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40

 

백선행은 두 남자가 담소하며 술을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홍안을 가시고 백발이 눈앞인데 망국으로 우는 사나이들이다. 살아서 복국을 볼 날이 오려는지… 사람은 나이로 철이 드는것도 아닌가보다. 나부터가 돈, 돈 하며 허둥질치다 아버님의 천둥같은 욕을 먹고서야 정신을 차리지 않았는가. 그는 눈앞에 장규현의 모습이 보이는것만 같았다.

천한 장사군계집을 스무살 넘긴 때부터 제 자식같이 여기며 잔정을 기울여주었건만 순국하기 전까지 노여움을 끼쳐드렸다.

그래도 사람같이 여겨 금언주머니에 《백》씨 성을 쓰고 《정》이라는 글자를 남겨주었다.

내가 세상에 부끄럽지 않게 살자고 마음먹은게 그때부터이니 망국이 철들게 한것이다.

그는 유양점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호방한 사나이, 어느 계집이나 쉽게 반할 사람이여선지 호주호색을 일삼다 인생말년에야 안해의 품으로 돌아갔다.

다 돈을 잘못 쓴탓에 겪은 인생풍운이다. 일찌기 저승에 간 도원국이도 그랬다. 마음을 바로 먹지 않고서는 무슨 일이든 옳게 할수 없다. 탐욕과 간계, 랑비와 방탕은 사람을 망쳐먹은 씨앗이다. 그것이 몸안에 뿌리내리고 자라면 고치기 힘든 중병이 들고 마는것이다.

유양점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장명학이 권하는 술잔을 내려놓는다.

《선행, 반갑지 못한 소식이 하나 있소.》

무거운 음조에 실린 그 말에 백선행은 제 생각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데요?》

《일본료정에서 살인미수사건이 있었다는 말을 들으셨소?》

《뛰뛰한 소문은 들리더군요. 일본료정일이니 귀밖으로 들었어요.》

유양점이 장명학에게 묻는다.

《로형도 알고계셨소?》

장명학도 심상히 여기며 대답했다.

《일본기생이 어떤 량반을 칼로 찔렀다고 하더군. 유흥가의 짐승싸움이니 무관히 대했소.》

《그랬을게요. 내 오늘 손아래친구 한사람을 만났소.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고 온 사람인데 변호사질을 해먹더군. 그 사람 하는 말이 일본료정의 기생이란 조선녀자고 이름은 송월이라는거요.》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백선행이다. 송월이라는 이름이 지금도 가슴에 못박혀있다.

《누구라구요? …》

《송월이요.》

《우리 그 송월인가요?》

송월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하나뿐이겠는가.

유양점은 희슥희슥한 수염을 더듬어쥐고 쓸어버렸다.

《내… 그때 선행과 헤여지며 하두 경황이 못되여 감감 잊었소. 송월이를 그 일본료정앞에서 만났댔소. …》

유양점은 송월이가 원한을 풀자고 다시는 밟지 않으려던 평양에 왔으니 자기 거처를 백선행에게 절대로 알려주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던 일을 이야기했다.

백선행의 얼굴은 금시 어두워지고 무릎우에 놓인 손은 간간히 떨렸다. 분명 송월이다. 그년이 무슨 독한 마음을 먹었기에 사람을 죽이려들었는가. 굴러다니다못해 일본놈 기생집에까지 몸을 맡긴 년이 세상 놀래울 일을 저지르다니. 사람되긴 글러먹은 년이다. 그 꼴로 명을 잇기보다 죽었어야 하지 않는가. 그는 속으로 송월을 꾸짖었다.

《내 이 입으로 말하기 힘들지만… 그 송월이가 죽이려든 사람이 서필이라는거요. 하- 무슨 영문인지…》

《서필이라니요?》

백선행은 얼없이 물었다.

《선행이 그놈이야 잊겠소. … 만달산토지흥정때 대가릴 내밀지 않았댔소.》

《그놈이… 미꾸라지같이 빠져달아난 놈이 또 나타났나요? … 송월이가 그놈을 칼로 찔렀수?》

《그랬다오.》

무릎우에 놓였던 백선행의 손이 뚝 떨어졌다.

《필경 그년이 나한테도 말 안한 사연이 있수다. … 이 일을 어쩌면 좋수? … 이날이때까지 그년을 찾자구 애를 써왔는데 이런 일을 빚어냈으니… 그게 불쌍한 계집애예요. …》

백선행은 울고있었다.

