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회)

제 1 장

4

 

렬차는 중낮무렵에야 삼포역에 들어섰다. 한껏 무르녹는 봄날의 해빛이 렬차에서 내린 사람들을 포근히 감싸안았다.

라순미는 서둘렀다. 여기서 풍덕리까지는 30여리가 잘되였다. 더구나 어둡기 전에 배등령을 넘어야 했다.

어느 사이 읍거리를 빠져나온 그는 풍덕으로 향하는 도로에 들어섰다. 어인 일인지 발걸음은 갈수록 가벼워지기만 했다. 저 멀리 아득히 배등령이 바라보인다. 그 령너머에 고향 풍덕이 있다. 오를 때는 배가 닿고 내릴 때는 등이 닿을만큼 험하고 가파로운 령이다. 하지만 순미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고 고향땅에 다 온듯 한 기분이였다. 수년간 드넓은 방목지를 좁다하게 달려다니며 몸도 마음도 굳세게 단련된 그였다.

그는 자기의 몸에 나래가 돋힌듯이 느껴졌다. 힘을 주고 꿈과 희망을 주고 지칠줄 모르는 창조에로 떠밀어주는 나래, 고향땅에 뿌리를 내리고 그 자양분으로 아름답고 억세여진 청춘의 나래였다.

그는 자기가 배등령을 걸어서넘는것이 아니라 날아서넘는듯이 생각되였다. 길옆의 푸르러가는 나무숲은 눈깜짝할 사이에 처녀의 곁을 지나쳤고 빗―쫑, 빗―쫑 앞쪽에서 우짖던 정다운 새소리도 인차 뒤전으로 멀어졌다. 날이 어두울무렵 라순미는 마침내 배등령마루에 올라섰다. 시원한 바람이 옷자락을 날렸다. 앞쪽에서 향긋한 풀냄새와 함께 노릿하면서도 비릿한 방목지특유의 향기가 가슴에 흘러들었다.

령아래마을에서 어서 오라 반기는듯 불빛들이 반짝거렸다. 비록 어둠속이지만 그는 고향의 전경을 대낮처럼 환히 굽어보고있었다.

마을웃쪽에 자리잡은 청년염소작업반과 끝간데없이 펼쳐진 구릉진 방목지들, 야산기슭의 아담한 토끼작업반과 추녀를 잇고 즐비하게 늘어선 문화주택들… 원래 이 골짜기, 저 골짜기들에 장기쪽처럼 널려있던 주택들을 작업반별로 구획을 지어 새로 짓고 농장을 규모있게 정리한것은 관리위원장 권봉석을 비롯한 순미네 부모들 세대였다. 그후 순미네 대에 와서 풍덕리는 더 아름답게 변모되였다.

순미는 살뜰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쓸어만지듯 가까이 다가오는 고향을 마음속에 안아보았다.

(아, 고향이란 이렇듯 정답고 그리운것이였던가. 살뜰한 어머니처럼 떨어져 한시도 못살 내 삶의 보금자리…)

그의 눈길은 저도 모르게 저 멀리 최전연으로 뻗은 도로쪽으로 향했다. 눈굽이 젖어들었다.

(지금 이 시각도 우리 장군님께서 저 가파로운 령길을 넘고계시지 않을가. …)

크나큰 격정을 가슴 한가득 안은채 령을 내리던 순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청년염소반 방목지 등판에서 수십개의 불방망이들이 움직이고있었던것이다.

무슨 일일가, 혹시 작업반에 무슨 사고라도 난게 아닐가.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다. 지난 시기에도 염소를 잃었거나 방목공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을 경우 전체 반원들이 홰불을 켜들고 떨쳐나서군 했었다.

