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회)

제 2 장  산음의 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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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이가 의술을 배워 명의가 되겠다고 평안도 룡천에서 여기 산음으로 왔노라고 한 허모의 말을 듣는 순간부터 류이태는 허준을 두고 생각해보았다.

룡천에서 왔다면 죽순이를 모를리 없겠는데 허준은 전혀 그런 말을 꺼내지 않는다. 허준이 의술을 배우겠다고 한데는 필경 무슨 까닭이 있을것이다. 혹 죽순의 추동이랄지 권고랄지 그런것으로 하여 허준이 의술에 뜻을 둔것은 아닐가?

배다른 형이라는 허모가 난데없이 나타나 그간 작은어머니를 돌봐주어 고맙다면서 동생인 허준이 의술을 배우겠다는데 좀 배워줍소사 하고 간청할 때 류이태는 입안이 소태를 씹은것처럼 쓰거워 참지 못하고 허준이를 모욕하는 말을 내뱉고말았다. 본래 투명하고 명명백백한것을 좋아하는 류이태였다. 닷새건너 약을 지으러 오면서도 의술을 배우려고 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사내답지 못한 허준에 대한 불만감과 더우기는 허준의 형이라는 허모의 몸에서 풍기는 인간답지 못한 허위성과 기만성이 그의 부아를 돋구었다.

류이태는 허모가 돌아간 다음 허준에 대해서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한마디로 준수하고 고지식한 젊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형에 비해볼 때 인품에서 벌써 장기쪽의 차와 졸같은 현저한 차이가 있어보인다. 그런데 이상스러운것은 의술을 배우겠다고 그 멀고도 먼 천리길을 달려온 그가 자기의 의향을 여직껏 꺼내지 않은것이다.

너무도 어지고 순박해서 그럴가? 항용 정직하고 순진한 사람일수록 비위살이 없는 법이다.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남에게 해되는 일을 하지 않으며 또 남에게 페를 끼치는것을 미안스러운 일로 여긴다. 허나 그가 의술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에는 무슨 초지가 있어서겠는데 거기에 무슨 비위를 부리고 말고가 있겠는가? 사내가 한번 뜻을 품었으면 머리가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들이밀고 볼판이 아닌가.

류이태는 다른 측면에서 허준의 심정을 생각해보았다. 분명 의술을 배우겠다고 머나먼 천리길을 온 그가 여직껏 말을 꺼내지 않는것은 의술에 대해 좀 파악한 다음 말을 삐치려는게 아닐가? 그렇게 생각하는것이 타당해보였다. 그러고보면 의서를 빌려달라고 간청한것이 깨도가 되였다. 가만, 혹시 죽순이를 통해 나에 대해 뭐인가 알고있지 않을가? 왜 그런지 자기에게 의서를 빌려보자고 간청할 때 그 어조에 비꼈던 기대감, 거절당했을 때 그 눈에 실렸던 당혹감이 엇갈리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의원님! 그간 건강하시나이까?》

류이태의 생각을 깨뜨리며 방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허준이 들어섰다. 생각에서 깨여나 앉은 류이태는 앉은자리에서 답례하였다.

《음, 임자인가. 그래 모친의 병세는 어떠한가?》

《네, 퍽 나아졌소이다. 이젠 자리를 털고일어나 뜰안을 거니오이다.》

《참 다행일세.》

류이태에게서 첩약꾸레미를 넘겨받은 허준이 엉거주춤거리더니 머리를 꼿꼿이 쳐들었다.

《저, 의원님! 무례하게 군다고 욕많이 하실줄 알면서도 청을 드릴가 하오이다.》

《?!》

《다름이 아니라 의서 한권을 좀 빌려보았으면 하오이다.》

《임잔 또 그런 소리를 하나? 임자가 그렇게 떼를 쓴다구 내가 의서를 함부로 내놓을줄 아나?》

《그 의서들이 의원님의 중한 보물이라는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정 그렇다면 의원님이 손수 쓰신 수사본이라도…》

류이태는 눈을 크게 뜨며 허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누가 나한테 수사본이 있다고 그러던가? 내 입에선 그런 말이 나온것 같지 않은데…》

책상앞에 단정히 앉아 붓을 놀리고있는 설유의 귀밑이 보일락말락 발그스름히 붉어진다. 류이태는 허거픈 웃음을 지었다. 보아하니 둘사이가 여간 가까운것 같지 않다. 웬간한 사내에겐 정을 쉽사리 줄 딸이 아니다. 헌데 허준에게 관심을 둔것을 보면 앞에 선 젊은이가 좋은 사내라는것을 말해준다. 자기이상으로 딸의 지인지감과 품성을 믿고있는 류이태다.