《누님, 진정하오. 양점형, 살인미수라면 서필이가 죽진 않았다는건데?》

《명이 질긴 놈이니까. 녀자의 칼부림에 정통을 찔렸을리 있소?》

백선행의 두눈에서 번개불이 일었다.

《그놈이 살았다구요?》

《인차 병원에 실려가 목숨은 건진가보오.》

《송월이가 한을 풀겠다고 했다니 그놈을 죽이자고 벼른게 아닌가요?》

《십중팔구는 그럴거요.》

백선행의 부르쥔 두주먹이 우들우들 떨었다.

《명학동생, 양점어른. 송월일 살려내게 해주시우… 난 그애를 살려야 하외다! …》

장명학이 난감한 기색을 보인다.

《살인미수죄요… 어차피 재판을 받아야 할 몸이 되였으니…》

《송월이가 종로경찰서 류치장에 갇혀있는데 죽기만을 기다리는 모양이요. 변호사를 내세워도 된다고 통지했는데도 그것마저 거절했다오.》

《그건 왜요?》

백선행은 다급하게 물었다.

《알리 없는 일이요.》

《두 어른은 내 집에서 묵으며 무슨 방도를 생각해내시우. … 난 송월일 꼭 살려내야 하우다. … 아이구 이런 변이라구야…》

속에 불이 일어 자리에서 일어난 백선행이 비칠거리자 경림이와 처가 달려나와 부축해가지고 방으로 데려갔다.

이시하라 겐지는 버릇처럼 흰 장갑을 낀 오른손은 일본도자루를 잡고 왼손은 톡 튀여나온 배우에 올려놓은채 유표한 매눈으로 백선행을 노려보고있었다.

《서장나리, 편안하셨소?》

백씨는 이 한마디 인사말을 던지고서 더 다른 말이 없었다.

겐지는 그만 속이 부글부글 끓어번졌다.

저 모양으로 한정없이 앉아있을 잡도리인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찾아든 리유를 알수 없어 그는 백선행의 입에서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도매점을 방화하여 평양갑부인 백선행의 기를 꺾어놓자던노릇이 틀어졌다. 저 망할 늙다리가 주저앉기는커녕 공회당을 건설하겠다고 나서는통에 평양백성들이 떨쳐나 죽가마 끓듯 했다. 벌써 공회당부지를 잡았고 설계수속까지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인부들이 떼를 지어 모여든다. 거기다 평양의 청년학생들까지 공회당건설을 위해 흙 한삽, 돌 하나라도 나르겠다고 윽윽대니 장차 민심이 어떤 바람을 몰아올지 모를 형편에 이르렀다.

자기의 치안유지관할지역에서 심상치 않은 사태가 빚어지고있는것으로 하여 겐지의 신경은 칼날같이 예민해졌다. 도매점방화와 그후 상봉으로 하여 상전들은 벌써부터 실망을 표시한다. 수가 낮은 경찰이라는 평정이 차례지지 않았는가.

도매점방화는 조선사람을 매수하려다 비밀이 루설될수 있다는 우려로 종로경찰서에서도 제일 날랜 일본인순사 2명에게 과업을 주어 귀신도 모르게 불을 놓았지만 방화자들의 실수로 현장에 일본제석유통을 남겨놓아 불끄던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다. 이것은 매우 좋지 못한 징조다.

겐지로서는 이미전에 승호지구에서 죽어 만달산귀신이 된 세이찌로의 운명을 잊을수 없었다.

이 평양은 서울과는 다른 곳이다. 유령같은 평양택견들이 배회하는 고장이여서 냄새 잘 맡는 그들이 방화자들을 찾아내는 날에는 세이찌로처럼 보복당할것은 물론 일본경찰이 조선인의 도매점을 방화했다는 사실공개로 위험천만한 사태가 빚어질수 있다.

겐지의 교활성과 잔인성의 기질도 지금은 불안속에 헤매고있는셈이다. 그런 까닭에 백선행이 아직 입을 다물고있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서장답지 않게 자기 먼저 말을 뗐다.

《백선행, 매우 유감이다. 우리 경찰이 통보를 받았을 땐 도매점이 이미 전소된 상태였다. 나는 당신의 심정을 충분히 리해하며 화재사고의 원인도 조속한 시일내에 밝힐것이다.》

굳어진 돌같던 백선행이 눈길도 돌리지 않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서장나리는 아직도 누가 불을 질렀는지 모르시우?》

《응? …》

겐지의 매눈이 사납게 번쩍거린다. 묻자니 백선행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렵기도 한데다 경찰서장으로서 체모를 갖춘 대답을 하기도 어려운 심정이여서 악이 치받쳤다.

