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29

 

유양점이 전주골에 덩실한 기와집 한채를 사가지고 젊은 첩과 재미있게 지낸다는 말을 들은적 있는지라 백씨는 어렵지 않게 양점의 집을 찾아냈다. 일각대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니 첫눈에 뜨이는것이 구불구불 지붕을 향해 뻗은 등나무와 조화를 이룬 기묘한 모양의 누운 향나무다. 지체가 있는 선비의 집이라는감이 자연히 들었다.

뜰안으로 들어서며 백씨는 주인을 불렀다.

《계시나요?》

잠시후에 방문이 열리더니 은비녀를 꽂은 젊은 녀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어데서 오셨수?》

묻는품이 여간 매끄러워보이지 않았다. 집안옷차림인데도 하얀 매화꽃을 수놓은 청비단치마에 연분홍양단삼회장저고리를 받쳐입고 맵시를 냈다. 희고 갸름한 얼굴과 눈매는 꽤 예쁘긴 했지만 깔끔한게 바늘로 찔러 피 한방울 맺히지 않을 녀자 같았다.

《나로 말하면 박석골에 사는 백씨라는 과부외다.》

문을 절반도 채 열지 않고 선 젊은 녀자의 건방져보이는 모습에 은근히 속이 꼬인 백씨는 일부러 자기를 낮추어 말했다.

《누굴 찾아오셨수?》

뒤미처 유양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만나러 왔소. 당신은 가보우.》

《알겠수다, 알았어요.》

마뜩지 않게 대꾸하고난 젊은 녀자는 방문을 활짝 열어제껴주고나서 한손으로 치마자락을 휘감으며 뒤뜰로 휭하니 사라졌다.

유양점은 벗어내쳤던 적삼을 걸치고나서 《어서 들어와 앉구려.》 하며 백씨를 멋적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백씨는 오늘따라 유양점을 마주보기가 역겨웠다.

《내가 오지 말아야 할 때에 나타난건 아니나요?》

《백씨가 예까지 찾아올줄이야… 허허.》

《룡강에 있다는 본댁을 생각이나 해요?》

《허허허, 돈푼이나 보내주니 일없을게요.》

사내의 뻔뻔스러운 말에 백씨는 미간주름을 모았다. 유양점의 나이가 마흔고개를 넘기지 않았으니 본처도 늙었다 할 녀자는 아닐거다. 본처라고 왜 남편이 그립지 않겠는가. 가사는 통털어 내맡기고 주는 정이란 이를데없이 박정하니 순박한 마음에 소박당한것이나 다름없이 살고있을것이다.

《생긴건 어른 맘에 들겠지만 보통 세차지 않을 녀자 같은데 부디 조심하시라구요. 첩이란 시기심이 있으면 집안 망칠 요물이라던데…》

《허허, 백씨 눈엔 그렇게 보이오?》

《글쎄요, 계집 속통머리야 계집이 더 잘 들여다봅지요.》

《생긴 값을 안하는 계집이 어데 있겠소.》

《됐어요. 난 그런 소리나 하자구 오질 않았어요.》

정색한 백씨가 감영에 불리워갔던 사연을 이야기했다. 도원국이 모함한것이 옳고 송사질을 했으나 증거가 없어 제편에서 옥에 갇혔다, 남잡이가 제잡이라는 말이 정말 신통하다. …

《하하하.》

유양점은 두손으로 살진 허벅다리를 북치듯 하며 요란하게 웃어댔다. 잠상이나 하다 관가에 걸려들었다면 손을 써서 살려낼수도 있었다. 속심이 못돼먹은 의주잠상의 간계에 걸려 하마트면 내가 목에 칼을 찰번 했다. 10여년을 지내오면서 돈을 놓고 아웅다웅은 했지만 그야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닌가. 그놈이 의리를 헌신짝처럼 차버리고 자기 욕심 채우자고 친구나 같은 나를 잡자고 했으니 제 옹노에 걸려든 신세가 되였다. 도원국이 입이 열이라도 뒤집지 못할 증거와 함께 없는 사실도 지어내여 송사했은즉 그놈은 살길이 막혔다. 설사 효수를 당하진 않는다 해도 약골인 도원국은 형틀에 묶여 곤장 50여대만 맞아도 뼈가 부서져나갈것이다.

