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회)

제 3 장  한성에 나타난 시골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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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의태의 말대로 과연 한성은 인총이 바글바글 끓는 곳이였다.

허준은 산음고을이 한성에 비하면 얼마나 시골인가 하는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허준이 살던 산음에서는 사람들의 인심이 매우 후했다. 그리고 집집마다에 문을 잠그고 다니는 법을 몰랐다. 그러나 이 한성에서는 영 딴판이였다. 물 한모금 얻어먹으려 해도 아니꼬운 눈길을 보냈다. 인총이 많은것만큼 별의별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다 있었다.

한성의 거리를 걸어가는 허준과 설유는 들끓고있는 그 인총에 파묻혀 숨이 막힐것 같았다.

허준의 일행을 맞이한 장기동은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기동의 집은 남산골에 있었다. 대체로 이곳은 가난한 사람들과 몰락한 선비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한성에는 고관대작들과 권세있는 량반들의 고래등같은 기와집들이 늘어선 곳이 있는데 한성부사람들은 그곳을 장동 또는 부자동이라고 불렀다.

《선생님, 류의원님께서는 무고하시오이까?》

기동이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류이태의 서신을 읽어본 기동은 대뜸 허준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초면이지만 쾌활하고 씨원씨원한 젊은이라는것이 대번에 느껴졌다.

《음, 류선생님이 임잘 퍽 총애하시더구만. 앞으로 내가 이 집에서 신셀 많이 지게 되였네.》

《아, 신세라니요? 내 앞으로 선생님에게서 의술을 배워야 하겠는데 무슨 그런 당치않은 소리를 하시오이까. 앞으로 많이 배워주사이다.》

스물두어살가량 되는 기동의 가슴에서는 피가 펄펄 끓어넘치는듯하였다.

허준이 방에 들어서서 집안을 둘러보니 비록 초가집이지만 퍽 아담하고 정갈하게 꾸려져있었다. 방도 제법 두칸이였다.

《선생님, 방이 비록 루추하오나 이 웃방에 거처하도록 하시오이다.》

《음, 그방이면 우린 족하네.》

기동은 성격이 퍽 급한 축이였다. 그는 허준의 일행이 려장을 풀어놓기 바쁘게 의술을 배워달라고 졸라대였다.

허준은 기동의 요청대로 의술의 기초리론과 기본원리들에 대하여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불깃불깃 혈색이 도는 기동은 억실억실한 두눈을 번쩍이며 허준의 설명을 자못 진지하게 들었다. 류이태가 말한바와 같이 그는 총기가 매우 빠른 젊은이였다. 예상외로 받아무는 속도가 빨랐다.

경상도 촌산골에서 올라온 의원을 한성사람들은 전혀 알아주려고하지 않았다. 산음현에서라면 사람들의 발길이 문턱이 닳도록 끊기지 않았으련만 한성부에 올라온지 한달이 지났어도 병자란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이에 제일 안달이 난것은 기동이였다. 류이태의 의술에 반했던 기동은 허준도 그와 같은 명의라고 믿고있었다.

병자들이란 의원들이 오라고 해서 찾아오는것이 결코 아니다. 병자들의 심리는 자못 예민한 법이다. 의원을 잘 만나면 죽어가던 병자도 살아나지만 의원을 잘못 만나면 별치않은 병도 더 위중하게 된다는것을 병자들자체가 제일 잘 알고있다. 그러니 병자들을 어이 탓할수 있으랴.

그러나 기동은 병자들의 그런 심중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명의인 허준을 자랑하여 병자들이 벌떼처럼 모여들게 하겠는가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허준은 이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허준에게는 류이태가 조언을 준대로 해야 할 일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류이태가 넘겨준 두권의 수사본을 자자구구 파고들었다. 그리고 필요한 자료들은 재정리하였다. 그의 옆에서는 설유가 앉아 허준이 불러주는 처방들과 치료묘리들을 적어나갔다.

이렇게 또 한달이 흘러갔다.

어느날 허준의 방으로 올라온 기동이가 뒤통수를 긁으며 어줍게 물었다.

