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회)

제 2 장  산음의 명의

10

 

허준이 류이태에게서 의술을 배우기 시작한 때로부터 어느덧 수년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허준의 의술은 몰라보게 성숙되여 점차 명의로서의 그의 이름은 산음현내를 벗어나 린근 고을에까지 소문나게 되였다. 이제는 오히려 류이태가 놀라울 정도로 병진단이 정확하고 치료효과가 컸다.

허준의 성장을 두고 기뻐하는것은 류이태뿐이 아니였다. 설유의 그윽한 눈은 허준으로 하여 더욱 반짝이고 그래서인지 그 아릿다운 미모는 한껏 피여난 만첩처럼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밤늦도록 의술을 탐구하고 치료에 몰두하다가도 아릿다운 설유를 마주하면 순식간에 피곤이 사라지고 산이라도 허물 기운이 솟는 허준이였다.

어느날 저녁이였다.

이날도 허준이 밤늦게까지 왕진치료를 마치고 돌아오니 류의원에게서 자기 집에 건너오라는 기별이 왔노라고 어머니가 전해주었다. 허준은 그길로 류이태의 집문을 두드렸다. 오늘따라 류이태의 인상은 별스레 심각해보였다.

혹 무슨 일이 생겼는가? 아니면 병자치료에서 내가 무슨 과실을 범했는가? 속내를 알수 없었다.

《자네 우리 설유를 어떻게 생각하나?》

밑도끝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류이태의 그 말에 허준은 어리둥절하여 두눈만 꺼벅거렸다.

《우리 설유를 어떻게 생각하나 말일세.》

류이태가 재차 물었다. 묻는 의도가 짐작되자 허준의 얼굴은 저도모르게 시뻘개졌다. 허준은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나직이 대답하였다.

《어떤 의미로 물어보시는지… 구태여 대답할것 같으면 의술에 밝고… 그리고 성격이 명랑하구 또 마음이 고운…》

《허어 참!》

허준의 어정쩡한 대척에 류이태는 허거픈 소리를 내였다.

《이보게, 난 그런 뜻으로 말을 뗀것이 아닐세. 뭘 그렇게 옴니암니할게 있나? 통짜로 내 묻네만 자네 우리 설유를 좋아하는가 말일세.》

허준의 가슴은 들먹거렸다. 드디여 때가 온것이였다.

설유같은 처녀를 마다할 총각이 어디 있으랴. 설유를 내놓고 천하절색이래도 싫은 허준이였다.

터놓고말해서 이미 허준과 설유의 사랑은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셈이였다. 서로의 마음은 뻔하나 그 어느쪽에서도 용기를 내여 꼭지를 떼지 못하고있을뿐이였다. 그 꼭지를 오늘 류이태가 시원스럽게 떼준셈이다.

《내 일전에 우리 설유에게도 한번 물어보았는데 자넬 좋아하는 눈치더군. 그래서 좋은 날을 잡아 자네들의 혼례식을 치르어주자고 하는데 임자의 의향은 어떤가?》

허준은 격정에 넘쳐 대답하였다.

《선생님, 고맙소이다!》

류이태의 얼굴에 만시름을 잊은듯 흐뭇한 기색이 어렸다.

한성에 올라간 스승이 온 일가와 함께 멸살된 일이 있은 다음부터 류이태는 과거는 물론 조정의 정사에도 전혀 무관심하였으며 오로지 의학과 병치료밖에는 몰랐다. 여가만 있으면 설유에게 의학의 원리와 의술의 리치를 처음부터 하나씩 배워주었다. 하면서도 설유가 제발 사내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머리에서 떠날줄 몰랐다. 어쨌든 녀자는 출가외인이라 시집가면 남편과 시집에 매여사는 몸인것이다. 인물곱고 령리하며 마음씨 또한 비단결같은 설유가 꽃처럼 피여날수록 류이태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떤 사내가 저애의 배필이 될고 하는 은연중의 근심이 바지가랭이에 달라붙는 도꼬마리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헌데 뜻밖에도 허준이가 류이태의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다름아닌 의학에 뜻을 둔 사내, 그것도 여느 사람과 달리 의기가 높으면서도 정열적이고 정직한 사내 그리고 설유자신도 마음에 들어하는 젊은이였다.

