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37

 

일본료정앞에서 유양점은 한때 벼슬길에 함께 올랐던 옛 지기를 만나 싱갱이질을 하고있었다.

《난 일본계집이라면 영 질색일뿐더러 왜식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네.》

《양점, 자네 아직 맛을 들이지 않아 그렇다니…》

《아아, 자네나 즐기게. 난 싫으이.》

유양점은 손을 내저으며 돌아서다 어떤 녀인과 마주쳤다.

어디서 본 얼굴인가. 나이는 좀 있는것 같으나 미색을 잃지 않은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어느 기생방에서였을가. …

그가 이렇게 더듬어보는데 녀인은 머리를 푹 수그린채 료정앞으로 종종걸음을 놓았다.

《아, 송월… 송월이!》

송월이였다.

자기를 알아본 유양점에게 언뜻 원망서린 눈길을 보낸 송월은 료정안으로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어찌된 일이야? 분명 선행의 도매점에 있던 송월이가 옳은데…》

오래간만에 만난 옛친구의 성의를 뿌리친 유양점은 류성리를 등지고 휘적휘적 걷다가 오탄술집이 눈에 보이자 저도모르게 웃음을 띠우고 중얼거렸다.

《저기가 우리 술집이외다.》 하던 로친네도 북망산에 갔다니 어디 한번 들려봐? …

유양점은 오탄술집에 퍼더버리고 앉아 늦도록 마시고서야 일어났다.

가을바람이 부는 평양의 거리, 야경을 치는 소리조차 멎어버린 밤의 고요, 우수의 락엽과 더불어 한숨짓는듯 한 어둠속으로 유양점은 비청거리며 걸어갔다.

인생은 한번 가면 다시는 못 오는것, 과히 짧게는 살지 않았어도 뒤돌아보니 왜 이리도 쓸쓸한가.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몸을 담그고서 속세의 이 물, 저 물 다 마셔보았다. 그리도 끊기 어려웠던 계집질도 이제는 실뚱해졌다.

싫어져서라기보다 나이가 말을 들어주지 않아 어쩔수없이 뜸해진 판이다. 그러니 돈은 있다한들 이제 어데다 쓰겠는가. 이 유양점의 호주호색도 서산의 해같이 지는구나. 아, 인생은 류수같다더니…

거나하게 취한 유양점은 늙음을 탄식하며 첩네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와 첩사이에는 요즘 싸움이 잦다. 젊어서는 안그러던것이 무슨 시샘이 그리 많아졌는지 하루밤만 외박을 해도 매달려 행악질이다. 화김에 이번에는 어데 간다는 소리도 안하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해볼 생각이 들어 순안쪽에 저수지공사를 벌리려고 갔다오는 길이다.

《허- 내 그년에게 가랭이를 물려 시라소니가 되여가는게 아니야.》

유양점은 취김에 화가 동해 이렇게 중얼거리며 걷다가 어떤 녀자가 곁에 따라서며 인사하는통에 와뜰 놀라며 멈춰섰다.

《어른께 인사불성이였던 저를 용서하십시오.》

《엉? … 인사불성… 용서라니…》

어둠속에서 녀인의 숨결이 불안스레 들렸다.

《아까는 미처 인사드릴 경황이 못되여… 제 송월입니다.》

그제야 유양점은 일본료정으로 들어가던 녀자생각이 났다. 자기가 틀리게 본것이 아니였다.

《송월이라… 백씨가 딸같이 여겨 박천객주집에서 데려다 도매점을 맡겼던 그 송월이 옳은가?》

《그렇습니다.》

《송월이가 옳다면 인사불성은 인사불성이야. 나한테가 아니라 선행에게 말이네.》

《이년은 도리를 저버린 죄진 몸이라 어쩔수 없습니다.》

《나도 아네. 그렇다고 평양에 와서까지?》

송월은 긴말 할새가 없는지 몹시 서둘러댔다.

《제 다시는 이곳에 발길을 돌리지 않자고 했지만 평생 품고사는 원한을 풀자고 해서이니 더이상 묻지 말아주십시오.》

송월이가 보통 독한 계집이 아니라는것을 유양점은 백선행을 통해 잘 알고있었다. 도매점일을 맡아하면서 도원국이와 한짝이 되여 잠상까지 했다니 담도 여간 아니다.