《저- 선생님, 물고기가시가 목구멍에 걸린것도 치료하는가요?》

기동의 천진한 물음에 허준은 저도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허,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아파하는거야 모두 의원들의 치료대상이지.》

《그렇소이까? 그럼 선생님께서 얼른 좀 봐주소이다. 옆집애가 목구멍에 물고기가시가 걸려 울상을 하고있소이다.》

《음, 그래? 얼른 가보세.》

허준은 왕진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기동을 따라 허준이 옆집으로 가니 열댓살나는 아이가 캑캑- 하며 울상을 짓고있고 그옆에서 그애의 할머니가 손자의 잔등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고있었다.

《좀더 세게! 그렇지, 기침을 세게 하면 목에 걸린 가시가 나올지도 몰라.》

기동이가 할머니를 찾았다

《할머니! 제가 유명한 의원님을 모셔왔소이다.》

할머니가 의아한 눈길로 허준을 바라보며 혼자소리로 외웠다.

《첨 보는 얼굴이다. 이 린근에 유명한 의원이 있다는 소릴 못들었는데.》

《저 경상도 산음현에서 오셨소이다.》

《뭐, 산음에서? 촌에서 왔구만!》

그닥 시답지 않다는 소리였다. 기동은 할머니에게 못마땅한듯 눈길을 흘깃하면서 허준의 눈치를 살폈다.

《선생님, 이 아이올시다.》

허준은 할머니의 태도에는 개의치 않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얘, 내 좀 볼가? 입을 하- 벌려라.》

아이가 입을 하- 벌렸다. 그러나 목구멍에 박힌 가시가 눈에 쉬이 보일리가 만무하였다.

《할머니, 무슨 고길 먹였소이까?》

《잉어탕을 먹였수다. 이애 애비가 낚시질로 잡아온거지요.》

《그 잉어가 남아있는게 지금 있습니까?》

《한마리가 아직 있수다.》

《내 그럼 그 잉어의 열을 좀 씁시다.》

《그렇게 하시우.》

허준은 부엌으로 내려가 잉어의 배를 가르고 팥알만 한 까만색을 띤 잉어의 열을 조심스럽게 손에 받쳐들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그마한 술잔에 풀어서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먹이였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면서도 아이는 그것을 다 받아마셨다.

기동을 돌아보며 허준이 한마디 하였다.

《자넨 얼른 나가서 흰엿 한가락을 사오라구.》

기동이 사온 흰엿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허준은 애한테 말하였다.

《이젠 그 엿을 입에 물고 녹여서 삼키거라.》

엿을 입에 물고 삼키던 아이가 연방 캑캑 하면서 재채기를 했다. 그러면서도 한동안 엿을 빨아먹던 아이가 갑자기 《할머니! 이젠 일없어! 가시가 싹 없어진것 같애!》하고 소리쳤다.

《어디, 정말? 하, 그것참! 조화는 조화로다. 이보게, 자넨 정말 의원인가?》

기동이가 눈을 희뜩거리며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할머니, 의원도 보통의원이 아니라 명의란 말이오이다. 이제 거드름을 피우는 한성의원들이 눈을 까뒤집구 나자빠지지 않나 두고보시우.》

집으로 돌아오면서 기동은 물었다.

《선생님, 어떻게 물고기가시가 그렇게 단박에 없어졌나이까?》

《음, 모든 물고기열은 다 물고기가시가 박힌것을 내려가게 하네. 그리고 흰엿을 입에 물고 넘기게 하면 재채기가 나오는데 그것도 가시가 나오게 하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기동에게는 이 모든것이 신비스럽기만 하였다.

그 다음날 기동이 허준에게 또 물었다.

《선생님, 하품을 크게 하다가 턱이 떨어진 병자를 데리고왔소이다. 그것도 고치시오이까?》

《허허- 어디 좀 보세나.》

중년의 사나이가 입을 벌리고 떨어진 턱을 손으로 부여잡은채 끙끙거리며 방으로 들어섰다.

기동이 옆에서 설명하였다.

《어제 저녁에 하품을 크게 하다가 그만 턱이 덜컥 떨어졌소이다. 그래서 밥도 전혀 먹지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고있소이다.》

병자를 찬찬히 살펴보던 허준이 그에게 물었다.

《술을 좀 하십니까?》

병자가 도리머리질을 하였다.

