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 회)

제 5 장  의서도적놈들

6

 

이날밤부터 허모는 짐승으로 화하고말았다. 하긴 이미전부터 인간 아닌 짐승이였다.

확실히 수미에게는 허모가 지금까지 상대한 녀자들과는 다른 마술과 같은 특유한 매력이 있었다. 수미의 미색에 넋을 잃은 허모는 해가 서쪽에서 뜨는지 동쪽에서 뜨는지 알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빠져들고말았다. 이제는 수미가 소금섬을 강녘으로 끌라고 해도 끌판이였다.

바로 나고야 겐이와 후유꼬가 바라던것이였다. 허모는 그 어떤 마수의 독침이 자기의 몸뚱아리는 물론 정신까지 야금야금 침범하는지도 인식 못하고 거미줄에 제발로 날아들었다. 보이지 않는 독거미줄에 허모의 육체와 정신은 더는 빠져나올수 없을 정도로 칭칭 감기고있었다.

소금물에 푹 절구어진 시래기와 같은 허모를 수미는 마음내키는대로 다루었다. 허나 아직은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남정의 품을 그리워하는 고독한 녀인으로만 둔갑하고있었다.

서너달이 지났다. 처음엔 날자를 약속하여 수미를 이곳으로 끌고오던 허모는 아예 수미를 자기의 별장으로 옮겨놓았다. 괜히 시끄럽게 시간약속이요, 뭐요 하는것이 불편하였다. 정작 옮겨놓으니 생각나면 아무때나 찾아와 재미를 보아 좋았다.

《나리, 소녀가 제일 좋아하는것이 뭔지 알아맞춰보세요.》

수미가 자기의 볼록한 젖가슴을 허모의 여윈 몸에 갖다붙이며 물었다.

풀어진 실눈으로 싫도록 주무른 수미의 몸뚱아리를 아직도 성차지 않은지 걸탐스레 바라보며 허모가 껄껄 웃어댔다.

《그거야 물어보나마나 뻔하지. 바로 이거겠지.》

수미가 허모의 다리를 밀어치우며 앙탈을 부렸다.

《아야, 다 늙어 기운도 없어가지구 속은 살아서… 기껏 한다는 대답이 추잡한 그 말뿐인가요?》

《됐어! 내 한마디 롱한건데 그렇게까지 성날거야 있나. 그렇다면 제일 좋아하는것이 뭐냐? 참, 궁금하구나. 네가 좋아하는거라면 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네앞에 당장 가져다놓지.》

《정말?!》

《장부일언중천금이라 사내가 한입 가지구 두말 하겠냐.》

《그렇다면 약속했어요. 소녀가 제일 좋아하는건 의술이야요.》

허모는 너무 어이가 없어 벌떡 일어나앉았다.

《뭐, 의술?! 네가 의술을 좋아한다는건 무슨 소리냐? 네 미모와 재간이면 어련히 팔자를 고치지 않을라구. 의술이라는게야 쟁인바치나 다름없는 천한 일인데 경국지색의 용모를 타고났겠다, 또 남정들이 괴춤을 추슬리며 따라다니겠다, 뭐가 모자라 병자들을 치료하는 그런 속된 일을 좋아한단 말이냐?》

《그래도 난 꼭 의술을 배워 나라안의 첫 손가락에 꼽히는 명의가 되고파요.》

수미의 태도는 자못 진지하였다. 그 모습을 보느라니 허모는 그 말이 꾸며낸 말이 아니라는것이 직감되였다.

《그래서 나리에게 한가지 청이 있사와요.》

《뭐냐?》

《의서를 좀 구해주었으면 해요. 의서를 봐야 의술이 늘수 있지 않나요. 그렇다구 녀자의 몸으로 의술을 배워달라구 찾아다닐수 없구 해서 나리에게 청을 드리는거예요.》

허모는 구해주마 하고 선선히 대답하였다.

며칠후 허모가 의서를 가져다주니 수미가 여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부터 부지런히 의서를 읽기 시작하는 수미를 보며 허모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암만 생각해봐도 저렇게 요염한 색녀가 의술을 좋아한다는것이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였던것이다.

