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회) 

 

제 2 장

6

 

《유나이티드》항공회사와 《노스웨스트》항공회사의 비행기들이 내뿜는 열기와 가스로 하여 비행장구내에는 늦은 겨울답지 않게 안개가 자욱히 끼였다.

안개속을 뚫고 감색불빛과 파란 등불이 부옇게 깜박이는데 그 요지경같은 미궁속에서 항공모함을 련상시키는 육중한 대형려객기들이 굼뜨게 기여나와서는 활주로를 물어뜯으며 얼어붙은 대지를 박차오르느라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지른다.

지프리 밀튼대좌는 비행장간이식당에 홀로 앉아 커다란 유리창너머로 번잡한 《케네디비행장》을 이윽토록 내다보고있었다.

의례적인 이번 국방성출장길은 마감에 와서 뜻밖에도 백악관까지 이어짐으로써 그를 놀라게 했다. 평범한 려행자로 참관한것이 아니라 공적용무로, 그것도 대통령의 직접적인 부름을 받고 호출되여 갔던것이다. 물론 릴씨 외사촌형의 주선이 있었겠지만 그는 성조기와 대통령기가 나란히 세워져있는 엄숙한 방에서 한시간가량 클린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면이나 사진에서보다는 얼굴이 몹시 수척하고 겉늙어버린 클린톤은 심중하고 친절한 분위기속에서 그의 생활과 사업을 료해하려고 애썼다. 대통령이 기대하는것은 미8군이나 판문점실태가 아니라 밀튼이 직접 상대하고있는 북조선군에 대한 인식과 감각이였다. 밀튼은 이 색다른 담화과정에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태전 체육복바람으로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까지 찾아왔었고 전방부대인 미2사 장병들앞에서 1분간의 쌕스폰연주회까지 진행한 대통령의 북조선군에 대한 편견과 무식이 그를 아연하게 만들었던것이다. 오래동안 북조선군을 상대로 군사외교활동을 벌려오고있는 밀튼으로서는 상당한 열의를 가지고 설명하였으나 불현듯 대통령의 암둔성과 무지를 깨친다는것이 부질없는 헛공사라는것을 깨달았던것이다. 하긴 그것은 대통령의 잘못만도 아니였다. 독선적이고 겉치레적이며 일면적인 아메리카식교육의 응당한 귀결이였고 북조선군의 류다른 특성때문이였다. 그들은 이 지구상에 전혀 그 비슷한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사상과 감정, 생활관, 가치관을 가진, 만나보고 상론하면서 그들의 언행과 심리, 체취를 감각적으로 느껴보아야 어느 정도라도 실감할수 있는 인간들인것이다.

밀튼은 미심쩍어 하며 어리둥절해진 클린톤을 뒤에 남겨둔채 백악관을 나와버렸다.

그는 차를 타고 광장거리와 방사선거리를 지나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였다.

대통령이 저럴진대 과연 미조관계가 미국에 리롭게 합리적으로 발전할수 있겠는가. 국방성제씨들이나 국무성관리들도 마찬가지다. 장님들이 모여 저마끔 코끼리를 만져보고는 자기 주장들을 내놓는격이다. 그것도 점잖게 내놓는것이 아니라 피대를 돋구며, 서로 물고뜯으며 제 손더듬을 고집하는것이다. 그래도 공군부대출신의 직계상관인 부참모장 마이클 던소장이나 남조선주둔 미군사령관인 륙군대장 죤 티렐리가 그들보다는 퍽 선생인셈이다.

