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회)

제 2 장  산음의 명의

5

 

어둠이 깃든 뜨락에서 서성거리며 려월은 허준을 기다리고있었다. 그의 심정은 마치 과거에 응시하러 평양부에 갔던 허준을 기다리던 때와 꼭같았다.

(과연 류의원님이 우리 준이를 받아줄가?… 안 받아주면 어떻게 한담?)

애오라지 아들의 마지막운명이 여기에 달려있는듯 하였다. 술시가 다 지날경에 골목길에 씨엉씨엉 걸음새만 보아도 대뜸 알리는 아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려월은 허둥지둥 허준을 향해 마중갔다.

《그래 어떻게 되였느냐?!》

《어머니,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소이다.》

방안에 들어와 초불심지를 돋군 려월은 다시금 다우쳐물었다.

《그래 류의원님이 받아주시던?》

허준은 잠시 망설이였다. 이제 자기의 대답을 들으면 어머니가 얼마나 실망하실가? 차마 거짓말을 할수 없었다. 그렇다고 문전거절당했다고 그대로 말할순 없지 않는가.

《저 어머니, 류의원님이 몹시 바쁘셔서 천천히 배워주겠다 하시오이다.》

《그래?》

아닌게아니라 려월의 얼굴은 대번에 컴컴해졌다. 그날밤 잠자리에 누운 허준은 생각하였다.

(내가 혹시 류의원님을 잘못 보지 않았을가?)

자기의 존경심과 기대에 비하면 류이태는 너무도 랭랭해보였다. 어찌 보면 모질다 할 정도였다.

(공연한 기대가 아닐가?)

허준은 꼬리를 물고 갈마드는 이러한 생각으로 뒤척거리며 온밤을 꼬박 새우다싶이 하였다.

다음날 아침 허준을 불러앉힌 려월이 빨간 주머니를 내놓았다.

《내 곰곰히 생각해보았는데 네가 어제 처신을 잘못해서 류의원님이 받아주지 않은것 같구나.》

《네? 그건 무슨 말씀이오이까?》

《그 유명한 의술을 배워달라고 청을 드리러 가면서도 빈손으로 가다니, 그게 어디 될 말이냐? 자고로 의술이란 달과 년을 거쳐 배우는 일인데 어찌 빈손으로 가서 배워달라고 한단 말이냐. 우리가 류의원님께 치료를 받으면서도 닷새에 한번씩 꼭꼭 약값과 치료비를 내지 않느냐. 그리고 일전에 큰도련님이 갑자기 말 못하는 벙어리병을 고쳤을적에도 오십냥을 냈다지 않더냐.》

려월의 말을 듣고보니 뇌리를 치는것이 있었다. 그러고보면 지나치게 자기 생각만 하고있었다는감이 들었다.

허모가 떠나면서 보냈던 관가의 하인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설유한테서 코를 떼운 허모는 류이태에게서 치료를 받은 후 온다간다는 소리없이 산음을 떠나갔다. 다만 자기가 기일이 촉박하여 인사도 못하고 떠나간다면서 대신 관가의 하인을 보내였다.

《허모도련님이 갑자기 고뿔이 오면서 벙어리가 된것을 류의원님한테서 침 한번 맞고 그자리에서 고쳤다고 하오이다. 참으로 귀신같은 의술을 지닌분이시오이다. 헌데 의원님이 의술은 높은데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라고 도련님이 막 욕하셨소이다. 글쎄 침 한번 놓는데 오십냥을 내라고 했다나 보오이다.》

허준은 그때 하인의 말을 들으면서 그런 명의술이면 그만한 돈을 요구할만도 하다는 생각을 하였었다.

어머니가 빨간 주머니에서 금가락 하나를 꺼내놓았다.

《이건 아버님이 우리에게 보내신것인데 큰도련님이 가져왔더구나.》

《아니, 이건?!》

《네가 의술을 배워 명의가 된다면야 금가락 하나가 대수냐? 먼저 이걸 쓰고 보자꾸나.》

허준은 코마루가 시큰하였다. 나이 스물이 넘도록 어머니에게 아직 이렇다 할 기쁨과 만족을 안겨주지 못하는 자신이 자못 민망스럽고 송구스러웠다.

《어머니! 제 어떻게 하나 기어코 의술을 배워내겠소이다! 정말 고맙소이다.》

려월은 눈물이 글썽하여 가벼이 머리를 저었다.

《고맙긴, 어미한테 그런 말을 하는게 아니란다. 다른 생각말구 일단 결심했다니 착실하게 의술을 배우거라. 난 네가 꼭 해내리라고 믿고싶구나.》

량반댁의 소실로 들어온 려월에게 있어서 허준은 희망이였고 삶의 전부였다. 본댁인 오매의 구박과 천대를 받으면서도 애오라지 허준이 하나만을 믿고 그 모진 고통을 애써 참고 살아오는 려월이였다.

그날 저녁 술시경쯤 되자 허준은 류이태의 집으로 향하였다. 그 시간은 병보러 오는 사람들이 좀 뜸해질 시간이였다. 생각대로 치료받는 사람은 두세명뿐이였다. 한동안 기다려 드디여 조용해지자 허준은 류이태의 방으로 올라갔다.

《저, 의원님!》

하루치료를 끝내고 그 결과를 적고있는지 류이태가 설유가 늘 앉아있던 앉은뱅이책상에서 붓을 놀리고있다가 허준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음, 자네가 이밤중에 웬일인가?》

류이태의 옆에서 작은 작두로 약재를 썰고있던 설유도 다소 놀란 기색을 지었다.

단단히 결심품고 찾아온 허준이였건만 정작 자기를 걸써 대하는 류이태의 그 물음에 주춤거렸다. 허준의 태도에서 낌새를 챘는지 류이태가 나무람하는 투로 말을 던졌다.

《또 의술을 배워달라는건가?》

허준은 이 시각 자기를 응시하는 설유의 그윽한 두눈에 안타까움과 동정의 빛이 어려있음을 감각으로 느끼며 불현듯 담이 커지는것 같았다. 그는 성큼 품안에서 금가락을 꺼내놓았다.

《의원님, 여러 측면에서 불미한 저를 용서하소이다. 약소하나 저의 성의로 아시고 이걸 받아주소이다.》

《그건 뭔가?》

《저-》

《얼만가?》

《금가락 한개오이다.》

옆에 있는 설유의 검은 눈이 놀람으로 하여 휘둥그래졌다. 설유는 아버지와 허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제 아버지가 어떻게 나올가, 단박에 거절하지나 않으실가? 은근히 마음을 조이며 설유는 옷고름을 입가에 가져갔다.

뜻밖에도 류이태는 선선히 응하였다.

《음, 그렇다면 사정이 다르지. 자네가 수강료를 꼬박꼬박 내면서 배워달라면 거절할 필요야 없지. 얘야, 이걸 건사하거라.》

그 순간 허준의 머리속에서는 침 한번 놓아주고 오십냥을 받아먹었다면서 수전노라고 뒤소리했다는 허모의 말이 피끗 떠올랐으나 이만큼 응해나선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류이태의 다음말은 허준을 아연케 하였다.