처음에는 서자라지만 량반의 피줄이라 뜨아히 대했었다. 그의 배다른 형이라는 허모가 설유에게 눈독을 들이고 횡포스레 놀아댄것을 그의 목에 꽂힌 동침을 뽑아주면서 짐작한 류이태라 허준 역시 그런 난봉군이고 거들먹거리는 도령이라 여겼었다. 헌데 지내볼수록 그에게 끌려들어갔다.

향학열에 불타는 그 학구적인 태도에 앞서 정직하고 대바른 품성과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무엇인가 기여하려는 그 의기가 마음에 들었다. 후세에도 사람들에게 리익되는 의서를 남기려는것은 류이태의 뜻이기도 하였다. 허나 류이태는 고작 자기의 의술경험에 대한 글이나 남기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학의 생둥이에 불과한 허준은 처음부터 나라와 백성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거질의 의서를 목표로 내세우고 의학탐구의 길에 들어섰으니 이는 류이태에겐 전혀 뜻밖이였다.

류이태의 몸도 이전같지 않았다. 녀인의 정을 모르고 살아온 류이태이다. 그러다나니 때이르게 겉늙었고 등도 구부러지기 시작하였다. 자기가 알고있는 치료비방과 의술을 이젠 허준에게 전부 넘겨주었다고 생각한 류이태는 자기가 더 나이들기 전에 설유와 허준의 혼사를 성사시키기로 결심했던것이다.

《설유도 그렇고 청원 이 사람, 자네도 이젠 높은 의술을 지녔으니 둘이 서로 가정을 이루고 마음을 합쳐 의술을 마음껏 련마하게나. 내 오늘 이렇게 설유를 자네에게 맡기고보니 이젠 눈을 감아도 저애의 부모들앞에 떳떳이 나설수 있게 되였네.》

《아버지!》

설유가 류이태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허준의 눈에도 이름할길없는 격정의 파도가 일었다.

《아버님!》

그로부터 며칠후 류이태는 허준과 설유의 혼례식을 차려주었다.

원래 류이태는 검소한 사람이였다. 그의 집에서 혼례식을 한다고 하면 그에게서 치료를 받고 새 생명을 받아안은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찾아들것은 뻔하였다. 이것을 우려한 류이태는 구메혼인(널리 알리지 않고 하는 혼인)을 하기로 하였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류이태라 혼례식에는 허준의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마을의 좌상령감만이 참가하였다.

좌상령감이 혼례상앞에 원앙새마냥 다정히 앉아있는 설유와 허준을 바라보며 채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의원님, 저렇게 끌끌한 배필을 두시고 어이 이렇게 혼례식을 검소하게 하시오이까?》

《우리 집에서 혼례식을 한다는걸 알면 아마 열흘동안은 이 집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질 않을것이오이다. 꼭 혼례식을 요란스럽게 해야만 잘산답디까? 좌상어른, 전 이렇게 조용히 치르는것이 더 맘 편하오이다.》

려월은 그저 목이 메여 눈물만 흘렸다.

《선생님, 장차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오이까?》

려월은 이제는 그야말로 한이 없는듯 하였다. 서자의 운명을 타고난 아들의 장래를 두고 얼마나 속을 태워왔고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자신의 처지를 한탄해왔던가.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자기 아들이 나래를 달게 된것이다.

류이태의 집에서는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허준은 밤새도록 설유와 저들의 앞날을 두고 소곤거렸다. 휘영청 놋대야같이 둥근 보름달이 시샘이나 하듯이 자지 않고 두 젊은 남녀의 침상곁을 뜰줄 몰랐다.…

두해가 더 흘렀다.

그새 허준과 설유사이에는 딸애가 태여났다. 허준은 이왕이면 자기의 대를 이을 아들이 태여났으면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그런대로 딸은 딸대로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허준은 류이태와 상론하여 아기의 이름을 예영이라고 지었다.

어느날 류이태가 허준과 설유를 불러앉히고 자못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이 사람, 이젠 자네도 나래를 펴야 할 때가 된것 같네. 자넨 이젠 나에게서 배울건 다 배웠어. 어찌 보면 나보다 의술이 더 높다고 할수 있지. 그러니 이 촌고을에서 맴돌지 말고 사람들이 많고 번화한 곳으로 가야 하겠네.》

《선생님,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시오이까?》

류이태를 불러 《아버님》이라 부르는것이 례사로운것이지만 허준은 아직까지도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렇다. 류이태는 단순한 장인이 아니라 그의 운명을 변화시켜준 스승이였고 인생을 옳바로 정해준 은인이였던것이다.

