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기다리는 마음

3

 

즐겁고도 흥겹고 서로 제속을 감출것도 숨길것도 없는 제나름의 생각을 그대로 털어놓게 하는 주연의 밤.

그 한가운데 시퍼런 불길이 널름널름 솟구치는 숯불무지우에 각을 떼낸 범의 네발사지와 갈비, 사등뼈뭉치들이 지글지글 구워지고 맑은 술을 철철 넘치게 떠담은 커다란 놋주발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으로 넘나들었다.

마당 네귀퉁이에 비자루와 같이 크게 묶은 광솔불이 검은 연기를 타래쳐올리며 홰불처럼 주위를 대낮같이 밝히였다.

등받이의자에 앉아있는 양녕대군의 앞에만 자그마한 주안상이 놓여있을뿐 나머지사람들은 숯불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깔아놓은 멍석우에 앉았다.

모두들 얼굴들이 불깃불깃해가지고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양녕대군은 그들의 흥취를 흐뭇이 바라보며 은주발의 술을 조금씩 마시였다.

박대산은 이런 자리가 처음이고 또 이곳의 풍속을 몰라서 사람들의 뒤전에 송구히 앉아있었다.

《박대산은 이리 와 내가 주는 술을 받으라.》

문득 호걸스러운 양녕대군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좌중에 즐거이 떠돌던 웃음소리, 말소리들이 물을 뿌린듯 가라앉았다.

박대산은 황송히 일어나 앉으랴 서랴 어쩔줄 몰랐다. 양녕은 자기의 은주발에 술을 철철 넘치게 부었다.

《내 생명의 은인에게 무엇을 줄고. 세상에 귀한것 많으나 제일 귀하기는 사람의 마음이노라. 이 술은 내 마음을 부은것이니 그대는 사양치 말라!》

박대산은 양녕대군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두손으로 술을 받아들었다.

《대군마님께서 호랑이를 잡으시려 홀로 접어드시는 호협남아의 기상을 본받았을뿐이온데 어찌 저의 하찮은 일만을 높이 일러주시옵니까.》

진심이 마디마디에 슴배인 그 말은 사람들의 가슴을 두드리였다.

《그래?! 하하하. 그대의 한마디 말은 호랑이를 잡은것보다 더 큰 만족을 나에게 주노라. 여봐라, 너희들 생각엔 어떠하냐?》

양녕대군은 좌중을 둘러보며 이렇게 물었다.

《지당하옵나이다. 그 말 한마디 호랑이에 비기리까 천금에 비기오리까!》

불깃불깃한 얼굴에 웃음을 듬뿍듬뿍 담고 모두들 목소리를 합쳐 우렁차게 대답하였다.

그들은 지금껏 박대산을 경계의 눈초리로 은근히 주시해왔다. 그의 행동거지와 하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너희들이 내 마음과 같다 하니 나는 더욱 기쁘도다. 이 사람, 어서 술을 들게.》

양녕이 껄껄 웃으며 박대산을 바라보았다.

박대산이 차마 마시지 못하고 들고있는 은주발에 눈물을 소리없이 떨구었다.

《대군마님께서 마음을 담아 부어주신 이 술은 이 몸에 흘러들어 피와 넋이 되리옵나이다. 하오나 대군마님께 먼저 술을 올리지 못하고 받기만 하오리까.》

박대산은 놋주발에 술을 가득 부어드렸다.

《하하하, 고마우니라. 자, 그럼 나와 함께 들자구.》

양녕은 단숨에 놋주발을 비우고 기분좋게 수염을 쓸어내리는데 시종이 나와 대군에게 무슨 말인지 가만가만 여쭈었다.

《음, 알겠니라. 이내 들어간다고 해라.》

양녕이 더욱 흡족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너희들은 오늘밤 마음껏 즐기라. 나는 안방에 들겠노라.》

양녕이 시종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인들이 일시에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대군마마― 편히 주무시오이다―》

양녕이 안방으로 들어가자 좌석은 부자연스럼이 없이 활기를 띠였다.

