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31

 

조선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일본, 청나라, 로씨야간의 치렬한 전쟁으로 동북아시아지역은 20세기를 맞이하였다. 침략과 략탈을 본성으로 한 서구렬강들은 청일, 로일전쟁을 각이한 정치, 군사, 외교적립장으로 중재, 개입하였으며 이 과정에 일본제국주의의 야수성과 잔인성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가지게 되였다.

태평양상의 렬도에 웅거한채 막부시대를 연장하여 죠수번이라고 그들이 말하는 지방할거군벌들간의 싸움이 망하는 길이라는것을 뒤늦게 깨달은 일본의 정객들은 《명치유신》이후 자본주의길을 치달아 마침내 군주를 섬기는 제국주의국가의 체모를 갖추었다. 그리고는 대륙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하여 패전하여 망할지언정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야심밑에 대륙의 강국이라고 해야 할 청, 로와의 전쟁으로 목적을 달성했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되는것은 시간문제일뿐 렬강의 간섭조차 거의나 없었다. 일국의 수도에서부터 시시각각 나라의 존망을 걱정하는 소식이 전국에 전해졌다. 서울에 일본군이 들어왔는데 병력수는 얼마고 무장장비는 어떠하다는둥, 왜나라 상인, 기업가들이 밀려들어 도로와 철도를 놓으며 신식상점과 백화점까지 내와 우리 물건들은 팔릴 일이 없다는둥, 며칠전에는 일본정부의 제일 큰 인물인 텁석부리난쟁이가 서울에 나타났는데 황제의 내전에도 제 집같이 드나든다는둥 정설과 랑설이 뒤섞여 별의별 대세관망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식자나 있다는 사람들의 걱정은 나라가 망하게 되였다는 탄식이였다.

하지만 백씨에게는 세상돌아가는 형편에 대한 이 모든 뒤숭숭한 소문이 륙로문선창에 어떤 물건이 들어왔다는 소식보다 크게 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직 대동강이 얼어붙기 전에 상품을 눅은것으로 더 많이 끌어들여야 한다는 한가지 생각에만 옴해가지고 부지런히 동분서주하였다.

철부지로만 보이던 나리가 얼마나 착실하게 일처리를 하는지 백씨는 마음을 푹 놓고 그에게 도매점안의 일을 통채로 떠맡겼다. 벌써 세 아이의 엄마가 된 나리다. 경림이와 마주세우면 짝이 기울지 않으리만큼 어진 사람인 나리의 남편은 선창에서 도매점까지 짐나르는 일을 맡아한다.

백씨는 아침밥을 먹기 바쁘게 길떠날 차비를 했다.

《어머니, 오늘은 날이 찬데 두루마기를 입고 가십시오.》

집안살림을 걷어안고 치르느라 늘 바쁜 속에서도 어느 한시 백씨의 뒤바라지를 소홀히 한적 없는 경림이 처의 다심한 념려였다.

《오냐, 내 오늘은 송산에 갔다오겠으니 그리 알거라.》

《날이 좀 풀린 다음 가시면 안됩니까?》

《난 평생 날을 가려 일한적이 없다. 겨울철 온돌바닥이 게으른 놈 엉뎅이살만 찌운단다.》

《호호호.》

《웃긴, 사람은 근실해야 하고 배를 곯으며 살아봐야 돈이 귀한걸 알게 된다.》

백씨는 나이를 먹으면서부터 입에 오른 이 말을 때없이 하였다.

집을 나서니 대동강바람이 기다렸다는듯 백씨의 치마자락을 물고 승악을 부려댔지만 그는 한창나이때처럼 꿋꿋이 걸음을 다그쳤다. 송산쪽의 땅을 판 돈을 받으러 떠난 걸음이다.

쉰고개를 넘어서서 백씨는 서선땅의 손꼽히는 갑부가 되였다. 3천여석이 나오는 땅과 수십만원의 돈을 가졌으니 젊어서 이를 악물고 마음먹었던것을 드디여 이룬셈이다.

서도지방에서 이름난 그였지만 차림새는 여느 촌늙은이나 다름없다. 무명치마저고리에 솜을 둔 무명두루마기를 입고 무명수건을 둘렀다. 달라진게 있다면 백고무신을 신은것이다. 코등을 기운 검정고무신은 제발 신지 말아달라는 경림이와 나리의 성화에 못이겨 지금같이 길을 떠날 때만 신군 한다.