《이건 한달 수강비로 하세. 그리고 의술전수시간은 하루 이각(3O분정도)으로 정하세.》

자기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시간을 정하는 류이태의 그 모습앞에서 허준은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해졌다.

(의원님이 참말로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란 말인가?)

잠시잠간 이런 생각이 피뜩 들었으나 허준은 어머니가 위급할 때 정성다해 치료하던 류이태의 모습이 떠올라 속으로 머리를 저었다.

원래 이 경상도 고을마다에는 여러명의 의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의술에서는 류이태를 따를 의원이 없었다. 하여 자기 고을에 의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먼길을 걸어 류이태에게 병을 보이러 오는 사람들이 수두룩하였다. 명의라고 소문이 자자하니 아마도 류이태의 치료비와 의술전수비가 하늘높은줄 모르고 올라가는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십분 그럴수 있다고 판정되였다. 문득 류이태가 찾는 소리에 허준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아니 젊은이,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나? 왜, 내가 한 말이 썩 맘에 내키지 않나?》

《그런게 아니올시다. 의원님이 절 받아주시니 참말 고맙소이다.》

《음, 그럼 시작해보세나.》

설유는 류이태가 넘겨주는 금가락을 받아들며 할깃 아버지에게 눈총을 쏘았다. 그러나 어쨌든 허준이 류이태에게서 의술을 배우게 된것이 다행이라는듯 그의 흑진주같은 검은 눈에서 밝은 빛이 반짝하였다.

《먼저 일전에 자네가 물어보자던 글줄부터 해명해보세나. 그때 무얼 물으려 했나?》

《네. 저… 주리란 말이 무슨 뜻이오이까?》

《주리말인가?》

허준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금같이 귀중한 시간에 류이태의 말 한마디한마디를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는듯 온 심신을 다 기울여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음 주리란 피부에 나있는 땀구멍이란 소릴세. 몸에서 이 주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네. 즉 주리를 통해 몸안의 수분이 배설되고 기혈이 통하며 또 이 주리를 통해 외사(외부의 병사)가 침범하여 온갖 병을 일으키지. 그러니 주리의 기능이 정상이여야 수분의 배설과 기혈의 흐름이 원만해지며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병사를 막아내여 병에 걸리지 않게 되네.》

생전에 처음 듣는 신기한 소리였다.

《자, 그럼 이제부터 의술의 기본원리들에 대해 가장 대표적인것들만 알려주세나. 우리 나라 의학은 옛적부터 자기의 독특한 리치가 있다네. 우리 의술에 <심주신명> 이란 말이 있는데…》

류이태는 자기의 하얀 참지우에 붓대로 《심주신명》이라고 활달한 필치로 쓰고나서 물었다.

《임자, 이게 무슨 뜻인가?》

허준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한자의 글뜻은 알겠으나 이 네 글자가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있는지는 도무지 리해할수 없었다.

《그럼 매 한자의 뜻풀이를 한번 해보라구.》

《예. <마음 심>자에 <주인 주>자 그리고 <귀신 신>자에 <밝을 명>자오이다.》

《옳네. 그러면 내가 이 네 글자에 담긴 의학의 심원한 리치를 말해주지.》

허준은 입술을 감빨며 바싹 귀를 강구었다.

《이 네 글자의 뜻은 심장이 신명을 주관한다는 뜻일세.

그럼 신명이란 무엇인고 하니 사람이 생각하고 사고하는 정신활동을 말하는것일세. 즉 심장이 사람의 정신활동을 주관한다는 소리일세. 듣자니 저기 바다너머 코큰 사람들의 의술에서는 머리가 아프거나 잠을 못 자고 신경이 과도한 병자들에 대해서는 그 머리만 들여다보며 머리에 작용하는 약들만을 쓰군 한다더군. 그렇게 해서는 머리의 병이 잘 치료되질 않아. 그 근원을 들어내야 하네.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그러한 치료방법과는 달리 머리의 아픔과 잠을 못 자고 심화병으로 까무러치고 할 때에 머리부터 치료한것이 아니라 심주신명의 원리에 따라 심장부터 편안하게 다스려주군 했다네. 그러면 치료효과가 매우 좋을뿐아니라 그 효과가 공고해서 재발도 거의나 없지.

참, 자네의 어머니말일세. 내가 자네의 어머니를 치료하는걸 봤을테지만 심화가 동해서 인사불성이 되였을 때 우선 각성시켜놓고 그다음에 심신을 안정시키며 심규(심장에서 신기가 나드는 구멍)를 열기 위해 심장의 경맥과 련계되여있는 수궐음심포경의 내관혈과 대릉혈(손목부위)을 써주질 않았나. 그게 바로 그러한 리치이기때문일세.》

《네에-》

류이태의 말에 한껏 심취된 허준은 연신 머리를 끄덕이였다. 류이태가 인사불성이 되여있던 어머니를 얼마나 신기한 의술로 살려놓았던가! 바로 그 신기한 술법의 근본리치가 허준의 머리속에 자리잡기 시작한것이다.

류이태는 또다시 붓을 휘둘렀다.

《뭐라고 썼나?》

《<통즉불통>이라고 썼소이다.》

《음, 그렇네. 이것 역시 네 글자이지만 그 뜻은 자못 심오하이. 이말을 해석하면 <통하게 하면 아프지 않노라.>는 소릴세.》

《네-》

《임잔 허리가 심히 아프거나 비증(관절염)이 와서 다리가 아프고 저려 제대로 걷지 못하며 또 오십견(오십대에 어깨와 팔을 잘 쓰지 못하는 병)이 와 옷도 제대로 못 입을 때 침이나 뜸을 뜨는걸 보았을터이지?》

《네, 보았소이다.》

《그게 바로 <통즉불통>의 리치일세. 아픈 부위의 침혈들과 손으로 꾹 눌러 제일 아픈 곳인 압통점, 그 압통점을 아시혈이라고 하네. 이 아시혈들에 침이나 뜸을 뜨면 그곳에서 막혔던 기와 혈이 통하게 되면서 아픔이 싹 없어지게 되네. 기혈이 통하지 않으면 그곳에서는 아픔이 생기게 되지. 내 말이 리해가 되나?》

《네, 리해가 되오이다.》

허준은 정기가 도는 두눈을 번뜩이며 대답하였다. 약재를 썰면서 할깃할깃 그들을 곁눈질하는 설유의 입가에 방긋이 웃음이 어린다.

처음 허준이 여기에 나타났을 때 설유는 그저 심상하게 여기였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쌀쌀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련일 찾아오는 허준을 설유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시해보았다. 류이태에게 간청할 때마다 허준의 눈에는 정열의 불꽃이 언뜻언뜻 어리군 하였다. 그의 학구열과 가슴속에서 고패치는 정열은 하늘에 닿은듯 하였다. 그것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과 눈빛 하나하나에 속속이 어려있었다.