아마 그래서 후세의 사가들은 류이태를 가리켜 허준의 장인이라고 기록한것이 아니라 허준의 스승이라고만 기록을 남겼는가 본다. 류이태의 곁을 떠난다는것을 생각조차 못한 허준이였다. 설유도 놀라운 눈길로 아버지를 빠끔히 쳐다보았다.

《이보게, 자네 의술이 이 산음고을에서는 이름이 짜하지만 진짜 그 의술이 어떠한가 하는것을 알려면 보다 인총이 많고 의원들도 많은 곳으로 나가보아야 하네. 그래야 자네의 뜻을 펼치는데도 유리할수 있어.》

허준은 그제서야 류이태의 권고에 담겨진 진의도가 깨도되였다.

《그래 자네의 생각엔 어데로 나가면 좋을듯 하나?》

《갑작스레 당하는 일이라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소이다.》

《그렇단 말이지.… 내 생각에는 한성부로 올라가는게 좋을것 같네.》

《한성부로 말이오이까?》

《그렇네. 이왕지사 나래를 펼바에는 이 경상도땅에서만 어물거리지 말고 나라의 수도인 한성에 나가는게 마땅하지 않겠나. 그러니 페일언하고 한성에 올라가게!》

류이태의 말을 듣고보니 그럴사하였다.

《내 한성부에 자네들이 거처할 맞춤한 곳을 소개해달라고 줄을 이미 놓았네. 한성에 올라가면 장기동이라는 젊은이를 찾아가게.》

《장기동이라구요?》

《그렇네. 장기동일세. 그 사람으로 말하면 몇해전에 한성에 갔을 때 알게 된 젊은이인데 그 사람 부친의 병을 내가 고쳐주었지. 그 젊은이가 학문에 대한 열의도 여간 아니고 또 총기가 빠른것 같았네. 내가 한성에서 머무를 때 날 따라다니면서 의술을 좀 배워달라고 거듭 졸라댔었지만 그때엔 어디 시간이 있더라구? 그래서 그의 청을 들어주지 못했었는데 참 좋은 젊은이야.

그곳에서 거처하면서 그 사람에게 임자가 의술을 좀 배워주라구. 앞으로 도움이 될거네.》

류이태에게는 한성에 면식이 있는 량반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 대개가 다 류이태의 치료를 받은 량반들이였다. 허나 류이태는 그런 량반들보다 평범한 백성들이 더 진실하고 사심이 없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더우기 장기동은 저 허준이처럼 의술에 뜻을 둔 젊은이였다.

현시점에 와서 류이태는 자기와 의술이 엇비슷한 허준이가 이제는 제자를 키울 때가 되였다고 여겼다. 그런 의도에서 류이태는 허준의 거처지를 기동의 집으로 택했던것이다.

《자네가 한성에서 자리를 잡고 명의라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오면 그때엔 내 만사불구하고 찾아가겠네. 헌데 그렇게 되기가 조련치 않을거네. 왜냐면 한성에도 한다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거니와 또 터세가 간단치 않으니 말일세.

그러니 자네가 잡도릴 단단히 해야 하네. 아마 그곳 의원들은 자네가 산음에서 왔다고 하면 촌의원이라고 눈아래로 볼것은 불보듯 뻔해. 게다가 웬간하게 명의라 일컫는 그네들은 조정에 줄이 있어 그 배경도 홀시 못할거네.

속담에도 있지 않나. <조정에 줄이 하나 있으면 온 가문이 살구난다.>는 말처럼 그만큼 한성의 의원들은 세도가들을 끼고 거드름을 피우길 좋아 할거네. 여차하면 자네를 촌의원이라고 시기질하던가 무슨 감투를 씌워 모해할수도 있네. 그러니 그런 모함에 들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돌리게.》

《알겠소이다.》

허준은 남쪽의 자그마한 고을에서 의원노릇이나 하는 류이태가 어쩌면 저리도 세상물계를 바둑판 내려다보듯 환할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공경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쨌든 그의 문하에서 의술을 배우면서 이 세상 리치를 어느 정도 터득했다고 자부하던 허준이였지만 이 시각 생소하고 번화한 한성으로 떠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앞날이 근심되였다. 내 이제 어디에 가서 이런 사심없고 훌륭한 스승을 다시 만날수 있을가.