라순미는 마을로 내려가려던 걸음을 돌려 방목덕으로 올라가는 달구지길에 접어들었다. 손전지를 항상 가지고다닌것이 다행이였다. 가시덩굴이 발에 감기는가 하면 키낮은 떨기나무, 새초숲이 앞을 막기도 했다.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을상싶다. 방목덕은 얼핏 보기에는 넓은 등판처럼 안겨오지만 실지에 있어서는 무수한 기복을 이루고있었다. 크고작은 야산들과 등성이들의 련속이고 때로는 낮아진 곬이나 후미진 버덩이 나타나기도 한다.

얼마나 달렸는지.

순미는 목안이 타드는것만 같았다. 어느새 온몸이 흠뻑 젖었다. 금시 만날것 같던 불방망이들은 보이지 않고 어데가 어딘지 도무지 분간할수가 없었다. 향긋한 햇풀냄새가 진동했다.

전지불빛에 무성하게 아지를 펼친 돌배나무, 매자나무, 능금나무들이 군데군데 드러났다.

순미는 비로소 방목지중턱에 꾸려진 염소방목쉼터앞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방목등판에는 곳곳에 이런 쉼터들이 꾸려져있다.

무더운 여름철 한낮이면 방목공들은 염소무리를 방목쉼터의 나무그늘밑으로 몰아넣고 휴식을 시키다가 오후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다시 방목을 하군 하였다.

라순미는 몇해전부터 봄, 가을식수철을 계기로 많은 방목쉼터들을 꾸려놓았다. 정방형 또는 원형으로 나무들을 심고 그사이에는 드문드문 일정한 높이로 구유를 설치하였다. 방목시 염소들이 리용할 소금구유였다. 방목쉼터마다에 샘물도 파놓아 염소들이 언제든지 물을 먹을수 있게 해놓았다.

샘터는 석축을 하고 우에는 뚜껑을 해덮었으며 거기에 차오른 물은 도랑을 타고흘러 물탕크에 차게 된다. 탕크에는 조절퇴수장치가 되여있다. 수십마리의 염소들이 그곳에서 마음껏 물을 먹을수 있다.

방목공들은 쉼터마다에 알락달락 색칠까지 한 새둥지를 만들어 나무마다 달아놓았다. 온갖 아름다운 새들이 방목지에 날아들게 하려는것이였다.

얼마나 좋은 동무들인가…

잠시 숨을 돌리며 염소방목쉼터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던 라순미는 흠칫 놀랐다. 어데선가 이쪽을 향해 불빛이 번쩍거렸던것이다. 그 불빛이 가까이 다가오고있었다.

웬 사람일가… 긴장하게 앞을 주시하는데 《누구요?》 하는 웅글은 목소리가 날아왔다.

귀에 익은 음성이였다. 침착하면서도 무게가 느껴지는 저 목소리…

(아, 홍진동무로구나. )

어느새 불빛이 곁에 다가왔다.

《홍진동무, 저예요, 라순미예요.》

처녀는 반갑게 소리쳤다. 안홍진을 만난것이 어찌하여 그처럼 기쁜지 알수 없었다.

밤중에 외로이 헤매다가 만나서인지… 아니면 일전에 해준 그의 아픈 말이 지금에 와서는 고맙게 생각되여서인지…

그 순간 순미는 그가 작업반에 온 첫날에 있은 축하모임때가 생각났다.

마지막으로 지명을 받은 안홍진은 놀랍게도 노래 《내 고향》을 불렀다. 그 노래는 이곳 청년들이 자기 고향에 대한 노래처럼 즐겨부르는것이였다. 노래도 노래였지만 그의 감정이 자기들과 일치한데 반원들은 모두 감탄했다.

순미가 보기에는 그가 대단히 높은 실력과 과감성을 지닌 훌륭한 청년인듯 했다.

권봉석관리위원장은 안홍진에 대해 소개하면서 앞으로 그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될거라고 은근히 귀띔했었다.

순미는 이번에 은송목장을 돌아보면서 관리위원장의 그 말을 다시 음미해보았다. 그와 동시에 안홍진이 힘들게 한 말에 대해서도 생각을 거듭했다.