《음. 기동이, 술 반홉(한홉은 180미리리터) 가져오게!》

《예?! 술로 떨어진 턱을 올려붙이오이까?》

《자넨 옆에서 구경이나 하라구.》

기동이 가져온 술을 받아든 허준은 병자를 자리에 눕히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였다.

《편안히 누워서 이 술을 먹고 한잠 푹 자면 됩니다.》

병자의 목으로 꿀꺽꿀꺽 술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기동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 우린 병자가 편안히 자게 아래방으로 내려가 있자구.》

주량이 세지 않은지 병자는 인차 코를 드렁드렁 골았다. 다시 웃방으로 올라온 허준은 병자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치료가방에서 종이에 싼 가루약을 꺼내들었다.

《선생님, 그건 무슨 초약이오이까?》

《음, 주염나무열매의 가루네.》

허준은 그 가루를 대롱(속이 빈 가느다란 토막)의 한쪽에 조심스럽게 밀어넣고 병자의 코구멍에 들이민 다음 후- 하고 불어넣었다.

카악!- 카악!-

갑자기 병자가 커다란 기침소리를 내였다. 기침을 할 때마다 그의 입이 쩍쩍 벌어졌다. 그가 몇번 기침을 하고난 뒤 허준은 그의 턱을 조심히 만져보더니 다시 병자의 코구멍으로 주염나무가루를 불어넣었다. 이번에는 병자가 상반신을 들썩이며 요란한 기침을 하더니 떨꺼덕- 턱이 맞물렸다.

허준의 얼굴에 느슨한 미소가 피여올랐다.

《자, 이젠 우리 아래방에 내려가서 병자가 깨여날 때까지 기다리자구.》

한식경이 지나자 병자가 깨여났다. 기동이 얼른 웃방에 올라가더니 소리쳤다.

《선생님, 병자의 턱이 이젠 완전히 올라가 붙었소이다!》

《허허허… 이젠 밥도 맘대로 먹어도 되겠네. 그렇게 턱이 떨어지는것을 탈함이라고 하네. 이따금 종종 보는 일이지. 잘 기억해두라구.》

기동은 그외에도 여러명의 소소한 병을 앓는 사람들을 련이어 데려왔으나 허준은 그 어느 병자치료에서도 막힘이 없었다. 허나 기동이 데려오는 병자들 대개가 의원의 손길을 절실히 기다리는 그런 위급한 병자들은 아니였다. 진짜 위급한 병자를 치료하는 허준의 모습을 보고싶은것이 기동의 소원이였다. 어쨌든간에 기동의 열성스러운 노력으로 그리고 허준의 막힘없는 치료술로 그에 대한 소문은 차츰차츰 린근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느날 허준에게 제발로 찾아온 첫 병자가 나타났다.

아직까지도 그닥 조급한 마음이 없었고 또 의서에 대한 구상으로 한가한 시간이 별로 없었던 허준에게는 제발로 찾아온 첫 병자의 출현이 그닥 놀라운 일이 아니였지만 기동에게는 그것이 마치 큰 사변처럼 생각되는 모양이였다.

어쨌든 한성부사람으로서 허준의 의술을 인정하고 찾아온 첫 병자가 아닌가!

찾아온 병자는 해사하게 생긴 젊은 녀인이였다.

《우리 허의원님은 저 경상도에서 쟁쟁하게 이름을 날리시던 명의요.》

기동이 소개했으나 녀인은 별로 흥심없어 하였다. 괜히 기동이 자체가 먼저 설레발을 치는듯싶었다.

(이 병자를 본때있게 치료해야 한성부에 선생님의 소문이 짜- 하고 날터인데!)

이런 생각을 머리속에 굴리며 기동은 웃방으로 병자를 데리고 들어갔다.

《선생님, 선생님한테 치료받으려고 병자가 찾아왔소이다.》

《음, 무슨 병잔가?》

젊은 녀인은 생전 처음 보는 의원의 실력을 가늠해보려는듯 빤히 허준을 바라보았다.

《그래, 어디가 편칠 않나?》

녀인의 대답이 꽤나 야무졌다.

