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회)

제 3 장  한성에 나타난 시골의원

6

 

옥에서 풀려나온 이후 허준의 치료범위와 폭은 더욱더 넓어졌다.

그전에는 남산골과 그 근처에서만 머물렀으나 이제 와서는 고관대가들이 거처하고있는 장동에까지도 그의 의술이 종종 가닿고있었다. 이 과정에 허준은 일반백성들과 량반들이 앓는 질병은 그 범위와 종류도 서로 다르다는것을 파악할수 있었다.

일반백성들이 많이 살고있는 남산골에서는 주로 해소, 감모, 곽란 등과 같이 흔히 볼수 있는 급성병들이 많이 발병하였다. 혹 질병들이 있다고 하여도 백성들은 늘 밭에 나가 고역살이에 시달리느라고 편안히 누워 앓을새가 없었다.

허나 호의호식하며 편안한 생활을 하고있는 고관대가들속에서는 대체로 소갈병(당뇨병), 비만증, 중풍전구증상(고혈압), 심계와 정충(심장신경증) 등과 같은 난치성질병들이 많이 나타나군 하였다.

서로 다른 이런 발병률은 허준에게 치료의 폭과 림상경험들을 더욱 넓히고 풍부히 할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허준은 이러한 치료경험들과 자료들을 빠짐없이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그의 자료들은 나날이 늘어만갔다.

치료의 여가에 허준은 의서편찬을 위한 사색을 한시도 중단한적이 없었다.

아직은 구성을 무르익히는 단계였지만 표상이 잘 안겨오지 않아 애를 먹고있었다. 그 바쁜 속에서도 한달에 한번정도씩 박근원의 집을 찾아가 병치료를 해주군 하였다.

근원은 자기의 병이 나아지자 류희춘을 일부러 찾아가 사례하였다.

어느날 허준은 류희춘의 부름을 받고 정오경에 그의 집으로 가게 되였다.

그 집 대문을 열고 한발을 들여놓던 허준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대문앞에서 맞아주는 사람이 다름아닌 죽순이가 아닌가.

《아니, 이게 누굽니까? 선복이 어머니가 아닙니까?》

죽순이 눈에 함뿍 웃음을 지었다.

《도련님! 아니, 허의원님!》

허준은 뜻밖에 류대감의 집에서 죽순이를 만난것이 너무도 믿어지지 않아 죽순의 손을 잡고 놓을줄 몰랐다.

《도련님! 소녀가 선복이오이다.》

어머니를 닮아 눈이 생글거리는 보름달같이 얼굴이 환한 묘령의 녀인이 뒤에서 한걸음 나서며 허준에게 허리를 굽혔다.

《아니, 네가 선복이냐?》

몰라보게 변한 선복의 아릿다우면서도 정숙한 자태에 허준은 혀를 차지 않을수 없었다.

류희춘이 그들의 해후를 이윽히 바라보다가 한마디 던졌다.

《그냥 이렇게 서만 있겠나? 어서 방안에 들어가 얘기하자구.》

방안에는 류희춘의 안해 송덕봉이 성의껏 차린 음식상이 놓여있었다.

《자, 자네들이 오래간만에 만났고 또 임자가 대사헌령감의 병을 치료하면 내가 다시 만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는셈치고 한상 차렸으니 사양말고 상앞에 나와 앉으라구.》

류희춘이 허준을 상으로 안내하며 하는 소리였다. 허준은 한성장안에서 류희춘대감을 가리켜 조정에서 제일 유식한 사람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렇게 한갖 시골의원에 불과한 자기를 륭숭하게 대접하는것을 목격하면서 시세 고관대가들속에서는 보기 드문 쉽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감무늬를 한 새파란 옥돌잔에 선복이가 돌아가며 평양의 유명한 명주인 발그스레한 감홍로를 한잔씩 부었다. 류희춘이 주인의 체모를 잃지 않고 술잔을 쳐들었다.

《허의원의 명의술덕분에 대사헌령감의 병이 나은것을 축하해서, 그리고 왕실의원인 우리 선복이의 일이 길하기를 바래서, 또 오랜 인연을 맺은 자네들의 상봉을 기념해서 한잔 쭉 들자구!》

허준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죽순이가 허준의 앞에 음식가지들을 집어다놓으며 어서 들라고 권했다. 어느새 서너잔 오간 뒤라 좌석은 흥그럽기만 했다.

《도련님이 끝내 의술을 배우셨군요.》

죽순의 감회어린 말소리에 허준은 낯색을 붉혔다.