《나한테서 도매점 하나 불에 타 없어진건 새발의 피외다.》

《하-… 피해액이 수천원이나 넘지 않는가.》

겐지는 백선행의 무표정한 얼굴을 지켜보며 은근히 놀랐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배하는 일본사람중 돈을 그리워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자신도 례외가 아니다. 《총독부》의 봉급이란 보잘것없는것이여서 어떻게 하나 평양백성들의 주머니를 털어내려고 애쓰며 산다. 수천원이면 서장봉급을 10년 모아도 안될 거액인데 새발의 피라니 이 늙은 로친네가 나를 놀려대자는 수작이 아닌가. 그러니 도매점방화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여 범인을 잡아달라고 찾아온것도 아닌것이다.

백선행은 지금 어떻게 하면 겐지에게서 류치장에 가둔 송월이를 만나라는 승낙을 받아낼가 하는 궁리만 하고있다. 제놈들이 도매점에 불을 놓았으니 속은 켕기겠지만 원체 흉악한 놈들이라 쉽게 응할리 없다. 이놈이 전번에 만났을 때도 돈소리를 했으니 도매점을 턱에 걸고 흥정을 해보자. 아가리가 큰 놈이 돼서 어방없이 큰 돈을 내라면 그것도 못할짓이다. 간사한 족속들일수록 제 타산에 곧잘 속아넘어간다고 생각한 백선행은 한숨을 섞어 말했다.

《서장나리가 내 부탁을 들어주겠는지…》

백씨의 말에 굳어져있던 겐지의 안면근육이 풀리였다. 부탁이라… 과연 어떤 부탁을 하자는것인가. 소문난 장사군 늙은 년의 덫에 걸려들면 체면잃는노릇일텐데.

《말하라, 선행. 어떤 부탁인지.》

《난 신세를 지면 꼭 갚는 녀자외다.》

《백선행, 당신이 신용이 있는 상인이라는걸 다 안다.》

백선행의 눈길이 이 방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겐지에게 돌려지였다.

《여기 경찰서 류치장에 송월이라는 계집이 갇혀있다던데요.》

《엉? …》

겐지는 백선행의 왕청같은 말에 재빨리 생각을 굴리였다. 일본료정에서 살인미수범죄를 감행한 녀자다. 취조과정이 매우 빨리 진척되여 검찰에 넘기면 재판을 받아야 할 범죄자를 백선행이 왜 찾는가. 이것이야말로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장사밖에 모르던 늙은 년이 제발로 경찰의 수사반경안에 찾아들어오는것이 아닐가. 일본료정에서 일하던 송월은 《일진회》 회원인 서필을 죽이려 했다. 살인기도는 실패했지만 정치적고려대상이다. 송월과 백선행의 연고관계가 밝혀지면 증거를 쥐게 되고 나가서 일본인들을 참살한 평양택견들을 잡아낼수도 있지 않는가. 겐지는 백선행을 구류할수 있는 법적단서를 쥘수 있다는 일종의 환각에 사로잡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바싹 다가붙었다.

《일본료정에서의 살인미수자 송월… 아주 지독하고 교활한 년이다. … 그런데 선행이 그 범죄자를 아는가?》

《알지요.》

겐지의 오른손이 일본도자루를 꽉 움켜쥐였다.

《그래서?》

《그년은 스무살 나이때 내 도매점에서 일했수다. 밀수군들과 작당하여 못된 장사를 하여 내쫓았는데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니 한번 얼굴이라도 보구싶어서 그러외다. 안되우?》

꿩을 잡아보려는 욕망을 앞세우던 겐지는 백선행의 말을 듣고나서 고개를 저으며 맹랑한 웃음을 날렸다. 얼마나 단순명백한 말마디들인지 한모퉁이도 언질을 잡을수 없었던것이다.

《매우 이상한 생각이 든다. 범죄자는 취조과정에 자기의 경력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인간인데 성조차 없다. 사생아인가? 그 어떤 질문에도 침묵이다. 보라, 이게 검찰에 넘겨줄 우리의 사건기록이다. 불과 2페지도 안된다.》

송월이가 죽을 마음을 먹은게 분명하다. 독한 년이 왜놈경찰에게 무슨 매질인들 당하지 않았겠는가. 사람을 죽이려 했으니 그 죄가 커서 여간 단련을 받지 않았겠는데 도매점에서 일한것조차 말하지 않았다.