열사나흘 지난 다음 수미가 의서를 다 읽었다면서 이렇게 물었다.

《나리! 나라안에서 제일 의술이 높은 사람은 임금의 병을 보아주는 어의라지요?》

《엉?!》

어의라는 소리가 나오면 입안이 소태씹은듯 쓰거워지는 허모이다.

《지금의 어의는 허준이라는 사람이라 하던데 그가 뭐 요란한 의서를 쓴다는게 사실인가요?》

허모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수미의 새빨간 입술을 쳐다보았다.

이 수미는 대체 어떤 년인가 하는 의문이 불쑥 뇌리를 쳤다. 의술을 좋아한다고 할 때는 별난 취미도 있구나 하면서도 그럴수 있다고 범상히 생각했는데 그 입에서 어의요 뭐요 하더니 이제는 허준의 이름이 튀여나오니 어안이 벙벙해졌다.

절색의 미모를 가진 수미라는 이 녀인은 과연 의술의 광신자인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어느새 허모의 속내를 꿰들었는지 수미가 칭얼대는 어린애마냥 허모의 무릎을 흔들며 응석기어린 투로 뒤말을 이었다.

《음- 그 얼굴 보기 싫다!- 난 나리의 그런 인상이 딱 질색이예요. 무슨 큰일이나 난듯이 오만상을 찌프리는게 미인앞에서의 사내의 장점인가? 그렇게 얼굴을 찌프리지 말라요. 하도 의술을 좋아하니깐 그런 소리가 내 귀에 들려온건데…》

허모는 허거프게 웃으며 수미의 새침해진 얼굴을 손가락으로 튕겨주었다.

정말 이 수미라는 계집은 사내를 다루는 솜씨가 여간 아니였다. 불쑥 리해수앞에서도 이렇게 애교를 부렸겠지 하는 생각이 느닷없이 갈마들어 허모는 수미의 얼굴을 다시금 찬찬히 눈여겨보았다.

《이자 보니 내 귀염둥이의 귀가 여간 넓지 않구나. 허준이 어의이고 또 그가 의서를 쓴다는것까지 다 알고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허준이가 의서를 쓰는게 너와 무슨 상관이 있어 묻느냐?》

수미가 허모의 무릎우에 고양이가 부뚜막에 올라앉듯이 난딱 올라앉으며 눈을 흘겼다.

《그 허준이라는 어의가 쓰는 의서를 보고싶어서 그래요.》

《뭐? 네가 여간 어벌이 크지 않구나. 그 의서를 봐선 어쩐다는거냐?》

《나리두 참, 뻔한걸 물으시네. 요먼저 말하지 않았나요. 의서를 보면 의술을 더 빨리 익힐수 있다구요. 나라안에서 으뜸가는 명의가 쓴다니 그 책은 필경 훌륭한 의서임이 틀림없을거예요.》

의술을 좋아한다던 수미의 말이 틀림없다고 믿어져 허모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허모의 눈치를 살피던 수미가 그의 얼굴에 자기의 뺨을 살며시 비벼댔다.

《내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지요? 듣자니 임진년 참사때 왜놈들이 한성의 왕궁서재에서 〈의방류취〉를 훔쳐 일본으로 날라갔다고 하던데 왜놈들이 왜 그리했겠나요. 그건 의서가 그만큼 가치가 있기때문이예요. 그런 의서는 말그대로 나라의 재보중의 재보로 된다 그 말씀이지요.》

천연스레 모르쇠하고 말을 엮어나가는 수미의 얼굴을 얼나간듯 훔쳐보며 허모는 수미가 결코 사내품이 그리워 자기를 찾아온 녀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분명 이 녀인은 나에게 무엇인가 암시를 하고있었다. 순간 번개치듯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가만, 가만있자!)

그렇다. 허준이 지금 쓰고있는 의서도 결국은 나라의 재보로 될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허모는 여직껏 허준에 대한 모해와 복수만을 생각하였다. 서얼이라는 신분적차이로 오는 모멸감과 굴욕감을 그가 고통스럽게 감수하고 지지리 짓밟혀 인생 그자체가 고통스럽고 환멸스럽도록 하려고 갖은 계책을 꾸며온 자기였다.