《예, 선복이 어머니와 류이태선생님의 덕이지요. 그렇지 않다면야 제가 어떻게 의원이 될 생각을 했겠소이까. 선복이 어머니, 정말 고맙소이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정말 용해요. 난 한성에 젊은 명의가 나타났다고 하기에 누군가 했는데 글쎄 이모부가 그 사람이 다름아닌 룡천사또댁 작은도련님이라고 하지 않겠나요.

난 그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지요. 내가 너무 믿지 않으니 이모부가 <정 믿지 못하겠으면 네 눈으로 직접 보려무나.> 하시지 않겠어요. 그래서 우리 선복이를 데리고 일부러 왔어요. 헌데 정작 만나고보니 사또댁 작은도련님일줄이야…

정말 반가와요. 그리고 고마와요. 도련님같은분이 아무렴 달리 될수 있겠나요.》

이 시각 죽순의 눈앞에는 자기를 찾아와 려월이와 허준을 비방하던 허모의 주먹만 한 얼굴이 떠올랐고 그 말을 믿고 허준모자를 의심했던 자기가 부끄러웠다.

《도련님!》

선복의 부름에 허준은 대뜸 얼굴을 찌프렸다.

《이젠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우리 서로 같은 의원이고 또 나한테 동생이 없고 너한텐 오빠가 없으니 우리 서로 오빠, 동생이라 부르는게 어떠냐?》

류희춘이 《허허-》 하고 사람좋은 얼굴에 웃음을 떠올렸다.

《그게 좋겠구나. 선복아, 넌 어떠냐?》

선복이가 대뜸 손벽을 치며 좋아라 찬성한다.

《나도 찬성이오이다.》

허준은 대감의 지체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좌석에 잘 어울리는 류희춘이 새삼스레 돋보이면서 그래서 임금이 류대감을 신임하는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선복이 어머니, 어떻게 된 일이오이까? 난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나이다.》

죽순이 눈가에 잔잔한 웃음을 띠우며 류희춘을 돌아보았다. 희춘이 눈을 끔벅거렸다.

《허의원이 룡천을 뜬 다음 5년후에 이모부의 주선으로 우린 한성부에 옮겨왔어요. 한성부에 올라온 그해에 난 전의감에서 녀의원들을 양성하는 의학훈도가 되였구 선복인 양성소를 마친 다음 명의시험에 응시하고 이태전에 궁실의 녀의원이 되였지요. 이애의 의술이 이젠 나보다 훨씬 우월해요.》

《아니, 선복이가 궁실의 녀의원이 되였단 말이오이까?!》

선복이 얼굴을 붉히며 어머니의 손등을 꼬집는다.

《이젠 오빠인데 뭘 숨기겠니. 궁실의 녀의원이라지만 아직 허의원보다는 의술이 높지 못해요. 앞으로 허의원이 오빠로서 선복에게 많이 가르쳐주세요.》

허준이 손을 내저으며 사양하였다.

《무슨 말씀을 합니까. 궁실의 의원이 나같은 시골의원한테 뭘 배울게 있겠소이까. 아직 자격증도 없는 의원에 불과한 내가 의술을 알면 얼마나 안다구… 내가 오히려 선복에게 배워야 할것 같소이다. 그렇지 않냐, 선복아!》

선복이가 불타는듯 새빨개진 얼굴을 죽순의 잔등에 감춘다. 룡천에 있을 때 그애의 볼을 튕겨주던 일이 생각나 허준은 빙그레 웃었다. 시종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던 류희춘이 허준의 말에 놀란 기색을 지으며 물었다.

《임잔 아직 과거에 응시하지 못했나?》

허준의 낯색이 순간에 돌변하였다. 죽순이 류희춘의 무릎을 슬그머니 흔들었다. 그 문제는 더 물어보지 말라는 암시였다. 류희춘은 죽순에게 왜 그러느냐는듯 그의 얼굴을 일별하더니 허준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낯색이 달라지나, 응? 내가 물어보지 말아야 할 말을 물었나?》

그래도 허준은 묵묵부답이다. 류희춘은 그러는 허준의 태도에 머리를 기웃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이 한성바닥에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했다는 의원들이 수두룩하지만 임자의 발꿈치에도 닿지 못해. 내가 왜 자네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솔직히 말해주지. 내가 임자를 보면서 뭘 생각했는지 아나?》

갑자기 류희춘이 정숙한 자세로 말을 잇는다.

