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기다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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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사람이 점심을 치르고 말들에게도 풀과 물을 배불리 먹인 후 다시 길을 떠나려던 때였다.

뜻밖에 새초밭너머 산자락에서 은은한 뿔나팔소리가 《부―웅―》, 《부―웅―》 울려오고 그뒤를 이어 북소리가 둥둥― 울렸다.

말들이 귀를 쫑깃거리며 긴 목을 빼들고 세사람도 귀를 강구었다. 박대산이 만약을 념려하여 칼을 뽑아쥐려는데 장영실이 얼른 제지시키며 《그만두게. 그건 마지막수야.》 하고 껄껄 웃으며 좀더 기다려보자고 하였다.

북소리가 그치고 이번에는 징과 꽹과리를 어지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일제히 울리더니 사나운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가 이쪽으로 점점 가까와왔다. 또 마구 웨쳐대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려오는데 그속에 《범잡아라― 범이다.》 하는 말마디도 새초밭으로 메아리쳐왔다.

《형님, 어떤 사람들이 범사냥을 나왔군요!》

박대산은 호기심이 동한듯 새초밭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런가보군. … 여기가 범바위골이라더니 정말인것 같네.》

장영실은 통영갓을 제껴올리며 여기저기로 눈길을 보냈다.

《아이, 무서워…》

영아는 몸을 옹송그리며 두사람사이로 바싹 다가붙었다.

《무섭기는 뭘… 여기 억센 랑군이 있는데…》

장영실이 쾌활하게 웃으니 영아의 얼굴에 수집은 웃음이 발그스름히 피여났다.

《그래두…》

《범보다 무서운것은 사람이다. 범은 어쩌다가 방비없는 사람들을 해치지만 간악한 고을아전들은 숱한 백성들을 등쳐먹고 간을 빼먹고 굶겨죽이고 〈죄〉를 주어 죽이지 않느냐. 길을 오면서 너도 보았지. 그게 범이 저지른노릇이냐. 사람이 저지른 참상이지.》

《형님말씀이 여불없소이다. 범보다 무서운것은 사람이외다. 범은 잡아죽여도 일없지만 범보다 간악한 놈들을 잡아 처단하면 오히려 〈죄〉를 들쓰니 백성들이 살아갈수 없소이다.》

박대산은 큰숨을 내쉬며 그냥 새초밭을 바라보았다.

꽹과리소리, 징소리, 개짖는 소리, 사람들이 웨쳐대는 소리들이 하나로 어울려 새초밭을 들썩들썩 흔들어놓았다.

《형님이랑 저쪽 뚝아래 몸을 숨기시오이다. 저기 범 한놈이 이쪽으로 옵니다.》

아닌게아니라 새초밭 한가운데로 누런 바탕에 검은 얼룩줄무늬가 난 범이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물가를 향해 슬금슬금 내려왔다. 그놈은 흘끔흘끔 뒤돌아보며 송곳같은 흰이발을 드러내고 조용히 으르렁대였다. 마치 시끄럽게 낮잠도 못자게 하는군― 하듯이 천천히 못가의 너럭바위를 나와서 뻘건 혀바닥으로 물을 훔쳐먹더니 닁큼 뛰여 바위우에 올라앉았다.

바로 그때였다. 숲으로부터 언제 나타났는지 사람 하나가 필마단창으로 벼락같이 달려나오더니 범을 향해 창을 힘껏 내던졌다. 아슬아슬한 순간 창은 등가죽털 한줌만을 뽑아놓고 내물에 날아와 빠졌다.

범은 《으앙―》 소리를 천둥같이 내지르며 눈깜박할 사이에 말탄 사람에게 덮쳐들었다. 순간 말이 《오호홍―》 하고 두발을 쳐들며 뒤발로 높이 솟아올랐다.

