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제 1 장  불우한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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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과는 인연없이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사모관대 떨뜨린 량반댁이건, 무겁게 짓누른 량반세상의 질곡속에 간신히 목숨을 연명해가는 백성들의 집이건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것은 매한가지이다. 신분적장벽이 하늘높이 막아선 세월에 그러한 공통된 심리는 봄이 오면 날씨가 따스하고 온갖 만물이 소생하기때문일가.

커다란 동헌대청의 서쪽모서리 작은 별채에서는 희미스레한 불빛이 간간이 흘러나오고있었다.

퇴마루기둥에 삐뚜름히 기대고 서있는 사또댁도령인 허모는 가느다란 눈을 쪼프리고 아까부터 그 별채를 쏘아보고있었다. 장난삼아 누가 그어놓은것 같은 두눈은 어둠속에서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허나 자세히 주시해보면 알릴락말락한 실눈에선 얼음물을 부은듯한 소름끼치는 랭기와 흡사 먹이감을 노리는 살모사의 독기가 풍겨나왔다.

《저놈의 자식은 오늘밤도 밝힐셈인가? 내 저자식을 그저 콱…》

허모가 혼자소리로 이렇게 뇌까리는데 어느새 나타났는지 물독같은 뚱뚱한 몸을 들썩거리며 모친인 오매가 입술을 비죽이 내밀며 심술궂은 소리를 내뱉았다.

《저것들이 아직도 자빠져 자지 않고 밤늦게까지 아까운 초대를 태우고있구나. 아니, 저 초대는 이 집 재산이 아니라더냐?》

삐뚤어진 심사로 말하면 모자가 서로 짝지지 않건만 그 본심은 차이가 있다고 해야 옳을것이다. 오매에게 있어서 남편의 소실인 려월은 눈에 든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려월이 남편의 각근한 정을 받고있기때문이다. 생각만해도 복통이 터질 일이였다. 양천 허씨집안은 대대로 명문가문으로 나라안에도 소문이 났고 오매의 집안도 그에 못지않은 명문가의 집안이다.

허준의 가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다. 그중의 하나는 그의 가문이 허공, 허웅, 허종, 허저 등과 같은 유명한 의원들을 배출한 의학자의 가문이라는 설인데 그중에서도 15세기의 유명한 의학자인 허종은 당대의 명의로 소문났으며 많은 의생들을 키웠다고 한다.

《성종시기 허종은 약처방을 내리는 리치를 가장 정통한데다가 남을 가르치는데 온갖 방도를 다하였다. 오늘날 뛰여난 의원들은 대개 허종에게서 배운 사람들이다.》(《중종실록》권32, 13년 3월 기유일)

그와 다른 설은 그의 집안이 무반가문출신이라는것이다.

이러한 설들이 나돌게 된것은 허준이 비천한 서자출신인것으로 하여 그 출신에 대해 자세히 기록된것이 없다는 사정과 관련되며 다른 한편 후날 그가 왕실어의를 하였던 까닭에 그의 생애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것과도 관련된다고 볼수 있다. 왜냐하면 그 어느 봉건사회보다 신분적구별이 뚜렷한 조선봉건왕조에서 서자의 신분은 사회의 버림을 받았기때문에 구태여 사가들이 그 래력을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만백성우에 군림한 지엄한 임금과 깊고깊은 구중궁궐에 들어앉은 왕실과 관련한 내용은 일체 비밀에 붙여진것으로 하여 왕실의 어의인 허준의 생애도 흑막속에 묻히기 쉬웠을것이다.

허준의 가문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나돌고있지만 그중에서 비교적 신빙성이 있는것은 그가 양천 허씨가문의 서자출신이며 그의 부친이 룡천군수직에 있었다는것이다.

이러한 허씨가문에 시집을 온 오매가 우로 련속 딸만 둘을 낳고 이번에는 아들을 낳아줍소사 하고 만삭된 몸을 힘겹게 끌고 북악산에 올라 산신령에게 지성껏 빌고있을 때 아닌밤중에 홍두깨라고 춘삼월에 군사시찰의 명분으로 하삼도에 내려갔다가 쾌청한 한가을에 귀가한 남편 허륜이 꽁무니에 젊디젊은 려월이를 척 달고 나타날줄이야.

남편의 뒤를 따라 주밋거리며 대문에 들어선 아릿다운 녀인으로 하여 온 집뜨락이 환해진듯싶었으나 그때부터 오매의 얼굴엔 칠팔월 장마철 구름장같은것이 항상 사라질줄 몰랐다.