그러한 허준에 대한 동정심이랄가 돕고싶은 마음이 어느새 설유의 가슴에 서서히 깃들었다. 어떻게 하나 도와주고싶었다. 허준의 간절한 청을 매정하게 거절하군 하는 아버지 류이태가 자못 야속스럽기도 하였다. 허준에 대한 동정은 설유가 허모에게 봉변을 당한 이후부터 더욱더 커졌다. 얼마나 대조적인 두 젊은인가? 한아버지의 피를 받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판판 다를가!

설유의 눈으로 볼 때 한사람은 인간추물이였고 다른 한사람은 정열과 의지가 펄펄 넘쳐나는 리지적인 젊은이였다. 허준의 일에 왼심을 쓰는 자기가 놀라왔으나 설유는 진심으로 그를 도와주고싶었다.

류이태의 의술전수는 날마다 계속되였다.

허준은 왕가물에 단비를 만난듯이 류이태의 지식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하루공부가 끝나면 허준은 그 내용을 전부 자기의 책에다 적어놓군 하였다. 그리고 반복하여 읽으면서 그것을 자기의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룡천의 별채에서처럼 또다시 허준의 집에서는 밤늦도록 불이 꺼질줄 몰랐다. 려월의 얼굴에는 다시금 희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는 허준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면서 특별히 손질할것도 없는 옷가지들을 꺼내들고 이것저것 바느질을 하면서 늦게까지 앉아있군 하였다. 바느질할것이 정 없을 때면 아래목에 조용히 앉아 그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군 하였다.

류이태에게서 전수받는 시간은 비록 해시(저녁 9~11시)때였지만 허준은 하루종일 류의태의 집에 붙어있었다. 그는 류이태의 일거일동을 순간도 놓치지 않고 살폈다. 맥을 짚는 법, 병자를 대면하는 법, 탕약을 달이는 법 등 눈에 익힐수 있는것은 다 익히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아직 모르는것이 너무도 많았다.

한달이라는 시일은 쏜 화살같이 빨리도 흘러갔다. 허준에게는 이 한달의 하루하루가 참으로 금같이 귀중하였다.

드디여 류이태와 약속한 한달이 다되였다.

《자, 오늘까지 한달일세. 이것으로 전수를 끝내려 하는데 다른 의견이 없겠나?》

허준은 나직이 대답하였다.

《의원님, 참으로 많은것을 배웠소이다.》

속으로는 아쉬움을 금할수 없었다. 의학이라는 학문을 큰 산에 비유할 때 겨우 첫걸음을 뗀데 불과한것이다. 그러나 약속은 역시 약속이 아닌가.

《그럼 됐네. 래일부턴 자네 일을 봐도 되겠네.》

류이태의 어조에는 한치의 에누리도 없다는 의미가 력력했다. 허준은 아쉬운대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류이태의 집을 나섰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대문을 나서는 허준을 바라보는 설유의 눈에 엷은 그늘이 비꼈다.

《아버지, 그럼 래일부터 의술을 가르치지 않소이까?》

《저 젊은이가 수강비를 가져오면 계속 배워주는거구 그렇지 못하면 그만두는거지.》

흔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류이태의 말은 설유를 몹시 실망케 하였다.

(그 많은 수강빌 어떻게 마련할가.…)

설유는 두눈을 슴벅이며 손톱눈을 썰었다.

허전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서는 허준에게 어머니가 물었다.

《오늘이 전수받는 마감날이지?》

마음이 몹시 심란하였으나 허준은 애써 밝은 인상을 지었다.

《네, 그렇소이다. 그동안 참말 많이 배웠소이다.》

어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가벼운 한숨소리가 허준의 귀에 들려온다. 락심과 서운한 기색이 한껏 어려있는 어머니의 어두운 낯색을 보는 허준의 가슴도 저도모르게 저려들었다. 한달동안의 전수를 거치면서 허준은 의술을 배우는 길에 들어선 자기의 결심이 참으로 옳았다는 확신을 더욱 굳히게 되였다.

그렇지만 이제 금방 첫걸음을 뗀데 불과하였다. 장차 의술을 어떻게 배워낼것인가? 수강비를 마련할 방도가 허준에게는 없었다.

룡천에서 산음으로 옮겨온 이후 려월모자의 살림형편은 그리 궁색하진 않았다. 룡천을 떠날 때 허륜이 그런대로 많은 재물을 주어보냈던것이다. 허나 로상에서 려월이가 앓고 또 산음에 와서도 앓다나니 한해어간에 많은 돈을 쓰게 되였다.

룡천에 있을 땐 그런대로 허륜에게서 돈을 받아 써왔지만 여기 산음으로 온 다음부턴 인편이 없어서인지 허륜은 돈을 한번도 보내오지 않았다. 결국 룡천땅을 떠난 그 순간부터 려월의 돈줄은 끊어진셈이였다.

몇달전에 아버지가 보냈다면서 허모가 놓고간 금가락이 효험있게 쓰이였다. 실지로 금가락을 허륜이 보냈는가부다 하고 여기고있던 려월은 그때부터 행여나 하고 다시 허륜이 돈을 보내오기를 은근히 기다리고있었다. 그러다나니 허모가 준 금가락에서 하나는 허준의 수강비로 쓰고 다른 하나는 그새 살림살이에 쓰다나니 수중에 몇푼밖에 없었다. 허모가 려월에게 내놓은 금가락은 사실 려월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속이 알알한것을 내놓은것이지만 실제상 려월모자에게 있어선 바쁜 모퉁이에 요긴하게 썼다.

그새 산음에서 봉변을 당하고 떠나간 허모는 새로 임금이 즉위하면서 치른 별시에 합격하여 경상도 자그마한 고을의 현감벼슬을 따내고 조정에서 한때 승정원에 있던 박씨문중의 어느 고관대작의 딸에게 장가까지 들었다고 한다.

본관이 그쯘한데다가 아버지 허륜이 그의 급제와 벼슬에 돈을 아끼지 않았던것이다. 허모는 소원대로 권세있는 량반가문의 당당한 장손답게 서자인 허준을 누르고 벼슬길에 먼저 오른것이다.

이날밤 허준은 뜬눈으로 꼬박 지새웠다. 욕망은 하늘에 닿았지만 엄혹한 현실은 그에게 너무 무자비하였던것이다. 하긴 돈이 없어 자기의 목적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한둘이던가. 정녕 나의 꿈은 또다시 여기에서 끝나고마는가?

허준은 마치 과시장에서 쫓겨나던 때와 같은 심한 좌절감에 사로잡혔다.

