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 회)

제 6 장  《보감》

8

 

허준은 사생결단의 각오를 안고 의서집필에 온 심혈을 깡그리 바치고있었다.

여느때같으면 반년이 더 걸릴 분량의 의서를 허준은 두어달만에 써냈다. 초인간적인 인내력으로 허준은 이곳에 와서 《잡병편》에 속한 여러권을 완성하고 지금은 10권을 쓰고있었다.

설유와 기동은 허준의 집필에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허준이 쓴 원고를 후열하고 혹 글자가 정확치 않거나 빠진 부분이 있으면 허준에게 면회간 기회에 물어서 고쳐놓군 하였다.

칠성이와 달래가 의서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응규의 기별을 받고 며칠동안 눈물로 지샌 그들이였으나 허준에게는 그 소식을 알려주지 않았다. 의서집필에 온 심혈을 쏟고있는 허준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것을 바라지 않았기때문이였다.

칠성이와 달래가 죽은 다음부터 응규는 아예 아전노릇을 그만두고 의서를 지키는 일에 전념하고있었다. 밖에 묻어놓았던 의서가 들어있는 단지도 방안에 들여다놓고 밤낮으로 그 단지의 곁을 뜨지 않았다.

이무렵 궁중에서는 왕후가 천연두에 걸린것으로 하여 온 대궐이 죽가마끓듯 소동이 일었다.

소경들이 모인 자리에선 애꾸가 제일이노라 뻐긴다더니 허준이 귀양간 후로는 태의 양례수가 궁중의 모든 치료를 도맡아하고있었다. 양례수가 자기의 의술을 다 동원하였으나 왕후의 병은 날이 갈수록 더더욱 악화되기만 하였다.

양례수의 얼굴엔 나날이 짙은 구름이 끼였다.

《태의어른, 구슬(발진)이 내공하였소이다.》

내시가 헤덤비며 양례수에게 하는 말이였다.

양례수는 새삼스레 허준이가 만약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뒤에서 허준을 시기했으나 역시 그가 명의라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양태의, 그래 정녕 왕후마마의 병을 고칠 방도가 없단 말이요?》

령의정이 양례수를 시틋이 바라보며 물었다.

양례수는 늦게나마 허준에게 용서를 빌고싶었다. 허모의 풍에 놀아 그를 모함하여 정배지로 가게 만든 장본인이 다름아닌 양례수 자기가 아니던가.

더구나 그 허모라는 감찰이 원인모르게 미쳐서 돌아간다는 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양례수는 불판에 엉뎅이를 대고 앉은것처럼 알수 없는 불안감과 죄의식으로 마음이 편안치 않았다.

이제 와서 체면이고 렴치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까딱 잘못하여 왕후가 병으로 잘못되는 날에는 어떤 처참한 형벌이 차례진다는것을 양례수는 잘 알고있었다. 자칫 하다간 위리안치된 허준이보다 더 참혹한 형벌이 차례질수도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양례수는 대척하였다.

《저, 이 병을 고칠수 있는 사람은 나라안에 허준이 한사람뿐이오이다.》

《지금 정배살이를 하고있는 그 의원말이요?》

《예, 그렇소이다.》

하여 허준은 정배살이를 떠날 때처럼 며칠사이에 벼락같이 궁궐로 돌아오게 되였다.

구슬이 잘 돋지 않아 위중한 두창(천연두)은 허준이 이미 달래를 치료할 때 경험한것이였다.

허준의 치료로 하여 왕후의 병은 날이 감에 따라 호전되여갔다. 왕후의 병이 다 나은 다음 광해군은 비변사에 어지를 내렸다.

《양례수대신 허준을 다시 어의로 임명하도록 하라! 허준이 그렇게 가벼이 고치는 병을 양태의는 어이하여 전혀 손도 쓰지 못하는고. 그에게 궁안의 치료를 맡기였다가는 생사람을 죽일수 있으니 그를 강등시켜 외직으로 내쫓도록 해라!-》

허준은 1609년 초봄에 다시금 궁궐의 어의로 봉해지게 되였다. 그런줄도 모르고 기동이와 설유는 허준과 약속한 날을 손꼽으며 기다리고있었다.