그때마다 어린시절 그림공부시간에 비행기를 타고 염소떼를 지휘하는 방목공청년을 그려보던 일이 느닷없이 떠오르군 하였다. 그것은 물론 동심이 떠올린 랑만적인 환상이였다. 어쨌든 청년염소작업반을 시대의 요구에 맞게 현대화하고 무릉도원으로 꾸리자면 그에 따르는 최신과학기술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안홍진의 존재는 순미에게 있어서 참으로 귀중하고 다행스러운것이였다. 깊은 밤 방목덕에서 뜻밖에 안홍진을 만나게 된 순미의 감정은 그러했다.

안홍진이 갑자기 나타난 순미가 놀라운듯 다우쳐물었다.

《반장동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요? 어느새 방목지까지 올라왔소?》

그에게는 라순미의 출현이 하늘에서 내렸거나 땅에서 솟아오른것만치나 신기하게 생각되는 모양이였다.

순미는 소리없이 웃었다. 그제야 안도의 숨이 나가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의식했다.

《배등령을 내리는데 갑자기 방목지에서 웬 불방망이들이 오락가락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곧장 올라왔어요.》

《그럼 배등령을 혼자서 넘어왔단 말이요? 남자들도 밤에는 넘기 힘들다던데… 하여튼 반장동문 보통이 아니구만.》

《어마, 그게 뭐 대단한거라고 그러세요. 배등령이야 우리 고향 대문이나 같은데요.》

순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밝게 웃었다.

《그런데 방목지에 무슨 일이 생겼어요?》

안홍진이 저녁에 있은 일을 대충 이야기해주었다.

《예? 옥련이가 〈흰제비〉를 잃었단 말이예요?》

《그렇소. 옥련동무와 태식동무가 염소를 찾겠다고 솔골쪽으로 들어갔다는데 그들조차 나타나지 않아 반원들이 모두 떨쳐나선거요.》

안홍진도 희문아바이를 만나서야 사연을 알게 되였던것이다.

《그래서 급히 방목지로 뛰여올라왔는데 이렇게 반장동무를 만났구만요.》

《그럼 빨리 가자요. 〈흰제비〉가 방울을 달았으니 지금쯤 찾았을지도 몰라요.》

라순미는 앞에서 걸음을 다우쳤다. 안홍진을 만나면 회의에 참가해서 받은 충격과 은송목장의 전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그럴 경황이 없었다. 《흰제비》부터 찾아야 했다.

라순미가 초조한 심정으로 잡관목을 와락와락 헤치는데 안홍진이 멈춰세웠다.

《반장동무, 배낭을 인주시오.》

《아이참… 깜박 잊었댔군요, 배낭을 졌다는걸…》

두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처녀의 등에서 배낭을 벗겨든 안홍진은 그것을 둘러메고 제가 앞장에 섰다. 그때부터 두사람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서로가 숲을 헤치는 소리만 와락와락 들려왔다.

순미는 왜 그런지 그 침묵이 싫었다. 제발 아무 말이라도 좀 했으면…

왜 갑자기 말을 끊었을가. 이 동무는 본시 뚝한 사람인가봐… 아니, 순미는 잘못 알고있었다. 안홍진은 지금 마음속으로 말을 하고있었다. 그것도 많은 말을 뜨겁고 열렬하게 하고있었다. 불망치같은것이 가슴을 지지며 끓어올랐다. 방금 배낭을 벗길 때 처녀의 땀에 젖은 잔등에서 마쳐오던 뜨거운 기운이 삽시에 자기의 온몸을 휩싸는것 같이 느껴졌다.