밀튼은 깊은 우수를 느끼며 커피잔을 집어들었다. 그는 미국을 떠날 때마다 늘 한발 먼저 비행장을 찾아 호젓한 이 식탁에 앉군하였다. 바로 15년전 그때도 그는 이 흑밤색식탁앞에 앉아있었다. 맞은켠에는 맑은 살갗에 머리칼과 눈동자가 밤빛인 처녀가 밝고 상쾌한 미소를 지은채 그를 쳐다보고있었다. 그는 오래동안 이 녀자를 사모해왔으나 미국땅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종시 그것을 내뱉지 못하고있었다. 리유는 많았으나 그중에서도 거절당한다면 그것으로 다년간 지속되여온 그 녀자와의 친분관계가 끝장이라는 우려가 심장을 짓누른때문이였다. 처녀는 좌익색채가 진한 그의 스승의 딸이였다. 해병대복무를 마치고 륙군사관학교를 거친후 주립대학 동양학과에 입학한 첫 겨울부터 그는 얼굴이 발그레하고 눈이 샘물처럼 시원한 그 처녀에게 마음이 끌렸었다. 그는 졸업후 력사학자가 될것을 꿈꾸었으나 국방성이 즉시 그를 호출하였다. 이태가 지나자 먼 해외근무가 그를 부르고있었다. 그는 이것이 처녀와의 마지막리별이라는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행복도 시간도 더는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는 커피잔을 내려다보며 긴 숨을 내쉬였다. 인간은 인생에서 그리 큰 행복을 기대하지 않지만 운명은 또 얼마나 린색한것인가. 지나가면 영원히 돌아올수 없는 이 순간, 그는 분명 느끼고있었다. 이제 헤여지면 저 익은 사과알같은, 불타는 장미같은 녀자는 이 계절이 끝나기전에 남의것이 될것이다. 아름다움은 해빛처럼 도저히 감출수 없는 법이다. 미인이란 언제든지 발견되는것이다.

하지만 하얀 이를 드러내며 아이처럼 웃음을 터치는 천진란만한 녀자앞에서 삼십대의 인생풍운을 다 맛 본 독신남자가 생사를 내건 심장의 고백을 과연 서뿔리 내뱉을수 있을가.

문득 언젠가 졸업야회뒤끝에 아버지의 제자들앞에서 그 녀자가 부르던 노래 한구절이 떠올랐다.

 

             한마디 말이 모자라서

             다가설수 없는 사람아

             그대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왜 그리 상심해하시죠?》

그 녀자의 관심어린 목소리에 밀튼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웃음뒤에서 해묵은 고뇌가 아픔을 겪고있었다. 그는 멀리 에돌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 어떤 결말을, 그것이 좋은것이든 나쁜것이든 분명하게 찾아오기를 은연중 기대하고있었다.

《레브똘스또이백작이 생각나서 그러오. 서른여섯살에 잡히자 그는 독신생활을 끝마칠 용단을 내렸다오. 그의 마음을 알아 차리기라도 한듯 세 딸을 가진 모스크바의 공작부인이 그를 따뜻이 사교모임에 초청했지. 물론 주인이 도이췰란드출신 궁중의사인 공작가정은 벌써부터 처리곤난해진 스물두살 먹은 맏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기로 내정했소.

지루한 사교계였지만 그는 반년을 꾸준히 다녔다오. 그런데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이 점찍은 맏딸이 아닌 둘째 아가씨 쏘피야에게 정이 끌렸다누만.》

《아이참, 어쩌나?…》

처녀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밀튼은 또 속절없는 애수의 긴 한숨을 내쉬였다.

《그런데 그 쏘피야란 당신처럼 웃기 잘하고 호들갑을 잘 떠는 새침데기 열여덟살이였다오.》

《어마나ㅡ》

《공작내외의 초조한 눈길에 시달리던 그는 어느날 마침내 더는 어쩔수가 없어 수첩장을 떼내여 거기에 몇자 적은후 쏘피야에게 쥐여주고 급히 저택을 떠나버렸다오. 똘스또이백작이 사라진 다음 쏘피야는 종이쪽지를 읽어 본후 두손을 번쩍 쳐들고 만세를 불렀다오. 쪽지에는 씌여있었소. 〈쏘냐, 난 당신이 마음에 드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 〉 공작량주와 자매들은 대번에 풀이 죽었으나 울며 겨자먹기로 이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소….》

《참 대문호에게 어울리는 랑만적인 사랑이군요.》

이번에는 그 녀자가 한숨을 푹 내쉬였다.

