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제 1 장

1

 

그것은 평범한 날에 있은 생활의 한토막이였다. 유쾌한 이동방목지의 생활, 그날도 청년염소작업반원들은 저녁식사를 마치면 의례히 그러하듯 우등불주위에 모여앉았다. 오락회의 시작은 항상 《청춘은 급행렬차》와 《우등불 타오르네》의 합창으로 시작되군 하였다. 쭉 빠진 키에 얼굴이 검실검실하게 탄 방목분조장 신종선이 앞에 나서서 《우등불 타오르네… 하나, 둘, 셋》 하고 운을 떼자 경쾌하고 랑만적인 노래소리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과 함께 밤하늘로 나래쳐올랐다.

합창이 끝나자 신종선은 반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은 어느 동무의 노래부터 듣는것이 좋겠소?》

《분조장동무, 그야 뭐 물으나마나 류옥련동무의 노래지요.》

몸매가 퉁퉁하고 눈이 가느스름해서 늘 웃는것처럼 보이는 방목공 김태식이 느릿하면서도 굵은 목청으로 한마디 했다. 그 말에 처녀들 틈에 얌전히 앉아있던 류옥련이 총알처럼 내쏘았다.

《동문 제 처신이나 바로하는게 좋겠어요. 밤낮 남의 이름만 꺼들지 말고…》

처녀는 깔끔한 눈길로 청년을 쏘아보았다. 자칫하다가는 오락회의 흥이 깨질 우려가 있었다. 그때 김태식의 옆에 앉았던 나어린 방목공 리경칠이 그 무엇인가를 부정하듯 손을 휘휘 저으며 회초리같은 몸을 일으켰다.

《저도 태식동무의 제기에 의견이 있습니다. 오락회때마다 매번 옥련동무가 먼저 부르는데 이건 전진이 없는 답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인상적인 짝눈을 반짝이며 평소에 히히덕거리기 잘하는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오늘 저녁부터 우리 청년염소작업반의 오락회수준을 한계단 높이자는걸 정식 제기합니다.》

리경칠은 한옆에 앉아 미소를 짓고있는 라순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반장동지! 제 의견을 말하랍니까?》

라순미는 그의 익살에 웃음이 났으나 흔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서 말하세요.》

반장의 말에 리경칠은 어깨를 으쓱했다.

《제 의견은… 에… 다른게 아니라 제가 청년염소작업반에 입직하여 염소방목공으로 임명받은지도 어느덧 3년이 되였다 이겁니다.》

《저 동무 무슨 말을 하자는거야?》

누군가 어이없는 투로 중얼거렸다. 술렁거리는 분위기에 다급해난 리경칠이 황황히 손을 내저었다.

《저의 말을 도중에 끊지 말았으면 합니다. … 다른게 아니라 오락회때마다 지명을 하거나 차례로 돌아가면서 고정격식화된 노래를 부르는데 이젠 막 짜증이 날 지경입니다.》

그는 오른쪽주먹을 망치처럼 휘둘렀다. 그리고는 자기가 한 말의 반응을 알아보려는듯 재빨리 좌중을 둘러보고는 한층 높은 어조로 열변을 토했다.

《례를 들어서 지명을 받거나 자기 차례가 되여 부르는 노래만 봐도 그렇습니다. 다 알고있는 사실이지만 태식동무는 〈휘영청 달밝은 이밤에…〉, 이거고 신종선분조장동지는 〈인생이 가는 길 머나먼 길에…〉, 이거고 기술원 정윤심동지는 노을이 불타는 창가에 앉아 일기를 쓴다는 노래고 옥련동무는〈뻐꾹새가 노래하는 곳〉, 이거고 송순애동문 그저 입만 열면 〈남모르는 들가에 남모르게 피는 꽃〉 하는데 사실 저 동무가 뭐, 남모르는 들가에 남모르게 피는 꽃은 아니란 말입니다.》

처녀들이 키득거렸다. 총각들속에서도 허허 웃음이 터졌다. 유독 웃지 않고 새파래진것은 송순애 하나였다. 그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들은 동창생이였다. 동창생처녀의 얼굴이 홍당무우처럼 되였으나 리경칠은 그에 개의치 않고 제 할 소리만 했다.

《그러니 우리 청년염소작업반의 오락회수준을 보다 새롭고 혁신적인 높이에 올려세우기 위한 각자의 탐구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또 독창, 독주도 하고 유희오락과 체육무용, 건강태권도에 이르기까지… 어쨌든 청년들답게 활동적이고 진취적인 내용과 형식을 갖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란한 박수가 터졌다.

《경칠동무가 제법인데…》

《씨박힌 소리를 하누만.》

저마다 리경칠이를 향해 박수를 치며 한마디씩 했다. 작업반적으로도 제일 나이어린 그의 제의가 엉뚱하게만 생각되지 않았던것이다.

