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회)

제 3 장

3

 

두개의 석회로가 만가동을 하면서부터 자재보장이 적극화되였다.

김희문은 날이 갈수록 젊음이 용솟음치고 일이 성수나기만 했다. 이게 바로 갱소년이고 생의 희열인가?

그가 석회로를 한기 더 일떠세운 후로 석회보장조 청년들은 김희문을 더 존경하고 따랐다.

이따금 지원을 나오는 농장청년들까지 석회로에 나타나서는 《고문아바이, 아바이는 그저 앉아서 지시만 하십시오. 이걸 해라, 저걸 해라, 시키기만 하란 말입니다.》 하고 비위를 맞추며 존대를 한다.

라순미 역시 석회로에 내려올 때마다 앉아서 지시만 주어도 자기에게는 큰 힘이 된다고 말하군 했다. 사람이 늙으면 좋은 말 한마디가 보약과 같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것 같다. 젊은이들한테나 순미한테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알수 없는 힘과 용기가 용솟음치는것은 사실이였다.

김희문은 작업의 휴식시간이면 청년들앞에서 뒤주머니에 늘 찔러넣고다니는 하모니카를 멋들어지게 불어제끼군 했다.

며칠전 아침에는 식사를 가지고 올라온 로친한테 《이 김희문이에 비하면 로친은 너무 늙어서 상대하기가 부끄럽다니까.》 하고 한마디 하여 젊은이들을 웃기고 안해한테선 눈총을 받았다.

그런중에도 마음을 써야 할 일이 한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태식이가 옥련이를 맘에 두고있는것이 분명한데 그 처녀한테서는 도무지 그런 눈치를 엿볼수가 없는것이였다.

이럴 때는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일이 순조롭게 되겠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반장한테 툭 털어놓고 의논해보고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단념하고말았다. 일때문에 늘 바삐 뛰여다니는 그를 돕지는 못할망정 그런 일로 부담을 주고싶지 않았던것이다.

이러나저러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여서 며느리로 맞을 처녀에 대해 신경을 쓰는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석회로온도를 가늠해보며 생각에 잠겼던 김희문은 인기척에 머리를 들었다. 큼직한 비닐버치를 머리에 이고 한손에 바께쯔를 든 안해가 다가오고있었다.

《시장하겠수다, 령감, 아침이 좀 늦어서…》

《시장은 무슨 시장, 순미반장이 조직사업을 잘해서 하루 세끼 제때에 더운 밥을 먹는데…》

최명후는 며칠전 령감한테서 좋지 않은 말을 들은 후 한결 더 곰상스럽게 김희문을 대했다.

오늘 아침도 그는 억양을 낮추며 령감한테 핀잔을 주는것 같으나 애정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럼 령감은 내가 날라오는 밥까지 끼때마다 두번씩 잡수시우?》

《체신머리 없는 소리, 여기 석회로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은 돌도 삭일 한창 나이야.》

때마침 석회돌을 실으러 갔던 두명의 청년들이 달구지를 끌고 나타나자 최명후는 설레발을 치며 반겨맞았다.

《그런데 이건 뭐요?》

김희문은 안해가 가져온 비닐버치며 바께쯔를 가리켰다. 버치도 바께쯔도 도라지꽃무늬가 찍힌 파르스레한 보자기를 씌운터여서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수 없다.

최명후는 덜렁덜렁한 성미에 어울리지 않게 령감곁에 바싹 다가앉으며 소곤거렸다.

《사실은 염장무우가 얼마간 있길래 양념을 듬뿍 묻혀 얼벌벌하게 해가지고 올라왔수다. 건설장 젊은이들한테 뭔가 기여하는게 있어야지요.》

《난 또 무슨 대단한거라구. 순미 어머닌 지난 밤 블로크찍는기계를 덕에 올려가는 일까지 도와주고 젊은이들한테 밤참을 대접했는데.》

《령감, 나두 다 생각이 있수다. 보우, 조찰떡을 한버치 해 올려오지 않았수.》

최명후는 버치를 씌운 보자기를 벗겼다. 거기에는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조찰떡이 그득히 들어있었다.

《사실은 옥련이 그 애가 건설장 식사보장을 맡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반찬이랑…》

김희문은 흠칫 놀라기까지 했다.

