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이룰수 없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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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밖 목멱산 남쪽기슭에 자그마한 동네가 있다.

만복이네 집은 산탁의 맨 끝집이다.

낮은 새초지붕아래 코구멍같은 방이 아래, 웃간인데 부엌도 코구멍같이 작다. 손바닥만한 마당가에 낡은 마구간이 있다.

해뜨기 전 이른아침 만복이 아버지는 마구간에서 말을 끌어내다가 말달구지에 메웠다. 그리고 건초를 달구지우에 두툼히 깔고 그우에 멍석을 깔았다.

오늘은 장영실이 동래관청으로 떠나는 날이다.

장영실은 만복의 부축을 받으면서 방문을 나섰다. 병색이 짙은 그의 얼굴은 10년이나 늙어보였다.

장영실이 파직되고 또 사랑하는 안해 숙이까지 죽은것을 보고 정신이상이 되여 집을 나가 어느 산기슭에 쓰러진것을 만복이 기어이 찾아낸 때로부터 한달이 지났다.

만복이네는 장영실을 살려내는데 온갖 지성을 다하였다.

장영실은 바깥출입을 하게 되자 기를 쓰고 동래로 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 몸으로는 못간다고 온 집안이 말리였으나 그를 이겨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만복이 아버지는 장영실의 갈 차비를 하여주는것이다.

《나리님, 이제라도 마음을 돌리시구 며칠만이라도 몸조리를 하시구 떠나시우.》

만복이 아버지가 걱정스러워 하는 말이였다.

《아니오이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가야 할 길이오이다. 상감마마의 어명대로 해야 하리다. … 아버님, 고맙소이다. 다 죽었던 이 사람을 살려주고 치료해주신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겠소이까. … 부디 건강하여 오래오래 사시기를 바라나이다.》

장영실은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만복이 아버지는 깊이 맞절을 하였다.

《나리님, 변변치 않은 달구지라도 준비해놓았으니 타고가시우.》

그리고는 만복에게 긴히 당부하였다.

《너는 나리님을 몸성히 모셔다드리구 나리님이 앓지 않구 일하시거든 집으로 돌아오고 그렇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을 말아라.》

《예, 알겠소이다. 그럼 소자는 나리님 모시고 떠나겠나이다.》

만복이는 눈물 글썽히 부모들앞에 절을 하였다.

장영실과 만복이는 하루에 겨우 50리나 60리밖에 못갔다. 행길이 돌투성이여서 조금 빨리 가면 달구지가 들추고 그때마다 장영실이 신음소리를 내면서 고통스러워하였던것이다. 어떤 때는 기침이 멎지 않아서 고생하다가 피를 내뱉고야 그치군 하였다.

그들은 가고 또 갔다. 장영실의 병세는 수그러들지 않고 더 심해갔다.

따스한 구들에 누워 약을 쓰면서 치료해주어도 효험이 있을지말지 하겠는데 춥고 흔들리는 달구지를 타고 먼길을 가는 사람에게 병이 낫기를 어찌 바라겠는가.

《임자가 이 사람탓에 고생이 막심하네그려. 뭐니뭐니해도 임자보기가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야.》

《원참, 무슨 말씀이니까. 그건 조금도 걱정마시오이다.》

만복이는 장영실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다. 그래서 이 길이 전혀 고생스럽지 않았다. 이보다 더 험하고 힘든 길을 가다가 그를 위해 죽어도 후회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돌투성이길은 언제 가도 끝날상싶지 않았다.

문득 산굽이에서 달구지 하나가 마주 달려나왔다.

달구지앞에는 말을 타고 견마를 잡은 관리 하나가 장히 거드름을 부리며 오고 그앞에서 전배사령이 《에라 쉬― 물러까라, 저리까라―》 하고 길잡는 소리를 웨치며 다가왔다.

그뒤로 호랑이나 사나운 짐승을 산채로 잡아가는 우리처럼 통나무로 간살을 내고 만든 함거 한채가 따라왔다.

그 함거달구지를 창잡이군사들이 에워싸고 종종걸음을 치며 달려오고있었다.

함거에는 김을지와 영아가 갇혀있었다.

영아는 을지의 어깨에 머리를 꼭 대고 저녁노을이 빨갛게 물든 하늘을 말없이 바라보고있었다.

《성덕이 아버지, 이 쇤네가 성덕이 아버지와 함께 죽으면 그이상 바랄것 없소이다. 그저 오라버님이 걱정되고 성덕이가 보고싶어요. 〈엄마〉 하고 부르던 그 소리가 들려오이다.》

《너무 상심말게. 우리가 죽일 놈들은 그만큼 죽이였으니 우리 죽음이 떳떳하네. 그러나 저 리사균놈이 바다에 빠져 죽은줄로 알았는데 살아났으니 마저 죽이지 못한것이 한으로 남았네.》

말탄 량반관리는 장영실이네 달구지가 가까이 마주오자 불호령을 내렸다.

