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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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가 죽은 뒤 백선행은 수차에 걸쳐 종로경찰서에 불리워가 취조당했다.

일본경찰기관은 눈먼 소경이 아닌지라 그를 보호관찰대상명단에 올려놓고 시종 주시하고있었다. 만달산토지매매로 일본의 위신을 짓밟은 그를 동조하는 평양의 젊은 패(평양택견)들이 때없이 나타나 소요를 일으키고는 자취없이 사라지군 하는것때문에 일본경찰은 골머리를 앓고있었다. 놈들은 백선행을 경찰서로 불러내고는 그의 입을 열어보려고 별의별 회유와 강박을 다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난 모르우다. 밤길을 오다 죽다가 살아난것뿐이외다. 나쁜 놈들을 잡아내는게 경찰서라니 우리 도매점을 노리는 도적이나 좀 잡아주구려. 그럼 내 인사를 차리리다.》

백선행의 출신과 인생경위를 낱낱이 조사하여 손에 쥔 종로경찰서장은 매눈에 올챙이배를 한 보통키지만 초면에 마주서는 사람들은 그 기상만 보아도 겁부터 앞세웠다. 언제나 하얀 장갑을 낀 손을 일본도자루에 올려놓은채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노려본다. 오늘도 그는 걸상에 앉은 백선행을 그렇게 쏘아보며 물었다.

《백선행, 우린 확실한 단서를 잡았다. 로친네가 평양망나니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망동질을 하게 한다는걸 말이야.》

《난 돈이 아까와 한뉘 조반석죽하는 사람이외다.》

《그건 우리도 안다. 요는 도매점에서 일이 있은 날 밤 승호지역에서 우리 일본사람 참살당했다. 그외 여러명 실종되였으니 수상하지 않은가?》

《예서 승호리가 어데라고 다 늙은 내가 날아다니며 나쁜짓을 충동질하겠수. 하느님이 내려다보면 기막혀 웃겠수다.》

평양의 늙은 녀자갑부에 대해 묘한 호기심을 가지게 된 서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로친은 어느 종교를 믿는가?》

《그건 또 무슨 소리외까?》

《종교말이다. 예수를 믿는가, 아니면 그… 사찰을 찾아다니며 부처를 믿는가?》

《난 그런델 찾아다닐새도 없었수다.》

《그럼 믿는것도 없이 그리 꿋꿋한가?》

《내게두 의지할게 있수다.》

《그게 뭔가?》

《돈이외다.》

경찰서장은 기막힌 대답에 어깨를 들썩대며 요란하게 웃었다.

웃고있는 겐지의 눈길은 덤덤한 백선행의 모습을 수술칼처럼 베고 벗겨댔다. 평양의 이 늙다리과부년이 말썽거리다. 만달산토지매매흥정은 결코 상업거래만이 아니였다. 이년이 큰돈을 벌고 입 씻고 돌아앉아 우리 일본을 납작하게 눌러놓았다고 쾌재를 올리는게 분명하다. 오노다는 기업창설이 바빠서 그랬겠지만 앞에 내세운 세이찌로는 바보짓을 했다. 조선놈들을 얕잡아보아서는 안된다. 세이찌로와 일본야꾸자들의 무리죽음, 이것은 반도인들의 저항이 앞으로 어떤 양상을 띠게 될것인가를 암시하고있다.

백선행… 성씨밖에 없던 장사군년에게 평양사람들이 이름을 지어주었다지 않는가. 돈있는 이년의 기를 꺾어놓아야 한다. 돈이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일본이 하느님이라는것을 알게 해줄테다. 네년의 도매점에서 우리 일본사람들이 죽었으니 그 집부터 재더미로 만들어놓을테니 두고보라. 비록 평양의 갑부라고 코를 세우지만 네년의 돈을 모두 하늘로 날려보내겠다.

《이젠 가도 되겠수?》

앉아있기가 갑갑하고 화가 난 백선행이 곱지 않은 눈길로 겐지를 바라보았다. 머리속의 악랄한 음모를 눈웃음으로 감춘 겐지는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백선행의 어깨를 톡톡 털어주며 간지럽게 입김을 내불었다.

