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회)

제 4 장  왕실의 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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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의원에 허준이가 오니 제일 기뻐한것은 선복이였다.

인순왕후의 사망으로 옥에 끌려갔다가 근 50여일만에 공의대비(인종의 비인 인성왕후)의 병이 위급하여 풀려나온 선복은 허준의 손을 부여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인성왕후는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몸이 불편하였다. 당시의 기록들에는 인성왕후가 담가에 들리워 오갔다고 전해지고있다.

근 2년 남짓하게 앓던 인성왕후는 류희춘이 사망한 그해 겨울 11월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때에도 대간들이 들고일어나 의원들을 처형하자고 하였으나 이번만은 선조가 승인하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 자기의 생이 곧 끝나리라는것을 직감한 인성왕후는 전신의 힘을 모아 언문으로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전하와 조정관리들이 졸곡제사를 지낸 뒤에는 사모와 검은 뿔띠차림을 할것이며 내가 죽은 뒤에 의원과 녀자의원을 심문하지 말것이다.》(《선조실록》권11 정축년 11월 경진일)

인종과 근 스무해를 살아왔지만 일점혈육 하나 남기지 못한 인성황후가 왕비로 있은지는 8개월 보름, 결국 그는 녀성으로서도 왕비로서도 이렇다하게 남긴것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대비가 생의 마지막순간에 내린 이 어지가 그의 가장 큰 공적이 아닐가.

선조는 공의대비에게 인성왕후라는 시호를 추증하면서 그의 언문지시대로 일체 의원들을 심문하지 않았다. 이 일은 허준이 내의원에 들어온지 이듬해에 벌어진 일이였다. 그 기간 선복은 대비의 병상을 잠시도 뜨지 못하였다. 허준은 어쩌다 만나는 선복의 충혈진 두눈과 부풀어오른 입술을 보면서 궁실의 어의라는게 과연 헐치 않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인성왕후의 초상을 치른 후 선복은 어머니의 병을 핑게로 스스로 사임신청을 내였다.

선복이 궁실의원직을 사임한 직후 허준은 그의 집에 찾아갔다. 근간에 죽순이가 심하게 앓고있어 몇번이나 치료해준 허준이였다. 허나 이날은 죽순이가 허준을 부른다는 기별이 왔기에 무슨 일이나 해서 내의원을 나서는 길로 집에도 들리지 않고 곧추 죽순의 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죽순의 집에 들어선 허준은 뜻밖에도 그자리에 있는 양례수를 만날줄 상상도 못하였다. 내의원에 다니면서 태의 양례수와 접촉은 있었지만 아직 이렇게 만난적은 없었다.

《허판관이 이 집에 어떻게 다?…》

놀라는것은 허준이쪽보다 양례수쪽이 더하였다. 양례수는 온지 퍼그나 된듯싶었다. 병석에 누워있던 죽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있었다. 눈귀에는 물기가 번뜩거렸다. 분명 무슨 말이 오간것 같은데 그로 하여 죽순이는 좀 흥분된듯싶었다.

선복이가 차종지를 허준이앞에 가져다놓았다. 양례수의 앞에도 이미 차종지가 놓여있었다.

《선복이 어머니! 몸은 좀 어떻습니까?》

병석에 누웠으나 죽순은 아직도 귀염성스럽고 복스럽던 자태가 사라지지 않았다. 죽순의 병은 젊은 나이에 홀로 살아온데로부터 오는 부인병이였다. 그를 진찰하면서 허준은 대뜸 죽순의 병명을 진단하였다. 명의인 죽순이 제 병을 모를리 없었다.

허준은 죽순의 운명이 왜 이렇게 되였는지 모르고있었다. 류이태는 분명 죽순이와 새 가정을 이룰수 있었다고, 그를 기다렸건만 죽순이가 다시는 산음에 오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죽순이스스로가 단념했다는것인데 왜 그랬을가? 본통치고개에서 분명 두사람은 심중의 언약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한성에 다시 올라온 후 죽순의 신상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허준은 판단하였다. 그렇지 않다면야 선복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겠는가. 선복은 과연 누구의 자식인가?!

죽순이 어줍게 웃음을 띠우며 허준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용케 시간을 냈군요. 그래 예영이 어머니랑 다 잘 있어요?》

양례수는 눈이 퀭해졌다. 허준이와 이 집사이의 관계가 보통관계가 아님을 새롭게 인식하며 불연중 허준이 의술을 닦은것이 혹시 죽순이와 관련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자 보니 허판관이 이 집과 보통사이가 아니로구만.》

《예- 선복이 어머닌 저의 운명의 은인이오이다. 그리구 선복인 제 동생이나 같구요.》

너무도 흔연히 대답하는 허준의 그 말에서 양례수는 자기가 여기에 더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일어섰다.