《이 사람 술받게. 임자가 우리와 함께 살게 됐다니 반갑네. 내가 누구인고 하니 대군마님의 분부로 이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는 소임을 맡은 사람일세. 그래서 나를 〈호조판서〉로 부른다네. 여기는 작은 나라와 같다는걸세. 하하…》

박대산은 자기보다 나이가 십년이나 많아보이는 《호조판서》의 술을 받는것이 송구스러워 일어나 받았다.

《임자가 대군마님이 당할번한 호환을 막아준것은 곧 우리를 구원해준것이나 다를바없네. 대군마님덕에 우리가 별세상을 살아가니깐. 여기서는 내일네일 따로 없고 다 우리 일이요, 대군마님의 일이라네. 대군마님은 왕세자로서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이런 궁벽한 벽촌에 계시지만 그걸 탓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락으로 삼으시거든.

오늘도 대군마님은 영웅호색이라 얼마전에 덮쳐온 천하절색 젊은 과부와 날새도록 즐기시려고 안방출입을 하신게야. 처음엔 계집이 고운 입술을 깨물고 표표히 곁을 주지 않아서 대군마님이 속을 태운가봐. 그러나 백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없다고 며칠전부터는 살풋이 안겨드는 모양일세. 자, 술을 들게. 왜 그러고있나, 어서 마시게.》

《호조판서》는 제 먼저 주발을 쭉― 비우고 말을 이었다.

《대군마님이 이 녀자, 저 녀자 많이도 보시는데 그럴수록 우리는 그게 더 좋네. 대군마님이 우리에게 호령하는 시간이 적어지니깐. 하하… 우리는 여기가 좋네. 밖에서야 하정배를 해가며 모셔야 할 량반들이 오죽 많은가. 하지만 여기서는 대군마님 한분만 모시면 만사태평일세. 우리는 동궁의 종들이였네. 지금도 대군마님의 종들이지만 지은 농사로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네. 나라에 바치는 조세요 군포요 하는것은 다 없고 알쭌히 우리것일세. 이런 세상이 이 하늘아래 어디 또 있을라구. 양녕대군이 우리를 개나 도야지처럼 다룰 때도 많지만 절대복종하고 비위를 잘 맞추어주면 화를 피할수 있네. 내가 왜 이런 말을 길게 하는고 하면 호랑이를 맨손으로 멨다치는 임자를 우리 사람으로 받아들인 기쁨이 큰탓이야. 또 임자가 여기서 살려면 우리를 알아야겠구 대군마님을 알아야 할게 아닌가.》

《호조판서》는 자기의 말을 중히 귀담아듣는 박대산이가 미더웠다.

그는 양녕대군의 지난날을 흥미있게 들려주었다.

…임금의 아들들인 대군들에게는 노비소유규정에 따라 150명의 노비를 주게 되여있었다.

양녕은 세자인 까닭에 50명이 더 차례져서 200명의 노비를 가졌다. 지금은 그 많은 노비들이 얼마 없었다.

해가 빛을 잃으면 칠색령롱하던 무지개가 사라지듯이 세자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니 세자궁의 관리들과 궁녀들, 종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스물대여섯 노비들만 남았다.

그들이 바로 이밤 주연에 참가하고있는 사람들이다.

양녕은 부왕 태종보다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사나이답게 큼직큼직하여 헌걸차고 씩씩하였다. 또 기질이 자유분방하여 왕세자가 지켜야 할 언행규범과 유교도덕에 얽매이는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궁녀들은 누구나 양녕을 좋아하였다. 궁녀들과 웃기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놀음놀이도 잘하고 롱말롱질도 잘하고 게다가 인물도 잘난 세자를 모시고있는것이 한량없는 기쁨이였다.

그들모두가 세자를 사모하였다.

실현될수 없는 사랑으로 가슴을 태웠다. 은근하고 조심스러운 사랑이였다.