끝간데 없이 펼쳐진 보통벌의 밭이랑마다 은빛서리가 한벌 깔렸다. 사람들은 무우밑둥이 긴걸 봐선 이해 겨울이 무던히 추울게라고들 한다.

황량한 벌을 바라보는 백씨의 가슴속에서 묵은 상처가 터지며 아파나기 시작했다. 이날까지 때없이 떠올라 괴롭히는 송월이다. 그때마다 못된 년 같으니, 너를 저승에 가서나 만나는가부다 하며 탄식했다.

송월이를 찾을 결심으로 그만두자던 행상길을 다시 걸어 5년동안 안 다녀본데가 없다. 인총이 오글거리는 서울의 골목골목, 음식점들과 기생집까지 다 뒤지다싶이 했지만 허사였다.

언젠가 송산 덕동의 집에 갔을 때 진주가 조용한 틈을 타서 이렇게 말했었다.

《어머니, 송월인 찾지 못합니다. 살아있대도 워낙 독한 성미라 어머니를 피해다닐텐데 무슨 수로 찾아내겠습니까. 제가 점쟁이라도 찾아가볼가요? … 어머니를 잊을 송월이가 아니니 꼭 제발로 찾아올거예요. 너무 속쓰지 마세요.》

백씨는 점쟁이말이라면 무작정 곧이듣지 않았다. 젊어 한때 봉산장에서 소경점쟁이를 만났는데 절반은 신통했지만 절반은 온통 거짓말이였다. 초년과부로 마흔살까지는 길가에서 살고 늦어 좋은 서방 만나 아들딸 수두룩이 낳고 락을 보느니… 했는데 실로 황당한 소리다.

어이구, 그년도 이젠 서른고개를 넘겼을텐데 어쩌고 사는지… 백씨는 찬바람을 등지고 걸으며 송월이로 해서 한숨을 내쉬였다.

땅을 팔고사는 일에 리력이 튼 백씨여서 작정한대로 일을 끝내고보니 점심참이라 허순백의 집을 찾아갔다.

세월은 속이지 못하는 법인지라 허순백은 머리에 백발을 떠인 로인이 되여 맞아주었다.

《백씨가 내 집을 오래간만에 찾아주네그려.》

《몸이나 좀 녹이구 가려구요. 그새 편안하셨수?》

《그저 그러하네. 한뉘 마음만 먹지 백씨한테 진 빚은 못 갚고 죽을가보이.》

화로불을 내놓으며 허순백이 하는 말이다.

《또 그 2천냥 소린가요?》

《허허, 세월이 아무리 가도 마음에 진 빚이야 어델 가겠나.》

백씨는 허순백이 땅마지기나 가졌지만 마음은 어진 인간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이같은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쓰인다면 아깝지 않은 돈이다. 벌어놓은 돈은 많은데 쓰자니 맹랑하게 쓰는것은 달갑지 않고 값있게 쓰자니 좋은 생각이 좀체로 떠오르지 않았다.

《백씨도 세상돌아가는 소문을 들었겠지?》

대통에 담배를 재워 붙여문 허순백이 시름젖은 소리로 물었다.

《풍설은 자자한데 나같은 계집이야 들어서 알 소리가 있던가요.》

《그전같이 지나쳐들을 소문이 아닌듯싶소. 섬나라 오랑캐들이 서슬이 푸르딩딩해가지구 조정을 떡주무르듯 한다지 않소.》

《임금님과 대감님들이 어련히 정사를 살피지 않을라구요.》

백씨는 팔아먹은 땅에서 리가 난것을 속으로 셈하며 허순백이 하는 말에는 크게 귀를 가다듬지 않았다.

《임금이면 뭘하고 대감이면 뭘하겠소. 왜나라것들이 어전에까지 밀려들어 조약이라는걸 날조했다오.》

조약이라는 말자체가 생소한데다 백씨는 조정이 하는 일은 상놈이 알바가 아니라고만 생각했다. 국부인 임금이 어련히 정사를 바로잡지 않으리. 그래서 만백성우에 높이 앉아계시는 상감마마가 아닌가.

