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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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강의 지하조직은 밀약을 어김없이 지켰다. 닷새후부터 그들은 원군물자를 범골치기의 숯구이막으로 감쪽같이 운반해왔으며 범골과 회암골의 갈림목에 서있는 진대나무밑둥을 세번씩 거듭 쳤다. 그것은 약속된 암호였다.

괴괴한 정적이 흐르던 깊은 골안의 희푸르스름한 새벽대기를 울리며 메아리치는 그 울림소리는 멀리 떨어진 밀영의 잠복초에까지 간간히 들려왔다.

덩- 떵- 덩-

잠복초의 대원들은 매번 화닥닥 놀라 뛰여일어났으며 날듯이 밀영으로 뛰여올라가 원군물자의 도착을 알리였다. 련이어 밀영에 도착하는 쌀, 소금, 물고기, 세수수건, 비누 등 원군물자들은 대원들을 기쁨에 설레이게 하였다. 원군물자들속에는 약간의 신문과 잡지들을 싼 꾸레미도 끼여있었는데 쌀이나 신발이 아닌 그것들은 대원들의 주위를 별로 끌지 않았다.

모진 기근과 온갖 궁핍에 시달려온 대원들은 끼니마다 배가 든든하게 먹게 되고 새 장갑이며 신발까지 받아안으니 기쁨에 겨워 어찌할바를 몰라하면서 참모장의 수완과 용단, 활약에 대하여 찬탄의 말들을 하였다.

한명찬은 원군물자들이 도착하여 모두가 기뻐하는 현실을 보면서도 이전의 불안감에서 벗어날수 없었으며 어찌 생각하면 자기가 심장이 크지 못한탓으로 너무 편협하고 극단적으로 생각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오랜 혁명경력을 가지고있으며 높은 위치에 있는 참모장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경험자로서 자기보다 훨씬 리성적으로 사리에 맞게 생각하고 판단할줄 아는 지휘관인데 그의 의사에 내놓고 도전했으니 얼마나 교만하고 경솔한가 하는 뉘우침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한명찬은 불안감을 다 털어버리고 참모장앞에 사죄하고싶은 충동을 하루에도 몇번씩 느꼈다.

참모장이 새 신발을 던져주며 동무도 하나 신으라고 할 때에는 얼굴까지 확 달아올랐다.

그러나 참모장은 소인의 작은 가슴에서 끓고있는 자존심의 발작이나 번민따위에는 아랑곳없이 대범하게 벙글거리면서 원호물자들을 받아안고 기뻐하는 대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동무들, 보라. 인민들은 우리 사령관동지와 우리 혁명군이 조국을 반드시 광복하리라는것을 굳게 믿고있기때문에 이런 성원을 보내고있다. 이런 인민들이 있는 한 왜놈들의 봉쇄책동도 실패를 면치 못할것이다. …

밀영에서 누구누구 해도 제일 기쁘고 신이 난것은 연미숙이였다.

우선 끼니때가 오면 가슴을 조이며 되박으로 쌀을 몇번이고 되여보던 일이 없어지고 쌀을 푹푹 퍼내여 밥을 짓게 된것이다. 소금을 아껴 산나물국마저 싱겁게 끓이던 일이 옛일처럼 되였으며 찬거리걱정도 별로 하지 않게 되였다.

그는 원호물자로 들어온 언 돼지고기며 바다물고기들을 물에 담그었다가 손질할 때면 저도 모르게 코노래까지 나왔다.

어느덧 녀대원의 볼에는 홍조가 타오르고 누구한테나 인사할적마다 눈부터 먼저 웃게 되였다.

그리고 간혹 림수산참모장이 작식터에 들어오면 전에없이 생동하게 빛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참모장은 별로 반기는 기색도 없이 뚝한 얼굴로 작식터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모든게 흔해졌다고 망탕 랑비하면 처벌할테요라고 짐짓 으름장을 놓기도 하였다. 그러면 녀대원은 너무 행복하여 두손으로 화끈한 뺨을 싸쥐며 《엄마, 어쩌나!》 하고 신음소리 비슷하게 속삭이였다.

설명설을 며칠 앞둔 어느날에는 지하조직에서 설을 쇠라고 찹쌀과 돼지고기를 비롯한 명절용식료품들을 보내왔다.

그날 연미숙이 샘터에 내려갔다오니 부뚜막에 병들을 꽃보자기로 싼 꾸레미가 놓여있었다. 처음에 그는 인민들이 보내온 콩기름이나 간장병들이겠지 하고 무심히 여겼는데 그 하르르한 꽃보자기가 자꾸 눈길을 끌었다. 보라색바탕에 점점이 찍힌 흰 코스모스꽃무늬들… 보라색의 대지에 휘뿌려진듯 한 그 활짝 핀 꽃송이들은 미소를 머금고 무엇이라고 끝없이 속삭이는듯 했다.