범이 앞발로 말의 귀통을 어찌나 세차게 때렸던지 말은 꼼짝 못하고 옆으로 나자빠졌다. 범의 순간타격력은 수백근이 넘는다고 한다. 범은 제 수염과 얼굴을 무척 아끼는 놈이라 모든 대상물을 직접 주둥이로 물지 않고 우선 앞발로 때려눕힌다. 그다음 위험이 가셔진 뒤에 재빨리 적수에게 달려들어 살멱을 물어메친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범은 그까짓 말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의 적수라는것을 알아본것이다. 범이 말에서 떨어진 사람을 향해 재차 덤벼들려는 그 순간 박대산은 범의 꼬리를 덮쳐쥐였다. 그가 어떻게 비호처럼 못가를 에돌아갔는지 아무도 몰랐다.

범은 갑자기 제 꼬리를 잡아당기는 사람을 보고 진노하여 산천이 깨져나갈듯이 《으―앙―》소리를 내지르며 뒤를 향해 몸을 돌려댔다. 허나 박대산이 세괃게 꼬리를 잡아당기는탓에 몸뚱이를 돌려댈수가 없었다. 그놈은 기를 쓰고 몇번 돌아서려고 하였으나 그때마다 허탕을 치더니 박대산에게 끌리우기 시작하였다. 꼬리를 붙잡힌것만 하여도 분한 일인데 끌리워간다는것이 또한 참을수 없는 수치를 당한듯 송곳같이 사나운 이발을 드러내고 무섭게 울부짖었다.

범의 꼬리를 놓치면 죽는다. 그래서 호미난방이라는 말이 생겨난것이다. 그러나 박대산에게는 그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는 이놈의 범을 물에 끌어다가 빠뜨려 죽일 차비였다. 범은 물을 싫어한다. 또 그만큼 물에 익숙치 못하다. 이것을 잘 알고있는 그는 못가로 한치한치 범을 끌어갔다.

사람과 범의 필사적인 힘내기가 벌어졌다. 범은 날카로운 발톱을 땅에 꽉 박았으나 그것도 쓸데가 없었다.

그 발톱들은 땅에 깊숙한 홈채기를 내며 풀뿌리들을 끊어놓을뿐 앞으로 움쳐낼 힘을 얻어내지 못하였다.

숲속에서 나무가지사이로 이 광경을 내다보는 영아는 가슴이 한줌만 해져서 손을 입에 가져다가 저도모르게 꽉 깨물고있었다.

(어쩌누… 그러다가 놓치면… 아― 어쩔려고…)

영아는 을지오빠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는 말안장뒤에 싣고오던 낫이 떠올랐다.

그것이라도 들고나가야 한다. 범과 싸우다가 남편이 죽으면 나도 함께 죽으리라― 그는 사생결단 숲속을 뛰쳐나가 말이 서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나 말도 놀라 곁을 주려 하지 않았다.

《얘, 일없겠다. 우린 대산이 범잡는것을 구경이나 하자. 과시 용맹하고나. 하하하.》

장영실이 뚝우에 언제 올라섰는지 영아를 안심시키며 손을 잡아 이끌었다. 사냥개들이 물가로 달려나와 범한테 감히 달려들지는 못하고 왕왕― 짖어대며 이리뛰고 저리뛰였다.

드디여 대산의 뒤발이 물속으로 뻗어내린 너럭바위를 디디고 다른 한발을 뒤로 옮겨 물속을 디디였다. 한발자국 또 한발자국 뒤로 옮길 때마다 물은 대산의 정갱이에 닿고 무릎에 차올랐다.

마침내 범의 뒤발이 물속에 잠겼다. 그러자 불에 덴 놈처럼 최후의 힘을 다하여 앞발로 너럭바위턱을 세차게 잡아당기며 못가를 뛰쳐나가려고 하였다. 허나 어림도 없었다.

대산이는 몇발자국 끌리워나가기는 하였지만 범의 꼬리를 더욱 꽉 그러쥐고 다시 《음―》소리를 내지르면서 끌어내리였다. 그의 두눈은 자신만만한 빛을 뿜고 한 일자로 굳게 다문 입과 얼굴에서는 억센 힘장수의 기풍이 내배였다.

