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 회)

제 4 장  왕실의 어의

3

 

죽순이를 만나고 온 뒤로부터 허준은 말없는 사람이 되고말았다.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그의 머리에 지배하고있었으니 그것은 류이태의 몫까지 그리고 죽순이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의서를 남기는것이 그의 생의 목표였다. 그러면서도 때없이 부지불식간에 죽순에 대한 생각에 잠기군 하였다.

남편의 거동에 민감한 설유가 갑작스레 말이 적어지고 때없이 멍청히 앉아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 허준이 이상하여 그 까닭을 조용히 물었다.

허준은 내키지 않지만 죽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설유는 너무도 가슴이 아파 온밤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니 선복이 어머니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나요? 난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사람이 어떻게 그런짓을 할수 있을가요? 한 녀인의 운명을 그렇게도 무참히 짓밟고도 뻔뻔스레 얼굴을 쳐들고 다닐수 있을가요?》

마치 제가 당한 운명이기라도 한듯 설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분해하였다.

《사람이 저밖에 모르면 또 량심을 잃으면 그런 인간아닌 인간이 되는게지… 선생님을 좀 보오. 난 선생님의 한생을 생각할 때면 눈물이 나오는것을 어쩔수 없구려. 부모없는 당신을 친자식이상으로 키우신 선생님이야말로 참인간중의 참인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스스로 머리가 숙어지고 그런 선생님의 말년이나마 행복하게 해드리고싶소.》

설유가 한참 생각하더니 조용히 말을 꺼냈다.

《저, 이제라도 아버님과 선복이 어머님을 함께 모여살게 할수 없을가요?》

허준은 머리를 번쩍 들었다.

《이자 뭐라고 했소?》

《아버님과 죽순의원이 다시 모여살면 안되겠나요?》

허준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쳤다. 그가 흥분할 때면 하는 습관이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가? 당장 아버님을 데려오기요.》

설유가 머리를 내저었다.

《아버님은 그곳을 뜨지 않으실거예요. 전 아버님의 성밀 잘 알거든요. 차라리 선복이 어머니를 내려보내면 좋지 않을가요?》

《선복이 어머니가 내려가겠다고 할가?》

《왜요? 고향이 산음이 아닌가요. 그리고 부모님들의 분묘도 그곳에 있지 않나요.》

죽순의 어머니는 몇년전에 세상을 떠나셨고 그의 언니들은 다 출가하여 그곳엔 한명도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류이태가 죽순의 부모들의 성묘를 하군 하였다.

설유의 말이 옳다. 이제라도 두사람이 가정을 이루면 남은 여생이나마 길복스러운 생활을 할수 있지 않겠는가.

그길로 허준은 설유와 함께 죽순의 집으로 향하였다.

모든것을 체념하고 병석에 누워있던 죽순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허나 선뜻 용단을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장장 25년간 오직 마음속에 그 한사람만을 간직했던 녀인이 정작 상봉과 해후의 기회가 앞에 놓이자 순식간에 마음이 돌변한듯 한사코 반대하니 허준과 설유는 어안이 벙벙해질수밖에 없었다. 일단 결심하고 온 이상 허준은 순순히 물러설수 없었다.

《선복이 어머니! 제 선복의 오빠로서 재삼 권고하는데 너무 외곬으로 생각지 마시고 산음으로 내려가십시다. 전 선생님의 말년이 선복이 어머니가 옆에 있음으로 하여 행복해지리라 믿고싶소이다.》

결사코 반대하던 죽순이 그 말에야 허준이 앞에 넙적 엎드리며 슬피 울기 시작하였다. 허나 그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쓰러져가는 자기의 생명에 희망과 넋을 안겨준 인간 허준에 대한 고마움과 격정의 눈물이였다.

며칠후 허준은 설유와 함께 죽순이, 선복의 부부와 함께 산음으로 다시 떠났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치료를 하고있던 류이태는 불시에 한성에서 밀려내려온 허준의 일행을 보고 웬일인가 해서 의아함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다가 일행속에 끼여있는 죽순이를 보는 순간 모든 진상을 알아차렸다.

《류선생님!》

《이 누군가, 죽순이 아니요?》

《한성에서 산음까지 하루길이면 되는 길을 이 못난 죽순이 스물다섯해만에 왔소이다.  절 용서하사… 속죄의 마음담아 죽순이 큰절을 올리나이다.-》

소복차림의 죽순이 땅에 손을 짚고 오열을 터뜨렸다. 류이태가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죽순의 동실한 어깨를 안아일으켰다.

《이렇게 올 길을 왜 이제사 왔소? 그 복스럽던 용모는 어데 두고 반백이 되였구려. 이렇게 돌아왔는데 용서는 무슨 용서… 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소.》

모여섰던 사람들이 눈물이 글썽해서 두사람의 상봉을 지켜보았다. 한참후에 선복이 류이태에게 소곳이 인사를 하였다. 죽순이 입가에 엷은 웃음을 지으며 소개하였다.

《선복이오이다.》

류이태가 인사를 하고 일어서는 선복을 와락 그러안았다.

《네가 내 딸이구나. 이렇게 다 크도록… 네 에미는 그렇다쳐도 너라도 이 애비를 찾아오면 못 쓴다더냐. 선복아-》

《아버지!》

난생처음으로 선복의 입에서 아버지라는 부름이 나왔다. 꿈속에서라도 부르고싶던 아버지라는 부름이였다. 나서 스물다섯해만에 선복은 아버지를 찾았던것이다.