백씨는 허순백의 처와 함께 점심을 먹고나서 집으로 향했다. 떠나올 때와는 달리 세찬 대동강바람을 맞받아걷자니 한결 걸음이 더디였다. 치마와 두루마기자락이 온몸을 휘감고 말갈기처럼 날린다. 날씨도 고약하기란… 무슨 바람새가 이리도 사나운가. 그는 몇걸음에 한번씩 이런 욕을 하느라 숙였던 고개를 들군 했다.

변덕스러운 날씨때문인지 길가에 행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토성랑어구에 들어설 때까지도 마주 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걸음을 멈추고 둘러보았다. 황량한 벌판, 벌거벗은 동뚝, 잎이 진 나무들만 모진 바람에 시달리며 아우성을 지를뿐이다. 다닥다닥 모여앉은 초가집들조차 한겨울 추위를 걱정하며 일찌기 옹송그린듯싶다.

장대재에 올라선 그는 또 한번 놀랐다. 춘하추동 눈과 비, 바람과 추위를 가리지 않고 붐비던 서문장이 텅 비였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을사년 초겨울바람에 놀라 평양의 수만인총이 어데로 달아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점포며 가게방들까지 빈지문을 닫아버렸다. 평양감사라도 죽었는가. 사또쯤 죽어서는 고개조차 안돌리고 임금이 돌아갔대도 평양의 저자거리는 숨죽인 일 없었다.

한걸음두걸음 이상한 생각에 끌려서 걷는 백씨의 귀에는 대동강바람이 곡성처럼 들리였다. 하늘땅이 이같이 몸부림칠 땐 괴변이 생긴가부다. 혹시… 그는 어수선하게 나돌던 풍문과 허순백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국난이 생겼단들…

종로쪽으로 가는 행길가에 백발을 날리는 늙은이가 지팽이에 의지하여 서있는 모습이 눈에 띄였다.

저 로인에게 무슨 연고인지 물어보고나 가자고 마음먹은 백씨가 걸음을 다그치다 뚝 멎어섰다. 이 추운 날 두루마기조차 입지 않은 장규현이 고개를 쳐들고 하늘만 바라보고있지 않는가. 80고령의 로인이 무슨 병이라도 만나면 어쩔려고 저런 행색으로 길가에 나와섰는가.

《아버님!》

장규현의 앞에 가서 고개를 깊이 숙인 백씨가 조용히 불렀다. 아무 대답도 없다.

《어인 일로 이 추운 날… 년세도 많으신데…》

백씨를 알아본 장규현은 절통한 마음이 비낀 목소리로 물었다.

《어델 갔다오는 길인가?》

《저… 송산쪽에 가지고있던 땅을 팔고 오는 길입니다.》

《…》

백씨의 대답을 들은 장규현의 얼굴과 온몸은 금시 부르르 떨렸다. 서글픈 고뇌와 비분, 엄한 질책과 분노의 빛이 한데 어우러진 그의 눈동자도, 서리가 내린 장미도 곤두선채 푸들거렸다. 후들거리는 두손으로 짚은 지팽이가 그의 심정을 대신하며 연방 땅을 굴러댔다.

무언의 호령같은 그 소리에 조바심으로 시달리던 백씨의 가슴을 삽시에 얼어들게 하는 말이 뒤를 이었다.

《나라가 망했다!》

《?!》

무심히 들어온 나라라는 말이 장규현의 입에서 처절히 울리며 채찍이 되여 백씨를 후려갈겼다.

《5천년력사국이 망했다! …》

장규현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려대며 통분한 심정을 터뜨리자 백씨는 고개만 숙인채 돌처럼 굳어져 움직일줄 몰랐다.

《나라란 임금의 나라가 아니다. 조정대신의 나라는 더우기 아니다. 나라는 백성의 나라로다! 임금은 수없이 룡상에 오르고 죽어갔지만 백성은 세세년년 나라를 이루고 살아오지 않느냐. 백성이 없이야 조정은 있어 뭘하고 임금을 임금이라 불러줄자 어데 있겠느냐. 아, 이 나라 조정의 정사라는게 백성의 눈귀를 멀게 하고 허리를 구부리고 사는것을 나라의 <기강>으로 삼아왔으니 참으로 통탄할노릇이로다. …》

한평생 제 육신을 놀려 돈을 벌고 모아들이며 살아온 백씨는 모르고 산 세상을 보았다. 그것이 장규현이 말하는 나라였다. 그 나라라는게 도대체 무엇인가. 가난뱅이 상놈들에겐 고역살이밖에 안겨준게 더 있는가. 백성은 나라라면 임금으로 여겼지 나라가 백성이라고는 생각조차 않는다. 그러나 장규현은 백성의 나라라고 말한다. 처음 듣는 소리지만 왜 이다지도 가슴을 치는가. 망국은 임금과 조정이 빚어냈어도 나라없는 노예살이는 백성이 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니 임금은 잃어도 나라는 빼앗기지 말아야 할 백성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백씨는 정신을 차리고 자기의 달라진 모습을 보며 놀랐다. 그것은 무지에서 벗어난 인간의 거대한 정신적충동, 의식의 파동이였다.