얼마나 달려왔으면 그렇게 흠뻑 젖었을가. 등에 진 배낭까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홍진은 순미반장이 열성자회의에 떠나게 됐을 때 그앞에서 서슴없이 내뱉은 자기의 말에 대해 생각하였다. 그때는 분명 처녀의 인상이 밝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 밤은 놀랄만큼 따뜻하고 친절하고 활달한 인상이였다. 이번에 혹시 좋은 일이라도 생긴것인가, 아니면…

안홍진은 더욱더 자기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는 이번에 관리위원장 권봉석의 제기로 농장 알깨우기실콤퓨터화에 참가하였었다. 여간 복잡하지 않은 작업공정이였지만 성과적으로 끝을 보게 되였다. 권봉석은 몹시 흡족해했다.

《동문 참 보배덩이야, 실력있는 기술자거던. 염소방목공이 아니라 당장 기사장사업을 대리하는게 어떻겠나? 그러찮아도 지금 기사장이 학교에 가고 없는데…》

안홍진은 웃었다. 알깨우기실 처녀들의 정성이 담긴 저녁식사를 하면서도 관리위원장은 계속 그 소리였다.

홍진은 식사를 마치고 염소작업반으로 올라오던 길에 풍덕땅의 아름다운 저녁풍경을 보게 되였다. 집집마다 불빛이 환한 마을, 구수한 흙냄새, 향긋한 햇풀의 향기…

불쑥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풍덕땅은 아버지의 고향이였다. 청춘시절 아버지가 흘린 땀이 이 땅에 슴배여있고 생의 발자취가 찍혀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 고장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군 했다. 그 이야기는 천진한 동심에 잠긴 어린 넋을 유혹했다.

《풍덕땅에는 신기한 약풀들이 많아 금시 어미배속에서 나온 새끼양, 새끼염소들이 며칠이면 어미만큼 자라군 했단다.》

《그럼 한달이면 굉장하겠군요?》

《아무렴, 황소만큼 크지.》

《데거… 한번 봤으면…》

아들의 호기심은 나날이 커만 갔다.

《아버지, 풍덕땅엔 소, 양, 염소 그리고 또 뭐가 있나요?》

《머루, 다래, 돌배, 능금 같은 산열매들이 골짜기마다 꽉 차서 가을이면 그 향기에 취해 저절로 잠들 지경이란다. 방목공들은 그 향기를 타고 훨훨 날아다니면서 고향의 노래를 부른단다. 그러면 양, 염소들은 무연한 풀판을 무대삼아 껑충껑충 춤을 추군 하지.》

《야, 아버지도 그렇게 해보았나요?》

《그럼.》

소년은 그 말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아버지가 부러웠다. 그 땅에 대한 이야기는 뭐나 다 신비스러웠다.

고사리, 고비는 한줌만 뜯어도 바구니를 채운다지. 버섯은 이름이 하도 많아 미처 외울수 없고 하나가 밥가마뚜껑만 하단다.

《야, 나도 한번 가봤으면…》

《이제 크거든 가보자꾸나. 사람들은 또 얼마나 좋겠니. 인정많고 일 잘하고…》

그처럼 어린 넋을 흥분시키던 신비한 땅에 바로 그가 와있는것이다. 지금껏 그에게 있어서 풍덕땅보다 더 살기 좋고 아름다운 곳은 없는듯싶었다.

안홍진은 군사복무시절에도 그리고 대학시절에도 언제한번 이 땅을 잊어본적이 없었다.

아버지 역시 고향에 대한 애틋한 추억에 잠기는 때가 많았다. 텔레비죤이나 방송으로 양, 염소를 잘 기르는 고장들이 소개될 때면 혹시 풍덕땅이 아닌가 하여 귀를 기울이군 하였다.

《아버지, 풍덕땅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세요. 거기야 금시 낳은 새끼양도 며칠이면 어미만큼 자라고… 한달이면 황소만큼 크고…》

홍진은 아버지의 옛말을 그대로 상기시키며 빙그레 웃었다. 아버지도 웃었다. 그때부터 아들의 생각은 깊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고향 풍덕땅도 많이 달라졌겠지. 그런데 어째서 텔레비죤이나 신문, 방송에 풍덕이란 이름이 오르지 않을가?…

홍진은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드리고싶었다. 현대과학기술을 배운 새 세대 청년으로서 풀먹는 집짐승을 기를데 대한 당정책관철에 앞장서는것이상 보람차고 영예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풍덕으로 가자. 아버지의 고향을 아들이 가꾸는것이야말로 응당한 일이 아닌가.