구내방송이 비행기리륙시간을 알렸다. 밀튼은 흠칫 놀랐다. 시간은 바투바투 그의 심장을 갉아먹고있었다. 손을 뻗쳤으나 행복의 종달새는 그의 곁에서 날아가려 하고있었다.

밀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녀자는 앉아있었다. 그 녀자는 문득 눈길을 들었다. 아쉬운듯 한 애수의 빛갈이 얼굴전체에서 얼른거렸다. 그것은 물기였다. 그것이 눈에서, 목소리에서 묻어났다.

《그런데… 전, 작별의 이 순간까지 기다리고 기다렸으나 그런 쪽지편지조차 없으니 언제… 만세를 부르지요?》

《조안!…》

밀튼은 심장이 멎는것같은 충격속에 그 자리에 앉아버렸다.

처녀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우리 아버지말처럼… 군복이 어울리지 않아요. 소심하고 감상적이고…》

한해후 지프리 밀튼은 젊은 안해 조안과 함께 다시 이 식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들은 함께 미지의 땅 남조선으로 떠나게 된것이다. 그때로부터 밀튼은 남조선주둔 미군사령부에서 군무를 시작했다. 딸 세라 밀튼은 벌써 열세살이 되였다.

《뭘 그리 공상에 젖어있나?》

안토니 릴씨가 찬 기운을 풍기며 그를 내려다 보더니 가방을 식탁우에 던져버렸다.

《아니 토니형이 어떻게?…》

《호텔에 전화를 거니 벌써 떠났더구만. 어젠 일이 바빠 자넬 만나지 못했어. 그래 대통령을 만난 감상이 어떤가?》

릴씨는 주변을 살피고나서 담배갑을 꺼내들었다. 금연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요즘은 걸핏하면 엄청난 벌금을 지불해야 한다. 아마 대통령보좌관도 재정사정은 어쩔수 없는 모양이다. 하긴 릴씨부친의 기업이 몇해전부터 파산직전에 이른것을 모르는 밀튼이 아니였다.

《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적어도 판문점이나 남조선주둔미군사령부 군무경력자가 백악관의 주인이 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릴씨는 담배연기를 조심스레 내뿜었다.

《밀튼, 이런 펠레톤을 본 일이 있나? 뇌수술을 하고있는 대좌에게 부관이 다가왔지. 〈대좌님, 당신에게 장령진급이 결정되였다는 통보입니다. 〉 그러자 대좌는 수술도중 급히 일어나 출입문으로 향하였네. 당황해 난 외과의사가 소리쳤지. 〈아니 대좌님, 뇌수를 꺼냈는데 넣고 가야지요?〉

대좌님은 활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네.

〈아아, 이젠 뇌수가 필요 없게 됐소. 〉》

《흥, 그러니 토니형같은 보좌관들의 어깨가, 아니 두뇌가 문제로 되는군요. 그렇지 못할 땐 정치가 안방으로 넘어가지요.》

밀튼은 쓴웃음을 지으며 커피잔을 들었다. 릴씨가 이번에는 담배연기를 거칠게 마구 내뱉았다.

《꼭대기에 앉은자일수록 머리는 텅 비기마련이야. 그저 운수가 좋을뿐이지. 일하기는 또 얼마나 편한가. 그저 지시하고 훈시하면 되는거야. 그래서 대통령으로서는 너무도 위험천만한 녀성편답의 길을 떠나는거지.》

릴씨는 눈을 가늘게 쪼프렸다. 그는 원래 다변가였고 웅변술이 높았다. 클린톤의 주지사선거때부터 그의 겝벨스식선거선전활약은 눈부신것이였다. 그는 사실 클린톤에게 있어서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

밀튼은 릴씨의 여위고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색에 파릿한 기운이 돌아서인지 무엇인가를 경계하는듯한, 성가셔 하는듯한 이상한 느낌이 비쳐온다.