장규현은 통절한 마음을 안고 말했다.

《내 을유년에 옥사했더라면 오늘날 네 모양을 보지 않았으련만… 낳지는 않았어도 자식만큼 크게 여겨왔는데 망국도 외면하고 돈벌이하는 그 꼴은 정녕 배달족의 수치로구나! …》

지팽이에 의지하여 무거운 걸음을 옮겨가는 장규현의 모습을 바라보던 백씨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대동강바람이 망국의 곡성을 터뜨린다. 대동문쪽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만백성의 원통한 분노를 세상에 알리고있다.

《아버님!》

백씨는 나라와 백성이라는 말뜻을 깨달으며 마음속으로 장규현을 불렀다. 아는것 없고 천한 장사군에 불과한 자기를 지금껏 사람대접해준이들이 있다면 장규현 부자다. 장규현은 그에게 있어서 살아있는 친근한 아버지였고 마음의 의지가 되여준 고마운 스승이였다. 그런 사람한테서 처음으로 먹은 큰 욕이였기에 백씨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비돌의 글처럼 가슴속에 눈물겹게 새겨안았다.

《<공수래 공수거>?》

장규현이 언젠가 조용히 훈시한 말을 백씨는 새삼스럽게 되뇌여보았다.

평양은 망국으로 호곡했다.

관리, 선비, 량인, 상놈 할것없이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대동문앞 종로에 떨쳐나와 궁성쪽을 향해 땅을 치며 매국역적들을 규탄하고 을사년조약 페기를 요청했다.

나라의 방방곡곡에서 대세를 관망하던 우국지사들이 망국의 진상을 폭로하고 일제의 강도적인 행위를 규탄하였다.

장명학은 평양백성들의 분노한 모습앞에서 처절한 심정을 맛보았다. 오늘의 망국이 복국에로 이어질 날은 멀고 험하리라는 생각을 안고 그는 인파속을 헤치며 대동문앞 거리를 걸었다.

《뗑- 뗑-》

종소리가 그치지 않는 속에 가슴을 두드리는 원성이 한데 어울려 하늘가로 울려퍼진다. 대동문앞에 실실이 푸른 잎을 드리우고 서있던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밤사이에 허리를 꺾고 나가넘어졌다. 그리 센 바람이 분것도 아니였는데 부러지는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했던지 숱한 사람이 놀라 깨여났다고 한다. 일개 초목도 망국을 알리려 스스로 허리를 꺾었으니 하늘도 무심하지 않다고들 했다.

아, 이 나라의 어지러운 정사가 오늘의 망국을 가져왔구나. 장명학은 가슴을 치며 대동문추녀우에 비낀 하늘을 바라보았다.

섬나라 오랑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국치의 시작은 어디였더냐. 조정이 한 일이 있다면 당쟁과 백성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뿐이였다. 눈이 밝은 대신이 있었더라면 세 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국가의 방위를 지금같이 소홀히 했겠는가. 임진왜란때 왜나라군사들을 남해에 수장시킨 충무공 리순신의 거북선은 이름만 남았을뿐 해전에 나갈 군사조차 변변히 갖추지 않은 조정정사였다. 나라의 앞날을 내다본자는 궁궐안의 대감벼슬자리에도 없었고 감사나리들중에도 없었다. 백성들에게 온갖 가렴잡세를 들씌워 가난에 허덕이게 하다보니 국력이란 탐관오리들의 한정없는 탕진으로 밑빠진 독이나 같았다. 우로는 조정대신들로부터 아래로는 고을의 말직관리들에 이르기까지 제 입에 들어갈 밥 한술씩만 먹지 않고 국고를 채웠더라면 나라가 이 모양이 되였겠는가.