《선행은 나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가?》

《이 늙은게 뭘 돕는다는거요?》

《나도 숨이 차다. <총독부>의 어른들이 자주 내려오는데 영접비용이 딸려서 애를 먹는다. 이 겐지는 신의에 보답하는 사람이다.》

《얼마나 필요하시우?》

《수백원쯤… 그것도 손을 내밀 때…》

백선행은 때없이 오라가라 시끄럽게 구는 서장놈의 속심이 돈이나 바라자는걸가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럼 우리 도매점과 내가 장사하는데 못되게 구는 놈들을 막아주겠소?》

겐지의 모습은 이 순간 대가리가 두개 달린 뱀을 련상시켰다.

《총독부》의 폭압기구인 경찰조직으로 악랄한 음모를 실현할 흉심을 가진 얼굴과 왜놈고유의 교활성으로 제 배를 채우려고 간사하게 웃는 상통이 겹쳐져 간흉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 경찰이 당신을 보호할것이다.》

《두고봅세다.》

종로경찰서를 나선 백선행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리를 잃은 후부터 머리가 희기 시작하였다. 이마의 주름은 한층더 깊어졌고 모진 비바람에도 트는 법을 모르던 살결의 윤기도 사라져버린데다가 군데군데 검버섯이 돋았다. 아직 허리까진 굽지 않았어도 그전만큼 걸음이 빠르지는 못했다. 류달리 검던 눈동자도 빛을 잃어가긴 하지만 그전보다 더 엄엄해진 눈길만은 여전히 발밑이 아닌 아득히 먼곳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는 마음이 허전할 때마다 자기가 후원하는 학교들을 찾아가는게 위안으로 되였다. 며칠전 창덕학교를 찾아갔더니 공부하던 아이들과 선생들, 교장까지 달려나왔다.

《할머니! …》

아이들이 에워싸고 치마자락과 옷깃을 잡고 매달리며 반겨주니 이게 모두 내 손자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북받쳐 눈물이 앞을 가리웠다. 아이들의 옷차림은 각이했다. 살림이 넉넉한 집 아이들은 운동화까지 신었는데 대다수는 토스레옷에 짚신이나 맨발이였다.

백선행은 아이들의 머리를 쓸어주고 또 쓸어주며 생각했다. 공부도 배불리 먹고 등덥게 지내며 하는 애들보다 맨발로 다니는 애들이 꼭 앞설게다. 고생이 무엇인지 가슴에 새긴 애들이 열심히 배워 나라의 인재로 자라면 빼앗긴 내 나라도 다시 찾게 되리라. 참으로 아둔한 나라의 기막힌 정사가 아니였는가. 학문은 량반들만의것이였고 나기부터 상놈의 자식이면 평생 가도 글 한자 배울수 없었다. 이 나라에 량반족속은 몇이였고 상놈이라 부르는 백성은 그 얼마였는가. 재물과 권세라는 구린내나는 진창속에 골통이 썩어버린 놈들에게만 공부를 시켰으니 어떻게 진짜 인재가 나왔겠는가.

백씨는 천덕꾸러기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도 한스럽게 돌이켜져 늘 하던대로 아이들에게 재삼 당부했다.

《모두들 게으름을 부리지 말고 힘껏 배우거라. 졸린다고 자고 놀고싶다고 놀고 공부하기 싫다고 책을 밀어두면 안된다. 왜놈에게 짓밟힌 내 나라를 생각하며 부지런히 글을 읽거라. 이 할머니가 밝은 날을 못 보고 죽으면 내 한을 풀어 기어이 독립을 안아오거라. 난 너희들이 바른 맘 먹고 배우고배워 나라를 위한 인재가 되기를 빌고 또 빈다. 내 부탁을 언제나 잊지 말거라.》

백선행과 아이들은 한덩어리가 되여 목메여울었다.

광성학교에 이른 백선행은 공부하는 아이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을 조용한 곳을 찾아가 앉았다. 자기가 나타난걸 알면 공부를 하다말고 달려나올가봐 그런다. 그는 아이들의 글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였다.

느티나무에서 매미들이 쉴새없이 울어댄다.

마음에 평온이 찾아든 백선행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학교후원사업을 시작한게 정말 잘한 일이다. 벌써 했더라면 더 좋았으련만 그조차 장명학이 귀띔해서야 마음을 먹은 일이다.

솔뫼다리를 새로 놓은지 보름쯤 지나 송산으로 가던 그는 길가에서 장명학을 만났다.

