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회)

 

제 5 장

17

 

참을성의 림계점에 도달했던 리성의 척자가 부러져나가기 시작했다. 누구인가 주먹을 부르쥐고 책상을 치며 일어서는 순간 일시에 와― 하는 함성이 터졌다. 회의장안은 순식간에 서로 다른 두 극사이에서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방전의 소용돌이속에 잠겼다.

《미국은 조선에서 손을 떼라!》, 《남북이 합심하여 조국을 통일하자!》라는 구호가 회의장 곳곳에서 울려퍼지자 다른쪽에서는 《공산당 선전이다!》, 《통일은 북진통일만이다!》하는 새된 반발이 쏟아져나왔다. 마이크를 틀어쥔 《국회의장》이 조용하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마이동풍이였다.

오늘 여기서 한국독립당, 사회당을 비롯한 여러 대소정당, 단체의 《국회의원》들과 무소속《국회의원》들로 이루어진 70여명의 소장파 《의원》들이 련명으로 미군철거와 평화통일긴급동의안을 의제로 제출하는 파격적인 사변이 발생하였고 그 토의과정에 지지파와 반대파간의 격렬한 투쟁이 벌어진것이였다.

소장파의 한 젊은 《국회의원》이 《국회의장》의 손에서 마이크를 앗아들었다.

《여러분, 우리는 후대와 력사앞에 민족분단의 죄인으로 남아있을수 없습니다. 미군을 더 이상 이 땅에 주둔시킨다면 나라는 언제 가도 평온할수 없으며 통일은 한갖 꿈으로만 남을것이요.》

《옳소!》

《미군은 나가라!》

《통일만이 살길이다!》

한쪽에서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오르는 동시에 다른쪽에서는 귀청을 째는듯 한 휘파람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사태가 심각하게 번져질것 같은 우려가 든 리승만의 극우익보수세력들이 《대한청년단》과 《서북청년단》의 악질깡패들을 회의장안으로 들이밀었던것이다.

깡패들은 마이크를 들고있던 《국회의원》을 연단에서 끌어내고는 마구 짓조겨댔다. 격분한 사람들이 주먹을 부르쥐고 그자들과 맞서 일대 란투를 벌렸다. 그 모습을 렌즈에 담는 기자들의 사진기가 련속 섬광을 일으켰다. 그러자 우익깡패들의 공격이 기자들에게로 집중되였다. 악청을 지르며 달려들어서는 바닥에 자빠뜨리고 사진기를 빼앗아 필림을 뽑아내여 토막쳐댔다.

《중지하라, 중지하라!》

누군가의 피터지는 고함소리가 천정으로 맥없이 흩어지는 가운데 회의장안은 회뽀얀 먼지속에 잠겨들었다. 수치와 절망, 분노와 광란의 일진광풍속에 날이 저물었다.

서울시 한복판에 위엄있게 틀고앉은 괴뢰국회의사당주변이 온통 수라장으로 변하였다. 휴지쪼박들과 천쪼각들, 누군가의 넥타이 같은것도 한산한 바람결에 밀려다녔다. 깨여진 유리쪼각들도 오가는 사람들의 신발밑에서 버석버석 밟히웠다. 반만년동안 쌓이고쌓였던 먼지가 죄다 들고일어난듯 석양빛마저 시누렇게 퇴색되여 길가에 맥없이 깔렸다.

이날 밤 성시백은 현장에 있던 《국회》 부의장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철병안문제가 제기되여 그 토의가 한창 절정에 올랐을 때 사태를 보고받은 리승만이 황급히 《국회》 회의실에 들어섰다는것이였다.

리승만은 미군철병안을 루차 제출한 《의원》들의 배후관계를 잘 알고있다고 하면서 처음에는 《유엔단》(유엔조선위원단)으로 하여금 남북통일을 촉진할것이며 그래도 안되면 미국을 개입시킬것이며 그래도 안되면 직접 《북벌》을 개시할것이라고 꺼리낌없이 뇌까렸다. 결과 남북협상파와 극우익보수파의 《국회의원》들이 모두 흥분하여 들고일어났는데 나중에는 그런 란투극까지 벌어졌다는것이였다.

리승만이 극우익깡패들까지 동원시켜 《국회》를 그런 무서운 싸움마당으로 만들어놓은것은 그만큼 자기의 지위가 벼랑끝으로 향해간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리성을 잃어버렸기때문이였다.