밀튼은 그를 외면한채 입을 열었다.

《일전에 얻어 들었는데 외삼촌의 기업이 소화불량증에 걸렸다던데요?》

《그것이 이제는 멈출줄 모르는 오랜 설사로 이어졌네. 환자는 거의 실신상태야. 50대에 가까이 와서 운명은 나를 외면해버렸어. 마라손선수이던 나를 가차없이 100메터달리기주로에 세우누만. 오늘날 미국경제도 말이 아니야. 아시아가 심각한 금융위기에 시달리는것도 제 안속을 챙기려 동분서주하는 미국의 충격파덕이지. 결국 세계경제는 불행하게도 아찔한 낭떠러지에 매달린셈이야.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그래 빠져나갈 길은 있는가? 지금은 누구나 제3의 길을 찾고있지. 사회주의붕괴는 지나친 유토피아환상을 환멸로 바꾸었고 리윤의 편중과 빈부격차는 자본주의도 종말로 가고있다는 확신을 가져왔네. 그로부터 이른바 국가부정, 시장의거라는 신자유주의를 제창했지. 한마디로 시장에서의 경쟁도 경쟁의 결과도 공정한 질서라는거야. 하지만 경제의 발전공식이 정지되고 환경과 공동체를 파괴하고있지. 그럼 제3의 길은 뭔가?》

릴씨는 접대원이 가져온 위스키잔을 신경질적으로 쳐들었으나 마시지는 않았다. 밀튼은 무엇인가 국가안보를 맡은 이 사나이의 심중에서 변화가 일어나고있다는것을 짐작했다. 그는 마음이 괴로왔다.

《시장경제를 장려하고 국가기업을 줄이는거야. 기존의 사회민주주의로선에서 시장의 역할을 강화하고 국가의 역할을 감소시킨 정책대안이지. 새 세기에 맞는 새 철학이라는 찬사와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시장옹호리론이라는 비평만 강해. 보수파들은 선거전략이라고 공격하고 중도세력과 좌파내부에서는 리론의 변질이라고 반기를 들지.》

밀튼은 쓰거운 미소를 지었다.

《토니형도 이젠 정치에서 물러나 자신을 생각할 때가 된것 같습니다. 행복의 한 측면은 결국 안정된 재부랄수밖에.》

《하지만 이 세계는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엔 땅덩이가 모자라.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선진국사람대우를 받으려면 지구는 수억명밖에 수용할수 없다는것이 현대콤퓨터의 결론이야. 이게 결국 성장의 한계, 민주주의의 한계야. 그러니 살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살고 죽어야 하는 생존법칙에서 인간은 영원히 벗어날수 없는 운명을 지녔거든. 무서운 악몽이지! 우린 죽든가 다른 행성으로 이사가야 해. 알겠나? 대좌, 이젠 자기가 설 자리를 봤겠지? 자연에서도 인간생활에서도 생존의 싸움은 영원히 끝날수 없어. 이 지구상에서 전쟁은 불가피한거야! 클린톤도 이걸 너무나 잘 알고있어. 자네에게만 터놓는데 만전쟁경험에 기초해서 새로운 전쟁방안이 지금 마감단계에서 완성되고있지. 때가 되면 평양은 기절초풍할거야. 세계를 재조정해야 미국이 허리를 펼수 있지. 결국은 강자들만이 남게 되겠지. 그런면에서 세계를 미조대결구조로 몰아간것은 미국정치의 제3의 길이고 어쩔수 없는 외통길이야. 크지 않은 조선이 미국과 어깨나란히 서게 된 리유를 이제는 알겠나? 물론 그 균형은 오래가지 못해. 과연 크지 않은 북조선이 이 행성을 미국과 맞서 손으로 떠받들수 있을가? 그들이 서서히 맥이 빠져 주저앉을 때까지 억제하며 달래며 기다리는것, 이것이 빌형의 포용정책이야.》

밀튼은 아마빛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넘겼다. 그래 누가 먼저 지쳐서 손을 내릴지 그것은 두고 봐야 한다. 릴씨도 결국은 한갖 리상론자에 불과하지 않는가.

