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42

 

주식회사 사장은 토실토실 살찐 손가락에 낀 금반지만 만지작거릴뿐 상대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는 기색이 전혀 없다. 쉰고개는 넘긴 사람일터인데 바람을 불어넣은 뽈같은 얼굴이 허여멀끔한게 잔주름 한개 보이지 않는다.

백선행은 유양점의 말을 들으며 사장의 얼굴을 지켜보고있다.

이놈은 경찰서장이나 검사와는 다른 장사군이다. 부처님 상통을 하고 점잔을 빼지만 속으로는 한푼도 곯지 않는 계산을 하고있을것이다. 칼찬 놈이나 법 다루는 흉악한 놈보다도 타산이 밝은 저런 간교한 놈을 다루기란 여간 말째지 않다. 귀구멍은 가졌을텐데 통 아무 기색도 없으니 우리 말을 개방귀만큼도 여기지 않는게 아닌가.

앞에 앉은 왜놈을 노려보며 그는 상욕이 터져나오는것을 겨우 참았다.

《자, 이 문서를 보십시오. 30년 가까이 되는 빚문서입니다. 사장님은 채무처리를 많이 해보았겠는데 리자만 계산해도 20만원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서필은 본 주식회사에 출자한 돈에서 그만큼은 내놓아야 하지요.》

유양점이 가지고온 빚문서를 사장앞에 놓아주었다.

세상에 보기 드문 빚문서여서 대바람에 야단할줄 알았는데 사장은 그냥 덤덤한 표정으로 턱만 약간 들고 내려다본다.

유양점의 옆에 앉아 사장을 아니꼽게 가로보던 장명학이 설명을 가하며 은근히 뒤를 눌렀다.

《서필의 출자금에서 20만원정도는 백선행에게 진 빚을 갚는다쳐도 나머지 돈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 돈의 출처에 대해서도 다 알아보았습니다. 개화파가 <갑신정변> 당시 모연하여 갖춘 자금이였는데 서필이 가로챘습니다. 이를테면 정치자금횡령입니다. 이 사실은 래일 <동아일보>와 기타 신문들, 일본신문에도 특보로 지면을 채우게 될겁니다.》

금반지장난에 여념없던 사장은 그제야 세사람쪽으로 무표정한 눈길을 돌리였다.

《이야기를 다했습니까?》

생긴것처럼 억양도 없다.

한마디도 바로 듣는것 같지 않던 놈이 심드렁히 묻는 바람에 백선행은 그만 화가 치밀어올랐다.

《난 그 빚만은 받아야겠수다. 그 사람 돈이 어른 손에 들어와있지 않나요.》

억지라는걸 알면서도 백선행은 말했다. 반지럽기로 뱀장어껍질같은 저놈의 주둥일 열리라 마음먹고 한 소리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장은 고양이처럼 소리도 안내며 세사람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춤이나 추듯 두팔을 가볍게 흔들어펼치고나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충분한 리해를 표시합니다.》

개수작말아! 뭘 알았다는거냐? 어물쩍해 넘기려들 생각은 하지도 말아. 백선행은 두손으로 무릎을 누르며 일어났다.

《빚은 갚아야 하외다.》

사장의 동그란 얼굴에 웃음이 스쳐지나갔다.

《당신이 백선행입니까?》

《그렇수다.》

《이름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기업을 해보지 않겠습니까?》

《난 지금껏 혼자서 장사를 했수다.》

《돈을 아껴야 합니다. 공회당을 짓는다는데… 그게 무슨 리윤을 줍니까?》

《어째서요? 난 여태 재간껏 벌어왔구 쓰기도 마음 내키는대로 써온 사람이외다.》

자기의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백선행을 바라보던 사장은 나직이 물었다.

《빚을 갚으라고 했지요?》

《그러문요.》

《우리 주식회사는 그런 의무를 지니지 않습니다. 오늘 주주모임에서 서필을 제거하겠으니 당신은 서필을 만나 주권양도문서를 꾸며가지고 은행에 가서 돈을 받아야 합니다.》

망할 녀석, 그 말을 일찍 해주었더라면 너같은 녀석과 길게 앉아 있었겠느냐. 백선행은 속이 치미는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수다.》

꿈에서 깨여난 서필은 잃어버린 꿈을 되찾으려고 눈을 감은채 꿈을 재생시켜보려고 애썼다. 머리속에 남은것은 재벌의 《왕관》이다. 자기가 차린 황홀한 연회장에서 울린 무도곡과 나비날개와 같은 치마자락들의 락화뿐이였다. 어디서 시작되여 어디에서 끝난것인지 전혀 련상되지 않지만 인생포부여서 가슴은 꿈밖에서 그냥 설레고있다.