허나 그의 입에서는 그와는 딴소리가 나왔다.

《젊은이, 내 일전에도 말했네만 임잔 의학을 모르기때문에 그 의서를 빌려주어도 리해를 못하네.》

《의원님! 그러지 마시고 절 한번 믿어보사이다. 제 한번 읽어 리해가 안되면 열번, 아니 백번을 읽어서라도 그 내용을 해득하겠나이다. 열백번 읽어 한 글자를 깨치는 한이 있더라도 꼭 한번 읽어보고싶소이다.》

류이태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허준을 바라보았다. 몇번씩이나 매정하다 할 정도로 단호하게 거절해버렸지만 단념하지 않고 지꿎게 달라붙는 허준의 그 기질과 정열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백번을 읽어 한 글자를 깨치는 한이 있더라도 의서를 보고싶다는 그 학구열에 공감이 갔다. 허준이가 심중하고 매우 침착한 성품을 지닌 젊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이의 그 열성을 인정상 무턱대고 모른다고 할수 없어 내 오늘은 임자의 청을 들어주겠네만 그 수사본도 나에겐 귀한거네. 그러니 그것을 간략화한 수사본 초록을 빌려줄테니 그거나 읽어보게나.》

《의원님! 고맙소이다!》

앉은뱅이책상앞에 앉아 아버지와 허준이사이에 오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설유가 나직이 호-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류이태의 집을 나선 허준은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와 앉은뱅이책상에 마주앉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준이 가져온 약첩을 쓸어만지던 려월은 얼굴이 상기되여 흥분해있는 아들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대체 그게 무슨 책이기에 그리도 좋아하니?》

《어머니! 류의원님이 나에게 의서 한권을 빌려주었소이다.》

《의서를?! 이제부터 의서를 파고들 작정이냐?》

아들이 배길에서도 죽순의원이 준 의서를 열성스레 읽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발도 안 난 아이가 밥부터 먹겠다는 식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던 려월이다.

《학문을 배우려면 천자문부터 배워야 하듯이 의술을 배우려면 먼저 의술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전번에 죽순의원님이 준 의서는 너무 어려워 무슨 소린지 전혀 알수 없거든요. 그래서 의서 한권을 마저 읽어본 다음 류의원님한테 의술을 배워달라구 청을 드릴가 해요.》

려월은 천진한 아이마냥 의서를 쥐고 흥에 떠있는 아들의 모습을 정답게 바라보았다. 암만 보아도 제 자식같아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대견하고 끌끌한지 아무리 골병으로 앓다가도 또 속상한 일이 생겼다가도 아들을 보기만 하면 해살이 비치여 굼니던 안개가 자취를 감추듯 온갖 근심거리가 가뭇없이 사라져버린다.

《내 이번에 병을 앓으면서 보니 류의원님의 의술이 참말로 신기하더라. 룡천의 선복이 어머니도 그렇구 여기 류의원님도 그렇구 정말로 고마운분이구나. 난 네가 그분들처럼 그런 의술을 터득하면 더 바랄것이 없다. 아마 그렇게 되면 네가 천하를 얻을수 있을게다.》

《네?! 천하를 얻는단 말이오이까?》

《그렇지 않냐. 죽어가는 병자를 살려내는 일보다 더 큰일이 또 어데 있다더냐?! 나라의 도처마다 얼마나 숱한 병난 사람들이 있을고? 그런 병자들을 죽음의 문턱에서 끌어내여 살려낸다는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또 의로운 일이냐!

그들을 살려내면 아마 너도 류의원이나 죽순의원처럼 만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사람들한테 떠받들려 살것이니 이보다 더 중하고 큰일이 어데 또 있겠니? 그게 바로 천하를 얻는것과 같지 않단 말이냐?