이번 투쟁에 참가하였던 《국회의원》들이 《국회》내의 통일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켜 미군의 남조선 영구주둔흉책에 더욱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야 하였다.

며칠이 지나 트루맨의 특령을 받고 도꾜의 맥아더를 찾아와 만난 미륙군장관 로얄이 서울에도 날아들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신문에는 그의 방문목적도 기일도 밝혀지지 않았다.

로얄은 서울에서 하루 체류하고 떠나갔는데 그가 여기로 오기 전에 맥아더와 만나서는 어떤 밀담을 나누었고 여기로 와서는 어디를 찾아다니였는지, 누구와 만났고 무슨 생각을 안고 떠나갔는지는 누구도 모르고있었다.

며칠후에야 성시백은 맥아더가 자기를 방문한 로얄에게 조선에로의 미군의 증병을 요청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흥미있는것은 로얄이 서울에 오자마자 《국무총리》를 데리고 비밀리에 38도선을 시찰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리승만의 《북벌》주장을 그대로 되받아외우는 그에게 현시점에서 《북벌》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을 하였다는것이였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번에 《국회》에서 일어난 철병소동이 맥아더의 증병요청을 받고 서울에 날아든 로얄의 심리에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고 볼수 있었다.

로얄도 미국륙군의 통수권을 쥔 장관으로서 지금의 현상태에서는 미군의 증병이 없이는 북조선에로의 무력진출이 불가능하다는것을 알고있지만 정작 여기 와서 미군의 주둔을 반대하는 민심과 그로 하여 이루어진 정치적혼란을 보면서 많은것을 생각했을것이다.

성시백은 지금 당장은 맥아더의 증병요청이 미국정부의 동의를 얻기 힘들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것이 자국내에서의 반정부기운과 세계여론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기때문이다. 가뜩이나 미군의 진주를 반대하는 반미기운이 날로 높아가는 땅에 아무런 구실도 없이 군대를 또 들이민다는것은 세계앞에 내놓고 전쟁을 하겠다고 선포하는것이나 같은것이다. 그럼 명색상으로나마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유엔도 그것을 보고 가만있을수가 없는것이고 미국의 영향하에 있는 서방렬강들도 금방 전쟁을 끝내고 복구건설을 하는판에 제 땅에다 포탄 한발 떨구지 않고 전승국이 된 미국의 전쟁놀음에 무턱대고 말려들려 하지 않을것이였다. 게다가 트루맨으로서는 중국과 중동문제도 복잡한데다 워싱톤의 정치권내에서 갈등과 분렬이 심해져 대통령의 지위를 고수하는데만 급급하자고 해도 숨이 찬 일이였다.

며칠후 성시백은 미국과 홍콩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로얄이 쌘프랜씨스코에서 진행한 기자들과의 공개담화에서 미국은 유럽중시에 모를 박고 전략을 세워나갈것이라고 하면서 쏘군(쏘련 붉은군대)이 북조선에서 철거를 완료한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로얄의 립장은 사실상 트루맨의 정치적동향을 그대로 반영한것일것이다.

성시백은 풀어헤친 머리칼처럼 무질서하게 자라난 갈밭이 내려다보이는 한강기슭에 차를 세웠다.

거기서 리병우를 기다리며 방금 받은 《유엔조선위원단》에 보내는 63명 소장파《국회》의원들의 미군철퇴요청과 관련한 편지사본을 검토하였다.

그것은 리승만이 기자들을 위협하고 공갈하여 《국회》 회의장의 미군철거문제소식이 신문에 나가는것을 금지시킨 조건에서 그때 철병안문제를 상정시켰던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련명으로 제출한 《유엔조선위원단》에 보내는 서한의 사본이였다.

미군의 철병을 바라는 자기들의 립장을 밝힌 이 서한은 《유엔단》에 보내는것과 동시에 서울시내 신문들에 공개할 같은 내용의 서한이였는데 성시백은 문득 이것이 원본의 내용과 무엇인가 다르다는것을 감촉하였다.

때마침 강태무와 표무원의 소식을 알아보라고 조선중앙일보사에 보냈던 리병우가 시간을 지켜 나타나 성시백의 차에 올랐다.