(아!- 무슨 방도가 없을가?…)

아버지 허륜에게 기별하면 도와줄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왜서인지 자기 힘으로, 자기 능력으로 어떻게 하나 이 고비를 넘기고싶었다. 허준의 머리에는 떠나오기 며칠전 그날밤이 잊혀지지 않았다. 자기를 꼭 끌어안던 아버지의 모습, 산음으로 내려가겠다는 리유를 설명하는 어머니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던 아버지가 요란한 폭소를 터뜨리며 《준이야, 네 어머니를 잘 모셔라!》고 당부하던 그 음성 그리고 떠나던 날 큰어머니가 중풍을 만난 일로 하여 산음으로 가길 주저하는 어머니를 떠밀어 보내던 아버지의 과묵하면서도 속깊은 심정이 헤아려지면서 허준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아버지한테 손을 내밀어선 안돼! 아버진 내가 스스로 일어서기를 바랄거야!)

무슨 뾰족한 수가 없을가? 허준은 온밤을 모대기였다.

그 시각 외할머니와 어머니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있는줄을 허준은 알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밥상을 물린 후 려월은 조용히 허준을 불렀다.

《준아, 일단 시작한 일이니 넌 어떻게 하나 끝을 보아야 하지 않겠니?》

허준은 어머니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대답하였다.

《어머니, 걱정마소이다. 이번에 그래도 적지 않게 배웠소이다. 이제 어떻게 하나 의서를 한두권 구해들여 자습을 하면 되오이다.》

《내 생각에는 의술이란게 그렇게 간단한것 같지 않더라. 류의원님이 날 치료할 때 보니 맥을 짚어보고 여기저기에 침을 놓군 하던데 그런걸 네가 책속의 글로써 깨칠수 있겠느냐? 그건 유능한 의원의 곁에 붙어서 부지런히 가르침을 받아야 알수 있는것이고 또 그렇게 해야 그러한 술법이 네 몸에 배일수 있다고 생각되누나.》

려월의 말도 일리가 있는 소리였다.

허준이 독학을 하겠다는것은 한갖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았으며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한 소리에 불과하였다. 잠시후 려월이 장농을 뒤지더니 네모반듯한 함을 꺼내놓았다. 옻칠을 하여 윤기도는 까만색바탕에 자개박이를 한 자그마한 함이였다. 려월이 그 함을 여니 그안에 옥가락지와 금팔찌가 들어있었다. 그옆엔 옥비녀가 있었다.

《아니, 이건?》

허준의 눈이 놀람으로 하여 커졌다. 그 옥가락지는 대대로 내려오는 손씨가문의 유물이고 금팔찌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소실로 데려왔을 때 준 귀물이다. 그리고 옥비녀는 외할아버지가 관가 몰래 외할머니의 머리태를 틀어올려주면서 꽂아준것이 아닌가. 새삼스레 허준은 외할머니의 머리를 살펴보았다. 옥비녀대신 여느 비녀잠을 꽂고있었다.

《이걸 팔아서 네 공부하는 비용에 보태거라. 어제밤에 외할머니와 다 의논이 있었단다.》

외할머니가 말없이 허준의 등을 쓰다듬어준다.

《할머니! 어머니! 이거야 외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유물이고 또 아버지가 남긴 보물이 아니오이까?》

《유물은 또 뭐구 보물은 또 무슨 보물이냐. 준아, 명심하거라!

진짜유물과 보물은 이런 귀물이 아니라 머리속에 들어있는 학문이다. 이런건 있다가두 없어지고 또 없다가두 다시 생기는것이지만 네 머리속에 자리잡은 학문은 너의 일생의 보물로 되는거란다.》

허준의 잔등을 쓰다듬던 외할머니가 하는 말이였다. 오늘따라 외할머닌 별스레 말이 많으시다.

《우리 손자가 의술을 배우겠다는데 뭘 아끼겠니? 네 외할아버지가 살았으면 이렇게 끌끌한 외손자를 위해 무슨 일인들 못하겠냐. 너처럼 인물 잘나고 키꼴이 쭉 빠진게 정말 멋있는 사내였지. 그래 그 할아버지가 아마 우리 준이같은 손자가 있는걸 알았으면 당장이라도 땅속에서 뛰쳐나와 하늘끝에 가서라두 준이가 필요한걸 가져왔을게다.》

《할머니!》

허준은 외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마디굵은 외할머니의 손이 그 한생을 말해준다. 눈시울이 뜨거워남을 어쩔수 없었다.

어머니가 준이의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 세사람의 손이 하나로 합쳐졌다.

《준이야! 할머니의 말씀을 명심하구 의술에 전념하거라! 더구나 그 의술이 너 하나뿐이 아닌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보물중의 진짜보물이 아니겠니? 네가 일전에 나에게 의술을 잘 배워 큰 의서를 쓰겠다고 하였는데 만일 그렇게만 되면 그것은 네 당대에만 사람들에게 덕을 주는게 아니라 몇백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대를 물려가면서 덕을 줄수 있는 그야말로 진짜보물을 마련하는것으로 될것이니라. 그에 비하면 이런것을 보물이라고 말할수 있느냐? 그러니 네 학문의 보물을 얻을수 있다면 할머니나 난 이 집을 팔아도 아깝지 않겠다.》

《어머니!》

허준은 가슴이 뭉클해져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을 큼직한 자기 손으로 감싸쥐며 부르짖었다.

《할머니! 어머니! 제 꼭 할머니와 어머니의 기대에 보답하겠나이다. 부디 믿어주소이다.》

외할머니의 눈가에 매달려있던 눈물이 주르르 떨어져 허준의 손등에 떨어졌다. 외할머니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렇지 않구, 우리 손자가 어련할라구. 내 죽기 전에 손자덕분에 호강할지 알겠냐.》하며 두눈을 슴벅이였다. 어머니의 때이르게 건너간 눈귀의 주름살이 허준의 눈을 아프게 자극하였다.

《오냐, 그래다오. 우리 집안에 네가 곧 생이구 행복이라는걸 너두 알겠지? 일구월심 오직 네 일이 잘되길 바라는게 이 에미의 가장 큰 소원이다. 그러니 절대로 헛눈을 팔지 말고 의술전수에 전념하거라. 그리고 학비걱정은 아예 말거라. 이 집의 가산을 다 팔아서라도 네 학빌 대주마.》

《어머니!-》

허준은 어머니의 품에 와락 얼굴을 묻었다. 두손으로 잔약한 어머니의 잔등을 쓸어만지는 허준의 두손이 세차게 떨렸다.

아, 어머니! 불쌍하고 착한 우리 어머니!

한생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고 눈물속에 살아가시는 어머니를 이 아들이 반드시 행복하게 해드리겠나이다. 온 세상사람들이 보란듯이 이 아들이 바로 나의 아들이라고 자랑하게 내 기어이 품은 뜻 흔들림없이 성공하겠나이다!

이틀후 허준은 류이태의 집으로 다시금 찾아갔다.

류이태의 방에 들어서니 설유가 놀란 눈길로 허준을 쳐다보았다. 수강비를 마련해가지고왔는가 아니면 그냥 통사정을 하러 왔는가 하는 기대와 불안이 엇갈린 기색이 설유의 눈에 어려있었다. 그러거나말거나 류이태의 태도는 여전히 무표정하고 랭랭하였다.