《그럼, 난 먼저 가보겠네. 앉아 얘기나 하라구.》

허준이한테 이렇게 말을 붙인 양례수는 일어섰어도 갈념을 하지 못하고 죽순이를 한참이나 뚫어지게 굽어보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병은 마음이 절반이라는데 너무 상심마오. 내 자주 와보겠소.》

자기의 얼굴을 구멍날듯 보는 양례수의 눈길을 피하며 얼굴을 외로 틀었던 죽순은 그 말에 아무런 대척도 하지 않고 그저 눈물만 흘렸다.

허준은 선복이와 함께 대문까지 나가 양례수를 바래주었다. 선복이가 인사하고 먼저 들어가버렸으나 허준은 그가 대문을 나설 때까지 그냥 서있었다. 대문을 나서던 양례수가 돌아섰다.

《그럼 자네의 스승이 산음의 류이태의원이겠구만.》

허준은 의아한 눈길로 양례수를 쳐다보았다.

《어련하겠소만 우선 선복이 에미를 잘 치료해주게. 그리구 청원 이 사람, 기회가 생기면 우리 한번 속터놓고 얘기해보세.》

아리숭한 말만 남기고 양례수는 대문을 나섰다. 허준이 다시 방안으로 들어오니 그새 죽순이가 선복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 벽에 의지해서 앉아있었다.

《그 량반이 갔어요?》

허준은 그 물음에 머리를 끄덕거리는것으로 대답하였다.

그의 머리속에는 양례수의 마지막말이 떠나지 않았다. 양례수가 여기로 온것은 죽순의 병때문인것만은 사실인데 그의 언행은 평시에는 찾아볼수 없던 그런것이였다. 몇번 접촉할 때마다 허준은 그에게 위압되는듯 한 느낌을 받군 하였었다. 틀진 걸음새, 남을 굽어보는듯 한 고자세, 자신만만한 몸가짐… 그런것을 오늘 허준은 전혀 찾아볼수 없었다. 죽순을 굽어보며 하던 말과 자기와 헤여질 때 던진 말을 놓고보아도 그리고 항상 남을 발아래로 굽어보군 하던 시선도 이전과 달랐다.

문득 허준의 머리속에는 양례수가 혹시 죽순이가 말하던 그 양성소선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선복이가 내의원에 있으니 그 어머니를 병문안 올수도 있지 않을가?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드는 순간 허준의 눈길이 죽순의 눈길과 마주쳤다. 죽순의 눈가에 추연한 빛이 흐르고 눈귀에는 눈물방울이 맺혀있었다. 허준의 속내를 들여다보았는지 죽순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아니, 그럼 태의어른이 선복이 아버지?!》

죽순이 눈을 꼭 감는다. 그의 눈에서 피같은 눈물이 짙게 배나왔다.

《어쩌면, 어쩌면 그럴수 있소이까? 예, 선복이 어머니!》

죽순이 세차게 어깨를 떨었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선복이가 어머니의 어깨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린다.

《어머니!- 그만 진정하세요. 계속 이러면 병이 더 도져요.》

이윽고 마음을 진정한 죽순이가 천천히 만단사연의 퉁구리를 풀기 시작하였다. 평생 혼자 속으로 묻어두려던, 입밖에 꺼내고싶지 않았던 가슴아픈 상처가 서서히 형체를 드러냈다.…

 

산음에서 류이태와 헤여져 한성에 올라온 죽순은 다시 의원양성소에 다니였다. 산음에 다녀온 후로 죽순은 딴 사람이 되고말았다. 말없고 조용하며 그러면서도 항상 생각에 잠기군 하는 그런 처녀가 다름아닌 한성에 올라온 죽순의 변화된 모습이였다. 언제 봐야 발랄하고 사내처럼 씨원씨원하던 죽순이가 별안간 숙녀같은 랑자로 모습을 바꾸었다.

의원양성소의 기일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양례수와는 될수록이면 피하려고 했으나 운명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왜냐면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여서 할수없이 매일 마주서야 하고 싫든좋든 그의 얼굴과 그의 웅변을 보고 들어야 하였다. 수강시간에 죽순은 머리를 쳐들지 않았다. 책상에 얼굴을 꾹 박고 귀로만 선생의 강의를 듣군 하였다.