일은 그후에 더 복잡해졌다. 한달후에 오매가 허씨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았건만 남편은 아들애만 들여다보았지 자기에게 한마디 치사의 말도 하지 않은것이였다. 남편의 무관심에 성이 독같이 오른 오매가 울고불고 하면서 음식도 제대로 들지 않고 제 설분에 옴하여 갓난애를 방심하다나니 십여년만에 겨우 허씨집안의 종손이라고 고고성을 터친 허모는 어려서부터 비들비들 앓기만 하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태후에 려월이가 아들을 낳았는데 남편은 엄정한 성미와는 달리 눈꼴 사나울 정도로 려월의 곁을 맴돌았으니 그 갓난애가 바로 허준이다. 허준이 태여난후 려월에게 더 정신이 팔려있는 남편의 처사는 오매의 속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하긴 자기보다 근 십년이나 젊은 려월이가 어찌 더 곱지 않으랴만 오매는 남편이 자기를 다 늙은 할망구를 대하듯 쓴외보듯이 하니 남편이 고와하는 려월이가 눈에 든 가시처럼 얄밉기 그지없었다.

에미가 보기 싫으니 그의 소생인 허준도 그지없이 미워났다. 게다가 자기가 막 씹어먹고싶어 이를 가는 려월의 아들 허준이가 언감생심 자기의 아들인 허모보다 글공부를 더 잘한다니 더더욱 밸이 꼴리는 오매였다. 그런 풀수 없는 앙숙으로 하여 허준이가 매일 밤늦도록 글공부 하느라 꺼지지 않는 저 불빛은 오매에게 있어서 화를 돋구는 불씨였다.

한편 허모에게 있어서 허준의 직심스러운 학구적태도와 뛰여난 실력은 아버지 허륜에게서 종종 꾸지람을 듣는 리유로 되고있었다. 허륜은 허준과 실력을 대비하며 눈을 부라리고 허모에게 온갖 욕설을 다 퍼붓군 하였다.

《이 못난 자식! <소수서원>에까지 다닌다는 녀석이 시골서원에 다니는 준이보다 못하다니 그게 어디 될 말이냐? 못된 놈의 송아지 엉치에서 뿔이 난다더니 글공부는 않고 벌써부터 주색질에 미쳐돌아가니 그래가지구 네놈이 사람질을 할상 싶으냐? 그렇게 처신할바에는 내앞에 얼씬하지 말아!》

부친의 이러한 추궁과 닥달질은 그를 분발시키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준에 대한 반감과 증오만을 불러일으켰다.

《소수서원》이란 온 나라에 소문이 짜한 백운동서원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허준이 태여나기 몇해전인 1541년에 경상도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말의 유학자인 안향(일명 안유. 1243년-1306년)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그의 옛집터가 있는 백운동에 사당을 건립하고 뒤이어 사람들의 힘을 모아 그옆에 세운것이 다름아닌 백운동서원이다. 그후 그곳 군수로 부임되여온 리황(1501년-1570년)의 제의로 명종이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써주었는데 그때부터 백운동서원은 온 나라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고보면 이른바 임금이 직접 현판을 써서 내려보내는 《사액서원》의 발단은 백운동서원에서 시작되였다고 볼수 있었다.

임금이 직접 현판을 써서 내려보낸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내걸자 서원은 번창하기 시작하였고 그 위세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여서 이 서원출신의 량반댁자손들이 조정의 벼슬자리에 등용되군 하였다. 그래서인지 한다하는 권문세가들속에서 《소수서원》에 자기의 자식들을 보내여 공부를 시키는것이 하나의 풍조로 되였다.

허륜도 집안의 뒤를 이을 맏아들인 허모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한성에 있을적부터 벌써 멀고도 먼 경상도에 아들을 보내여 공부를 시키고있었다. 허륜이 룡천군수로 부임되여온지는 반년밖에 안된다. 한때 경상우병사를 지낸 부친 허곤과 면식이 있는 사람이 경상도감영에 있는 유리한 조건도 없지 않았으나 허륜은 어떻게 하나 아들 허모가 서원을 마친 다음 량반댁출신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하려는 의도에서 천여리나 떨어진 풍기땅에 허모를 보냈던것이다. 허륜이 군수로 있는 평안도 룡천에서 백운동서원이 있는 풍기군까지는 무려 천여리나 되였는데 이 또한 허륜이 허모를 꾸짖는 리유의 하나로 되군 하였다. 일년에 서너번씩 뻔질나게 집으로 와서는 돈을 요구하는 허모였다. 그때마다 허륜은 서원에서 배운 내용을 시험쳐보군 하였는데 아들이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버럭 어성을 높이며 이렇게 소리치군 하였다.

《이녀석아! 집안의 재산을 다 들이밀어 경상도 그 먼곳까지 보내여 공부시키는데 늘 봐야 이 모양이니 언제면 정신이 들겠냐? 이 허씨집안에 망조가 들었지, 들었어, 저 허준이를 좀 봐라! 비록 시골서원에 다니지만 얼마나 직심스레 공부하는지 언제나 첫손가락에 꼽히고있어. 그런데 네녀석은 하라는 글공부는 하지 않고 벌써부터 술과 계집질에 미쳐돌아가니 그래가지구 대체 어떻게 과거에 급제한다더냐?》

허륜의 욕설처럼 허모는 결코 머리가 나쁘거나 총기가 없는것이 아니였다. 따져보면 도리여 허준이보다 머리가 좋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허나 허모는 글을 익히고 학문을 파고드는 노릇이 영 질색이였다. 반면에 팽이처럼 잘 굴러가는 그 머리로 권모술수를 꾸미는데서는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허모는 부친에게서 닥달질을 받으면서도 자기의 이 능력에 대해 추호도 믿어의심치 않았으며 범잡은 포수마냥 자신에 대해 자부하고있었다.