성시백은 곧 발동을 걸고 강기슭을 떠났다.

그는 한손으로 승용차의 조향륜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뒤좌석에 앉은 리병우에게 자기가 보던 문건을 넘겨주었다.

《놈들이 별의별 롱간질을 다 부리려고 하는것 같소. 〈유엔단〉에 보낸 서한과 신문에 공개할 서한내용이 서로 다르오.》

《네?!》

성시백은 놀라는 그에게 밑줄을 그은 부분을 다시한번 훑어보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미군의 조속철거》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바로 이 《조속》이라는 글자에 성시백이 밑줄을 그어놓았었다.

리병우는 이것만 보고는 알수 없어 성시백을 의아히 쳐다보았다. 성시백은 후사경을 통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기억엔 〈유엔단〉에 보내는 영문으로 된 원문에는 급속이라고 되여있는데 여기엔 조속으로 경개(고치는것)되였소. 이건 심중한 문제요.》

《하지만 제 보기엔 급속이나 조속이나 특별한 의미상 차이는 없는것 같습니다. 여기에 누구의 롱간질이 들어갔다고 볼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조선말에서야 특별한 의미상 차이가 없지. 하지만 단어 하나, 토받침 하나를 가지고도 승패가 좌우되는것이 정치투쟁이요. 이것이 그 누군가의 실수가 아니라 놈들의 음모라면 어떻게 하겠소?》

《네?!》

리병우는 가슴이 서늘해져 자리를 고쳐앉았다.

《조속이라는 단어와 급속이라는 단어가 우리 말에서는 서로 류사한것 같지만 영어에서는 시간상의 큰 격차가 있소. 그러니 놈들이 이 단어를 구실잡아 철거를 질질 끌수도 있단 말이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잘못하다가는 우리들자신이 미군을 쫓아버리려 하다가 도리여 미군에게 언제까지건 자기 무력을 그냥 주둔시킬 언질을 줄수 있소.》

순간 리병우의 이마에 땀방울이 내돋았다. 성시백이 영어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말을 모국어처럼 자유자재로 할줄 안다는것은 알고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한 단어에 깃든 세부적인 의미까지 다 파악하고있을줄은 미처 몰랐던 리병우는 경탄에 가까운 그 무엇을 느끼면서도 버썩 긴장되지 않을수 없었다.

성시백은 이제라도 빨리 내용을 정확하게 다시 고쳐서 신문에 내도록 대책을 세우라고 리병우에게 지시를 주었다.

그다음에야 그는 갔던 일이 어떻게 되였는가 물었다.

성시백은 리병우에게서 강태무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 려수군인폭동진압에 동원되였다가 직무를 태만한것으로 하여 철직된 이전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을 만나 한해전에 그가 특별반에 편입되여 다니던 륙군사관학교 2기졸업생들중에 강태무라는 사람이 있는가 알아보고 그에 대하여 물어보았었다.

마침 송호성은 그때 강태무와 한호실에서 지냈었다. 그때 강태무의 사람됨을 깊이 파악했던 송호성은 정의감이 강하고 민족적자존심도 만만치 않은 매우 과격하면서도 열정적인 청년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여러 경로를 통하여 강태무에 대하여 더 깊이 료해해보았는데 그 과정에 강태무가 춘천의 표무원대대장과 합심하여 려수에서와 같은 폭동을 극비밀리에 준비하고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였다.

성시백은 그와 같은 폭동이 려수와 순천에서와 같은 뼈아픈 희생으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충분하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와 같은 폭동의 재발이 김일성장군님의 민족통일사상을 실현하는것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였다.

그래서 리병우를 시켜 강태렬을 통하여 그들에게 폭동계획을 철회하라는 권고를 하도록 하였던것이다.

《폭동계획은 중지되였습니다. 그들이 이미 폭동계획을 다 무르익히고 오늘래일 당장 거사를 치를 판이였더군요.》

《그래 순순히 말을 들었다오?》

《순순히가 다 뭡니까? 하마트면 강태렬이 제 동생에게서 반역자의 락인을 받을번 했다고 합니다. 폭동계획이 김일성장군님의 뜻과는 대치되는 행위로 된다고 찍어말해주어서야 마음을 좀 진정하더랍니다. 내 보기엔 아마 이제 그들이 훌륭한 통일애국투사로 자라날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우리 장군님을 따르자고 결심하고 나선 사람들이 다르게는 될수가 없는 법이지.》

성시백은 앞으로 강태무나 표무원이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커다란 공헌을 할수 있으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리병우는 계속하여 최근에 리승만이 북조선의 주요 도소재지들중의 하나인 해주에서 공화국공민들과 경비대가 북조선정권을 반대하여 폭동을 일으켰다고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요란하게 선전하고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고 물었다.