《이놈들, 뉘앞이라고… 길을 비키지 못할가.》

김을지의 손에 바다에 던져졌던 리사균이다.

그는 기분이 흡족하였다. 함거안에 김을지부부를 붙잡아넣었을뿐만아니라 아산고을왜변도 김을지패당이 눌러버렸지만 자기가 눌러버린것으로 얼마든지 꾸며낼수 있게 되였기때문이다. 왜놈우두머리의 수급도 보란듯이 가지고있는것이다. 또 박대산이도 사로잡았는데 이게 바로 김을지다.

그는 기세등등 또다시 불호령을 내질렀다.

《이놈들, 다리갱이를 꺾어놓아야 정신이 들테냐? 당장 길을 비켜라―》

만복이는 얼른 길섶에 달구지를 내다붙이고 함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공손히 량수거지를 하였다.

함거가 지나갔다. 허나 그 순간에 한쪽바퀴가 만복의 달구지바퀴와 부딪쳤다.

워낙 길이 좁아서 달구지가 서로 어길수 없었다.

리사균은 말채찍을 건공중에 번쩍 들어올려 만복이를 이리치고 저리쳤다.

《이 웬놈의 달구지냐? 냉큼 길아래로 내끌지 못할가.》

장영실은 몸이 아파서 이불을 덮고 새우등처럼 꼬부리고 누워있다가 어떤 놈의 불호령소리에 일어났다.

소리치는 놈을 보니 뜻밖에도 말잔등에 올라앉은것은 리사균이였다.

이놈이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을가. 나를 언제나 해치려들던 놈, 이놈이 이런 꼴을 하고 관노가 되여 내쫓겨가는것을 보고 얼마나 미칠듯이 기뻐하겠는가.

《달구지에 앉은 놈은 또 웬놈이냐. 량반관리가 행차하는데 뻐젓이 달구지에 앉아있어? 이 천하에 죽일 놈!》

리사균이 채찍을 높이 들고 내리치려다가 스르르 내리며 《야, 이것 봐라. 네가 노비로 굴러난 장영실이렷다. 으흐흐… 잘 만났다. 그러니 내손에 다 걸려들었고나. 일거량득이라더니 이번 행차엔 일거삼득이로다.》 하고 입이 귀밑까지 째지게 웃었다. 함거안에서 장영실이라는 소리를 들은 을지와 영아는 깜짝 놀라 나무간살사이로 내다보았다.

아닌게아니라 참말 그처럼 보고싶던 오빠이다.

김을지는 《형님―》 하는 웨침이 터져나오는것을 혀를 깨물고 참았다.

그는 내 죽어도 형님을 구원해내리라 하고 영아에게 눈짓으로 자기 손의 결박을 가리키였다.

마침 함거를 에워쌌던 라장, 라졸놈들이 무슨 큰 구경거리를 만난것처럼 장영실의 달구지곁으로 갔다.

영아는 이 틈을 타서 을지의 뒤손결박오라줄을 이발이 부러지도록 꽉 물고 풀기 시작하였다. 이 오라줄을 제때에 감쪽같이 푸는가 못푸는가에 세사람의 생사가 달려있었다.

가슴이 후둑후둑 뛰였다.

《음, 네가 리사균이가 옳구나. 나를 보니 그렇게도 기쁘냐? 네가 아무리 기쁘기로서니 나를 어쩌지 못한다. 나는 임금의 어명으로 동래로 간다. 거기서 너같은 놈 백이 달라붙어도 만들지 못할 기물을 만들라고 어명을 내리셨다.

내 가는 앞길을 막는 놈은 곧 임금의 어명을 그르치는 역적이다. 그래 길을 낼테냐, 길을 막을테냐?》

장영실은 앉은자리에서 리사균을 준절히 꾸짖었다.

만복이는 장영실의 도도한 기개와 추상같은 호령에 가슴이 후련하였다.

《어…어… 네가 아직도 상호군인줄 알았더냐. 너희 김을지와 장영아는 화적패에 들어갔다가 내 손에 붙잡혔다. 김을지가 박대산으로 변성명하구 양녕의 반당노릇을 한것도 낱낱이 드러났다. 이것을 임금님이 아시게 되면 너를 다시 불러올려 사지를 찢어죽일게다. 여봐라, 저 장영실이라는 노비놈을 당장 묶어 함거에 싣고가자. 세 년놈들이 함거에 함께 실려가는 꼴을 봐야겠다. 어서 묶어라.》

장영실은 함거를 바라보았다. 함거에서도 을지와 영아가 자기를 내다보고있었다.

《성덕이 어미, 애비야―》

장영실은 두팔벌리고 나오다가 달구지밖으로 굴러떨어졌다.