《아버지!-》

《오, 내 딸아!》

선복의 뒤에 섰던 다섯살난 그의 아들애가 《할아버지-》 하며 찾았다. 류이태가 돌아서더니 그애를 번쩍 추켜안아들었다.

《네가 내 외손자로구나. 외손녀밖에 없던 집에 이런 잘난 외손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어. 하하!》

류이태가 애를 안고 빙빙 돌아가자 온 뜨락이 웃음바다로 번져졌다.

며칠후 허준은 설유와 선복이부부와 함께 간소하게나마 상을 차리고 그앞에 류이태와 죽순을 나란히 앉혀놓았다. 세상에 보기 드문, 있어보지 못한 혼례상이였다.

쉰고개에 들어선 류이태와 마흔댓에 난 죽순이의 잔치상이였다. 두사람을 바라보는 허준의 눈에 맑은 눈물이 고여있었다. 비록 애젊은 청춘남녀의 잔치상은 아니였다. 허나 이 잔치상에 마주앉을 때까지 두사람이 걸어온 인생길은 얼마나 고심참담했던가. 허나 두사람은 서로 만났다. 티없이 순결하고 사심없는 진정과 애오라지 서로를 그리는 마음은 세월의 년륜으로도 가셔낼수 없었으며 그들을 늙게 할수 없었다. 진실한 사랑은 세월을 모른다. 비록 우여곡절은 있었어도 죽순은 사랑하는 님의 품으로 돌아왔던것이다.

먼저 허준이와 설유가 예영이를 데리고 류이태와 죽순에게 꿇어앉아 절을 하고 축배잔을 올렸다. 잔을 든 허준의 손이 격정으로 세차게 떨렸다. 가슴속에 끓고있는 격정을 애써 누르며 허준이 입을 열었다.

《오늘 류이태선생님과 죽순의원님이 가정을 이루니 이 심정을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의학의 길로 떠밀어준 죽순의원님! 그리고 저에게 의술을 배워주신 류이태선생님! 전 긴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부디 행복하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자식들도 선생님들같은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도록 언제나 채찍질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다음엔 설유가 말을 받았다. 벌써부터 설유의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 흐르고있다.

《악착한 왜놈들에게 부모를 다 잃은 저를 데려다가 친자식보다 더 품들여 키워주신 아버님!  이렇게 다 자라도록 아버님께 효도를 다하지 못한 절 용서해주세요. 너무도 젊으신 나이에 홀로 사시면서도 내색 한번 하지 않으신 아버님께 이 딸이 머리숙여 용서를 비오이다. 아버님도 사내이고 인간인데 어찌… 흑! 지금 생각해보면 왜 아버님이 깊은 한밤중이면 잠들지 못하시고 먼 북녘하늘가를 바라보셨는지 이제야 리해되오이다. 아버님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사람, 죽순어머님이 계셨습니다.

어머니! 우리 아버님을 행복하게 해주사이다.… 먼저 떠나간 저의 친부모님들을 대신하여 어머님께 고마움의 인사를 올리나이다.》

류이태와 죽순이 눈물속에 축배잔을 받아들었다. 좌중은 눈물과 격정으로 설레였다.

선복이부부가 어린 아들애를 데리고 나섰다. 부부를 대신하여 선복이 말을 하는데 흥분으로 해서 그의 말소린 도중도중 막히군 하였다.

《스물다섯해만에 전 아버지라는 말을 처음 해보았소이다. 아버지! 어머니! 제 심정을 무엇이라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어머니에게도 이런 행복하고 기쁜 날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그저 허준오라버님이랑 설유형님이 고맙기만 하오이다. 그리고 전 우리 어머니에게 이런 훌륭한 아버님이 계신줄 몰랐소이다.

 아버지, 어머니! 부디 오래오래 건강한 몸으로 행복하시길 이 딸은 간절히 비나이다.》

죽순이가 허준의 손을 꼭 부여잡고 류이태를 돌아보며 갈린 목소리로 말하였다.

《류선생님! 난 이 사람앞에 한생 갚아도 못 갚을 빚을 진 사람이예요. 이런 제자를 둔 선생님이 부러워죽겠어요. 의술이나 그 학문적깊이는 둘째치고라도 그 인간적풍모에 난 반했어요. 남들같으면 일어서기는커녕 진탕속에 묻혀버렸을 그 처지에서 애오라지 의술을 배워 명의가 되고 의서를 집필하겠다고 나섰을 때 난 이사람을 의심했댔지요.…

이 사람이 날더러 저를 오늘에로 떠밀어준 은인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이 사람이야말로 내 운명을 건져준 은인이 아니겠나요.》

너무도 면구스러워 허준은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그 모양을 보는 설유가 웃음을 지으며 죽순의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

《어머니, 그러다간 예영이 아버지가 쥐구멍에 들어가고말겠어요.》

허준은 게면쩍은 웃음을 띠우며 죽순이를 마주보았다.

《제가 무슨 은인이겠나이까. 저를 오늘로 이끌어준 아버님의 덕이옵니다.》

류이태가 감개무량한듯 느긋한 웃음을 입가에 떠올리며 허준을 옹색한 처지에서 구원해주었다.

《그건 임자가 앞으로 꼭 뜻을 성취하라 그 소릴세. 그러니 이젠 우리 일은 마음을 푹 놓고 의서집필에 심혼을 쏟아붓게.》

《오늘의 말씀을 가슴에 쪼아박고 의서를 반드시 만들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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