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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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멘트와 콩크리트에 대한 집념은 오노다의 남다른 취미이기도 했다.

철혈전쟁의 새로운 세기는 그 어떤 거대한 파괴력에도 끄떡하지 않는 방어용요새를 요구하는데 그것을 세멘트가 담보한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천황페하》에 대한 《충성》과 사무라이기질로 이루어진 일본군대를 대륙침략의 길에 내몰았지만 총창이 달린 보총을 멘 알몸뚱이나 다름없다. 로일전쟁에서 승리의 개가를 올렸다고는 하지만 려순요새의 함락을 위해서만도 수만병졸들의 시체더미를 성벽높이만큼 쌓아야 했다는것을 일본의 정객들은 잊지 않고있었다. 오노다도 같았다.

전쟁은 파괴와 죽음의 동의어나 같지만 앞으로 일본이 맞설 나라들은 렬강들인것으로 하여 《야마도 다마시》정신과 함께 무장력을 강화해야 한다. 전쟁은 공격과 방어로 이루어진 싸움이다. 공격을 하려고 해도 요새화된 병기창이 있어야 하며 방어를 하려고 해도 포탄을 막아낼수 있는 든든한 공병구조물이 있어야 한다. 오노다기업에 막대한 리윤을 제공하여줄 세멘트와 강재는 일본정부에 있어서도 절박한 요구로 제기되고있는것이다.

오노다에게는 조선의 자원분포도가 있었다. 그것을 들여다볼 때마다 하루빨리 황금덩이의 주인이 되고싶은 욕망으로 하여 잠조차 오지 않았다. 이와 같은 심리로 하여 며칠전에 급히 현해탄을 건너 조선땅에 발을 디딘 그는 서울에 도착하기 바쁘게 세이찌로를 호출했다.

세이찌로가 현지에서 시작한 일에 대하여 속속들이 료해하고난 오노다는 저으기 불만스러웠다. 외교관의 경력을 가지고있기에 믿었더니 평양의 돈개나 있다는 과부로친네와 마주서서 세월없는 바줄당기기를 하고있는 판이다. 일이 틀어지니 야꾸자들을 동원하여 한바탕 소동까지 일으켜 흉흉한 소문이 나돌게 만들었다. 세이찌로에 대한 경멸감이 북받쳐오르면서 이번 일에나 써먹고는 아예 차던질 생각이 그의 뇌리에 굳어져갔다.

누런 둥글무늬가 어지러이 찍혀진 검은색하오리를 걸친 오노다는 게다를 끌고 주단우를 신경질적으로 오가다가 창문곁에 붙어섰다. 검붉은 장막같은 창가림사이로 서울시가가 내다보였다. 흰옷입은 인파가 끊기지 않고 이리저리 흘러가고있었다. 백의민족이라더니 저 차림에만도 얼마나 많은 노력이 깃들었을텐가. 그의 눈에 비낀 조선사람들이란 부지런한 천분을 가지고있는 값눅은 로동력일따름이였다. 땅속에 값진 광석자원이 무진장하다면 땅우에는 인적자원이 저렇게 넘쳐흐르지 않느냐. 기회를 놓치면 후회를 면치 못한다. 그는 자기의 기업전략이 일본정부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있고 그 지지가 다름아닌 재정적배경인것으로 하여 부풀어오르는 탐욕을 누를길이 없었다.

《세이찌로상이 도착했습니다.》

호텔안내원 일본녀인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알려주는 말이였다.

《어서 들여보내오.》

녀인이 사라진 문가에 세이찌로가 나타났다.

《원로에 수고가 많았겠습니다.》

《세이찌로상, 그대에게 중임을 맡기고 잘 돌보지 못해 미안하오.》

《황송한 말씀입니다.》

세이찌로는 오노다가 팔걸이의자에 몸을 묻자 응접탁을 사이에 두고 옆에 앉았다.