《그년은 말 안할거외다. 팔자가 눈물겨웠수다. 다섯살때부터 길가에서 거지로 빌어먹고 살았지요. 내가 데려다 딸같이 여기고 키웠는데 돈에 눈이 어두운 년이라 밀수군과 손발이 맞아돌아가다 나한테서 쫓겨났수다. 이젠 스무해도 넘는 옛날일이지요.》

자리에서 일어난 겐지가 천천히 백선행에게 걸어왔다. 그의 머리속에서는 기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송월이를 만나게 해주면 수수께끼같은 서필과의 관계가 밝혀지지 않겠는가. 취조과정에 송월과 서필의 관계가 의문을 자아냈지만 본인들의 진술거절로 확인하지 못했다. 서필은 일본이 보호해야 할 인물이다. 서필과 백선행사이에 어떤 연고관계가 있다면? 송월의 살인범죄를 추동한것이 백선행이였다고 할수 있는 자그마한 실머리라도 쥘수 있지 않을가.

《백선행, 나는 평양갑부인 당신의 인격을 존중한다. 범죄자를, 그것도 살인미수범죄자를 면회시킨다는것은 매우 신중한 문제다. 그러나 만나게 해주겠으니 돌아가서 기다리라.》

《알겠수다. 흥정이 이루어지면 사례는 하리다.》

《하-》

겐지는 기막힌 웃음을 뿜었다. 법률과 관련된 약속도 흥정이라는 두마디로 해치우는 백선행이 무지스러운가 하면 경찰관인 자기가 장사군이 된듯 한 기분에 사로잡혔던것이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자신도 교활한 목적을 가지고 흥정한것이나 같지 않은가.

그로부터 이틀후 백선행은 송월을 만나도 된다는 련락을 받았다.

면회실은 자그마한 뙤창 한개뿐이여서 낮인데도 사람을 가려보기 어려우리만큼 어둑컴컴했다.

기소단계에 이른 송월은 수인복을 입고있었다. 쪽걸상에 앉은 그는 주위환경에 무관심했다. 불리워나오면 지금같이 앉아있고 다시 몰아넣으면 철창속에 몸을 던지고 다가올 죽음만을 기다렸다. 류치장살이에 살이 빠져서 이전 모습은 찾아볼수 없었다.

백선행은 장명학과 함께 순사가 놓아주는 편백나무걸상에 앉았다.

《어서 이야기하라.》

왜놈순사가 물러가자 백선행은 송월의 모습을 한동안 뜯어보다 조용히 불렀다.

《송월아, 누가 왔는지 보려무나.》

너무도 귀익은 목소리, 꿈에도 그리던 그 소리에 송월은 온몸을 흠칠 떨며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백선행의 음성을 가려들은것이다. 무정하게 흘러간 긴긴 세월속에서도 잊지 않고 산 목소리다.

이런 곳까지 찾아올줄은 생각도 못했을테니 놀라겠지 하고 생각하며 백선행은 말했다.

《내 너를 얼마나 원망했고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 나를 죽을고비에서 살려내고도 그 모진 욕을 다 듣구 내쫓는대서 훌쩍 가버린단 말이냐?! 어쩌면 그리 지독하냐?! 내가 너를 이 꼴로 만들었으니 할 말이 없다!》

백선행의 볼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리없이 우는 송월의 모습은 그지없이 처량했다. 저 연약한 계집애가 무슨 모진 마음을 먹고 칼부림을 했을가. 그는 송월을 지켜보며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송월아, 네가 변호도 거절했다는게 사실이냐?》

송월은 두무릎우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흐느낌소리는 높아갔다.

《네가 죽이자고 한 사람이 분명 서필이냐?》

백선행의 물음에 송월은 머리만 끄덕였다.

《어인 일로 그런 무서운짓을 한단 말이냐. 난 너를 키웠구 너를 잘 안다. 너는 살인할 재목이 못돼. 그러니 전후사연을 다 말하거라.》

돌처럼 굳어진 송월의 입에서 그제야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이 못난 년 잊어주세요.》

《내 잊자고 해도 잊을수 없어서 찾아왔고 네 한이 뭔지 모르고 너를 죽이면 나도 더는 못산다. 죽어서 원귀가 되여 만나서도 등을 돌려댈테냐? … 난 너를… 어미정으로 사랑했구 키웠다. …》

《어머니…》

송월은 두손으로 머리를 쥐여뜯으며 《어머니… 배은망덕한 이 년을 용서하세요.》 하고는 구슬프게 울었다.

그때까지 듣고있던 장명학이 물었다.