연미숙은 그 꽃보자기를 얼른 풀어 어깨며 앞가슴에 대여보다가 빨찌산생활에서 까마득히 잊었던 청춘의 열정과 희열이 가슴터지도록 안겨와 그 자리에서 한바퀴 돌아보는데 널문이 벌컥 열렸다.

녀대원은 소스라쳐 놀라서 홱 돌아봤다.

문틀이 버그러지도록 가득차서 흘러드는 눈부신 해빛을 등지고 뚜벅뚜벅 걸어들어오는 꺼먼 그림자… 참모장이였다.

그는 뚝한 얼굴로 부뚜막의 병들을 여겨보는가싶더니 거칠게 소리쳤다.

《이건 왜 여기다 이렇게 놓았소? 모두 구경하라는거요, 엉? 치우든지… 밖에 내다 팽개치오!》

연미숙은 그것들이 술병이란것을 비로소 깨닫고 어쩔바를 몰라 그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부릅뜬 눈, 이그러진 얼굴…

《동무 방에 들어가 일을 좀 보겠소.》 하고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거침없이 안방문을 열었다.

그는 문서보따리같은 시꺼먼 보꾸레미를 옆구리에 끼고있었다. 참모장이 방안으로 들어가고 사이문이 닫기자 온몸이 고드름처럼 얼어붙었던 연미숙은 호- 한숨을 내쉬였다.

저녁녘에 그날 풍기인 대원 서기활이 작식터로 달려들어와 숨이 턱에 닿아 말했다. 오늘 밤부터 참모장동지가 여기서 묵으며 중요한 일을 본다, 한명찬소대장동지의 지시인데 동무는 참모장동지한테 방을 내드리고 소대장방으로 옮겨오라고 했다, 그리고 소대장동지는 우리와 함께 자게 된다고 꼬리를 달았다.

《내 방을?…》

《참모장동지한테 제일 따뜻하고 조용한 방을 내드리자는거요.》

연미숙은 머리가 핑 돌아가는것 같았다.

이튿날부터 녀대원은 작식터에서 일하면서도 안방에 있는 참모장의 존재에 대하여 한순간도 잊지 않고 마음을 쓰게 되였다. 중요한 일이란 무엇일가. 그의 노여움을 샀으니 어쩌나. 어떻게 하면 그 노여움을 풀어드릴수 있을가. 아, 무엇때문에 그까짓 무늬에 정신이 팔렸던가. … 그래서 병들이 다 드러난것도 알지 못하고… 왜 눈치가 이렇게 무딜가. … 허리를 굽히고 그릇들을 닦으며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저도모르는 사이에 눈앞이 흐릿해졌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손등으로 쓸어올리고 이마며 코등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는척 하며 눈을 빗씻었다. 가마목의 병들을 장작가리뒤에 숨겨놓았는데 참모장이 알면 더 노하지 않을가 하는 불안감도 들었다. 그는 밖에 나가 그 병들을 품속에 감추어가지고 돌아와 조용히 안방문을 열고 방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방안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하고 헐어빠진 구름노전바닥에 일본과 만주의것이 분명한 신문과 잡지들이 잔뜩 널려있었는데 그속에 웅크리고 앉아 머리를 싸쥐고있는 참모장은 바위돌로 굳어진듯 까딱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신경이며 모든 감각이 마비된듯 인기척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녀대원은 더럭 겁이 나 사이문을 도로 닫으려다가 사뿐 구들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숨을 죽이고 벽에 붙어서 날렵하게 안으로 들어간 다음 방구석에 병들을 소리없이 꺼내놓고 그우에 보자기를 덮었다.

그리고는 어떻게 뛰여나왔는지 몰랐다.

연미숙이 부엌아궁이에 장작개비를 더 밀어넣으며 불을 때다가 일어서는데 사이문이 왈칵 열리며 참모장이 뛰여나왔다. 확 풍겨오는 술냄새…

녀대원은 놀라서 주춤 물러섰다가 얼결에 허리를 굽혀 인사하였다.

참모장도 놀란 기색이였다.

《아-니, 아직두 여기서 뭘하오?》

《…》

《일이 끝났으면 인차 병실에 갈것이지. …》

《방을 좀 깨끗이 거두고…》

《음…》

그리고 참모장은 밖으로 나갔다.

연미숙은 얼른 방안으로 들어갔다. 숨이 막히게 자욱한 담배연기속에서 꽁초가 무드기 쌓여있는 재털이를 방구석에 치워놓으며 무슨 담배를 이렇게 많이 피울가, 이전에는 그닥 즐기지도 않는것 같더니…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방바닥을 쓸고 걸레질을 한 다음 구석쪽의 침구들을 정돈하다가 제일 밑에 깔린 낡은 모포가 너무 되는대로 개여져있어 그것을 툭 쳐들었다. 모포속에서 무슨 잡지들과 신문들이 와르르 쏟아져내렸다.