《이 아저씨가 명의원이라고 하던데 의원님께서 한번 쇤네의 병을 알아맞혀보시오이다.》

녀인의 말에 기동이 힐끔 눈총을 쏘았다. 허나 젊은 녀인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음, 좀 보세나.》

허준은 병자의 말에는 개의치 않고 그의 맥을 짚어보기 시작하였다.

촌구맥(손목 요골동맥부위에서 보는 맥)을 짚고 두눈을 쪼프린채 한동안 맥을 보던 허준은 병자의 얼굴과 눈, 혀를 세심하게 관찰하였다. 이윽고 허준이 입을 열었다.

《임자 혼자 사는 녀인이구만.》

녀인은 깜짝 놀랐다.

《아니! 맥과 얼굴에서 그것이 나타나오이까?》

녀인은 허준의 그 솜씨가 놀라운듯 동그란 눈으로 허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음, 혼자 사는 녀인은 음만 있고 양이 없으며 성욕이 있기는 하나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연고로 몸에서 음양이 서로 상박(서로 맞부딪치는것)되게 되네. 그러한 관계로 오른손 손목의 척맥(촌관척맥에서 요골경상돌기부위가 관맥이고 손바닥쪽이 촌맥이며 관맥부위의 뒤쪽이 척맥이다.)에서 그 맥상이 나타나며 또 얼굴색과 혀에서도 그것이 나타나게 되네.》

《그렇소이까?!》

녀인의 눈이 점차 호기심으로 반짝거린다.

《그러니 임잔 바람을 싫어하고 몸이 항상 나른해하며 때없이 오한이 났다, 열감이 났다 하겠구만. 그리고 생각이 많고 번거로우며 잠을 못 자고 생각이 꼬리를 물며 가슴이 답답하고 저절로 식은땀을 자주 흘리고있지. 이런 증상은 좀 걷거나 힘든 일을 하게 되면 더 심해지게 되네.》

녀인이 두손바닥을 찰싹 마주치며 탄성을 올렸다.

《의원님, 옳소이다! 꼭 그렇소이다!》

녀인의 입에서 의원님이라는 소리가 저절로 터져나왔다. 그 소리에 기동의 입귀가 귀밑까지 올리붙었다. 이 넓디넓은 한성부에서 그래도 처음으로 허준을 의원님이라고 불러준 병자이다.

녀인은 허준에게 바싹 다가섰다.

《의원님, 그럼 제 병은 어떻게 하면 고칠수 있소이까?》

《음, 부인들의 병에서는 기본은 혈을 보하는것일세. 그것이 부인병치료의 근본이야. 의술에서는 이것을 본이라고 하지. 그다음에 증상을 보아가면서 울체된것을 없애거나 화를 내리우거나 하는 약을 가감해주어야 하는데 이것을 표라고 하네. 그리고 다음의 말을 참고로 잘 들어두라구.》

녀인이 허준의 말에 한껏 귀를 기울였다. 처음의 그 당돌함은 어데로 갔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기동이 역시 허준의 명의술이 담겨진 단 한마디의 말이라도 흘릴세라 귀를 강구었다.

《원체 부인들은 음기가 많은 체질인데다가 늘 습한 곳에서 일하네. 부인병은 남자들의 병보다 열배는 치료하기가 힘드네. 녀인들은 임신과 해산, 붕루(월경시기가 아닌 때에 갑자기 피가 많이 나오는것) 등 남자들이 없는 일들을 가지고있네. 그리고 자식을 돌보고 키우며 때로는 여러가지의 일로 하여 걱정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등 생각이 지나칠뿐아니라 자신을 쉬이 억제하지 못하기때문에 병의 근원이 깊게 되네. 그러니 부인병은 남자들의 병과는 달리 치료해야 하는거네.》

《그럼 어떻게 치료해야 하오이까?》

《원체 부인보약의 으뜸은 사물탕이네. 허나 임자에겐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내 몇가지 약재를 더 넣어 처방을 해주지. 그 처방대로 한달만 먹으면 틀림없이 병이 깨끗이 나을거야.》

허준은 약처방을 적기 시작했다.

《사물탕, 인삼, 백복신, 귤껍질, 시호, 강호리, 향부자, 감초.》

그리고는 기동에게 그 처방을 넘겨주면서 말했다.