내 룡천에서도 그래, 여기 와서도 그래 누워 앓으면서 생각해보았구나. 나라님도 그리구 그 어떤 대신들두 병앞에서는 꼼짝 못하겠구나 하는 느낌이 새삼스레 들더구나.》

《…》

허준은 말없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 소박하고 담담한 어조에 이 아들에 대한 크낙한 믿음과 사랑이 마디마디 어려있어 눈굽이 뜨거워짐을 어쩔수 없었다. 아들과 어머니의 눈길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어머니가 눈을 슴벅거리며 아들에게 고무를 보낸다. 아! 어머니!…

책뚜껑 웃쪽에 《언해향약방》이라는 제목이 씌여져있는 의서였다.

《언해》란 한자를 우리 말로 풀이하여 쓴 책이라는 소리렷다. 지금 세월에서는 유식을 뽐내는 사람들이나 량반사대부들 대부분이 우리 글을 뒤전에 밀어놓고 한자를 쓰기 좋아한다. 허나 류이태의 의서는 우리 글로 씌여있었다.

그밑에는 《가제(림시 제목)》라고 쓰고 한줄 내려와 《류이태 저》라는 저자의 이름이 박혀있었다. 허준은 첫 장을 번졌다.

《전언(머리글)》이라는 글줄이 허준의 눈에 안겨들었다. 정신을 도사리고 허준은 한자한자 글줄을 읽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는 삼천리금수강산으로서 산천경개가 하도 좋아 향촌의 곳곳에 사람을 살리는 진귀한 약초들이 얼마든지 있다. 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진귀한 보물들을 자기 집근처와 뒤산에 두고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여 제대로 쓰지 못하고있다. 만일 각이한 병들을 치료하는 각이한 약재들을 자상히 서술한 책이 있으면 그것은 마치 밤길을 밝히는 등불과도 같이 병을 치료하는 요긴한 방법들을 알려줄것이다.

본인의 힘과 손길이 나라의 곳곳에까지 다 닿지 못하여 자기 고을과 린근고을의 사람들밖에 보아주지 못하는것도 또한 안타까운 문제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렇게 치료방법과 그것에 쓰이는 약재들을 세세히 적어 온 나라에 돌리면 만사람들이 그 덕을 입지 않을가 하는 생각으로 불미한 실력에 붓을 들었으니 이 의서를 널리 리용해주기 바란다.

흔히 일부 사람들은 <황제내경> 이나 <신농본초경>, <상한잡병론>과 같은 이웃나라의 의서들만 귀히 여기면서 그것만 들여다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리치이다. 그곳 산천의 약재가 어찌 우리 나라의것과 같겠는가? 그리고 또 그곳 사람들의 체질과 우리 나라 사람들의 체질이 어찌 같겠는가?

그리고 이즈음 소위 유식을 뽐내는 사람들은 좋은 우리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턱대고 한문을 쓰기 좋아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우리 글을 무시하고 한문을 쓰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것이다.

본인은 이웃나라 사람들이 썼다 하는 의서들보다 더 월등한 책을 쓰려고 있는 힘껏 노력하고있으나 이것이 어리석은 일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내 당대에 그 뜻을 이루어내겠는지 하는 의심도 바이 없지는 않다. 허나 우리 나라라고 이웃나라보다 못하다는 법이 있는가? 하여 본인은 이 의서를 끊임없이 보충하고 수정하여 나중에는 높은 경지에 이른 의서를 내놓을 결심을 가지고 생이 지는 마지막까지 노력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의서를 될수록 만백성들이 알기 쉽게 우리 글로 쓰려고 한다.

잘된 의서 한권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줄뿐아니라 우리 후세의 사람들도 그 덕을 오래오래 입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병으로 일찍 죽거나 잘못 치료할 념려도 없게 된다. 붓을 들면서 이런 뜻이 마음속에 일기에 본인의 생각을 잠시동안 적어놓았노라.》

허준은 마음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전언의 글에 류이태의 뜻이 그대로 집약되여있는듯싶었다. 그러니 류이태는 단지 그시그시 병난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만을 하는것이 아니라 자기의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한발자국, 한발자국 걸어가고있는셈이였다. 그 길은 어찌 보면 내가 갈망하고있는 길과 엇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허준의 뇌리에 얼핏 갈마들었다.