녀대원은 참모장의 생활비밀이 터져나온것 같아 기겁하여 주춤 물러섰다. 그러나 나이가 나이였던만큼 호기심이 동해 쪼그리고앉아 인쇄잉크냄새가 류다른 향기처럼 풍겨오는 희한한 표지의 일본잡지들과 일본과 만주의 신문들을 뒤적여보게 되였다. 담배불에 구멍이 뚫리고 담배재가 묻어있는 신문이 이상하게 눈길을 끌어 그것을 꺼내 펼쳐보는데 대서특필한 기사제목이 망막에 날아들었다.

《중공의 공비 군장 양정우 자살!》

연미숙은 화들화들 떨리는 가슴으로 기사내용을 더듬어봤다. 황군의 대대적인 포위공격으로 군의 기본력량을 소멸당한 양정우군장이 북방으로 패주하다가 몽강현의 무명고지에서 추격대에 다시 포위, 최후의 혈전, 측근호위병들이 다 쓰러지자 진퇴량난의 함정에 빠진 양정우군장 권총자살… 일쏘관계가 바야흐로 호전되는 때 황군에 끝까지 저항한 양정우의 죽음이야말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자의 희비극적인 운명이 아닌가. …

연미숙은 두손으로 볼을 싸쥐며 신음소리를 내였다.

《아-》

양정우군장과 참모장의 관계, 군장이 그한테 기념으로 선사한 회중시계, 그것을 늘 자랑으로 여기던 참모장… 그리고 아까 자기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 그가 바위돌처럼 굳어져 인기척도 전혀 느끼지 못한것이 리해되였다.

(아, 얼마나 큰 타격을 받았으면!…)

연미숙은 가슴이 저려들며 그가 측은해졌다.

 

×

 

그때 림수산은 병실아래쪽 훈련장의 숲속에서 한손으로 나무그루를 짚은채 고개를 떨구고 서있었다. 양정우군장이 자살했다는 기사를 읽은 다음 작식터의 그 비좁은 안방이 무덤속처럼 느껴져 뛰쳐나와 발길이 가는대로 정신없이 돌아치며 비분을 터뜨리다가 멎어선것이다.

바람 한점 없이 숲속은 고요한데 나무가지들사이로 흘러드는 희푸르스름한 달빛이 눈판을 허옇게 밝혔다. 나무와 바위, 별들과 빙하처럼 얼어붙은 하늘의 은하수도 모두 숨을 죽이고 그의 가슴이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듯 했다.

(양정우군장은 권총으로 제 가슴을 쏘기전에 무엇을 생각했을가. … 후회와 가책은 없었을가. … 당신은 항일전의 전기간 주관적으로는 혁명에 얼마나 충실했는가.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얼마나 막대한 해를 끼쳤는가. 부대들을 와해, 괴멸에로 이끌고 대원들과 나어린 호위대원들까지 다 죽이고 자기도 죽고…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자의 운명! 왜놈들의 평가… 적의 평가이지만 그 평가에 일리는 있지 않는가. … 우리 사령부로 찾아왔던 탄장대리, 당신이 총애한 호대걸은 지금쯤 무순탄광이나 안산제철 로동계급속에 들어가 반일운동을 지도할지도 모른다. 그는 환경변화에 적응했으니까. 당신은 학식도 높고 혁명경험도 많은데 어째… 어째서 무장투쟁으로만 나가는가. 우리가 혼자힘으로 어떻게 관동군을… 대일본제국을 이기는가. 당신의 비극적인 운명이나 모든 불행의 화근은 쏘련이 일본과 손을 잡으려는데 있다. 쏘련은… 쓰딸린은 우리를 무시하고 쏘련의 리해관계만 중시하고있다. 아, 이 세상에는 정의가… 과연 정의가 있는가. … )

림수산은 어디라없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갔다.

(이제 우리 운명도 저 양정우처럼 되지 않겠는가. 쏘일협약이 이루어지게 되면 관동군이 총력량을 우리 혁명군에 집중할터이고 그때는…

우리 주력군이 돈화에서 관동군에 포위될수도 있고 저 목단령을 다시 넘어 남하하다가… 봄에… 봄에 사령부와 주력부대가 과연 여기로 나올수 있겠는가. … 망상이 아닌가!…

화라즈에서 론의가 있었을 때 사령관동지한테 왜 더 솔직히 터놓고 말하고 주장하지 못했던가. …

우리 사령부에 찾아왔던 그 탄장대리는 말했지. … 환경변화에 적응못하는 생명체는 죽기마련이다.

죽어야 한다. … 아, 아,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

림수산은 가슴에서 불이 일고 목안이 타들어 눈을 쥐여 입안에 마구 쓸어넣고 와작와작 씹었다. 입술이며 볼에 눈이 허옇게 묻었다.

얼마전부터 그는 누구한테도 하소할수 없는 그 무서운 불안감과 번민이 엄습하면 줄담배를 피우고 술까지 마시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 무엇으로써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불면증에 허덕이게 되자 아편까지 생각하게 되였다. 어디선가 아편담배를 피우면 정신이 몽롱해져 만시름을 잊게 되고 인생이 즐겁고 태평스러워져 깊이 잠들수 있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기때문이다.

