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노비출신 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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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이 김을지를 처음으로 알게 된것은 4년전이였다. 그때 장영실은 임금이 제수한 호군벼슬을 받고 지금처럼 마을돌이차로 고향 동래현에 내려왔었다.

고을군기소에는 화포 두문이 오래전부터 수리를 기다리고있었다. 허지만 그것을 수리할수 있는 장공인이 병들어죽은 다음에는 그것을 고쳐낼 사람이 없었다.

장영실은 서울로 올라가야 할 몸이였으나 고장난 화포를 그대로 두고 갈수 없었다.

《그대가 화포를 살려놓으면 내 그 공을 후히 치르겠네. 조정에는 그대가 사나흘 늦어진다는 장계를 띄우겠네.》

얼마전에 병조의 정랑으로 있다가 부임되여온 고을원은 벌써 화포를 다 수리해놓은것처럼 매우 기뻐하였다.

동래는 왜놈들이 쏠라닥거리는 변방이여서 군사일을 아는 무반관리를 지방관장으로 내려보낸것이다. 그는 장영실의 손이 미치면 화포같은것은 쉽게 고쳐낼수 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동래는 내가 태여난 고장이나이다. 사람이 났다가 죽으면 고향에 흙한줌 보탬이 마땅할진대 오히려 무엇을 더 바라겠소이까. 하하하.》

장영실은 쾌히 고을원의 청을 받아들이고 화포수리에 팔을 걷고나섰다.

그날부터 군기소의 숯불로에는 붉고 푸른 불길이 불끈불끈 치솟고 모루에서 단쇠를 두드리는 메질소리가 낮과 밤을 이어 울려나왔다.

장영실이 쇠집게로 단쇠를 이리뒤집고 저리뒤집으며 쬐꼬만 지시마치로 《딱, 다닥》, 《딱, 다닥》 두드려주면 바로 그 부분에 쌍메질군들이 《영차》, 《영차》 소리를 주거니받거니 큰 메를 휘둘러쳤다. 그때마다 불꽃이 사방으로 튕겨났다.

쌍메질군중에 몸이 좀더 커보이는 사람은 최서방이다. 그는 장영실이 노비로 있을 때에도 그 일솜씨에 늘 탄복해왔었지만 오늘에는 그 탄복이 곱절이나 더 커지는것이였다. 능란하고도 날랜 동작과 명민하고도 영특한 눈빛에는 귀신의 조화가 붙었다고 해야 할것이다. 또 한없이 겸허하고 소탈한 품성은 관노로 있을 때나 호군의 벼슬에 오른 지금에나 변함이 없다. 량반벼슬관이라도 쟁인바치들과 함께 어울려 땀흘리면서 일하는 이런 량반만 세상에 있다면 살아가기가 얼마나 편하랴.

화포 하나가 흠잡을데없이 수리되고 다른 화포도 거의 다 수리되고있던 어느날 수영포의 군정 하나가 군기소에 왔다.

푸른 더그레군복에 붉은 술이 달린 벙거지를 눌러쓴 그 군정은 키가 훤칠하게 삐여지고 해풍에 거무스레 다스러진 얼굴에 눈이 부리부리 빛나는 젊은이였다. 그는 새로 만든 창과 칼을 받으러 왔다가 조정의 호군벼슬관이 직접 손에 쟁기를 들고 화포를 수리한다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동하여 야장간에 들린것이다. 그가 바로 김을지였다.

작업장은 활기롭게 일을 다몰아대고있었다. 쌍메질군과 풀무군들이 웃동을 벗어붙이고 흥겹게 풀무질도 하고 메질도 드세차게 하는 모양이 볼만하여 김을지는 사방을 두릿두릿 살피였다.

작업장 한쪽에 다 수리된 화포 한문이 위엄있게 놓여있었다. 김을지는 화포곁으로 다가가서 미덥게 바라보았다. 이 화포라면 왜놈들을 보기 좋게 짓쳐버릴수 있었다. 누구도 수리하지 못하여 군기소에 내버려졌던 화포가 귀인을 만나 살아숨쉬게 되였다. 그는 일개 군정이지만 서울의 호군나리님이 고마왔다. 왜것들이 달려든다면 직접 창칼을 들고 맞붙어싸워야 하는 군사들의 마음을 합쳐서 인사라도 드리고싶었다.

그러나 어디를 둘러보아도 호군나리님이라고 짐작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나 숯검댕이칠을 한 얼굴에 땀이 번들거리는 잔등을 지고 일손을 세괃게 다그치고있었다.