그러고보면 허준이가 자기자신의 운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며 온갖 심혈을 짜내여 쓰고있는것이 바로 의서였다. 그가 왜 그렇듯 의서에 미쳐돌아가는가? 그것은 의서가 다름아닌 나라의 재보로, 국보로 되기때문이였다. 다른 놈들같으면 서얼출신이라고 과거장에서 모욕이란 모욕을 다 받으며 쫓겨났으면 인생을 포기하기가 일쑤인데 저 허준이놈은 쓰러지지 않았다. 얼마나 지독한지 제 에미인 려월의 삼년상을 채 치르지도 못하고 한성으로 올라왔고 내가 머리를 짜내여 옥에 처넣었건만 화를 복으로 전환시켜 오늘은 만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임금의 주치의까지 되였다.

전란때에는 난 살구멍을 찾아 절간을 찾아다닐 때 저놈은 임금을 따라 편안히 의주까지 갔다 고스란히 돌아왔고 오늘은 또 의서를 쓴다고 돌아치고있다. 결국 허준이놈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뜻이 있고 의지가 강하였다. 죽으나사나 저놈을 딛고 올라서려면 그놈이 제일 아파하는것을 쑤셔놓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허준이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인다는 의서가 아니겠는가?! 그것만 없애버리면 허준이놈은 아마 미쳐서 길길이 날뛰다가 비명에 횡사할것이다.

물론 허모도 《의방류취》와 같은 의서들은 국보이며 앞으로 허준의 손에서 태여나게 될 의서도 그에 못지 않는 국보적인 의서로 되리라는것을 예감하고있었다. 그러나 허모에게 있어서는 국보라는 인식보다도 허준에 대한 증오심이 더 급선무였다. 국보를 말살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허준을 매장할수만 있다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을 복수심과 야심이 가슴속에서 독구렝이마냥 꿈틀거렸다. 한편 이는 허준모자에 대한 원한을 안고 비명에 죽은 어머니 오매의 복수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근간에 와서 허준이 임금으로부터 호성공신(3품벼슬)이라는 칭호를 하사받지 않았는가. 선조는 1604년에 그간 허준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호성공신이라는 칭호를 하사하면서 《어의가 있어 나라의 사직이 보존되도다!》고 문무대신들앞에서 칭찬까지 하였다. 그자리에 모인 대신들이 뻐꾹소리 한마디 못하고 돌아와서는 저들끼리 수군거렸다고 한다.

《어의로서 공신으로 떠오른 전례가 없는데 허준은 과연 복이 있소.》

그쯤이면 그닥 신경쓸것이 없는데 뒤말이 목에 걸린 물고기가시처럼 허모를 자극하였다.

《헌데 어의가 사헌부의 그 눈이 빼대대한 감찰의 이복동생이라더군. 감찰인지 하는 녀석은 적자인데 서자인 제 동생한테 밀려서 아직도 6품관이라지 않수.》

《그 감찰인지 하는 녀석은 계집에만 혹하는 색골이라더군. 서얼인 자기 동생의 발꿈치에도 못 간다니 우리 량반들의 망신을 다 시키는군. 그래서 리해수대사헌두 그놈을 가까이했다가 나중엔 돌아서서 방귀도 안뀌였다더군. 그걸 보면 박근원이 사람을 볼줄 모르거든.》

중구난방으로 줴치는 이런 뛰뛰한 소리는 가뜩이나 밸이 꼴려 앙앙불락하는 허모의 심기에 부채질을 더해주었다. 계속 이러다간 복수는 고사하고 살아 숨도 제대로 쉴것 같지 못했다. 기회가 오면 언젠가는 허준을 매장시킬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인내성있게 기다리던 허모로서는 망망대해에 뿌려진것처럼 앞일이 캄캄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수미가 생각지 않게 허모에게 살길을 열어준것이였다. 아릿답고 요염하기 그지없는 수미는 참말로 허모에게 있어서 여의주나 같은 존재였다. 싱싱하고 젖빛같은 그 몸뚱아리에 미친듯이 취하게 하더니 지금은 앓던 어금이를 뽑을수 있게 방책을 알려준다. 어찌보면 수미라는 이 계집은 나-허모와 필연적으로 련결된 천상연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허모의 손이 수미의 불룩한 젖가슴을 더듬었다.