《전하의 건강을 생각했지.… 2O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다시 조정에 올라와보니 전하의 건강이 여의치 않더군. 임금앞에서 충의를 부르짖는 숱한 신하들이 있으면서 전하의 옥체 하나 돌봐드리지 못하다니 이게 어디 신하된 본분인가. 내 지금 명목상 내의원 제주인데 전하의 옥체를 만강하게 할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나. 비록 내의원에 저마다 제노라는 의원들이 있긴 하지만 임자와는 전혀 달라. 의술은 둘째치구 인품상 너무도 임자와는 다르더란 말이야. 내 임자를 첨 만나보구 생각했지. 저런 명의라면 전하의 옥체를 만강하게 할수 있지 않을가 하고 말일세. 그래서 내가 임자한테 관심을 두는걸세. 이젠 내 의도를 알겠나? 그러니 우리 사이엔 서로 숨기는게 없어야 하네.》

당시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삼의원》이라는 세개의 의료기관 다시말하여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가 있었다. 물론 여기에 동서대비원(일명 활인서)까지 합하면 네개로 볼수 있지만 대체로 우의 세개만 들군 한다.

내의원은 한마디로 궁실치료기관이다. 세종 25년(1443년)에 이미전에 존재하던 내약방을 고친 관청으로서 일명 내국, 내약, 상약, 약방, 약원이라고도 불렀으며 벼슬로는 도제주, 제주, 부제주 등 명목상 책임자가 있고 그아래에 정(정3품), 첨정(종4품), 판관(종5품), 주부(종6품), 직장(종7품), 봉사(종8품), 부봉사(정9품), 참봉(종9품) 등 벼슬관이 있었다.

덧붙여 더 이야기한다면 정1품 의정이 맡으면 도제주요, 정2품관이 맡으면 제주요, 정3품이상이면 부제주라 한다는것이다.

전의감은 한마디로 량반특권층의 병을 치료하는 기관이다. 처음 태조 1년(1392년)에 설치되였을 때에는 주로 임금을 비롯한 궁중의 치료를 위주로 하면서 동시에 궁실을 비롯한 귀족량반들의 치료를 맡아하던 전의감은 그후 내의원이 분리된 다음 궁중용약품과 임금이 하사하는 약품을 공급하는 일과 량반특권층의 병치료를 전문으로 하게 되였다. 벼슬로는 제주가 상징적으로 있고 그밑에 정, 부정, 첨정, 판관, 주부, 의학교수, 직장, 봉사, 부봉사, 의학훈도, 참봉 등이 있었다.

혜민서는 이른바 일반 백성들의 치료를 보아준다는 미명하에 설치된 치료기관이다. 처음 1392년에 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였다가 세조 12년(1466년)에 혜민서로 고쳤으며 벼슬로는 주부, 의학교수, 직장, 봉사, 의학훈도, 참봉 등이 있었다.

이 삼의원중에서 내의원을 일명 《내국》으로, 전의감과 혜민서를 《외국》이라고 불렀다.

그밖에 일명 활인서라고도 부르는 동서대비원은 조선봉건왕조 초기인 1392년에 수도안의 백성들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명목으로 설치한 의료기관인데 동대비원과 서대비원으로 나뉘여있다가 태종 14년(1414년)에 동서활인원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세조 13년(1467년)에 활인서로 다시 명칭을 바꾸었다. 활인서를 일명 활서라고도 부르는데 벼슬로는 별제(종6품), 참봉(종8품) 등이 있었다.

너무도 진중하고 숙연한 류희춘대감의 자세앞에서 허준은 추억하고싶지 않은 과시장에서의 일을 털어놓지 않을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론 전 다시는 과거에 응시할 생각이 없었소이다. 작고하신 아버님이 제가 룡천을 떠날 때 나라법에 서얼출신의 대과응시는 허용되지 않지만 잡과는 허용된다고 하시며 절더러 꼭 과거에 응시하라고 당부하셨소이다. 한성부에 와서 두해가 지났지만 저로서는 아직 과거에 응시할 생각은 하지 않았나이다.》

류희춘이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그래, 앞으론 어떻게 할 심산인가?》

허준은 솔직하게 자기의 취지를 그대로 밝혔다.

《대감어른앞에서 오늘 주책없는것 같지만 제 속에 품고있는 생각을 그대로 털어놓겠소이다. 앞으로 벼슬할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소이다. 저의 일생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나라와 백성들앞에 기여할 큰 의서를 남기는것이옵니다. 그래서 의술을 배웠고 또 의학에 대한 연구를 더 심화시키려고 하오이다.》

허준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나직하였으나 자신심과 배짱이 엿보였다. 죽순은 새삼스레 허준이가 왜 의술을 배우는 길을 택했는가를 인식하였으며 그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재가 응어리되여 앉았는가 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죽순은 순간이나마 그를 오해했던 자신을 질책하며 조용히 말을 붙였다.