《오라버님―》

《형님―》

김을지는 피타게 부르짖으며 함거의 문짝을 세게 찼다. 문짝이 부서져나갔다.

그들은 이미 손결박을 풀었던것이다.

김을지는 우리밖을 뛰쳐나온 호랑이처럼 라졸 하나를 덮치고 창을 빼앗아냈다.

실로 눈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라장, 라졸들은 얼음판에 넘어진 소처럼 이럴지저럴지 분별치 못하고 리사균이조차 한동안 얼친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더니 무슨 변이 났는지 그때에야 알아차린듯 옆구리에 찼던 칼을 뽑아들며 《여봐라, 저놈을 쳐라.》 하고 칼을 내뻗쳐 김을지를 가리켰지만 그 칼이 후들후들 떨리였다. 그만큼 기겁했던것이다.

라장, 라졸놈들이 《와야―》 하고 앞뒤로 달려들었다. 순간 김을지는 창을 번개처럼 휘두르면서 놈들을 쳤다.

영아도 을지의 창에 찔리워 죽은 놈의 창을 잽싸게 꼬나들고 김을지의 뒤를 막아서서 달려드는 놈들을 족치였다.

놈들은 을지와 영아의 무술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잠간사이에 라장, 라졸들이 다 죽어버리자 리사균은 저 하나만이라도 살아보자고 말머리를 돌리였다.

김을지의 기다란 창이 화살처럼 날아가 리사균의 등을 꿰질렀다. 리사균이 말잔등에서 떨어져죽었다.

김을지와 영아는 창을 내던지고 장영실에게로 달려갔다.

만복이 어느 사이 장영실의 머리를 자기 무릎에 베우고 돌봐주고있었다.

《오라버님―》

영아는 장영실을 쓸어안으며 눈물을 쏟았다.

《형님―》

을지가 또 장영실을 겹쳐안았다.

《너희들의 소식을 몰라 애탔더니 이렇게 만났구나. 인젠 됐다. 그만 눈물을 닦아라.》

장영실이 밝게 웃었다. 그의 눈귀에도 눈물이 그득히 맺혔다가 흘러내렸다.

만복이는 영아를 처음 보지만 김을지는 장영실의 집에서 여러번 만나 인사를 드린바여서 잘 알았다.

양녕대군의 반당으로 서울에 오군 하던 이 사람이 김을지란 말인가. 그는 웬일인지 장영실과 김을지부부와 사생동고를 함께 하고싶은 마음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형님, 땅바닥이 차오이다. 자, 이리 오소이다.》

김을지는 장영실을 새털처럼 가볍게 안아올려 제 무릎에 아이들처럼 앉히였다.

《형님의 병이 깊어 잠시도 여기 있으면 안되겠소이다. 빨리 인가를 찾아 몸을 덥히면서 조처해야 하리다.》

《그래, 옳다. 너희들도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 이제 곧 이자리를 떠야 한다. 온 조정이 너희들을 붙잡으려고 한다. 나를 걱정말구 어서 떠나거라. … 나는 이길로 동래관청에 가겠다. … 리사균은 어찌 되였느냐?》

《그놈을 죽여버렸소이다.》

《잘했다. 그놈이 제갈길을 간셈…이…다.》

장영실은 숨이 차서 말꼬리를 힘들게 잇더니 의식을 잃었다.

그들은 서둘렀다. 빨리 인가를 찾아내여 장영실을 눕혀야 하였다.

김을지는 장영실을 안고 리사균의 말에 올랐다. 영아는 함거의 말을 떼내여 타고 만복이는 빈 달구지를 타고 떠났다.

날은 어슬어슬 어두워왔다.

찬바람이 불었다.

어느덧 하늘엔 별들이 총총하였다.

인가는 어디서나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당황하고도 불안하였다.

하지만 마침내 시내가 흐르는 어느 산기슭에 한점의 불빛이 가물가물 보여왔다.

그들은 그 집을 찾아들었다. 집은 자그마한 초가이지만 집둘레에 아담하게 둘러져있는 담장도 있고 뜨락가에 감나무도 몇그루 서있었다.

밤눈에도 집주인의 착실하고도 알뜰한 손길이 집오래에 어려있음을 알수 있었다.

《주인님 계시나이까?》

영아는 조용히 물으려고 하였으나 저도모르게 다급하고도 떨리는 목소리가 크게 울려나왔다.

방안에서는 밖에서 나는 사람의 목소리를 가려듣지 못했는지 잠시 대척이 없었다.

영아는 재차 주인을 찾았다. 그때에야 《게 누구셔요?》 하는 맑은 목소리가 나고 방문이 방싯이 열리였다.