《옥련이라니, 갑자기 그 처녀소리는 왜 하는거요?》

《아따 령감은 그래 아들이 있는 염소반에 밤낮 코맞대고있으면서 아무것두 모르시우?》

《뭘 말이요?》

김희문은 시침을 뗐다. 아들과 옥련이 사이가 진짜 그런 사인지 아니면 생소린지 알지도 못하면서 주책머리없이 코를 디밀었다가 공연히 될 일도 그르칠지 모른다.

령감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피던 최명후는 그냥 제 소리를 했다. 언젠가 배등령너머에 있는 처녀소리를 태식이한테 했더니 별스레 배심이 든든한 인상이더라는것, 그런데 아닐세라 한번 집에 내려왔을 때 옷을 빨려다가 웃옷주머니에서 옥련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것을 제 눈으로 보았다는것 등등이였다.

《거참, 모를 소리다. …》

《아이구, 령감두 원. 애들의 그거라는게 남모르게 하는 일인데 누가 알탁이 있소? 난 그 애가 날 닮아서 덜렁거리긴 해두 속이 깊은줄은 아우다.

어쩌면 풍덕일판에서 제일 곱게 생겼다고 소문이 자자한 옥련이와 사귀였는지. 하긴 그래서 사내겠지. …

글쎄 사진을 찍은걸 보니 어깨를 나란히 한게 어찌나 다정스러워 보이던지…》

최명후는 흥이 나서 절로 언성을 높였다.

《그만하오. 젊은이들이 듣겠소. 그게 사실이라면 여적 내가 모를수 있소? 소경이나 귀머거리 아닌 이상… 필경 로친이 김치국부터 마시는게야.》

김희문은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들고다니지 말라고 오금을 박았다.

《될 일이면 가시끝에도 장미가 핀다고 총각이 좋으면 눈이 이마에 가 붙어도 처녀가 따르는거요. 다른 사람들 실례들게 있나? 우리 경우만 놓고봐도 그런데…》

최명후의 눈이 둥실해졌다.

《령감머리가 잘못되지 않으셨수? 우리 경우라는건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이우?》

《허허허… 여보 로친, 뭐 머리칼이 희여지니 머리안까지 백지가 돼가는가 하오? 내가 옛일을 잊을라구.》

최명후는 발끈했다. 그럼 젊었을 때 자기가 령감한테 반해서 정신없이 따랐기때문에 결혼을 했는가고 따지고들었다.

김희문은 느릿느릿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한테 물을게 있소? 기억이 사진이나 같을텐데…》

《됐수다, 령감. 아들이 장가갈 나이가 됐는데 새빠지게 그런 소린 왜 하시우? 어서 청년들과 같이 식사나 곱배기로 하시우.》

(이럴줄 알았으면 령감한테 조찰떡 빛갈도 안 보이는걸…)

최명후는 음식그릇들을 차려주고는 간다온다 소리없이 힝 자리에서 일어나 염장무우가 든 바께쯔와 조찰떡 비닐버치를 이고들고 사라졌다. 성이 난김에 힘든줄 모르고 걸음을 옮기던 그는 제잡담 웃음이 터져나와 혼자 소리내여 웃었다.

(원 령감두, 다른것은 곧잘 잊어버리면서두 그 일만은 꿔준 돈처럼 잊지를 않으니… 원, 세상에…)

최명후는 마을쪽을 내려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사실 김희문이 한 말은 옳았다. 70년대초에 제대되여 고향 풍덕에 돌아온 김희문은 맵시있게 균형잡힌 몸에 쾌활하면서도 락천적인 성격의 사나이였다. 악기라고 생긴것은 손에 쥐기만 하면 다 다룰줄 알았고 춤과 노래에도 막히는것이 없었다.

그때 그들은 면양반에서 함께 일했다. 하루일을 마치고 돌아와 양우리앞의 공지에서 쌍쌍이 손잡고 춤추며 노래부를 때면 최명후는 멋들어진 춤가락에 목청 또한 구성진 김희문에게 넋이 끌려 제정신이 아니였다.