임금과 조정의 위엄이 국력인것은 아니다. 입에 풀칠조차 못하는 백성을 거느린 임금과 대감들이 누리는 향락이란 망국의 조짐이라 해야 할것이다.

나라를 잃으니 가슴치며 통곡하는것은 백성뿐이고 역적의 무리들은 왜놈들의 사타구니에 숨어 눈물 한방울은 고사하고 일본에 의존하여 보호를 받는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서슴없이 지껄여대고있다.

정처없이 비분의 인파속을 걷던 장명학은 누군가 팔소매를 잡는통에 멎어섰다. 아들이였다.

《네가? …》

《아버님… 흐흑… 할아버지가…》

《어찌됐다는거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

장명학은 아들의 두어깨를 와락 움켜쥐고 내려다보았다. 병석에 있던 아버지다. 성미가 불같은 늙은이가 혹시… 그는 황황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너는 이길로 백씨에게 알려라. … 어서!》

장규현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순국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백씨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이틀전에 본 백발의 모습이 눈앞에 안겨오면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무지스러운 내가 강직한분의 가슴에 아물지 않을 상처를 남겨 보냈구나. 천만번 빌어도 용서를 받지 못할 몸이 되였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백씨는 제 손으로 베천을 끊어 상제옷을 만들어입고 경림의 부축을 받으며 장규현의 집을 찾아갔다.

제자들이 초상을 서는 장규현의 빈소에는 조객들이 끝없이 찾아왔다. 평양감영과 주변고을관리들, 선비들속으로 들어서는 백씨를 누구도 상놈으로 하대하지 못했다.

유양점이 무릎을 꿇고 조용히 말했다.

《스승님, 백씨가 분향합니다.》

다른 조객들과 달리 상제차림인 백씨가 잔을 받아올리고 절을 하였다.

《아버님…》

그의 입에서 한마디 부름이 피를 토하듯 흘러나왔다.

어느 누가 평양 백과부를 사람취급했던가. 누가 나에게 백성의 본분과 나라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었는가. 아버님뿐이다. 소경으로 살다 청천벽력에 눈을 떴건만 망국으로 생긴 천만갈래 길중에서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아버님! … 가르쳐주소이다. …

백씨의 눈물겨운 심중에는 아랑곳없이 장규현의 령혼은 향불연기로 조용히 피여오르며 사라져가고있었다.

고인의 령전에서 물러난 백씨는 장규현의 부인을 찾아갔다.

별채에 홀로 앉아있던 부인은 곡을 하며 들어서는 백씨의 손을 잡고 나직이 말했다.

《그만하게. 사람이 100년을 사는것도 아닌데… 망국의 치욕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거니 너무 슬퍼말게. …》

장규현 부인이 오히려 위로하려드는 바람에 백씨는 가슴이 더 미여져왔다.

《배운게 돈버는 재간밖에 없는 계집이여서 아버님께 노여움을 끼쳐드린채 풀어드릴 길이 없어 눈물만 앞섭니다.》

백씨는 자기가 저지른 행실을 곧이곧대로 털어놓았다.

《일어나 바로 앉으라구. 알면서 저지른짓은 죄악이나 모르고 범한 잘못은 깨달으면 그만일세. 그러니 너무 자기를 괴롭히지 말게.》

《어머님, 고맙습니다.》

《나도 인츰 령감님뒤를 따라가게 될터이니 만나면 전해주겠네.》

백씨는 흔연하나 이상스러운 부인의 억양과 표정에서 입으로 그저 쉽게 하는 말이 아님을 느꼈다.

《아들 명학이 서울에서 가져온 신문의 글을 읽은 때부터 령감의 기상은 이전 같지 않았네. 그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말만 외웠지. 나라는건 늙었지, 며느리랑 손자는 그 령감 호령질에 곁에 가지도 못했다네. 어제 밤 별당 서재의 불이 새벽까지 켜있었네. 내가 가서 문을 열자니 걸려있더군. … 아들, 손자, 손녀들에게 유서를 남겨놓구… 독주를 마셨네. 생시인듯 누워있는데 숨은 졌어도 눈은 감지 못했네. … 망국의 한이 너무 커서 그랬겠지. …》

백씨는 마지막으로 본 장규현의 모습이 다시 떠올라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곡성을 터쳤다.

장례가 끝나고 친척들만 남게 되자 백씨는 부인에게 인사를 올리고 마당에 내려섰다.