류이태는 허준의 앞에 두툼한 두권의 책을 내놓았다.

《이건 내 한생의 총화라고 말할수 있어. 나도 한생에 큰 의서를 내놓으려고 했는데 이젠 늦었어. 좀더 일찌기 시작했어야 하는걸 젊은 시절에는 명의라고 사방에서 추어주는 바람에 치료에만 몸을 잠그다보니 미처 그 생각을 못했었지. 나이가 좀 들어 뜻을 세우고 시작해보았지만 역시 큰 의서를 만든다는것이 그렇게 간단치 않구만. 내 나이엔 인젠 늦었어. 그러니 이걸 자네에게 넘기겠네.》

《선생님!》

《음, 내 말을 마저 들게나. 여기에 <내경편>, <외형편>, <잡병편>, <탕액편>, <침구편> 등 다섯편으로 구분해놓고 내 자료들을 넣느라 했지만 아직 종합적인 큰 의서로 되려면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이건 많은 품과 치료경험, 시간을 요구하는 일이지. 이걸 앞으로 자네가 만들려는 큰 의서를 쓸 때 참고로 하게나.》

허준은 가슴이 뭉클하여 머리를 수그렸다. 그의 머리우에 류이태의 석쉼하면서도 진지한 목소리가 계속 울렸다.

《그리구 내 자네에게 다짐둘것이 있으니 명심해서 듣게나. 지금 이웃나라가 큰 나라랍시고 저들의 의서만 똑 제일이라고 으시대고있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네. 우리 나라의 적지 않은 의원들도 제 나라것은 보잘것없다면서 그 나라의 의서만 끼고다니면서 내세우고있지. 자고로 우리 나라의 의학은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있네. 오랜 의술의 력사를 가지고있는 우리 나라가 왜 의서에서 다른 나라에 뒤지겠나? 의서를 쓸바에는 그 의서들을 릉가하는 그리고 후세의 사람들까지도 애용하면서 볼수 있는 보감으로 될만 한 큰 의서를 써야 하네.

알겠나?

그렇게 큰 의서를 쓰려면 이제부터 일생을 부지런히 뛰고 또 뛰여야 할거네. 자넨 한성에 가서도 병자들을 열심히 치료할뿐아니라 치료에만 옴하지 말고 꼭 좋은 치료경험들을 자료화해서 분류하여 글로 남기게.

참, 그 일은 설유, 네가 놓치지 말구 할 일이다. 그것이 하나하나 모아지면 앞으로 큰 의서로 만들수 있는 좋은 밑천으로 되는거야.》

참으로 귀중한 조언이였다. 허준은 물론 예영이를 안고있는 설유도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그 말을 귀담아들었다.

《그리고 동서고금의 의서들을 될수록 많이 탐구하여 거기에서 좋은것들은 받아들이도록 하게. 그러고보면 아직 자네나 나에게는 의서들이 많질 못해.》

《선생님, 알겠소이다!》

류이태의 시선이 설유에게로 향하였다.

《설유야, 네 소임도 자못 중요하느니라. 이 사람이 저렇게 큰일을 감당하자면 혼자서는 힘에 부칠게다. 그러니 넌 그전에 나에게 했던것과 같이 서사작업을 잘 돕도록 해라.》

《아버지, 알겠사와요.》

《음, 이젠 내가 말할건 다 말한것 같구나.》

류이태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허준을 기대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단호히 잘라말하였다.

《결심이 섰으면 래일 곧 떠나도록 하게나.》

그 이튿날 허준과 설유는 어린 딸 예영이를 안고 외할머니와 어머니, 스승의 바래움을 받으며 산음고을을 떠났다.

류이태가 그들의 모습이 점이 되여 사라질 때까지 손저어 바래주었다. 사랑하는 딸과 사위 아니, 친혈육보다 더한 정으로 의학의 길에 들어선 제자에게 심혈을 기울인 류이태였다.

과연 그들의 앞길에 어떠한 운명이 놓여있겠는지. 아직은 가늠할수 없는 허준의 한성행이였다.

오늘따라 별스럽게 깊숙이 패인 류이태의 밭고랑같은 주름살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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