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등문고(1)

4

 

명랑하고도 꾸밈새없는 장영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대산이는 맨버선발로 달려나가고 숙이는 그뒤로 문밖에 나와섰다.

어스름 달빛아래 무관복을 입은 체소한 사람이 잽싼 걸음으로 마당 한복판을 지나오는것이 보였다.

양녕대군이 입궐하여 장영실에게 박대산이 왔다고 알린 모양이지만 이렇게까지 일찍 나올줄은 몰랐다.

《형님, 내 여기 있소이다.》

대산이 웨치듯 하면서 토방아래로 내려가 장영실을 맞이하였다. 그들이 서로 손을 붙잡고 웃는 모습은 키큰 어른과 키작은 자식간에 오래간만에 만나 반기는것 같았다.

박대산이 장영실과 함께 방안에 들어서자 정식으로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였다.

《아니, 절은 또 뭔가. 어서 편히 앉게.》

장영실은 대산이를 만류하며 그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항렬을 봐도 그래, 벼슬을 봐도 그래, 절을 해도 두번을 해야겠소이다. 하하하.》

장영실이 즐겁게 웃으며 대산의 두손을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대산이는 어쩔수없이 꿇었던 무릎을 풀고 그와 편히 마주앉았다.

《나리님께서 일찍 나오셨나이다. 아주버님이 나리님을 기다리면서 저녁밥을 안드셨나이다. 함께 하시오이다.》

숙이는 얼른 부엌으로 나가서 밥 한그릇 더 들고 올라왔다.

그는 남편이 조정관리들속에서 차별대우를 받고있는줄 알고있는지라 오늘 저녁도 그와 같이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나 걱정스러웠다.

《성덕이 아버지가 왔는데 내가 일찍 나와야지. 그건 그렇구 여보, 임자한테 술이 있으렷다. 하하하, 성덕이 아버지가 오면 대접하자구 건사해둔것 말일세.》

《네, 있나이다.》

숙이는 활짝 웃으며 술방구리와 술보시기 두개를 내놓았다.

이리하여 두사람은 숙이가 옆에서 부어주는 술을 들면서 오래간만에 회포를 나누었다.

《성덕이가 이젠 쉬운 말을 곧잘한다니 그녀석 영특하구만. 임자가 부럽네.》

《그애가 영특하오이다. 참말루… 그래서 세상에 내 났던 표적을 남기게 되였소이다. 하하…》

《내 났던 표적이라니?》

《내 피줄을 잇구 내 골육을 물려받은 자식이 태여나니 내 났던 표적이 아니오리까.》

《하하하.》

《하하하.》

두사람은 즐겁게 웃었다. 숙이도 수줍게 돌아앉아 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웃었다.

《난 언제면 내 났던 표적을 남길가. 이건 숙이가 대답해야겠는데…》

장영실은 대답을 기다리듯 이윽히 숙이를 바라보았다.

《아이참, 나리님두… 취하셨네. 술을 적게 하시오이다.》

숙이는 오랜 세월 입에 붙은 말이여서 자기도 모르게 나리님이라고 부를 때가 많았다.

《허허, 이 사람보게. 또 나리님이라네. 제 남편을 보구, 하하하. 인젠 그런 말 하지 말게. 대궐에서 대접받지 못하는터에 임자한테서 나리님으로 대접받으면 뭘하나. 오늘저녁 연회에 참석하려니 당상관들은 말할것두 없구 당하관들조차 나와 한자리에 나란히 앉기를 꺼려하는 눈치를 보이지 않겠나. 내가 비천한 관노출신이라 조정관리들이 언제나 그렇게 렬등히 보는것이여서 별로 나무람할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을것도 없어서 자리를 피하려던 참인데 마침 양녕대군마님이 나를 찾아와 반갑다 하시구 그대의 집에 대산이 왔느니라 하길래 집으로 총총히 나왔네. 여기는 앉은자리가 편하고 마음도 편하니 술맛도 좋네.》

장영실은 얼근하여 속에 있던 말을 다 쏟았다.

대개 출신이 천하거나 문벌이 보잘것없는 사람은 아무리 당대에 뛰여난 재사라 해도 문반이나 무반의 기본벼슬은 주지 않고 잡관(기술관벼슬 즉 역관, 의관, 천문관, 지관 등)벼슬밖에 주지 않았다.

세종이 장영실에게 잡관벼슬을 주지 않고 무반벼슬을 높이 제수한것은 전고에 없는 일이였다.

장영실이 조정의 문무관리들속에서 하대를 받지 말고 나라의 기물을 만드는데 필요되는것이 있으면 당당하게 요구하고 사람들을 부리라는 뜻이였다.

임금의 뜻은 이렇건만 조정관리들은 장영실보다 벼슬이 낮은자라도 그를 업신여기였다. 틈과 짬이 있으면 언제나 그를 질투하였다.

숙이는 남편의 고충을 잘 알지만 대산이는 이런 내사를 처음 알았다.

아까 북각앞에서 등문고를 울린 경상도백성들의 처지를 직접 보고 의분을 금치 못하였는데 또 장영실이 안고있는 심리적고통을 듣고보니 더더욱 량반관리들이 미웠다.

《성덕이 아버지, 상감마마의 성은에 보답하는것은 백성들의 첫째가는 락이고 사람이 사는 보람일세. 개는 달을 보고 짖어도 달은 달대로 하늘중천을 달린다네. 자, 우린 우리끼리 상감마마의 즉위년 23주기를 축하하여 술을 드세.》

장영실이와 대산은 대궐을 향해 돈수재배하고 엄숙히 술보시기를 들었다. 이 두사람의 마음속엔 임금을 받드는 충의지감이 북받쳐올랐다.

《상감마마께서 분부하여 형님이 만들어올린것중에 어느 하나도 기뻐하지 않은것이 없다지만 자격루와 옥루기륜을 보아주시고는 너무 기뻐 형님에게 상호군벼슬을 주셨는데 그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오이다.》

대산이는 장영실이 임금에게 그리도 기쁨을 준것이 부러워 이같이 청하였다.

《그러셨다네. 성상께서는 흠경각에 친림하시여 옥루기륜을 보시고 대희하시였네. 이런 물시계는 고금에 없다, 이런것은 세상천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기륜이다. 조선의 자랑이라고 하셨다네.》

《대체 옥루기륜이란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걸 좀 말해주소이다.》

장영실은 앉음새를 고쳐앉으며 영민한 눈을 빛내였다.

《보루각(자격루라는 물시계를 위해 지은 집의 이름)에 설치한 자격루도 처음엔 성상께서 이렇게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해서 만든것이고 옥루기륜도 자격루를 더 발전시켜 이리이리 만들수 있으리라 하고 가르쳐주시였으니 내가 만든것이지 내 혼자서야 궁냥이 닿겠나.

이런 성상이 계시는 한 우리 나라 문물이 번창하지 않을수 없다네.》

장영실은 옥루기륜을 만들게 된 동기와 만들던 과정, 그 작용원리를 이야기하였다.

박대산은 물론이요, 숙이도 밤가는줄 모르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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