《울음을 그치오. 눈물이 살길은 아니지 않소. 내 누이의 부탁으로 함께 왔으니 묻는 말에 대답하오. 변호를 거절하는 리유가 뭐요?》

송월은 그제야 얼굴을 들었다. 백선행이 혼자 온줄만 알았는데 장명학이까지 와있지 않는가.

《저는 바라지 않아요. … 저에겐 돈 한푼 드릴게 없습니다. …》

노기띤 백선행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년아, 사람이 있고 돈이 있지 돈있고 사람있느냐! 여직 살면서 그것도 모르니 네가 저승에 가서도 바로 살기는 글렀다!》

송월이 창백하고 무표정하던 얼굴에 애절한 빛을 드러내며 목멘 소리로 다시 불렀다.

《어머니!》

《쓸데없는 수작말고 어서 사실대로 말해라.》

백선행을 한동안 바라보던 송월이가 물었다.

《어머니… 그놈은 죽었지요?》

《살아있다.》

《예?! …》

《살아서 펀펀히 돌아친단다. 왜놈 사타구니에 매달려서.》

《아! 그 짐승같은 놈이 살아있다니…》

《이 미련한 년아, 네가 그를 짐승같이 여긴다면 무슨 사연이 있을게 아니냐?》

백선행의 엄한 꾸중에 송월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물어뜯어대기만 했다. 입귀로 선지피가 흘렀다.

장명학이 침착하게 말했다.

《송월이! 기소되면 재판을 받아야 하지만 아무리 피해자래도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책임져야 할것이 있다면 너에게는 유리하다.》

비칠거리며 일어난 송월은 터벌터벌 걸어와 백선행의 앞에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어머니! … 그놈은 짐승입니다. … 살인귀입니다. … 저를 낳아준 어머니를 죽음에로 내몬… 첩이였던 어머니에게 제 피줄이 아닌 자식이 있다는걸 알게 되자… 짐승같이 달려들어 주먹질, 발길질을 마구 해대여… 어머닌 소경이… 소경이 되여버렸습니다.

짐승같은 그놈은 불쌍한 어머니를 앞 못 보는 병신이 되게 만들고도 성차지 않아… 집과 가산을 다 팔아치워 우릴… 거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모녀는 방랑을… 어머닌 어린 저를 고생시키는게 가슴아파… 억울함을 안은채… 목숨을 끊었습니다. 대동강에 몸을 던져…

전 어머니의 유물인 장도칼, 서필이란 놈이 어머니에게 주었다던 그 장도칼로 어머니와 저의 원한을 풀고야말겠노라 마음다지고 복수의 날을 기다려 살아왔습니다. 헌데 그놈은 우리 가정만의 원쑤가 아니였습니다. 나라가 망하든말든 제 욕심만 차리면서 왜놈의 졸개노릇까지 하는 매국노라는것을 알게 되였어요. … 전 빼앗긴 이 땅의 수많은 원혼들의 복수를 위해 매국역적놈의 가슴에 칼을 박았던것입니다. …》

송월은 백선행의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억이 막힌 백선행은 송월을 굽어보며 물었다.

《그렇다고 일본기생집에 들어가 몸을 팔며 산단 말이냐?》

《어머니! … 전 깨끗해요. 어머니품에 자란 제가 어찌 몸을 더럽히겠습니까. 다른것은 다 꾸짖어도 이 말만은 믿어주세요. …》

《어디 보자, 송월아!》

백선행이 두손으로 송월의 얼굴을 감싸들고 정겹게 눈여겨보았다.

《그 모진 고생속에서 자기를 지켰으니 송월아, 너는 진정 내 딸이다!》

《어머니! …》

송월을 꼭 그러안은 백선행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경찰서를 나선 장명학은 주먹을 부르쥐고 웨치듯 말했다.

《아, 서필이가 그런 놈일줄이야…》

밤이 깊었는데도 백선행은 자리조차 펴지 않고 초저녁에 앉은 모양대로 굳어져있었다. 이따금 무엇을 뜯어삼키는것 같은 신음소리만 냈다.

《여보, 어머님이 저녁도 안 드시고 저렇게 앉아만 계시는데 말씀 좀 드려보세요.》

경림은 안타까와하는 안해의 말을 들으며 한숨만 내쉰다.

《어머님이 저렇게 무서운 기상을 한걸 처음 보오. … 어디 곁에나 가겠소.》

동창이 밝아왔다.

백선행은 새벽빛이 스며드는 방안에서 허공을 노려본채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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