오늘은 기동이가 허준에게서 의서를 받아가는 날이였다.

술방구리를 들고 가시울타리쪽으로 다가가 후박나무쪽을 바라보던 기동은 와뜰 놀랐다.

늘 가면 불을 피워놓고 나무밑둥에 기대여 끄덕끄덕 졸거나 하품을 하던 파수군이 보이지 않았던것이다.

(아니?!)

기동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다급히 술방구리를 놓고 단숨에 가시울타리를 타고넘었다. 언제나 한본새로 머리를 수굿하고 붓을 달리던 허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허준이 그리도 신주처럼 귀중히 여기던 의서원고는 물론 붓도 벼루도 없었다.

허둥지둥 돌아온 기동의 낯색이 시꺼멓게 죽어있는것을 보고 설유가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생겼어요?》

《사모님, 선생님이 안계시오이다!》

《그건 무슨 소리예요? 안계시다니?!》

설유가 깜짝 놀랐다. 금시 온몸이 얼음장같이 싸늘하게 얼어들었다.

(그럼 혹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다가 설유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절대로 그럴수 없었다. 그렇게 쉽게 거꾸러질 남편이 아니였다.

(그렇다면?)

《어서 로인장네 집으로 가봅시다!》

생각을 굴리는 설유에게 기동이 한마디 하고는 제 먼저 직방 둔덕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설유와 기동의 말을 들은 로인 역시 깜짝 놀랐다.

《내 얼른 파수군들이 거처하고있는 집에 다녀오겠네.》

잠시후 로인이 숨이 턱에 닿아 뛰여왔다.

《엊그저께 저 한성에서 의금부도사가 사람들을 끌구와서 의원선생을 데려갔다누만.》

《네?! 대체 무슨 일로 데려갔다 하오이까?》

《잘 모르겠네만 파수군들의 말이 어지가 내려 데려갔다더군.》

불안은 더욱더 커졌다. 그럼 위리안치보다 더 중한 형벌을 내리려 하는가?

설유와 기동은 로인에게 그새 많은 신세를 진데 대해 사례하고 황급히 수레를 타고 한성으로 향하였다. 한성에 당도하여 응규를 만난 후에야 설유와 기동은 임금의 어지로 허준이 다시 어의로 등용되였다는 소식을 알게 되였다.

《그럼 그이가 정녕 정배살이에서 풀려나왔단 말이지요?!》

설유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이고 목소리는 떨렸다. 응규가 설유의 손목을 부여잡고 목이 메여 뒤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기동이가 볼편을 실룩거리며 격정에 넘쳐 설유의 팔을 흔들었다.

《사모님, 이젠 선생님이 살았습니다!》

 

나지막한 산기슭의 두 봉분앞에 네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서있었다. 허준과 설유, 기동과 응규였다.

봉분의 앞에는 허준이 정배지에서 쓴 여섯권의 의서가 차곡차곡 놓여있었다. 《잡병편》 제6권부터 제11권까지였다.

봉분앞에 꿇어앉은 허준은 무덤을 쓸고 또 쓸어만졌다. 언제나 뿔난 황소마냥 머리받기질을 하던 성미급하나 열정적이고 꾀많은 칠성의 모습과 험악한 세상살이를 꿈만히 여기며 언제나 발랄하고 쾌활하던 달래의 자태가 눈앞에 삼삼하였다.

억장이 무너지는듯 한 아픔이 허준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너무도 젊고젊은 나이였다.

응규를 통해 의서를 도적질하러 쳐들어왔던 놈들속에 설유의 친부모들을 죽인 왕사마귀가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앞에 한동안 저 멀리 동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허준이였다.

결국 《동의보감》은 의원인 허준 하나만의 심혈이 깃든 단순한 의서가 아니였다. 여기에는 이 나라 민족의 넋과 얼이 슴배여있었다. 악착한 왜놈들이 바다건너 남의 나라 땅에 와서 의서를 노린다는것은 그 의서에 민족의 자존과 슬기가 깃들어있기때문이였다. 그 자존과 슬기를 빼앗고 말살하려고 저 섬나라 왜놈들이 그리도 갖은 흉계를 다 꾸미고 날뛰고있는것이 아닌가.