《내 물을게 있어서 왔어요.》

백씨는 유양점의 심중에는 상관없이 제 말을 꺼내놓았다.

《말하시구려.》

《이번 일을 당하구보니 그 1만냥을 기어쿠 찾아야겠어요. 어른이 이 일에 입씻고 나앉지는 못하겠지요?》

도원국을 이잡듯 한게 후련해하던 유양점은 백씨의 물음앞에 난색을 지었다. 당초 협잡한 돈이요, 그 돈을 가진 사람은 이 나라 지경안에 없다. 그러니 어떤 말로 굼때넘기겠는가.

《지금 와서 이 미련한 계집이 생각해보니 어르신네도 한동아리가 되여 날 속였어요. 안그런가요?》

조용조용 말하지만 숨이 차게 조여대는 백씨앞에서 유양점은 살진 볼따귀를 긁어댔다. 별도리가 없다. 백씨에게는 사실그대로 말해줘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삼화려각에서 있은 일과 도원국의 계교에 속아 평양으로 올라오게 된 경위를 다 뱉아놓았다.

《사실 난 도원국이가 백씨의 돈주머니를 털 간특한 생각을 하리라고는 미처 넘겨짚지 못했소. 맞다들리고보니 그 판이요. 내 체면으로 까밝혀 말해줄수도 없었소. …》

《그러니 어르신네도 그 개화당인지 뭔지 한데 한축 끼우긴 했군요.》

《허허, 바람직한 거사여서 머리는 들여밀었지만 이를테면 그림자나 같았소.》

《하다면 의주잠상과 나란히 옥에 들어앉아야 옳지 않나요?》

유양점은 백씨가 독을 품고 와앉았다는것을 느끼며 겁부터 앞세웠다. 돈냥이나 있는 녀자가 감영에 드나들며 송사하면 무슨 일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개화파는 거사에서 망했구 서필이란 량반은 어디론가 도망쳤소. 도원국이 백씨를 걸고 모함한건 사람잡아 돈벌이하자는 속심밖에 다른것이 없으니 개화파요 뭐요 할건 없다고 보오.》

백씨는 록록치 않은 눈길로 유양점을 바라봤다. 들으니 그럴법한 소리지만 무식한 년이라고 깔보며 작당을 하여 만냥돈을 털어냈으니 다 같고같은 놈들이다.

《문서에 도장찍은거야 생각나겠지요?》

《아, 그거야… 백씨가…》

《내가 1만냥을 선선히 내놓은건 어르신네 얼굴 보구 그랬어요. 내가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아시나요? 도장은 찍었겠다, 서울량반도 없으니 어르신네가 그 돈을 다 갚아야 옳지 않은가요?》

유양점은 궁지에 빠진 신세가 되였다. 백씨의 말을 그르다고 할수 없었다. 그렇다고 서필이가 삼킨 1만냥을 자기가 갚는다는건 바보천치나 할노릇이다. 백씨가 내대는 요구가 진심일가. 이럴 땐 비위를 내대는거다.

《머저리짓은 이 유양점이 했소. 헌데 갚자 해도 문서장을 내놓고 회계해야지 않소? 허허, 그 빚문서말이요.》

능글맞게 웃으며 무릎을 툭툭 치는 유양점의 거동에 백씨는 기가 막혔다. 얼마나 가죽이 질긴가. 이제 와서는 문서를 내놓으란다. 이런 말이 나올줄은 생각조차 못한 그였다. 그 문서장이 있었더라면 지금같은 흥정은 고사하고 옥살이할 몸이 아닌가.

《허허허-》

백씨는 자기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왔다는것을 깨닫자 허거프게 웃는 한편 자기의 우매함을 탄식하지 않을수 없었다.