물은 벌써 그의 배허벅에 차올랐다. 갑자기 물보라가 뽀얗게 일어났다. 물에 빠져들어가는 범이 물속을 뛰쳐나가려고 앞발을 들고 솟아올랐다가 떨어져내리고 또다시 솟아올랐다가 떨어져내리며 일으키는 물장구, 물보라였다. 그것은 마치 범이 우정 거대한 물장구치기놀음을 하는것 같았다.

범은 물속에 대가리를 처박히지 않으려 하고 사람은 그놈을 물속에 빠뜨려 숨줄기를 끊으려고 하였다. 범은 물이 더 무서웠던지 제 꼬리를 당기고있는 사람을 잊어버리고 한사코 물속을 뛰쳐나오려고 했다.

《허허, 그놈 잘 놀아난다―》

말에서 떨어졌던 사냥군량반이 어느 사이 흔연히 못뚝우에 올라서서 수염을 흐뭇이 쓸어내렸다. 그 량반은 언제 범한테 놀랐던가싶게 마치 좋은 구경거리를 만난것처럼 거동이 한가스러웠다.

그는 처음 보는 희한한 광경에 매우 흡족한듯 눈에 기쁨을 담기도 하고 아이들처럼 순진한 호기심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잘한다, 잘해, 인젠 범의 꼬리만 잡고 가만히 서있어도 되겠네.》

대산은 뚝우의 점잖은 량반을 향해 《알았소이다.》하고 겸손히 웃었다.

사람은 큰일을 함께 겪으면 서로 모르던 사이라 해도 오랜 구면처럼 인정이 가까와지는것 같다.

《장한 젊은이로다!》

량반이 웃으며 대산을 치하하였다.

뿔나팔과 북을 들고 혹은 징과 꽹과리, 활과 창을 든 범몰이군들이 못가로 급급히 달려왔다.

상투쟁이장정들 여라문에 머리태를 둘둘 감아 베수건에 감추고있는 총각들이 대여섯이다. 그들은 량반이 무사하다는것을 알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화색이 도는 얼굴들을 숙이였다.

《큰일칠번 하였소이다.》

나이든 중늙은이 하나가 일동을 대표하여 말하였다.

《저희들이 미처 뒤따르지 못하와 죄송하옵나이다.》

《오냐, 내 걱정은 말구 너희들은 저 젊은이를 보아라.》

범몰이군들은 그제야 량반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못 한복판에 범을 끌어넣고 제 마음대로 가지고노는 대산이를 놀랍게 바라보았다.

《아니 저런… 세상에 범장수도 있기는 있네그려.》

《어데서 온 젊은이인데 맨손으로… 땅에서 솟았나, 하늘에서 내렸나.》

《그렇게 드센 범도 물속에선 어방이 없소그려.》

《저것 보게, 범이 인젠 한꺼풀 수그러들었군.》

한식경이나 물장구를 치며 날뛰던 범은 시간이 흐를수록 맥을 쓰지 못하고 물속에서 대가리를 종내 솟구어올리지 못하였다.

대산은 범을 물속에 그대로 두었다가 마지막물거품이 《꾸르륵―》올라온 뒤에야 너럭바위우에 끌어올리였다.

《야, 그놈 우리네 중송아지만 하다!―》

《웬걸, 중송아지보다 더 크겠네!》

《발통 하나가 큰 황소 발통만 해. 에― 저 발통 봐.》

《이놈을 며칠전에만 잡았어두 우리네 암소를 떼우지 않으련만, 그참…》

몰이군들이 하는 이소리저소리를 흘려들으며 뚝우에 올라선 대산이는 수염이 잘 생긴 량반앞에 다가갔다.

첫눈에도 나이 오십이 지나보이고 훤칠한 키에 안광이 류다른 사람이라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웠다.

짐작에도 어느 무관량반이 하인들과 종들을 거느리고 사냥을 나온듯 하였다.