(칠성아, 달래야! 난 너희들의 목숨만을 병마에서 구원해주었지만 너희들은 이 나라의 재부를 야수들의 마수에서 구원했구나!

그 의롭고 아름다운 애국의 마음과 의리를 내 영원히 잊지 않으마. 《동의보감》은 단순히 이 허준만이 아니라 너희들과 같은 훌륭한 사람들의 손에 받들려 나온 의서이기에 민족의 보배로 될것이니라.)

허준의 백발이 훈훈한 춘풍에 흐느적거렸다.

허준은 귀양지에서 풀려나온 다음에도 의서집필을 단 한순간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붓을 달리는 그의 눈앞에는 의서를 위해 서슴없이 목숨을 바친 칠성이와 달래의 모습이 얼른거렸고 좋은 의서가 나오기를 애타게 고대하던 어머니와 류이태, 그리고 유명무명의 사람들의 모습이 안겨들어 원고완성에 박차를 가하였다.

집필은 1년간 더 계속되였다. 이 기간에 그는 열한권에 달하는 《잡병편》의 집필에 이어 《탕액편》 세권과 《침구편》 한권을 더 완성하였다.

총 25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였다.

1610년 9월 2일.

불그스레한 기운이 온 방안을 비쳐주고있는 탁자우에서 허준은 붓을 달리고있었다. 《침구편》의 마지막장이였다. 그옆에서는 설유와 기동이, 응규와 선복이가 허준의 모습을 지켜보고있었다.

드디여 달리던 붓이 멎었다.

붓을 놓은 허준은 금방 자기가 쓴 글발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였다. 종이장에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장장 열네해라는 세월이 흘렀다. 갖은 풍상고초와 악조건을 의지와 사랑의 힘으로 한걸음한걸음 헤쳐 마침내 의서완성이라는 날을 맞은것이였다.

얼나간듯 화석처럼 굳어져 뜨거운 눈물을 쏟고있는 허준의 어깨에 설유가 얼굴을 살며시 기대였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손으로 허준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쳐주더니 사랑하는 남편의 허리를 꼭 그러안았다.

《예영이 아버지!-》

기동과 응규가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의원님!》

허준의 백발이 풍만난듯 세차게 떨렸다. 걷잡을새없이 쏟아지는 눈물이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리라. 그 눈물에 깃든 만단사연 그 무엇이랴 표현하랴.

허준이 갑자기 껄껄 웃으며 큰소리를 쳤다.

《됐네, 됐어! 이 기쁜 날에 울어서야 되겠나. 어서 한상 푸짐히 차리오! 우리 기동이와 응규, 선복이와 그리고 칠성이 달래와 함께 마음껏 즐기며 축하하기요!

자네들이 아니였다면 내 어찌 의서를 완성할수 있었겠소. 그렇지 않소?》

설유가 눈물젖은 얼굴에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않구요. 우리 달래와 칠성이가 오늘을 보았으면 얼마나

애써 웃음을 지으려 했건만 마지막말에 가서는 어깨를 세차게 들먹이였다.

응규와 기동이가 다가와 흐느끼는 설유의 량팔을 꽉 쥐였다놓았다. 사나이들의 눈에도 맑고 뜨거운 눈물이 그득히 고여있었다.

그때로부터 열흘후 허준과 설유는 수레를 타고 산음으로 향하였다. 수레우에 놓인 커다란 부담짝안에는 25권에 달하는 《동의보감》원고가 들어있었다.

죽순은 5년전에 세상을 떠났고 류이태는 허준이 정배지에서 풀려나온 그해 겨울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류이태는 죽순이와 합장하였다. 합장묘앞에 《동의보감》원고를 쌓아놓은 허준과 설유는 깊숙이 절을 하였다.

허준은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선생님! 죽순의원님! 선생님들의 소원대로 의서를 완성했소이다. 저의 운명의 방향타를 그어주시고 언제나 떠밀어주신 선생님들이 계셨기에 오늘이 있었소이다.

훌륭한 설유를 저의 곁에 세워준 아버님은 저의 영원한 스승이고 친아버님이십니다.)