《얼른 이 처방대로 약을 지으라구.》

첩약을 받아든 녀인이 기뻐하는 기색을 띄여보며 허준은 녀인의 귀에다 대고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그리고 가장 좋기는 좋은 배필을 찾아 다시 시집을 가는거야.》

녀인의 얼굴은 익은 꽈리마냥 붉어졌다. 녀인은 허준에게 진정으로 되는 감사의 정을 담아 깊숙이 절을 하였다.

《의원님, 정말 고맙소이다.》

녀인이 물러가자 기동은 궁금증을 털지 못하고 물었다.

《이자 그 녀인에게 뭐라고 하셨소이까?》

《허허- 임잔 아직 그것까진 몰라도 돼!》

허준에게 퉁을 맞은 기동을 바라보며 설유가 빙그레 웃었다.

그날 저녁 허준은 설유에게 심중한 어조로 말하였다.

《부인병은 참으로 복잡하면서도 세심한 치료를 요하는 질병이요.》

설유도 이에 동감이라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적지 않은 의원들이 부인병을 잘못 진단하고 증에 맞는 적합한 처방들을 내리지 못하고있어요.》

허준은 오늘 치료한 젊은 녀인의 치료처방을 설유에게 의서의 기초자료로 적어두도록 하였다. 차후 치료효과는 녀인의 반응상태를 보아야 할것이다.

이날밤 허준은 좀처럼 잠들수 없었다. 끝내 궁싯거리다가 일어난 허준은 책상앞에 마주앉으며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부인병치료에 관한 착실한 의서가 있으면 좋을터인데…》

그러나 하나의 의서가 태여난다는것은 결코 그렇게 말처럼 쉽게 되는것이 아니다. 아직은 붓을 들기에는 자료와 치료경험들이 너무도 적었던것이다.

허준의 이 구상은 그때로부터 28년이 지나서야 실현될수 있었다.

1601년에 이르러 허준은 오랜 기간의 치료경험에 기초하여 1책 1권으로 된 《언해태산집요》를 편찬하였다. 이 책은 또한 이후에 집필된 허준의 인생의 총화작인 거질의 의서 《동의보감》에서 부인문의 기초자료로 되였다.

허준의 예견대로 한달동안 첩약을 달여먹은 젊은 과부는 모든 병증세를 깨끗이 털어버렸다. 그러자 그의 입이 용을 쓰기 시작했다. 소문을 퍼뜨리는데서는 녀인들 특히는 젊은 과부들을 당하지 못한다.

젊은 과부는 말을 덧붙이고 과장을 해가면서 허준의 의술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 허의원님은 얼굴만 척 봐도 만가지 병을 다 진찰해낸다우. 나두 거기서 치료를 받았는데 아, 글쎄 맥도 짚어보지 않구 얼굴만 슬쩍 보구서두 내가 과부라는것은 물론이구 오장륙부의 병을 속속들이 알아맞추더라니깐!》

발없는 말이 천리간다고 얼마 안있어 허준의 명의술은 온 한성시가에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얼마후부터는 너도나도 허준에게로 병자들이 찾아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류이태와 쌍벽을 이를만큼 명의술을 지니고있었던 허준은 이 모든 병자들을 막힘없이 진단해내고 치료하였다.

기동은 날이 갈수록 더욱 성수가 나서 돌아쳤다. 이에 따라 기동이가 배우는 의술도 차츰차츰 높아지기 시작했다.

몇달이 지난 어느날 기동은 자기가 그처럼 고대하던 진짜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던 병자를 살려내는 허준의 명의술을 직접 목격하게 되였다.

그날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경 늙수그레한 령감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의원님, 의원님, 우리 애가 지금 다 죽어가고있소이다.》

허준은 로인의 다급한 소리를 듣고 일어섰다.

《로인장, 무슨 병이오이까?》

《네에- 우리 애가 어제 오후부터 토하고 쉴새없이 설사를 하는데 지금은 눈을 까뒤집구 다 죽게 되였소이다! 한성에서 명의로 소문난 한 의원이 좀전에 왔다갔는데 이젠 때가 늦었다면서 그냥 갔소이다.