(흥, 꿩 잡는게 매라고 어쨌든 과거급제하여 벼슬하면 될게 아니야. 서원을 나오면 내가 벼슬을 못할것 같은가. 천만에! 아무리 날구 뛰여두 첩의 소생인 준이가 당당한 량반댁자손인 나를 당할수 없어!)

허모는 고양이앞의 쥐처럼 부친앞에 수굿이 머리를 숙이고 욕설을 당하면서도 속으로는 늘 이런 생각을 하군 하였다. 하지만 허모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아버지앞에서 한대중 묵묵부답으로 응대하였다.

왜냐면 배다른 동생 허준의 학문이 실지로 자기를 훨씬 릉가하고있는것만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였기때문이였다. 이러한 허모이고보니 밤늦도록 꺼질줄 모르는 별채의 불빛이 발바닥에 박힌 티눈보다 더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오매와 허모의 이같은 심사가 서로 손벽을 쳐서 이날밤에 이런 말들이 오간것이다. 허모는 허준이보다 두살 우인 스물두살이다. 과거급제하기 전에는 성례를 치르지 않는답시고 여직껏 혼사말을 삐치지 못하게 하는 허모이다. 허나 명색뿐이고 주색질에 난당이여서인지 준이보다 머리 하나는 작고 몸도 여윈 하늘소마냥 바싹 말랐다. 한참이나 별채를 노려보던 오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치마바람을 일구며 마루에서 내려 별채로 향하였다.

불그스레한 겨릅초대가 타오르는 자그마한 방안에서는 이무렵 허준이가 개다리소반을 책상삼아 글공부에 여념이 없었고 그뒤에 한쪽무릎을 세우고 앉은 려월은 바느질을 하면서 밥상에 머리를 수굿하고 정신없이 책을 읽고있는 아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책속의 지식을 깡그리 빨아들이려는듯 잠시도 글줄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있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려월의 심중에서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생각이 이 시각에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있다.

(장차 저애의 운명이 어찌될고?)

밖에서는 아들애를 보고 사또댁 도령이라고 괴여올리지만 어쨌든 그애는 서자이다. 비록 아버지가 한개 고을의 관속들과 백성들이 《원님》, 《사또님》이라고 머리를 조아리는 군수이지만 아들애는 다름아닌 첩의 소생인것이다.

려월의 고향은 경상도 산음이다. 그의 할머니는 본래 연산군시절에 왕궁의 궁녀였다고 한다.

1506년 9월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 등이 반정을 일으켜 임금자리에 있던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후날의 중종)을 왕위에 앉힌 다음 연산군시절의 신하들과 궁녀들을 숙청하였는데 그때 궁녀였던 할머니는 이미전부터 눈을 맞춘 수비군교를 따라 은밀히 왕궁을 탈출하여 그 군교의 고향인 경상도 합천으로 몸을 피하였다. 합천에 당도한지 며칠후 수배령이 내려 군교는 금부에 잡혀 처형되고 할머니는 합천관아에 관비로 되였다. 화는 쌍으로 온다고 이듬해에 사내애를 낳은 할머니는 애가 세살나던 해에 그만 산후탈로 운명하고말았다. 림종을 앞두고 할머니는 세살난 아들애의 손목을 꼭 잡고 《너의 아버지는 손가였으니 네 이름은 손…》하고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노비의 자식이라 그때까지도 변변한 이름자도 모르고있던 아들애는 자라면서 어머니가 자기의 성이 손씨라고 말하던것밖에는 생각할수 없었고 고을에서는 그애를 보고 그저 《돌이》이라고 불렀다. 이집저집 떠돌아다니면서 동냥질로 커가던 돌이는 아홉살때 합천관가에 관노로 들어가게 되였다.

그후 여러번이나 군수가 갈리고 세월이 흘렀으나 돌이는 관아에서 온갖 잡다한 일들을 도맡아하며 성장하였다. 비록 천한 종의 신세였으나 왕궁수비군교로 있던 체격이 름름한 아버지와 궁녀로 뽑혔던 아릿다운 어머니의 피가 그의 몸에 살아있어서인지 점점 총각꼴이 잡히면서 용모가 동탕하게 잘나 사람마다 혀를 차군 하였다. 오죽하면 고을의 관장으로 부임되여오는 한성량반들의 안댁들과 딸들이 돌이한테 반해 밤이면 이불깃을 뜯으며 가슴을 박박 허볐다는 소문이 돌았겠는가.

신분은 비천한 노비였으나 하늘이 선사한 부모들의 피만은 속일수 없어 돌이는 합천고을은 물론 온 경상도땅에 미남자로 소문이 자자하게 되였다. 그 끼끗한 용모탓에 돌이의 운명은 더 불행해지게 되였다.

