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제 2 장  산음의 명의

8

 

산음에 온지 이듬해 그러니 설유가 일곱살때였다. 산음에 와서도 류이태는 숱한 매파들이 뻗닿게 찾아왔으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설유한테 다른 어머니를 안겨주고싶지 않았고 또 먼저 돌아간 안해에 대한 도리상감정은 류이태에게 그런 마음의 여유를 주지 않았던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첫새벽이였다. 첫닭이 갓 홰를 칠가말가할무렵 류이태는 자기 집 대문을 요란스레 두드리는 소리에 빗장을 벗기였다. 어느 량반댁 하녀인듯싶은 열일여덟살난 처녀애가 밖에 서있었다.

《저- 의원님! 첫새벽부터 소란을 피워 안됐소이다. 사실 한성에서 공부하던 우리 아씨가 어제 내려왔는데 어찌된 일인지 정신을 잃고 헛소리만 치는데 당장 무슨 변이 날것 같소이다.》

《처년 뉘집 하녀인가?》

《전 <딸딸이네 집> 아니, <한성댁> 에 있소이다.》

《한성댁》 이라면 잘 몰라도 《딸딸이네 집》 이라면 산음고을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전 임금때 한성에서 재사로 명성날리다가 기묘사화에 련루되여 내려온 집인데 벼슬살이와 담쌓고 살아가던 주인량반은 이미전에 세상을 떠나가고 녀자들만 사는 집이다.

그 집에 한성에 올라가 공부하는 랑자가 있다는 소문을 대충 들어 알고있던 류이태는 딴말을 하지 않고 방안에 들어가 치료가방을 들고나왔다. 어느새 깨여난 어린 설유가 《아버진 어데 가나?》 하고 묻기에 《인차 돌아오마. 그러니 가마안에 있는 밥을 식기 전에 먼저 먹거라.》 하고 이른 류이태는 하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딸딸이네 집》에 당도하니 안주인과 집식구들이 우르르 밀려나와 류이태를 맞아주었다.

류이태가 병자를 들여다보니 스무살이 지난 과년한 랑자가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데 퍽 복스러웠다. 맥진으로 류이태는 이 랑자의 병이 신경쇠약으로 오는 병임을 간파하였다. 주위를 다 물리고난 류이태는 랑자의 어머니에게 조용히 물었다.

《딸의 나이가 몇이오이까?》

《에구, 무슨 의술인지 뭔지 배운다면서 스물두살이 되였수다.》

《의술이라니요? 그건 무슨 소리오이까?》

《내 녀동생이 한성에 있는데 몇년전에 우리 아이를 한성에 데리고갔지요. 동생 남편이 조정에서 무슨 사간원인지 뭔지 하는데서 벼슬을 하고있는데 우리 애를 의원양성소라는데 넣었는가봅디다.》

《전의감에 있는 의원양성소말이오이까?》

《그런가봅디다. 우리 애가 거기서 공부한지 이젠 해수로 두해째가 되지요. 이젠 시집갈 나이가 지났건만 의술인지 하는데 미쳐 꿈도 안꾸었지요. 그래, 애 언니랑 나랑 근심이 고드름처럼 매달려있었수다. 헌데 어제 갑자기 내려오지 않았겠수. 이 웬일이냐 해서 물었더니 몸이 말째 좀 안정하려구 내려왔다는게 아니겠수?! 그리고는 오자바람으로 한술 대충 들고는 자리펴고 눕습디다. 우린 곤해서 그러는가 했는데 밤새 신음소릴 내기에 들여다보니 이렇게 인사불성이우다.

의원님, 대체 우리 애의 병이 무슨 병이우?》

류이태는 속으로 재밀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딸애의 병은 상사병이옵니다. 몸에 병이 온것이 아니라 마음에 병이 들었소이다. 이런 병에 신통한 약이 없거니와 그 어떤 치료를 해도 백약이 무효이오이다.》

랑자의 어머니가 아부재기를 쳤다.