하여 홍진은 대학을 졸업하고 현실체험지를 풍덕으로 정했다. 그 땅은 어떤 의미에서 그자신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고맙다, 네가 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아버지는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하지만 얼굴색은 밝지 못했다. 무엇인가 괴로와하는 표정이였다. 그날 밤 아버지의 방에서는 오래동안 불빛이 꺼질줄 몰랐다.

갑자기 왜 그러실가. 혹시 내 결심을 못마땅하게 여기신건 아닐가?

홍진은 그 까닭을 떠나오는 날에야 알게 되였다. 아들을 배웅하려 역전까지 따라나온 아버지는 홍진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했다.

《홍진아, 풍덕으로 떠나는 너를 보니 참 생각이 많아지는구나. 아버진 사실 고향에 빚을 진 사람이다.》

《예, 아버지가 빚을 지다니요?》

《음, 그런 일이 있었다. 리상과 실천간의 불일치라고 할가… 그때 난 면양반 반장을 하고있었는데 제나름의 리상도 있었고 정열도 있었지. 그래서 작업반을 본때있게 일떠세울 높은 목표를 정하고 크게 일판을 벌렸단다. 당시로서는 너무나 아름찬 목표였다. 어떤 사람들은 공상이라고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찬성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지. … 작업반원모두가 떨쳐나 건설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소환장이 떨어질줄이야…》

잠시 말을 끊은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였다. 깊은 자책과 회오에 잠긴듯 한 아버지의 무거운 표정을 대하는 홍진의 심정은 착잡하였다.

그렇듯 열렬하고 뜨겁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추억하군 하던 고향땅에 아버지의 후회가 깃들어있을줄 어찌 알았으랴.

《그래서 아버진 고향을 떠나게 됐고 잔뜩 벌려놓았던 일은 끝을 맺지 못했지. 숱한 사람들을 고생만 시키고…

홍진아, 리상과 목표를 세우는것만으론 부족하다. 그것을 꼭 실천에 옮길 때만이 참되고 훌륭한 인간이 될수 있는거다.

그래서 나도 지금껏 부지런히 일해왔건만 어쩐지 고향앞에는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수가 없구나. …》

홍진은 목이 메였다. 아버지의 손을 꽉 틀어잡은 그는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예요, 아버지. 아버지는 지금껏 떳떳하게 사셨어요. 고향에 대한 아버지의 심정은 리해됩니다. 그래서 제가 그곳으로 가는것이 아닙니까.》

《옳다, 아버지의 부탁을 잊지 말고 풍덕땅을 가꾸고 빛내이는데 너의 지식과 정열을 아낌없이 바쳐다오.》

《아버지!》…

그렇게 떠나온 홍진이였다.

그는 당분간 아버지에 대한 말을 누구에게도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앞으로 많은 일을 해놓은 후 떳떳하게 나서고싶었다. 리당비서 박성복에게만 사실대로 터놓았을뿐이였다.

《그렇댔구만. 정말 반갑소. 한번 본때있게 일해보오. 내 약속을 지켜주겠소.》

안홍진은 그동안 아버지의 이야기속에서 낯을 익힌 사람들을 누구의 소개없이도 알아볼수 있었다. 아버지의 소꿉시절동무인 권봉석관리위원장이며 김희문아바이 그리고 면양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풍덕땅에 자진한 연구사를 따라왔다가 영원히 이 땅에 뿌리를 내렸다는 라순미의 어머니 림송심(아버지는 웬일인지 그에 대해서 구체적인 말을 피했었다. ), 청년염소반의 김태식의 어머니 최명후며 류옥련의 어머니 정보배도 다 알아보았다. 그들앞에 부끄러움없이 나서고싶었다. …

안홍진은 무엇인가 발에 걸채여 비칠거렸다.