《시간이 됐군. 이젠 자네도 어깨우에 장령별을 올려놓을 때가 되지 않았나? 걱정말고 우리의 의도에 맞게 북조선군과 상대해주게. 참 자네 안해가 김대중대통령과 인맥이 깊지?》

릴씨는 문득 시계를 들여다본후 코트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더니 무엇때문인지 약간 주저하였다.

《대통령부인이 나의 가시아버지의 수제였다는걸 아실텐데요. 그런 연고로 리희호부인이 나의 안해를 친동기처럼 여깁니다. 미국류학시 조안이 그의 개별교수를 받은적도 있지요. 나도 그래서 청와대에 자주 초청됩니다.》

밀튼의 말에 릴씨는 이마살을 찌프리며 봉투를 서둘러 내밀었다.

《몰라서 묻는건 아니야. 하지만 이 편지는 개인적인거니까. 김대중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전해주게. 자 그럼!》

대형려객기는 정시에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밀튼은 일반좌석에 앉아 창밖의 가없는 공간에 눈을 주었다. 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해졌다. 다정하고 리해심이 깊은, 그의 삶이자 행복의 전부인 안해가 기다리고있는 집, 미국을 떠나 집으로 간다. 어쩐지 이상한 상념의 샘줄기가 북받치는 감정의 한복판을 흐른다. 고향, 집ㅡ 이 모든 인간의 전통적관념을 한줄기로 이어놓고봐도 류다르게 떠오르는것이 안해와 딸이 기다리는, 한강변의 아담한 저택창가의 따뜻한 불빛이다. 그러고보면 미국땅에는 그의 정을 붙잡을만한것이 아무것도 없다. 부모가 일찌기 돌아간후 그는 외삼촌댁에 얹혀 살았다. 눈치밥을 먹던 시절도 철이 들어 군대에 입대하면서 인차 끝나버렸다. 안해는 그의 집이였고 인생이였다.

젊은 안해와 귀여운 딸, 사람들은 가끔 그들모녀를 자매로 착각하군 한다. 밀튼자신이 어떤 때는 자기가 두 딸의 아버지처럼 생각되기도 하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그들을 생각할 때 가슴 한구석에는 늘 무거운것이 떠돈다. 이번 국방성과 백악관걸음이 그것을 더 현실적인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은 지금 막뒤에서 무서운 책략을 꾸미고있다. 결코 공화당의 강경보수세력만이 평양에 대한 군사적대응과 타격을 력설하는것이 아니다. 전쟁은 바야흐로 밀튼의 조그마한 행복의 《에덴동산》을 넘겨다보고있다.

그것을 생각할 때 밀튼은 소름이 끼쳤다. 미국이 세계의 주인공이 되려고 몽둥이를 들고나설 때 과연 존엄과 정의를 생명으로 여기는 북조선사람들이 머리를 숙이겠는가.

문득 몇해전 그가 군사정전위원회 부비서장으로 있을 때 겪은 좌절감과 놀라운 충격이 어제일처럼 눈앞을 스치였다.

군사분계선상공에서 감시정찰임무를 수행하던 미8군소속 전투비행단 군용직승기《OH58》이 비무장지대로부터 북쪽 5㎞ 되는 금강군 이포리 인민군지역에 추락되는 비정상적인 사건이 발생하였었다.