그는 당시 풍덕마을 처녀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있었다. 년간 양털생산과 새끼양생산에서도 모범이였고 농장예술공연때면 손풍금반주를 도맡아놓고 하군 했다. 면양반건설이 한창일 때 전국농촌부문예술소조경연에 류옥련의 어머니 정보배가 노래 《내 고향》을 잘 불러 무대에 나설 때 김희문은 노래반주를 맡았었다. 웃음과 노래, 랑만이 한껏 넘치던 청춘의 그 시절 최명후는 김희문의 사랑이 담긴 눈길을 얼마나 고대하였던가. 그냥 기다리고만 있을수 없을 정도였다. 열정적인 성격의 처녀였던 최명후는 그에게 시집가지 못하면 일생 처녀로 늙고말겠다고 부모들앞에 선고하는 바람에 다른 대상자를 생각하고있던 집안에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그의 부모들은 할수없이 총각을 만나 자기 딸의 일생을 망치지 않게 해달라고 점잖게 사정을 했었다.

그때일을 돌이켜보는 최명후로서는 옥련이가 아무리 인물잘난 처녀일지라도 자기처럼 정열적이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생각이였다. 그런데 령감말을 들으면 그런 사이 같지도 않으니 난사는 난사다.

그의 마음에 딱 걸리는것은 아들이 아버지만큼 잘 생기지도 못했고 찬찬하지도 못한것이였다.

(그저 안팎으로 나만 닮았다니까. …)

문뜩 가까이에서 명랑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날씬한 키에 환하게 생긴 한 처녀가 웃쪽에서 마주 내려오고있었다.

옥련이였다. 앞으로 도선발경연에 올라갈 준비를 하느라 잠시도 노래련습을 중단하지 않는 모양이였다. 저혼자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무런 구속도 없이 마음껏 목청을 내뽑는다. 목청은 그야말로 맑고 명랑하면서도 우아했다.

최명후는 입을 하 벌리고 정신없이 처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리도 곱게 생기고 노래 또한 잘 부른단 말인가. 노래에 심취된 나머지 그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말했다.

《잘한다! 잘해!》

마지막음정을 여운있게 넘기려고 애쓰던 옥련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굳어졌다.

최명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나야, 태식이 어머니라니까.》

그는 푸짐하게 웃으며 처녀를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처녀는 몸둘바를 몰라하며 얼굴을 붉힌다.

《어델 가나?》

옥련은 달아오른 얼굴을 들지도 못한채 부식물때문에 마을에 내려간다고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럼 마침이구만. 변변친 못해도 내가 부식물이랑 조찰떡을 좀 쳐가지고 올라오는 길이야.》

최명후는 빨간 비닐버치를 씌운 보자기를 벗겨보였다. 처녀는 별로 반가와하는 기색이 아니다. 하지만 워낙 노죽이 죽가마같은 최명후라 처녀가 그럴수 있지 하고 생각하면서 어서 앉아 다리쉼이나 좀 하자고 처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래도 옥련은 그냥 서있기만 했다.

《얼마나 힘들겠나. 한둘도 아니고 그 숱한 사람들한테 하루 세끼 때식을 끓여줄라니… 땀은 동이채로 흘릴거고 얼굴은 항상 불에 익어 꽈리처럼 되겠지. 남자들이야 그저 먹을줄이나 알았지 녀자들의 수고를 알게나 뭔가. 우리 태식이녀석만 봐도 그럴거야.》

처녀가 어쩌나 보자하고 아들이름을 슬쩍 비치는데 흠칫 놀라는듯 하던 옥련은 바빠서 그만 내려가보겠노라고 입안소리로 말한다. 그제서야 자기가 지내 수다스러웠다는것을 깨달은 최명후는 처녀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이상했다. 단순히 부끄러워 그러는것만 같지 않았다. 령감 말대로 떡줄 놈 생각도 안하는데 김치국부터 마신 격인가. 그럴수가 있나. 태식이와 나란히 사진까지 찍지 않았는가. 최명후는 더 에돌지 않기로 작정했다.

《우리 태식이가 워낙 곰상스럽지야 못하지. … 하지만 내 에미가 돼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래도 사내싸고 우물속처럼 생각이 깊다네.》

처녀는 여전히 새침한 인상이다. 저도 모르게 등이 달아오른 최명후는 령감과 철석같이 약속까지 한 말을 그만 뱉아놓고야말았다.