의원님, 정말 우리 애를 살릴수 없는가요? 제발 비는데 우리 앨 꼭 살려주시우다.》

《어서 갑시다.》

황황히 내뛰는 로인의 뒤를 따라 허준은 병자의 집으로 달음박질쳤다. 기동도 역시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부지런히 허준의 뒤를 따랐다.

허준이 로인과 함께 방안으로 들어서니 과연 로인이 비명소리를 지를만도 하였다.

스무살전인 애티나는 총각이였다. 혈색이 불깃불깃해야 할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하였고 하루동안의 심한 구토와 설사로 하여 눈확과 볼은 움푹 패여있었다. 그리고 팔다리가 가드라들고 장딴지의 근육이 뒤틀리여 딴딴하게 쥐가 일고있었다. 참으로 위급한 상태였다.

《아뿔싸! 곽란(갑자기 게우고 설사를 심하게 하면서 명치아래와 배가 몹시 아픈 위중한 병)이로구나.》

허준의 입에서 저도모르게 터져나오는 소리였다. 허준은 다급히 병자의 손발을 잡아보았다. 얼음장같이 싸늘하였다. 그의 가슴은 섬찍하였다. 이 상태에서 조금만 지체하면 병자는 틀림없이 죽음의 나락에로 떨어진다.

좀전에 왔댔다던 의원이 손을 들만도 한 위급한 상태였다.

허준은 얼른 치료가방에서 닦은 소금을 꺼내여 배꼽(신궐혈)에 채워넣고 다시 그우에 큰 뜸봉을 올려놓은 다음 불을 달았다. 그리고는 기동에게 소리쳤다.

《기동! 빨리 뜸을 장수에 관계없이 계속 뜨라구. 병자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말이야!》

《알겠소이다!》

기동도 역시 허준이 못지 않게 바짝 긴장되였다. 큰 뜸봉이 타면서 그밑의 소금을 달구어 탁- 탁- 소금튀는 소리가 울렸다.

기동이 뜸뜨는 사이에 허준은 재빨리 생마늘쪽을 갈아 병자의 발바닥에 발라주었다. 다음 열손가락끝의 십선혈에 잽싸게 침을 찌르고 피를 한방울씩 뽑아주었다.

기동은 배꼽에 연신 뜸을 뜨면서도 허준의 이 잽싼 동작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두었다.

로인은 여전히 안절부절 못하고 분주히 손을 놀리는 허준과 기동을 번갈아보았다.

다시금 치료가방에서 첩약을 꺼낸 허준은 로인에게 다급히 말했다.

《로인장, 빨리 이 약을 달여오시우.》

《알았수다.》

로인은 황황히 부엌으로 내려갔다.

좀 있더니 기동이 소리쳤다.

《아! 병자가 몸을 움씰움씰 움직이오이다!》

허준은 다급히 맥을 짚어보았다. 지(느린 맥)하고 미(미세한 맥)하던 맥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잠시후에는 병자가 까슬까슬하게 타든 마른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러나 아직은 장담할수 없었다. 아직도 병자는 생사기로에서 헤매고있었다. 허준은 재빨리 닦은 소금 두사발을 각각 종이에 싼 다음 가슴과 배에 올려놓았다. 로인이 탕약을 가지고 들어오자 허준은 재차 소리쳤다.

《로인장, 어서 불담을 담은 다리미를 이리 가지고오시우.》

허준은 조심스럽게 병자의 머리를 들고 숟가락으로 탕약을 먹이기 시작했다. 탕약을 다 먹일무렵에 로인이 뜨거운 불담을 가득 담은 다리미를 들고 황황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허준은 그 다리미로 가슴과 배에 놓여있는 닦은 소금을 달구기 시작하였다.

잠시후 병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허준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어리자 예민한 감각으로 그의 일거일동을 살피던 기동이가 슬며시 다가와 물었다.

《선생님, 배꼽의 소금뜸과 가슴과 배의 소금찜질은 왜 하오이까?》

이제는 기동과 이야기할 마음의 여유가 생긴터라 허준은 목소리를 죽여가며 설명해주었다.