그가 돌아서려는데 병실쪽에서 서너명의 대원들이 부르는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인민주권을 세우자 붉은 주권을 세우자

                   로동자 농민의 피값에 인민주권을 세우자

                   …

 

림수산은 고개를 수굿하고 그 노래소리를 유심히 들었다. 유쾌한 목소리들이였다. 이밤, 절해고도나 같은 밀영의 밤, 저렇게 노래를 부를수 있는 그들이 부럽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했다.

(… 저런 락관주의는 무지에서… 아무것도 모르는데서 나오는것인가. … 아니… 아니…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저 목소리를 들어보라. 저들은 분명히… 분명히… 사령부와 주력부대가 여기로 온다는걸 믿고있다. 그래서 저렇게 노래까지 부르는데… 아, 참모장인 나는?!…)

그는 전기에 닿은듯 와뜰 놀랐다. 주먹으로 나무그루를 치고는 쏟아져내리는 눈가루의 폭포속을 뚫고나가 병실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자기를 여기로 파견할 때 사령관동지께서 아침식사를 같이하며 술잔까지 권하시던 일이 눈앞에 번개쳤다. 그리고 웬일인지 권영벽의 얼굴이 떠올랐다. 옆의 잡관목덤불쪽에서 버스럭소리가 나더니 웬 그림자가 달려나와 앞을 막아섰다.

한명찬이였다.

《참모장동지, 야- 참, 어디 갔댔습니까?》

그 물음이 다른 뜻으로 들려 가슴이 서늘해지며 대답이 선뜻 나가지 않았다.

《…》

《그냥 찾았습니다.》

《이자 노래를 부른게 누구요?》

림수산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예?… 노래요?… 서기활이하구 장득범이랑… 저, 그런게 아니라…》

한명찬은 변명조로 대답했다.

《득범동무가 설명절이 오니 고향생각이 난다면서 노래를 떼서 같이들 부르게 됐습니다. 참모장동지, 래일모레가 설인데 원호물자도 많이 들어왔겠다, 대원들 사기도 높일겸 떡이랑 치구 잘 쇠보는게 어떻습니까?》

림수산은 순간에 가슴이 녹아 그의 팔굽을 철썩 때렸다.

《그래서 날 찾았나? 좋-은 의견이요. 본때있게 쇠자구!》

이튿날 아침부터 작식터는 설명절준비로 흥성거렸다. 절구질소리, 칼도마소리, 기름이 끓는 소리… 가마들에서 피여올라 천반밑에 뽀얗게 서려도는 뜬김밑에서 분주히 돌아치는 작식당번들… 그들은 설명절기분에 들뜬 나머지 안방에 있는 참모장의 존재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고있는것 같았다. 그러나 연미숙은 한순간도 그에 대해 잊지 않고 마음을 썼다. 그한테 위로의 말, 비감을 덜수 있는 말이라도 해주고싶었다.

그날 밤 연미숙이 사이문을 열고 일이 끝나 돌아간다고 인사하니 참모장은 랭랭한 눈길로 흘깃 치떠보더니 보던 신문을 옆으로 활 던져버렸다.

《동무는 나를 무얼로 아는가. 무슨 봉건상투쟁이대감님쯤으로 아는가, 엉?! 일이 끝났으면 그냥 돌아갈것이지 원, 이거야 참!…》

연미숙은 무안하고 서러워 병실로 달려가 자리에 몸을 던지고 모포를 뒤집어썼다. 새벽녘에 잠을 깼을 때에야 혹시 자기가 침구들을 정돈하며 일본의 신문, 잡지들을 본것을 눈치챘기때문이 아닐가, 차라리 정돈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귀틀집의 한 병실에 설음식들을 차려놓았다.

아래목 상좌에 참모장이 앉고 그앞에 대원들이 두줄로 주런히 마주앉았다. 오후부터 장작불을 많이 때여 구들은 뜨끈뜨끈하고 방안공기는 훈훈하였다. 귀틀집 여기저기에 초불까지 켜놓아 은근한 그 불빛이 제법 명절밤의 운치를 돋구었다. 보기에도 구미가 당기는 설음식들… 대원들은 기쁨과 즐거움에 겨워 설레였다.

그 자리에 한명찬이 얼굴만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저녁녘에 특별경비를 조직해놓고 좀전에 솔선 순찰하러 나갔던것이다.

배식당번들이 제 흥에 떠서 벙글거리며 모자라는 음식이 없나 하여 두리번거리는데 참모장이 그들에게 어서 자기 자리들에 와서 앉으라고 손짓하였다. 두 배식당번이 뒤줄의 이빠진 자리를 메꾸는데 연미숙이 들어와 해쓱한 얼굴로 좌중을 돌아보며 걷어올렸던 팔소매를 풀어내렸다. 앞줄복판에서 서기활이 그에게 자기네 줄 웃머리쪽을 가리키며 저기로, 저기가 자리라고 알려주었다. 연미숙은 참모장자리에서 가까운 거기로 가지 않고 애써 웃어보이며 뒤줄의 말석에 가 쪼그리고앉았다.