《상사병이라니? 그 무슨 황당한 소리유? 남들이 알면 큰일나겠수다.》

류이태는 빙그레 웃었다.

《어머니, 제 진단을 믿으시오이다. 터놓고 말해서 이런 상사병에 걸린 랑자들은 물론 총각들도 제 많이 보았소이다. 그러니 제 진단을 믿으시구 딸의 마음을 될수록 안정시켜야 합니다. 그리구 절대로 이런 병을 앓는다는 소문을 내지 마시오이다. 댁의 하인들은 물론 집안사람들도 모르게 하소이다.》

그제야 랑자의 어머니가 머리를 끄덕이였다.

《난 의원님이 주위의 사람들을 다 치우라고 해서 우리 딸애한테 불치의 병이 생긴줄 알구 가슴이 덜컥했수다. 정말 의원님은 병도 잘 고치지만 사람의 마음도 잘 아시는군요. 헌데 이런 병엔 특별한 치료비방이 없는지요?》

《그 병에 특효약이 하나 있긴 한데…》

랑자의 어머니가 그의 턱밑에 바싹 다가앉았다.

《그 특효약은 전적으로 딸한테 달려있소이다. 딸이 정신을 차리고 마음이 안정되면 어머니가 조용히 딸에게 그런 병을 가져다준 사람이 누구인가 물으시고 될수록이면 딸의 소원대로 그 사람과 혼례를 치르어주는것이 특효중의 특효약이옵니다.》

이어 류이태는 랑자의 입맛을 돋구는 음식을 렬거하면서 하루빨리 원기를 돋구어주라고 당부한 다음 그 집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류이태의 머리속에서는 의원양성생이라는 랑자의 모습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녀인의 몸으로 의원양성생이 된다는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류이태의 랑자에 대한 립장은 같은 동업자로서의 관심이랄지 아니면 아릿다운 그 용모에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원의 길을 택했다는 그 자체에 대한 놀라움인지 아직은 그자신도 가늠하지 못하였다. 하여튼 류이태의 랑자에 대한 왼심은 그런 처녀에게 길복스러운 생활이 차례졌으면 하는 생각으로 번져졌다. 그러면서 한성에 있는 의원양성소에서 의술을 배웠다니 그곳 의생이 아니면 한성의 그 어느 량반자제와의 련정관계로 상사병이 났는가부다 하고 치부해버렸다.

그로부터 두달후 병자치료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류이태가 큰길에 나섰는데 불쑥 웬 녀인이 길을 막아서는것이였다. 무슨 병치료때문에 그러는가부다 생각하며 류이태가 녀인의 얼굴을 쳐다보는데 다짜고짜로 그 녀인이 류이태의 팔을 잡아끌며 골목으로 데리고가는것이였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류이태는 녀인이 팔을 끄는대로 골목에 들어섰다.

골목에 들어선 녀인이 류이태를 향해 되알지게 내쏘았다.

《당신같은 의원이 어떻게 명의로 소문났어요? 이 산골에서 명의랍시고 아무 소리나 망탕 하며 다니는 당신은 명의는커녕 의원자격도 없어요! 돌팔이같은거!》

류이태는 어안이 벙벙해서 녀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한참만에야 류이태는 그 녀인이 의원양성소에 다닌다는 랑자임을 알아보았다. 그 집에 갔을 때에는 꽤나 복스럽게 생겼구나 하고 여겼는데 정작 마주서니 얼굴 생김 하나하나가 꼭꼭 돌려맺힌게 여간 오돌차보이지 않았다.

류이태는 미처 정신차릴새없이 따벌처럼 마구 쏘아대는 랑자의 행동이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성날줄 알았던 류이태가 오히려 웃어대자 랑자가 제편에서 얼굴이 달아올라 더 성이 나서 쌕쌕거렸다.