당시 합천관아에는 서분이라고 하는 처녀가 관노로 박혀있었는데 어느때인지는 몰라도 돌이와 서분이 사이에는 애틋한 련정이 소리없이 오가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해 여름날, 불현듯 도차지가 돌이에게 목욕을 시키고 갓 풀을 먹인 새옷을 갈아입히더니 마님이 찾는다는것이였다.

무슨 감투끈인지 영문을 알지 못하고 돌이가 안댁이 거처하는 내당앞에 이르러 《마님! 소인을 찾으셨나이까?》하고 물었으나 아무런 응대도 없었다. 돌이가 련이어 두세번 찾아보았으나 역시 인기척이 전혀 없다. 내가 잘못 알고 왔는가 하고 돌이가 돌아서는데 문득 방안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내당문이 살며시 열리며 서른댓살밖에 안되는 군수댁이 새뽀얀 얼굴을 내밀고 해사한 웃음을 지었다.

《음, 돌이가 왔나? 어서 빨리 들어오라구.》

엉거주춤하며 짚신발을 비벼대고 방으로 들어서던 돌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방안에 요란한 주안상이 마련되여있었던것이다. 까닭을 알길 없는 돌이가 두리번거리며 어쩔줄을 몰라하는데 군수댁이 얼른 문을 닫았다. 하더니만 새하얀 살결이 다 들여다보이는 하르르한 속옷차림으로 별스레 다정하게 돌이의 팔을 끄당기며 상으로 이끌었다. 찰싹 달라붙은 속옷으로 하여 녀인의 풍만한 육체의 륜곽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뜻밖의 환대에 돌이는 얼떨떨해졌다. 그러는 돌이의 벌개진 얼굴을 재미나다는듯 쳐다보며 군수의 안댁이 아양을 떨었다.

《자네가 그동안 수고하기에 내 오늘 한턱 내는것이니 마음껏 들게. 령감은 감영에 가고 없어. 이 방안엔 나와 임자뿐이야.》

녀인의 몸에서 사내를 취하게 하는 야릇한 향기가 풍겨오고 그의 눈에서는 이글이글 정욕의 불길이 일고있었다. 갑작스레 맞다든 정황앞에서 돌이는 두손을 맞잡고 두눈을 어디에 건사할지 몰라 허둥거렸다. 관아에 매인 노비라고 하지만 너무도 정직한 돌이였다. 손을 내젓는 돌이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튀여나왔다.

《아니, 이러지 마소이다. 소인이 감히 어떻게

돌이는 황급히 돌아섰다. 그찰나 안댁이 돌이의 목을 그러안았다. 열에 뜬 안댁의 목소리가 돌이의 귀를 간지럽혔다.

《돌이, 너도 사내녀석인데 뭘 그래? 이 마님이 널 끔찍이도 생각한다는걸 모른단 말이냐?

네가 사또가 없는 짬에 이 방에 들어와 속옷차림의 내 몸뚱이를 훔쳐봤다는것이 어떤 죄인줄 알아? 내가 이제 소리 한번 치면 넌 사또댁 겁탈죄를 뒤집어쓰고 영낙없이 형틀에 매일 신세야. 알겠어? 그러니 사내녀석이라는게 머저리처럼 굴지 말구 내 말대로 해!》

돌이의 목을 꼭 그러안은 안댁의 입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나오고 돌이의 잔등에 꽉 붙이고있는 풍만한 젖가슴은 널뛰듯 오르내리고 있었다. 돌이는 자기가 군수댁의 술책에 빠져들었다는것을 깨달았다. 눈앞이 캄캄하고 입안이 말라들었다. 불쑥 서분의 순진한 두눈이 눈앞에 떠올랐다. 어제밤에도 잠간 만났을 때 정답게 바라보던 그 눈길이 얼핏 스쳐지나면서 돌이는 가슴속에서 세찬 분노가 일었다. 세상에 녀자기생이 있다더니 마님이 나를 남자기생으로 보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돌이는 분노를 터뜨리며 안댁의 포동포동한 팔을 집게같은 손으로 꽉 움켜쥐였다.

《마님은 이 돌이를 잘못 보았소! 그래, 당신네 량반세도가들은 인륜도 없고 렴치도 없소?

사내라고 생긴 량반들은 부녀자들을 노리개처럼 여기며 신세를 망쳐놓더니만 마님같은 내인들은 우리 남자들을 제 욕구나 채워주는 물건짝인줄 아는구려.이 돌이가 관가에 매여산다구 인륜도 도리도 모르는 시렁배인줄 아시우?》

돌이는 움켜쥐였던 안댁의 두팔을 콱 밀치고 방문을 걷어차고 나갔다. 등뒤에서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다 퍼붓는 안댁의 넉두리가 따라왔다. 그로부터 사흘후 돌이는 영문모를 도적놈으로 몰려 형틀에 매이게 되였고 끝내 형장에서 숨을 거두고말았다.