자리가 정돈되자 참모장은 엄숙한 얼굴로 대원들을 둘러보며 어지간히 흥분된 목소리로 말하였다.

《동무들, 이제 새날이 밝으면 설명절이요. 동무들이 혁명군에 참군하여 처음으로 맞는 설이요. 아마 이밤 고향의 부모님들도 떠나보낸 자식들 생각에 잠들지 못할거요.

그 부모님들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마침 원호물자도 들어와서 약소하나마 이렇게 차렸으니… 많이들 드시오. 자, 어서 들자구!》

모두 선뜻 들지 못하였다. 고개를 수굿하고 코물을 들이키는 대원들이 한둘이 아니였다.

참모장도 가슴이 뭉클해지는지 갈린 목소리로 말하였다.

《자, 이러지 말구 들자구. 우리 어디 가서나 이밤을 잊지 말자구. 이 참모장도 욕하면서. 허허… 자, 자, 들자구!》

모두 말없이 음식들을 들기 시작하였다. 숟가락소리, 그릇소리, 음식먹는 소리만 좌중에 흘렀다.

이윽고 참모장은 취기가 올라서인지 광기가 번뜩이는듯 한 눈으로 대원들을 둘러보다가 방자하게 소리쳤다.

《들자. … 사람이 세상에 났다가 이런 밤도 있어야지. 넨장… 래일은 오락회도 열고 윷놀이도 하고 장기시합도 벌릴가 하네. 속에 있는 소리두 하고-》

앞줄끝에서 한 대원이 그를 빤히 지켜보다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이제 여기로 사령부와 주력부대가 오게 됩니까?》

《오지 않구. 오오!》

《언제쯤?…》

《그날은 나두 몰라. 허허… 그날이 빨리 오게 하자면 우리 여기서 우선 훈련을 잘해서 야간기습전, 매복전, 유인전, 식량공작, 정치공작… 어떤 임무나 척척 수행하는 만능의 유격대원이 돼야 해. 그래서 주력부대의 군량도 장만해놓고 국내조직과의 련락선도 잘 닦아놓고… 그러면 오지, 온다니까. 말하자면 우리는 사령부의 별동대란 말이요!》

《히야- 별동대!》

참모장은 문득 비장한 표정, 갈린 목소리로 뇌이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 우리들중 살아남는 사람들은 이 밤을 잊지 않구 회억할거네. 자, 들자구, 들어. 떡이랑 음식들이 어떻소?》

《맛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참모장동지, 감사합니다!》

림수산은 좀 당황해하며 손을 내흔들었다.

《아니 아니, 동무들, 사실 말이지 감사는 내가 아니라 저기 앉아있는 저 작식대원동무가 받아야 하오. 동무들의 어머니나 누이들 심정으로 이런 기쁨, 이런 자리를 마련하느라고 작식터에서 묵묵히 수고한 연미숙동무가 받아야 하오.》

그리고는 명상에 젖은 눈길로 허공의 한점을 응시하다가 감회깊이 말하였다.

《아… 예전에 우리 어머님이 하던 말이 생각나누만. 내인들한테는 제나름의 손맛이 있는데 그 손맛에 따라 같은 감으로 만든 음식도 맛이 다르게 된다고 했소. 그리구 그 손맛은 마음씨에서 나온다고… 때문에 마음씨 고운 내인이 만든 음식치고 달지 않은게 없다누만. 허허…》

모두들 박수를 쳤다. 그들의 눈길이 아래쪽 구석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연미숙에게로 쏠리였다.

바깥공기는 푸근하였다. 함박눈이 한송이 또 한송이 소리없이 날아내렸다. 그 무슨 축복인듯이… 귀틀집안에서 들려오는 박수소리, 웨침소리, 웃음소리… 그 소리들이 고막을 두드리는가싶더니 아스런히 멀어져갔다.

귀틀벽밑에 쪼그리고앉아있는 연미숙은 두손으로 확확 달아오르는 볼을 싸쥐였다. 행복감에 겨워서가 아니였다. 참모장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추워올리는 말들에 의분같기도 하고 설음같기도 한것이 터져올랐으며 모욕감과 함께 아리숭한 수치심까지 들어서였다. 어느때에는 저러고 오늘 밤엔 또 이러고… 사람을 뭘로 여기는가? 사람을 턱없이 미워하며 배척하고 턱없이 추어올리며 끌어당기고… 상급이면 사람마음을 제멋대로, 제 기분대로 주물러대도 일없는가, 떡반죽처럼… 흙반죽처럼… 하염없이 날아내리다가 녀대원의 머리칼이며 얼굴에 붙은 눈송이들이 순간에 녹아 볼을 따라 눈물처럼 방울방울 굴러떨어졌다.