《거 옥련이가 우리 애와 찍은 사진이 참 잘됐더구만. 언제 그렇게 다…》

처녀의 얼굴이 번쩍 들렸다. 그처럼 곱고 환한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눈가에는 맑은것이 맺힌다.

최명후는 영문을 알수 없어 머리를 기웃거렸다.

《왜 무슨 일이 있었나?》

순간 후두둑 뛰는 가슴의 불안을 느끼며 처녀의 손을 잡았다. 옥련이는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한테는 그 사진이 정말 진짜처럼 보이던가요?… 태식동문 그런 사진까지 장난해서 결국은 온 동네에 당치 않은 소문을 내고 저를 모욕했어요.》

《아니, 장난이라니?…》

최명후는 눈앞이 아뜩해졌다. 고운 새가 줌안에서 빠져 날아가버린듯 한 심정이였다.

옥련은 한숨을 내쉬더니 그간의 사연을 숨김없이 다 터놓았다.

최명후는 처녀의 말을 마치 꿈속처럼 듣고있었다.

처녀는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아뿔싸, 이게 웬일이람. 세상에 이런 망신도 있나. …)

최명후는 한순간에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지는감을 느꼈다. 창황중에도 처녀를 어떻게 위로했으면 좋을지 어쩔바를 몰라했다.

《내 그녀석을 그저… 옥련아, 너무 속썩이지 말아. 내 이제 당장 그녀석을 만나 볼기를 치마. 원, 철이 없어두 분수가 있지 멀쩡한 처녀를 망신시키다니…》

《아니 어머니,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 일은 이미 끝났으니 더 상기시키지 마세요.》

옥련은 사정하듯 말했다. 그리고는 얼굴을 싸쥔채 마을쪽으로 달려내려갔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던 최명후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처녀의 뒤모습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원, 내가 로망을 했군. 령감이 이걸 알면 쫓겨나기가 십상이지. …)

별안간 태식이에 대한 분이 치밀어올랐다.

최명후는 덕 웃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는 아들이 능금골에서 방목분조를 책임지고있다는것을 알고있다.

최명후는 건설현장을 에돌아 곧장 능금골로 향했다. 머리에 버치를 이고 염장무우바께쯔를 들고 걸음을 다그치자니 땀이 비오듯 흘렀다. 발이 땅에 닿는지마는지 힝힝 걸음을 옮기던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리 생각해봐야 이렇게 이고들고 능금골까지 간다는게 우스웠다.

건설장쪽으로 다시 걸음을 돌렸다. 순미를 만나 약소한대로 조찰떡과 염장무우를 넘겨주고 사연을 알아볼 작정이였다. 옥련이가 그 정도이니 반장인 그가 그 일을 모를수가 없었다.

건설장에 다달은 그는 단번에 눈에 안겨드는 전경도앞에 굳어진듯 서버렸다.

아이구나, 희한도 해라. 이게 바로 풍덕땅에 자자하게 소문난 그 전경도로구나. 최명후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는 방금까지 아들문제때문에 머리가 뒤흔들리던것을 까맣게 잊고 정신없이 전경도를 들여다보았다.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이 벌려놓은 일이 대단하다기에 무슨 말인가 했더니…)

순미가 대견하고 기특하게만 생각되였다. 그러자 방금전 옥련이와 마주섰던 일이 떠오르면서 아들에 대한 원망감이 다시금 불쑥 치솟았다.

순미는 연약한 처녀의 몸으로 이처럼 큰 일판을 척척 주도해나가는데 사내녀석이라는게 처녀 하나 제대로 움켜쥐지 못해서 이 에미얼굴에 흑칠을 한단 말인가. 제 아버지 발꿈치에도 못 간다니까. 원, 사진까지 만들어내다니…

한숨을 내쉬며 잠시 망설이던 최명후는 일판을 벌려놓고 바삐 돌아갈 순미한테 쓸데 없는 걱정을 끼치느니 조용히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 문제를 자꾸 들고다녀야 주책머리 없다는 소리나 들을것 같았다.

그는 마침 석회를 싣고 올라오는 청년들에게 버치와 바께쯔를 넘겨주고는 누가 볼세라 허둥지둥 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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