《우린 아산고을에서 왜변을 만나 피신해오는 사람들이예요. 헌데 몸을 상해 위급한 사람이 있어서 잠간이라도 이 댁에…》

영아의 목소리는 애절함과 처량함이 마디마디에 젖어들었다.

《아이구나, 그래요?! 저도 거기서 왜변을 만나 피신해왔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왜변을 함께 겪으며 죽을고비에서 살아난 사람들끼리 무엇인가 통하는 정이 있어서인지 녀인은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초롱불까지 비쳐주었다.

《네에.》

영아는 너무나 고마와 눈물이 났다.

김을지도 녀인에게 굽석 절을 하였다. 그의 큰 눈에도 눈물이 번쩍이였다.

집주인녀인은 아래목에서 자고있는 어린아이를 웃목으로 밀어놓고 거기에 장영실을 눕히였다.

그리고 장영실이 어떻게 다쳤는지도 알아보고 몸에 난 상처도 보고 이마도 짚어보더니 웃방으로 올라갔다.

급히 무슨 약인지 가지고 내려와 상처에 붙이고 다시 정성껏 싸매주었다.

녀인의 손은 희고 고왔다. 말씨도 여느 촌집 녀자같지 않았다.

《어머니, 얼른 더운물을 끓여주어요.》

녀인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가 의술에 밝았던 까닭에 조금이나마 배워둔것이 있었다.

《오냐, 그러마.》

방웃목에서 어린애에게 베개를 바로 베여주고있던 나많은 할머니가 제꺽 일어나 부엌으로 내려갔다.

《어머니, 산꿀이 있지요?》

《있구말구. 아이가 얼마 먹었냐. 그대로 있단다.》

《그럼 됐어요. 따스한 물에 풀어 먹이자요.》

사람들의 말소리에 깨여난 어린애가 눈을 비비면서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불시에 《엄마―》 하고 영아의 품에 달려들었다.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장영실의 손을 주물러주고있던 영아는 얼결에 아이를 보더니 와락 끌어안았다.

《이게 성덕이구나. 성덕아―》

영아는 목메여 부르짖었다. 김을지는 《네가 어떻게― 응, 성덕아―》 하고 제 엄마의 품에서 성덕이를 떼내여 옆에 앉혔다.

《지금 삼촌이 아파서 누워계신다. 어서 삼촌의 손을 주물러라.》

《옳지, 아버지 말씀대루 어서…》

영아도 이렇게 한마디 하고 잠시 놓았던 장영실의 손을 다시 잡고 주물렀다.

주인집녀인은 대번에 눈을 크게 뜨고 영아와 김을지를 번갈아보더니 다음순간 《아니, 김을지란분이?! 왜놈의 배에서 저를 구원한… 아주머닌 그때 고개에서 이애를 맡기였던… 아이참, 이게 꿈인지 아닌지 모르겠군요.》 하고 영아의 두손을 쓸어안았다.

영아도 그때에야 녀인을 알아보고 《이게 어찌된 일이예요?》 하고 소스라치듯 놀라며 녀인의 손을 덧잡아쥐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들은 지금껏 생명이 위급한 장영실을 돌보느라고 서로의 얼굴을 가려볼 경황이 없었다.

지금도 긴말을 나눌 사이가 없었다. 어떻게 녀인이 성덕이를 데리고 여기까지 왔는지, 그리고 김을지부부가 어떻게 살아서 이 집에 찾아들게 되였는지 서로 묻고 대답할 계제가 못되였다.

녀인은 그때 고개마루 숲속에서 날이 밝도록 영아와 김을지네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안타까이 기다렸었다.

어린애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으며 우는데 그들은 해가 한발이나 올라왔지만 돌아올줄 몰랐다.

녀인은 김을지네 사람들이 왜놈들을 짓쳐버리느라고 기력이 쇠진해져서 끝내는 관군들에게 다 죽은줄로 알았다.

그는 성덕이가 불쌍해졌다. 그는 이 어린애 하나만이라도 살려내서 자기를 구원한 사람들에게 의리를 다하리라고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그리하여 아이를 업고 그 고개를 떠나 여기 본가집으로 왔던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려줄수 없었다. 지금은 생명이 경각에 이른 사람을 살려내야 하였다.

할머니가 따스한 물에 산꿀을 풀어왔다.

녀인은 실오리같이 벌어진 장영실의 입술사이로 꿀물을 한숟가락씩 넣어주었다.

장영실은 그것을 의식치 못하고 본능으로 넘기였다.

잠시후에 입술이 알릴듯말듯 움직거렸다. 숨결도 조금 높아지는것 같았다. 점차 얼굴이 밝아졌다.

이윽하여 눈을 스르르 떴다. 하고는 자기를 내려다보고있는 영아와 을지, 만복이들을 알아보고 평시처럼 밝게 웃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성덕이를 보고 《이애가 잘 생겼구나. 너는 누구냐?》 하고 물었다.