잠옷바람으로 떨쳐일어난 그는 아침식사를 주문했다. 전례없이 쌘드위치와 영국산 브란디며 고급한 서양음식들을 청했다.

식탁에 앉은 서필은 접대부가 내주는 눈같이 흰 수건을 받아 점잔을 부리며 가슴우에 펴놓았다. 이 아침처럼 부유하게 살게 되기를 바라며 그는 브란디를 한모금 마시고는 이상한 감정의 도취에 말려들었다.

결코 헛되이 산건 아니야. 목숨을 내건 도박을 하며 오늘까지 걸어오지 않았는가. 고진감래라- 서필이, 자넨 성공한 인간이 될걸세. 악인의 생명속에 자리잡은 잠재의식, 검질긴 야심은 이렇게 속삭이며 입김을 불어넣었다.

《선생님, 회사에서 보내온 편지를 가져오랍니까? 오늘신문은요?》

접대부가 교태를 부리며 묻는 말에 서필은 손을 쳐들었다.

《내 방에 가져다 놓으라.》

자기의 목소리가 지금같이 위엄있게 울려보기는 처음이다. 그는 희열에 넘쳐 마시고 먹으며 멀지 않아 펼쳐지게 될 재벌의 휘황한 앞날을 그려보았다.

구름타고 둥실둥실 떠가는듯 한 기분으로 방에 들어선 서필은 팔걸이의자에 앉으며 회사의 편지부터 손에 쥐고 봉투를 뜯었다. 주주모임을 하려는가. 편지로 전하니 이례적이긴 한데… 여하튼 주식소유에서 내가 앞자리에 있지 않는가. 앞으로 사장을 거쳐 재벌에로?! … 엉, 이게 뭔가?! 그의 두눈은 편지의 글자들이 날아날가봐 허둥거리며 붙들었다.

《본회사… 주주모임은… 서필씨를 제명하기로 하였음을 통고하는바임. …》

재벌의 환각세계는 태풍만난 사상루각마냥 여지없이 허물어져내렸다. 당당한 주권소유자가 회사에서 쫓겨나다니? … 이게 어디 될말이냐!

서필의 얼굴은 시퍼렇게 얼어들었다. 온몸의 피가 두눈에 모여 응결되고 관자노리는 지렁이같은 피줄투성이로 변했다. 이럴수 없다. 이건 어떤 놈이 나를 모해하자고 보낸 위조편지다.

서필은 자리에서 일어나 헐떡거리며 방안을 빙빙 돌아쳤다. 꿈의 환락은 순간에 불과했고 가혹한 현실은 그를 헤여나올 길 없는 악몽속으로 밀어넣었다.

방바닥에 떨어진 신문에 눈이 간 서필은 무의식적으로 집어들었다. 애당초 주식시세를 알아보기 위해서만 필요했던 신문이라 복잡한 심중에 건성 훑고 놓으려는데 얼핏 제 이름자가 눈에 띄였다.

《배신으로 살아남은 정치간상배》라는 두드러진 표제아래 다름아닌 자기, 서필이라는 인간의 행적이 함축소개된 비평기사였다. 그속에 개화파모연사업을 맡은 후 어떻게 돈을 횡령했는가가 방불하게 서술되여있었다.

《어느 놈이 이따위 개나발을 불어댔는가! …》

악이 받친 서필은 신문을 움켜쥐고 갈가리 찢으며 비칠비칠 걸음을 옮기다 마주 오는 자기를 보고 흠칫 놀라 멎어섰다. 거울속의 서필이가 비웃듯이 말한다.

《너는 차라리 갑신년에 죽은것보다 못하다. …》

차라리 갑신년에 죽었더라면 오늘같은 꼴은 되지 않았을걸…

죽다니? 내가 왜 죽어?! … 아니다. 죽을순 없다. 어떻든지간에 나는 살아야 하고 살아서 꼭 큰 기업가가 되여야 한다.

넋의 단죄를 거부한 그는 자기로 돌아왔다. 그의 뇌수세포는 맹렬한 활동을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죽을고비를 넘겨왔는가. 배신조차도 수치로 여기지 않으며 살아온 나다. 나의 가장 큰 과오는 평양땅에 발을 들여놓은것이다. 귀신이 붙은 고장이다. 여기서 내가 쓴맛을 얼마나 보았는가.

서필은 날이 저물기만을 기다렸다. 어둠을 타고 평양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빨리 서울에 가서 은행의 돈을 찾아쥐고 줄행랑을 놓으면 그만이다.

그가 전전긍긍하며 저녁이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려관의 일본녀자가 보퉁이를 들고 들어왔다.