성시백은 이미 그 문제에 대하여 료해해보았었다. 그날 밤 서울방송에서 나오는 《특종뉴스》를 그자신이 직접 듣기까지 하였었다.

…오늘 1월 19일 밤 11시 북한정권의 독재와 억압속에 눌려살고있던 중요소재지들중의 하나인 황해도의 해주시에서 현 정권을 반대하는 국민들과 군대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해주시는 지금 불바다에 잠겼다. 북조선 인민군대와 보안대가 일으킨 폭동에 궐기하여나서는 시민들과 국민들의 수는 계속 늘어나고있다. 공화국의 독재속에 암흑의 진창길을 걷고있는 북한의 국민들이여, 모두가 떨쳐일어나 해주의 영용한 투사들처럼 싸우라. …

물론 그것이 미리 준비되였던 보도라는것은 의심할나위가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폭동이 일어났다고 하는 11시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그러한 보도가 나올리가 없는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보도에 그쳤을뿐 구체적인 자료가 첨부되지 않았다.

알고보니 리승만이 그날 밤 해주쪽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릴것을 타산하고 서울방송국과 경향신문의 기자들까지 복새통을 일구어 38도선에 내보냈는데 그 기자들이 청단에서 마이크를 북쪽으로 돌려대고 밤새껏 기다리다가 나중에는 을씨년스러운 바람소리와 추위에 얼어들어 내뱉는 자기들의 재채기소리만 록음해가지고 돌아갔다는것이였다.

성시백은 이러한 사연에 대하여 알려주면서 이번 사건은 도꾜의 미군사령부에서 지령을 받은 《국무총리》가 작전하고 지휘한것인데 작전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준비했던 허위보도가 세상에 공개된것으로 하여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조소를 자아내고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리병우는 앞걸상의 등받이를 후려치며 분격해하였다. 그리고는 밀페된 승용차안이 답답한지 시창의 유리를 내리우고 밀려들어오는 찬 바람을 그득하게 들이켰다.

《그러니 그것도 역시 리승만이 조작했던 음모였군요. 정말 치졸하고 더럽습니다.》

《지금 우리 장군님께서 바라시는것은 누가 누구를 반대해서 들고일어나는 식의 령도권싸움보다 갈라진 민족의 통일성업을 위해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굳게 단합하는것이요. 앞으로 우리도 장군님의 이 뜻을 받들어 보다 적극적인 투쟁을 벌려야겠소.》

《그런데 리승만이 전번 〈국회〉회의장에 나타났을 때 철병안문제를 루차 제출한 〈의원〉들의 배후관계를 잘 알고있다고 한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것입니다. 혹시 향명선생에 대한 무슨 단서를 잡은건 아닌지…》

성시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보다도 백범의 신변이 걱정스럽소. 나는 아직까지 공개적으로 정치활동에 참여한적이 없는 상업가로서 리승만의 시야에 들만 한 근거가 없지만 김구선생은 다르거던. 이번에 〈국회〉의제에 미군철병안문제를 상정시키는데도 김구선생이나 조소앙선생의 적극적인 활약이 큰 역할을 하였는데 리승만이 그 눈치를 채고 이를 갈고있을거요. 〈국회〉에 의거하는 합법적활동을 하였으니 내놓고 탄압할 구실은 없어 그렇게 말했을거요.》

《그렇다 해도 각성은 높여야겠습니다. 리승만이 조직한 〈합동수사본부〉 책임자가 어떤자인지 아십니까? 오제도라고 이 남조선은 물론 미국에까지 알려진 사찰계의 거두입니다. 백범처럼 공개적이며 합법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야 그런 수사관을 붙일 필요가 없지요. 오제도가 일단 무슨 낌새를 채고 선생을 파고들기 시작하면 그땐 야단입니다.》

성시백은 리병우의 안달아하는 모습을 보며 시뭇이 웃음을 지어보였다.

