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제 4 장

16

 

날이 밝은 뒤 방학세는 평양으로 떠나기에 앞서 석반월이라는 처녀를 한번 만나보고 가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때에야 방학세는 자기앞에 나타난 그 말썽많은 처녀의 얼굴을 자세히 볼수 있었다.

얼핏 보면 흔히 보게 되는 얌전데기녀학생에 불과했지만 자세히 보게 되면 인생에 맞다들릴수 있는 갖은 우여곡절을 이 며칠동안에 앞당겨 모두 체험해본 녀자답게 수심이 짙게 어려있었다.

방학세는 자기가 이 처녀를 지나치게 랭담하게 대하였다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김일성동지께서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는것을 다 내다보시고 이 처녀에 대한 신변호위를 명령하신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 그이께서는 무엇때문에 나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시였댔을가?

《그래 이젠 우리가 동물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소? 동문 공을 세웠으니 죄를 씻고도 남았소. 그러니 소원이 있으면 터놓고 이야기하오.》

《고향에 가게 해주십시오.》

《고향에? 다니던 학교는 그만두고?》

《네, 이 도시엔… 더 있고싶지 않습니다.》

처녀의 심정이 리해되였다. 또 그렇게 하는것이 객관적으로 보아도 처녀에게는 더 리로울것 같았다. 사건을 결속지었다고는 하지만 혹시 내무서의 그물에서 몰래 빠져나간 잔고기들이라도 있다면 저들의 일을 파탄시킨 반월을 가만두자고 하지 않을것이였다. 차라리 반월의 소원대로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고향에 가서 이전처럼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수 있게 해주는것이 적중한 조치라고 생각되였다.

《그렇다면 동무 소원대로 하시오. 여기 내무기관에서 필요한건 다 도와줄거요. 어떻든… 어떻든 이번에 수고가 많았소.》

어떻든 속으로는 이래저래 이 처녀에게 미안한 일이 많다는것을 느끼게 되였다.

그렇다고 말을 길게 늘어놓고싶지 않았던 방학세는 함께 있던 도내무부 일군들에게 금천으로 가는 차편이 있는가 알아보고 처녀를 집에까지 무사히 보내주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나서 그는 인차 평양을 향해 출발했다.

그때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 석반월은 황해도 벽성군의 이름없는 나지막한 둔덕우에 서있게 되였다.

반월의 앞에는 신갈나무, 떡갈나무, 이깔나무 등 다종다양의 나무들로 숲을 이룬 해발높이 284메터의 은파산이 군데군데 째진듯 한 눈이불을 뒤집어쓰고있었다. 이곳은 그가 태여나서 난생처음 와보는 곳이였다. 난생처음 와보는 곳이면서도 난생처음으로 자기의 생각이나 주견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발길이 가는대로 맹목적으로 이끌려 도착하게 된곳이였다. 하긴 꼭 그렇다고 말할수도 없겠지만 어쨌든 해주를 떠나면 이곳에 들려보리라는 결심을 미리부터 하고있었던것은 아니였다.

반월은 다만 고향으로 가는 길을 되도록이면 에돌고싶었다. 될수록이면 해주에서도 한시바삐 떠나고싶었고 고향에도 늦게 도착하고싶었다. 그래서 내무성 부상이 평양으로 떠나며 준 지시때문에 도내무부일군들이 반월을 불러놓고 고향에 무사히 보낼 궁냥을 할 때 금천이 아니라 벽성으로 가겠다고 선뜻 말했었다.

그때 자기를 앞에 놓고 수군거리는 내무원들의 대화속에서 그날 해주시운송사업소에서 벽성군에 물자 실으러 나가는 차가 있다는 소리를 얼핏 들었던것이다. 반월이 그 차를 타고 벽성으로 가게 해달라고 하는 바람에 그를 불러놓았던 내무원들은 뜨아해하였다.

《동무고향이야 금천이 아니요. 그런데 벽성엔 왜? 거기 누가 있기에 가겠다는거요?》

《제 동무가 거기 시집을 가있어요. 고향에 가던 길에 그곳에 들려보고싶어요.》

반월은 내키는대로 말한것이기는 하지만 거짓말을 한것도 아니였다. 벽성군 월록면에 자리잡은 은파산밑에서 리수영이라고 하는 둘도 없는 소꿉동무가 시집살이를 하고있는것은 사실이였다.

반월은 정말 그때 고향에 가기 전에 수영이를 꼭 만나보고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었다. 생긴것처럼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쾌활한 수영이와 천진했던 지난날의 동심에 잠겨 실컷 웃고 떠드느라면 마음속에 차오르는 온갖 괴로움이며 해주에서 겪었던 수치스러운 과거에 대하여 서도 다소간 잊을수 있을것 같았다.

결국 이렇게 되여 반월은 벽성군에서도 외진 월록면의 룡정리에까지 이르게 된것이였다.

석달전까지만 해도 고향에서 리민청사업을 한다며 뛰여다니다가 벽성군의 어느 민청위원장총각과 눈이 맞아 이곳으로 시집을 온 수영은 임신중인 며느리에 대한 시부모들의 《정책》으로 집안에서 《포로생활》을 하고있었다. 그러다가 뜰안에 들어서는 반월을 알아보고는 바스라지는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왔다. 그들은 세상에 저들밖에 없는듯 마음내키는대로 떠들어대며 어린애들처럼 콩당콩당 뛰였다.

온 얼굴이 그것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류달리 눈이 큰 수영은 시집을 가서 한결 더 환하게 피여난 둥실한 얼굴에 호함진 웃음을 담고 반월이의 이마를 손끝으로 튕겼다.