《누님.》

상복차림인 장명학이 백씨앞으로 걸어왔다.

이전 같으면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으련만 오늘은 그런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불러온 누님인데 이제 와서 구태여 반상이라는 신분을 따질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제사날은 물론 청명과 추석에도 잊지 않고 찾아오겠노라는 백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난 장명학은 그를 데리고 뒤뜰로 갔다.

《내 누님에게 전할게 있소.》

《뭔데요?》

장명학은 품에서 흰 비단주머니 한개를 꺼냈다.

《이건 아버님의 금언주머니입니다. 이속에 신의며 지조에 대한 뜻깊은 문장을 넣어 간수하고 생각날 때면 꺼내여 읽군 하셨답니다.》

《어떤 글들이였게요?》

백씨는 한생 뜻높이 산 장규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고싶어 이렇게 물었다.

《다 태워버리셨더군요. 어느것 하나 그대로 지켜내지 못했다고 생각하셨기때문에 그랬을겁니다. 우리 아버님은 내가 어렸을 때 공부를 바로하지 않으면 벌을 세워놓고 회초리로 내 종아리가 아니라 자신의 장딴지를 무섭게 후려쳤답니다. 아버님의 다리에서 피가 뚝뚝 흐르는걸 보면서 나는 아버지에게 잘못했노라고 울며 빌었지요. … 아버님은 도덕과 충의를 숭상했지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그 인간이 지닌 자질을 소중히 여기였으며 인재를 옳게 길러내야 나라의 정사를 바로할수 있다고 늘 주장했습니다. … 아버님은 누님을 남달리 마음속에 두고 사셨지요. …》

《죄많은 년입니다.》

백씨는 목이 메여 말했다.

《이 금언주머니를 보십시오. 백씨라는 글자가 있지요. 운명전에 쓰신게 분명합니다. 속에 든 흰 명주천에 또 한 글자를 적었습니다.》

백씨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그처럼 소중히 여겨온 금언주머니에 이름도 없는 천한 년의 성씨는 왜 쓰고 남겼다는 글자란 무엇일가.

《이건 분명 누님께 전하라는것이 옳소.》

《그속에 있다는 글자는? …》

《<바를 정>이라는 글자입니다.》

얼없이 비단주머니를 받아쥔 백씨는 장규현의 다심한 정을 가슴후더이 느끼며 다시 물었다.

《아버님의 마음이 담긴 글자겠지요? 과연 내가 어떻게 살걸 바라신걸가요?》

사람의 마음이란 곧 뜻이거늘 어떻게 한마디로 대답한단 말인가. 장명학은 마주선 사람이 다름아닌 백씨였기에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마디마디를 골라가며 말했다.

《바른 마음으로 살라는 당부라고 봅니다. 인간세상의 모든 선과 악은 마음에서 흘러나오고 마음속으로 흘러들어가지요. 망국의 치욕을 쓴 이 나라 백성이 가져야 할 마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어느 한시도 국치를 잊지 말고 나라를 되찾을 큰뜻을 품고 한가지씩이라도 옳은 일을 찾아하려는 애국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장명학과 헤여진 백씨는 지팽이라도 짚고싶은 심정으로 비척비척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잃고보니 나라란 백성에게 있어서 하늘같았다. 그 하늘을 되찾자니 몸은 늙은데다 일개 녀자라 말안장에 올라앉아 칼을 휘두를 재목도 못된다. 가진것이 있다면 돈뿐인데 그 돈이 이제 무슨 맥을 출텐가. 한뉘 먹지도 입지도 않으며 악을 쓰며 번 돈, 가난이 준 한을 풀자고 비발치는 흉과 육신의 고달픔을 무릅쓰고 한푼두푼 모아들인 피같은 그 돈이 나라를 되찾게 할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내놓으련만 이까짓거로는 어림도 없으니 쇠붙이나 뭐가 다른가.

《<바를 정>…》

아무리 곱씹어 외워봐도 앞이 번쩍 트이는 궁리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이 바른 일일가. 내가 어떤 일을 해야 나라위한 옳은 일로 될가. 아, 내가 친아버지처럼 섬겼고 선생으로 받들어온 장규현의 당부를 죽는 날까지 지키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큰 죄는 없으리라.

그의 넋은 가난으로 찾은 행상길이 아닌 망국민이 가야 할 향방을 찾아 심연속을 끝없이 헤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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