연미숙은 눈송이들의 그 신선하고 상쾌한 기운에 홀연 정신이 들며 소스라쳐 놀랐다. 아니, 내가 왜 이렇게 토라졌는가. 왜?… 왜?… 혹시 저 말들에 진심이 있는게 아닐가. 그럼 험악하게 대하며 배척한건… 그건 무슨 까닭인가. … 이 밤이 새면… 묵은 해에건 이밤에 결산해야 한다. 이밤에… 끝나면 찾아들어가 해명하자. 아퀴를 짓자. 깨끗이…

출입문으로 대원들이 우르르 밀려나왔다.

《야- 눈이 온다-》

《함박눈이구나-》

그속에서 포식에 흐믓해진 대원 몇이 취한 목소리로 노래까지 불렀다.

 

                         …

                          용진 용진 나가세

                          용감스럽게

                          …

 

참모장이 앞을 막아섰다.

《헛허… 미숙동무, 왜 먼저 나왔소?》

《…》

《저쪽밀영에서 동무한테 보내는게 있소. 일이 끝나면 피뜩 들리오.》

실무적인 담담한 목소리였다.

 

×

 

참모장은 다른 말이 더 없이 물러갔다.

성글게 날아내리는 눈발들의 희뿌연 장막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뒤모습을 바라보던 연미숙은 웬일인지 문득 가슴속 격랑이 잦아들고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듯 했다. 그리고 고역에 시달리고난 뒤처럼 다리맥이 어디론가 빠져나가 무릎까지 후들거리며 주저앉고싶었다.

작식당번들의 도움을 받아 부엌일을 서둘러 끝낸 연미숙은 머리며 군복차림을 단정히 하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사이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림수산은 아래목에 올방자를 틀고앉아 방에 들어선 녀대원에게 거기는 바닥이 찬데 따뜻한 안쪽에 들어와 앉으라고 일렀다.

연미숙은 숫저운 미소를 머금고 한발자욱쯤 더 들어서서 조심스럽게 앉았다.

림수산은 군복저고리 웃단추 두세개를 끌러놓으며 오늘 정말 수고했다고, 대원들이 모두 좋아하니 나도 기쁘다고 하면서 생활상 애로되는 문제들이 없느냐고 이것저것 물었다.

그리고는 좀 엄엄한 얼굴로 옆에 놓인 자그만한 보꾸레미를 들어 그의 무릎앞으로 훌 밀어주었다.

《옜소. 재봉대밀영동무들이 미숙이앞으로 보내는거요.》

《?…》

《풀어보오.》

성급히 보자기를 풀어보니 보슴털이 보르르한 연분홍모실세타를 차곡차곡 접어놓은것이였다.

그는 너무도 뜻밖이여서 놀란 눈으로 참모장을 쳐다보았다.

《아니, 이런게 어디서요?!…》

《마음에 들겠는지… 잘 보라구.》

연미숙은 접었던 세타를 무릎우에 펼쳐놓고 정신없이 쓸어만져보고 여기저기를 쥐여도 보았다. 연분홍의 화려한 색갈과 말할나위없이 부드러운 감촉에 숨이 멎는것 같았다.

《아이. 정말 이런게 나한테 차례지다니. …》

참모장은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그를 여겨보다가 입을 열었다.

《뭐 별로 대단한것도 아니요. 저 신경이나 할빈백화점같은데 가면 흔해빠진거요. … 지하조직에서 재봉대밀영에 보낸 원호물자들속에 들어있었소. 아마 우리 녀대원들이 지방공작에 나갈 때 입으라고 보냈겠지. 그걸 보니 미숙이 생각이 나서… 사시장철 껄껄한 토목천에 감겨있는게 불쌍해서 한번 군벌주의를 써봤지. 내라! 이건 누구도 못다친다! 하구 말이요. 헛허허…》

연미숙은 눈굽이 저려들어 고개를 숙였다.

《아이, 어쩐담…》

《됐소. 입어보라구. 한번 내앞에서 입구 뽐내보라구!》

연미숙은 기쁨에 들뜬데다가 참모장이 친삼촌이나 맏오빠처럼 여겨져 세타를 얼른 머리우에 들어 입으려고 했다.

《아니… 아니… 넨장, 상의를 벗구… 내 돌아앉을가, 응?》

그리고는 벽쪽으로 돌아앉아 담배를 피워물었다. 이윽고 등뒤에서 신음 비슷한 탄성이 올랐다.

《아이, 꼭 맞네.》

천진한 웃음소리…

림수산은 돌아보았다.

은근한 연분홍의 채광에 휩싸인 처녀의 눈부신 자태가 가슴이 뭉클하도록 안겨드는 순간 그는 《야, 좋구나-》 하며 정신없이 뛰여나가 그 눈부신 존재를 번쩍 안아올렸다.