《울어도 시원치 않겠는데 웃어요? 당신은 이자 보니 얼굴이 솥뚜껑 한가지군요!》

류이태는 그만에야 폭소를 터뜨렸다.

《하! 하! 하!-》

성나다 못해 얼굴이 화독처럼 새빨개진 랑자가 똘랑똘랑 눈물을 떨구더니 그만에야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소리내여 울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류이태는 당황해났다. 밑도끝도 없이 나타나 자기보고 돌팔이라고 욕을 퍼붓는 랑자의 행동을 보며 이 랑자가 왜 이럴가 혹시 자기가 상사병에 걸렸다고 한 소리를 두고 이러지 않나 생각하면서 너무나도 천진스러운 모습에 저도모르게 웃음집이 흔들거렸던 류이태였다. 헌데 랑자가 골목에서 소리까지 내며 섧게 울자 류이태는 방금까지 성을 냈다가 급작스레 울어대는 랑자의 행동에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결혼한지 일년만에 안해가 세상을 떠나고 혼자서 설유를 키우며 사는 류이태의 나이는 당년 스물아홉살, 비록 장가를 갔다지만 녀성들과의 교제가 많지 못하였다. 류이태는 어떻게 랑자를 달랠지, 또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그저 우두커니 랑자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한자리에 서있었다.

어느덧 사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행인들이 집으로 가는 걸음을 다그치는 때이다. 행인들이 낯익은 의원이 웬 녀인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모양을 힐끔힐끔 곁눈질해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한참후에 얼굴을 든 랑자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초면에 례의도 없이 아무 말이나 망탕 한 소녀를 용서하세요.》

류이태는 저 혼자 열을 올리고 저 혼자 울고 또 저 혼자 용서를 비는 랑자의 보기 드문 성정이 놀랍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하여 제편에서 량해를 구했다.

《용서는 무슨 용서? 내가 안됐소. 랑자가 심중히 말하는데 웃었으니 그거야말로 상대방에 대한 무례한 행동이지. 진심으로 사죄하오. 헌데 몸은 다 나았소? 전번에 갔을적엔 인사불성이더니…》

《이젠 퍽 나았어요.》

《이자 방금 날 보구 돌팔이라 욕하던데 무슨 일이 있었소? 내가 병치료를 잘못한게 있소? 아니면 랑자한테 내가 무슨 해되는 짓을 한게 있소? 왜 그렇게 날 악의에 차서 욕하오?》

랑자가 얼핏 류이태를 쳐다보았다.

《의원님이 우리 어머니에게 내 병명을 뭐라구 하셨지요?》

아차! 하고 류이태는 혀를 깨물었다. 짐작한바그대로 상사병이라고 진단한데서 사달이 난것이다. 그만큼 당부했건만 그의 어머니가 주책없이 주절댄것이 랑자의 귀에 들어갔구나. 처녀총각시절에 상사병에 걸렸다는것은 자기의 인품에 손상을 준다. 더구나 총각켠보다 처녀켠에서는 더 창피로, 부끄러움으로 여기는 문제이다.

류이태는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랑자의 눈길을 애써 피하며 류이태는 침묵으로 대답하였다.

《의원님이 보기엔 제가 그런 상사병에 걸릴 사람같이 보이나요?》

그 물음에 류이태는 온몸이 굳어졌다. 그 물음은 그냥 침묵으로 대할 문제가 아니였다. 의원으로서 더구나 처녀를 맥진하면서 오진했다는것이 아닌가. 단순한 오진이 아니라 이는 류이태의 의술과도 관련된 문제이다.

《그럼, 내가 진단한것이 엉터리라는거요?》

《…》

이번엔 랑자켠에서 그 물음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듯 대척이 없다.

《난 여직껏 오진한적이 없소! 그리구 랑자를 맥진하면서 난 오진하지 않았소!》

랑자가 그 말에 반응을 하지 않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류이태는 무의식적으로 랑자의 뒤를 따랐다. 지금 랑자가 어디로 가는지, 집에서 어린 설유가 기다린다는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그저 랑자가 걸어가는대로 따라걸었다.