직승기는 춘천비행장을 리륙하여 소양강을 따라 비행하다가 용대삼리계선에서 서북쪽으로 선회한후 중앙분계선을 넘어 해삼대상공으로 침입해 선회비행하던중 그로부터 8㎞ 종심인 무산상공에서 인민군의 사격을 받았다. 단 한발의 인민군화력에 최신형의 미군직승기는 박살나고 조종사 두명중 한명인 부조종사 데이비드 마이클 힐몬 상급준위는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다른 한명의 조종사인 보비 웨인 홀상급준위는 불명예스럽게도 포로되였다.

사건이 발생한 첫 순간 밀튼은 눈앞이 아찔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날카로운 핵대결로 정세가 전쟁접경에로 바투 치달아오르다가 《비시인, 비부인》의 《암묵》의 제네바협상과 클린톤대통령의 담보서한으로 어느정도 안정된 미조관계가 이 엄청난 사건으로 이제 어떻게 번질것인가. 미8군사령부 복도는 부리나케 오가는 군화발소리들로 부산스러웠다. 국방성과 국무성의 긴급지시가 련달아 떨어지고 밀튼은 커피 한잔으로 겨우 식사를 굼때며 룡산과 판문점을 꽁지에 불이 달려 뻔질나게 오갔다. 남조선주둔 미군사령관방에 불리워갔던 그의 전임비서장 그라프대좌는 밀튼과 함께 룡산기지정문에 세워놓은 군용차에 오르며 심각한 낯색을 지었다.

《대좌님, 일이 어떻게 번질가요?》

《밀튼중좌, 빨리 가족대피를 생각해. 명백한것은 전쟁이야. 페리국방장관은 이미 군사적타격안에 비준하고 백악관으로 달려갔소. 대통령도 이제는 공화당의 격분을 눅잦히지 못할거야. 하긴 굴욕적인 담보서한으로 땅바닥에 떨어진 권위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가 온셈이지.》

밀튼은 달리는 승용차안에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군부강경파와 힘의 정책을 시종일관 표방하는 완고한 보수세력은 이 전례없는 사태를 방임하지 않을것이다.

딸 세라와 안해 조안의 애처로운 모습이 눈앞을 막아섰다.

밀튼은 불안하여 금시라도 차에서 뛰여내리고싶었다. 하지만 운명의 군용차는 그를 싣고 판문점으로 그냥 내닫고있었다.

그의 예상을 뒤집는 일이 일어났다. 이튿날부터 미8군사령부 복도의 발자국소리가 뜸해졌다. 밀튼은 부비서장방에 앉아 문서를 정리하며 귀를 기울였다.

이따금씩 퍽 조심스럽게 걷는 발자국소리가 들려올뿐이였다. 그날 저녁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게 보내는 남조선주둔 미군사령관의 사죄편지가 정중히 작성되였다.

조선문과 영문으로 된 서한을 들여다보는 밀튼의 손이 떨렸다.

미군사령부의 이례적인 서한이였던것이다.

《…저는 군사령관으로서 저의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훌륭한 병사들까지도 때로는 실수를 저지르며 치명적인 실수까지도 범한다는것을 알고있습니다.

저는 미군직승기가 귀측경계선을 넘어간데 대하여 유감으로 생각하며 우리 국제련합군측에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있다는것을 귀측에 확언합니다.

저는 힐몬상급준위의 유해를 송환해준데 대하여 귀측에 사의를 표하며 인도주의적견지에서 홀상급준위를 곧 우리에게 돌려줄것을 정중히 요청합니다…》

밀튼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으나 의혹을 품지 않을수 없었다. 사죄편지를 들고 그라프대좌의 뒤를 따라 판문점회의실에 들어선 밀튼은 상대측 봉명주의 안경낀 둥실한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도고한 기품이 느껴졌다.