허준은 입술을 감빨며 다음페지를 펼치였다.

《…병자의 치료는 림기응변하여야 한다. 사람의 온몸으로는 경락을 따라 기가 흐르고있다. 사람은 자연의 기와 서로 교류되는 속에서 살고있다. 옛 시절에는 이 기가 충실해서 그 기를 받으면서 살던 사람들은 다 든든하였다. 그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기가 점차 약해졌기때문에 그 기를 받은 사람들은 보통 약해졌다. 그러므로 옛 시대에 쓰이던 약처방의 용량을 지금 사람들에게 천편일률식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즉 약을 지을 때 일률적으로 하지 말고 림기응변해야 한다.》

허준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서경덕의 《리기설》을 거듭하여 읽었는지라 그 리치가 잘 리해되였다. 결국 사람의 몸에도 경락이라는 통로를 따라 기가 흐르고있었다.

《병은 능숙하게 치료해야 한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고 약간한 차이가 있으며 즐기는것과 휴식, 일하는것이 다 다르다.

본래부터 추운 겨울에도 찬물을 들이키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람을 슬쩍 쏘이기만 해도 기침을 하다가 인차 감모(감기)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

또한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몇백리를 내달려도 땀이 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문밖에만 나가도 인차 피로해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술을 동이로 마셔도 취하지 않는데 어떤 사람은 입에도 대지 못한다. 사람은 눈과 귀, 맥락과 기혈은 다 같으나 그 병증은 령활무쌍하니 병을 고치기가 어찌 쉽다고 말할수 있으며 어떻게 약을 망탕 쓸수 있으랴. 이것을 잘 고려하여 매 사람들에게 알맞게 약과 침을 적용하여 병기를 몰아내는것이 명의가 아니겠는가…》

《음- 그렇단 말이지.》

저도모르게 허준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는 글을 읽을 때 리해가 된다던가 공감되는 경우에 그가 하는 일종의 습관이다.

《의서가 귀하다고 하지만 의서에만 망탕 매달려서도 안된다. 하늘에 뜬 기러기를 그리 어렵지 않게 능숙한 솜씨로 쏘아떨구는 궁수도 그 방법에 대해서는 책으로 적어 전달할수 있겠사오나 그의 참묘리에 대해서는 자자구구 다 적어 전달할수 없다. 그러하니 의서에 기초하여 본인이 깊이 생각해보면서 끊임없이 탐구하고 숙련해야 한다.》

류이태의 이 글은 의학의 세계에 림하는 자세를 깨우쳐주는 말이기도 하였다.

허준은 의서의 세계에 더욱 흥미진진하게 잠겨들어갔다. 이제까지 본것은 의서의 한 모퉁이만을 조금 본데 불과하였다. 좀더 깊이 들어가보고싶었다. 특히 의술의 기본대상인 사람에 대하여 알고싶었다. 류이태가 죽음의 문어구에서 살려낸것은 사람이 아닌가. 즉 의술의 대상은 사람이다. 그러면 사람의 몸은 대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서원에서 배우던 유교경전의 허황한 리론과는 전혀 다르면서도 자기의 생활과 매우 가깝고 또 사람의 갖가지 병을 고쳐내는 실용적인 학문의 세계가 허준의 눈앞에서 펼쳐지고있었다. 허준은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입술을 감빨면서 의서를 정신없이 읽어나갔다.

《몸의 형체: 옛사람들은 몸은 한개의 나라와 같다고 하였다. 즉 가슴과 배는 궁실이요, 팔과 다리는 그 뜨락이며 뼈마디는 온갖 관리들이고 정신은 임금이요, 혈은 신하이고 기는 백성과 같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몸은 우선 섭생으로 잘 다스려야 하며 다음으로 병이 들면 제때에 치료하여 정상으로 되돌려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의 형체와 기능이 기울어져 나라가 쇠약해지고 주저앉듯 일어서지도 활동하지도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몸의 형체와 기능도 늙으면 정과 혈이 모두 줄어들고 7규(일곱개의 구멍)가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게 된다. 즉 울 때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고 도리여 웃을 때 눈물이 나오며 걸죽한 코물이 많이 나오고 귀에서는 매미우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난다. 또 음식을 먹을 때에는 입이 마르고 잘 때에는 침을 흘리며 오줌이 저도모르게 나오고 대변도 몹시 굳거나 설사가 나며 낮에는 몹시 졸리지만 밤에 자리에 누우면 잘 자지 못한다. 이것은 늙은이의 병이다.》