《아유― 그새 꽤나두 고와졌구나. 해주서 공부한다더니 도회지바람이 좋긴 좋다. 경비대에 있는 그 어리무던한 총각 노상 입을 다물지 못하구 살겠다야.》

여기서까지 해주학교와 변익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자 반월은 심드렁해졌다.

수영의 시집은 어디서 구해들였는지 지붕에 제법 청기와까지 얹어놓아 그 아근에서는 보기 드문 체모를 자랑하고있었다. 방안에는 자개박이벽장이며 자그마한 경대까지 놓여있었고 돗자리를 깐 바닥은 불을 많이 때서 아래목에 콩을 한줌 던졌다가 쓸어모으면 제꺽 익을만큼 달아있었다. 남편과 시부모들은 밭에 거름을 실러 나가고 수영이 혼자 있었다.

방안에 들어가 뜨끈한 바닥에 몸을 붙이고 수영이와 마주앉은 반월은 자기 신상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일체 내비치지 않고 수영의 생활에 대하여서만 물었다. 한참동안 결혼생활이며 시집살이의 달콤한 재미와 별로 특별하지도 않은 누구에게나 흔히 있는 고민거리들에 대하여 쉴새없이 늘어놓는 수영의 말을 듣기만 했다. 어째서인지 반월은 남의 생활에 대한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말을 듣기가 좋았다. 마치 자신에게도 언제인가 그런 달콤한 생활이 찾아든적이 있는듯 했고 지금 당장 그런 생활속에 잠겨있는듯 한 행복감도 느끼게 되는것이였다.

《아야야… 내 정신 좀 봐. 손님을 앉혀놓고 말로만 한상 굼때려댔구나.》

저녁에 반월은 수영이의 온 가족과 식사를 나누었다. 때때로 수영이가 해주에서 얻어들은 새 소식이나 좀 이야기해달라고 졸라대군 했지만 그때마다 반월은 별로 특별한것이 없다고 대답하군 하였고 제 자랑에 도취된 수영은 반월의 표정에서 이따금 나타나군 하는 서글픈 기색을 보지 못하고 더 이상 캐물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수영의 시아버지는 척 보기에도 무던하고 고정할것 같은 오랜 농사군이였는데 반월에게 자꾸만 음식을 더 권하며 바쁘지 않으면 며칠간 여기서 며느리의 동무나 해주다 가라고 했다. 수영의 시어머니와 무던하게 생긴 남편도 볼일이 있어 벽성에 왔다가 잠간 들렸댔다는 반월의 말을 곧이 믿고 먹을 걱정일랑 말고 마음내키는껏 더 류숙하라고 했다.

둘은 밤에 한자리에 누워 낮동안 못다했던 달콤한 이야기들을 끝없이 나누었다. 다행히도 수영은 변익수에 대한 말은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결에 수영이가 먼저 잠들었는데 고민거리도 병도 별로 없는 건강체여서 잠도 깊이 잘 잤다. 아이를 낳으면 건장한 부모들을 닮은 장수가 나올것 같았다. 반월은 수영의 옆에서 새벽녘이 될 때까지 뜬눈으로 뒤채기다가 일어났다.

아직도 꿈나라에서 행복의 단즙을 빠느라 입술을 오무작이며 자고있는 수영의 머리맡에 부디 행복하길 바란다는 짤막한 쪽지 한장을 남겨놓고 조용히 그 집을 나섰다.

반월이 마을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등성이에 올랐을 때 안개바다에 잠겨 듬성듬성한 이영들이 가까스로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한 그곳에서 새벽동자질에 나선 아낙네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소리와 여기저기서 짖어대는 집지기개들의 울음소리들이 간간이 들려왔다.

지금쯤은 수영이도 잠에서 깨여나 인사불성으로 떠나간 동무를 탓하며 토달거리고있을것이다.

눈에 덮여 미끄러운 자그마한 등성이를 가까스로 또 하나 넘어가자 간신히 들려오던 새벽동자질소리며 이영들만 내보이던 마을의 자태도 사라지고 그뒤에 자리잡은 은파산의 눈덮인 관목숲만 눈에 어려왔다.

해주에서의 지난 며칠동안에 남들이 겪어보지 못할 흔치 않은 경난을 겪은 반월은 자기의 곡절과는 판이하게 너무나도 평범한 이 세상이 어이없기도 했고 새삼스럽기도 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먼저 송악산에서 경비대 소대장으로 있는 변익수를 찾아가 만나고싶었다. 그에게 지금껏 자기 집안이 겪고있는 곡절과 자신의 생활에서 일어난 변화를 그대로 터놓고싶었다.

물론 내무원들을 도와 간첩들을 잡아내는데 기여하기는 했지만 원쑤들에게 속혀 뭣모르고 끌려다닌 과오는 반월이자신도 역겨운것이였다. 그 역겨운것을 내뱉는 심정으로 모든것을 솔직히 터놓고 용서를 빌고싶었다. 그러면 익수동무가 과연 어떻게 나올가? 나를 용서해줄가? 혹시 수치를 당한 어지러운 처녀로 타매할수도 있지 않을가? 그래도 할말은 없다. 그래도 찾아가 만나고싶었다. 마음에 꺼리는것이 없이 익수에게 모든것을 다 터놓지 않고서는 언제 가도 진정할수 없을것 같았다.

수영이네 집에서 보낸 지난 밤을 돌이켜보게 되였다. 고요한 마을, 행복한 가정… 수영이의 집에서 보았던 그 모든것이 부럽기 그지없었다.

반월은 자기에게도 과연 그런 날이 오겠는지 걱정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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