어느날 한성에 다시 올라온지 한달가량 될무렵이였다.

의원양성소에서 집으로 가는 죽순이앞에 커다란 산이 막아섰다. 얼핏 고개를 드니 양례수였다. 이미 그와의 대면이 있으리라는것을 각오한 죽순이라 딴소리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무슨 말을 했던가.

《그새 죽순이가 없으니 양성소가 텅 빈것 같더군. 그래 몸은 좀 어떻소?》

《다 나았소이다.》

《그래, 고향의 어머님이랑 무고하시오?》

《예, 별일이 없소이다.》

양례수가 묻는 말에 죽순이 단마디로 대답하니 대화는 인차 동강이 났다.

죽순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그저 양례수의 발만 바라보면서 걷기만 하였다. 양례수의 발이 멈춰서기에 죽순이도 그자리에 멈춰섰다. 머리를 들어보니 한강가였다. 이미 어둠은 깃들어 사위는 어둑시근한데 주위엔 인적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가? 내가 왜 여기까지 왔을가?)

이런 생각이 뇌리를 치는 순간 와락 양례수가 그를 그러안았다. 죽순은 젖먹은 힘까지 다해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였건만 열에 뜬 그의 손에서 그저 옴지락거렸을뿐이였다.

《죽순이! 왜 그러오? 이미 우린 한몸이 된 사이가 아니요? 난 죽순이가 다시 올 날을 애타게 기다렸소. 다시는 놔주지 않을테요.》

죽순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진하고 정직한 사나이 그리고 남의 아이를 키우며 높은 의술로 평범하고 소박한 고향사람들을 위해 애쓰던 류이태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눈앞에 떠올랐다. 그와 헤여지던 본통치고개가 저멀리 보이는듯 하였다.

《이러시면 안돼요. 난 당신을 바라지 않았어요!-》

허나 우악스러운 사내의 품에서 죽순은 벗어날수 없었다.…

죽순은 악몽같은 이날을 평생 잊을수 없었다. 한강의 시퍼런 물결이 용용이며 사품치는 강변에서 녀인의 혼이 울고있었다. 갈대숲이 솨솨- 울부짖었다.

죽순은 실신상태에 빠진듯 향방없이 갈숲을 방황하였다. 시퍼런 강물에 몸을 던지고싶었다. 그 순간 죽순은 류이태의 때묻지 않은 얼굴이 떠올랐다. 비록 아차 실수로 처녀의 몸을 더렵혔어도 깨끗한 마음만은 그에게 바치고싶었다. 허나 이젠 마음도 어지러워졌다. 류이태와의 언약을 끝내 지켜내지 못한것이였다. 처음엔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양례수라는 사내에게 몸을 허락했지만 이번엔 제정신을 가지고있으면서도 지켜내지 못하였다.

격정의 순간이 지난 뒤 양례수는 뜻밖에도 죽순이 태를 치며 통곡하자 눈이 퀭해져서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제서야 자기의 애제자인 죽순이가 자기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스승인 자기가 한녀성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는가를 인식하였는지 중언부언 설명을 달았다. 허나 죽순의 마음을 도저히 가라앉힐수 없었다.

《가라요! 당신은 나쁜 사람이예요! 썩 내 눈앞에서 사라져요!》

비실비실 뒤걸음치며 양례수는 그자리를 떠나갔다.

한강에 몸을 던지려던 죽순이 자신을 수습케 한것은 의술을 배워 나라안의 첫째가는 녀명의가 되라던 류이태의 당부였다. 얼마나 순박하고 정직한 사나이인가. 한 사내는 산음이라는 촌에 있고 다른 사내는 번화한 한성부에 있다. 허나 두사람의 인격의 높이는 문자그대로 하늘과 땅이였다.

며칠후 죽순은 양례수를 찾아갔다. 온밤 생각을 굴린 끝에 내린 결심이였다.

《난 이미 당신의 사람이예요. 그러니 부모님들께 말해 성례를 치르자요.》

장밤 한강가를 미친듯이 방황하던 죽순은 그만에야 지쳐서 강기슭에 엎어졌다. 무정한 강물이 그의 몸에 사정없이 들씌워졌다. 다시는 류이태에게 돌아갈수 없는 자기였다. 출로는 하나, 양례수와 성례를 치르는 길밖에 없었다. 하여 죽순은 며칠동안 생각끝에 이런 결심을 내리고 양례수를 찾아왔던것이다.