김을지는 고마운 호군나리님이 일의 순서와 묘리를 가르쳐주고 잠간 자리를 떴나부다고 생각하면서 한창 벼림질을 하고있는 모루가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거기에는 키작은 사나이 하나가 자기보다 세네곱 힘꼴이나 써보이는 엄장 큰 젊은이들을 쌍메질군으로 데리고 어깨장단을 치듯이 잽싸게 집게를 뒤채기며 단쇠를 먹이고있었다.

한쪽 메질군이 쇠메를 내리칠 때 《좋다!》 하고 다른 메질군이 내리칠 때는 《좋지!》 하는 소리를 엇바꾸어가면서 메질군들에게 신바람을 일으켜주는 키작은 사나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좋다, 좋지.》 하는 소리를 따라서 《쿵―》, 《쿵―》 메질소리가 한동안 즐겁게 울려나왔다. 하더니 마침내 키작은 사나이가 《좋다, 그만―》 하고 빙긋이 웃자 두 메질군들도 맞받아 메아리처럼 《좋다, 그만―》 하고 따라 웃으며 쇠메를 내려놓았다.

키작은 사나이는 불그스레 달아오른 부분품을 커다란 물통에 두어번 잠그었다꺼냈다 하였다. 그때마다 《치익―》, 《치―익―》 단김을 내뿜어올렸다.

김을지는 키작은 사나이가 억대우같은 젊은이들을 자기의 의도대로 고분고분 일을 시키면서 그들과 한몸처럼 어울리는것을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에게 무엇이건 물으면 친절히 대답해줄것 같았다.

《수고하오이다. 소인은 수영포의 군정이오이다.》

김을지는 키작은 사나이에게 이렇게 인사를 하고 《우리 군영의 화포를 수리하여준다는 호군나리님이 어디에 계시는지요?》 하고 물었다.

키작은 사나이가 빙긋이 웃으며 메질군들을 돌아보자 그들도 씽긋씽긋 웃기만 하였다.

김을지는 멋적어 뒤더수기를 긁적이였다.

《그걸 왜 물으시우?》

키작은 사나이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채 김을지를 따스히 마주보았다.

《우리 군영의 화포를 호군나리님이 직접 수리하여주신다니 어찌 고맙지 않겠수. 그 나리님께 큰절이라도 드리고싶소이다. … 소인이 하말 군정으로 주제넘게 인사를 차리겠다는것이 여러분네들에게는 우습게 생각될테지만―》

김을지가 또 뒤더수기를 긁적이는데 그의 어질고 착한 진심이 내보인다.

《하하하…》

《하하하…》

메질군들은 눈물이 찔금 나도록 웃고는 대답도 둘이 함께 하였다.

《거기서는 눈을 뜬 장님이구려. 바로 이분이 호군나리님이시오.》

두 메질군이 키작은 사나이를 가리켜주자 키작은 사나이는 숯검댕이칠을 한 얼굴을 붉히며 《아니웨다. 저 사람들이 실없는 소리를 하는거요.》 하면서 쾌활히 웃었다.

《하긴 뭐 호군나리님이 웃동을 벗어내치고 땀을 흘리면서 일할수야 없지요. 호군나리님을 뵈옵시면 우리 수영포군사들의 고마운 인사를 전해주시오이다.》

김을지는 메질군들에게 벙글 웃음을 지어보이고 발걸음을 돌리였다.

키작은 사나이는 문밖으로 따라나오며 《참말 고맙소이다. 우리가 꼭 군정님의 인사를 전해드리겠소이다.》 하고 친절히 바래주었다.

이 키작은 사나이― 장영실이 수영포의 군정에게 제 이름을 선뜻 알리지 않은것은 자신을 호군이랍시고 나타낼수 없어서 그랬지만 한편으로는 그에게 미안스러웠다. 허지만 나라의 변방을 다지는데 도움이 되고 군사들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그 한가지 기쁨이 가슴에 그들먹이 차올랐다.

하루일을 끝낸 이날 저녁에 장영실은 장공인들과 함께 시내가로 나왔다.

맑은 시내물은 저녁노을을 싣고 정답게 흘렀다. 마치 금물결이 흐르는것 같았다. 시내물은 수고많은 사람들을 살뜰히 씻어주려는듯이 그들의 무릎아래를 감돌아 흘렀다.

장영실이네들은 시내물처럼 기분이 맑아지고 피로가 일시에 풀리는듯하여 너도나도 벙글거리며 물을 끼얹었다.

허지만 이 웬일인가. 시내건너 가까운 버들숲에서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하는 녀인의 웨침이 간간이 들려왔다. 장영실이네들은 몸을 씻다말고 우뚝우뚝 일어섰다. 또다시 사람을 살리라는 소리! 그들은 다급히 시내물을 사방으로 휘뿌리며 달려갔다.

장영실이 달음박질치며 앞을 내다보니 어떤 처녀가 군정인듯한 사람을 안고 몸부림치고있었다. 처녀는 뜻밖에도 누이동생 영아였다.