《나리님께서는 어디 다친데가 없나이까?》

《나는 아무 일 없거니와 젊은이몸에는 할퀸 자리라도 없느냐?》

량반의 말마디에는 수하사람들을 많이 거느려본 사람의 냄새가 짙었다.

《예, 그러면 소인은 안심하고 물러가겠나이다.》

《가다니, 옷이나 벗어 말리워입고 가도 가야지.》

《아니옵나이다. 저기 제 안해와 형님이 기다리고있사옵니다.》

박대산이 손으로 가리켜보이는 곳으로 눈길을 좇은 량반은 못건너 서있는 장영실과 영아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였다.

장영실네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대는 정3품의 무관복을 입었구만. 어느 벼슬에 뉘시오?》

량반은 초면에 허물없이 대하는것을 나무람 말라듯이 사람좋은 웃음을 지으며 친근하게 물었다.

마치 거치장스러운 례의범절은 떼여버리고 직방 본론으로 들어가자는것 같았다.

장영실도 호감이 가는 이 량반이 비록 평복차림을 하고있으나 나라의 원로재상인줄로 알고 허리를 깊이 꺾어 례의를 지켰다.

《소관은 상감마마의 성은을 크게 입어 상호군벼슬을 받은 장영실이나이다.》

《오! 장영실이라… 그대가 바로 나라의 재사 장영실이렷다!―》

량반은 오래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을 만난듯 무등 반갑게 껄껄 웃었다.

《내 그대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왔지만 이렇게 직접 면대하기는 처음이노라. 내가 임금이라 해도 그대를 높이 등용했을테지. 사람마다 일기일능을 다하게 하자면 량반, 상놈 차별없이 벼슬을 주어야 하구말구. 듣자니 그대는 임금님의 벼슬을 받고 고향에 마을돌이를 갔다더니 지금에야 돌아오는 길인가보구나. 그래야지. 잘했노라. 벼슬에 올라 고향에 다녀오지 않는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에 나돌아다니는것과 같으니라. 하하하…》

장영실은 이렇게 자기를 잘 알고 반가와하며 소탈하고도 호방한 웃음을 날리는 량반에게 마음이 대번에 끌리였다.

그러나 대관절 누구인지 알수 없어 머뭇거리였다.

《그대는 이 사람이 누구일가 하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허허… 내가 바로 양녕 리제로다. 지금 임금의 형이란 말이다. 그래, 어떻냐?》

량반이 비로소 상하를 두지 않고 허물없이 자기를 드러내자 장영실은 물론이요 대산이와 영아도 깜짝 놀랐다.

그들은 허겁지겁 땅에 엎어지듯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임금의 형이라니 이 무슨 일이냐. 대낮에 눈을 펀히 뜨고 꿈을 꾸는것인가. 어떻게 이런 곳에서 임금의 형님을 만나볼수 있는가.

《황송하오이다. 대군마님께서 앞에 계시여도 알아뵙지 못한 죄를 용서하옵소서.》

《허, 죄는 무슨 죄… 모두 일어들나거라. 장공이 먼저 일어나야 모두 일어날것 같군. 응?》

양녕은 뭘 그리 놀라는가, 사람이란 이렇게 서로 알고보면 별다른 구별이 없는것이다, 상하동락하면 반연이 깊어지는 법이라 사람이 량반이라고 눈이 하나 더 있는것이 아니요 상놈이라고 눈이 하나 없는것이 아니다, 제가 먼저 자기를 지나치게 비하하면 남들도 낮추보는것이라고 허리를 굽혀 장영실의 팔소매를 잡아올렸다.

《사람들이 공연히 이런저런 하찮은 법들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제가 얽혀들어서 제절로 속박당하지. 안그런가, 응? 하하하.》

장영실네 세사람은 일어서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두손을 무릎우에 포개고 감히 머리를 들지 못했다.

해는 벌써 새초밭중천을 지나 서쪽을 향해갔다.