신통한 소리였다. 허준에게는 이와 같은 글귀가 리해되지 못할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어마어마하게 의서의 난해함을 강조하던 류이태의 말이 의아쩍게 생각되였다.

(의학은 참으로 실용적인 학문이다! 내가 이날이때까지 괜히 허황하게 리치에 닿지도 않는 경전만을 외워왔구나!)

허준은 지금까지 헛되이 흘려보낸 시간이 아까왔다. 자기가 몇번이고 떼를 써서 류이태의 이 의서를 빌려오기를 천만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행방없이 경전이나 뒤적이고있을것이 아닌가? 허준은 이런 생각을 하며 계속 글줄을 읽어나갔다.

《그러하되 늙으면 어떻게 양로해야 하는가?

50살이 되면 음식을 젊은 사람과는 다르게 먹어야 하며 60살이 되면 고기를 먹어야 하고 70살이 되면 기름진 반찬을 먹어야 하며 80살이 되면 진귀한 음식을 먹어야 하고 90살이 되면 항상 음식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반찬과 음식을 먹지 않을 때에는 보해야 한다.》

허준은 계속 책장을 번져나갔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점차 그늘이 지기 시작하였다. 책장을 번져나갈수록 알기 어려운 문구들이 자주 나타났던것이다.

《페는 기를 주관하며 기는 신에서 생긴다. 이때 맥을 짚어보면 촌구맥이 국물우에 뜬 고기덩이처럼 피뜩피뜩 나타나는것은 양기가 미약한것이요 거미줄같이 휘감아놓은것 같은것은 음기가 쇠약한것이다.

사람은 기를 음식에서 받는데 맑은것은 영이 되고 탁한것은 위가 된다. 위는 주리와 련관되여있다.》

허준은 머리를 기웃하였다. 어렴풋이 표상은 안겨왔으나 모를것이 더 많았다.

(화담선생님은 기는 만물의 근원이며 하늘과 땅은 물론 모든것이 기로 이루어졌다고 하였는데 신에서 기가 생기고 페가 기를 주관한다고?! 그리고 촌구맥이란 대체 뭔가? 기가 음식에서 생긴다는건 리해할수 있는데 맑은것은 영이 되고 탁한것은 위가 된다는것은 대체 뭔가? 그리고 주리란 또 무슨 소리인가?)

책장을 번질수록 글줄과 문장들은 더욱더 어려운 말로 이루어져있었다. 허준이 혼자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리해할수 없는 리치였다.

(의학은 결코 가벼운 학문이 아니라 리치가 매우 심원한 학문이구나!)

허준은 의학의 세계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이런 의술을 배워 만백성들의 병을 치료하고 그들의 목숨을 구원하는것이 얼마나 의로운 일인가. 더우기 류의원님이 쓰신바와 같이 후세에도 물려줄 훌륭한 의서를 내 당대에 남길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뜻있고 의로운 일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자기가 감히 바라보지도 못할 엄청난 일같이 생각되였다.

(이 일은 이미 류의원님이 시작하지 않았는가?)

허준은 류이태가 하는 이 의로운 일을 자기가 곁에서 있는 힘껏 도와주기만 해도 한이 없을것 같았다. 다만 한가지 명백한것은 현재로써는 허준이 혼자서 이 의서의 심원한 리치와 뜻을 도무지 깨칠수 없다는 그것이였다.

며칠동안 책과 씨름하던 허준은 드디여 결심을 내렸다.

허준은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정색하여 말하였다.