《건강은 어떤가? 조선물이 몸에 맞는가?》

조선물이라는 오노다의 표현이 퍽 자극적으로 들리여 세이찌로는 신경을 창끝처럼 곤두세우며 조심스레 응대하였다.

《별일없이 잘 있었습니다.》

세이찌로는 이름 못할 불안으로 후두둑 가슴이 떨려났다.

오노다의 눈빛이 지금같이 흐리여있을 때는 매우 기분이 나쁜 상태다. 저 뿌연 눈동자에 어떤 음흉한 계략이 담겨져있는것일가. 만달산토지소유권문제를 락착짓지 못했으니 화가 동했겠는데 오노다의 저 여유작작한 태도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이찌로상, 자네 처가 생남을 했네. 대단해, 나이도 있는데… 축하하네.》

세이찌로의 낯이 벌개지였다.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리유로 세번이나 처를 갈아대다나니 지금 사는 녀자의 나이는 서른살을 겨우 넘겼다. 아버지와 딸보다 더한 나이차이를 둔 부부사이에 아들이 생겨난것이다.

《감사합니다.》

오노다는 희뿌연 눈으로 벽에 걸린 그림속의 부사산을 바라보았다. 눈길은 그곳에 가있지만 세이찌로를 어떻게 처분할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고있었다.

워낙 외교관퇴물들을 신통치 않게 여겨온데다 세이찌로는 량다리치기명수고 속에 감추고 사는게 많은 놈이다. 《천황페하》앞에서도 거짓말을 서슴지 않을 뻔뻔스러운 작자이다. 평양에 가서도 내가 시킨 일만 한것이 아니라 《총독부》의 밀정노릇을 겸했다는 통보가 있다. 하긴 《총독부》의 일을 도왔다고 나빠할거야 없지. 《총독부》의 일이 잘되면 내 기업도 더 순조로이 펴일게 아닌가.

《세이찌로, 임자넨 생남했는데 내 기업이 <생남>하자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것 같은가?》

세이찌로는 오노다가 드디여 자기를 부른 목적을 묻고있다는것을 느꼈다. 속이 켕겨난 그는 오노다의 눈치를 살펴가며 백선행을 상대로 만달산토지문제의 해결을 위해 진행한 일에 대해 요약하여 설명했다.

《그러니 차후방도는?》

비수같은 오노다의 질문이였다.

《그년의 요구에 동의하는것은 스스로 수치를 삼키는 격이 된다고 봅니다. <총독>정치의 배경밑에서 관권을 동원하여 강제로 빼앗아내는것, 이것이 지금 조건에서 최선의 방도라고 생각합니다.》

눈을 감은채 듣고만 있던 오노다가 천천히 일어나 방안을 거닐었다. 마치도 먹이를 노리고 날아예는 한마리의 검독수리를 방불케 했다.

《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탐방해봤지만 조선에는 처음 왔네. 산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지?》

검독수리부리에서 흘러나온 때아닌 산수타령이 자기가 방금전에 내놓은 방책을 송두리채 부정하는 야유임을 확신한 세이찌로는 불쾌감에 휩싸이는것과 동시에 오노다의 차후결심을 타진할수 없는 초조한 심리로 하여 오금이 저려왔다.

세이찌로는 한동안 바재이던 끝에 입을 열었다.

《조선을 두고 삼천리금수강산이라고 함은…》

귀맛좋은 언변으로 얼버무려대려던 세이찌로의 대답이 썩둑 잘리웠다.

《산천이 아름다우면 뭘하는가? 우리 일본이 타고앉은 땅이니 유람은 아무때나 할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검독수리가 사납게 한번 날개를 쳐대자 세이찌로는 기가 질려 굳어지고말았다. 황황해난 그의 뇌리에 번개치는 생각이 있었다.