범몰이군들은 너럭바위우에 자빠져있는 범을 둘러싸고 아직도 이러니저러니 떠들어대고있었다.

《범장수젊은이는 이름이 무엇인고? 어디서 살고 무엇을 하는고? 방금 내 생명을 구해준 은인을 몰라서야 되겠느냐.》

양녕은 박대산이 앞으로 한걸음 다가서서 그의 어깨를 웃사람답게 두드려주었다.

그 언행에는 박대산을 대견해하는양이 짙게 어려있었다.

박대산은 저도모르게 몸이 옹송그려졌다.

어떻게 대답할지 몰랐다. 자기를 숨김없이 자초지종 다 말할것인지 아니면 변성명을 한 그대로 대답할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지난 초봄에 자기 가족을 살려낼뿐만아니라 지금까지 진 빚과 온갖 부역까지도 다 면제하여주라고 한 임금의 은총을 입은 몸이 바로 그 임금의 형님이 되는 양녕에게 차마 거짓말을 할수 없었다.

그뿐인가. 장영실도 임금의 덕에 높은 벼슬을 받았고 영아도 관비의 몸에서 풀려나고 자기도 그를 안해로 맞을수 있은것이다.

이렇게 보아도 임금의 덕이요, 저렇게 보아도 임금의 덕을 입은 몸이다.

그러나 반지빠르게 모든것을 그대로 고했다가 일이 뜻밖에 틀려지는 날이면 만사가 끝장날것이다.

박대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범의 꼬리를 잡고서도 제 마음대로 휘둘러대는 그였지만 마음이 곧고 정직한 그는 이런 일에 대해서는 쩔쩔매는것이였다.

박대산의 딱한 심정을 제꺽 알아차린 장영실은 박대산을 대신하여 양녕대군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저 사람은 본래 경상도에 사는 사람이온데 이름은 박대산이라 하옵니다. 소인이 동래현에서 저 사람을 알고 저애와 짝을 무어주리라 하였다가 저애는 관비의 몸이고 소인은 발탁되여 대궐에 올라가있었길래 수년이 지난 오늘에야 성례를 치르었나이다.》

장영실은 박대산의 출신도와 본이름만 내놓고 그외는 있는 사실대로 여쭈어올렸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그만이지 신분에 구애되여 수년세월 애간장을 태웠고나. … 이번에 임금의 은총으로 량인백성이 된 다음에야 혼례를 갖추었단 말이군. 그렇지?》

《그렇사옵니다.》

《만일에 임금의 덕화가 없었더라면 짝을 뭇지 못하였으리라.》

양녕은 저 혼자소리로 말꼬리를 낮추며 추연히 먼산을 바라보았다.

그도 한때 세자궁의 시녀 초금이를 사랑하다가 부왕 태종과 세자궁의 간관들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한채 상사병에 걸린적이 있었고 그후에 어리라는 아릿다운 처녀를 또 사랑하다가 그것도 나중에 탄로되여 그자신은 세자궁에 연금되고 처녀는 실련을 이기지 못하여 북악산에 들어가서 제 손으로 목매 죽었었다.

처음에 사랑하던 시녀 초금이는 그전에 부왕의 지시로 참형을 당하였었다. 두 처녀는 이 세상에 없다.

그때로부터 스무해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양녕은 그 사랑을 못잊어 이산, 저산에 두견이 울면 초금이와 어리의 넋이 아닌가 하고 애달피 한숨을 지었다.

그런데 제앞에 있는 이 젊은 범장수부부도 그런 곡절을 겪었다니 생각이 많아졌다.

그때문인지 몰라도 양녕의 가슴속에서는 박대산부부를 힘이 닿는껏 도와주고싶은 충동이 솟아올랐다.

양녕은 《다 그 잘난 신분탓이로다.》 하고 혼자소리를 또 하였다. 이말은 지난날 자기가 직접 당했던 불우한 사랑과 고통을 더 많이 념두에 두고 한 말이였으나 장영실네 세사람은 대군에게도 그런 사랑이 있었다는것을 알리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군의 이 말이 참으로 고마왔다.