돌이가 비명에 생때같이 목숨을 잃은지 며칠이 지난 뒤 서분이는 누구도 모르게 종적을 감추었다. 합천군수가 관가의 군사들을 발동하여 서분이를 잡는다고 돌아쳤으나 그가 간 곳을 그 누구도 알길 없었다.

돌이가 억울하게 죽은 후 합천관가를 탈출한 서분이는 발길이 닿는대로 허둥지둥 달렸다. 군경내를 벗어나 남쪽으로 무작정 도망가던 서분이가 힘이 진하여 정신잃고 쓰러진 곳은 산음경내였는데 그곳은 다름아닌 구형왕사가 있는 왕산기슭이였다.

구형왕사란 옛 금관가야의 10대왕이자 마지막왕이였던 구형왕(521년-532년)의 사당으로서 산음현에서 서북쪽으로 이십여리 떨어진 곳에 있는 왕산의 산기슭에 지은것이다. 왕산에는 왕산사라는 절간도 있었는데 구형왕의 무덤은 이 왕산사의 북쪽에 돌로 쌓아 지은것으로서 네면에 모두 층계가 있었다. 고려때에는 그런대로 조정에서 관리를 임명하여 돌보도록 하였지만 수백년전에 사라진 왕의 무덤을 고려왕조의 씨종자까지 말리워버리겠다고 혈안이 되여 날치던 리씨네는 돌따서서 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래서 구형왕의 무덤은 그 후손들이 대를 물려가며 지키고있었는데 그들은 늙은 로인내외를 산당지기로 쓰고있었다. 마침 무덤을 돌아보고 내려오던 산당지기로인이 쓰러진 서분이를 발견하고 제집으로 업어가 소생시켜주었다.

돌이가 죽은 후 따라죽으려고 모질게 결심했던 서분이가 이를 악물고 살아야겠다고 고쳐 생각한것은 배안에서 꿈틀거리는 새 생명때문이였다. 세상밖에 밀려난 노비의 신세에서 서분이가 한가닥 미련이라도 가진것은 사내답게 잘나고 인정이 많은 돌이와 가정을 이루고 오붓하게 살려는 희망이였다. 그런데 그 돌이가 군수녀편네의 흉계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으니 장차 누구를 믿고 험악한 세상을 살아간단 말인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고 생각했다가 또 고쳐 생각하기를 그 몇번이던가. 생각끝에 서분이는 합천관가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했던것이다. 오래지 않아 아이가 태여나겠는데 노비의 처지에서 아이를 낳는것은 도저히 용납될수 없었다. 다름아닌 그 아이가 돌이의 아이인 형편에서 후일이 어떻게 더 험악하게 번져질지 누구도 가늠할길 없었다. 그래서 서분이는 무작정 관가에서 도망친것이다.

몸이 회복된 후 자초지종을 묻는 늙은 내외에게 서분이는 자기의 처지를 그대로 이야기할수밖에 없었다. 혈붙이 하나 없는 지금의 형편에서 늙은 내외는 서분이의 유일한 지탱점이였다. 울음속에 도간도간 이야기가 끊어지기도 하였다. 서분이의 말을 다 듣고난 내외는 눈물을 머금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고마운 늙은 내외는 서분이를 저들의 양딸로 받아들이고 관가에는 어려서 잃어버린 딸을 찾았는데 딸이 출가했다가 그만 호환으로 남편을 잃었노라고 통지하고 호적부에 올렸다.

서분이는 그 늙은 로인내외의 딸로 호적부에 올리고 반년후에 딸애를 낳았다. 그 딸이 다름아닌 려월이다. 늙은 로인의 성이 로가여서 서분이는 로씨로 등록하고 딸애는 돌이의 성을 따서 손씨로 호적부에 올리였다.

그렇게 되여 려월은 산음사람이 되였다. 산음에서 태여났다고 하지만 똑똑한 본적지도 없는 불행한 인생이였다. 려월은 점점 자라면서 할머니와 부모님들을 닮아 절세의 가인으로 피여났다.

산전막의 늙은 로인내외는 그러한 려월이를 친손녀이상으로 귀해하였으며 가난한 살림속에서도 있는것 없는것 다 기울여 키워주었다. 젊었을적에 서당에서 글을 익혔다는 로인의 손에서 려월은 글을 익혀 린근사람들은 글 잘 아는 딸을 두었다고 그의 어머니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려월이가 열여섯살나던 해에 경상도 군사실태를 료해하러 내려왔던 허륜이 산음에 있는 남산고성을 돌아보다가 고을의 왕산에 옛 가야국왕의 무덤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구경하러 왔었는데 산나물을 뜯는 려월이를 띄여보고 첫눈에 마음이 끌려 소실로 데려갔다. 어떻게 되여 어머니가 자기를 한성량반의 소실로 들여보냈는지 려월은 아직도 의문스러웠다. 허나 남편이 자기를 무던히도 위해주니 그런 의문이 자연히 사라져버렸다. 반면에 정실댁인 오매의 새암과 투기질은 때이르게 려월의 머리에 흰서리를 내리게 하였다.