《그래도 이 한성부에서 의원노릇을 하려면 의과급제자격증이 있어야 할거예요.》

죽순의 말에 선복이까지 맞장구를 쳤다.

《할아버님과 어머니의 말씀이 맞아요. 나도 오라버님이 의과에 응시했으면 해요. 오라버님의 그 실력이면 급제하는거야 식은 죽 먹기나 같을거예요.》

류희춘이 좌중을 둘러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그 말들이 다 옳은 소리야. 의과에 응시 못한 의원이라면 전번처럼 건덕지를 잡고 임자를 또 괴롭힐거네. 그러니 이번에 치는 잡과 초시에 응시해야 래년 봄에 치르는 복시에 응시할수 있을거네. 틀림없이 임잔 단연 첫자리에 급제할거네.

내 오늘 임자의 말을 들으면서 새로운것을 알게 되고 또 많은걸 배웠네. 임자의 그 뜻이 성취될수 있게 내 힘자라는껏 도와줄 생각이네.》

허준은 그자리에서 일어나 류희춘에게 허리를 굽히며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의 정을 담아 인사를 하였다.

《정말 고맙소이다. 이 은혜를 제 잊지 않고 꼭 뜻을 이루겠나이다.》

《그러지 말게. 내 이제 몇년을 더 살겠나. 임자같은 젊은이들을 할수 있는껏 도와주는게 내 락이지.》

솔직한 말로 허준은 구태여 의과에 응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었다. 화담선생처럼 학문연구와 의로운 일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기때문이다. 게다가 의과에 응시하지 않았지만 의과자격을 받은 의원들보다 의술이 높아 사람들속에서 명의로 떠받들리고있는 지금의 형편에서 의과응시가 괜한짓으로 여겨졌기때문이다. 허나 허준은 류희춘과 죽순의 권고가 하도 극진하고 진정이기에 반승낙을 하고말았다.

한편 류희춘은 허준이 의과에 급제하면 그를 내의원에 넣어 장차 임금의 주치의로 천거할 속구구를 하고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허준이 그 문제를 설유에게 비쳤더니 그도 대뜸 과거급제는 시어머니의 소원이 아닌가고 하면서 찬동하는것이였다.

웬간해서 허준의 의사를 따르던 설유까지 의과에 응시했으면 하는 의향을 보이자 허준은 생소한 한성에 올라와서 말없이 자기를 뒤받침해준 설유가 오죽하면 저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준은 의과에 응시하기로 결심하였다. 허준이 선선히 응하자 설유의 눈에 맑은 눈물이 괴여올랐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두손을 가슴에 얹고 허준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설유의 그 마음에 가슴이 뭉클해져 허준은 안해의 손을 꼭 쥐였다.

드디여 응시하는 날이 왔다.

시험장으로 떠나는 허준을 설유가 기동이와 함께 문앞에까지 나와 바래워주었다.

허준이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뒤에서 어린 딸애의 애된 목소리가 울렸다.

《아빠!- 》

고사리같은 손을 젓는 예영이의 귀여운 모습을 보는 허준은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과시장으로 걸음을 옮기는 허준의 눈앞에는 아들이 과거급제하기를 애오라지 바라던 어머니의 모습과 자기를 오늘과 같이 떠밀어준 못잊을 스승의 모습이 우렷이 안겨왔다.

허준은 여려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과거장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짚었다.

과시장은 평양부의 과시장보다 훨씬 크고 방도 으리으리하였다.

허준은 지정된 자기 자리에 들어가앉았다. 얼핏 둘러보니 응시자가 마흔명가량 짐작되였다.

각이한 형색의 응시생들이 긴장한 빛을 띠고 시험관이 들어서기를 기다리고있었다. 너렁청한 과시장에 숨막힐듯 한 정적이 깃들었다.

드디여 과시장에 시험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기의 학문과 의술이 높다고 자부하는 허준이였지만 정작 시험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자못 울렁거렸다. 이전날 평양부의 과시장에서 서얼이라고 응시도 못해보고 무참히 쫓겨나던 일이 이 시각 떠오르며 온몸에 가벼운 전률이 일었다. 이번은 대과가 아니라 잡과인 조건에서 별다른 일이 없겠지만 허준은 우려와 불안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표표한 기상으로 들어서는 시험관들을 살펴보던 허준의 얼굴은 갑자기 새하얗게 질렸다. 불시에 심장이 뚝 멎는것 같았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또 있는가? 맨 앞에 평양부의 과시장에서 허준에게 가슴아픈 상처를 남겼던 그 참시관이 있는것이 아닌가.