《내 아무리 돈에 미친 년이기로서니 어른신네한테 받아내자고 하겠나요. 이번 일이 이쯤 그친것만도 어르신네 덕인데요.》

백씨는 토포사에게 어느만큼 돈을 먹여야 한다는것을 타산하고나서 화김에 유양점을 찾아왔었다. 량반놈들과 변놓이를 해보자던노릇이 죽을고비에 든데다 돈을 꾸자고 와서는 온갖 귀맛좋은 수작질을 늘어놓던 의주잠상이 제사 고해바친것으로 해서 독이 올랐던것이다.

유양점의 말을 듣고보니 속아서 내준 1만냥은 찾을 길 없는 돈이 분명하다. 장사에서 한푼도 밑져보지 못한 그로서는 억이 막히고 악이 치미는노릇이지만 눈뜨고 털리운것이나 같으니 미련을 품을 필요도 없다. 이를 악물고 웃어넘겨야만 했다.

《백씨는 큰 녀자인데 이번 일은 주마등같이 여기구려.》

유양점은 백씨에게서 더 조임을 당하지 않게 되자 무사태평한 소리를 했다.

《어르신네는 식자가 있는데 하나 물어도 되겠나요?》

《물으시오.》

《<공수래 공수거>라는게 무슨 소리나요?》

유양점으로서는 백씨의 이 물음도 뜻밖이였다. 모르고 묻는지, 아니면 딴 궁리가 있어선지 까리까리했다.

《<공수래 공수거>… 허허, 그건 혹시 날 훈계하자는 말이 아니요?》

백씨는 유양점을 이전처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무식한 년이라구 업신여기시나요?》

《아, 그건 아니요.》

유양점은 한손을 내저어대고는 자못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공수래 공수거>란… 그건 사람이 이 세상에 날 때 빨간 두주먹으로 오고 죽어서 누구나 다 가게마련인 곳에 갈 때도 빈손으로 간다는 소리요. 임금이나 대감이나 상놈이나 다 같소. 살아서는 천하를 움직이고 세상보물을 만지지만 죽은 다음에 그 모든게 무슨 소용이요. 죽어 묻히는 석자 세치 구덩이는 하늘이 목숨을 가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준 땅이요.》

백씨는 은연중 자기의 두손을 내려다보았다. 《공수래 공수거》,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게 인생이라… 아무리 요란스러운 벼슬을 산 사람이나 한뉘 동전 몇잎에 울며 산 사람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니 욕심부리지 말고 살라는 말이다. 하지만 나한테 그 욕심이 없다면 어떻게 지금같이 많은 돈을 벌었겠는가. 죽어 빈손으로 갈지언정 살아 돈이 없어 구박받으며 살지는 않을테다.

《에그- 난 가겠어요.》

백씨가 일어서자 유양점은 오른손을 내뻗치며 당부했다.

《그… 그 빚문서만은 꼭 찾아야 하오.》

어머니에 대한 도원국의 모함에 저도 모르게 말려들어간 후부터 송월은 끝없는 속죄속에 차례질 벌을 기다리고있었다. 열흘 가까이 그는 이처럼 고통에 시달리고있었으니 살아있으나 죽느니만 못하게 속썩는 날과 날이였다.

송도에 갔다 돌아온 어머니는 도매점에 나타나지 않을뿐아니라 만나자고 송월을 찾는 일도 없었다. 엊그제 관가에 끌려갔다는 말을 들은 그는 자기가 간직하고 산 소중한것을 한시에 다 잃어버린 심정에 빠졌다. 사람이 돈에 미치면 눈도 멀고 인간의 의리 같은것은 걸레짝같이 여기게 되는것일가. 세상 어느 누가 들어도 너는 죽어 마땅하다고 말할 죄를 짓고사는 내가 아닌가.

송월은 어머니와 이어진 지나간 일들을 돌이켜보며 뼈아픈 눈물을 흘렸다. 귀인인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철부지나이에 어느 길가나 남의 집 굴뚝모퉁이에서 굶어죽은지도 오랬을게다. 대령강객주집에 그냥 있었더라면 지금쯤은 몸을 팔아사는 기구한 운명을 피할 길이 없었을게 아닌가. 목숨을 건져주고 혈육같이 돌봐준 고마운 어머니다. 제 입으로 어머니라 먼저 부르고 그 어머니를 모함하는 일에 끼여들었으니 하늘이 내려다본다면 큰 벌을 내리리라.