어머니의 묘소에도 그들은 의서를 쌓아놓고 깊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였다.

허준은 어쩐지 어머니가 너무 기뻐 금시라도 땅을 박차고 무덤속에서 나올것만 같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허준의 뺨으로 흘러내렸다.

(어머니, 어머니가 그토록 바라시던 뜻을 이루고 이 아들이 돌아왔소이다. 어머니의 당부, 어머니의 부탁을 골수에 새기고 이 아들이 의서를 완성하고 어머니를 뵈우러 왔나이다. 한번만이라도 눈을 뜨시고 보시오이다. 어머니!-)

1613년 11월 《동의보감》전 25권 (《목록》2권, 《내경편》4권, 《외형편》4권, 《잡병편》11권, 《탕액편》3권, 《침구편》1권 총 3139페지)이 목판으로 출판되였다.

드디여 대를 물려가면서 나라의 귀중한 재부로 될 3대 고려의학고전의 하나인 《동의보감》이 이 세상에 태여난것이다.

의서《동의보감》은 실로 귀중한 나라의 재보였다.

허준이 집필한 《동의보감》에 의해 우리 나라의 전통의학은 봉건시기 우리 나라 의학발전력사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게 되였다.

15세기에 출판된 《향약집성방》이 우리 나라 민족의학의 성과를 종합한것이고 《의방류취》가 동방의학의 성과를 집대성한것이라면 《동의보감》은 동방의학의 모든 성과를 하나의 체계로 소화하여 새로운 높이의 의학체계를 창조하고 독특한 학풍을 세울수 있게 한 고려의학의 백과전서였다.

《동의보감》이 나옴으로써 이때부터 동방의학의 체계가 성립되였으니 그 의의를 어찌 한두마디로 다 말할수 있으랴.

《동의보감》은 의서로서의 그 내용도 매우 선진적이면서 과학적이였다.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건강을 유지하는데서 육체와 정신을 단련하는것이 선차이고 약과 침은 그다음이라는 선진적인 사상을 강조하였다. 이 소박한 예방의학사상은 허준의 진보적인 의학사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마음과 몸을 단련하고 수양을 잘하면 병을 미리막고 오래 살수 있는데 이것을 모르고 병치료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진보적인 사상으로부터 그는 일단 병이 생긴 다음에도 제때에 치료하여 불행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모든 병치료에서 우선 정신적잡념을 없앰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얻는데 관심을 돌리며 식사료법을 하여 낫지 않을 때에 약과 침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동의보감》은 방대한 규모의 과학적저술이면서 동시에 평범한 사람들이 누구나 병치료를 쉽게 할수 있도록 실용성을 갖추고있다는데 그 특색이 있었다.

《동의보감》의 이 특색은 의학에서 리론이 아니라 실천에 기본을 두어야 한다는 허준의 진보적사상을 반영하고있다.

허준은 《동의보감》집례에서 옛사람의 약처방은 들어가는 약재의 분량이 너무 많아서 쓰기 어려운데 하물며 빈곤한 가정들에서 어떻게 약을 쓸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처방의 구성을 달리하고 약재의 분량을 조절하여 누구나 쉽게 쓸수 있도록 하였다.

뿐만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널리 쓰고있는 단방들과 민간료법들을 널리 수집정리하여 해당한 병치료부분에 알기 쉽게 제시함으로써 광범한 사람들의 병을 치료할수 있도록 하려고 성의를 다하였다. 그러므로 《동의보감》은 로련한 의사들과 의학자들에게는 훌륭한 참고서로 되고 의학을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교과서로, 일반사람들에게는 쉽게 리해하고 자체로 치료할수 있는 그야말로 빠뜨린것이 없는 훌륭한 가정의학독본으로 되고있다.

《동의보감》에는 뛰여난 과학적내용도 풍부히 담겨져있다. 그것은 《동의보감》의 매개 편이 다 그부분의 전문의학책에 손색이 없는 정도의 면모와 내용을 갖추고있는것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먼저 정상생체의 생리적기전에 대하여 쓰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방법을 제시한 다음 매개 질병과 그 병리적기전, 증상 및 치료처방과 예후에 대하여 썼으며 끝으로 해당한 병치료에 효과있는 단방들과 침구법을 밝히는 독특한 서술체계를 세웠다.