시간은 돈이다. 황금이다. 오노다의 독수리발톱이 그 황금덩이를 덮치려 하고있다. 그걸 지체시킨 나의 운명은…

눈앞이 아찔해난 세이찌로는 명줄을 거머쥐고있는 오노다앞에 무턱대고 담보해나섰다.

《만달산토지를 꼭 이달안으로…》

《세이찌로, 나는 기업가이지 정치가는 아닐세. 이 나라에서 <총독부>가 실시하는 무단통치에 공감하는 사람은 더우기 아니야!》

더이상 앉아있을수 없어난 세이찌로는 군인처럼 벌떡 일어서며 입에 거품을 물고 고아댔다.

《조선놈들은 사정없이 짓밟아야 합니다. 만달산토지도 그렇게 빼앗아내야 우리 일본의 위엄을 보여줄수 있습니다.》

오노다의 흐려있던 눈이 번쩍 빛을 뿜었다. 등골을 서늘케 하는 싸늘한 눈초리로 한줄기 비웃음이 언듯 스쳐지났다.

《정치와 산업, 이것은 일본제국의 대륙침략 2대전선이다. 정치는 산업의 뒤받침을 받고 산업은 정치의 보호속에 있다. 조선반도에서 우리 제국의 무단통치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빚어내고있는지 아는가? 이곳에 발을 붙였다고 하여 식민지민족을 완전히 굴복시켰다고 생각하는가? 이 땅에서 우리가 실시하는 무단통치의 진의도가 무엇인것 같은가? 조선백성의 반항때문이다. 끝없이 이어질 그 반항의 결과에 대하여 생각해봤는가?》

졸지에 선생앞에 선 소학생모양이 되여버린 세이찌로는 검독수리의 위압에 눌려 힘겹게 숨을 몰아쉬였다. 오노다의 몸무게를 모르는바 아니지만 미처 정신을 차릴 새없이 호되게 후려쳐대는 상전의 론리정연한 추궁에 자라목이 되여버린 그는 뻐꾹소리 한마디 못하고 서있었다.

《데라우찌<총독>의 후임 역시 군인일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기업을 일으켜세워야 한다. 정치와 꼭같은 방법을 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정치는 반항을 총칼로 짓누르며 나가겠지만 조선의 로동력을 써야 할 기업이 반항에 부닥치면 공장이 멎는다. 생산이 중지된단 말이다! 세이찌로, 내가 어떻게 당신을 믿고 지금같이 중대한 일을 시켰는지 후회가 된다.》

오노다의 평정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잘 아는 세이찌로다. 평양의 늙다리과부년때문에 운명의 선고를 받고있는 그였다.

그는 속으로 이를 부등부등 갈았다. 내가 살아있는 한 네년도 편안치 못할줄 알라. 오늘 당한 이 굴욕을 내 기어코 씻고야말테다.

백선행을 복수할 앙심을 속에 다져넣은 세이찌로였기에 고개를 갑신대면서도 슬그머니 제 의견을 고집해보는것을 잊지 않았다.

《고견에 탄복합니다. 그러나 백과부와 같은 년을 그냥 두어서는 장래를 우려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검독수리의 날개가 또 한번 퍼드덕하였다.

《오노다기업은 평양의 민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회유하여야 할 때다. 알아들었는가?!》

《하!》

세이찌로는 고개를 숙인채 마지못해 대답했다.

《이건 수치다, 수치! 잔말말고 백선행의 요구대로 흥정을 락착지으라!》

오노다는 두다리를 뻗치고서서 세이찌로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오노다기업은 백선행의 요구대로 만달산의 토지를 샀다.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의 의기가 저락되여가는 속에 곳곳에서 속썩는 한숨소리만 들릴 때 백선행이 오노다기업과 맞서 끝내 이겼다는 희한한 소식은 평양은 물론 온 나라에 전설같은 이야기로, 통쾌한 승전담으로 나래돋쳐 파다하게 돌아갔다. …

송산에서 덕동이와 진주까지 축하하러 건너오는통에 백선행의 집은 오늘 여느때없이 흥성거렸다. 부엌에서는 경림의 처와 나리, 진주가 북 나들듯 하며 음식을 만드느라 야단이다.