《아니 네가 웬일이냐? 이 군정은 누구이고?》

《오빠, 이 군정이 왜놈들의 칼에 찔리운것이 분명하오이다. 나를 구원하느라고…》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영아는 빨래터에서 조선사람의 옷으로 변장한 왜놈 셋에게 덮치워 숲속으로 끌리워갔었다고, 그리고 숲속에서 정신을 잃었는데 깨여나보니 왜놈들은 간곳없고 이 군정이 자기를 안은채 쓰러져있었다는것을 급히 이야기하였다.

《그러니 이 군정이 너를 위해 왜놈들과 싸운것이렷다?》

《예, 틀림없사와요.》

영아는 군정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제 속옷을 찢어서 막고있었다. 군정은 의식이 없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영아는 군정의 볼을 가만가만 다독이며 정신을 차리라고 안타까이 찾았다.

《아니, 이 사람이 군기소에 왔던 군정이구나.》

《그래요. 아까 빨래하는 나를 보고 자기는 수영포의 군정인데 군기소가 어딘가고 물었댔어요.》

장영실은 얼른 제 머리수건을 벗어서 군정의 상처를 싸맸다. 빨리 손을 써야지 생명이 위태로왔다.

《자, 내게 업혀주우.》

장영실이 제꺽 등을 돌려댔다.

《나리님, 안되오이다. 내가 업겠소이다.》

최서방이 수영포군정을 조심히 껴안아 일으켜세워서 등에 업었다.

그리고 반달음을 치듯이 걸음을 빨리 하였다.

《그 왜놈의 새끼들이 도망쳤나?》

《그런것 같사오이다.》

최서방의 물음에 영아가 대답하며 종종걸음으로 뒤따라왔다.

《천하에 죽일 놈들… 내 손에 걸려들었다면 모조리 박살탕을 내는건데…》

최서방은 분노가 치밀어올라 씨근덕거리며 걸음을 다그쳤다. 아마도 자기의 돌팔매로 놈들을 요정내지 못한것이 분한 모양이였다.

일행이 시내를 첨벙첨벙 건너서 갈림길에 이르렀다. 하나는 군기소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로 가는 길이다.

《나리님, 어데로 갈가요?》

그는 언제나 이같이 장영실을 《나리님》으로 존대해 불렀다. 지난날 장영실이 관노로 있을 때에는 자기보다 나이가 서너살 아래일뿐만아니라 한동네에서 이웃하고 살아온 까닭에 《영실이》 혹은 《임자 재간은 세상 으뜸일세.》 하는 식으로 너나들이를 해왔지만 그가 벼슬에 오른 뒤에는 그렇게 대할수 없었다. 벼슬은 그렇다치고라도 장영실의 뛰여난 재능과 사람됨이 진정으로 존경스러웠기때문이였다.

《우리 집으로 가소이다. 오석형님, 힘들지 않소이까?》

장영실이 따라오며 이렇게 대답도 하고 묻기도 하였다. 그도 어릴 때부터 입에 오른대로 최서방을 존대하여 《형님》 또는 《오석형님》으로 부른다. 《오석》이란 이름은 본이름이 아니고 그가 다섯개의 돌을 팔매쳐서 다섯개의 목표물들을 어김없이 까부신다고 하여 그에게 달아준 자랑스런 별명이다. 엄장이 큰데다가 힘도 또한 그만큼 억세서 남들보다 큰돌을 가지고도 힝힝― 멀리 던질뿐아니라 겨누는대로 맞혀버리는것이였다.

어느해인가 왜놈 다섯이 바다가마을에 몰래 기여들어 도적고양이처럼 무엇인가 훔쳐가지고 도망가다가 최서방의 다섯번 팔매에 다섯놈이 다 뒤골통들이 빠개져 죽었다. 그때부터 《오석》, 《최팔매》란 별명이 더 유명해지고 존경스럽게 불리웠다.

《예, 이 젊은이도 몸이 거쿨지오이다.》

최서방은 군정을 한번 추슬리고 걸음을 다그쳤다. …

하늘가엔 어느 사이 은싸래기같은 별들이 불을 켜들고 불그스레한 방등불빛이 흘러나오는 장영실이네 단간 오두막집 뙈창가로 찾아오는것 같았다. 경각에 이른 생명을 살려내려고 의원을 데려오러 달려가는 장공인들의 급한 길을 밝혀주듯이 유정히 빛났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갔다.

마을의 의원들도 돌아가고 최서방과 함께 왔던 장공인들도 한시름 놓여서 돌아들갔다.

장영실과 영아는 꼬바기 밤을 지새워가며 군정을 돌보았다.