《삼촌, 나 성덕이오이다. 삼촌은 장영실상호군…》

성덕의 엉뚱스러운 대답에 모두들 오래간만에 웃었다.

집주인(향단)은 한껏 놀라 장영실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바로 이분이 관노로부터 상호군까지 높이 올랐다가 본래의 관노로 떨어진 사람이구나.

향단은 이 상호군이 왜변때는 없었는데 어떻게 되여 남매간에 만나 이렇게 자기 집에 오게 되였는지 알수 없었지만 온 나라에 이름난 재인명사가 다름아닌 자기 집에 들리였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은근한 자랑감을 느끼였다. …

밤 삼경이 지나서 김을지와 영아는 부득이 장영실과 눈물겨운 작별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영아와 을지는 장영실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오라버님, 부디 몸성히…》

영아는 목을 꽉 메우는 설음에 말을 더 하지 못하였다.

《형님, 사정이 웬간하면 형님뵈러 이따금씩 동래로 가군 하오리다.》

을지와 영아는 최천복두령이 이미 정해둔 새 웅거지의 깊은 산속으로 가야 했다. 거기에는 벌써 최천복두령이 먼저 보낸 사람 두셋이 움막집들을 짓고있었다.

김을지와 영아는 그곳에 자리잡고 사람들을 불러일으켜 량반놈들과 사생결단 싸울 결심이였다.

만복은 김을지와 영아에게 《나리님은 제가 끝까지 모시겠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이다.》라고 하였다.

장영실은 영아와 을지의 손을 붙잡고 흔연히 웃어보였다.

《어딜 가나 몸조심하게. 나도 이제 날밝으면 동래로 떠나겠네.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면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 자, 어서 떠나들 가게.》

한해가 지나갔다.

장영실은 동래고을 노비방에서 자고깨며 고을야장간에 나가 일하였다. 상호군으로 마을돌이를 왔을 때 있던 고을원도 다 교체되여 가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일하던 노비들도 병들어 죽거나 살 곳을 찾아 떠나들 가서 알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서자란 고향땅이건만 낯선 고장에 온것처럼 정이 붙지 않았다.

야장간도 볼품없이 피페해지고 쇠물을 녹이는데 필요한 숯도 없고 철붙이도 없었다.

또 그를 거들어주는 장공인들도 아침에 나왔다가는 슬그머니 없어지군 하여 새 화포알을 만들수도 없었다.

그러나 장영실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임금이 기다리겠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려고 야장간에 나가군 하였다.

허지만 병세는 더 중해졌다. 만복이 곁에서 돌봐주지 않았다면 벌써 목숨을 부지할수 없었을것이다.

장영실은 쇠를 녹이는 로도 새로 쌓고 풀무통도 새로 만들어놓으며 쓰러졌다가는 다시 일어나면서 새 화포알을 만들어낼 준비를 하나하나 해나갔다.

어느 가을날 그는 끝내 먼지가 풀썩이는 야장간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고말았다. 만복이 급히 그를 부둥켜안고 야장간곁에 붙어있는 노비방으로 가서 장영실을 눕히였다.

쟁인바치노비들은 숯을 굽느라고 산에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만복은 물을 떠다가 장영실의 얼굴도 닦아주고 손발도 씻어주며 이리저리 뛰여다니였다.

고을원님에게 알릴가, 의원부터 찾아가야지 하고 만복은 야장간문턱을 급히 넘어섰다.

바로 그때 숯짐을 크게 진 사람이 큰 눈으로 이리저리 살피면서 야장간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뒤로 자그마한 사람이 숯짐을 지고 바투 따라왔다.

《숯사시오, 숯이요, 쇠도 돌도 다 녹이는 참숯이요. 어서 사시요―》

만복이는 그 웨침소리를 여겨들을 경황이 못되여 숯장사군앞을 급히 지나갔다. 그러자 숯장사군이 그를 막아섰다.

《숯을 사라는데 사겠는지 안사겠는지 대답이나 하시구려.》

《소인이 우리 나리님 일로 급난하와 대답할 짬이 없소이다.》

만복이 얼른 돌아섰다.

그러나 숯장사군이 그를 꽉 붙잡았다. 그리고 사방을 살핀 뒤에 자기의 수염을 뚝 떼서 보이고 《만복이 날세.》 하고 나직이 말하였다.

《아니 을지아저씨가?!》

만복은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와 을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장영실나리님이 방금 땅바닥에 쓰러져서… 정신을 잃고…》

《뭐라구? 형님이?》

김을지가 놀라서 숯짐을 벗어내치는데 그뒤에 섰던 자그마한 사람도 숯짐을 와락 벗어버리고 만복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 오라버님이 어데 있어요? 어서… 어서 가자요―》

영아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산처럼 쌓였다.