《누님도 참, 혼자서 다리를 보자고 나왔군요.》

《그런게 아니라우. 자기장에 가보려구 떠난 걸음이지요.》

백선행은 다리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다리기둥에 새긴 《백선교》라는 글발이 보였던것이다. 그의 심중은 이루 형언할수 없었다. 강건너 다니는 사람들의 고생을 덜어주자는 생각으로 한 일에 불과할뿐인데 구박속에 살아온 과부의 성씨따위를 다 비에 새겨주다니… 후날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가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이 작은 다리 하나를 놓은게 뭐 그리 큰 덕행이라고 이같이 내세워주는걸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오?》

《내 바른 맘 먹고 선행을 하자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든게 없는 이년에게 도련님이 가르쳐주세요.》

《동생두 아닌 도련님이요, 배운것이란 껍데기뿐인 사서삼경으로 내가 뭘 훈시하겠소.》

장명학은 수십년을 누님으로 불러옴에도 불구하고 백씨의 변함없는 도련님대접에 속이 언짢아 퉁명스레 대꾸하였다.

《원, 그럼 이제래두 동생이라 내 부르면 되겠수?》

《허허- 누님, 누님은 아버님이 남기신 금언을 깨닫고 걸음을 떼지 않았소. 망국을 빚어낸 페정중의 페정은 량반과 상놈을 가려 교육을 한것이고 그 교육조차 제 나라것이 아닌 유교성리학에 매달린것이라고 보오. 옳바른 교육이 인재를 키우고 인재는 나라의 기둥이라 교육이야말로 나라의 만년대계가 아니겠소. 수난당한 내 나라를 구원하재도 쓸모있는 학문으로 나라위한 뛰여난 인재를 키워내는 교육사업을 도와나서는것이 제일가는 선행이라 보오.》

상놈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세상에 버러지보다도 못한 녀자로 태여난탓에 백선행은 글은 고사하고 교육이라는 말뜻조차 제대로 알수 없었다. 배운것이 있다면 제힘으로 하는 장사요, 그나마 수판알조차 튕길줄 모르고 눈치껏 제나름으로 익혀온 돈벌이재간이 전부였다. 걸음걸음 모르는게 한이였다. 하지만 늦었다고 한탄말고 나같은 까막눈이 더는 나오지 않게 이제라도 도와나서자. 아는것이 없어 당한 설음을 가셔줄수 있는것이 교육이고 돈만으로는 되찾을수 없는 내 나라 땅을 인재들이 찾아올수 있다면 내 무엇을 아끼랴.

마침내 백씨는 학교들을 도울 결심을 내리고 만달산토지흥정이 결판난 후 집에 찾아온 유양점과 장명학의 앞에서 자기 마음을 펼쳤던것이다. 백씨의 학교후원사업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학교 교실에서 울려나오는 아이들의 창가소리를 들으며 백선행은 자못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공부하는 청년들아

너의 직분 잊지 마라

새벽달이 넘어가고

동천조일 비쳐온다

백선행은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듯 새벽달이 지기만 바란다. 왜놈들의 학정은 날이 갈수록 포악해지는데 이 나라엔 언제면 아침해가 비쳐오려나. 망국의 수치를 씻자고 일어났다가 한을 품은채 저승에 간이들 그 얼마이던가.

피줄이 얼기설기 두드러진 손으로 그는 치마자락을 움켜쥐였다.

《누님이 아니요? 왜 여기에 이렇게 앉아계시오? 마침 누님을 찾아가던 길이요.》

《서북학회》 일원으로 교육진흥에 나서서 동분서주하는 장명학이 지나치다가 백선행을 보고 반가워하며 다가왔다.

《먼길을 다녀오느라 고생인들 오죽했겠수. 우리 신동이들을 다 떠나보냈나요?》

수재로 선발한 청년들을 중국 상해에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장명학이다. 백선행이 돈을 대주어 유럽나라 대학들에 공부하러 보내는 젊은이들이였다.

일본이 조선에서 실시하는 식민지교육의 실태를 장명학을 통해 잘 알게 된 백선행이 그와 의논하고 이런 용단을 내렸던것이다.

백선행은 마음속으로 고대해온 소식을 듣고싶어 물었다.