상처에 피멎이약과 독을 푼다는 약을 붙이고 따스한 꿀물을 풀어먹이면서 의원이 주고간 여러가지 약을 쓴 효험이 있어서 군정은 새벽녘에 눈을 떴다.

장영실과 영아는 안도의 숨을 가만히 내쉬였다.

《정신이 좀 드우?》

장영실은 그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영아는 기쁨이 반짝이는 눈길로 군정의 얼굴을 쓰다듬듯 바라보았다. 낯모를 외간 남자가 자기를 구원하여주고 죽음의 미궁속을 헤매이다가 이렇듯 의식을 차린것을 보니 뜨거운 눈물이 절로 솟구치였다.

처녀는 자기를 구원한 이 군정이 바로 빨래터에서 군기소로 가는 길을 묻던 수영포의 군정임을 시내가버들숲에서 이미 알아보았었다.

남을 위해 피를 흘리고 의식을 잃었던 사람.

영아는 자기 몸의 모든것을 다 떼주고 제 한몸을 다 바쳐서라도 군정이 자리를 털고일어나 그전처럼 씩씩한 모습으로 수영포에 돌아갈수만 있다면 자기의 소원이 다 풀릴것만 같았다.

《여기가 어디시우?》

군정은 누운채로 목을 돌려 방을 둘러보다가 아니 누울데를 누운듯 평시처럼 움쭉 일어나려고 하였다. 하지만 나직이 비명을 지르면서 머리를 베개우에 내려놓았다.

《아직은 일어날수 없소. 며칠 더 누워있어야 하리다.》

장영실은 김을지의 이마에 송골송골 내돋은 땀을 씻어주었다.

김을지는 어두운 등잔불빛에 그가 누구인지 처음엔 몰랐다가 이제야 알아본듯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아니, 이게 누구시우? 화포를 수리하던분이시구려!》

《옳소이다.》

장영실이 마주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였다.

《영아, 이 사람이 인젠 힘든 고비를 넘겼나부다.》

《아니, 정말… 저… 저때문에 이렇게 몸을 다쳤으니…》

영아는 눈물이 또 절로 나와서 옷고름을 눈언저리로 가져갔다.

《거긴 빨래하던… 까무라쳤던 아가씨를 보았었는데… 무사했군요!》

김을지는 처녀가 살아난것이 무한히 기뻤다.

《이애는 내 동생인데 관가의 관비우. 아가씨라니 말이 되우. … 이애 이름은 장영아라우.》

장영실이 하는 말을 영아가 받았다.

《관비 영아는 죽었던 몸이 군정님을 만나 다시 살아났사오이다.》

영아는 울음소리를 삼키며 두무릎을 모아 앉은절을 하였다.

《아니, 절은 무슨 절… 내 이름은 김을지라 하우. 고향은 충청도 양지현이구 지난해에 여기 와서 군역을 지고있수.》

김을지는 이같이 자기 소개를 하고 뒤를 달았다.

《내가 살아난것은 이 집 남매덕분이오이다. 그러니 우리 다 서로서로 살려주고 구원받은 생명의 은인이웨다. 내 엉뚱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이제부터 〈형님〉, 〈동생〉하구 부르면 어떨지. … 거기서 좋다면 난 그쪽을 〈형님〉으로 모시겠소이다.》

《그참 좋은 생각이우. 난 서른살을 넘기였으니 〈형님〉이 되겠수.》

장영실이 시원시원 반갑게 받아들이자 영아는 방긋이 웃으며 손벽을 짜락짜락 쳤다.

《아이 좋아, 그럼 난 〈을지오빠〉라고 불러도 되겠군요!》

《암, 그렇구말구. 그럼 난 끌끌한 동생 하나를 얻었네그려!》

장영실은 어제 낮에 화포를 수리하여준다고 진심으로 인사하던 이 김을지에게 호감을 샀던바이고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녀동생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여서 혈육과 같은 정이 갔다. 그는 자기의 말로 다 할수 없는 고마움을 체온으로 보태듯이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았다.

《형님, 날이 밝으면 이 동생이 할 일이 하나 있소이다. 어제 저녁중으로 수영포에 돌아가 군기소에서 받은 장칼 열자루, 화살 백대를 바쳐야 하옵는데 이렇게 누웠으니 어찌 하리까. 그 칼과 화살은 시내징검다리를 건너서 조금 가다가 큰 바위밑에 감추었는데…》

김을지는 매우 걱정스러워하였다.

《동생, 내가 진작 그 생각을 못했네. 임자가 위태하여 덤벼치느라고 그 생각을 할 짬도 없었지. 그건 념려말게. 날이 밝으면 그것들을 찾아다가 사람을 띄워보내고 자네의 일도 보장(보고)하고… 요긴한것은 임자가 빨리 쾌차하는것이네.》

장영실은 빙그레 웃으며 김을지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형님, 고맙소이다. 그러면 제 상처가 저절로 낫소이다. 하하…》

김을지는 소리내여 웃다가 상처가 아픈듯 얼굴을 찡그리였다.