마루에 앉아 젊은이들이 그러는 모양을 바라보며 백선행은 아무말없이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진주가 제발로 잘 걷는것을 눈으로 보는게 제일 기뻤다. 송도에서 오생원을 세번씩이나 데려왔고 10년 가까이 약을 썼더니 지금같은 효험을 봤다.

이따금 다가와서 무엇을 꼭 잡숫고싶은가고 묻는 나리에게 수수지짐이면 된다고 흔연히 대답하군 하는 어머니를 여겨보던 경림이가 동생을 나무랬다.

《너 어머님 성미를 모르니? 왜 또 묻는거냐?》

《오라버니두… 세상에 우리 어머님 같은분이 있어요? 난 생각해서 그러는건데…》

《됐다. 자꾸 묻지 말아. 우리 성의면 된다.》

그 말을 듣자 마음이 이상해진 백선행은 토방구석에서 호미를 찾아들고 남새밭 김을 매기 시작했다.

눈치빠른 진주가 부엌일을 잽싸게 마무리하고 백선행의 일을 도와나섰다.

《무슨 큰 경사가 났다고 너희들까지 일손을 털고 건너온단 말이냐?》

《우리 룡산이가 할머니를 본지도 석달이 지났어요.》

《너 말대답하는 재간이 늘었구나.》

《어머니, 난 어머니가 꿈에서도 보여요.》

《원, 나이가 잔뜩한 애에미라는게…》

함뿍 정을 담아 울리는 진주의 젖은 목소리에 이렇게 나무람한 백선행은 저도 가슴이 뻐근해와 저고리고름으로 코물을 훔쳤다.

영 못 쓸줄 알았던 다리도 이젠 다 고치고 부부간이 원앙새처럼 화목하니 속에 품은 말까지 무랍없이 터놓는게 아닌가.

점심참이 되여올무렵 대문이 찌꿍 열리더니 장명학이 유양점과 함께 들어섰다.

《누님, 문안드리오.》

평소에 침착했던 그답지 않게 활기로이 인사말을 하며 고개를 숙여보이는 장명학을 백선행은 허겁지겁 달려가 맞았다.

《아니, 웬 인사를… 어인 일로 예까지 걸음을 하셨수? 기별두 없이…》

여전히 신수가 번번한 유양점이 말했다.

《기별은 무슨 기별이요. 인생의 기별은 마음속에서 마음속으로 절루 오고간다오.》

《어이구, 양점어른까지…》

《이 양점이 선행을 어이 잊겠소.》

능글맞은 소리를 흘려들으며 백선행은 두사람을 집안으로 안내했다.

집안에 차린 상은 상하구별이 없는것이여서 어느 자리에 앉으나 꼭같아 흡족해난 백선행이 경림의 처와 진주, 나리를 불러앉히며 칭찬했다.

《너희들은 진정 이 어미의 마음을 아는 딸들이다.》

백선행의 그 말에 덕동이가 심술을 부리였다.

《저네들이야 소소부레한 부엌일이나 했지요. 무거운걸 나르구, 잡구, 손질한건 경림형과 나리 서방이예요.》

《옳다, 옳아. 내가 춰주는 순서를 삭갈렸구나.》

《하하하.》

《호호호.》

백선행은 장명학과 유양점을 곁자리에 앉히였다.

《이거 오늘이 혹 선행의 생신날은 아니우?》

유양점은 팔자수염을 쓸며 정성을 기울여 알뜰하게 차린 음식상을 둘러보고나서 넌지시 물었다.