《내 너한테는 꼼짝 못하겠구나. 그래, 그 의서가 필요하단 말이지?》

수미가 허모의 가슴팍을 파고들며 속삭였다.

《그래요. 나에겐 그 의서가 절실히 필요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의서는 내 손에 꼭 들어와야 해요.》

말을 맺는 수미의 눈에 서늘한 독기가 풍기건만 독사에게 물린 허모는 전혀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내 너를 위해 힘써보지.》 ·

어느덧 허모의 몸과 수미의 몸이 한동아리가 되였다. 허준의 의서를 훔쳐서 그를 꺼꾸러뜨리려는 허모의 앙심과 이 나라의 국보를 훔쳐서 일본으로 빼가려는 원쑤의 흉계가 하나로 융합되였다. 다음날 허모는 완칠이와 심복부하 두명을 불러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

《넌 오늘부터 허준의 집을 주야로 감시하라! 그러다가 그의 녀편네나 딸년이 저자에 나가 집을 비우면 지체하지 말고 수단껏 그 집에 슴새들어가거라. 틀림없이 의서의 원고는 방안의 탁자우에 놓여있을게다. 너희들의 임무는 그 원고를 손에 넣는거다.

명심하거라. 너희 둘중의 한명은 밖에서 망을 보고 한명은 대문안에서 꼭 망을 봐야 한다는걸 말이야. 그 기회에 완칠이가 의서를 손에 넣어야 한다. 절대로 남의 눈에 띄여서는 안된다. 알겠냐?》

《알겠소이다.》

완칠이와 함께 행동하는 이 두사람은 허모의 손탁에서 놀아대는 망종들이였다. 사헌부 감찰인 허모가 후날을 위해 놓아준 범죄자들이였다. 두놈이 다 아전나부랭이였다. 한놈은 멋대가리없이 키가 꺽두룩하고 장작개비처럼 바싹 말랐는데 재물이 탐나 자기 주인의 가산을 훔쳐가지고 달아나다 잡힌 놈이다. 다른 한놈은 얼마나 술을 처마셨는지 코가 새빨갛게 주독이 올라있는데 강간죄로 잡혀왔던 놈팽이였다. 말라꽹이와 주독코는 어데서 배웠는지 둘다 손발을 괜찮게 놀렸으며 날쌔고 머리도 팽팽 돌았다.

허모는 두 놈팽이들에게 각각 스무냥을 던져주며 실수말것을 신신당부하였다. 완칠에게는 이미전에 별도로 쉰냥을 안겨주었다. 원체 이런 일에 솜씨가 있고 날랜 놈들인지라 사흘만에 어렵지 않게 임무를 수행하였다.

탁자우에 놓인 두툼한 원고뭉테기를 보며 허모는 흡족해하였다.

그의 머리속에는 원고뭉치를 잃어버리고 머리를 쥐여뜯으며 락심천만해있을 허준의 모습이 생동하게 안겨왔다. 그리고 그옆에는 설유가 가슴을 쥐여뜯으며 슬퍼하는 모양이 떠올랐다.

정녕 삼복철에 얼음물을 마신듯이 가슴이 시원하고 기분이 붕 떠올랐다. 그와 함께 자기의 목에 매달려 좋아할 아무리 보아도 싫지 않은 수미의 흰 육체가 얼른거렸다.

(이런걸 보구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라 하던가. 이게 바루 꿩먹구 알먹구 둥지털어 불을 때는 격이렷다! 허준이 이놈! 네놈이 아무렴 날 이길가. 어림없다!)

저녁에 수미가 거처하고있는 별장에 들어서는 허모는 양지마당의 수닭마냥 여드레팔자걸음을 하며 뜨락에서부터 길게 목소리를 뽑았다.