한참 걷다보니 남강이 앞에 펼쳐진다. 이날 죽순은 류이태에게 자기가 고향에 왜 내려왔고 또 의원양성소를 그만둘 생각이라는것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왜서인지 류이태를 처음으로 대면하지만 숨기고싶지 않았던것 같았다.

후날 류이태와 리별한 죽순은 그날 왜 자기가 처음으로 대면한 류이태에게 자기의 속을 다 털어놓았는가고 스스로 묻군 하였다. 바로 이날밤이 아니라면 자기의 가슴에 영원히 아물지 못할 아픈 상처가 생기지 않을수 있지 않을가. 그러나 도저히 그 물음에 죽순은 대답할수 없었다.

한편 류이태는 자기에게 터놓는 죽순의 지나온 경력을 들으면서 전혀 이상스럽게 생각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다정하게 지내던 녀동무를 만난듯싶고 또 응당 자기가 그의 과거사를 알고있어야 하는것처럼 생각되였다.

죽순의 이야기를 다 듣고난 류이태는 조용한 어조로 이렇게 말해주었다.

《의원이란 직분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내 생각엔 내의원의 그 스승이 랑자를 남다르게 생각하는것 같구만. 그리구 내가 잘못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랑자도 그 내의원의 선생을 남다르게 여기는것 같소. 그렇지 않으면야 그리도 열성스레 배우던 의학공부를 걷어치우고 고향에 내려올수 있겠소?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요?》

그때 죽순은 어떻게 대답했던가. 한참후에 죽순의 입에서 이런 대답이 흘러나왔다.

《모르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난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요. 이건 티끌만 한 거짓도 없는 내 진심이예요. 내 이 말을 믿으세요. 헌데 무슨 영동할미가 붙었는지 그 사람의 손이 그냥 내 몸을 만지는것 같은게 도저히 마음을 안정할수가 없어요. 그 사람만 보면 내 몸에 그 사람의 체취가 남아있는것 같아 스스로 수치스럽고 모멸감이 나는건 웬일일가요?》

류이태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남쪽으로 흐르는 남강의 물결이 세차게 출렁거리며 강변을 걷는 두사람의 발등을 적셔주었다. 여느때같으면 신발이 젖을가봐 물결을 피하던 사람들이였건만 그에 아랑곳없이 그냥 내처 강변을 따라 걸었다.

《내 생각엔 말이요. 이모님이랑 또 이모부랑 의원양성소에 넣어준 의도는 참 훌륭하다고 보오. 의술로 사람들의 목숨을 구원하는 일은 참 훌륭한 일이 아니겠소. 그러니 랑자가 다시 한성에 돌아가 의술을 그냥 배우는게 좋을것 같구만.》

《?!》

이날밤 류이태는 죽순을 그의 집에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서너달이 지난 어느날 전번에 왔던 죽순이네 하녀가 류이태를 찾아와 아씨와 마님이 의원님을 데려오라고 했다는 기별을 하였다. 류이태가 하녀의 기별을 받고 죽순의 집으로 가니 죽순이와 그의 어머니를 비롯한 온 집안 식구들이 다 있었다.

알고보니 래일 죽순이가 한성으로 떠난다고 하였다. 그간 죽순이를 통해 류이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가 송별식사가 끝나자 류이태와 죽순이를 앉혀놓고 물었다.

《이거 뭐라구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만.》

별스레 갑자르는 어머니옆에 죽순이 단정하게 앉아있는데 진분홍물감을 들인듯 얼굴이 발그스레하였다.

《다름이아니라 의원님, 어떠시우? 우리 딸애가 말이우?》

《예?! 그건 무슨 말씀인지?》

이 집에 들어설 때부터 또 송별식사를 할 때부터 집식구들과 죽순의 눈치가 별스럽다 생각하던 류이태라 짐짓 놀라며 반문하였다.