(이들은 지금 무엇을 생각할가? 남조선군을 제끼고 우리 미군과만 접촉하려는 진의도는 무엇인가? 그들이 제기하는 새로운 평화보장체계라면 남북간에도 가능하지 않을가? 하지만 이들은 한사코 남조선측을 무시한다. 락크대장의 이 서한이야말로 수십년간의 미조군부대결에서 두드러지는 미국의 굴욕적군사외교의 산물이 아닌가? 지난 시기 같으면 오랜 기간의 치렬한 협상과 군사적대응 등 날카로운 공방전끝에라도 이런 사죄편지는 생각할수 없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끌려가고있는가? 인민군의 정신도덕적상승은 어디서 나온것인가? 봉명주, 수년간 대상하지만 얼마나 범접하기 어려운 이상한 인물인가.

정말 갈수록 리해할수 없는 나라, 수수께끼같은 군대이다!…)

이어 판문점에서 미조군부실무협상이 열렸다. 미군수뇌가 전례없는 사죄편지까지 보낸만큼 직승기조종사를 돌려받는것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석대표인 스미스소장은 북조선의 통보가 호전적이라고 하면서 이번 사건이 군부관련문제인것만큼 정부급에서가 아니라 군부사이에 해결되여야 한다고 뻣뻣하게 오금을 박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북조선군대표인 봉명주대좌는 엄엄한 태도로 사건이 미제침략군의 고의적인 정탐행위라고 까밝힌후 상대측이 도전적으로 나오는 이상 직승기조종사는 조사가 완료되는데 따라 군법에 의해 처리될것이라고 단호하게 언명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통역인 북조선군 리천중좌의 말이 끝나기도전에 부참모장 터미 스미스소장의 얼굴은 수수떡이 되여버렸다. 그는 당황하여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봉명주의 팔소매를 잡았다.

《대좌각하, 잠간만!… 저는 교양이 적고 촌놈이다보니 발언을 잘못한것 같은데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수레가 소를 앞서는격이 되였습니다. 지금 깊이 속죄하는참입니다. 당신의 타당성있는 말씀에 류의했습니다. 협상을 계속해주십시오.》

참모탁에 앉아있던 밀튼은 두눈을 감아버렸다.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상관의 모습을 차마 볼수가 없어서였다.

그것이 북의 계획적인 책략이였는지 아니면 성과없는 협상의 결과였는지 크리스마스전으로 직승기조종사를 돌려받으려던 국방성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말았다.

미국력사에 전례없는 일들이 밀튼의 눈앞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클린톤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여러차례 기자회견을 열고 미군직승기조종사들이 범죄를 범한데 대하여 인정한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클린톤은 자기가 직승기조종사의 조기송환을 국정의 최우선순위에 둘것이라고 말하면서 이 사건으로해서 미조관계가 악화되는것을 희망하지 않는다고 언급했으며 이어 클린톤행정부의 공식적인 사죄를 전달하기 위하여 미국무성 부차관보가 평양으로 출발하였다. 그는 북조선을 방문했던 다른 미국인들과는 달리 공식적인 초청장도 없는 불리한 상태였다.

그해 12월 3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대표들사이에 《량해문》이 채택되였다.

《…미합중국은 미군직승기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령공을 불법침입한데 대하여 인정하였다.

미국측은 이 행동에 진심으로 되는 사죄를 표시하고 앞으로 이러한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할것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담보하였다….》

이것은 강경보수적인 미군부의 치명적인 망신이였다. 결국 넥타이를 맨 국무성이 사건을 마무리한것이다.

밀튼은 미군사령부 스미스부참모장방에 앉아 그라프대좌가 내미는 신문《뉴욕 타임스》를 아연한 눈길로 들여다보고있었다.

《북조선은 이번 협상과정에 챙길것은 다 챙겼다. 김정일최고사령관의 의도대로 협상을 통하여 군사정전위원회를 사실상 무력화시켰고 또 주한미군사령관의 사과서한을 받아냈다. 나아가서 대통령특사 하바드의 방북으로 평양에서 북미간에 직접 협상탁을 마련하였다. 미국은 전례없는 굴욕외교끝에 겨우 살아남은 미군조종사를 데려갈수 있었다….》

클린톤은 오후 5시경 플로리다주에 있는 나포된 비행사 보비 홀의 안해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는 승리하였습니다.》라고 오히려 기쁨에 넘쳐 환성을 질렀다.