《난 생일이라구 쇠본 일 없어요. 얘들이 오늘은 무슨 맘 먹고 이러는지…》

《선행의 식성은 내가 아는데 너무 잘 차렸으니 어느것부터 집을지 모르겠소.》

《노죽은 그만하구 양점어른이 좋아하는 소갈비부터 먼저 내시라구요.》

《허허, 내 그러리다.》 하며 소매자락을 시원스레 걷어올린 유양점이 소갈비가 아니라 놋저가락으로 수수지짐을 집어들더니 다른 손으로 소매기슭을 받쳐들며 백선행쪽으로 내밀었다.

《아니, 이건 왜? … 어쩌자구 이러시나요?》

유흥도락이자 인생으로 살아온 유양점이 목이 갈린 소리로 말했다.

《사양마오. 선행은 나같은 사내 열백을 주고도 바꾸지 못할 평양의 녀걸이요!》

유양점의 진심어린 말에 좌중은 감개무량함을 금치 못했다.

만달산토지매매흥정이 시작된 때부터 평양장안에는 오래동안 별의별 소문이 다 나돌았다.

돈밖에 모르는 백선행이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다가 일본사람들한테서 경을 치를거라느니, 돌무지나 다름없는 땅값을 엄청나게 불러대는걸 보면 아낙네의 보짱이 턱없이 크다느니, 돈 먹고 사는 불가사리가 분명하다느니, 공짜로 뺏겼대도 항변 한마디 할수 없는 험악한 세월에 저러다 큰일나겠다느니…

그중에서도 왜놈들에게 당할 우환을 두고 걱정하는 말들이 많았다.

제나름의 말이고 떠도는 소문에 불과했지만 그지간 경림이 부처며 나리와 그의 남편 그리고 덕동이와 진주는 어느 하루 마음놓고 살지 못했다.

백선행의 결심을 지지한 장명학도 은근히 동요했고 부득이하여 흥정판에 끼여든 유양점은 자기에게 화가 미칠가봐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모든 일은 백선행이 마음먹은대로 되였다.

오노다의 위임장을 가진 세이찌로가 벌레씹은 상통으로 백선행과 문서에 도장을 눌렀다. 그 자리에는 평양의 이름있는 유지들도 참가했으며 문서의 내용은 신문에 공개되였다.

망국의 수난을 겪는 나라에서 실로 기상천외하다고 해야 할 일이였다. 나라를 빼앗은 왜놈들이 백선행에게 꼼짝 못하고 진셈이였다.

《선행, 난 아직도 말귀를 잘 모르겠소. 일본사람에게 닭알을 살 때 속을 사오, 껍질을 사오 하고 물었다는 얘길 들었는데 대체 무슨 소리요?》

유양점이 좌중의 흥을 더 돋구자고 시침을 뚝 따고 하는 말에 장명학이 끼여들었다.

《바둑이나 장기놀음에도 첫수를 잘 써야 하지 않소. 껍질없는 닭알을 보셨소?》

《내 두손 들었소. 나같은 난봉군의 머리가 선행의 묘한 궁리를 어떻게 헤아려내겠소.》

그 말에 한바탕 웃음판이 터졌다.

장명학은 자기가 마련해가지고온 백화주를 놋잔에 부어 백선행에게 권했다.

《누님, 이 잔만은 받아주시오.》

《오늘따라 아버님생각이 나는군요.》

그리움이 차오르는 가슴을 달래며 백선행은 고개를 모로 돌리고서 천천히 잔을 내였다.

《오늘은 정말 좋구만, 내 선행이 술 마시는걸 보게 될줄은 몰랐소. 좋은 자리인데 어서 한마디 하오.》

마침 기회가 생겼다고 여긴 유양점이 싱글거리며 부추기자 백씨는 난색을 지었다.