《홍진동무.》

라순미는 깜짝 놀라 다우쳐불렀다.

그는 우뚝 그 자리에 멈춰섰다. 어둠속에서 그들은 서로 마주보았다.

《밤길인데 조심하세요.》

《반장동무, 미안하오.》

안홍진은 시원스럽게 말했다.

라순미는 그가 무슨 말인가 하고싶어하는듯이 여겨졌다. 아닐세라 그가 하는 말이 순미를 놀래웠다.

《반장동문 나한테 의견이 많겠지요?》

라순미는 호 입김을 내불었다. 그랬다, 의견이라기보다 하고싶은 말이 많았다. 은송목장을 돌아보면서 머리속에 떠오른 착상들 그리고 새로이 가다듬은 결심에 대하여…

그는 청년염소작업반을 새롭고 특색있게 꾸리고싶었다. 고향 풍덕땅을 제일가는 락원으로, 은송목장보다 더 훌륭하게, 더 아름답게 가꾸고싶었다. 방목지 하나만 놓고봐도 그곳 목장은 골짜기를 따라 들어가면서 순환식방목구획을 짓고있었다. 그러나 은송목장과는 달리 풍덕땅의 방목지들은 넓은 구릉지대에 펼쳐져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여느 목장들과 다름없는 방식으로 염소방목을 해왔었다.

라순미는 고향의 지대적특성에 맞게 방목지를 새롭게 꾸리고 염소방목을 현대적으로 할 계획을 세웠다.

그의 생각은 어제, 오늘에 비로소 생긴것이 아니였다. 오래전부터 쌓은 경험에 토대하여 세계적인 축산업발전에 따라세울것을 목표로 한 실로 아름찬것이였다. 현재의 염소방목등판을 일정한 구획으로 나누고 콤퓨터화된 방목방법을 도입해보려는것이였다. 그러자면 물론 그에 따르는 수많은 과학기술적문제들이 해결돼야 한다. 방목지들을 구획지을 현대적인 울타리, 염소들의 방목상태를 관찰하는 송상카메라의 설치, 일정한 기간 방목을 시킨 후 한 구획에서 다른 구획으로 넘어가는 염소무리들의 자동적인 이동방법, 발달된 방목도로 건설, 그 모든것을 조종할수 있는 콤퓨터프로그람체계와 그 운영… 어찌 방목뿐이랴, 젖짜기와 젖가공도 보다 현대적인 수준에 올려세워야 하였다.

그 모든것을 어떻게 한두마디 말로 설명할수 있겠는가.

순미의 가슴은 세차게 높뛰였다. 안홍진은 그의 심정을 읽었는지 말없이 부지런히 앞을 헤치며 나갔다.

그들은 마침내 솔골에 이르렀다. 골짜기 후미진 곳에서 우등불이 타오르고있었다.

《동무들―》

순미는 골짜기를 향해 달려갔다. 힘든것도 숨이 찬것도 느끼지 못했다.

얼마나 달렸는지. …

골짜기를 따라 한동안 들어가니 불무지주위에 빙 둘러앉은 반원들의 모습이 안겨왔다.

《동무들―》

청높은 부름소리가 골안을 울렸다.

《반장동무다.》

누군가 소리쳤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우르르 달려왔다. 라순미는 삽시에 그들에게 둘러싸였다.

《반장동무, 수고했소.》

신종선이 그의 손에서 가방을 받아쥐며 말했다.

《그간 모두 잘들 있었어요?》

갑자기 목소리가 갈렸다. 뜨거운것이 왈칵 솟구쳤다.