누가 이처럼 자기들의 사랑을 걱정해준 일이 있었던가.

양녕은 아픈 추억을 털어버리려는듯 제 먼저 풀판에 앉았다.

《게들 편히 앉게. 언제까지나 불편하게 량수거지를 할터인가.》

그는 도무지 임금의 형님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같지 않았다. 꼭 어느 평범한 량인백성같이 진땅, 마른땅을 가리지 않았다.

이리하여 장영실이네 세사람은 양녕대군과 함께 풀판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중에 박대산과 영아가 막부득히 장영실을 따라가기는 하지만 당장 거처할 곳이 없다는 사정까지 다 아뢰게 되였다.

《오, 그래, 그 마침이로다. 나는 박대산이 임자가… 이름이 박대산이라고 했었지. 그래 박대산이 임자가 탐나서 어떻게 하면 임자를 내곁에 붙잡아둘가 했더니 내 오늘 헌헌대장부를 하나 얻은셈일세. 먹고 입고 쓰고살 걱정은 안시킬터이니 여기에 눌러앉게. 우리 사냥이나 실컷 하면서 한세상을 즐겁게 마무리하세. 임자 새각시는 떡돌같은 아들을 자꾸 낳아주면 될게구, 응? 어떻냐, 내 말이.》

박대산이는 귀가 번쩍 뜨이는것 같았다. 장영실이도 영아도 마찬가지로 가슴이 두근거리였다.

동래현을 떠날 때부터 걱정스럽던 일이 이리도 뜻밖에 풀려나갈줄은 몰랐다.

허나 그렇게 되면 노랑봄철에 산불이 퍼져가듯 사방에 소문이 날것이 분명하다. 그 불티들이 장영실에게 옮겨붙고 또 영아와 박대산에게도 옮겨앉을지 누가 알랴. 알다가도 모를 일이 세상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즉석에서 풀려나갔다.

《상호군은 임금이 아는 사람일지나 젊은 박대산은 임금이 모르는 사람일세. 그러니 구태여 임금에게 상주할 필요가 없는것만큼 이 일을 비밀로 하자구. 내 말이 임자들에게는 이상스러운데가 있을테지. 그건 차차로 이야기되겠지만 달리 생각할건 없느니. 나로 말하면 조야의 감시속에 있는 몸이거든. 내가 누구를 자주 만나는가, 또 어데로 돌아다니는가, 별것을 다 알려고 눈을 밝히거든. 하하하― 임금은 한피줄을 타고난 형제라 그렇지 않건만 오히려 조정의 재상들과 삼사대간들이 해괴한짓을 식은죽 먹기로 하지.

그런즉 박대산이 임자가 나와 함께 있으려면 이 일을 루설치 말아야 하네. 범을 맨손으로 잡는다는 사람을 내가 끌어들이고있다고 하면 이러쿵저러쿵 말썽을 일으킬테니까. 마치나 내가 드센 장수라도 모으고있는듯이 그들이 나를 의심하네. 내 말귀를 바이 알아들었느냐?》

세사람은 그가 왜 조야의 감시속에 들었는지 또 대군곁에 군사들이 모여들면 왜 조정에서 무서워하는지 아직은 딱히 알수 없는 일이지만 비밀을 지키자는 그 말은 박대산에게 있어서 죽고 사는 운명대사라 이곳에 눌러앉는 조건중의 첫째가는 조항과도 같은것이였다.

《황송하나이다. 하오나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여서…》

장영실이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숙이였다.