백선행과 절교한 후 굴러다닌 곳도 알만 하다. 똑똑하면서도 바보짓을 한 송월이다.

《송월이가 품고산다는 원한이 도대체 뭐게?》

《목숨을 바쳐서라도 풀어야 할 한입니다.》

《저런… 언제부터 그속에 그런 독한 심사가 깃들었느뇨?》

《다섯살때부터 품은 한입니다.》

《허허.》 기막힌 웃음을 짓고난 유양점은 《그렇다면 내 굳이 알자고 하진 않겠네.》하고 말했다.

《부탁합니다. 어르신께서는 어머니와 자별한 사이지요? 부디 제가 평양에 나타났다는것과 거처만은 루설하지 말아주십시오. 간절한 이 부탁을 꼭 지켜주십시오.》

이 말을 남긴 송월은 어둠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던 유양점은 불길한 생각이 갈마들어 손을 내저으며 머리를 활활 털어대고나서 걸음을 옮겼다.

첩의 집앞에 이른 유양점은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집안은 이상하리만큼 괴괴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신도 벗지 않고 방안에 들어간 유양점이 등불을 켜고 둘러보다가 정신을 번쩍 차리며 굳어졌다. …

백선행은 자기 집을 찾아온 유양점을 보고 기겁했다. 호걸남아답게 늘 잘 차려입고 얼굴에는 능글맞기는 해도 싫지 않은 웃음을 지우지 않던 사람이 며칠사이에 늙은이가 되여버렸던것이다.

무명바지에 조끼도 입지 않은 동저고리바람인데 헝클어진 상투는 미친 사람의 몰골을 방불케 했다.

《아니, 이게 양점어른이 옳으시우?》

너무도 놀란 나머지 백선행은 억이 막혀 물었다.

《나외다. … 허허허. 선행이 노상 입에 담아 깨우치려 하지 않았소. 못된 첩은 집안 망칠 요물이라구… 망한 양점이 선행의 한잔술을 마지막으로 얻어마시자구 왔소.》

채머리까지 흔드는 유양점의 정상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었다.

《어서 들어가십시다. … 통 무슨 영문인지…》

백선행도 덩달아 허둥거리며 그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얘야, 어서 뭘 좀 차려라. 제꺽…》

경림의 처에게 말한 백선행은 미륵처럼 선 유양점을 다시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시우? 꼭 혼나간 사람같으니…》

《바로 봤소. 이놈의 혼이 쑥 빠졌소. 망했수다! …》

망했다는 소리만 자꾸 외워대던 유양점은 땅바닥도 아랑곳 않고 털썩 주저앉았다.

희여멀쑥하고 번번하던 사내가 어쩌면 이다지도 한심스레 변할수 있단 말인가. 그러거나저러거나 한생을 살며 인연을 맺어온 사람이다. 무슨 변괴라도 생겼는가. 묻자니 이 모양을 한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연하기만 하다.

백선행은 퍼더버리고 앉은채 땅이 꺼지게 한숨만 내뿜는 유양점의 모습을 아연히 지켜보았다.

일손이 빠른 경림의 처가 제꺽 주안상을 차려내왔다.

백선행은 《송산술》을 사기잔에 부어주었다.

《어서 드시우.》

《고맙소, 선행.》

유양점은 부어준 첫잔을 비운 다음부터는 제 손으로 연방 부어 마셔대는게 반정신이 나간 행동거지다.

《원, 천천히 마시구려. 그러다 술에 체하겠수다.》

백선행의 걱정스러운 말에 유양점은 너털웃음을 터치며 제 꼴을 두고 빈정거렸다.

《술이 아니라 색에 잔뜩 체한 이 주제를 못 보시우? 먹히웠수다. 첩년에게 내 그만 먹히우고말았다오. … 허허허… 남자는 호색호주에 망한다더니 그 벼락이 이렇게 내 머리우에 떨어질줄은 몰랐소그려. …》

《…》

《내 일찌기 선행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 신세가 됐겠소. 사람이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선행한테서 배웠어야 하는건데… 망한 뒤 후회라더니 내가 그 꼴이 됐소.》

《너무 속쓰지 마시우. 주제넘은 내 타박 몇마디가 퍽 속에 걸렸던가부지요?》

손을 휘휘 내두르고난 유양점이 또 술잔을 비웠다.