지금 이 시각도 려월은 직심스레 글공부에 전념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지나온 자기의 운명을 돌이켜보고있었다. 한겨울철의 고드름마냥 아들의 앞날에 대한 근심이 가슴속에 매달려 사라지지 않는다. 서자출신은 아무리 출중하고 뛰여난 재능이 있어도 벼슬길이 막혀버린 세월이다.

그런데도 아들애는 저렇게 매일 밤늦게까지 글을 파고드니 려월의 가슴은 백근 철추를 달아놓은듯 무겁기만 하였다.

(장차 저애를 어떻게 하면 좋을고? 과거에 응시하지 못할바에는 그리도 직심스레 익힌 지식과 학문이 전혀 쓸모없는 무용지물이 된다는것을 저애는 알고있을가?)

허나 허준은 그런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늘 손에서 책을 놓을줄 모르고 학문을 파고들고있다.

허준이 한창 읽고있는 책은 화담 서경덕(1489년-1546년)이 쓴 《리기설》이다. 화담 서경덕이라고 하면 온 나라에 유명짜한 성리학자였다. 화담은 허준이 태여난 해에 별세하였다.

이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세상리치는 도대체 어떻게 되여있는것인가? 늘 이와 같은 물음을 제기하고있던 허준이였다. 화담 서경덕의 《리기설》에는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이러한 리치를 담은 글줄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늘 유교의 《격물치지》 (사물에 접촉하여 그 리치에 이른다는 관념론적인 리론)요, 《맹자》요, 《론어》요 하는 경전만을 외우기에 신물이 날대로 난 허준에게 있어서 서경덕의 《리기설》은 모두가 새라새로운것들이였다.

세계의 본질을 이루며 세계의 모든 사물현상들의 발생발전과 그 운동변화를 좌우지하는것은 신이나 리(정신)가 아니라 오직 물질적인 기이다. 우주공간에는 기가 가득차서 그것이 크게 모인것은 하늘과 땅이 되고 작게 모인것은 여러가지 물체가 된다. 허공의 해와 달, 별로부터 시작하여 땅우의 나무와 풀, 한알의 모래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물현상은 다 기로 되여있으며 기를 떠난 자연이나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기는 시초도 없으며 발생하는것도 없다. 시초가 없으니 어찌 종말이 있으며 발생하는것이 없으니 어찌 사멸이 있겠는가. 비록 한쪼각의 초라도 그것이 보기에는 다 타서 없어지는것 같지만 그 기만은 여전히 남아있는것이니 어찌 완전히 없어졌다고 하겠는가.

허준은 저도모르게 머리를 끄덕거렸다. 과연 리치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되였다. 그는 계속 다음 글줄을 읽어내려갔다. 음양에 관한 서경덕의 리론이다.

하나의 기가 나누어져 음과 양으로 되는데 양이 가장 큰것이 하늘이 되고 음이 가장 크게 모인것이 땅으로 되였다. 양이 맺혀서 가장 정한것은 해가 되고 음이 맺혀서 가장 정한것은 달이 되였다. 나머지 기들은 흩어져서 하늘의 별이 되고 땅의 물과 불로 되였다. 이것을 말하여 우주라고 한다.》

허준은 서경덕의 이 리론이 황당무계한 말만 되풀이하는 유교경전에 비하여 얼마나 현실적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속에 갈마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유교에서는 사람에게는 《천명》이 있으며 사람은 《천명》에 따라 날 때부터 하늘로부터 생사와 길흉, 귀천이라는 명분을 가지는데 이는 사람의 힘으로써는 절대로 달리할수 없는 영원불변한것이라고 설교하고있었다.

평소부터 경전의 명분론에 반발심을 가지고있던 허준이다. 물론 허준은 서자로서의 자기의 처지에 대하여 자각하지 못한것은 아니였다. 어느덧 나이 스무살인 허준인지라 이에 대하여 자기나름의 고민에 잠겨 홀로 모순에 빠져있기도 하였다. 그러던 참에 맞다들린 화담선생의 책은 허준에게 새로운 기대감을 안겨주었다. 허준은 서경덕의 리론자체에도 흥미가 동했지만 그보다는 뛰여난 학문과 지식을 가지고있으면서도 일생 벼슬살이를 거절하고 후대교육과 학문탐구에 한생을 바쳤다는 그의 인생에 더욱 관심이 컸다.

(화담선생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였다지만 선생의 얼은 이 책과 더불어 이렇게 살아숨쉬고있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화담선생을 생각하고 그의 학문에 공감하겠는가. 바로 이것이 사람의 육체는 죽어 없어져도 령혼은 영원히 살아있다는것이 아닐가? 그러니 화담선생은 참으로 행운아야!)