《양점어른이 내가 어떻게 살아온 몸인지 몰라 그러시나요.》

말리느라 낸 말이 새삼스럽게 되새겨져 백선행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과연 어떻게 살아온 인생이였던가. 믿고 의지할 곳조차 없었다. 풍파많은 세상살이를 16살때부터 혼자서 이를 악물고 해왔다. 돌이켜보면 누구를 속여먹은 일도, 거짓장사를 한 일도 없었다. 피눈물로 헤쳐야 했던 인생길이 연약했던 이 아낙네를 배심강한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니 인간세상이 나에게는 학교였고 고생살이가 나의 스승이였다고 해야 할것이다. 오로지 제 육신을 놀려가며 먹고싶은것도 먹지 않으며 이악스레 돈을 모았다.

약 한첩 못 쓰고 젊으나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남편을 생각하는것이 유일한 마음의 의지였다. 백선행의 정조는 두해도 못산 남편이 주고 간 정이고 사랑이였다.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여준 안재황의 혼백과 더불어 오늘까지 살아온 그였다.

배운게 없는 그에게 있어 처음에는 가난이 원쑤였고 살길을 찾아 나섰을 때는 량반, 부자가 원쑤였다. 그러나 지금은 보다 피맺힌 원쑤중의 원쑤가 있다. 나라를 잃고보니 구천에 사무친 원쑤가 왜놈들이다.

사람이 굴욕을 받아삼키면 머저리가 되는 법이니 똑똑한 사람으로 살려면 끝까지 배짱을 세워야 한다는것을 그는 이번에 만달산토지를 왜놈들에게 팔면서 깊이 깨닫게 되였다.

《내 한마디 하라우?》

백선행은 누구에게라 없이 물었다.

《어서 하소.》

양점의 훈수에 긴숨을 내쉬고난 백선행이 조용히 말을 뗐다.

《난 만달산땅을 팔지 않았어요. 그저 다른 도리가 없어 왜놈종자들에게 잠시 비싼 값으로 빌려주었을따름이요. 언제든 기어코 되찾아야 할 우리 땅이외다. 나를 제 나라 땅을 팔아먹은 장사군년으로만 치지 말아주시우! …》

나직하나 마디마디 진정이 배인 백선행의 말이 모두의 가슴을 쳤다.

고개를 숙인 진주는 어깨를 떨며 소리없이 울었고 마음이 여린 나리는 이내 흐느낌을 터쳤다.

덩지큰 사내들인 경림이와 덕동이의 얼굴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장명학과 유양점은 숙연한 표정을 짓고 생각에 잠겼다.

모처럼 마련된 자리라는데 생각이 미친 백선행이 분위기를 돌릴겸 장명학에게 물었다.

《내 요즘 생각을 두루 해보았는데 가지고있는게 비록 큰돈은 못되지만 학교들을 돕는데 쓸가 하는데 어떠시우?》

백선행의 마음을 읽고 감개한 장명학은 성수가 나서 시국을 설명했다.

애국의 마음안고 일떠선 선비들이 도처에 사립학교를 세우고 교육사업에 힘쓰고있다. 그중에서도 《서북학회》가 앞장에 서고있다.

장명학은 이 자리에 필요한 이야기만 추려 말하고나서 감탄해 마지 않았다.

《누님은 학당에 다닌적두 없으면서 대세를 어쩌면 그리도 옳바르게 보오.》

《너무 올려추지 마시우. 내야 뭐 아는게 있나요. 그저 돈을 어떻게 쓰는게 좋을가 궁리해봤을뿐이지요.》

《그게 진정이요?》

유양점의 물음에 백선행은 대답했다.

《광성학교에 만 4천여평, 창덕학교에 6천여평, 숭현학교에는 2만 6천평의 전답을 기증하렵니다.》

《과시…》

유양점은 큰 입을 벌린채 다물지 못했다.

장명학은 백씨의 용단에 탄복하며 《학교들에서 정말 기뻐할겁니다.》 하고 지지해주었다.

《이삼일후 두 어른이 함께 가서 땅문서를 학교에 넘겨주면 어떤가요?》

장명학과 유양점은 좋은 일에 나서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점심후 손님들이 다 돌아갔다.