처녀는 기겁하여 남자의 가슴을 떠밀며 버둥거리다가 방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남자는 필사적인 반발에 기가 꺾인듯 황황히 밖으로 뛰여나갔다. 그 바람에 등불이 꺼졌다. 어둠…

연미숙은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화들화들 떨다가 세타를 와락와락 벗어 내동댕이쳤다. 단숨을 몰아쉬며 헝클어진 머리를 수습하고 방바닥을 더듬더듬 만지며 군복상의를 찾는데 문이 열렸다.

《누구예요?!》

《…》

《나가세요!… 옷을 입겠어요! 불을 켜구…》

처녀는 가슴이 쿵쿵 뛰는 소리가 머리속에 우뢰치고 손이 떨려 가까스로 등잔에 불을 켜놓았다. 그리고 홱 돌아서니 림수산이라는 남자는 너무 가까이 다가와있었다. 거치른 숨소리, 탐욕의 광기에 이글거리는 눈. …

연미숙은 두팔로 앞가슴을 싸안고 뒤걸음쳐 구석벽에 붙어서며 새된 소리로 내쏘았다.

《나가요!》

그러나 남자는 열기를 풍기며 다가왔다. 얼굴이 해쓱하게 질린 처녀는 벽에 붙어서 앞구석쪽으로 주춤주춤 밀려가고 남자는 덮쳐안으려고 두팔을 내밀며 다가왔다.

《소리칠래요!》

《소리치라! 병실에서 다 달려나오게… 온 세상이 다 듣게… 난… 난 화라즈의 밤부터 생각했어!》

《거짓말…》

《진정이요!》

《집에 아주머니는…》

《저 잡지… 신문들을 봤지?… 난 한잠도 못 자. 괴로워… 분통이 터져… 양정우군장도 죽었어. 미숙이, 날 좀 위로해줘.》

《나가요!》

《에-익!》

미숙은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몰랐다. 정신없이 병실로 달려올라가 자리에 몸을 던지고 모포를 푹 뒤집어쓴 다음에야 남자의 팔이 자기 몸을 우악스럽게 끌어안던 일, 그의 이마를 기운껏 밀어버린 일 등이 떠올랐다. 처녀는 억울함과 수치심 그리고 자기가 불쌍해서 섧디섧게 울다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피터지게 깨물고 부들부들 떨었다.

새벽에 잠자리에서 눈을 뜬 연미숙은 간밤에 있었던 일이 악몽처럼 여겨져 조용히 한숨을 내쉬였다. 그리고 문득 참모장도 남성이며 남자들이란 그 어떤 기분상태에서 간혹 그런 실수를 할수도 있지 않는가, 더우기 인간세상과 멀리 떨어진 이런 적막한 밀영에서는…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만약 이 일이 대원들한테 알려지면 그는 지휘관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며 밀영을 떠나야 할것이다.

연미숙은 이른아침 작식터로 가려고 병실에서 나오다가 한명찬소대장과 마주쳤다.

한명찬은 어느 누구한테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괴로운 얼굴로 그를 지켜보며 참모장이 밤중에 왜 재봉대밀영으로 갔는지 모르겠느냐고 물었다.

녀대원은 해쓱한 얼굴로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분명히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를 말없이 지켜보는 소대장의 눈길을 피하여 황황히 작식터쪽으로 내려갔다.

사흘뒤 오후였다.

연미숙이 샘터에서 밥보자기며 행주들을 깨끗이 빨아 소랭이에 담아가지고 작식터로 올라오는데 병실쪽으로부터 참모장이 웬 사민녀자를 데리고 내려오고있었다.

연미숙은 그를 보자 오싹 전률을 느끼며 멎어섰다. 어디로나 도망치고싶었다. 몸이 물로 될수 있다면 땅속깊이 슴배여들고싶었다.

녀대원은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못박힌듯 서있었다.

웃쪽에서 참모장의 노기 섞인 목소리가 터져올랐다.

《소대장동무가 어디 갔소?… 모르오?》

《…》

《한데 동무는 왜 그렇게 서있소? 올라오오!》

연미숙은 가까스로 발걸음을 떼여 올라갔다.

참모장의 뒤쪽에 서있는 사민녀자가 이쪽을 빤히 여겨보다가 밝게 웃는 모습이 눈결에 언뜻 보였다.

《한명찬동무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소?》

《아까는 병실에 있었는데요.》

《됐소. 우선 서로 인사들이나 하오. 이 동무는 문정금이라고 재봉대밀영에서 작식이랑 돕던 동무요.》

낯선 그 녀자는 한걸음 나서며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스스럼없이 그의 손을 꼭 잡아쥐였다.

손맛이 부드럽고 매우 따뜻하였다. 시원한 눈매며 수수하면서도 복스럽게 생긴 얼굴용모로 보아 성품이 서글서글하면서도 다정다감한 처녀같았다.

참모장은 엄엄한 얼굴로 말했다.

