우이신 김정숙녀사를 잃으시였다. 그 아픔이 어떤것이겠는지 상상해보았니? 그런 아픔을 누르고 나라일을 돌봐야 하는 수령의 고통을 생각해보았니? 그 아픔과 고통에 비하면 지금 우리에게 부닥친 환경이 도대체 뭐겠니? 아니― 난 깨끗하게 살다가 깨끗하게 죽을것이다. 녀사님처럼 민족을 위해, 겨레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한몸을 기꺼이 바치련다.》

이것은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해온 민족의 장한 아들이 이 나라 겨레를 향해 웨치는 심장의 부르짖음이였다.

《선생님!》

리창우는 끝내 오열을 터뜨리며 성시백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리병우도 다가와 성시백의 어깨를 억센 힘으로 움켜쥐였다. 바람이 휘몰아치고있었다. 더 세차게, 더 완강하게 휘몰아쳤다. 가까운 산비탈에서 바위돌이 굴러내리는 소리가 울렸다. 무엇인가 깨여지고 부서지는 소리도 뒤따른다. 세사람은 여전히 한덩이가 되다싶이 하여 바람세찬 언덕길에 서있었다.

바야흐로 그들에게 운명을 판가리하는 준엄한 시련의 해 1950년이 다가오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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