《동의보감》 저술의 과학적측면에 대하여서는 부종에 대한 서술만 보아도 알수 있다.

《동의보감》이 나오기전까지 동방의학에서는 부종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었다.

《향약집성방》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와 중국의 의학책들에서는 신장(콩팥)성, 심장성, 악액질(몹시 여윈것)성 부종들의 구별이 없었고 원인이 서로 다른 여러가지 부종에 대한 리해들이 혼동되여있었다.

그러나 허준은 부종을 구분하면서 신장(콩팥)에 근원이 있는것, 천식이 동반되는것, 심장과 관련되는것 그리고 오랜 학질 또는 리질과 관련되는것 등으로 가르고 외적원인에 의한 부종은 상반신이 먼저 붓고 내적원인에 의한 부종은 하반신이 먼저 붓는다고 함으로써 부종의 형태를 과학적으로 밝혔다. 이와 같이 부종의 형태를 비교적 정확히 구분한것은 허준의 풍부한 치료경험과 세심한 관찰력을 생동하게 보여준다.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인체의 유기체로서의 전일성에 관한 견해도 명백히 하였다.

그는 침구편에서 침에 의한 자극은 국소적인 자극임에도 불구하고 놀란 사람, 목마른 사람들에게는 놓지 말라고 강조하였으며 외적원인과 내적원인으로 생긴 질병의 감별에서도 13가지의 감별증후를 제시하여 몸의 유기체를 전일적으로 보고 질병을 유기체의 각 장기와 기관의 호상련관속에서 진단치료할것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동의보감》은 우리 나라 전통의학을 과학리론적면에서나 실용적면에서 새로운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써 봉건시기 의학발전에서 절정을 이루게 하였다.

《동의보감》은 그 이후시기 전통의학발전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동의보감》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허준자신이 강조한바와 같이 한가닥의 줄기처럼 끊기지 않고 계승되여온 우리 나라 의학이 그 전통을 힘있게 이어갈수 있었다.

19세기말에 이르기까지 《의문보감》(1724년 주명선), 《급유방》(1749년 조정준), 《광제비급》(1790년 리경화), 《제중신편》(1799년 강명길), 《의종손익》(1868년 황도연) 등 《동의보감》을 본보기로 한 의학책들이 련속 출판되였고 허준의 의술을 본받아 수많은 명의들이 배출되였다.

 

양례수는 허준이 《동의보감》을 완성한 후 조용히 자기의 생을 돌이켜보았다. 물론 허준이처럼 인생의 고초는 없었다. 그만하면 얼음판에 박밀듯이 무난하게 걸어온 한생이였다. 허나 그의 운명엔 자신에 대한 긍지와 자부가 없었다. 그도 의원이고 허준도 의원이며 의술에서는 서로 버금을 다투었다. 허나 종착점은 현저한 차이를 가져왔다. 죽순이와의 문제도 그래 허준이와의 관계도 그래 또 의서문제도 그래 어느 하나도 양례수는 결과가 없었다. 부끄럽고 괴로왔다. 하여 양례수는 태의로서의 자기의 실패를 스스로 인정하며 내의원에서 사직할것을 청하였다.

양례수가 사임신청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허준은 그를 찾아갔다. 무슨 말을 할수 있으랴.

허준은 다만 양례수가 쓰던 의서에 대해 물으며 이런 말을 남기고 일어섰다.

《전 태의어른이 의술에 앞서 자기를 잊었으면 하오이다. 다시말해서 경보(양례수의 자)선생의 의술이 자기만을 위한것이 되지 않기 바라오이다. 의술은 인술이라 인술이 있어야 의술이 있는 법이지요.》

양례수는 그후에 근 13권 13책에 달하는 《의림촬요》라는 의서를 내놓았다. 그 의서가 허준을 압도하기 위해서 내놓은것인지는 몰라도 될수록 그가 때늦게나마 자기를 자책하고 의로운 일을 했다고 평가하고싶다.