《어험! 우리 미인이 어데 갔나?》

목소리를 듣고 수미가 반색을 하며 마중했다.

《어찌 된 일이실가? 늘 우거지상을 하던 우리 나리님의 기분이 퍽 좋아지셨다? 어데 가서 과부와 한바탕 놀고왔나?》

《에끼, 고약한 년! 과부는 무슨 과부? 그저 만나면 날 놀려댄다니까. 자, 내가 뭘 가지고왔나 좀 보렴.》

허모는 손에 든 원고뭉치를 흔들었다.

《자, 네가 그리도 갖고싶어하던 허준의 의서원고야!》

《아니, 정말이시와요?》

수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원고를 그러안은 수미가 정신나간듯 종이장을 한장두장 펼쳐보았다. 마지막장까지 다 뒤적이던 수미가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 매몰찬 기운이 새까만 두눈에 서렸다.

《이건 원고가 아니야!》

그러더니 머리를 싸쥐였다. 영문을 알길없어 허모가 그 모습을 얼나간듯 바라보았다.

《왜 그러느냐?》 .

《이건 원고가 아니예요!》

《뭐라구? 원고가 아니라니, 그건 웬말이냐? 분명 우리 애들이 담을 넘어 들어가 허준의 탁자우에서 훔쳐온것인데 그럴수가 있나? 어디 내가 좀 보자!》

허모는 미친년 달래캐듯 벌컥벌컥 원고를 뒤져보았다. 원고가 아니라 의서를 쓰려고 모아놓은 토막자료들이였다. 그것도 저들만이 알아볼수 있는 기호와 표식같은것이 태반이여서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무슨 병을 어떻게 치료했다는건지 알아볼 재간이 없었다. 허모는 털썩 방바닥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였다. 애써 품들여 했다는노릇이 이 모양이니 손맥이 풀리고 허거프기 그지없었다. 수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수그리며 한숨을 내쉬는 허모를 쏘아보았다.

(수개같은 자식! 그저 계집질이나 할줄 알았지 원고도 가려 못 봐.)

허나 애써 참았다. 아직 허모는 써먹을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참, 나리는 그 허준이라는 어의와 이복형제간이라지요? 차라리 나리가 그 집에 직접 가서 의서원고를 빼옴이 어떠하오이까?》

죄지은 놈처럼 머리를 푹 수그리고있던 허모는 제 방귀에 놀란 노루마냥 후닥닥 뛰쳐일어나며 소리쳤다.

《내가 그 집에 간단 말이야? 어림없는 소리! 아니, 그런데 네가 그걸 어떻게 다 아느냐? 내가 너한테 그런 말을 해준것 같지 않은데…》

수미가 흥- 하고 코방귀를 뀌며 돌아섰다. 매몰찬 목소리가 그 입에서 되알지게 튀여나왔다.

《정말 눈감고 아웅할래요? 내가 모를줄 알아요? 형은 당당한 량반출신의 적자인데도 고작해야 감찰벼슬이고 동생은 천한 서자인데도 당당한 왕궁의 어의라는 소문이 이 한성바닥에 짜한데 내가 왜 그걸 모르겠나요? 그 말을 하면 나리가 괴로와한다는걸 아는데 구태여 남의 아픈 상처를 끄집어내선 뭘 하랴 하는 생각에 여직껏 아는 흉내를 안 냈어요. 보다싶이 난 그렇게 모진 녀자가 못돼요. 오늘 이렇게 말하는것은 어머니가 다르지만 그래도 형제지간이니 의서를 구하는데 리로울가 해서 그랬어요. 헌데 나리가 덴겁해하시니 괜히 말을 꺼냈다는 후회가 들어요.》

허모는 되알진 목소리로 청산류수마냥 말을 둘러치는 수미의 그 림기응변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수미가 평범한 녀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이날밤 허모와 수미는 어떻게 하면 허준의 의서원고를 훔쳐내오겠는가 머리를 맞대고 꿍꿍이를 하였다. 두 도적들은 허준이 이미 집필한 원고가 있을것이니 그거라도 몰래 훔쳐내오기로 의론이 합치되였으나 별다른 계책은 짜내지 못하였다.