《음, 곽란은 매우 위중한 급병이야. 조금만 치료를 잘못하거나 늦게 손을 쓰면 단박에 죽어버리지. 저렇게 설사와 구토가 심하면 정신을 잃고 손발이 싸늘하게 되며 위와 배가 꼬이는듯 아프고 나중에는 이 병자처럼 손과 발에 쥐가 일면서 힘살이 뒤틀리우게 되네. 이때 배꼽에 뜸을 련속 뜨고 가슴과 배에 더운 소금찜질을 해주면 더운 기운이 속으로 들어가면서 병자가 살아나게 되네.》

《이자 금방 병자에게 먹인 처방은 뭣이오이까?》

《천남성가루 3돈, 대추 세알, 생강 다섯쪽을 넣은것이네. 게우고 설사하면서 팔다리가 싸늘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쓰는거지.》

드디여 병자가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로인이 허준의 앞에 넙죽 엎드려 목메인 소리로 웨쳤다.

《의원님, 고맙소이다! 다 죽게 된 우리 아들을 살려준 의원님은 정말 우리 가족의 생명의 은인이로소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기동이가 물기어린 두눈을 슴벅이다가 코를 씩 훔쳤다.

허준이 로인의 손을 잡아일으켜세웠다.

《로인장, 어서 일어나시오이다. 아직은 맘놓기가 이르오이다. 지금 탈양(탈수)상태에 있으니 이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맘을 놓을수 있소이다. 몹시 게우고 설사를 해서 아직 원기가 부족하고 팔다리가 싸늘하며 얼굴도 꺼멓고 숨이 차하오이다. 이걸 없애야 하오이다.

이제 제가 대주는대로 하시오이다.

생강 21돈을 좋은 술에 달여서 자주 먹이시오이다. 뿌리가 그대로 달린 파 21대를 술에 달여 먹여도 되오이다. 그리고 파와 소금을 짓찧어서 배꼽아래의 기해혈에 붙이시오이다.》

기동은 다 죽어가는 곽란병자를 능숙한 솜씨로 치료하는 허준의 의술을 보고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해하였다.

치료를 잽싸면서도 침착하게 해나가는 허준의 모습에는 높은 의술을 지닌 사람에게서만 엿볼수 있는 자신심이 한껏 어려있었다. 그럴수록 기동은 허준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그의 의술을 하루빨리 더 많이 배우고싶은 욕망으로 불타올랐다.

그날 저녁 허준은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나라의 방방곡곡에서 얼마나 많은 저같은 병자들이 치료를 제때에 받지 못해 죽어가고있을가!)

오늘 자기가 살려낸 환자도 한성의 의원들이 돌려놓은 환자였고 이미 황천길에 발을 들여놓았던 사람이였다.

(저런 구급병자들을 정확히 진찰하고 치료할수 있는 의서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 의서를 보고 낮과 밤을 구분하듯이 병상태를 구분하여 수많은 죽어가는 병자들을 살릴수 있지 않겠는가!)

역시 의서에 관한 문제였다.

한성부에 와서 치료하면서 허준은 의서의 중요성과 좋은 의서 한권이 의원들뿐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의술을 깨우쳐주고 병자들의 생명을 구원하게 할수 있음을 새삼스럽게 절감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큰 의서를 쓰기로 결심한 자기의 뜻과 목표가 참으로 의롭고 옳은 일이라는것도 다시금 확신하였다.

설유가 깊은 상념에 잠겨있는 허준에게 조용히 다가와 나직이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구급방에 대한 의서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있소.》

설유가 그윽한 눈에 함뿍 웃음을 담았다.

《욕심두 참, 일전에는 부인병에 대한 의서가 필요하다 하시지 않았어요?》

《음, 그랬지. 허나 부인병도 그렇고 구급방도 그렇고 아직은 자료가 너무도 빈약해.》

그의 말꼬리는 저도모르게 흐려졌다. 아직은 너무도 자료가 빈약하였던것이다.

허준은 그때로부터 34년이 지난 1608년에 《언해구급방》을 편찬하였다. 이 의서에서 허준은 오늘 치료한 병자와 같은 곽란, 구토, 설사, 탈양 등 34가지 구급병증에 대한 원인, 증상, 치료처방들을 구체적으로 써놓았다.

이날밤 허준은 설유에게 자기가 오늘 적용한 곽란의 전 치료과정과 처방 그리고 탈양의 치료처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적어두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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