송산의 덕동이와 진주까지 떠나가니 집안에는 경림이 부처와 나리만 남았다. 나리 남편은 도매점 창고에 일감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자기 방에 올라간 백선행은 허리를 펴려고 누웠다. 나리가 올라와 부들부채로 파리를 쫓아준다.

《됐다. 너도 힘들겠는데 좀 쉬려무나.》

《일없어요.》

나리는 그냥 부채질만 했다.

《그럼 눕거라. 너 나하구 자고싶어서 그러지?》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나리가 베개를 가져다놓고 백선행의 곁에 눕더니 다정스레 꼭 그러안는다.

《매일 엄마와 함께 이렇게 잤으면 좋겠네.》

《네 서방은 어떻게 하구?》

《호호호.》

《오늘 일선이가 왜 늦어지느냐?》

안일선은 백선행의 양손자다. 안재황에 대한 생각을 잠시도 잊지 않고 사는 그로서 나이 먹으며 가난했던 안씨가문의 후손에게 재산을 물려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되여 맞아들인 양손자인데 지금은 광성학교에서 공부를 시킨다.

《놀음놀이를 좋아하니 학교에서 동무들과 놀겠지요.》

《놀음? …》

백씨는 사내들이란 놀음에 빠지면 아예 사람구실을 못한다고 여겨왔다.

《어머니… 어서 쉬세요. …》

나리의 말이 백선행에게는 이상하게 들리였다. 안씨가문에서 데려와 손자삼아 키우는 일선이가 날이 갈수록 탐탁하게 여겨지지 않아 은근히 왼심쓰는 그였다.

《그녀석 너한테 찾아와 돈 달라는 소리는 안하더냐?》

《아니요. …》

나리는 숨을 죽여가며 대답했다.

《아니긴…》

화가 동한 백선행이 움쭉 일어나 앉았다.

나리는 어머니가 이쯤 따지고들 땐 더더구나 솔직히 터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를 속이던 끝에 비참해진 송월의 운명을 제 눈으로 본 때부터 생긴 심리였다.

《일선인… 그… 투전노름도 하고…》

《그 다음은? …》

《나이도 있지 않습니까. 녀자들을 좋아하니 기생집에도…》

《네 눈으로 봤냐?》

《네.》

나리는 고개를 숙인채 까딱 안했다.

《허허-》

기막힌 웃음을 내뿜고난 백선행이 노기띤 목소리로 말했다.

《골라골라 제일 나쁜짓만 하는구나.》

《어머니, 일찌기 장가들여… 색시를 만나면…》

어머니의 노여움과 근심을 덜어주자고 하는 나리의 말이였다.

《안될 소리!》

자리를 차고 일어난 백선행은 경림에게 일러 버들회초리 한단을 가져다놓게 하였다.

그날 저녁 안일선은 한단이나 되는 회초리가 다 부러져나갈 때까지 종아리를 맞았다.

경림의 안해가 울면서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회초리마저 꺾어져나가자 백선행은 방안을 둘러보고 매채가 더 없는것을 한스러워했다.

인간의 생활이란 행복과 기쁨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점심참에는 얼마나 좋은 일만 있었는가. 그러나 저녁에는 이같이 가정의 법도를 세워야 하겠기에 버드나무회초리가 우는 일이 뒤를 잇는것이다.

백선행은 엎드려 비는 안일선을 굽어보며 생각했다. 되지 못한 인간은 배속에서부터 생겨나는 법이다. 가난뱅이집안에서 산 녀석이 언제 투전노름을 배웠고 꼭뒤에 피도 마르지 않은게 기생집까지 다닌다니 사람되기는 글렀다. 회초리 한단이 다 부러져나갔다고 글러먹은 머리속에서 바른 생각이 나올리 없다.

백선행은 자기가 품고산 기대가 허무하여 장탄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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