《의원님!》

류이태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허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왔나?》

허준은 류이태의 앞에 묵직한 돈꾸레미를 내놓았다.

《음, 수강비를 마련했나? 그럼 한달동안 또 해봅세.》

설유가 그러는 아버지를 야속한 눈길로 바라보고나서 웃방너머에 있는 방으로 쑥 들어가버렸다.

또다시 의술전수가 시작되였다.

이번의 전수에서 류이태는 의학의 리치와 함께 실지 병자들을 치료하는데 필요한 실용지식과 술법까지도 도간도간 배워주었다. 류이태가 얼굴이 부석부석한 중년사나이를 진찰하면서 허준에게 말했다.

《병자를 치료하는데서 첫째는 진찰이 기본이라고 말할수 있네. 진찰을 똑바로 못하고 치료에 접어들려 하는것은 사냥군이 목표물을 찾지 못하고 살을 날려보내는것과 같다고 볼수 있네. 진찰만 정확히 하면 병자의 치료는 절반은 먹어놓은것과 같다네.》

허준은 자못 심중한 기색을 짓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헌데 그 진찰이란게 결코 간단치 않지. 허나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수많은 훌륭한 진찰법들을 마련해놓았네. 그가운데의 하나가 망진일세.》

《네? 망진이요?》

허준이 무슨 말뜻인지 몰라 반문하며 류이태를 바라보았다.

《음, 그렇네. 망진이네. 망진에서 <망>자의 뜻은 바라본다는 뜻이지. 이를테면 병자를 바라보고 그의 병기를 알아낸다 그 말일세. 얼굴색과 눈의 흰자위의 색 등 곳곳에 병자의 병기가 어려있네. 망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설진을 하나 례를 듭세.》

류이태는 앞에 앉아있는 중년사나이의 쭉 내민 혀를 바라보며 허준에게 물었다.

《이 병자의 혀에 무슨 병이 담겨져있나?》

《?!》

허준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음, 모를터이지. 내가 알려주지. 이 병자의 혀는 정상사람과는 다르네. 헌데 문제는 이런 혀를 보고 순식간에 병자의 상태를 속속들이 알수 있다는걸세. 자세히 보라구. 이 병자의 혀는 정상사람에 비해 멀퉁하게 불어나 있어.》

허준은 눈을 밝혀 그 혀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았으나 잘 가늠이 가질 않았다.

《잘 모르겠나? 그럼 옆의 병자의 혀를 한번 보세나.》

얼굴이 갸름하고 해쓱한 젊은이가 류이태의 말대로 혀를 쑥 내밀었다.

《한번 대비해보게.》

《아! 차이가 있소이다! 이쪽 젊은이의 혀가 저쪽 병자의 혀보다 가늘고 뾰족하오이다!》

《음, 그뿐이 아니네. 이 불어난 혀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혀가 멀퉁하게 불어났으니 그 변두리에는 치흔(이발자리)이 또렷하게 새겨져있네.》

《아, 치흔이 있소이다.》

류이태의 말대로 멀퉁하게 불어난 혀의 변두리를 따라 움푹움푹 패워들어간 이발자리가 또렷이 안겨들었다.

《음, 그럼 이런 혀는 무슨 병기를 담고있는가?

그건 이 병자의 체질이 랭과 습이 심하다는걸 말해주네. 즉 몸에 랭과 습이 끼였지. 그러니 혀의 색갈도 정상인 담홍색을 띠여야겠으나 희읍스름하거나 약간 푸르스름하지. 몸에 습과 랭이 있게 되면 비위가 꼼짝 못하네. 비위는 습과 랭을 제일 싫어하니깐. 그러니 손발이 차고 입맛이 없으며 음식을 조금 먹으면 헛배가 부르고 명치끝이 묵직한 증상이 나타나네. 이런 병자들은 습과 랭을 뽑아주는 처방을 해주어야 하네.》

《네-》

허준은 류이태의 말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럼 다시 이 병자의 혀를 좀 보세나.》

류의태는 젊은이의 혀를 가리키며 계속하였다.

《이 병자의 혀도 정상이 아니야. 혀끝을 자상히 살펴보라구. 어떤가?》

허준이 머리를 기웃하였다.

《음, 처음이니 잘 모를수 있지. 뾰족한 혀끝이 발그레하게 붉어져있지 않나?》

허준은 얼른 습과 랭이 있다는 병자의 혀를 젊은이의 혀와 대비하여보았다. 혀끝이 발그레하게 달아있는것이 보기에도 척 알렸다.

《아, 그렇소이다. 혀끝이 빨갛소이다.》

《그렇지? 그게 바로 심열이 불타서 그런거야.

심은 혀의 싹이라고 하지. 그러니 심장의 병상태가 혀 특히는 혀끝에 매우 예민하게 나타나네. 참, 일전에 내가 <심> 은 신명(정신상태)을 주관한다고 했지? 저렇게 심열이 타게 되면 틀림없이 심계(가슴두근거림)와 정충(불안하고 답답한것)과 같은 증상(심장신경증증상)이 나타나게 되네. 이건 망진에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네. 그러니 의술이 높은 의원들은 병자에게 루루이 어디가 아픈가 물어보지 않아도 얼굴과 혀만 척 보고 병의 거의 전부를 알아맞힐수가 있는거네.》

허준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류이태의 의술이 높다는것은 알고도 남았지만 정말 진찰방법의 극히 일부분에도 이렇듯 심오한 리치가 깃들어있었는지는 미처 가늠치 못했던 허준이였다. 허준은 자기가 배워야 할 의학의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류이태의 전수는 계속되였다.

허준은 류이태의 전수를 받지 않는 시간에는 여전히 류이태의 병자치료를 진지하게 관찰하였다. 확실히 류이태의 진찰과 치료는 특이하였다. 우선 그는 진찰에 매우 많은 품을 넣었다. 류이태가 진찰할 때에는 그의 눈에서 여느때와는 달리 은은한 정기가 발산하는듯 하였다. 그만큼 그는 병자의 진찰에 자기의 온 심신을 다 바치였다. 망진, 설진, 맥진, 촉진 등의 모든 과정이 다 그러하였다.

허준은 류이태의 명의술의 첫째 조건이 우선 진단의 정확성에 있다는것을 간파하였다.

정확한 진찰을 한 다음에 그는 매 사람들의 특성에 맞게 치료를 매우 세밀하게 갈라 서로 처방을 달리하였다.

류이태의 다른 특이한 점은 약처방을 떼여주면서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자기 집주변과 흔히 얻을수 있는 약재들을 리용하여 자체로 치료할수 있는 방법들을 세세히 가르쳐주는것이였다.