그들은 만복을 따라 허둥지둥 걸음을 떼놓았다.

김을지와 영아가 이렇게 숯짐을 지고 급히 찾아오게 된것은 그럴만 한 일이 생겼기때문이였다.

며칠전 김을지네 《산당》패들이 경상도 창녕땅이 가까운 어느 고을 악덕량반놈들을 치다가 그중의 한놈이 제발 살려달라고, 나는 조선사람이 아니라 왜인이라고 하는 놈을 보게 되였다.

김을지는 네놈이 목숨을 건져보겠다고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하고 그놈의 목을 치려고 하는데 그놈이 왜말로 무엇인가 내뱉더니 그다음엔 조선말로 자기를 살려주면 중대한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하였다.

김을지는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냐 했더니 그놈이 하는 말이 《이것은 절대비밀이오이다. 내가 이것을 루설시키면 내 목이 떨어지오이다.

일본에서는 조선의 유명한 재인재사 장영실이 파직되여 동래관청노비로 왔다는것을 알고 유인랍치하려고 하는데 장영실은 고을야장간에서 일한다고 하오이다.

야장간에는 숯이 없어서는 안되오니 날랜 놈들을 숯장사군으로 가장하여 누구도 없는 점심참에 장영실을 조용히 만나 그에게 네가 일본으로 가면 조선의 상호군보다 더 높은 벼슬을 주고 노비와 땅을 준다고 꼬이라고 두령이 말했소이다.

그는 지난 봄에 이미 이런 말로 장영실을 구슬려보았으나 거절당하였다고 하면서 장영실, 자기는 조선의 노비로 살망정 왜땅의 벼슬은 싫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백번찍어 안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다시 낚시를 던져보아라, 그를 데려다가 일본의 화포도 만들고 문물을 발전시키면 일본에 큰 리득을 줄것이다, 만약 또다시 불응하면 강제랍치하여 대마도에 싣고오라. 밀선은 이달 보름날 동래 수영포만의 으슥한 바위기슭에 숨겨놓고 기다리고있겠으니 이달 보름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일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고 하였소이다.》고 하였다.

김을지는 깜짝 놀랐다. 그는 그놈에게 《너는 누구냐? 왜 여기에 왔느냐?》 하고 따져물었다.

놈은 《나는 부산포왜인거류지에 사는데 장사거래로 여기에 왔소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김을지는 이 왜놈이 하는 말을 믿었다. 아무리 교활한 왜놈이라도 이처럼 엄청난 거짓말을 갑자기 지어낼수는 없는것이다.

또 교활한 왜놈들이 능히 이런 일을 꾸밀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였다.

이달 보름날이라면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빨리 서둘러야 하였다.

여기서 동래까지는 이틀동안 밤낮으로 걸어야 한다.

《산당》사람들이 김을지에게 고을을 떠나갈 준비를 다 갖추었다고 알리였다.

김을지는 새 웅거지의 두령이였던것이다. 그간 일년가까이 되는 사이에 량반관리놈들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새 웅거지에 모여와 벌써 수십명으로 불어났었다.

김을지가 그들을 먼저 떠나보내느라고 잠간 뒤를 돌아볼 때 왜놈이 품에 감추었던 비수를 뽑아들고 찌르려들었다. 순간 어데선가 날아온 화살이 먼저 놈의 가슴팍을 뚫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김을지의 주위를 살피던 영아가 화살을 날렸던것이다.

김을지와 영아는 이틀낮, 이틀밤을 쉬지 않고 걸어서 동래의 깊은 산속에 있는 숯구이막근처에 들어섰다.

그들은 산기슭 길목에 몸을 감추고 숯짐을 지고 내려올 놈들을 기다렸다.

보름날 해가 높이 떠오른 중낮에 과연 숯짐을 지고 내려오는 놈들이 나타났다.

세놈이였다. 놈들은 누가 없는 숲속이라 마음놓고 저희들의 왜말을 지껄이며 가까이 다가왔다.

틀림없는 왜놈들임을 확인한 김을지와 영아는 놈들을 순식간에 제껴버리고 한놈은 사로잡았다.

산 놈을 따져보니 사흘전에 영아의 화살에 맞아죽은 왜놈의 말과 꼭 같았다. 조금만 더 지체하였더라면 장영실은 왜땅에 랍치되여갈번하였다. 안도의 숨이 저절로 새여나왔다.

그들은 나머지왜놈도 죽여버리고 놈들이 지고 왔던 숯짐속에 산꿀과 곰열을 파묻었다.

그것은 영아가 동래가까이 가는 이번 길에 오라버님을 만나볼수 있지도 않을가 생각하여 웅거지를 떠나올 때 가지고온것이였다.

장영실은 노비방 다 꿰진 삿자리에 반듯이 누워있었다.