 

나고야 겐이는 자기의 패배를 뼈아프게 절감하였다. 유구한 력사와 슬기로운 문화를 가진 이 민족을 이길수 없다는것을 나고야는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공기와 물이 맑고 은금보화 가득한 아름다운 나라였고 유구한 력사와 슬기로운 문화가 깃들어 더욱 신비로운 이 나라였다.

그러한 나라에 인재가 어찌 없으랴만 나고야는 후유꼬가 보낸 편지에서 허준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마도 이 편지는 후유꼬의 인생의 총화이자 나고야자신에 대한 평가라고 볼수 있지 않을가.

의서의 원고를 빼내려고 하다가 실패한 후유꼬가 정배지에 간 허준을 만나고 돌아와 자결하기 전에 썼다는 편지였다.

《나고야상. 당신을 어른이 아니라 이렇게 부르는데 대해 용서해주겠지요. 당신을 통해 세상물정에 눈이 트고 이성의 감정을 체험한 나 후유꼬로서는 달리는 부르고싶지 않군요.

난 방금 위리안치된 곳에 있는 허준을 만나고 왔어요. 비록 의서원고는 손에 넣지 못했으나 처참한 운명의 나락에 굴러떨어진 인간 허준을 굴복시키려고 갔던 이 후유꼬가 오히려 그앞에 손을 들고 무릎을 꿇고 왔어요.

헌데 이 시각 내가 불쾌하거나 좌절된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고 평온한것은 무엇때문일가요?

나고야상. 당신한테 모든것을 다 바친 후유꼬의 진심의 목소릴 한번 들어봐요.

우린 이 나라 사람들을 너무도 몰랐어요. 개중엔 서자라고 제 동생을 잡아먹는 허모와 같은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순진하고 정직하면서도 지혜롭고 강의해요.

난 허준이를 보면서 자기자신의 저렬감에 수치를 느껴요. 그의 안해라는 녀인앞에선 내가 마치 천한 촌기생처럼 여겨지고 내가 과연 녀성이 옳은가 하는 의문이 들어요.

뛰여난 미모와 정숙하고 세련된 몸가짐, 우아하고 부드러운 그 품격, 자기 남편의 일에 대한 열렬한 공감과 뜨거운 헌신, 녀성이라면 누구나 바라면서도 오르지 못할 아득한 높이에 다름아닌 허준의 안해가 서있지 않겠나요.

그런 녀인의 심장속에 있는 사내가 다름아닌 허준이예요.

난 부러워 죽겠어요, 나도 녀성인네 저런 녀인이 되고싶었고 저런 남편을 사랑하고싶었어요.

생각해보면 난 그렇게 될수 있었어요. 당신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운명이 달리될수 있었어요. 당신이 내 운명을 이렇게 만들어놓았지요.

생각만 해봐도 소름이 끼쳐요.…

허나 난 당신을 탓하지 않아요. 어쨌든 당신은 내가 녀성으로서 정조를 바친 첫 사내이고 또 내 운명의 석가여래이니깐요.

당신은 오산했어요. 이들의 피와 땀, 넋과 지혜가 깃든 의서를 훔쳐다 제 이름으로 내는것은 비렬한짓이예요.

설사 그렇게 해도 인정세태가 메마르고 남을 등쳐먹는데 이골이 난 우리 일본땅에서는 누구든지 속을수 있지요. 허나 이 나라의 넋과 기개는 훔칠수도 빼앗을수도 없지 않을가요?…

정배지에 갔다가 난 깜짝 놀랐어요. 생사를 기약할수 없는 그리고 딴 죄도 아니고 임금이 죽은 죄를 뒤집어쓰고 가시울타리를 친 찌그러져가는 초가집에 처박힌 허준이가 글쎄 거기에서 의서원고를 쓰고있었어요. 당신이나 난 의서를 훔칠 생각이나 했지 어떤 인간이 필사의 각오로 그 의서를 쓰는지 생각이나 해봤어요?