그날 저녁 반원들은 《더 높이 더 빨리》를 비롯한 새로 나온 노래들을 합창하였다. 한마음한뜻이 되여 부르는 그 노래소리는 마치 리경칠의 제의에 열렬히 호응하는듯 했고 모두가 있는 힘과 지혜를 깡그리 바쳐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려는 청춘들의 불타는 맹세를 소리높이 구가하는것 같았다. 얼마나 좋은 저녁이였던가. 하늘높이 메아리치던 열정적인 노래소리, 노래소리…

불쑥 떠오른 추억이였다.

그때 흥분에 들떠 웨치던 리경칠의 말이 오늘따라 류달리 가슴을 파고드는것은 무엇때문일가?

라순미는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는듯 차창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동해선렬차는 봄기운이 완연한 등판을 가로질러 기세차게 달리고있었다. 차창밖으로는 진달래꽃에 뒤덮여 하나의 거대한 꽃바구니처럼 보이는 야산들이 흘러가는가 하면 금시 무너질듯 한 바위벼랑이 눈앞에 다가들기도 했다.

보다 새롭고 혁신적인 높이!

그것이 과연 오락회에만 국한된 문제일가? 아니, 아니야…

처녀의 사색은 달리는 렬차와 함께 다시 줄달음치기 시작했다.

흘러간 생활의 한토막이 그때는 미처 느낄수 없었던 많은 뜻과 의미를 안고 가슴에 안겨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눈굽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산굽이를 돌아서며 울리는 은은한 기적소리가 처녀의 마음을 울렸다. 한시바삐 고향에 가닿고싶었다. 한낮무렵이면 렬차는 삼포역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서 내려 반나절길이면 풍덕땅에 들어설수 있다.

아, 내 고향 풍덕땅! 처녀는 뒤로 꽁진 굽실굽실한 파마머리를 매만지며 조용히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떠난지 불과 며칠밖에 안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밑굽을 지지며 서서히 차올랐다. 조수처럼 밀려드는 감정의 멀미에 그는 살그머니 두눈을 감았다.

전국축산부문일군열성자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오는 라순미의 작은 가슴은 고향에 안고 가는 크나큰 선물로 하여 한껏 부풀어있었다.

이번 열성자회의를 통하여 그가 받아안은 충격은 이루 말할수없이 컸다. 특히 은송목장 염소분장 책임방목공 리옥경의 경험토론은 그를 놀라게 했다. 염소사양관리의 과학화, 현대화, 예상을 뒤집어엎은 젖생산과 새끼생산실적… 염소방목을 전업으로 하는 같은 처녀로서 질투심이 날만큼 그가 돋보였다. 회의일정으로 은송목장을 돌아볼 때는 더욱 그랬다. 얼마전 위대한 장군님을 일터에 모시는 영광을 지닌 은송목장은 그야말로 현대화되고 그 전경이 하도 아름답고 황홀하여 한폭의 조선화를 마주한 기분이였다. 골짜기마다 전개된 현대적인 염소우리, 토끼우리호동들, 가금사들… 갈래많은 골짜기와 등성이들마다에 구름처럼 뒤덮인 하얀 염소떼들… 정문 량쪽에 커다란 우유통을 든 염소조각이 서있는 젖가공실이며 먹이가공공장, 수의치료실, 콤퓨터조종실 등 각종 건물들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했던가. 마을앞을 흐르는 산촌의 내물은 금시 흰천을 잠그면 파란물이 들만큼 맑고 푸르렀고 무성한 숲에서 우짖는 새소리는 자기들의 일터를 자랑하고싶어하는 방목공청년들의 노래소리처럼 들려왔다. 그것은 하나의 교향악이였다. 메―에, 메―에 겨끔내기로 울리는 방목지 염소들의 울음소리,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소리, 방목지에 넘쳐나는 청년들의 랑만에 넘친 웃음소리, 노래소리…

순미는 그 모든 선률에 귀를 강구며 자기가 나서자란 고향 풍덕에 대해 생각하였다.

최전연으로 뻗은 도로를 옹위하듯 량옆으로 솟은 구릉마다에 넓고 푸른 방목지가 펼쳐져있는 아담한 마을, 예로부터 바람이 세차고 눈비가 많이 오는것으로 하여 그 이름도 풍덕이라 부르는 고장이다. 라순미는 지금껏 작업반원들과 함께 고향 풍덕땅을 그 어느곳보다 살기좋고 아름다운 고장으로 꾸리기 위해 아글타글 노력해왔었다. 일년 삼백륙십오일 쉬임없는 전선시찰의 길에 계시는 어버이장군님께서 아름답고 살기 좋은 무릉도원으로 전변된 우리 고향땅을 바라보시며 순간이나마 피로를 푸시게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것은 라순미 하나만이 아닌 청년염소작업반원모두의 념원이고 소망이였다. 그이상 더 바랄것이 무엇이랴. 그 숭고한 지향에 받들려 풍덕땅은 최근 몇해사이에 몰라보게 달라졌다. 마을웃쪽에 자리잡고있는 청년염소작업반은 오고가는 길손들조차 무심히 지나치지 않을만큼 번듯하게 꾸려진것으로 하여 군적인 모범작업반으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염소우리호동들의 대보수, 작업반구내의 생산문화, 생활문화, 방역울타리의 갱신, 방목지의 정리… 참으로 아낌없는 땀이 거기에 깃들어있었다. 그러나 은송목장에 비하면 우리는 아직…

라순미는 무거운 자책감에 모대겼다. 어째서 그렇게밖에 일하지 못했을가, 은송목장 청년들처럼 목표를 높이 세우고 일했더라면 우리도 지금쯤은…

라순미는 가장 값있고 보람있게 보냈다고 자부했던 자기의 청춘시절에 대해, 고향 풍덕땅에 바쳐온 헌신과 사랑에 대해 다시 돌이켜보지 않을수 없었다. 부끄러웠다, 더없이 부끄러웠다.