움푹 꺼져든 눈확, 여윌대로 여위여서 뼈만 남은 몸, 머리칼이 빠져서 풋밤알만한 상투, 땀때국이 흐르는 베잠뱅이…

《아이고… 오라버님, 이 웬일이오이까.》

영아가 오열을 쏟으며 장영실을 그러안고 흔들었다.

《여보, 울지만 말구 빨리 손발을 주물러주게.》

을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장영실의 인중에 손침을 여러번 놓아주고 비벼주었다.

잠시후에 장영실의 실오리같은 들숨날숨이 눈에 띄우게 알려졌다.

《만복이 임자 샘물 한사발 떠오게.》

을지는 이렇게 당부하고 자기는 밖으로 나가 지고온 숯짐속에서 산꿀단지와 곰열봉지를 꺼내가지고 왔다.

그들은 급히 산꿀과 곰열을 샘물에 진하게 풀어서 장영실의 입에 한숟가락씩 여러번 먹여주었다.

이 산꿀은 새 웅거지의 벼랑에서 따내린것이고 곰열은 곰을 잡아 마련하여 간수해두었다가 이번에 장영실을 위해 가져왔었다.

을지와 영아는 장영실의 손발을 부지런히 주물러주면서 그가 깨여나기를 기다리였다.

관청아전이나 또 누가 들어와본대도 자기들을 의심할 까닭이 없기때문이다. 숯장사군으로 왔다가 사람이 위급하여 돌봐준다고 하면 그만인것이다.

한식경이 지나서 장영실은 몸을 움직이고 신음소리를 냈다.

또 두입술이 조금씩 벌어졌다가 닫기고 또 벌어지군 하였다.

무엇인가 말하고싶은듯이―

영아의 얼굴에 반가운 웃음이 확 피여났다.

오라버님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의식이 돌아서는줄 알았다.

그는 장영실의 얼굴을 두손으로 소중히 감싸고 가만가만 흔들었다.

《오라버님, 오라버님, 정신이 좀 드오이까?》

그러나 장영실은 여전히 그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하였다.

이 시각 그의 넋과 정신은 어데로인가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고있었다.

이 나라 산과 들을 지나 푸른 하늘 아득한 공간을 넘어 마침내 임금이 있는 대궐에 들어선다.

《상감마마, 장영실이 삼가 문안드리옵나이다. 이 장영실이 다시 노비가 되여 고향에 돌아왔나이다.》

장영실의 뇌리에서 떠나가고있는 넋이, 그 혼이 이렇게 임금에게 아뢰이고있었건만 영아도 을지도 알수 없었다.

다만 장영실의 얼굴이 밝아지는것 같고 웃음까지도 비끼는것 같아서 그를 부르고 찾았다.

그러나 초불이 제 몸을 다 태우고 마지막으로 밝아졌다가 아주 꺼지듯이 이 시각 장영실의 생명의 불꽃이 마지막으로 밝아지는것을 그 누가 짐작인들 할수 있었으랴.

《형님, 정신을 차리소이다.》

《오라버님, 눈을 좀 뜨세요―》

을지와 영아가 이같이 번갈아부르는 소리를 장영실이 들을수 있었다면 그는 벌떡 일어나 《아참, 나를 깨우지 않았다면 좋았을걸 그랬네. 방금 상감마마를 뵈옵는 꿈을 꾸고있었는데… 참 아쉽게 되였네.》 하고 그전처럼 밝고 명랑한 웃음을 지었을것이다.

허지만 그는 영원히 깨여날수 없는 잠자리를 펴고있었다. 그러나 차마 잠들수 없는 그의 넋은, 그의 정신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씩하나씩 가슴속에 깊이 쌓이였던 느낌을 임금에게 아뢰이고있었다.

《상감마마, 어이 이 비천한 노비를 높은 벼슬에 올려주었더이까. 하늘은 높고 땅은 낮고… 세상은 높고낮은것으로 이미 굳건히 정해져있는데 어이하여 밑바닥 노비를 높이 등용해주셨나이까. …

상감마마께 감히 물어볼 말씀이 있사옵니다.

지난날 경상도백성들이 등문고를 치고 살길을 열어달라고 청원하였는데 어이하여 그 백성들에게 형장을 치고 내쫓았소이까.》

장영실의 숨결이 가늘어지고 밝아지던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영아는 장영실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통곡하고 김을지는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고 만복은 땅을 치며 가슴을 두드리며 슬피 울었다.

작은 노비방이 슬픔에 무너질것 같았다.

그러나 장영실의 정신, 그의 넋은 그 울부짖음도 다 모르고 푸른 하늘을 누비며 대궐로 날아가고있었다.

임금을 하늘처럼 믿었던 그 하늘은 꿈의 하늘이였다.