서연관(왕세자를 공부시키는 관리)들이 알면 그 사랑이 임금에게 상주되고 그러면 세자궁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세자를 녀색에 빠뜨려 임금의 도를 닦지 못하게 한다는 리유인 까닭이다.

궁녀들은 세자빈이 되고싶어하였다. 앞으로 본방(왕비)이 된다면 그 고귀함이 온 나라에 빛날것이였다.

그 소원은 아득한 하늘가에 보이는 별을 따는것보다 더 가망이 없었지만 또 사람의 일이란 몰랐다.

궁녀들은 양녕의 침전에 들기를 바랐으며 양녕은 양녕대로 궁녀들을 매일밤 받아들이며 주색잡기로 세월을 보냈다.

부왕 태종은 드디여 세자를 페위시키는 어지를 내리였다.

《세자 제는 어릴 때부터 몸이 장대하기에 앞으로 학문을 성취하여 나라를 부탁할만한 동량지재(마루대나 들보로 될만한 나무, 여기서는 한 나라를 떠받들만한 능력있는 사람이라는 뜻)로 생각되여 언제나 그를 가르치는데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나이 25살을 넘기여 수염이 텁수룩하나 학문을 숭상하지 않고 방종하고 음탕하기가 날로 심해간다.

세자 제는 녀색에 빠져서 옳지 않은 일을 함부로 한다. 뒤날에 사람을 살리고 죽이며 주고 빼앗는 권력을 차지하면 어떻게 될는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를 세자의 자리에서 내쫓고 충녕을 세자로 봉하노라.》

세자는 즉시 양녕대군으로 떨어져 광주로 귀양갔다.

이것이 무술년(1418년) 6월에 있은 일이다. …

《양녕대군마님이 광주에서 이곳 리천고을지경으로 귀양지를 옮긴것은 동생되는 임금님이 자기의 형님을 가까운데 있게 하면서 보고싶으면 그날로 불러올수 있도록 하였기때문일세. 임금님의 형제간 의리는 고금에 없지. 임금님이 누가 보지 않는 곳에서 양녕대군마님을 만나면 형님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못난 동생이 외람되게 형님의 자리에 올랐으니 이 어인 일입니까?〉 하고 말씀하시면 대군마마는 웃으며 〈신은 임금의 신하일뿐입니다. 임금의 자격이 없는것이 형이라 하여 룡상에 앉는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그릇된 처사입니다. 신을 죽이자고 하는 삼사대간들의 제의가 장마비와 같이 그칠줄 모르건만 신을 보존케 하는 임금이 아니옵니까. 조금도 신을 근심마시고 정사에 힘쓰기를 바라나이다. 〉 하고 말씀한다오.》

박대산은 《호조판서》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숯불처럼 타오르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이런 임금, 이런 임금의 형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기꺼이 바치리라는 의지를 가다듬었다.

《호조판서》는 술 한주발을 쭉 내고 주위를 한번 둘러본 다음 누가 들을세라 가만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하네. 오늘은 범도 잡았고 자기의 생명을 구원해준 임자를 얻은 기쁨에 기분이 좋아서 무척 자애로왔지만 자고깨면 달리 될지 모른다네. 대군마님은 자기의 기분을 조금만 거슬리면 무자비하다네. 지난해 대군마님이 술을 못하는 노비에게 〈너 이놈, 네가 나와 한자리에 앉아서 술을 안하는것은 나와 즐거움을 나누지 않겠다는것이다. 네가 감히 나를 업신여기는것이 분명하다. 저놈에게 술을 한동이 먹여라. 〉 해서 끝내 그 사람을 죽게 만들었네. … 매사에 조심해야 하네. 하기야 생명의 은인인 임자한테야 그리 가혹할수는 없겠지만 그래두 알겠나. 대군마님의 일을…》

박대산은 《호조판서》가 술에 취하여 허튼소리를,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며 껄껄 웃었다. 그러나 그것이 취중진담인줄 알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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