《그런게 아니요.》

통탄을 쏟으며 하는 유양점의 말에 백선행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첩의 몸에서 낳은 유양점의 두 아들은 피줄을 이어서인지 소문난 난봉군에 망나니들이였다. 그녀석들때문에 집안싸움이 그치는 날 없는데다 첩은 첩대로 제 낳은 자식이라 두둔하며 유양점을 향해 조석으로 앙탈질이니 집안꼴은 날로 험해만 갔다.

그날도 술집에서 화술을 들이키고 돌아왔는데 이게 웬일인가. 대문을 걷어차고 들어간 집은 속이 텅 비여버린 집아닌 집이였다.

허둥지둥 이방저방을 훑어가며 불러보았으나 응대는커녕 인기척 하나 없었다.

뒤미처 펀뜩 떠오르는 생각에 쫓기운 유양점이 황급히 자기 방 장농을 열어젖히고 돈궤를 찾아보았으나 그것도 이미 통채로 없어진 뒤였다.

첩년이 아들녀석들과 함께 수만원어치 금은붙이며 돈이 가득 든 궤를 훔쳐가지고 도망쳐버린것이 확실하였다.

눈에 달이 오른 양점이 때식도 잊고 도락도 줴던진채 그들의 향방을 찾아 여기저기를 헤맸으나 허사였다.

유양점은 스스로 치욕을 들쓴 자기의 꼴이 하도 구차해보이고 한스러워나서 가슴을 쳤다. 그야말로 궁지에 빠진 그였다. 토목공사로 애써 모아들인 큰돈을 다름아닌 제 집에서 식솔에게 다 털리운 신세다.

희귀하다고 해야 할 얘기를 다 듣고나서야 백선행은 유양점이 거지신세로 굴러떨어진채 자기를 찾아왔다는것을 깨달았다. 감감 잊고 지낸 본댁네도 아니고 평시에 몸 담고 살며 정을 준 첩네한테서, 남도 아닌 제살붙이들에게서 재산을 말짱 털리우고 버림을 당한 유양점이였다. 선행은 그를 무슨 말로 달랬으면 좋을지 몰라 딱한 심정에서 측은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내 그 년놈들을 기어쿠 붙들겠소. 잡아서 몽땅 혼쭐을 내구… 내 돈을 앗아내고야말테요.》

유양점은 두눈을 부릅뜨고 천정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이를 갈아댔다.

백선행은 유양점이 이루지도 못할 헛된 다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자초지종 다 듣고보니 양점의 첩과 그 자식들이 하루아침에 마음을 돌려 저지른 일이 아닌듯싶다. 이미전부터 작당을 하고 기회만 노리다 돈을 훔쳐가지고 도망친게 분명하다. 이런 어망처망한 일이 빚어질 때까지 유양점이 전혀 낌새를 채지 못했다니 참 기막힌 판이다.

그리운것 없이 살아온 량반후손이 벼슬을 버리고 장사길에 나서서 돈을 벌면서 돈맛을 익혔다. 돈맛이란 일단 들여놓으면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른 소금물이나 매한가지다. 돈 가진 인간이 일단 유흥도락에 빠지면 헤여나오지 못한다. 유양점이 바로 그렇게 살았고 한치두치 주색의 진펄에 발을 옮겨놓던 끝에 이 지경에까지 이른것이다. 돈이라는걸 처음 만들어낸것은 사람이지만 바로 그 돈이 지금처럼 사람을 망하게 만들기도 하는것이다. 유양점의 비참한 오늘이 그것을 보여주고있지 않는가.

《양점어른, 내 한마디 하라우?》

《해주우. …》

《수만원을 순간에 날린셈이니 그 심정이 오죽하랴만 쒀논 죽인걸 어찌겠나요. 아마 찾기는 어려울거외다. 솔밭에 바늘을 떨군셈 쳐야지요. 속이 타실테지만 다 잊고 이제라도 룡강본댁을 찾아가시우. 그래두 어르신의 여생을 품어줄이는 그 녀인밖에 없을줄 아우다.》

듣고보니 정말 옳은 충고요, 가고싶은 마음도 일순 솟구쳤지만 양점은 차마 선뜻 응할수 없었다. 무슨 낯으로 룡강에 가서 처자를 만난단 말인가. 평소엔 비위가 떡판같고 천연덕스럽던 그였지만 이제 와서 본처앞에 나설 용기만은 좀처럼 나지 않았다.