《할머니! 어머니! 전 이제부터 류이태의원님한테서 정식으로 의술을 배울가 하나이다.》

외할머니가 눈을 꺼벅거리며 손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뭐?! 네가 꽤 배워냄즉 하냐?》

《사람이 결심하고 달라붙으면 못해낼 일이 없소이다. 이런 시가 있지 않소이까. <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로다> 자신있소이다.》

어머니가 아들을 대견스레 바라보았다.

《네가 저 류의원님에게서 그런 신기한 의술을 배워낸다면 이 어민 더 바랄게 없다. 그런데 그게 가당하겠는지 걱정부터 앞서는구나.》

《어머니, 저 의서를 보니 류의원님도 뜻이 높으신분 같은데 아마 망탕 거절하진 않을것이오이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느냐.》

과시장에서 여지없이 쫓겨난 허준의 일로 하여 가슴에 멍이 들고 심화병을 앓던 려월의 해쓱한 얼굴에 다시금 한가닥의 희망이 피여오르기 시작했다.

며칠후 허준은 의서를 옆구리에 끼고 류이태를 찾아갔다. 류이태가 의아한 기색을 지으며 물었다.

《오늘은 약짓는 날도 아닌데 어떻게 왔나?》

《저 의원님, 빌려주신 의서는 참으로 요긴하게 보았소이다. 헌데 몇가지 의문되는 글이 있어서 찾아왔소이다.》

《내 임자에게 말했지, 의술의 리치는 그렇게 간단하게 깨치는게 아니라구 말이네.》

《네, 이제야 의원님의 그 말씀의 뜻을 알겠소이다. 그래서 몇가지 좀 묻고싶어서…》

《임자 제정신인가? 내가 언제 자네하고 마주앉아 입씨름을 할 겨를이 없네. 자네 눈으로 좀 보게나! 저 아래방에 얼마나 많은 병자들이 내 손을 기다리고있는가 말일세. 그러니 그런 동에 닿지도 않는 소린 아예 싹 그만두고 그 의서나 돌려주고 어서 가게나.》

류이태는 우물쭈물하는 허준의 손에서 자기의 의서를 쑥 뽑아 설유에게 넘겨주었다.

《얘, 설유야! 이걸 건사해두거라.》

설유가 당황하여 어쩔바를 모르는 허준을 얼핏 바라보았다.

류이태는 더는 허준을 돌아보지도 않고 병자의 치료에 여념없이 바삐 돌아갔다.

허준은 더 말을 삐쳐보지도 못하고 조용히 류이태의 방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는 그냥 돌아설수 없었다. 허준은 우줄우줄 늘어앉아 아래방에서 자기의 순번을 기다리고있는 병자들의 틈바귀에 끼워앉았다.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려 아래방으로 드나드는 설유가 올방자를 틀고 심중한 기색을 지은채 앉아있는 허준을 힐끔 쳐다보았다.

류이태는 병자들속에 섞여있는 허준을 보고서도 전혀 모르쇠하며 치료에 열중하고있었다.

류이태의 집으로 찾아드는 사람들은 끝이 나지 않았다. 늙은이, 젊은이, 남자, 녀자, 어린아이들 그리고 급한 병자와 고질적인 병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허준은 류이태가 왜 자기의 청을 거절했는지 리해할수 있었다. 정말 류이태는 앉아있을새없이 부지런히 돌아갔다. 이윽고 술시(저녁 7~9시)가 되자 아래방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류이태가 아래방에서 서성거리는 허준을 돌아보았다.

《임잔 나와 버틸내길 하자는건가? 그렇게 해서는 안돼. 내 말하지 않았나? 나에겐 짬이 도무지 없다구 말일세. 임자도 오늘 하루종일 앉아서 제 눈으로 똑똑히 봤을터인데.》

《저 의원님, 그럼 일각동안만이라도 시간을 내주소이다.》

《안돼!》

《그럼 한문장만이라도…》

《이보게! 일전에도 말했지만 난 긴 말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일세. 자네처럼 고집을 쓴다 해서 내 맘이 돌아서는것도 아니니 그러지 말구 어서 돌아가게.》

류이태는 더 가타부타할것이 없다는듯 돌아서서 장지문너머 자기방으로 쑥 들어가버렸다. 허준은 하는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류이태의 집을 나섰다. 그러는 허준의 모습을 설유가 동정과 측은한 눈길로 한동안 바라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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