《을지오빠, 웃어도 가만가만 웃으시와요. 호호…》

《하하하, 네 말이 옳다.》

《형님, 제가 할 일이 또 하나 있소이다.》

《또 하나?! 그게 뭔데…》

장영실과 영아는 그의 일이라면 다 들어주고싶어 눈을 빛내면서 김을지를 내려다보았다.

《형님, 제가 영아를 덮쳐가던 왜놈 셋과 싸웠는데 그놈들의 시체가 소나무숲속에 딩굴고있을것이오이다. 그것들을 어찌하면 좋을지…》

《뭐?! 왜놈을 셋씩이나? 동생이 참말 큰일을 하였구만! 장해… 잘하였네!》

《난 그것도 모르고… 아이, 오빠… 으흐흑…》

영아는 자기를 위해 왜놈들을 죽여버린 김을지가 한없이 고맙고고마와 새삼스럽게 눈물이 터져나왔다.

《그런 일이 있은줄 영아도 몰랐구만.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를 해주게. 날이 밝으면 관가에 가서 어제 벌어진 일을 알리구 죽은 왜놈들을 처리해야 할터인데 먼저 내가 자상히 알아야 할게 아닌가.》

《그러면 처음부터 말하리다.》

김을지는 영아가 숟가락으로 떠넣어주는 꿀물을 받아넘기고 천천히 말하기 시작하였다.

…김을지는 어제 아침 수영포 영장으로부터 동래현 군기소에 가서 새로 만든 칼과 화살을 가져오라는 군령을 받았다. 군기소까지는 50리가 잘되였다.

그는 짚신감발을 든든히 하고 길을 떠났다. 씨엉씨엉 바람을 일으키는 걸음발밑에 길은 푹푹 줄어들었다.

그가 지름길을 찾아 산골시내를 건너가는데 맞은편에 빨래하는 처녀가 보였다. 그는 처녀와 가까운 징검돌우에 멈춰섰다.

《저… 말 좀 물어보소이다.》

처녀는 난데없는 사람의 목소리에 와뜰 놀라서 이쪽을 돌아보고는 이내 안심한듯 허리를 폈다. 그리고 몸을 반쯤 돌리고 물음에 대답할 차비로 가만히 서있었다.

처녀의 어깨뒤에서 탐스러운 머리태가 물결쳐 흘렀다. 그 한끝에는 갑사댕기가 마치 꽃나무에 나비가 날아와 붙은듯 김을지의 눈에 안겨들었다.

《어서 말씀하시와요.》

김을지는 처녀의 고운 목소리가 맑은 시내물소리와 어울려 가슴에 흘러드는것 같았다.

《관가 군기소가 이 근방에 있다고 해서… 어데로 가는지 좀 알려주소.》

《네―에―》

처녀의 얼굴에 가벼운 웃음이 방그레 피여났다.

《저 산 오른쪽모퉁이를 돌아가면 메질소리가 들려오나이다. 군정님은 수영포에서 오시나이까?》

《그렇소만 그걸 어떻게 아는거요?》

김을지는 반가와 벙글벙글 웃었다.

《지금 군기소에선 수영포의 화포를 수리하느라고 드바삐 일손을 다그치나보오이다.》

《그런가, 고맙소다. 헌데 저… 조정에서 호군나리님이 우리 화포를 수리해주신다는데 그것이 사실인지요?》

처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방긋이 웃었다.

《가보면 아시리다.》

《허, 참말이군. 헛소문이 아니구만. 고맙소이다.》

김을지는 불현듯 외지에 온것 같지 않고 이 시내물, 이 처녀, 이 산천이 고향땅의 모든것처럼 생각되였다. 빨래하는 처녀가 저 멀리 산너머, 구름너머 충청도 양지현 자기 집 녀동생 아지와 같아보여서인지 아니면 수영포의 화포를 드바삐 수리하고있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이제 만나게 될 호군나리와 장공인들도 이미 알고지내던 사람들처럼 여겨졌다. 하기는 왜놈들을 치고 나라를 지키자고 자기도 군역을 지는 사람이고 창과 칼을 만들고 화포도 수리하여주는 장공인들과 호군나리도 나라를 지키자는 사람들이다. 우리들모두 이 하나의 장한 뜻으로 맺어진 사람들이니 어찌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 하여 낯선 사람들이겠는가.

김을지는 처녀에게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징검다리를 뛰여넘어갔다. …

이렇게 건너왔던 시내를 다시 건너 돌아갈 때는 빨래하던 처녀가 아쉽게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엔 한낮을 지난 해가 벌써 서켠으로 기울어질듯말듯 하였다. 빨리 길을 재촉해가면 날이 어둡기 전에 수영포로 돌아갈수 있었다.