《짐승가죽을 썼다면 몰라도…》

유양점은 실로 자기라는 인간의 존재자체가 무의미함을 통감하며 때늦은 죄의식속에 허덕였다.

《내 행상다니며 들은 얘긴데 한번 들어봐요. 어느 옛적일인지는 몰라도 시앗싸움에 시달리던 한 량반이 누가 진정인가를 떠볼 심산으로 열흘이 넘도록 신고다녀 쿠린내와 진때에 절은 버선 한짝은 본댁에게 주고 다른 한짝은 첩에게 주며 터진 혼솔을 당장 기워내라고 했답디다. 하니까 첩이라는 녀자는 버선에서 나는 냄새에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고개를 외로 돌린채 대강 기우고 가위로 실을 잘라 밀어놓는데 본댁은 이마살 한번 찡기지 않고 손 다림질해가며 정성스레 깁고나서 그 역한 버선을 서슴없이 입가로 가져가더니 실매듭을 물어끊더라겠지요. 사람이란 거짓정에 속으면 진정을 노엽히고 한뉘 제 부모 섬긴 안해마저 소박하게 된다고들 하더라구요.》

시종 너그러운 소리로 들려주는 백선행의 얘기는 옛말에 불과했지만 그 의미가 새겨지면서 유양점은 남달리 큰 자기의 허우대가 대번에 한줌만큼 졸아드는것 같이 느껴져 좀처럼 머리를 들수가 없었다.

실로 옳은 말이다. 지금껏 룡강본처가 이 방탕한 남편을 탓해본적이 있었던가. 가문의 큰 살림을 맡아안고 시부모를 공손히 섬기였고 사후엔 제사를 받들며 가사를 알뜰히 돌보아온다. 남편이 첩을 둔 소식을 얻어들었겠지만 엎디면 코닿을 룡강에 살면서도 언제 한번 올라와 소란을 피운 일도 없다. 비단결이 아무리 곱고 부드럽다한들 이 녀인의 마음씨에 비길수 있으랴.

헌데 남편이라는 놈은 인생살이 마감고개를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이 모양으로 있으니 한생토록 형언할수 없는 고통만을 들씌운 보상을 무엇으로, 어떻게 한단 말인가. 지금 형편에선 백선행의 말대로 룡강집에 찾아가는 길밖에 없다.

죄는 지은데로 가고 덕은 닦은데로 간다는 옛말 그른데가 없은즉 인륜법도를 어겼으니 어찌 하늘이 내리는 벌을 피할수 있을손가. 흥진비래라 즐거움이 끝나면 슬픔이 닥치기마련인가부다.

돈냥이나 있을 때엔 사람도 세상도 제 발밑에 있는것 같고 도락도 끝없을듯싶더니만 거렁뱅이의 신세에 이르러서야 세상이 엄정함을 비로소 깨닫게 되였다. 그래서 옛글에서도 덕을 숭상하였으리라.

《선행, 그래도 나같은 사람에게 옳은 소리를 해주는건 그대뿐이요. 내가 이 꼴로 되니 그 많던 술친구들도 장독에 붙었던 파리들처럼 다 날아가버리고맙디다.》

《돈으로 사귄 친구들이니 그럴수밖에요. 이제야 그 사람들이 어른을 왜 찾겠나요.》

《허허, 그 말두 옳수다.》

혼자서 되병술을 바닥낸 유양점은 선행의 말에 수긍하며 서글픈 소리로 말했다.

《이젠 평양에서 하루밤 잘 곳도 없으니 선행의 말대로 룡강에 내려가려오.》

《잘 생각하셨어요. 언제 가시려우?》

《이길로 내려가려오. 초라한 꼴일망정…》

유양점의 맥없는 대답에 백선행은 한숨을 내쉬였다.

《이왕 내 말을 들을바엔 마저 들어주시우. 경림이 부처에게 공대를 이를테니 내가 도매점에 올라가 어른의 평양집을 처분하고 돌아설 동안 예서 묵으며 울화도 좀 풀고 옷갓이랑 바로 갖춰 떠나는게 어떤가요? 오래간만에 처자앞에 나서는데 차림새가 그게 어디 됐어요?》

그지없이 고마운 백선행이다. 그 어데도 손을 내밀데가 없게 된 자기를 이토록 걱정해주는 진정에 양점은 눈굽이 달아올랐다. …

그날부터 유양점은 백선행의 집에서 일체 바깥출입을 못하고 누워 앓으며 꼬박 사흘을 지냈다.