송월은 어제오늘 앞에 있을 일을 생각하며 도매점의 장부들을 깐깐히 정리해놓았다. 이 집을 나서게 될 때, 아니 쫓겨나게 된다 해도 자기 한 일들에 빈구석이 없어야 마음이 편할것 같았다.

지금도 그는 착잡한 마음을 안고 도매점의 물건들을 제자리에 옮겨놓고있었다.

《경림이 있냐?》

《어머니 오십니까.》

뒤뜰에서 어머니와 경림이가 나누는 말소리가 들리자 송월은 선 자리에 굳어졌다. 드디여 자기가 가슴졸이며 기다려온 시각이 왔음을 그는 직감했다. 어머니의 성미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다. 마음속에 자리잡는 안도감은 도원국의 간계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어머니가 무사하게 되였다는것이였다. 밤마다 등잔불아래 무릎꿇고 앉아 빌고 또 빌어오지 않았던가.

《경림아, 송월일 방으로 들여보내거라.》

드디여 어머니가 찾는다.

송월은 경림이가 알리기 전에 제발로 걸음을 옮겼다.

방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선 송월은 어머니의 기상에 얼어붙었다.

오른쪽무릎을 세운채 비껴앉은 백씨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게 앉거라.》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끄당기운듯 송월은 오금을 꺾으며 폴싹 주저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앉은 그 모습은 입김에도 날아가버릴듯 가냘팠다.

《말해라. 네가 나한테 한을 품었으니 그게 어찌된 까닭인지 알고싶다.》

《…》

송월에게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어머니의 손에 죽었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는 그였다.

백씨의 마음속에는 이미 송월이가 없었다. 그러다나니 무엇을 따져물으며 꾸짖고싶지도 않았다. 서로 모르고 살았어야 했을 사이에 머리를 마주 대고 속에 없는 빈소리로 어미, 딸이라 부르며 지냈으니 속히운게 한스러웠다. 주먹을 틀어쥔 백씨는 여전히 한모양으로 앉아서 말했다.

《대답하기조차 싫다면 입을 열지 않아도 된다.》

《어머니…》

송월은 있는 힘을 모아 바싹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그만해라! … 혀바닥은 네거다만 다신 나를 그렇게 찾지 말아.》

송월의 머리가 노전바닥에 닿았다. 한시에 동강나는 정이다. 끊어지면 이을 길 없다는것을 잘 아는 그여서 어머니의 마지막말만 기다리였다.

《서로 구구한 말은 하지 말자. 내가 4년 가까이 너를 부려먹었으니 품삯은 주겠다. 천냥이면 되겠느냐? 작으면 네가 더 불러라.》

백씨는 엄청난 돈을 불렀다. 하루에 열푼도 많다고 해야 할 품삯이고 먹여주고 입혀준 값을 제끼면 열냥을 준대도 감지덕지해야 할 송월이다.

지금껏 누구보다 돈을 아껴온것이 돌이켜졌다. 단벌 무명치마저고리마저 너무 낡아 입지 못하게 될 때라야 새것으로 갈아입었고 검정고무신 코등은 깁다깁다 더는 어쩔수 없게 되여버렸다. 제 입에 들어가는 음식에조차 돈을 쓰기 아쉬워 일부러 거친 음식으로 골라가며 먹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번만은 아깝게 여겨지지 않았다. 송월에게 천냥소리를 하는건 중떠보는 말이 아니였다. 도리도 모르는 욕심사나운 년에게 돈벼락을 안겨주어 내쫓으리라 마음먹은 그다. 어디 가서 살든지간에 두고두고 자신을 후회하게 만들고싶었던것이다.

《왜 대답이 없냐?》

죽은듯이 앉았던 송월이가 고개를 쳐드는데 얼굴에 피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힘겹게 일어선 그는 휘청걸음으로 자기 방에 올라가 장농을 열더니 옻칠한 함을 꺼내가지고 내려왔다.