양례수는 쾌히 동의하였다. 실지로 양례수는 죽순이를 마음에 두고있었던것이다.

운명의 돛을 달고 배회하던 쪽배가 기우뚱거리며 힘겹게 가고있었다. 이후 양례수는 죽순이를 이전처럼 대하지 못하였다. 어딘가 모르게 조심스럽게 대하였다. 간혹 죽순이를 넘겨다보는 눈치였건만 성례를 치르기전에는 다시는 그럴 생각을 꿈도 꾸지 말라고 죽순이가 못 박아주었다.

양례수는 그러는 죽순에게 자기가 고향 홍농에 한번 내려가 부모님들께 죽순이와의 문제를 상정시켜 승인받겠다고 하였다.

그무렵에 죽순은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였다. 정언벼슬에 있던 이모부 류희춘이 1547년의 량재역벽서사건에 련루되여 벼슬을 떼우고 정배를 가게 되였던것이다.

아버지없는 자기를 한성에 데려다 키워주고 공부시켜준 이모부 류희춘은 죽순에게 있어서 아버지나 같은 존재였다. 하루새에 죽순은 넓고넓은 한성시가에서 의지가지할데 없는 신세에 놓이게 되였다. 역적의 집안이라는 감투가 그의 머리우에도 들씌워졌다. 오직 믿을것은 장래를 언약한 양례수였다.

그러던 어느날 양례수가 죽순에게 혼례문제로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하는것이였다. 그가 홍농으로 내려간 후 죽순은 이제나저제나 기다렸건만 한달후에 올라온 양례수가 그새 고향에 내려가 혼례식을 하고 안해까지 데리고올줄 꿈에나 생각했으랴.

죽순은 미칠것만 같았다. 이미 그의 몸에는 양례수의 후대가 자라고있었다.

근 열흘을 죽순은 꼬바기 앓았다. 고열로 헛소리치는 죽순이의 정상에서 이모인 송덕봉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였다. 하늘같이 믿던 남편이 하루밤새 역적으로 몰리워 정배간 상태에서 제가 맡아키운다며 한성에 데리고온 언니의 딸인 죽순이가 련정문제로 혼수상태에 빠져 생사기로에 놓였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덕봉은 우선 죽순이부터 살리기로 작정하고 가산을 팔아 그의 병치료를 하였다. 이모의 극진한 간호로 열흘만에 의식을 차린 죽순은 덕봉이앞에 전후사연을 다 털어놓았다.

양례수가 마음이 돌변한것은 죽순의 이모부인 류희춘이 역적죄로 류배간것과 관련되였다. 장차 나라안의 명의가 되여 왕실어의가 될 야심을 품고있는 양례수에게 역적집안의 조카와 혼례를 치른다는것은 말그대로 호미난방이였다. 고민끝에 양례수는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들에게 이실직고하였다. 덴겁하며 부모들이 생야단을 쳤다. 처음엔 양례수도 죽순이와의 혼례를 우겨보았다. 물론 뿌리깊은 주대가 아니라 체면상, 부모 몰래 녀자를 가까이한 이 아들도 사내임을 보여주는 변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다나니 그 우김이 심지가 약했다. 부모들의 말에 두번이상 더 제 주장을 뻗대지 못하였다.

덕봉은 조카의 가슴터지는 고백을 들으면서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 양례수란 의원이 분명 네 이모부때문에 저한테 화가 미칠가봐 꼬리를 사렸구나. 모든게 우리때문이야. 그러다나니 너한테까지 이런 불행을 가져왔구나.》

마음의 상처를 터놓은 죽순은 덕봉의 품에 안겨 오래오래 섧게 울었다. 나중엔 소리도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장차 어떻게 할 심산이냐?》

덕봉의 물음에 죽순은 머리를 저었다.

《그저 죽고싶은 생각뿐이예요.》

《그런 소릴 말아. 참, 산음에 있다는 류이태라는 의원을…》

덕봉의 품에서 태를 치던 죽순이 벌떡 머리를 쳐들었다.

《아니돼요. 그 사람한테는 절대로 못 가요. 무슨 낯을 하고 그 깨끗한 사람을 찾아가…》

죽순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비오듯 흘렀다.

그 눈물은 이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 한달음에 달려가고싶어도 스스로 자격을 상실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몸부림의 눈물이였다.