사실 큰 의서를 쓴다지만 역적으로 몰린 그의 운명이 가련해서 찾아가 한바탕 쾌재를 부르고 그리고 인생을 포기한 그의 입에서 패배자의 고백을 받아내고 의서원고를 가져오려고 갔던 이 후유꼬가 그런 불굴의 인간앞에, 자기의 목숨같은것은 안중에 없고 오직 의서만을 생각하는 그 숭고한 모습앞에 두손을 들었어요. 자존심도 체면도 다 잊고 말이예요.…

더는 날 찾지 마세요.

아마 이 편지를 받을 때면 후유꼬라는 녀인은 이 세상에 더는 없을거예요.

너무도 아름답고 순결한 이 나라 사람들앞에 엄청난 죄를 지은 이 후유꼬가 갈길은 과연 어델가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결심한 이 시각, 깨끗한 이 나라의 공기와 물, 산천에서 몸은 비록 죽어도 넋이라도 깨끗해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더없이 안정되고 평온해지는군요.

당신을 증오하면서도 인정하는건 그래도 당신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위하는 그 마음에 대한 공감일지도 모르지요. 그 나라를 위함이 다른 민족을 짓밟고 그 나라 사람들에겐 죄되는 일이긴 하지만…

당신은 자기의 패배를 스스로 인정해야 해요.

나 후유꼬의 마음에 당신이 영원히 깃들지 못한 련정의 패배자인것처럼 당신은 허준에게 아니, 이 나라에 패했어요.

당신의 영원한 명복을 빌어요.…》

나고야는 후유꼬를 자기의 화신으로 철석같이 믿고있었다.

말그대로 나고야 겐이이자 후유꼬였고 후유꼬이자 나고야 겐이였다. 그 후유꼬가 바로 나고야 겐이를 해부학적으로 분석하고 비난하고있었다. 비난이 아니라 사형선고를 내렸다고 해야 할것이였다.

병부에서 근 3년동안의 훈련을 거친 후유꼬가 허준의 의서따위를 훔쳐오는것은 문제로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나고야였다. 허나 《동의보감》과 같은 재보를 낳은 이 나라 사람들의 나라를 위한 마음과 블타는 넋은 나고야 겐이의 계책도 후유꼬의 간자로서의 우수한 기질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뿐만아니라 후유꼬가 나고야 겐이에게, 일본이라는 나라에 침을 뱉고 비렬한이라고 저주를 퍼붓게 했던것이다.

나고야 겐이는 쓰디쓴 고배잔을 련거퍼 들이켰다. 그만에야 술잔을 들어 땅바닥에 힘껏 내동댕이쳤다.

《망할 놈의 고마인, 쌍년같은 후유꼬!》

누구를 타매하는지 누구에게 분풀이하는지 나고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정신이 아찔해져 술잔이 깨여진 바닥에 코를 박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이후 나고야 겐이는 우리 나라에서 출판한 《동의보감》을 겨우 얻어 《탕액편》의 본초(고려약재)에 일본이름을 붙여 번역하여 《동의보감탕액화명》(2권 2책)을 출판하였으며 이어 《탕액편》의 향약이름을 일본문자로서 조선말발음대로 쓰고 일본말로 번역한 《동의보감탕약언자화해》(1책)를 출판하였다.

한편 나고야 겐이는 임진전란때 《의방류취》를 훔쳐온것은 그야말로 천하의 진귀한 보물을 날라온것이라는것을 다시금 깊이 절감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략탈해간 《의방류취》의 원간본에서 서문과 발문(뒤글), 간기와 같은 주요사항이 적힌 부분을 다 없애버려 그 책을 어느때 어데서 누가 어떻게 편찬하고 출판한 책인지 알수 없게 만들어놓고 왜나라 왕궁문서고인 궁내청-서릉부에 감추어놓은 간악한 왜놈들은 그후 제놈들이 도적질해간 우리의 민족문화재보인 《의방류취》를 우리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도구로 써먹었다.

1876년 2월 왜놈들은 강화도에서 조선봉건정부와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라는 불평등조약읕 체결하고 그해 8월에는 다시 이 조약의 부록과 통상장정이라는것을 조작하였다.

이때 왜놈들은 조선에는 이 책이 다 없어졌으니 그것을 가지고 가면 침략조약체결에 유리해질것이라고 타산하고 제 나라에서 목활자로 다시 찍은 《의방류취》를 일본군함 《아사마》호에 싣고와서 조선정부에 《기증》하였다.