《그럴테지. 그나 세상에 갑작스런 일이 얼마나 많다고… 오늘만해도 그대들은 호랑이를 갑자기 만났지. 또 나를 만난것도 미리 준비했다가 만난것이 아니라 갑자기 만났고 또 여기에 눌러앉자는 말도 갑자기 들었겠다. 모든 일이 얼핏 생각하면 갑작스런것 같아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다 오래동안 제 곬을 타고오다가 벌어지는 일이니라. 내가 이자 호환을 당할번 하다가 갑작스럽게 생명의 은인을 만난것처럼…》

양녕의 말은 옹배기물을 꺼꾸로 쏟듯이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그 물은 장영실이네 세사람의 가슴을 시원히 적셔주면서 근심걱정을 말끔히 씻어가는것이였다.

《임자네들의 팔자소관이란 책에는 아무날 아무때 임금의 형과 만나서 동락하리라 하고 이미 씌여있는걸세. 암, 그렇구말구. 하하하!》

세사람은 대군앞이라 곁따라 웃지는 못하였지만 모두 조심스러운 웃음을 담고 서로 마주보았다.

그 눈길에는 대군의 권고를 따르자는 말없는 약속이 깃들어있었다.

양녕도 그들의 눈빛을 읽고 만족한듯 수염을 흐뭇이 내리쓸었다.

얼마후에 장영실은 한시름 놓인듯 가벼운 마음으로 말우에 올라 대궐을 향해 혼자서 떠났다.

그는 박대산과 영아에게 너희들은 대군마님을 잘 모실뿐아니라 임금의 성은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였다.

이제 헤여지면 언제 만날지 기약하기 어려운 일이여서 장영실도 박대산이도 눈물을 머금고 리별하였다.

《오빠― 아, 잘― 잘 가시오―이다―아―》

영아의 눈물에 젖은 목소리가 새초밭을 넘어 장영실의 뒤를 따라 비운의 나래를 퍼덕이며 날아갔다.

여기에 함께 있었으면, 아니 함께 오빠따라 갔으면 하는 그 마음이 메아리가 되여 산굽이를 도는 장영실의 가슴을 세차게 울려주었다.

사람의 길지 않은 한생에 리별이란 어이 생겨 이다지도 애절한 눈물을 자아내는가. 허나 어찌하랴.

박대산과 영아는 사세부득한 이 리별이 없이는 기구한 운명을 의탁할곳이 없는것이였다.

《여봐라, 너희들은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주안상을 크게 차리도록 하라. 모든 사람들이 다 참녜하도록 하라. 멍석이란 멍석은 죄다 내서 깔아라. 그 범은 내 말우에 싣고… 오늘 저녁엔 술과 함께 범고기를 맛보여주리라.》

양녕이 범몰이군들이 몰켜있는 못가 저켠에 대고 큰소리로 웨쳤다.

《예, 알았소이다.》

모두 얼싸 좋아라 하고 다같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저 사람들은 내 집의 하인들일세. 자, 우리도 어서 가자. 이 새초밭은 임금이 나에게 준걸세.

대산이, 임자에게 이 새초밭 사냥터를 관리할 소임을 맡기노라. 쉰댓결은 실히 되네. 이 새초밭이 끝나는 저 산탁아래 임자네들이 쓰고 살 빈집이 한채 있니라. 거기로 가자구.》

박대산과 영아는 말을 끌고 양녕대군을 따라 새초밭 한가운데를 꿰질러나갔다. 사냥개 세마리가 주인의 길을 초잡아나가듯 냄새를 맡으며 앞섰다.

길길이 자란 새초밭은 사람들의 키를 넘었다. 앞서가는 개들이 자주 가을꿩들을 튕기군 하였다.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말라든 길다란 새초잎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서걱서걱 서로 잎새들을 비비며 설레였다.

찔레꽃덩굴, 분지나무, 찔광이나무와 같은 가시나무들은 빨갛고 까만 열매들을 그대로 안고있었다. 새들이나 짐승들이 열매들을 따먹으러 오면 날카로운 가시들은 창끝같이 고누어들고 《찌를테야, 찌를테야. 가까이 오지 마―》 하고 열매를 지켜온듯싶었다.

이따금 청신한 하늘빛꽃송이를 이고 선 가을들국화포기들이 반겨 웃는것이 눈에 띄였다.