《상감마마, 백성들이 굶어죽고 맞아죽고… 산 사람들은 칼을 들고 일어났사오이다. 백성들이 호구지책이 없으면 례의도덕을 지킬 마음이 자라지 않고… 례의도덕이 없어지면 무슨짓인들 못하리까. 이미 죄를 지은 다음에 그 죄를 처벌하는것은 곧 백성들을 그물로 잡는것이나 다름이 없사오이다. 반드시 우로는 부모를 공양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릴만한 길을 열어주어야 례의도덕과 법을 장려할 여지가 있사옵니다. …

상감마마께서 옥루기륜이나 측우기나 제가 만들어 바친 모든 기물들을 볼 때마다 크게 기뻐하셨건만 그 기쁨이 백성들의 얼굴에 웃음으로 옮겨지지 못하였사옵나이다. 상감마마의 시대에 와서 문물이 눈부시게 선양되옵는데 백성들은 그 덕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살아가기가 더 힘들어졌나이다. 측우기가 농사에 크게 도움을 주어 수확물이 늘어나고 그럴수록 조세량이 그만큼 많아져서 측우기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리기는 마찬가지옵나이다. 이런 까닭에 상감마마의 기쁨은 량반관리들에게만 미치옵고 백성들에게는 더 큰 고통이 되였사옵니다.

상감께서는 측우기를 만들어 바친 이 장영실을 대견히 여겨주시며 〈그대야말로 과인의 정사를 빛내주는 충신이로다. 〉, 〈얼룩소라도 뿔만 좋으면 제상에 놓는다. 〉 하셨는데 그때는 그 말씀이 노비출신이 나라에 큰공을 이루었다고 치하하시는 뜻으로만 알고 황송하옵기만 하였사옵니다.

허나 지금에 생각해보면 제 한몸이 제물이였음을 알게 되였나이다.

상감마마, 이 장영실이 가슴에 묻어두었던 말씀을 올릴 때가 왔나이다.

양녕의 반당 박대산은 김을지옵나이다. 그가 다시 칼을 들고 악덕관리들을 치고있사옵니다. 이런 김을지, 이런 백성들이 도처에 일어나고있사옵니다.

어느 옛 고사에 곽땅의 임금이 망했다는 말을 듣고 선비 하나가 곽땅을 찾아가 곽임금이 왜 망했느냐 물으니 곽임금은 어진 임금이였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과연 어진 임금이였다면 망할 까닭이 없지 않느냐 했더니 하는 대답이 곽임금은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악한자들을 미워했지만 그 악한자들을 내쫓지 못하고 어진 사람들을 등용치 못하와 망했다고 했더이다.

상감마마, 그 악한자들을 김을지네들이 짓치고있사옵니다.

어찌 의로운 그들을 붙잡아 처형하오리까.》

…저녁녘에 장영실은 눈을 번쩍 떴다. 자기를 내려다보고있는 영아와 을지를 보더니 왜 성덕이가 보이지 않는가고 가냘픈 소리로 물었다.

영아가 성덕이는 새 웅거지에서 잘 자라고있다고 하자 알릴듯말듯 고개를 끄덕이였다.

《임금이 어린 성덕이에게도 노예의 멍에를 메워주었구나. 임금이… 할…수 없고나. …세…상이 그렇게…돼…먹은…걸. …》

장영실이 스르르 눈을 감으며 의식을 잃었다.

영아와 을지는 그를 붙들고 어쩔줄 몰라하며 인중에 다시 손침을 놓아주기도 하고 산꿀과 곰열을 다시 풀어먹이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눈을 다시 뜨고 《너무 슬퍼하지 말게. … 사…람이… 세… 상에 났다가… 그… 세상…을… 알고 죽…으면… 족…하지. …량반세… 상이자… 임…금의… 세… 상인줄… 내… 알고… 죽으니… 됐다. 너희들…은 어서… 웅거지로 떠나… 거라. …》 하고는 무슨 말을 더 할듯 하다가 끝내 하지 못하고 또다시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 그의 혼은 대궐의 높은 담을 넘어 어전에 소리없이 날아가 임금에게 하직을 고하고있었다.

《상감마마, 이 장영실이 상감마마의 곁을 영원히 떠나가옵나이다. 상감께서 이 노비를 다시 불러 상호군벼슬을 되돌려준대도 돌아가지 않겠나이다. 만약 임금이 기다리겠다던 새 화포알을 저승에 가서도 만든다면 김을지네 사람들에게 주어서 악덕관리들을 씨도 없이 섬멸해버리도록 하겠나이다.》

해가 지고 하늘가에 피빛노을이 불타오르는 저녁에 장영실은 마지막숨을 거두었다.

노을은 더더욱 진한 피빛으로 산과 들을 물들이였다. 그것은 마치 장영실이 남긴 인생의 노을, 원한의 노을처럼 생각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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