《보냈소. 역에서 나를 붙들고 <선생님, 고국에 돌아가시면 선행할머니에게 우리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꼭 공부를 잘해서 인재가 되여 돌아가겠습니다. > 하구 부탁합디다. 이국땅에서 이국땅으로 떠나보내자니 가슴이… 후유-》

장명학의 애끓는 탄식을 들으며 백선행은 고개를 쳐들고 구름 낀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 언제면 독립의 날이 오는가. 내 살아서 그애들이 돌아오는걸 보면 좋으련만…

무릎을 짚으며 힘겹게 일어나는 백씨를 장명학이 부축해주었다.

《허허, 젊어서 오륙을 너무 놀려선지 이젠… 하긴 먹은 나이가 있지 않나요.》

《그런데 여기 앉아서 뭘하셨소?》

백선행은 학교쪽을 바라보며 대견해하는 미소를 지었다.

《애들이 글읽는 소리를 듣구있었수다. 저애들이 자라면… 내 죽은 다음에라도 나라를 찾게 되겠지요?》

나라잃은 상처를 가슴속깊이 묻고 기약할수 없는 앞날에 인생의 마지막기대를 걸고 간절히 묻는 백선행의 추연한 모습에 목이 메여난 장명학은 슬며시 눈길을 돌리였다.

학교후원에 아끼는것이 없는 늙은이다. 평양땅에 돈많은 부자들이 많다지만 학교에 눈을 돌리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남들이 그리도 아까와하는 돈, 남들처럼 대물림한 재산이나 일확천금한 재물도 아니고 평생을 변변히 먹지도 입지도 못하며 한푼두푼 모아들이느라 땀과 피눈물이 가득 슴배여진 그 돈을 서슴없이 내놓은 갸륵한 마음의 깊이를 누가 다 헤아릴수 있으랴.

《누님, 가지 않으시려우?》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함께 가우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나 좀 알려주슈.》

나라를 빼앗긴 오늘에 와서 늘어나는것은 걱정이 전부인 우국지사뿐이라 장명학은 자기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같이 유식하다는 사람들이 앉아서 탄식만 할 때 제 입으로 무식하다고 말하는 백선행은 자신을 바치고있다. 사내들도 엄두를 못낼 큰일들에 선뜻 나서고있다. 왜놈들과 직접 맞섰던 만달산토지문제때도 그래, 학교후원사업 역시 그러하지 않은가. 이 나라에 식자는 누구고 진짜로 무식한 사람은 누군가.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도, 나라위해 애쓰는 사람도 결국은 이 땅의 평범한 백성들인가보다.

장명학이 제 생각에 빠져 대답이 없는데 답답해난 백선행이 다시 물었다.

《요즘 나라형세가 어떠하게요?》

《나라란 이미 빼앗긴 나라고 구국운동이란 허울뿐이지 분렬과 파쟁으로 서로 물고뜯으며 세월을 보내고있지요. 내가 이번에 중국 관내에까지 가서 두루 돌아보았는데 사대와 당쟁의 뿌리는 뽑아낼것 같지 못하오. 아, 언제면 이 나라에 동이 틀고…》

백선행은 장명학의 맥빠진 탄식에 화가 나는것을 겨우 참았다. 아무러면 그렇게도 인물이 없겠는가. 앞일을 작정할 마련은 않고 툭하면 막막하다는 한숨뿐인 량반네들이다. 천한 내인만치두 강심을 먹을줄 모르고서야 무슨 큰일을 칠텐가. 사모쓰고 활개치던 식자있는 이네들을 믿고 나라를 찾기는 통 글렀다. 남의 나라 땅에 가서도 서로 으르렁댄다니 망신스러운 일이 아니고 뭔가. 언제든 단군성왕님 같은분이 나타날게다. 그날이 어서 와야 할텐데…

류성리 앞길을 지나던 백선행이 멎어서며 물었다.

《저건 무슨 집이요? 내 요즘 멀리 나다니지 못하다나니 저렇게 꽤 커뵈는 집이 생겨난것두 몰랐수다.》

《왜놈들이 지은 공회당이요.》

《공회당이라니? 게선 뭘하게요?》

《우리 나라를 어떻게 다스릴가 공론하는 장소인데다 잡스러운 놀음까지 벌려놓는다고 하오.》

《무슨 놈의짓들을 하는지 한번 구경이나 하자구요.》

장명학이 막아섰다.

《누님, 저긴 못 들어가오.》

《아니, 이 평양땅에 내가 들어가지 못하는 집도 있수?》

길게 한숨을 쉰 장명학이 말했다.