이것은 류이태가 자기의 수사본의 전언에서 《우리 나라는 삼천리금수강산으로서 산천경개가 하도 좋아 향촌의 곳곳에 사람을 살리는 진귀한 약초들이 얼마든지 있다. 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진귀한 보물들을 자기 집근처와 뒤산에 두고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여 제대로 쓰지 못하고있다.

만일 각이한 병들을 치료하는 각이한 약재들을 자상히 서술한 책이 있으면 그것은 마치 밤길을 밝히는 등불과도 같이 병을 치료하는 요긴한 방법들을 알려줄것이다. 본인의 힘과 손길이 나라의 곳곳에까지 다 닿지 못하여 자기 고을과 린근고을의 사람들밖에 보아주지 못하는것도 또한 안타까운 문제의 하나이다.》라는 뜻을 실지 치료에 구현한것이였다.

아직 자기의 뜻인 의서를 내놓지 못하였으니 정력을 다하여 병자들에게 그러한 치료법들을 알려주는듯 하였다.

허준은 이러한 치료법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자기의 책에 깐깐히 적어넣었다. 류이태가 병자들에게 지어주는 복잡한 약처방들은 비록 리해하지 못해도 그런것들은 얼마든지 리해할수 있었다.

겨울철에 들어서면서 해수병(기침, 기관지염)과 감모를 앓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어느날 젊은 녀인이 류이태에게 와서 안타까이 호소하였다.

《의원님, 우리 집식구모두가 감모에 걸렸소이다. 헌데 감모를 제때에 치료하지 않으니 곧 해수병으로 넘어가 온 집안이 쿨럭쿨럭 기침하는데 집에서 잔등에 부항을 붙이여도 잘 낫지 않소이다.》

류이태는 약을 지어주면서 말하였다.

《음, 자기 집과 그 주변을 둘러보면 얼마든지 감모와 해수병을 치료할수 있는데 괜히 수고로이 왔다갔다 하고 또 돈을 쓰는구만. 이보라구, 새아기! 내 그 치료법을 자상히 알려줄터이니 한번 해보라구. 감모는 만병의 근원이야. 제때에 치료하지 않으면 인차 해수병으로 넘어가네. 감모치료는 그리 어렵지 않네. 우선 파와 마늘을 잘게 썰어 짓찧은 다음 작은 자배기에 담아 이불안에 넣어주라구. 그리고 잘 때 그 이불을 머리까지 푹 뒤집어쓰구 일각동안 크게 숨을 들이쉬라구.

또 다른 방법도 있지. 곶감 세알과 생강 두돈(8그람정도)에 물 한사발을 두고 푹 달여 한번에 두숟갈씩 하루 세번 먹이면 되네.》

《예에-》

녀인은 류이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허준은 류이태의 뒤에 바싹 붙어서서 이 모든것을 자기의 책에 적어나갔다.

《이보라구. 내보기엔 새아기네 집에서는 매해 이즈음때엔 쩍하면 감모와 해수병을 앓군 하는데 병이 난 다음에 이렇게 뛰여다니지 말고 미리 예방하는게 매우 중요하이.》

《그건 어떻게 하오이까?》

《선기가 나서 감모가 올 시기가 되면 삼계탕을 해먹이라구. 삼계탕을 할줄 아나?》

녀인이 얼굴을 붉히였다.

《잘 모르오이다.》

《원 이런, 그것도 모르다니. 이보게, 삼계탕은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자랑할만 한 보양방법이야. 몸이 약할 때에도 으뜸이지만 감모의 예방에도 그저그만이야. 그럼 내 알려줄터이니 잘 들으라구. 까난지 석달쯤 되는 중닭, 검정닭이면 더 좋네. 한마리를 잡아서 마늘 열쪽, 생강 세돈(한돈은 3. 75그람), 인삼 한뿌리, 3년생이 좋지. 후추 20알, 찹쌀 두 숟가락, 호두 다섯알을 닭의 배안에 넣고 폭 고아서 먹이라구. 그러면 감모가 걸리라 해도 지레 무서워서 달아난다네. 허허허.》

《네 , 그렇소이까?》

《헌데 말일세. 이때 남자에게는 암닭을, 녀자에게는 수닭을 써야 더 효험이 있다네.》

역시 류이태는 세심하였다.

《의원님, 그런데 인젠 저의 주인과 시아버지, 저의 애는 이미 해수병으로 넘어갔소이다.》

《음, 해수병은 우리가 늘 자주 볼수 있는 병인데 그것도 치료할수 있어. 기침이 계속 나고 가슴이 아플 때에 물엿속에 무우를 적당한 길이로 토막내여 꽂아두면 엿이 녹아 맛있는 무우엿이 되네그려. 그걸 작은 술잔에 담아 하나씩 먹이라구. 그렇지 않으면 곶감 세알과 생강 두돈에 물 한사발을 두구 푹 달여 한번에 두숟갈씩 하루 세번 먹이게. 그러면 알 도리가 있을거네.》

《네- 의원님, 정말 고맙소이다.》

녀인이 머리를 숙여 절을 하며 말했다.

《아니, 내 말은 아직 끝나질 않았네. 자네 시아버지와 아이들도 해수병을 앓는다고 했는데 로인들과 아이들의 해수병치료는 이와는 달라. 로인들은 젊은이들보다 원기가 약하지. 이때에는 돼지염통 한개를 깨끗이 물에 씻어 그 물기가 약간 마를 때 소금을 두고 한식경이 되도록 푹 삶아 염통과 국물을 같이 들게 하라구. 두번만 해먹으면 뚝 떨어질거네.》

《그럼 애는 어떻게 해야 하오리까?》

《아이는 말이네, 돼지의 생간을 잘게 썰어서 그것을 깨깨 말리운 다음 가루를 내라구. 그것을 다시 꿀에 개여서 두돈정도씩 하루 세번씩 먹이라구. 그럼 며칠이 지나 기침이 싹 없어져.》

허준은 류이태의 이 말을 통하여 치료방법보다도 더 귀중한것을 터득하였다. 즉 류이태의 명의술의 요점은 매 사람들마다 그리고 어린이, 중년, 늙은이 등 나이별특성에 따라 치료법을 적중하게 적용하는것이였다.

그리고 의술이란 의서에 씌워진것이나 그 누가 가르쳐준 고정격식화된 방법으로만 아니라 병상태에 대처하여 림기응변으로 적용하는 보다 복잡하고 심오한 학문이라는것을 허준은 오늘의 이 일을 통하여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의술에서 천편일률식치료방법은 그야말로 금물이다!)

이것이 오늘 허준이 다시한번 절감하게 되는 자못 중요한 리치였다.

보름이라는 날이 언제 흘렀는지 몰랐다.

허준의 마음은 또다시 조급해나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보름이 지나가면 그다음에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머니는 집안가산을 다 팔아서라도 학비를 대주겠다고 하였지만 허준은 그렇게 할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는 저도모르게 땅이 꺼지는듯 한 긴 한숨소리가 새나왔다.