얼마나 그리웠던가. 아, 동무들, 나의 동무들…

《반장동무, 이거 도착하는 날 정말 안됐소. 그 〈흰제비〉가 글쎄…》

신종선이 시선을 피하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됐어요, 일하느라면 무슨 일인들 없겠나요.》

그는 동무들뒤에 숨어 반가움조차 표현 못하는 옥련이의 손을 꼭 잡아쥐였다.

《옥련아, 신경쓰지 마, 〈흰제비〉는 꼭 나타날거야.》

《반장동무, 난 정말…》

옥련은 눈물이 글썽해졌다.

《됐어, 그만해.》

순미는 그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안았다.

얼마후 청년염소작업반원들모두가 우등불주위에 모여앉았다. 그제야 왁작 떠들며 회포를 나누기 시작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질문소나기에 대답하느라 한동안 쩔쩔매던 순미는 정색한 표정으로 지금껏 가슴에 안고있던 격정을 터쳐놓았다. 회의참가과정의 충격적인 느낌이며 은송목장을 돌아보면서 느낀 자책과 괴로움, 새롭게 다진 맹세와 결심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은송목장에 대한 말이 나오자 반원들은 연방 야! 야! 감탄을 터뜨렸다.

《우리도 은송목장처럼 작업반을 멋있게 꾸립시다.》

역시 즉흥적인 리경칠이 제일먼저 소리쳤다. 모두가 호응해나섰다. 비록 말밥에 자주 오르는 리경칠이였지만 그의 호소에는 진심이 스며있는것이였다.

《동무들, 우리는 어떻게 하나 작업반을 현대적으로 꾸리고 고향 풍덕땅을 살기 좋은 무릉도원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자신들의 지혜와 힘을 다 바칠 각오를 가져야 해요. 우리는 결코 작은것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목표를 높이 세우고 힘차게 돌진해야 해요.》

순미는 숨을 가다듬고 한층 격조높이 말했다.

《우리 고향 풍덕은 자연지리적으로 볼 때 은송목장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 고향의 지리적특성, 실정에 맞게 우리 식으로 새롭고 특색있게 현대화하자는겁니다.》

순미는 지금껏 마음속에 고패치고있던 자기의 착상을 그대로 터놓았다. 반원들의 눈빛은 점점 황홀해졌다.

《반장동무, 난 어쩐지 꿈처럼 생각되는군요.》

작업반적으로 제일 말이 없기로 소문난 방목공청년이 머리를 기웃거리며 한마디했다.

《옳아요, 아직은 꿈이예요. 하지만 꿈을 현실로 꽃피우는게 우리 시대 청년들의 응당한 의무가 아닌가요.》

《반장동무의 말이 옳소.》

신종선을 비롯한 오랜 방목공들이 호응했다.

《이 리경칠이 콤퓨터조종실에 앉아 방목을 한단 말이지? 그러다 발바닥에 털이 나면 어쩐다?…》

리경칠의 너스레에 와 웃음이 터졌다.

《저는 반원들모두가 그런 각도에서 우리 청년염소작업반을 어떻게 꾸리는것이 제일 합리적이겠는가 하는것을 탐구하고 착상해서 집체적으로 토의하자는거예요. 이를테면 현상모집을 하겠단 말이예요.》

《현상모집?…》

반원들은 대번에 눈들이 커져서 웅성웅성했다. 김태식이 마른 나무가지들을 불무지에 던져넣었다. 수많은 불찌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순미는 각이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반원들의 모습을 미더운 눈길로 둘러보았다.

《전 작업반장으로서 오늘부터 누가 더 좋은 안을 내놓는가를 다투는 현상모집을 정식 선포합니다.》

요란한 박수소리가 골안을 울렸다.

그들은 작업반장의 착상과 의견을 놓고 저마다 열을 올리며 토론했다.

한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다.

어느덧 골안이 희붐히 밝아오고있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흰제비〉들을 찾아봅시다.》

신종선이 소리쳤다. 반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샘골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흰제비》오누이는 종시 나타나지 않았다. 반원들은 맹수의 피해같다고 제나름대로의 추측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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