《조선사람은 들여놓지 않는 집이요. 한마디로 왜놈들이 우리를 깔보자고 지은 공회당이라오. 그만 갑시다.》

《왜놈종자들이 저따위 집이나 지어놓구 우릴 우습게 본단 말이우?》

백선행은 일본양옥집을 불이 펄펄 이는 눈으로 노려보며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누님! 고정하소.》

백선행은 장명학의 근심어린 말에는 아랑곳 않고 그냥 이를 부득부득 갈아대며 몸을 떨었다.

《하늘이 무서운줄 모르는 이 왜놈의 종자들아! 이 한을 어떻게 풀고…》

장명학과 헤여져 집으로 돌아온 백선행은 왜놈들의 공회당을 보고난 울분으로 하여 저녁조차 먹지 않았다.

밤이 깊도록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던 백선행은 마당으로 뛰여드는 다급한 발자국소리에 놀라 일어나 앉았다.

《어머니! … 이 일을,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

숨이 턱에 닿은 경림의 처가 다급히 부르며 알수 없는 말만 거듭하는통에 속이 끓어난 백선행은 방문을 활 열고 나섰다.

《이 밤중에 웬 소란이냐?》

《어머니… 도매점이… 도매점에 불이 일었어요. …》

《뭐라구?! …》

정신을 번쩍 차리고 바라다보니 륙로문선창쪽에서 시뻘건 불길이 솟구치고있는게 아닌가. 도매점이 타고있는게 분명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여름철이라 불을 지핀 아궁은 하나뿐이고 그나마 하루 세끼 밥이나 지어먹는게 고작인데다 물건들을 넣어두는 창고가 있어 불단속을 한시도 소홀히 해본적 없는 집이다. 스무해 가까이 불이 난 일이 없었는데 이 무슨 변이란 말인가.

백선행은 경림의 처가 이끄는대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잠에서 깨여난 숱한 사람들이 물동이와 초롱들을 들고 뛰여다니며 불을 끄느라고 아우성이다. 어찌나 불길이 세찬지 기와장이 녹아터지고 동이며 초롱으로 물을 퍼부으면 펑펑 소리까지 지르면서 기승을 부려댄다.

도매점이 길옆에 자리잡은데다 이웃의 집들과 거리가 먼것이 다행이다.

불길속에서 기둥이 콰당탕 넘어가고 기와장들이 와르르 쏟아질 때마다 검은 연기가 밤하늘을 뒤덮는다. 너울대는 불빛아래서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울려온다.

《어떤 놈들이 못된 마음을 먹고 불을 질렀소.》

《설마 그럴리야…》

《석유냄새가 나는걸 맡지 못하오?》

《분명 석유냄샐세.》

백선행은 억이 막혀 우뚝 굳어져버렸다. 다 태워먹은 도매점이다.

수만원이 불에 타서 재로 되는 참변앞에 넋을 잃은 백씨는 주위에서 떠드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이따금 두손으로 가슴을 쥐여뜯으며 정신없이 《나리야, 나리야…》 하고 찾았다. 그에게 있어서 도매점은 비명에 간 나리의 혼이 깃들어 살붙이같은 집이였다.

《어머니, … 제가… 제가 집조차 바로 지키지 못해서…》

경림이가 나타나서야 백선행은 정신을 수습했다. 사람이라기보다 타다남은 나무등걸같은 경림이의 온몸은 재투성이였고 머리카락이 온통 그슬린게 보기조차 처참했다.

《경림아! … 이게 뭐냐? 불속에 뛰여들다니?! 다친덴…》

경림은 두눈에 눈물이 그렁하여 고개를 저을뿐이였다.

《아범은 어찌됐냐?》

《집에 돌려보냈습니다. … 허리를 다쳐서…》

백선행의 눈길이 황황히 경림의 처를 찾았다.

《네가 빨리 가보거라. … 의원을, 의원을 데리고… 어서!》

경림의 처를 쫓다싶이 떠밀어보낸 백선행은 피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아이구… 저 집안에 나리가 있는데… 그앨 두번 죽이는구나. …》

《어머니! …》

나리의 남편과 경림이가 백선행의 품에 와락 안겨들며 황소울음을 터쳤다.

악착스러운 불길은 도매점을 재더미로 만들어놓고서야 사그러 들기 시작했다. 마치 늦겨울 동뚝에 피우는 쥐불같이 여기저기서 피여오르다 잦아들며 대동강바람을 타고 더운 재만 휘뿌려댔다.