드디여 허준이 애타게 고대하던 말로써가 아니라 실지 행동으로 의술을 전수받는 날이 왔다. 류이태는 침통에서 가느다란 호침을 한개 꺼내들었다.

《자, 그럼 이젠 실지 행동으로 해보세.》

그리고나서는 한쪽다리를 걷어올리며 말했다.

《임자 이 침으로 내 다리에 있는 족삼리혈을 한번 찔러보라구.》

《네?》

허준은 어리둥절해서 류이태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나? 내 다리의 족삼리혈에 침을 한번 찔러보라는데.》

《의원님, 그렇게야 어떻게…》

《아니, 그게 무슨 큰일이라구 그러나? 임자가 앞으로 의술에 정통하려면 자기 몸에도 수없이 침을 찌르고 뜸쑥으로 살을 태워야 할걸세. 이건 이제 그 시작에 불과한거야. 자, 어서!》

그 말에 허준은 마음을 다잡고 류이태의 피부를 왼손으로 바싹 헤워 긴장시킨 다음 족삼리혈에 침을 들이박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침대는 살속으로 꿰질러 들어가지 못하고 휘청휘청 휘여들기만 하였다. 아무리 안깐힘을 써서 침자루를 돌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가죽이 이렇게 질긴가?)

허준의 이마에서는 비지땀이 흘러내렸다. 허준이 침대를 꽂으려고 모지름을 쓸 때마다 류이태가 얼굴을 찡긋거렸다. 한참 고심해서야 허준은 겨우 침대를 족삼리혈에 들이박을수 있었다.

《그래 어떤가?》

《네, 침혈에 침댈 박기가 조련치 않소이다.》

허준은 류이태가 침놓는 모습을 적지 않게 보아왔다. 그는 흡사 두부속에 침을 박듯이 잽싼 솜씨로 거침없이 쑥쑥 침을 놓군 하였다.

《이보게 실은 사람의 피부가 여간 질기질 않다네. 그러니 침을 거침없이 꽂는것도 높은 기술이 요구되네. 특히 아프지 않게 침을 놓으려 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지. 어떤 의원들은 침을 하나도 아프지 않게 놓는데 왜 어떤 의원들은 침을 놓을 때 병자들이 아파하는가? 그런 의원들은 흔히 자기 손이 매워서 그런다고 하는데 그게 아닐세. 술법이 부족해서네. 사람은 살가죽겉이 제일 감각이 예민하다네. 침을 아프지 않게 놓으려면 감각이 예민한 이 살가죽을 빠른 순간속도로 꿰찔러야 하네. 이건 높은 기량과 숙련을 요구하네. 자네에겐 전혀 그런 숙련이 없으니 침이 질긴 피부를 쉽게 뚫을게 뭔가? 이젠 내 말의 뜻을 알겠나?》

《네, 알겠소이다.》

류이태는 허준의 앞에 한치두께는 실히 될 두툼한 참지묶음을 내놓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침대를 가지고 이 참지를 뚫는 련습을 하라구. 그 과정을 통해 손끝과 손목에서 침날을 잽싸게 박을수 있는 순간힘을 키워야 하네. 이때 종이의 웃면은 사람의 피부라고 생각하게. 자네의 순간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침대가 뚫는 종이장의 수는 더 많아질걸세.》

허준은 그날부터 맹훈련에 들어갔다. 그 훈련은 결코 조련치 않았다. 왼손 엄지손가락과 식지로 참지를 누르고 순간적인 힘을 가하여 그사이에 침을 들이찌르기를 수십번, 수백번 반복하였다. 그의 이마에서는 비지땀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사흘정도 지나니 손끝에 물집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준은 이를 악물고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나갔다. 얼마나 침찌르기를 익혔는지 참지가 온통 벌둥지처럼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그날도 허준은 비지땀을 흘리며 아래방에서 침술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오늘은 류이태가 왕진을 나가서인지 병자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설유가 몇명의 병자들에게 첩약을 내주자 곧 방에는 고요가 깃들었다. 그러나 허준은 그러거나말거나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이때 장지문쪽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도련님.》

머리를 들어보니 설유가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허준을 부르는것이였다.

《?!》

허준의 얼굴은 대번에 붉어졌다.

허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유가 다시금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어줍은 기색을 짓고 허준은 설유가 있는 웃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설유는 류이태가 늘 치료하는 웃방과 잇닿은 끝방으로 들어가며 허준을 돌아보았다.

《도련님, 여기로 들어오시오이다.》

류이태의 집은 웃방너머의 방까지 합하여 모두 세칸이였다.

설유의 권유에 허준은 당황함을 금할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더욱더 달아올랐다. 그러나 설유의 태도는 여전히 흔연스럽다.

《도련님. 어서 들어오시오이다.》

한참 머뭇거리던 허준은 용기를 내여 설유가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아담하고 정갈하면서도 조용한 방이였다.

《앉으소이다.》

《아니, 이렇게 서있는게 더 좋소이다.》

설유가 생그레 웃으며 다시금 권하였다.

《도련님. 지붕이 무너지지 않을터이니 어서 앉으시오이다.》

(평시에 참해보이던 랑자가 이자 보니 여간 당돌하지 않군!)

잠시후 설유가 번쩍번쩍 장식을 한 장농을 열더니 두툼한 책 한권을 꺼냈다.

《도련님, 이 책도 역시 우리 아버지가 쓰신 수사본이오이다. 전번에 도련님이 빌려가신것보다 더 알속있는 자료들이 많이 들어있소이다. 아버지의 전수시간이 제한되여있사오니 그대신 이렇게 틈이 있을 때에 소녀가 좀 가르쳐줄가 하오이다.》

순간 허준의 눈은 번쩍 빛났다. 옹색함이 대번에 사라져버렸다.

《여기에는 아버지가 실지 치료하는 과정에 터득한 비방들이 많소이다.》

설유는 책갈피를 번지기 시작하였다. 어느 한 갈피를 펼친 설유가 설명하였다.

《이즈음 날씨가 차서 랭과 습이 심해지면서 비위병으로 앓고있는 병자들이 많소이다. 이것이 그러한 병들에 쓰이는 비방이오이다. 간단하면서도 참 효과가 좋은 치료방법들이오이다.》

허준은 설유가 짚은 곳을 얼른 들여다보았다.

