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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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수많은 창문들중에서 어느것이 자기가 찾는 창문인지 전혀 알수 없었다. 따뜻하고 눈부신 불빛이 쏟아져나오는 저 밝은 창문들중에 나의 창문은 어느것일가? 창문들은 눈빛과도 같았다. 때로는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하고 깜박이기도 하고 아예 눈을 감아버린것도 있다.

한소나기 쏟아부으려는지 저녁부터 잔뜩 흐렸던 하늘은 아예 먹물을 뿌린듯 캄캄하여 별빛한점 볼수 없다. 그 무거운 암운에 짓눌린듯 대기도 얼어붙은것처럼 까딱하지 않는다. 그는 예술인숙소경비실 야외등앞에 보초병처럼 서있었다. 밤늦게까지 훈련한 배우들이 명랑하게 웃으며 지나쳤지만 그를 유심히 들여다보거나 관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꼿꼿이 서있는 그가 경비실 한옆의 외등처럼 느껴졌는지…

눈이 부리부리하고 목소리가 걸걸하여 대뜸 저음가수라고 짐작되는 중키의 배우 한명이 야외등앞을 지나 들어가다가 문득 멈춰섰다.

《소좌동지, 혹시 누굴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예, 옳게 판단했습니다.》

약간 익살조가 섞인 성악배우의 기분에 그는 저도모르게 말려들어갔다.

《반갑습니다. 성악조장 문국지입니다.》

성악조장은 엄숙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는 한순간 당황하였으나 이내 자신을 수습한채 입가에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수고스러운대로 사람을 한명 찾아주십시오. 무용배우 최단아동무를 말입니다.》

성악조장의 눈이 야외등에 반짝하고 빛났다.

《아, 그러니 그 해군정찰병동무구만요!》

성악조장은 틀어쥔 손을 정열적으로 흔들고나서 급히 숙소안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는 어쩐지 마음이 조급하고 불안해지는것을 누를길 없었다. 더 엄격히 마음속을 투시한다면 거기에 응어리져 앉아있는것은 괴로움과 무거움이였다.

강변에서의 결별에 가까운 무자비한 상봉, 거기에 상대의 심리나 정서를 용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아량이나 관용이 있었던가? 사랑하는 사람들일수록 바위도 녹일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있으나 그 열정에 반비례되게 질시와 타매의 강도 역시 그렇듯 가혹하고 에누리 없는것인가. 만약 일상적인 생활속의 평범한 인간관계였다면 최단아도 그자신도 그렇게 자존심을 날카롭게 벼려들고 상대방을 단매에 거꾸러뜨리려고 모지름을 쓰지 않았을것이다.

그 운명적인 상봉후 어느정도 흥분이 가라앉자 그는 우선 애인이 최남호부국장의 딸인줄을 짐작하지 못했던 자기의 어리석음을 놓고 심각한 고민에 시달렸으며 모든것을 체념한듯한 최단아의 쌀쌀하고 도고한 행동이 준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결코 그 녀자의 일면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에 끌려들수는 없었다. 그것은 비굴한 행동이였고 량심과 진심을 떠나서 애인의 리해와 환심을 산다면 그들이 꿈속에서도 바라는 아름다운 생활의 탑도 소중한 행복도 언젠가는 산산이 깨여져버릴것 같았다. 그로해서 그는 상대방의 비위를 조금만 맞추어도 위기의 극한점까지는 치닫지 않았을 피치못할 환경에서 자기가 너무 모질었다는 자책감속에 빠져든것이였다.

사랑이란 유리그릇과 같아서 자칫 잘못하면 깨질수 있다. 하지만 그 불안전한 유리그릇을 만들어내는데는 얼마나 많은 품이 드는것인가.

비록 일면적이고 극히 개인적인 감정에서 최남호와 그의 부하이자 사위감인 자기와의 관계를 면밀히 따져보고 무자비한 공격을 들이댄 그 녀자였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어쩔수 없는 혈연적인연, 다른 측면에서는 높이 살수 있는 도덕적인정이라는 부드러운것이 빛을 뿌리고있다.

사랑의 한쪽면은 따뜻하고 부드럽다면 다른 면은 억세고 준엄한것인가. 부드러운 이끼에 싸여있는 굳은 바위인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귀중히 여기지 못한데로부터 피치 못하게 잠겨든 괴로운 번민의 바다인가. 그는 고통속에 시달리며 그사이 북방구분대의 먼 출장길을 다녀왔다. 래일은 또다시 관하구분대로 떠나야 한다. 시간이 어느정도 흐르는데 따라 그의 마음이 랭정한 분별력을 찾은만큼 이제는 그 녀자도 어쨌든 리성을 회복했을것이다. 시대적사명과 군인정신을 떠난 순수한 사랑이란 있을수 없고 또 바랄수도 없는것이였다.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어느정도 흘렀으나 아직 최단아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 유쾌한 성악조장이 다른 련락을 띄우지 않는것으로 보아 그 녀자는 분명 호실에 있을것이였다. 최단아는 일요일이나 급한 사정이 있을 때만 집으로 간다는것을 그는 알고있었다. 최단아는 예술단에 입직한 때부터 독신자숙소생활을 해온것이였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지나간 교제의 나날 《먼 교외에 있다》는 그 녀자의 집을 후날 필요한 때 찾으려고 속생각을 갖게 하였고 그 깜찍한 수에 속아넘어간 원인이 되였던것이다. 또 이제와서는 그 녀자가 애인의 직속상관인 아버지를 애써 알리지 않은 리유도 리해가 되였다. 최남호부국장이 최단아의 아버지인줄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자기가 그 녀자에게 접근했을것인가? 그는 머리를 저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무의미한 질문이였기때문이였다. 그렇다. 생활이란 수학이 아니고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비가 후둑후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밤하늘은 더욱 캄캄해지고 어디론가 숨어버렸던 바람이 때를 만난듯 한옆으로 불어치는것이였다. 비바람은 점점 세차지면서 순간에 얼굴과 군복을 적셔버렸다. 그는 뿌연 야외등과 나란히 그냥 서있기로 결심했다. 이제는 시계를 들여다보는것도 두려웠다. 그렇다면 이대로 아침까지 서있어야 한단말인가.