이렇게 종로경찰서장 이시하라 겐지의 모략으로 백선행의 도매점은 하루밤사이에 깡그리 불타버렸다.

평양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며 왜인들이 방화하였다는 말이 분노로 번져질 때 백선행은 두문불출하고 자리에 누워 열흘이 지나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수만원을 하루밤사이에 잃었으니 아무리 속대가 굳은 녀자래도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나이도 있는데 몸져누웠으니 걱정하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문병을 왔지만 백선행은 경림의 처를 내세워 누구와도 만나지 않을 의사를 밝혔다.

서울에 갔던 장명학이 뒤늦게야 소식을 알고 걸음을 다우쳐 백선행을 찾아오다가 대문가에서 유양점을 만났다. 머리가 반나마 희여버린 유양점이 뭔가 잔뜩 짊어지고 선 모습에 장명학은 저으기 놀랐다.

《양점형, 어인 일로…》

《선행이 재난을 입었다는 말을 듣고 오는 길이요.》

《나도 오늘에야 알았소.》

마당에 들어서는 두사람을 경림의 처가 맞아주었다. 여느 사람들 같으면 돌려세워 보냈겠지만 어머니와 오랜 친분을 가지고있는 장명학과 유양점이였기에 안방으로 모시였다.

유양점은 룡강에서부터 지고온 짐을 경림의 처에게 내놓으며 저녁을 지으라고 이르고나서 장명학과 방으로 들어갔다.

《선행의 신상이 걱정되오.》

유양점의 한숨섞인 소리에 장명학이 부엌에 있는 경림의 처에게 물었다.

《식음을 전페했다는게 사실인가?》

《그전만 못해도 조금씩은 드십니다. … 무슨 생각인가 하시는것 같은데 물을수도 없고… 숱한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하나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그 소리에 두 사나이가 긴 한숨을 내쉴 때 미닫이문이 열리더니 백선행이 저고리고름을 매며 내려왔다.

《양점어른이 어떻게 그 먼길을 오셨나요?》

백씨의 어조는 담담했다.

깜짝 놀란 두 사내는 백씨의 거동을 멍청히 쳐다보기만 했다. 도무지 앓고난 사람같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꿋꿋한 기상이였는데 이상하게 번뜩이는 두눈이 어쩐지 심상치 않은 느낌을 주었다.

《누님, 몸은 좀 어떻소?》

장명학이 걱정스레 묻자 백선행은 시들히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내 앓기는 좀 앓았소만 육신이 아파서가 아니라 정신을 가다듬느라 앓았지요.》

유양점은 백선행이 심한 정신적고초로 퍼그나 늙었다는것을 느끼면서 그의 헌헌한 목소리에 의혹을 가지였다. 사내대장부라는 자기도 첩년과 자식들이 돈을 털어가지고 도망쳤을 때 제정신이 아니였다. 하물며 녀자인 백선행으로서야… 그런데 자기앞에 앉은 녀인은 너무도 태연하지 않은가.

열흘동안의 모대김끝에 백선행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결심이 자리잡았다.

도매점화재는 왜인들이 저지른짓이 분명하다. 만달산토지흥정때부터 자기를 눈에 든 가시같이 여겨온 왜놈들이다. 공짜로 땅을 빼앗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나리의 목숨을 앗아가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 악귀같은 왜놈들이 내가 제놈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고 엇나가니 망하게 만들자고 잡도리를 한거다. 나라를 잃었다고 그것들앞에 기가 죽어살 내가 아니다. 도매점을 재로 만들었다고 너털거렸을 그놈들의 눈깔이 뒤집히게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백씨는 도매점을 잃은 쓰라린 아픔을 씹어삼키며 왜놈들과 끝까지 해볼 마음을 굳게 다지였다.

《내 두 어른을 은근히 기다렸지요. 마침 이렇게 마주앉았으니 속에 품었던 생각을 들어들 주시려우?》

백선행이 진중한 표정으로 장명학과 유양점을 건너다보았다.

《누님, 어서 말씀하오.》

《내 늙은 몸이라도 선행의 한을 풀어주는 일이라면 기꺼이 나서겠소.》

《난 공회당을 짓자구 마음먹었어요.》

《?! …》

두 사나이는 도매점의 화재로 숱한 돈을 날린 백선행의 입에서 너무도 상상밖의 말이 나오는 바람에 억이 막힌 충격으로 마주보기만 했다. 그러니 열흘이 넘도록 자리에 누워 공회당 지을 결심을 했단 말인가.