그사이 집처분을 마친 백선행은 양점의 옷가지와 망건도 새로 마련하고 그가 집에 가져갈 물건등속도 갖추어놓았다.

《내 지금 오면서 보니 대동강나루에 남포로 가는 배가 한척 있기에 부탁해놨어요.》

자기를 위해 아낌없이 기울이는 백선행의 후더운 인정에 유양점은 할 말을 잊고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였다.

백선행은 참지에 싼 돈을 양점앞에 밀어놓았다.

《자요. 많지 않아도 가지고 가시라요.》

《선행, 이러지 마오. … 사람이 렴치라는것도 있지 않소. … 내 어디 가면 살지 못하겠소.》

신세진것만도 갚을 길 없는 유양점이라 두손을 내저었다.

《어른에겐 돈이 많으면 또 곬을 바꿔 흘러갈가봐 더 주지는 않겠어요. 그래도 장사길에 나섰다 오래간만에 가는 집인데 사내 주머니가 비면 되겠나요. 어서 받아넣으시우.》

《고맙소. 허지만 이 빚은 갚고 죽지 못할가보오.》

백선행을 따라 대동강나루에 이를 때까지 유양점은 실로 생각이 많았다. 글도 세상리치도 다 깨친 량반이라 코를 세운 자기는 주색잡기로 망해버린 초라한 꼴을 보이는데 그쳤지만 앞에서 걷는 일자무식의 이 녀인은 세상고초를 다 겪으며 평양백성이 다 아는 인물로 되였다. 결국 식자개나 있다고 해서 인간구실하는것도 아니다. 고생속에 자기를 알고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이 튼 사람만이 후회없이 살수 있는게 아니겠는가. 백선행이 그런 녀자다. 한생 근검절약으로 번 피땀스민 돈을 저 하나의 향락이 아니라 제 피줄도 아닌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쓰고있다. 세상에 드문 이런 녀인을 자기 한생에 알고지냈다는것만도 행운이 아닌가.

사람들이 백선행을 왜 존경하는가를 오늘에 이르러서야 새삼스럽게 느끼는 그였다.

나루배에 사람들이 타고있었다.

《어서 오르시우.》

백선행도 리별의 감정으로 속이 쓸쓸해왔다.

방탕으로 불행을 산 가련한 사내를 바래우고있다.

녀자인 자기에게 한창나이때부터 따라다닌 사내다. 곱지 못한 욕망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마음에 두었던 남자임은 틀림없다. 이룰수도 이루어질수도 없는 그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어서인지 마음은 이상하게 허전했다. 아득한 세월속에 물러간 삼화려각의 그밤이 잊혀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에게서는 가장 참기 어려운 순간을 이 사내한테서 당했고 넘겼다.

《선행, 부디 몸성히 잘 계시오.》

《편히 다녀가시우. 바쁜 일이 생기면 인편으로 알리라구요.》

《고맙소, 선행…》

유양점을 태운 나루배가 기슭을 떠난다. 사공이 노젓는 소리가 구슬픈 노래가락처럼 들려온다.

배에 선 유양점을 바라보며 백선행은 자리를 잡고 앉으라고 손짓했다.

《선행, 잘 있소! …》

유양점은 다시한번 소리쳐 작별인사를 했다.

리별이란 괴로운것이다. 이제는 두사람 다 늙은이들이니 다시 만날 날이 있을텐가. 그들의 과거는 어딘가 먼곳으로 흘러가고있었다.

강기슭에 선 백선행은 멀어져가는 배를 이윽토록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람의 한생도 저 강물처럼 흘러만 가고 돌아오지 못한다.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며 악을 쓰지만 죽으면 그만이다. 무엇이 남는가. 량반이건 상놈이건, 부자건 가난뱅이건 죽으면 재산도 가난도 귀천도 저 강물처럼 흘러가버리고 끝이 나고만다. 다시 오지 않는게 인생이고 두벌 살지 못하는것이 사람의 목숨이다.

《<바를 정>! 마음을 바로가지라. …》

백선행은 장규현이 남긴 금언을 조용히 외우며 되새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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