벼슬을 하지 않고서도 의로운 일을 할수 있고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을수 있다는 서경덕의 전례는 벼슬길이 막혀버린 젊은 허준에게 일종의 호기심과 기대감, 희망과 락관을 가져다주었다고 볼수 있었다. 한번도 만나본적이 없고 그래서 그 인간됨이랄지 그에 대한 구체적인 표상이 없던 허준이였지만 화담선생에게 자연히 마음이 쏠렸다. 신분차별로 하여 벼슬을 못한다쳐도 무엇인가 의로운 일, 이 세상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좋은 일을 할수 있다는 신심과 또 그런 의로운 일을 하고싶은 욕망이 허준의 가슴속에 점차 깃들기 시작하였다. 이는 단순히 서얼인탓에 벼슬길에 나설수 없다는 위구와 우려감으로부터 산생된 감정이 아니였다.

허준은 아버지로부터 비록 량반의 피를 이어받았다고는 하지만 천민출신인 어머니에게 더 정이 가는것을 스스로 인정하군 하였다. 늘 사나운 암범처럼 길길이 날뛰는 본댁의 눈치를 보아가며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얼음장을 건느듯 조심스레 살아가는 어머니가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졌다. 그래서인지 허준은 어릴적부터 늘 량반이라고 거들먹거리며 평백성들을 숫보는 오매와 허모와 같은 인간들에 대한 반감 비슷한 감정이 가슴속에 내재하고있었으며 그와 반면에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주고싶은 감정이 움트게 되였다. 허준은 글공부를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어머니와 같은 어질고 착한 사람들을 위해 의로운 일을 할수 있을가 하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항상 떠날줄 몰랐다.

(서자인 내 형편에서 어떡하면 의로운 일을 할수 있을가?)

허준의 머리속에 있는 지식이란 대개 서원에서 늘 외우던 유교경전의 글줄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생원시나 진사시에 응시하는 경전외우기나 글짓기는 눈감고도 자신있는 허준이였다. 허나 그것도 과거에 응시할 기회가 차례져야 써먹을것이 아닌가. 허준은 글줄에서 눈을 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쨌든 속절없이 살아서는 안돼!)

별안간 별채의 지게문이 활짝 열리며 찬바람이 방안으로 날아들어왔다. 생각에 옴해있던 허준과 바느질을 하고있던 려월이 동시에 머리를 돌렸다. 뚱뚱한 몸을 흔들거리며 오매가 불쑥 방안으로 뛰여들었다. 려월이 황황히 일어서며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그의 손에는 바느질감이 그대로 들려있었다. 축 처진 볼을 실룩거리며 오매가 다짜고짜로 손가락으로 려월의 얼굴을 가리켰다. 당장이라도 그 손가락이 날카로운 창이 되여 려월의 얼굴을 사정없이 찌를것만 같다.

《아니, 임잔 제 주제에 무슨 큰일이나 친다구 매일 밤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이 지랄인가, 이 지랄! 미꾸라지 룡꿈을 꾼다구 룡이 될가? 천한것이 량반댁에 들어와 먹을것, 입을것 뚝뚝 생기니 이젠 그 알량한 자식을 과거급제시키려구 이 야단인가? 이 집 재산이 누구건데 아까운 초대를 마구 태우는가 말이야.》

려월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심한 모욕감과 수치감으로 더욱더 몸둘바를 몰라하면서도 차마 오매의 눈을 마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그 욕설을 받아들인다. 그러는양이 오매의 삐뚤어진 심사를 더욱 키질해준가싶다.

《왜 말이 없어, 응? 이제는 내 말이 쓰겁다는건가? 나리앞에서 노죽을 부릴 땐 이렇게 벙어리가 아닐테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낸다더니 임자때문에 조용하던 우리 집안이 소란하구 이러다간 또 우리 집 가산이 다 거덜나겠어!》

오매의 도끼눈이 려월에게서 허준에게로 옮겨졌다. 허준은 머리를 수굿하고 아무 대척도 하지 않는다. 그 모양이 오매의 심술에 더 불을 달았다. 지금 허준의 가슴속에는 세찬 불길이 황황 일고있었다. 허나 허준은 자기가 이 고비를 참지 못하면 어질고 착한 어머니가 후날에 더 큰 곤욕을 치른다는것을 잘 알고있기에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한본새로 아무 기척도 없이 머리를 수그리고있을뿐이였다. 아무리 앙탈을 부리며 소리를 쳤댔자 그들모자에게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오매는 한동안 도끼눈으로 쏘아보다가 문을 탕- 닫고 사라져버렸다. 문닫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오매가 사라지자 려월은 무너지듯 그자리에 주저앉았다. 가슴을 부둥켜안은 려월의 눈가에 피같은 눈물이 가랑가랑 고였다가 동뚝을 터쳐놓은듯 좔좔 량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허준의 눈가에도 눈물이 고여있었다. 허준은 말없이 허리를 구부리고 어머니의 어깨를 살며시 껴안았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깊이를 가늠할수 없는 격정의 불길이 타번지고있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이하여 이 집에 들어오셨나이까?! 이런 멸시를 받으라고 날 세상에 낳았는가요, 어머니!-)

가슴속에서는 이런 항변의 목소리가 울려나왔으나 허준의 입에서는 그와 전혀 다른 살뜰한 말이 튀여나왔다.