《왜들 대답이 없으시우? 내가 황당한 소릴 하나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유양점이 턱수염을 흔들며 떠듬떠듬 중얼거렸다.

《지금같이 어려운 형편에서 그건… 수십만원이 들어야 할 일판을 벌린다는게 어디…》

백씨의 두눈에서 한갖 괴벽스러운 고집이 아닌 반항의 불꽃이 튕겨져나왔다.

《내 돈 한푼한푼은 평생 피땀으로 번것이여서 내 목숨이나 같지요. 도매점엔 분명 왜놈들이 불을 놓았수다. 번 돈을 일본을 위해 쓰지 않으면 재로 만들겠다는 속심을 드러냈수다. 난 한푼도 왜놈들에게는 내놓지 못하겠어요. 내 손으로 그 돈을 몽땅 대동강에 처넣는 한이 있더라도…》

장명학은 백선행의 장한 결단에 가슴이 후더워올랐다. 어떻게 이루어진 결심인가. 죽기로 왜놈들과 맞서려는 백선행이였다. 사람이 돈을 바로 쓰면 애국자가 되고 그르게 쓰면 매국노가 된다는 엄정한 리치를 행동으로 보여주고있지 않는가!

《양점형, 우린 누님의 뜻을 따라야겠소. 그게 구국의 길이자 애국의 길이기때문이요.》

《로형의 말이 옳소. 선행은 이름그대로 선행이요.》

유양점도 갈린 소리로 말했다.

백선행이 두손을 쳐들고 내저었다. 두사람의 말이 자기 생각보다 엄청나보여 당황해났던것이다.

《이러지들 말아요. 나같은게 애국하는 일이 어떤건지 알기나 하나요. 그저 왜놈세상이지만 왜놈들한테 눌리워살지 않겠다는 생각뿐이예요.》

백선행의 그 모습이 두 사나이에게는 순결무구한 정신과 송죽같은 절개로 느껴져 눈물이 그렁해나기까지 했다.

《허허, 이 유양점이라는게 룡강에서 백씨소식 듣고 위안이나 하려고 찾아들었으니 과시 졸부외다.》

그렇게 말하는 유양점의 눈귀도 축축히 젖어들었다.

앉아있기 옹색해난 백선행이 정지문을 열었다.

《저녁은 다 됐냐?》

《예, 이제 들여가려던 참입니다.》

경림의 처가 상을 차렸다. 밥바리마다 기름기도는 흰밥이고 물고기국에 조기구이, 꽃게, 대합회 같은 서해안어물을 갖가지로 갖추었다.

《네가 귀한 손님 오신줄 알구 마음먹고 차렸구나.》

백선행이 좋아서 경림의 처를 칭찬하자 그쪽에서 손을 흔들며 말한다.

《아닙니다. 어르신네가 오시면서 가지고… 저녁엔 그것으로 차려 어머님을 대접하라기에 저는 그저 시키는대로 했습니다.》

경림의 처와 저녁상을 번갈아 보고난 백선행이 두손으로 무릎을 쳤다.

《원, 세상에… 양점어른이 이럴줄은…》

그제야 유양점은 처음 웃음소리를 냈다.

《허허, 이게 내 손으로 거둔 룡강쌀이요. 숭어도 조기도 꽃게도 내가 매생이 타구 손자녀석과 잡은거요. 맛이나 보오.》

《이젠 잡수신 나이도 있는데 매생이 타구 고기잡이까지 하시다니요. …》

《양점형의 그 힘은 누구도 당하지 못할거요.》

《열흘갈이땅을 사흘이면 다 엎어치우니까. 하하, 로친네가 폭삭했소. 밭두렁에 나와앉아 여보 령감, 쉬염쉬염 하소 하구 소리친다네.》

늙어서 정을 붙인 그들내외의 모습을 보는것 같아 백씨는 얼굴이 밝아지며 잔마다 술을 부었다.

《어서들 잔을 비우시우.》

《선행, 내 이 술을 마시고 공회당건설을 주관하리다.》

《아니, 집에 기별도 하지 않고 여기에서 일하시려우?》

《일없소. 로친도 아들, 손자들도 다 좋아할거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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