처녀는 빨래를 다하고 돌아간게로구나 하고 김을지는 어쩐지 서운한감을 느끼며 낯익은 징검돌을 건너 기슭에 발을 옮겨놓았다.

그는 그 순간에 걸음을 뚝 멈췄다. 길우에 초신 한짝이 떨어져있었다. 빨갛고 노랗고 푸른색 신총날들을 세워 곱게 삼은 자그마한 초신은 분명히 처녀들의 신발이였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신은지 얼마 되지 않은 꽃신이다.

《이 꽃신 한짝이 왜 여기에 있을가?》

그는 몇걸음 더 나아가서 길섶에 떨어져있는 다른 한짝의 꽃신을 또 집어들었다. 두짝을 맞추어보니 한컬레다.

젖은 신발에서 물방울이 맺혔다가 떨어지는것을 보니 방금 어떤 일이 벌어졌다는것을 대뜸 알수 있었다.

김을지는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건너온 징검다리 아래우를 급히 훑어보았다. 그의 눈길은 여울목에 걸려있는 빨래광주리에 박혀들었다. 방금이라도 물결에 떠실려 내려갈듯말듯 주인을 애처롭게 찾는듯부르는듯 하여 가슴이 찢겨왔다.

(아, 왜놈들이 처녀를 덮쳐갔구나. 이놈들이 여기까지 와서 대낮에 악착한짓을 했구나. )

근간에 왜놈들이 우리의 연해에 도적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기여들어 못된짓을 자주 저질렀다.

김을지의 눈에 숯불같은것이 번쩍이였다. 그는 몇발자국 숲으로 들어가 바위아래에 지고가던 칼과 화살을 감추고 허리에 찼던 칼을 뽑아들었다.

(이놈들, 멀리는 가지 못했으리라. )

김을지는 불이 펄펄이는 눈망울로 사방을 불태울듯이 뚜릿뚜릿 살피며 달려나갔다. 그러다가는 멈춰서서 귀를 강구고 주위를 눈여겨보기도 하였다. 놈들이 대낮에 길을 따라 갈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는 좌우의 길섶을 주의깊게 살피며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간 가니 숲 안쪽으로 눕혀진 풀들이 보였다.

김을지는 거기로 뛰여들었다. 몇걸음 지나 작은 애솔나무가지가 부러져있고 좀더 나아가서 찔광이나무가지에 빨간 갑사댕기가 걸려있었다.

마치 독수리에 채워간 어린 새의 깃털이 걸려있는것처럼 처량하기 그지없다. 그 댕기는 빨래하던 처녀의 순결한 마음의 한쪼각처럼 안겨들었다. 그는 댕기를 소중히 떼내여 품속에 간수하였다. 그러자 가슴은 이 처녀를 살려내야 한다는 한가지 생각으로 고동쳤다.

김을지는 칼을 꽉 그러쥐고 흔적을 따라 숲을 헤쳐나갔다. 마침내 그의 두눈이 번쩍 빛나는 시각이 왔다. 애타게 찾는 처녀가 나무들사이로 보였다. 커다란 자작나무밑둥에 비끄러매여있는 처녀! 얼룩얼룩한 왜놈의 수건에 틀어막힌 입,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에 덮인 얼굴… 처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고개를 떨구고있었다.

《아가씨―》

김을지는 자신도 모르게 황소의 영각처럼 웨치면서 처녀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사람이 뒤따라오는것을 알아차린 교활한 왜놈들이 처녀를 미끼삼아 나무에 결박해놓고 좌우숲속에 숨어있는줄 어찌 알았으랴.

놈들은 처녀를 구원하러 오는 사람이 처녀의 몸에서 바줄을 푸는 동안에 감쪽같이 달려들어 해칠 잡도리를 하였다.

김을지는 놈들의 잔꾀를 미처 몰랐다. 허나 달려나가다가 처녀의 주위에 왜놈들이 없는것을 보고 심상치 않은 기미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는 자기의 좌우숲과 등뒤에 신경을 바싹 모았다. 겉으로는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정신이 처녀에게만 쏠린듯이 달려갔다. 김을지의 마음속준비를 알길 없는 왜놈들은 김을지가 자기들이 숨어있는 곳을 지나가는 순간 《얏―》, 《얏―》 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한꺼번에 비수를 휘둘렀다. 이 순간을 예견했던 김을지는 껑충 높이 뛰여 회오리바람처럼 솟아올랐다가 칼을 내리쳤다. 왜놈 한놈이 목이 잘리워 꺼꾸러졌다. 다른 두놈은 날래게 몸을 피했다가 또다시 《얏―》, 《얏―》 째지게 소리를 치면서 앞뒤로 달려들었다.