《됐소, 됐소. 우리 사태를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내가 한 일이라는것이 무슨 간첩활동같은것이라면 몰라도… 난 그저 싸움은 말리고 혼사는 붙이랬다는 선조들의 격언을 해설하러 다녔을뿐이요.》

그래도 리병우는 무엇인가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해하였다.

성시백은 차를 세웠다. 조향륜을 감아쥔 그의 손이 으득 소리를 내며 당장에 손안에 있는 모든것을 박살낼 기세로 조여졌다.

그의 심각해진 목소리가 발동기소리가 멎은 고요한 차안을 진동시켰다.

《이것 보오. 난 김일성장군님의 민족대단결의 사상에 공감하고 그이의 뜻이 정말로 온 조선민족을 구원하는 길이기에 그 길에 한몸바치기로 결심한거요. 내가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따르는것은 공산주의냐 민족주의냐 하는 그 어떤 리념때문에가 아니라 외세에 의하여 강요된 민족의 분렬과 아픔을 진정 자신의 아픔과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쓰시는 김일성장군님의 고결한 민족정신, 열렬한 민족애에 공감했기때문이요. 제 민족을 사랑하지 않고 제 민족의 자주권과 평화와 행복을 제쳐놓고서야 리념을 론해선 뭘하고 정당을 조직해선 또 뭘한단 말이요. 그런데 리승만은 자기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제 민족을 통채로 미국의 식탁에 섬겨바칠 매국노요. 난 이걸 그대로 보고만 있을수가 없었소. 만약 이것이 죄가 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해도 난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거요. 나의 죽음이 민족분렬을 고취하는 매국세력의 강권에 억눌려 사는 이남사회에 자그마한 교훈이라도 던져주게 된다면 난 그 죽음을 떳떳이 맞이하겠소.》

리병우의 눈가에는 어느 사이 물기가 그렁하게 내배였다. 가식을 모르고 고지식한 리병우는 자기의 감정을 숨길줄 몰랐다.

성시백은 조향륜을 쥐고있던 손을 뒤로 뻗쳐 리병우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당장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기는 이르오. 이제 장군님께서 불원간 민족구원의 새로운 방략을 내놓으실거요.》

성시백은 트루맨이 당분간은 조선문제에까지 관심을 둘 형편이 못되여 맥아더의 증병요청을 거절하였다고 해도 일단 남조선에 주둔한 미군까지 그렇게 순순히 철거시키려 할수는 없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미국의 세계제패야망을 그대로 체현하고 대통령자리에 오른 트루맨이 극동제일주의를 주장하는 맥아더의 의견을 결코 묵살하지는 않을것이고 언제이건 반드시 조선에서의 새 전쟁도발음모를 실천에 옮길것이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하루빨리 미군의 완전철퇴를 실현하여 나라의 자주적통일을 이룩할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놓아야 하였다.

그를 위해 지금은 김구, 김규식, 조소앙을 비롯하여 4월남북련석회의 참가자들로 구성된 남북협상파세력이나 괴뢰국회의 소장파《의원》들뿐아니라 평화통일을 바라는 보다 광범한 애국력량을 묶어세워 거족적인 반미투쟁을 강도높이 전개하는것이 급선무였다. 그렇게 하여 단독으로라도 북진을 개시하여 억지로라도 미군을 개입시키려 하고있는 리승만을 정치적으로 더욱 고립약화시키고 그 동족대결광증이 현실로 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하였다.

그런데 남조선의 광범한 애국력량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사업은 지금 《유엔단》을 대상으로 벌리고있는 미군주둔반대투쟁보다 더 어렵고 복잡한 문제였다.

그래서 성시백은 이 문제를 해결하실분은 오직 김일성장군님뿐이시라고 생각한것이고 이제 그이께서 내놓으실 민족구원의 새로운 방략을 피타게 기다리고있는것이였다.

《저걸 보십시오. 벌써 꽃이 피는것 같습니다.》

문득 리병우가 양지바른 산기슭에 자란 개나리에서 파릇한 새싹이 뾰조롬히 얼굴을 내밀고있는 모양을 보고 의미있게 탄성을 올리였다. 성시백도 보았다. 바야흐로 새봄이 태동하는무렵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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