(아니?!)

운명의 희롱이라고 보기에는 눈앞의 현실이 너무도 믿어지지 않았다.

눈앞에 무수한 별찌가 일었다. 현훈증으로 하여 앉아있는 그자리가 마치도 빙빙 돌아가는것만 같았다. 이제 벌어지게 될 참혹한 광경이 눈앞에 얼른거리면서 등골이 선뜩하고 이마에서는 콩알같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이윽고 응시생들을 마주하고 앉은 시험관이 응시생명단이 적혀있는 문서를 기웃이 내려다보았다.

아니나다를가 시험관이 퉁방울눈을 부라리며 입가에 힘을 주었다.

《허준이 누군가?》

허준은 머리를 수굿하고 대척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허준이라고 여기에 없는가?》

응시생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냥 앉아버틸수 없었다. 허준은 천근무게가 달린듯 무겁기만 한 몸을 가까스로 일으켰다. 시험관이 손가락질을 해대며 고래고래 목청을 돋구었다.

《야, 이놈! 귀가 먹었느냐? 왜 제때에 일어나지 못해? 이놈아! 네가 그렇게 오그랑수를 쓰면 내가 널 알아보지 못할줄 알았어? 이 서얼놈이 꽤 질기긴 질기구나. 평양부에서 그렇게 무참하게 쫓겨나구두 아직도 무슨 미련이 있어 이 과시장에 기신기신 들어왔느냐? 설사 서얼이라 해도 부친이 정2품관이여야 잡과에 응시할수 있는데 네놈의 부친은 종4품 군수인데다가 몇년전에 없지 않았는가. 여봐라, 이 서얼놈을 당장 과시장에서 끌어내가라-》

시험관의 고함소리가 터지자 미리 기다리기라도 한듯 문밖에서 두억시니같은 네명의 라졸들이 우르르 쓸어들어왔다.

그뒤로 실눈에 독기를 품은 허모가 거들먹거리며 흔들흔들 따라들어섰다.

《네자식이 어벌두 크지, 여기가 어디라구 감히 들어와? 저 서자놈을 냉큼 집어내.》

네명의 군졸들이 주저함이 없이 앞뒤에서 욱 모다붙어 허준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뿌드득- 소리가 나더니 허준의 두루마기 동정과 한쪽팔소매가 떨어져나갔다.

허준의 가슴속에서는 울분과 격정의 소용돌이가 끓어번지기 시작하였다. 그 소용돌이는 곬을 찾지 못한 강물이 언제에 막혀 용용이는것인가, 드디여 리성을 잃은 허준의 입에서 벽력같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래, 난 서자다! 서자는 사람이 아니라더냐? 서자도 당당한 사람이란 말이야.》

자기의 팔을 잡아끄는 군졸들을 뿌리치며 허준은 젖먹은 힘까지 다 내여 목청껏 소리쳤으나 어찌된 일인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허준은 온몸을 비틀며 더 힘껏 고함쳤다.

《야! 이놈들…》

그 순간 누군가 허준의 어깨를 잡아흔들었다.

《예영이 아버지! 예영이 아버지!》

기연가미연가 허준이 정신을 차리고보니 등잔불빛속에 설유가 자기의 어깨를 잡아흔들고있는것이 아닌가. 설유의 고운 얼굴에 수심이 잔뜩 비꼈다.

《아니, 왜 그러세요?》

허준은 그제서야 자기가 악몽속에 온밤 헤매고있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이마에 내밴 땀을 문지르는 허준에게 설유가 다정히 속삭였다.

《너무 근심마세요. 일이 다 잘될거예요. 마음을 푹 놓고 쉬세요.》

이날밤 설유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허준의 머리를 자기 무릎에 괴여놓은 설유는 그의 머리를 부드러운 손으로 쓰다듬으며 조용히 시조를 읊기 시작하였다.

 

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로다

오르고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그 목소리에 취해 고르롭게 숨소리를 내며 잠들기 시작한 허준의 모습을 굽어보는 설유의 얼굴에는 그 깊이를 가늠할수 없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정이 그득히 어려있었다.

의과초시에서 합격된 허준은 다음해 봄에 치른 복시에서 급제하였다.

의술의 리론에 있어서나 실기에 있어서 허준을 따를 응시생들은 한명도 없었다.

잡과응시에서의 급제는 허준의 의지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그후 그가 거대한 의서를 집필하는데서 큰 도움이 되는 지름길인 동시에 그의 파란많은 운명의 시초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그 누구도 이를 알수 없었다. 허준 당사자는 물론 설유도 전혀 상상할수가 없었다.

때는 1573년 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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