《어머니! 그만 진정하세요. 우리라구 한생 이렇게 살겠나요? 아마 큰어머니두 아버지때문에 그러겠지요. 아버지가 큰어머니보다 어머니를 더 위해주니 그런다고 생각하세요. 어머니!》

오매가 씩씩거리며 방안으로 들어오자 팔베개를 하고 노전을 편 방바닥에 누워있던 허모가 일어나앉으며 물었다.

《그래. 좀 혼내웠수?》

오매가 분명 자기를 낳은 친어미이건만 허모는 제 에미를 마치 손아래 동생이나 하인을 취급하듯 마구 대하군 한다. 처음에는 제 아들한테서 아이취급 당하는것이 분해서 하늘높이 뛰며 야단치던 오매였지만 아들의 팽이머리에서 나오는 기막힌 묘안들이 자기 심지에 꼭 둘어맞자 차츰 아들의 하대에 익숙되고말았다. 허모가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버지인 허륜이다. 한성의 오위도총부에서 경력(종4품)으로 있다가 여기 룡천군수로 부임되여온 부친은 무반출신이여서인지 자식들을 엄하게 다루었다. 손탁이 세고 입이 무거운 반면에 어쩌다 추궁할 때면 눈알이 빠지도록 신칙하였으며 때로는 형방비장을 시켜 매질도 서슴지 않았다. 모반출신으로 문관들만 임명되는 군수로 부임되여왔지만 그런 성정으로 하여 이웃나라와 강 하나를 사이 두고있는 군안의 정사를 짧은 시일안에 손탁에 거머쥔 부친이다. 국경에서 의주의 상인들을 끼고 잠상질을 밥먹듯 하던 륙방비장들과 아전들이 범같은 부친앞에서는 감히 속임수를 쓸수 없었다. 날아가는 참새도 옭아낸다는 호방이나 공방이 군수가 부임된지 한달후에 속임수를 쓰다가 부친앞에서 혼쭐난 후부터 군내의 관속들이 그앞에서는 고양이앞의 쥐처럼 꼼짝달싹 못하고있었다. 그런 부친이기에 그앞에서는 제 할 말도 제대로 못하였지만 우직한 모친을 손끝이 아니라 혀끝으로 데리고 노는 허모였다. 아직도 불그락푸르락거리며 허준이모자때문에 성이 가라앉지 않았던 오매가 아들의 물음에 푸념질을 해댔다.

《저 빌어먹을 쌍것들이 이제는 내 말따위는 귀등으로두 듣지 않는구나. 아무리 욕지거리를 해대도 두 년놈들이 날 죽여라 하구 찍소리 한마디 없으니 내 참, 입이 쓰거워서 그냥 오구 말았다.》

허모는 여윈 얼굴에 마지못해 그어놓은듯 한 실눈을 깜박거렸다.

《어머니두 참, 그렇게 해선 안되우. 수를 써야 하우. 괜히 꽥꽥거려야 인심이나 잃지 얻는것이 있수? 무슨 수를 꾸며 저놈들이 아예 혼맹이가 빠지도록 골탕을 먹여야 하우다.》

《뭐 수? 그런 뾰족한 수가 대체 어데 있다더냐?》

오매가 해덤비며 물었다.

《불에 덴 수소처럼 그렇게 마구 덤벼치지 말구 잠자코 있수다. 내게 다 생각이 있지 않으리.…》

오매는 아직도 허모의 말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듯 두눈만 껌뻑거렸다. 허모는 자기가 악감을 가지고 대하는 사람들앞에서도 곧잘 웃음을 짓군 한다. 그러나 그러한 웃음속에는 항상 무서운 그림자가 조용히 배회하군 하였다. 이 시각도 허모는 하관이 빠른 얼굴에 가느다랗게 건너간 실눈에다 미묘한 웃음을 띠우고 허준이모자에게 골탕을 먹일 흉계를 머리속에서 굴리고있었다. 첩의 소생인 허준이 자기보다 잘되는것을 절대로 허용할수 없는 허모였다. 분명 한아비의 피를 받은 동생이라 하겠지만 어쨌든 자기는 당당한 량반댁종손이며 허준은 천한 서얼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자기보다 더 월등해지거나 높이 올라서려 하면 무자비하게 짓뭉개버릴 야심이 허모의 가슴속에서 부레마냥 끓고있었다.

(아직은 좀 일러! 이제 반드시 그런 기회가 있을게다. 그때엔 내가 너에게 단단히 버릇을 가르쳐주마.)

그는 아이머리통만 한 자그마한 엉치를 무겁게 질질 끌며 오매에게 다가가 그의 귀박죽에 대고 무언가 수군거렸다. 오매가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후 오매의 입이 벙글써하게 벌어지더니 이어 잠자던 귀신도 소스라칠 스산한 너털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으흐흐. 그거 참 깨고소하겠구나. 음- 네 말이 옳다. 내 너의 계교대로 하나하나 착실하게 준비를 해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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