《전 멀리 떠나가겠어요. 남들이 보지 않는 저 먼곳으로 가겠어요.》

그렇게 되여 죽순은 한성을 떠났다. 고향 산음에서 류이태가 기다리고있다는것을 모르지 않는 죽순이였다. 류이태처럼 궁벽한 산골에서 의술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주리라. 이런 결심을 품고 한성을 떠난 죽순이 정착한것은 국경을 가까이한 룡천이였다.

20년간의 류배에서 돌아와 조정에 발을 다시 들여놓은 류희춘은 죽순이 소식을 듣고 너무도 가슴이 터져 한동안 련거퍼 술만 들이켰다. 당장이라도 그 뻔뻔스러운 양례수의 낯짝에 주먹을 안기고싶었다. 송덕봉이 남편을 겨우 만류하였다.

그후 류희춘은 양례수가 설사 의술이 높다 하지만 그를 쌀쌀하게 대했으며 곁에 붙지도 못하게 하였다. 더구나 희춘이 내의원의 제주로 있는 기간 양례수는 의술이 높았지만 어의로 될수 없었다. 희춘은 임금앞에 그를 소개조차 하지 않았던것이다.

당시 양례수가 내의원에서 의술이 제일 높았으나 류희춘이 내의원이 아니라 전의감에 있는 허준을 소개한것만 봐도 양례수에 대한 그의 감정을 잘 알수 있었다. 양례수는 류희춘이 사망한 다음에야 희춘을 대신하여 약방제주가 된 류전에 의해 선조앞에 나타날수 있었으며 이때부터 국왕의 주치어의로 활약할수 있었다.

룡천에 있던 죽순은 류희춘의 노력으로 다시 한성에 올라와 전의감의 의학훈도가 되였고 선복은 궁실의 녀의원이 될수 있었다. 류희춘이 살아있는 동안 양례수는 제 딸인 선복이를 눈앞에 놓고도 언제한번 말도 붙일수 없었다. 물론 선복이는 양례수가 저의 친아버지인줄 꿈에도 몰랐다.

희춘이 사망한 후 언제인가 양례수가 선복을 불러 이것저것 말을 시킨적이 있었다. 하도 이상해서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그 말을 했더니 딸의 말이라면 언제나 웃으며 너그럽게 받아들이던 어머니가 버럭 성을 내며 다신 그 사람과 상종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것이였다.

대비가 사망한 후 선복이 사임한것은 죽순이의 병마도 관련되지만 어머니가 그만두라고 한것이 중요한 원인이였다.

오늘 이렇게 양례수가 죽순이네 집에 걸음한것은 처음이였다. 양례수는 갑자기 선복이가 사임신청을 하자 그를 불러 리유를 물었다. 리유가 어머니의 병이 위급해서라는 말을 들은 양례수의 낯색이 컴컴해졌다. 선복이를 통해 그 소식을 들은 죽순은 왜 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했냐며 나무람하였다.

벽에 의지해 힘겹게 말을 마친 죽순의 낯색이 창백해지더니 어지러운듯 비칠거렸다.

《어머니!》

어머니의 팔을 부여잡고 눈물속에 기나긴 고행의 사연을 듣고있던 선복이 급기야 죽순이를 눕혀놓았다. 허준은 죽순이 편히 눕도록 거들어주고나서 나직하게 한숨을 쉬였다.

한참후에 진정이 되는지 죽순의 얼굴에 혈기가 도는듯 하였다. 가만히 손을 내밀어 허준의 손을 꼭 잡은 죽순이가 입을 열었다.

《허의원이 앞으로 의서를 쓰겠다고 했는데 그 사람을 조심하세요. 재간은 있으나 야심이 너무 세거든요. 누가 자기보다 올라서는것을 그 사람은 절대로 용서안해요.… 류선생과는 너무도 판이하지요. 후에 류선생을 만나거들랑 이 죽순이가 속죄하더라구, 평생 류선생 하나만을 마음에 간직했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내가 죽으면 류선생옆에 묘를 써주세요. 아직 류선생이 살아계시니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린다고 하세요. 죽어서라도 류선생과 항상 있고싶어하는 이 녀인의 마음이예요.》

죽순의 집을 나서는 허준의 마음은 개운치 못하였다. 선복의 아버지가 양례수이고 죽순의 운명을 그런 불행에 빠뜨린 사내가 다름아닌 양례수라는 사실앞에서 허준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사람이 살아 한생에 큰일은 못한다쳐도 마음만은 정직하고 샘처럼 깨끗해야 한다!)

류이태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왔다. 정말 쉽지 않은 류이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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