저 비발속에 가리워 부옇게 빛나는 어느한 창가에서 지금 그 녀자는 야외등밑에 외로이, 후줄근히 서서 상념에 잠겨있는 소좌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것인가. 아마 곁에는 말같이 늘씬한 한또래 한호실 무용수처녀들이 캐득거리며 비속의 사나이를 익살을 섞어 야유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최단아는 잔뜩 코를 쳐들고 함께 깨고소해할수도 있고 아니면 발끈 성을 내며 창가림을 와락 가리워버릴수도 있다.

비는 마냥 억수로 쏟아져내려 군모를 푹 적셔버리고 뒤덜미와 목을 타고 가슴과 등으로 줄줄이 흘러내린다. 하지만 그는 끄떡하지 않고 바위처럼 버티고 서있었다. 바다물속에서 단련된 그로서는 이런 물의 유희가 그저 꿈만 하였다.

누군가가 숙소 식당곁에 바투 붙어서서 오다가 잠시 망설이더니 경비실쪽으로 홀짝홀짝 뛰여왔다. 늘씬한 키와 가는 허리, 률동적인 뜀새를 미처 가려보기도 전에 가슴속에 섬찟하는 전률이 지나갔다.

녀자는 내처 뛰여오더니 그의 앞에 멈춰서서 목을 움츠리고 올려다본다.

《아이 비야, 안녕하세요? 해군정찰병동지!》

《아니 성희동무구만. 그새 더 이뻐진것 같은데요.》

김성희는 자그마한 얼굴의 오똑한 코를 쳐들고 귀염성스럽게 미간을 찌프리더니 한손으로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비물을 훔쳤다.

《오래 기다렸지요?》

《그럭저럭. 하긴 래일 아침까지도 버틸수 있소.》

그는 우정 명랑한 기분을 지어보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피ㅡ 남자가 자존심도 없이!》

《그쯤은 약과지.》

《야, 단아동문 정말 한심해.》

《왜? 딱 뻗치고있소?》

한순간 김성희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지나갔다.

그는 비물에 진저리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아니예요. 지금 외출중이예요. 아마 제창 집으로 간지도 몰라요. 정말이예요.》

《음, 여기에는 은을 파묻지 않았다 그 격이군.》

《아니, 그건 무슨 소리예요?》

박신철은 군복밑의 몸만이 아니라 가슴속까지 젖어드는것을 느꼈다. 비로소 찬기운이 감수되는듯 싶었다. 그는 눈길을 들어 뿌연 불빛이 비쳐나오는 창문들을 다시금 올려다보았다. 깊은 우수가 마음을 쓰리게 하며 서서히 밀려온다.

너의 심장은 그것이 다였는가? 차라리 나올수 없다고, 만나고싶지 않다고 무자비한 립장을 보였다면 그래도 내 마음이 이토록 아프지는 않을것이다. 이토록 서글프지는 않을것이다.

《소좌동지, 이자 무슨 말을 했어요?》

《아무것도 아니요. 죄는 천도깨비가 짓고 벼락은 고목이 맞는다고 했지. 이 모자를 좀 잡아주오.》

그는 군모를 벗어 얼떠름해 서있는 성희에게 덥석 안겨주고 군복저고리 웃주머니에서 수첩과 원주필을 꺼냈다. 우산처럼 쳐든 군모밑에 수첩장을 펴놓고 잠시 생각을 골랐다. 흐르던 물이 막힌것처럼 펜이 멎어버렸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그 숱한 생각과 지향, 분노와 호소를 어떻게 몇줄의 글줄에 담을수 있겠는가. 가장 격노한 심정은 가장 평범한 글로 되여버리기가 일쑤다. 눈을 뜨자 사나운 비줄기와 바람이 수첩장을 얼룩얼룩하게 적셔버렸다. 그는 일필휘지로 갈겨쓴 수첩장을 북 뜯어내여 성희의 손에 맡긴후 말없이 돌아서서 지하철도역이 있는 거리끝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한참만에 돌아서보니 성희가 비발치는 야외등밑에 오도카니 서서 정신없이 자기쪽을 바라보고있다.

《잘 가세요. 소좌동지! 단안 정말 맹꽁이야!》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처녀는 분명 그렇게 종알거리고있을것이다.

이윽고 비바람과 어둠이 박신철을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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