듬성듬성 서있는 오동나무, 늙은 떡갈나무, 도토리나무와 같이 넓은 잎을 가진 나무밑에는 새초들이 자라지 못하였다.

거기에는 메돼지, 노루와 같은 산짐승들의 발자국들이 그대로 찍혀져있었다.

그들이 새초밭을 벗어나 대군이 말한대로 빈집이 있는 곳에 다달으니 이미 개들이 먼저 와있다가 꼬리를 저으며 달려나왔다.

보매 양녕대군이 개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왔다가 자주 들리는지 내버려둔 집같지는 않았다.

지붕은 새초이영을 두툼히 올렸는데 비가 새여내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래웃방에 부엌이 달린 세칸집! 동래현 영아네가 살던 오막살이집에 비하면 고루거각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다만 사람이 늘 살고있지 않은탓으로 마당에 락엽이 많이 쌓이고 휑뎅그레한 방안과 부엌에는 습기가 슴배여있었다.

불을 때면 습기도 빠질터이고 온화한 가정적인 기운이 흐를것이였다.

《이 집은 내가 사냥하다가 비를 만나거나 눈이 오면 들려 쉬는 집이니라. 그래 어떻냐? 집이 마음에 들면 여기서 살게.》

양녕이 박대산을 돌아보며 흡족히 웃었다.

《너무나 과분한 집이옵니다.》

박대산은 황망히 허리를 꺾었다.

영아도 어깨를 가늘게 떨며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였다. 고마와하는 대답을 이렇게 눈물로 하는것이였다.

《인가와 외따로 떨어져있기에 외롭기는 할터이지만 그대신 고을아전들이 이 집을 몰라서 좋아. 저 산너머에선 조세요, 군포요, 부역이요 늘 들볶지만 여긴 그런것을 모르니라. 그게 제일 좋을걸세.》

박대산은 임금님이 자기 집에서 걸머졌던 온갖 빚과 부역까지도 다 면제하여주라 하더니 오늘은 임금의 형되는 대군이 직접 보살펴준다고 생각하니 자기의 운명은 임금과 굳게 이어진다고 믿어졌다.

머리털을 잘라 신을 삼아드려도 못다 갚을 은혜였다.

《이 몸이 죽어 한줌 흙이 될지라도 대군마님을 받들어모시겠나이다.》

《그대는 내 생명을 구했노니 그대는 할바를 다 했노라. 내가 그대들에게 집을 주고 살 곳을 정해준것은 나의 욕심을 채운것이니라. 그대들을 위한것보다 내옆에 담찬 대장부를 두고싶은 마음 더 크기때문이니라. … 자, 오늘은 대강 손질해 들구 래일부터 집을 잘 꾸리게. 저녁에 어둡기 전에 사람을 보낼테니 내 집으로 오도록 해라. 주연을 펴라 일렀으니 부부가 함께 참녜하여라.》

양녕대군은 이렇게 두사람의 마음을 느긋하게 풀어주고 이내 숲속으로 사라진 오솔길을 따라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양녕대군을 바래워준 박대산과 영아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자기들이 살아갈 집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이게 바로 우리 집이란 말인가. 넓으나넓은 세상에 우리 부부 단둘이 살 집인가. 너무나 큰 행운이 차례져서 믿어지지 않았다.

하늘땅에 대고 우리 집이 옳은가 소리쳐 묻고싶은 심정뿐이였다. 그러나 그 말을 입밖에 차마 낼수 없었다.

물으면 어데선가 《아니다.》라는 대답이 금시라도 들려올것만 같아서였다.

그들은 이 집에 부부의 사랑을 가득가득 채워넣을것이였다.

영아에 대한 사내대장부의 불같은 사랑을, 영아는 박대산에 대한 녀인의 살뜰한 사랑을 아래방에도 웃방에도 부엌에도 끝없이 쌓아올릴것이다. 그리하여 이 집에 금은보화보다 더없이 귀중한 사랑이 가득찰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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