백씨는 자기앞에 내놓은 함을 굽어보며 서슬진 소리로 물었다.

《이건 도대체 뭐냐?》

뚜껑을 연 송월이가 바닥에 돈을 쏟아놓았다. 엽전과 함께 녀자들의 노리개인 장도칼도 있었다.

《알겠다. 이게 그 의주잠상녀석과 작당하여 네가 벌어서 딴 주머니에 찼던 돈인게구나. 퍼그나 되는구나. 더러운 돈이니 내 눈앞에서 당장 거둬라!》

《이년이 죽을죄를 졌으니 용서는 바랄 길 없고… 다만 이 집에서 몰래 번 돈이니… 내놓습니다. …》

《난 지금껏 살면서 더러운짓으로 돈번 일이 없다. 너와는 더 회계할게 없으니 내가 주는 천냥을 합쳐가지고 래일중으로 네가 갈 곳을 찾아 없어져라.》

백씨가 일어서자 송월은 정신없이 그의 버선발을 붙잡았다.

《차라리…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돈에 눈이 어두워… 속아서… 속아서…》

성미가 독한 백씨는 입방아를 찧어대는 송월을 차던지고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속인게 누구고 속은게 누군지 이제는 알바가 아니다. 모든 일은 다 지나가버렸다. 남은것이 있다면 인연을 잊어버리면 되는거다.》

송월의 흐느낌소리가 나직하나 애절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하도 처량하여 백씨의 모진 마음도 한순간 흔들리였다. 못된짓을 하게 만든 놈은 의주잠상이 아닌가. 이년이래야 고작해서 제 주머니에 돈 몇푼 채워넣는 정신에 속아서 장단을 친것이 분명하다. 10여년을 넘겨온 인정을 무명실 끊어버리듯 하는 내 처사가 옳은가. 아니, 무슨 약한 마음을… 이 고약한 년이 문서가 있는 곳을 일러바쳤을 땐 내 재산을 통채로 먹어보자는 심보였다. 어리석기는 하지만 그같은 생각을 의주잠상놈과 이마를 마주 대고 공론하지 않았겠는가. 이년은 분명 구미여우다. 곁에 끼고있어야 화밖에 날라올게 더 있겠는가. 백씨의 마음은 처음 먹은대로 돌아섰다.

그는 송월에게 발목을 붙들리운채 소리쳐 찾았다.

《경림아, 나리와 함께 들어오너라.》

경림이가 나리를 데리고 방에 들어섰다.

《오늘부터 이 도매점일은 너희 오누이가 맡아야겠다. 지나간것은 회계하지도 말고 일만 시작하면 된다.》

경림은 어머니의 심정이 리해되여 알겠노라고 대답했지만 마음이 여린 나리는 송월의 정상이 가여워 고개를 수그리며 눈물을 훔쳤다.

《어머니, 그럼 송월언니는… 어떻게 돼요?》

나리가 울먹거리며 묻자 백씨는 경림에게 못박아 말했다.

《경림아, 너는 이 어미의 마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겠지? 내앞에서 다른 소리를 말고 나리와 함께 가서 일을 하거라.》

송월은 자기라는 인간이 경림이와 나리, 송산의 덕동과 진주처럼 백씨를 어머니라 더는 부를수 없게 되였음을 절감했다.

어떤 말로 용서를 빌어도 어머니의 마음은 돌려세울수 없다. 그것을 바라는것자체가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배은망덕이라는 말이 나를 두고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송월은 눈물젖은 얼굴을 쳐들었다.

《제가 미친년이여서 죽을죄를 졌으니 들어올 때처럼 가진것 없는 몸으로 조용히 물러가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백씨의 얼굴에는 노기가 어렸다. 제 돈을 벌자고 눈이 어두워 사람잡이를 하는 모함질에도 서슴없이 끼워든 년이 혀바닥을 씻고 제법 고운 소리를 내는게 역스럽게 들렸던것이다.