김을지는 앞놈을 향해 칼을 후려칠것처럼 하다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며 뒤놈을 찔렀다. 놈은 어쩔사이없이 앞으로 푹 엎어졌다. 바로 그때 앞놈이 던진 단도가 날아와 김을지의 옆구리에 박혔다. 왜놈은 김을지가 단박에 쓰러질줄 알았던지 한순간 앙큼한 살기웃음을 띠고 바라보았다. 허나 김을지가 비호처럼 몸을 돌려세우자 왜놈은 얼혼이 빠진듯 허둥지둥 도망질하였다.

김을지는 몇걸음안팎에 놈을 따라잡아서 단칼에 목을 베였다.

그는 기운이 진하여 비칠거렸다. 옆구리에서 피가 흘렀다. 그러나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처녀를 향해 달려갔다. 그는 쓰러지듯 처녀앞에 무릎을 꺾어앉았다. 그리고 처녀의 입에서 수건을 뽑아주었다. 막혔던 숨길이 열려진듯이 가느다란 숨결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처녀는 고개를 떨어뜨린채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얼굴을 감싸쥐고 《아가씨― 아가씨―》 부르며 흔들어도 대답이 없었다.

김을지는 서둘러 바줄을 풀었다. 그의 옆구리에서 피가 그냥 흘렀다. 힘이 진해갔으나 그는 처녀를 안고 한발자국한발자국 숲을 헤쳐나갔다.

드디여 시내가에 이르렀다. 눈앞에 별찌같은것이 무수히 떠돌았다. 앞이 점점 어두워진다. 여기서 쓰러지면 둘이 다 죽는다는 생각이 가물가물 떠오른다. 몇발자국 더 옮겨짚었다. 허지만 더 견디여내지 못하고 그자리에 푹― 꺼꾸러졌다. 김을지는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천만다행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김을지의 무거운 몸에 깔리워 땅에 닿는 충격에 까무라쳤던 처녀가 깨여났던것이다. …

김을지는 여기까지 말하고 숨을 돌려쉬였다. 영아가 그의 입에 숟가락으로 꿀물을 떠넣어주었다.

《그만 먹겠네. 영아! 이렇게 부르는걸 허물치 말라구. 내가 오빠니깐― 형님, 그렇지요?》

김을지는 빙긋이 웃으며 장영실의 동의를 구하였다.

《암, 그래야지. 영아가 제 오빠의 말을 왜 탓할고.》

장영실은 껄껄 웃으며 영아를 즐겁게 바라보았다.

《아무럼요, 호호호.》

영아는 무등 기뻐서 오래간만에 소리내여 웃었다.

《형님, 시내가에서 내가 영아를 안고 쓰러진 후에는 아무것도 모르오이다. 그런걸 형님네들이 영아와 나를 살려냈군요.》

《아니라네. 우리가 달려갔을 때는 벌써 영아가 자네를 붙안고 사람을 살려달라고 소리치고있었네. 영아를 살려낸건 임자지만 임자를 살려낸 사람은 영아라네. 영아가 제때에 의식을 차리지 않았다면 자네는 피가 다 빠져서 저세상 사람이 될번 하였네. 영아가 자네의 상처를 막고 또 우리들을 불렀기에 이렇게 〈형님〉, 〈동생〉, 〈오빠〉로 인연을 맺게 되였네!》

…장영실은 김을지가 혼곤히 잠든 새벽녘에 옷을 관복으로 갈아입고 관가에 나갔다가 중낮이 훨씬 지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을원에게 김을지의 일을 통고한 다음 병방, 라졸들을 데리고 김을지가 해야 할 두가지 일을 다 처리하였다. 하나는 칼과 화살을 찾아서 수영포에 보내고 다른 하나는 왜놈시체 셋을 처리한것이다. 만약 왜놈중에 어느 한놈이라도 사로잡아 토설을 받아냈다면 놈들의 음흉하고 교활한 흉계를 알아냈을것이다.

놈들은 영아를 인질로 삼아서 장영실을 꾀여내다가 랍치하려고 하였었다. 조선의 유명한 재사를 일본에 끌어다가 제 나라에 없는 화포라든가 여러가지 병쟁기들을 만들게 하려고 하였던것이다.

서울객관의 왜놈들이 부산포 왜인거류지에 련락하여 장영실이 동래에 갔으니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런 흉계를 그 누구도 몰랐다. 장영실도 영아도 몰랐으며 동래고을원도 조정에서도 몰랐다. 그것은 영원한 비밀로 세월의 락엽속에 파묻혀버린것 같았다.