이날 오후 저자에 나갔다가 방문을 열고 들어선 설유는 탁자우에 무둑히 쌓였던 자료뭉테기가 없어진것을 띄여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여기에 놓여있던 자료들이 다 어데 갔을가?)

행여나 하여 방안의 구석구석을 뒤져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다만 탁자밑에 떨어진 자료의 쪼박종이들이 몇장 있을뿐이였다.

저녁이 되여 집으로 돌아와 설유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허준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의 머리속에 제일먼저 떠오른것은 태의 양례수와 그밑에서 맴도는 함치우의 얼굴이였다. 어의로 등용되리라 믿었다가 허준이한테 밀려난 양례수는 때없이 허준이를 괴롭히는 존재였다. 길에서 마주치면 반가운양 하지만 가느스름하게 쪼프린 그 눈에는 분간할길 없는 적의와 질시가 다분히 내포되여있다. 더구나 의서편찬국의 일이 흐지부지되여 허준이가 단독으로 의서를 집필한다는것을 안 다음부터는 너 잘한다, 어디 한번 실컷 해봐라, 네까짓놈이 혼자서 어떻게 거질의 의서를 만든단말이냐 하는 식으로 치떠보고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양례수가 허준이 어의가 되고 의술로 명성이 난것을 배아파하겠지만 이렇게까지 치졸하게 남이 한창 쓰는 원고의 자료까지 없애치운다는게 도무지 믿을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다른 사람이 또 의서집필을 달가와하지 않는다는것인데 그가 과연 누구일가, 무엇때문에 그러는것일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허준은 착잡한 생각을 털어버리며 성급하게 물었다.

《그래, 의서의 원고는 제대로 있소?》

《장농밑에 그냥 있어요.》

허준은 온몸이 오싹해왔다. 만일 오늘 의서를 훔치러 들어왔던 놈이 장농까지 뒤져보았다면 어떻게 될번 했겠는가.

생각만 해도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고 오한이 나듯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

만일 의서의 원고가 없어졌더라면 허모가 예견한바대로 허준은 즉시 그 자리에 졸도했을것이다. 전신의 힘과 지혜를 다 바쳐 한자한자 쪼아박은 의서였다. 자기의 뜻과 넋이 고스란히 깃들어있는 의서였다. 정녕 의서는 허준의 삶의 전부였고 어찌보면 허준- 자신이기도 하였다. 그런 원고를 잃을번 하다니?! 온몸을 우들우들 떨며 허준이 호령조로 말하였다.

《어서 그 원고를 꺼내오!》

《념려마세요. 아까 들어와서 원고가 다 있는가 하는것부터 확인했어요.》

《그래두 꺼내오. 이 두눈으로 직접 봐야겠소!》

남편의 심중을 잘 아는 설유였다. 오죽하면 저러랴 하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설유는 얼나간 사람마냥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방안에 우두커니 서있는 남편앞에 원고를 조용히 내보였다. 여섯권의 두툼한 원고가 허준의 앞에 놓였다. 《내경편》 네권과 《외형편》 두권이였다.

원고꾸레미를 쓸고 또 쓸어만지는 허준의 눈에 섬광이 번뜩이였다.

《안되겠소! 오늘은 자료를 훔쳐갔지만 래일엔 이 원고를 훔치자고 접어들거요. 그땐 이 장농안도 믿음성이 없소.》

《옳아요. 내 생각에는 단지에 싸넣어 밖에 파묻는게 좋을가 해요.》

《음- 그게 좋겠소. 이제 당장 그렇게 하기요!》

옆에서 부모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예영이가 얼른 부엌에서 오지단지를 가지고 들어왔다.

허준과 설유, 예영이는 이제까지 완성한 《동의보감》의 원고를 기름종이로 정성껏 싸서 차곡차곡 오지항아리속에 넣었다. 그리고 웃뚜껑을 덮고 다시금 몇겹의 기름종이로 정히 봉한 다음 뒤울안에 감쪽같이 묻고 그자리를 머리속에 새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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