《…몸에 랭을 받아 위완통(위가 몹시 아프면서 위경련에 가까운 병)이 왔을 때에는 현호색을 보드랍게 가루내여 한번에 한돈씩 하루 세번 먹는다. 또는 소금 한근(한근은 600그람)을 센 불에서 닦아 천주머니에 넣어 웃배에 대고 2각(3O분)동안 찜질하되 식으면 다시 갈아준다.…

헛배가 부를 때에는 물 한사발에 보리길금 한줌 넣고 절반이 되게 달여서 하루 세번 식간에 먹는다. 헛배가 몹시 부를 때에는 병자가 몹시 고통스러워하는데 도라지를 원추형으로 잘라 간장에 2각동안 담그어두었다가 홍문에 넣어도 효과가 좋다. 또한 생무우와 쪄서 익힌 무우를 같은 량으로 짓찧어 즙을 짜서 한번에 반홉(한홉은 18O미리리터)씩 하루 2~3번 먹는다, … 비위가 나쁜 사람들에게서 변비는 매우 고통스러운 병이다. 늙은이들에게서 흔히 변비가 오군 하는데 이때에는 꿀 두숟가락과 소금 한돈을 뜨거운 물 한고뿌에 타서 매일 이른아침 빈속에 마시면 변비가 뚝 떨어진다. 만일 변이 너무 굳어 홍문이 째질 때에는 팥 2O돈과 당귀 4돈을 같이 달여 그 물을 차처럼 자주 마신다.…》

허준은 손에 들어온 귀물을 놓칠세라 다급히 그 모든것들을 자기의 책에 옮겨베끼였다. 그 모습을 설유가 미소를 짓고 바라보고있었다. 한참동안 적어나가던 허준은 문득 고개를 들고 말하였다.

《아씨! 이런건 아씨나 의원님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다 리해할수 있소이다. 그보다 더 힘든 복방처방들에 대해 좀 알려주소이다.》

《그럼 이것도 자못 중요한 비방이온데 이건 어찌하시오리까?》

《아씨가 틈틈이 적어 저에게 넘겨주시오이다.》

《네에?》

설유의 눈이 놀람으로 하여 커졌다. 그렇게도 이 방에 들어오기를 주저하며 얼굴이 붉어져 마주 바라보지도 못하던 사람이 갑자기 무슨 용기가 나서 이젠 되려 자기에게 이런 부탁까지 하는가? 설유는 그것이 바로 허준의 불타는 향학열이라는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도련님, 알겠소이다. 그건 걱정마시오이다. 헌데 무슨 복방이 잘 리해되질 않소이까?》

《네, 일전에 의원님이 어떤 녀인에게 사물탕을 처방해주었소이다. 그걸 좀…》

《네? 사물탕은 보혈약이온데…》

설유가 별안간 발그레하게 얼굴을 붉히였다. 허준은 의아한 눈길로 설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설유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계속하였다.

《사물탕은 주요부인보약으로서 제일 널리 쓰이는 명처방이올시다. 찐지황, 당귀, 백작, 궁궁이로 이루어져있소이다.》

허준은 설유가 얼굴을 붉힌 까닭을 그제서야 리해할수 있었다.

설유는 계속하였다.

《도련님, 보약이라 해서 다 같질 않소이다. 지금 돈많은 량반부자들은 보약이라 하면 몸보신에 다 좋은가 해서 산삼, 인삼, 록용, 구기자 같은것들을 망탕 쓰고있사온데 그러다 되려 몸을 해칠수 있소이다.》

《보약도 몸을 해친단 말이오이까?》

《그렇소이다. 보약에는 네가지 즉 양을 보하는 보양약, 음을 보하는 보음약 그리고 혈을 보하는 보혈약, 기를 보하는 보기약이 있소이다. 양이 허하고 음이 왕성한 사람에게 보음약을 쓰면 어떻게 되겠소이까? 오히려 몸상태를 나쁘게 하오이다. 대표적인 보음약은 구기자이며 가장 널리 알려진 보기약은 산삼, 인삼이며 보양약은 록용이올시다. 양이 동하는 어떤 량반이 몸을 보하려고 록용을 많이 써서 양기가 우로 뻗쳐 죽은 례도 있소이다.》

설유의 이 짧은 말속에서 허준은 참으로 많은것을 배웠다.

《우리 조상들이 내놓은 가장 유명한 보기약처방은 사군자탕이오이다. 기운이 없고 소화가 잘 안되며 온몸이 노근한 사람들에게는 특효이오이다.》

《네에-》

《도련님, 또 있소이다. 우리 나라 의술은 저 멀리 코큰 사람들의 의술과는 다르오이다. 그 사람들은 감모가 오면 병상태와 사람의 체질에 관계없이 다 한가지 약재를 쓰지만 우리 나라 의술에서는 감모도 풍한감모, 풍열감모로 갈라 그에 알맞는 약처방을 쓰고있소이다. 그리고…》

허준은 노래하듯 말하는 설유의 아름다운 모습을 마치 얼나간 사람처럼 쳐다보고있었다. 이제는 그의 말이 귀에 잘 들려오지 않고 오직 보름달같은 그의 얼굴만이 눈앞에 또렷하게 안겨올뿐이였다. 그의 넋은 통채로 설유에게로 가있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르는듯 하였다.

《도련님, …》

설유가 이상한 기색을 느끼고 허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련님, 대체 어인 일이시오이까?》

《네에?》

그제서야 허준은 흠칫 놀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아, 아니올시다! 계속…》

바로 이때 별안간 허준의 머리우에서 벽력같은 고함소리가 울렸다.

《이건 대체 무슨 망동인고? 청청대낮에!》

허준은 깜짝 놀라 후닥닥 뛰쳐 일어섰다. 류이태가 싸늘한 눈길로 허준과 설유를 번갈아 바라보고있었다. 류이태는 허준에게 서슬푸른 기상으로 말했다.

《임자는 남녀칠세 부동석이란 말을 모르나? 모르는가말이야!》

설유가 다급히 류이태의 말을 막아나섰다.

《아버지, 그런게 아니오이다.》

《넌 좀 가만있거라. 임잔 날 따라오게!》

아래방에 내려온 류이태는 엄한 기색을 짓고 허준에게 말하였다.

《임잔 의술을 배우겠다고 큰 맘을 먹은것 같은데 그게 대체 무슨 행실인가? 자고로 헛눈을 팔면서 다니는 사람이 큰일을 치는걸 내 평생 보질 못했네! 의술을 배우겠으면 자나깨나 오직 그 하나에만 전념해야지 대체 무슨 잡생각인가! 그렇게 배우려면 이제라도 싹 그만두라구!》

허준은 머리를 푹 수그리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였다.

그날밤 허준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오늘 있은 일을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분명 자기의 마음은 걷잡을새없이 설유에게로 쏠리고있다. 이것은 부인할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지 말자고 자기를 몇번이고 다잡았지만 도저히 마음을 눅잦힐수 없었다. 설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면 괜히 가슴이 설레이고 그 아릿다운 얼굴을 한번 보면 더 보고싶은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허준은 오늘에 와서야 자기가 설유를 좋아한다는것을 새삼스럽게 인정하였다. 처음에는 설유가 설명해주는 의학의 리치에 빠져들었고 그다음에는 설유의 미모에 저도모르게 넋을 빼앗겼던것이다.

류이태의 엄한 추궁은 백번도 옳은것이였다.

(아직은 나에게 그를 사랑할 권리가 없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의원님의 충고대로 일체 잡념을 머리속에서 빼버리고 오직 의술련마에 온넋과 심신을 바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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