《듣자니 상처하구 홀몸으로 저 거제도에서 량부모를 다 잃은 의지가지할데 없는 어린 처녀애를 맡아키우신다는데 이젠 새로 가정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수? 며칠밤 내 우리 애들과 의논하구 또 죽순의 의향두 그래, 의원님이 싫다 하지 않으면 우리 죽순이와 다시 성례를 치름이 어떻겠수?》

류이태는 자기 귀를 의심하였다. 분명 죽순이 어머니의 입에서는 제 딸과 성례를 치르자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류이태는 죽순을 얼핏 바라보았다. 홍시마냥 빨개진 얼굴을 숙이고있는 죽순의 모습에서 류이태는 이것이 꿈아닌 현실임을 깨달았다.

《아니?! 그건 무슨 말씀이오이까? 나야 이미 한번 장가를 간 사람이구 또 아이까지 있는 사람인데… 그 댁의 따님이야 아직 처녀인데 이거야 너무 렴치없는 일이 아니오이까!

안되옵니다. 무슨 웃음거리를 만들려구 이런 엄청난 생각을 하십니까! 사람들이 날보구 뭐라구 하겠소이까. 되지도 않을 일을 가지구 괜히 소문나기 전에 없었던 일루 칩시다.》

류이태가 황겁해서 손을 내젓자 죽순의 어머니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만하게. 이자 보니 임잔 사람의 몸에 생긴 병은 잘 고치는데 마음에 생긴 병은 고칠줄 모르는구려. 웃겠으면 웃구 울겠으면 울구 그런건 우린 관계치 않네. 그럼 한가지 묻자구. 우리 죽순이가 마음에 드나 안드나? 그것부터 말 좀 해보게.》

그때의 일을 이야기하는 류이태의 눈빛이 반짝인다. 그의 나이는 지금 마흔다섯이다. 비록 뜨거운 애정을 속삭이는 한창나이의 젊은이에겐 어찌 비하랴만 그의 온몸에서 더운 피가 세차게 분출하고있었다. 아니, 그 열도는 너무도 뜨겁고 강렬하였다. 흡사 바위도 녹여낼 그런 욕망이 이 시각 부글부글 끓고있었다.

《그때 난 죽순의 어머니의 물음앞에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네. 뭐라구 할가? 그래야 우린 두번밖에 만나지 못했어. 그 두번의 대면에 뒤이어 이런 일이 터질줄이야 내 어찌 알았겠나. 글쎄 미리 준비했더라면 어떻게 대답할지…

그러다나니 내 입에선 왕청같은 대답이 나왔지. 허참!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대답을 했는지 나두 모르겠네.》

류이태는 죽순의 어머니의 물음앞에서 한동안 뗑해졌다. 그가 무슨 대답을 하나 죽순의 어머니가 그의 입을 주시해본다. 비스듬히 돌아앉은 죽순의 온몸이 통채로 귀가 되여 자기의 대답을 기다린다는것을 류이태는 미처 몰랐다. 너무도 뜻밖에 당한 일이여서 어떻게 대답할지 궁싯거렸다. 그러던 그의 입에선 미리 준비나 한듯이 이런 말이 튀여나왔다.

《뭐, 이 집에선 꿩대신 닭이라두 잡아 상을 차릴 심산이시우?! 그 집 따님이 한성에 있을 때부터 이미 마음을 주던 유명짜한 선생이 있는데 왜 날 택하시우? 내가 뭐 꿩대신 쓰는 닭인줄 아시우?》

《흑!-》

죽순이가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죽순의 어머니가 입을 벌리고 너무도 황당해서 말을 다 못했다.