《미숙동무, 일이 너무 고된것 같아 방조자로 데려왔소. 마음에 들거요. 재봉대밀영에서는 모두 보내기 아까와했소. 열렬한 입대청원자요. 동무가 책임지고 유격대원이 될수 있도록 잘 이끌어줘야겠소!》

그리고 참모장은 돌아섰다.

 

×

 

문정금은 작식터의 안방에 자기 배낭과 솜덧저고리를 벗어던져넣은 다음 저고리소매를 걷어붙이고는 작식터안을 날렵하게 돌아치며 연미숙의 일손을 도왔다. 그러면서 자신에 대하여 끝없는 이야기를 하였다.

몽강의 소학교 교원의 외동딸로 태여난 정금은 열세살이 될 때까지 슬픔이라는것을 모르고 자라났다. 공부를 하는데서도 제기던지기, 줄넘기, 숨박곡질같은 장난질에서도 마을의 어느 처녀애한테도 짝지지 않았다. 이쁘장하고 똑똑하며 성미도 서글서글한 정금이를 온 동네가 귀여워하였다. 아버지는 그것이 무등 기뻐 외동딸을 금이야 옥이야 하며 더 알뜰살뜰히 보살펴주었다. 나어린 정금은 행복에 겨워 가슴이 한껏 부풀어올랐다. 그런데 11살때 경찰들이 밤중에 집안으로 달려들어와 아버지를 잡아갔다. 아버지가 학부형들을 선동하여 군자금을 세차례나 모아 독립군에 보내준것이 탄로되였던것이다. 엄마는 눈물로 날을 보내였다. 정금은 양기가 없는 처녀애로 되였다. 움츠러들었다. 늘 겁먹은 얼굴로 길을 걸어다녔다. 2년후 아버지는 감옥에서 옥사했고 그 이듬해 엄마마저 장티브스로 세상을 떠났다. 바람사나운 세상에 의지가지할데 없이 댕그랗게 홀로 남은 처녀애는 목이 다 쉬도록 울다가 먼 산간벽지의 외가켠이 된다는 친척집에 이끌려가서 눈치밥을 먹으며 야학공부를 하였다.

정금은 야학선생한테서 김일성장군님께서 새로운 조선군대를 뭇고 일제침략자놈들과 싸우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야-》 하고 환성을 질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부대가 김일성장군님의 친솔하에 국내에로 진군하여 보천보를 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야학생들모두가 뛰쳐일어나 박수도 치고 만세도 불렀다.

거의 매일이다싶이 혁명군에 대한 새라새로운 소식들이 들려왔다.

어느 하루는 혁명군안에 녀대원들도 많은데 그들은 하나같이 절색의 미녀들이다, 하나같이 총도 잘 쏘고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춘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떠돌았다.

그날 정금은 가슴이 마냥 설레여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자신도 혁명군녀대원이 되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원쑤를 갚고싶었다.

그후 야학선생을 회장으로 하는 조국광복회조직이 무어지고 혁명군에 대한 원호사업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정금은 그 앞장에 섰다.

《… 두달전에 원호물자를 지고 저 고개너머 재봉대밀영에 왔다가 거기 아주 떨어지고말았어요. 거기 재봉대원들은 집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부모님들이 기다리지 않겠느냐 하며 나를 얼리지요. 나는 막 앙탈을 부렸어요. 나한테는 기다리는 부모도 없다, 나는 고아다 하고 왕-왕- 울면서. 호호호… 생떼를 썼지요. 내려가지 않겠다, 여기 있게 해달라,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다 하겠다, 이러면서… 재봉대원들은 내 처지를 알게 되자 내려가라는 말이 점점 없어졌어요. 나는 거기서 힘든줄 모르고 일하다가도 참모장동지만 나타나면 유격대에 받아달라고 졸랐어요, 졸졸 따라다니면서… 그때마다 참모장동지는 그저 듣기만 하고 빙긋이 웃기만 하셨는데 어제는 진중한 안색으로 저하고 담화를 했어요. 나는 이것이 마지막기회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온 이야기며 부모님들의 원쑤를 갚고 나라를 찾고싶은 심정을 죄다 털어놓았어요, 눈물을 흘리면서… 그런데 참모장동지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면서 바로 동무와 같은 동무들이 우리 혁명군에 들어와야 한다! 이러지 않겠어요. 하지만 검열해보고 받는것이 철칙이니만큼 지금 당장 받아들일수는 없다고, 좀 기다리라고 하더니 오늘 나를 여기로 데려왔어요. 참모장동지는 정말 원칙이 강하면서도 인정이 깊고 아는것도 많은분이야요. 이런 참모장동지를 만난게 나한테는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르겠어요. 언니, 그렇지요? 그렇지 않아요?》

《…》

연미숙은 선뜻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가슴이 서늘해져서였다. 그는 행주로 가마뚜껑만 묵묵히 닦았고 작식터의 저쪽구석에서 그릇들을 닦으며 끝없이 이야기하던 문정금은 무엇을 느꼈는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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