그 원간본(금속활자로 찍은 원간본)은 아직도 일본 천황궁문서고에 감추어져있다.

그후 일본에서는 1663년 우리 나라에서 《동의보감》을 얻어다가 여러번 출판하였다.

1724년 일본학자 후지와라는 일본판의 《동의보감》의 머리글에서 《의학책은 그 리론이 명확하고 정밀하여야 의혹이 생기지 않고 인명에 도움을 줄수 있는데 <동의보감>이야말로 현재는 물론 후세에도 높이 찬양할만 하다. <동의보감>이 나옴으로써 의술발전에 걱정이 없어지게 되였다.》라고 찬양하였다.

또한 일본의 한 력사학자는 《〈동의보감〉은 동방의학의 유일한 백과전서로서 동방의서의 지도적지위를 차지하고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동의보감》은 그 편집력과 서술능력의 우수성으로 하여 동방의학의 보감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차지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귀중한 림상의학서로 되고있다.

조선사람의 저작으로서 이 책처럼 중국과 일본에서 널리 읽혀진 책은 아마 없을것이다.

중국에서는 1738년 중국사절단의 특별한 요청으로 이 책을 가져다 여러번 출판하였다.

1763년의 건륭판 《동의보감》의 머리글에는 《책의 이름을 보감이라고 한것은 마치 해빛이 조그마한 구멍으로 스며들어오기만 하여도 오랜 어둠이 당장 가셔지고 피부의 살금까지 환히 보이는것처럼 이 책을 펴보는 사람은 거울처럼 환히 알수 있기때문이다. 중국에서 첫 의학책이 나온 이후 지금까지 력대의 명의들이 쓴 저서가 소 한바리에 다 실을수 없고 집 한채에 채우고도 남지만 치료효과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러나 〈동의보감〉은 지금까지 나온 의학책들의 부족점을 보충하고 누구나 건강을 유지하게 하였으니 이 책을 인쇄하여 널리 보급하는것은 천하의 보물을 온 천하사람들과 나누는것으로 된다.》고 극구 찬양하였다.

중국의학대사전에는 《동의보감》에 대하여 《체계가 정연하고 내용이 풍부하여 의학계의 거대한 존재》라고 하였으며 쏘련의학대백과사전에서도 이 책을 동방의학의 3대 백과사전의 하나로 꼽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동의보감》을 1814년과 1874년 등 여러차례에 걸쳐 다시 출판하였다.

 

불타는 넋과 애국의 뜻을 지니고 한생을 명실공히 진정한 의학을 위해 심장을 뜨겁게 태우던 허준은 최후의 림종을 앞두고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불렀다. 설유와 딸 예영이, 기동이와 박응규, 선복이가 눈물을 머금고 허준을 지켜보고있었다.

이 시각 허준은 림종을 앞두고 화담 서경덕이 했다는 말을 새겨보고있었다.

《삶과 죽음의 리치를 이미 안지 오래니 마음이 편안하고 배워서 의심이 없는데 이르렀으니 참으로 쾌활함을 느끼였고 일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니 마음이 참 편안하구나!》

가물거리는 의식속에서 허준은 속으로 되뇌이였다.

(그렇지, 그래. 일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으니 정말 내 마음이 편안하구나.)

허준은 전신의 힘을 다하여 또박또박 그루를 박으며 이런 말을 남기였다.

《부디 이 땅을 귀중히 여기여다오. 그리구 이 땅을 위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한가지라도 남길줄 아는 사람이 참사람이…》

설유와 예영, 기동이와 응규, 선복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허준은 그들 한사람한사람을 일별해보고나서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내밀었다.

《여보!… 그 손을… 한번… 잡아보기요.…》

설유가 부드러운 자기의 손으로 허준의 싸늘한 손을 꼭 쥐였다. 허준은 가물거리는 의식속에서 설유의 그윽한 눈을 바라보면서 웃으려고 애썼다. 하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 세상의 모든 행복을 다 차지한듯 한 그런 미소가 어려있었다.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Google+로 보내기
evernote로 보내기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mypeople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