류이태는 자기가 어떻게 그 집을 나섰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기 집에 당도했는지 전혀 인식못하였다. 대문을 나서던 그의 눈에 퇴마루기둥을 부여안고 오열에 몸부림치는 죽순의 모습이 안겨들고 그 흐느낌소리가 귀전을 사정없이 때렸다. 그날 류이태를 찾아오던 병자들은 모조리 문전거절을 당하였다. 그날밤 류이태는 퇴마루기둥에 앉아 장장 긴밤을 보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대문두드리는 소리에 멍청히 앉아있던 류이태가 나가보니 소복단장을 한 죽순이가 앞에 서있는것이 아닌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 눈물은 바라면서도 성취할수 없었던 소중한것을 한순간에 이룰수 있었건만 자기의 실수로 잃은데 대한 아쉬움과 그리고 자기가 아무리 애써 부정해도 가슴속엔 이미 이 녀인이 너무도 소중히 자리잡고있다는것을 때늦게나마 인식한 천금에도 비기지 못할 그런 눈물이 아닐가.

《의원님! 전 지금 한성으로 떠나는 길이옵니다. 절 좀 바래주지 않겠어요?》

그 순간 죽순은 류이태의 그 눈물에서 모든 진상을 알아차렸다. 죽순의 눈가에 따스한 미소가 흐르고 옥을 굴리는듯 한 그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린다. 류이태의 온몸에 저도 모르는 기쁨의 전률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쫙 흘렀다.

류이태는 허둥지둥 방안으로 뛰여들어갔다. 죽순이가 한성으로 간다는데 무엇인가 기념으로 줄것이 있어야 한다. 피뜩 그의 눈에 스승이 준 의서가 걸려들었다. 그가 제일 귀히 여기는 책이고 스승의 넋을 감득하는 그의 생의 한 부분이였다. 그 의서를 뽑아든 류이태는 생각을 굴리다가 붓으로 《의술즉인술》 이라고 일필휘지로 내리썼다.

그 의서를 품고 류이태는 의관을 정제하고 죽순을 바래주러 따라섰다.

그들의 앞으로 수레가 가고있었다. 죽순이가 타고갈 수레였다.

산음에서 한성으로 가려면 함양을 거쳐 전라도 남원을 지나 충청도로 길을 잡아야 한다. 고을읍에서 한 삼십리쯤 가면 본통치라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가 함양과의 경계이다. 죽순과 류이태는 그 본통치고개까지 걸어갔다. 그들이 무슨 말을 했던지… 헤여질 때 류이태는 죽순에게 품에서 의서를 꺼내주었다.

《그대에게 줄것은 이것밖에 없구려. 나의 마음과 그대한테 바라는 나의 소원이 이 의서에 다 담겨있소. 부디 의술을 닦아 명의가 되길 바라오.》

죽순은 두손으로 그 의서를 받아들고 첫장을 펼치더니 나직이 읽었다.

《<의술즉인술> 이라-》

류이태가 그 말꼬리를 달았다.

《그렇소. 의술은 첫째두 둘째두 인술이요. 이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 나라 의원들의 좌우명이였고 지론이였소.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원들이 인술이 없으면 그 아무리 명의라고 해도 돌팔이나 다름없소. 난 명실공히 죽순이가 그런 명의가 되리라 믿고싶소.》

《선생님의 그 말씀을 꼭 잊지 않겠어요.…》

죽순의 작은 가슴속에 커다란 산악이 자리잡고있었다. 이렇게 그들은 헤여졌다. 서로의 언약은 없었다. 허나 천금보다 소중한 마음속언약을 한것으로 되지 않을가. 서로의 눈빛과 억양에서 그들은 서로의 마음과 진정을 읽었고 서로의 장래를 하나로 결합시켜보았던것이다.

허나 죽순은 나라안에서 제일가는 녀의원이 되였으나 다시는 산음으로 오지 못하였다. 명의가 되겠다는 류이태와의 약속은 지켰으나 마음속의 약속은 지키지 못하였다. 류이태는 죽순이를 기다렸다. 한해, 두해, 십년이 흘렀으나 죽순은 그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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