《나는 일을 시킨 사람에게 품삯을 주지 않는 일이 없다. 내가 주겠다는 돈이 작다는 소리냐?》

눈을 내리깐 송월은 이미 결심한지라 자기의 속마음을 마지막으로 쏟아놓았다.

《아닙니다. 제가 몰래 꿍져둔 돈은 못된 마음이고 품삯으로 주시겠다는 돈은 너무도 깨끗한것이여서 뒤섞어가지면 죄될 일이기에 그럽니다. 두벌죄는 짓지 않겠습니다.》

《입방아는 그만 찧어라. 내 너를 다시 볼 일이 없을진대 주는대로 가지고 이 집에서 나가거라.》

백씨는 인정의 마지막줄을 사정없이 잘라버리고나서 방을 나섰다.

졸지에 인생의 의지점을 잃어버린 송월이다. 그는 백씨의 사랑속에서 살면서도 그가 얼마나 단호한가에 대해서 다는 몰랐다. 장사에는 흥정이 있을지언정 자기를 짓밟거나 배신한 인간은 용서치 않는것이 백씨였다.

송월은 리문리려인숙 주인을 망하게 만들어 종내 자기 친구들한테 맞아죽게 한 어머니의 독한 마음을 이야기로 들어 잘 안다. 사랑하는 남편을 구원하자고 돈 일곱냥을 꾸려고 온 어머니에게 그놈은 돈을 미끼로 녀자의 정조를 짓밟으려 했다. 그 일을 한으로 품고산 어머니는 10여년이 지난 뒤에 기어코 복수했다.

어머니를 모함하여 자기 욕심을 채워보려고 한 도원국은 지금 어데 있는가. 관가에 끌려갔던 어머니가 무난히 풀려나와 지금같이 독을 쓰는걸 보면 그도 결코 무사치는 못할것이다.

아, 이제 와서 가슴치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만족을 모르고 산 내가 아닌가. 송월은 자기 운명의 앞날을 기약할수 없음을 통감했다.

그는 방바닥에 놓인 돈을 궤에 고스란히 담아 한옆에 밀어놓았다. 이왕 버림을 받은 이상 때오른 몸을 더는 이 집에 얹고싶지 않았다.

정처가 없는 길, 또다시 다섯살때처럼 방황의 길에 나서야 하는 송월이였다. 그는 장농을 열고 옷가지들을 꺼냈다. 도매점일을 하자면 차림새부터 잘 갖추어야 한다며 백씨가 장만해준 옷이 여러벌이다. 량반부자집 딸들도 부러워할 비단치마와 저고리들, 겨울 옷가지와 쓰개며 사치한 노리개들…

송월은 손가락에 낀 금가락지부터 뽑아 돈궤에 넣었다. 옷가지중에서 제일 낡은것으로 갈아입은 다음 멋진 옷들은 차곡차곡 개여 농안에 가려넣고 쇠를 잠그었다.

《어머니… 이 미련하고 고약한 계집을 부디 용서하세요. …》

허줄한 보자기에 낡은 옷가지 몇벌을 싸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걸음을 떼자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앞섰다.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속에 용서를 바랄 길 없는 속죄와 독한 결심이 비껴있었다.

나라는 목숨은 이미 꺼진 등불이나 같다. 이제부터는 아무렇게 굴려도 무방하다. 다만 대동강에 몸을 던져 수중고혼이 된 낳아준 어머니의 구천에 사무친 한만 풀어주면 된다.

송월은 장도칼이 든 작은 보퉁이 하나를 끼고 마당에 나섰다.

창고를 거두던 경림이가 그를 보고 말했다.

《송월이, 어머니가 래일 아침에 오시겠다고 했는데…》

도매점 부엌에서 나리가 뛰쳐나왔다.

《언니… 어델 가나요?》

송월은 이미 눈물을 가신 뒤였다.

《이건 장농열쇠고 그안에 다… 있어요. 오라버니, 잘 있어요.》

경림에게 열쇠를 준 송월은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씹어삼키며 총총히 대문밖으로 사라졌다.

무심한 저녁해는 뉘엿뉘엿 기울어가고있었다.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Google+로 보내기
evernote로 보내기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mypeople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