밀튼은 쓰거운 환멸의 고배를 맛보았다.

클린톤대통령은 자주 《프로시아국가는 지상에서의 신의 행진》이라고 한 헤겔의 말을 인용한다. 미국의 지위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혔던것이다. 그는 대통령취임식때 한팔을 쳐들어 멋진 자세를 촬영가들에게 제공하면서 공상에 취하여 연설하였다.

《…우리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를 안주하게 하지 마소서. 우리는 때가 되면 용감히 떨쳐나서리니〉

한겨울의 행사이지만 전세계에 봄을 앞당기고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길우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보호아래 우리는 패배를 모르는 신의 나라의 신명에 응해야 합니다.》

봄이 오면 꽃이 피는것이지만 실제로 꽃이 펴야 봄인것이다.

강한자는 자기가 강하다고 말할줄 모른다. 정치를 바로 하자면 머리는 차고 손은 뜨거워야 한다. 하지만 미국의 제씨들의 머리는 자존심으로 달아오르고 칼을 쥔 손은 선뜩하리만큼 차겁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지어《판도라의 상자》(신화에 나오는 생명의 상자)처럼 조심히 다루어야 할 정치에서도 진지하지 못하다. 헤쎄는 신은 인간의 모든것을 용납할수 있지만 진지하지 않은자에게는 등을 돌린다고 했다. 그렇다. 신은 지금 미국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찌기 도이췰란드의 저명한 력사학자 랑메는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결정적요인은 국토의 크기도 아니요, 군사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그것은 국민의 도덕적이메지다.》라고 했던가….

…지프리 밀튼은 잠에 취하여 비행기시창밖으로 머리를 돌렸다. 대형려객기는 구름을 뚫고 공허하게 얼어붙은 고공을 힘겹게 돌파하고있었다. 그는 지금 자기가 행복과 불행의 어중간, 하늘과 땅의 어지러운 혼돈속을 홀로 지겹게 헤쳐가는것만 같았다.

안해와 딸에 대한 련민의 감정도 안개속의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정처없는 자기의 운명에 대한 애수도 앞날에 대한 수동적이고 절망적인 감수도 이 순간만은 그의 넋을 떠나 저 영원한 심연처럼 무시무시하게 드리운 공간속에 잠겨버리는것이였다.

《선 자리》를 돌아보라. 래일이 아니라 오늘에 충실하라.

하지만 행복을 위해서는, 가냘프고 작은 세사람의 안식의 소우주를 위해서는 운명에 도전해야 하는것이 준엄한 현실이라는것을 밀튼은 분명히 깨닫고있었다.

서울룡산기지에 도착한것은 새벽이였다. 정책장교 베이컨중좌와 보조비서장 달프중좌, 의례장교 그로스소좌가 우들우들 떨며 그를 맞이하였다.

《왜 그리 기분들이 우울하오?》

밀튼은 승용차에 오르며 베이컨중좌를 돌아보았다.

《대좌님, 미안한데 집이 아니라 사령부로 가셔야겠습니다.

북조선군이 봄을 앞두고 우리의 합동군사연습에 대응하여 일제히 훈련에 진입했습니다. 김정일최고사령관은 며칠째 최전방을 순회하고있습니다. 던소장과 티렐리사령관은 밤에도 사무실을 뜨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남조선야전군들도 훈련으로부터 전투경계에로 이전했습니다. 대좌님을 급히 모셔오라는 명령입니다.》

그랬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시간은 좋은것으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나쁜것으로 변하여가는것이다.

전쟁의 불구름은 타래쳐오고있었다.

밀튼은 자기의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는것을 실감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깊은 고뇌의 한숨을 내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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