고을원은 김을지의 병치료에 쓰라고 쌀과 콩을 보내주고 김을지가 몸을 추세울 때까지 영아를 붙여주었다. 그는 자기의 고을경내에서 사람을 구원하고 왜놈 셋을 잡아죽인 사실은 일상적으로 고을의 정사가 잘된탓이라고, 더우기는 새로 부임한 고을원이 군사들을 옳게 신칙하여온탓이라고 조정에서 인정해주리라는 생각에 매우 흡족히 여기였다.

장영실은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영아가 누워있는 김을지에게 미음을 먹여주고있었다.

《몸이 좀 어떤가?》

장영실은 따뜻이 김을지를 내려다보았다.

《인젠 퍽 차도가 있소이다. …》

김을지는 빙긋이 웃으며 장영실을 올려다보다가 그만에야 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장영실형님이 량반벼슬관의 옷을 입고있는것이다.

《아니, 형님이?! 내가 찾던 호군나리님이?!》

《바로 그렇네.》

장영실이 김을지의 옆자리에 앉으며 그의 손을 다정히 잡고서 전립을 쓴 머리를 끄덕이였다.

《동생, 어제는 내가 임자에게 호군이요 하고 제가 센척 하고싶지 않아서 웃기만 하였네. 얼마전까지만 해도 나는 관노였고 영아는 지금도 관비가 아닌가. 호군이라고 관노의 본색이야 어디 갈텐가. 그러니 별일없이 나를 대하게.》

장영실은 벼슬을 받고 관리가 되였다고 하여 어깨를 돋구고 거드름을 부릴줄 몰랐다.

사람이란 우단점을 가진것이니 김을지가 능한 일은 내가 서툴고 내가 능한 일은 김을지가 서툴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해야 할 일이 많고 못한 일도 많다. 그래서 그는 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였다.

김을지는 새롭게 알게 된 장영실의 됨됨에 그지없이 감복하였다. 그는 《형님―》 하고 몸을 일으키였다.

《을지오빠, 상처가 도지와요.》

영아는 덴겁하여 김을지의 어깨를 가만히 눌렀다. 김을지는 그대로 자리에 누워있는것이 송구스럽고 죄송하여 견딜수 없었다.

《내가 호군나리님을 몰라보고 〈형님〉, 〈동생〉하자고 무엄하게 놀았소이다. 제가 형님의 동생자격이 될수가 없는데…》

《온참, 을지오빤 별소릴 다… 호호호, 그렇게 생각하면 저도 을지오빠의 녀동생자격이 있으리까. 난 노비이고 을지오빤 량인이 아니신가요.》

영아는 김을지에게 눈을 곱게 흘기였다.

《그 말 참 잘하였다. 정이 통하면 그만이지 자격은 무슨 자격일텐가.》

세사람은 한동안 즐겁게 웃는데 모두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장영실과 김을지는 이렇게 만나 끊을수 없는 정으로 인연이 맺어졌다. 호군이 되여 고향에 갔다가 만난 김을지를 상호군이 되여 고향으로 가는 길에 다시 만나게 되였으니 이 무슨 기이한 일인가. 이것은 다 임금의 은총으로 이루어졌구나. 임금의 은총이 아니였다면 내 어이 두번이나 마을돌이를 갈수 있었고 그때마다 김을지를 만날수 있었겠는가.

《형님, 형님이 무슨 생각을 깊이 하시는걸 보니 혹시 이 동생이 길을 잘못들었다고 걱정하시는게 아니우? 내가 칼을 들고 나선것은 양지현감과 같은 악덕량반들을 쳐없애지 않고서는 임금의 어진 정사도 백성들이 덕을 볼수 없기때문이오이다.》

김을지는 끓는 의분을 어쩔수 없는듯 탁주사발을 끄당겨 꿀꺽꿀꺽 들이마시였다.

《임자가 의금부도사와 대적할 때 하는 말을 들으면서 양지현감을 죽여버린 까닭을 대개 알았고 또 지금 하는 말도 대의에 어그러짐이 없어서 수긍이 가네. 그러나 좀더 자상한 이야기를 듣고싶네.》

《제가 이 말을 옮기기가 괴롭지만 형님도 아시고 영아도 알아야 하겠기에 이야기를 하리다.

형님이 호군벼슬을 받고 고향에 마을돌이를 오셨다가 서울로 돌아가셨고 저는 영아가 극진히 상처를 치료해준 덕분에 수영포로 돌아갔소이다.

저는 수영포에서 10년간의 군역을 마치고 충청도 양지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였나이다. 저는 영아를 만나 고향의 부모님들에게 우리 두사람사이를 다 여쭙고 영아를 반드시 안해로 맞아들이겠으니 기다려달라고 금석같이 언약을 나누었소이다.》

이렇게 시작한 김을지의 이야기는 눈물에 젖어들고 감격에 젖어들고 분노에 젖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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