(아 고향아, 이 딸을 용서해다오. 그리고 믿어다오. )

처녀의 심장은 어느덧 새로운 결심과 비상한 충격으로 세차게 높뛰고있었다.

그의 마음은 렬차를 앞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쯤 방목지의 풀들은 더 푸르러졌겠지. 그리고 동무들은… 제일먼저 떠오른것은 그사이 작업반사업을 맡아안고 팽이처럼 돌아치고있을 기술원 정윤심의 모습이였다. 감정이 풍부하고 정열적인 성격의 소유자, 무슨 일이나 끝장을 볼 때까지 해내고야마는 기질이다. 얼마나 힘들었을가, 하지만 종선동무가 곁에 있으니 한결 마음이 든든할거야. 그들은 한달전에 결혼한 사이였다. 말수가 적으면서도 맡은 일을 수걱수걱 해제끼는 신종선에 대해서는 언제나 오빠처럼 믿음이 간다. 전국근로자들의 노래경연에 참가할 희망과 포부를 안고있는 류옥련은 오늘도 염소떼와 함께 산판을 누비면서 그 고운 목청으로 노래를 부를것이다. 고향에 대한 맑고 아름다운 노래소리가 귀전에 들려오는것만 같다. 이따금 그 처녀를 시까스르기 잘하는 김태식은 여전히 자기의 기지있는 해학과 롱담으로 청년들을 웃길것이다. 애젊은 방목공들인 송순애, 리경칠이들은 또 어쩌고있는지. 늘 그러하듯 티각태각 다투고있지나 않는지… 보고싶었다. 한시바삐 만나 가슴속에 용암마냥 끓고있는 이 심정을 콱 쏟아놓고싶었다. 그리움에 충만된 라순미의 눈앞으로는 한 청년의 모습이 불쑥 안겨들었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두눈이 번쩍이는 사색형의 청년이다. 까닭없이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니, 까닭이 있었다.

그가 회의차로 떠나오기 며칠전에 나타난 청년, 대학을 졸업하고 청년염소반에 현실체험을 왔다는 청년이였다.

안홍진… 아직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수 없다. 다만 그의 눈에 순간적으로 어렸던 실망의 빛이 잊혀지지 않을뿐이다. 어찌 눈빛뿐이랴, 그가 한 말이 가슴에 박힌 파편쪼각마냥 쓰라린 아픔과 고통을 주고있었다.

《어쩐지 허전하군요. 작업반을 꾸릴려고 애를 많이 쓴것은 알리는데… 하지만 너무 협소하고…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면 무엇인가 탁 트인감이 없습니다. 높은 목표를 점령하자면 시대의 정신과 안목, 그에 따른 피타는 탐구와 창조가 필요한게 아닐가요?》

의미가 깊은 말이였어. 그래서 난 그 순간에 심장이 비틀리우는듯한 아픔을 느꼈던거야. …

사실 라순미는 그때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자기들이 이룩해놓은 창조물을 몇마디 말로 부정해버리는듯 했던것이다. 마치 한폭의 명화에 깃든 화가의 노력과 탐구, 정열에는 아랑곳없이 제멋대로 평가하고 결론하는 관객처럼 희떠워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라순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홍진동무, 동무는 나에게 참으로 귀중한 말을 해주었어요. 그 말의 의미를 그때는 미처 몰랐댔어요. 동문 속으로 얼마나 나를 비웃었겠나요.

라순미는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우중충한 산발들이 렬을 지어 흘러가고있었다. 어느 역을 가까이 하는지 렬차의 기적소리가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그 소리도 고향으로 향한 처녀의 사색을 깨뜨릴수 없었다.

그 동문 우리 청년염소반에 나타난 첫날 목에 방울까지 단 우량종염소 두마리를 앞세우고 왔었지… 혹시 그 동무에게 우리 염소작업반을 개변시킬 요란한 계획이라도 있는게 아닐가? 그러면 많은 도움을 받을수 있을텐데…

라순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현실체험을 나온 사람이였다. 언젠가는 풍덕땅을 떠나갈 사람이였다. 고향을 더 잘 꾸리고 시대의 높이에 올려세워야 할 주인은 다름아닌 풍덕땅 청년들, 청년염소반원들이였다.

라순미의 가슴은 어느덧 불도가니처럼 활활 끓어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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