《응? … 그건 뭔가?》

《어떤 늙은 녀자가 선생님한테 드리라고 해서…》

《늙은 녀자? …》

서필은 보퉁이를 풀어헤치고나서 입을 쩍 벌리였다. 만달산토지매매흥정을 하러 갔다가 백선행에게 벗기운 코트와 중절모, 회중시계였다. 제 물건임에도 꼭 수의같이 여겨졌다. 괴물같은 년! 나를 잡자고든게 네년이였구나!

자리를 차고 일어난 그는 미친놈처럼 덤벼치며 행장을 꾸리였다. 그런 속에서도 은행권을 품안에 넣는것을 잊지 않았다.

《선생님 계십니까?》

히스테리적인 발작에 이른 서필에게 있어서 일본녀자의 아양기 어린 목소리도 이제는 저승사자가 부르는 소리같아 온몸을 떨었다. 그가 건네주는 흰 봉투안에서 서필을 락심천만하게 만드는 《사형선고》가 나졌다. 래일 아침 9시까지 검찰에 출두하라는 검사의 호출장이였다. 하늘처럼 믿던 일본상전들에게서 버림을 받은 서필이다.

종로경찰서장 이시하라 겐지가 검찰기관에 제출한 의견서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본관은 <일진회> 회원 서필에 대한 사상동향과 행적을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바

첫째, 내세울만 한 가치가 없는 인간이며

둘째, 정치사기한의 정체가 알려진 조건에서 일본의 법률적보호대상에 포함시킬수 없으므로 결석재판을 진행하는것은 고려해야 할것이다.》

일본검찰기관은 이시하라 겐지의 자료를 분석한데 기초하여 서필이 일본제국의 식민지정책유지에 쓸모있는 인물로 될수 없는것으로 판단하였고 《법의 공정성》을 기한다는 미명하에 평양민심을 회유하고저 법정에 내세우기로 결정한것이다.

검찰의 호출장을 쥔 서필은 자기가 서있는 일본려관의 방안을 잘못 찾아온 집이런듯 의아한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야심의 분출과 향락의 환영으로 범벅이 된 자기의 넋이 여기서 살았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황야의 락엽신세나 다름없이 되여버린 서필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옮겼다.

목적도 의지도 없이 허둥대는 그의 걸음을 이번에는 다다미우에 놓인 무명보자기가 휘감아세웠다. 마치도 생명체처럼 눈을 가지고 쳐다보는듯 한 물건들, 백선행이 이름을 붙인 두루마기와 갓에서 그는 죽음이 운명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주섬주섬 보자기속의 코트를 꺼내입고 중절모를 쓰고난 서필은 회중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초침이 파들파들 그의 거친 숨결과 더불어 움직인다.

려관을 나선 서필은 어둠속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분다. 그에게는 인상깊었다고 해야 할 평양바람이다. 대동강기슭에 이른 그는 걸음을 멈추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죄를 지은 놈이 재판을 두려워하기마련이다.

서필은 그때까지 손에 쥐고있던 일본검찰기관의 호출장을 강물에 던지고는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지금의 자리에서 인생의 과거를 련결시켜보는 그였다.

《이 장도칼은 어머니의 몸값으로 네놈이 남겨준 물건이다. 골수에 사무친 우리 모녀의 원한이 수십년세월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걸 아느냐?! …》

머리를 풀어헤친 녀자의 손에서 번쩍이던 칼날이 눈앞으로 덮쳐들자 서필은 신음소리를 내며 걸음을 옮겼다.

한 녀성을 짓밟아 차던진 배신적악행의 뿌리에서 얼마나 많은 죄악의 가지가 뻗었는가. 배신으로 이어진 인생, 그 배신의 대가로 배신을 당해야 하는 오늘의 운명이 빚어졌다. 일본상전들의 비호밑에서 돈주머니를 불구려던 나에게 내려진 천벌인가.

돈만 있으면 살아갈수 있다고 생각한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

서필은 무릎을 휘감으며 흐르는 강물속으로 한걸음씩 옮겼다. 이 순간 그의 뇌리에는 백선행의 이름이 떠올랐다. 40대에 만났던 얼굴도, 고행이 새겨놓은 주름많은 얼굴도 생생히 보인다. 평양녀인의 눈빛이 번쩍거린다.

돈을 쫓아 돈을 누리면 죄짓는 길이 몇갈래인지 아느냐. 죽어도 알아야 할것은 깨닫고 가거라. 돈에 대한 탐욕이 너를 민족까지 등지게 만들었다. 망국의 수난조차 외면하고 벌어들인 돈을 명줄로 삼았기에 너는 살아 이 땅에 묻힐 자리가 없다.

《백선행…》

강물을 삼키며 마지막소리를 낸 서필은 마침내 물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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