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28

 

평양이 가까와오자 백씨는 나리를 재촉하며 걸음을 다그어댔다. 이전에는 송도쪽에 한번 나오면 황해도 토산비천장, 봉산은파장, 황주읍내장을 오고가며 장마다에서 리를 보고야 떠나는 그여서 달을 넘기군 하였다. 이번처럼 곧추 걷기는 처음이다.

집앞에 이른 그는 찌그러든채 열려진 대문꼴에 놀라 황황히 안으로 들어갔다.

《경림아, 경림이 있냐?》

그가 부르기 바쁘게 집안에서 《어머니, 이제야 오십니까?》 하며 경림이와 덕동이가 허둥거리며 마주 나오는통에 백씨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것을 느끼면서 뚝 멈춰섰다.

《웬일이냐?》

집에 큰 변이 났다는것을 알아차린 백씨는 누구에게라 없이 다우쳐 물었다.

경림이가 백씨앞에서 주저앉으며 말했다.

《어머니, 먼길을 다녀오셨는데… 불길한 소식을 전해드려야 하니… 죄스럽습니다. …》

좀해서 제 기분을 내비치지 않고 긴말도 모르던 경림이가 울음절반으로 꺽꺽거리며 말을 늘어놓았다. 백씨는 속이 답답해나 화를 버럭 냈다.

《어서 말해라! 사설질말구…》

《어머님이 떠나신지 나흘째 되는 날 아침 감영에서… 감영에서 라졸들이 밀려들어 집안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습니다. …》

《내가 무슨 도적질이라도 했게 집까지 뒤진단 말이냐?!》

마음 용한 경림이가 입을 열지 못하고 주밋거리자 덕동이가 나서며 말했다.

《저는 뒤늦게 달려왔습니다. 와보니… 감영에서 나온 라장이 대역죄를 지은 집이니 주추돌밑까지 다 헤쳐서 찾아내라고 소리질렀답니다. 상전의 령이니 라졸들은 가장집물을 마구 짓모아대고 부뚜막의 가마까지 뽑아 내던졌답니다.》

《당초에 모를 소리다. 내 집에서 대체 뭘 찾는다는거냐?》

담이 큰 덕동이조차 고개를 수그리며 힘들게 대답했다.

《어머님이… 개화당과 련루되였다면서… 만냥돈으로 뒤를 받쳐준 문서가 있을테니 내놓으라 했답니다.》

《뭐라구?!》

백씨가 지금처럼 놀라보기는 처음이다. 돌부리도 걷어차서 내뜨릴만큼 억세던 두다리가 후들후들 떨리였다.

감영에서 생트집걸고 들이닥친 일이 아니다. 소경 막대기질하듯 집안을 뒤진것은 더욱 아니다. 유양점과 도원국이 나서서 서울량반에게 꿔준 1만냥 빚문서가 대역죄에 걸려들줄이야 꿈엔들 생각했던가.

개화당인지 뭔지 하는 사람들을 붙잡아다 닥치는대로 목을 치던 살판도 한물져가는 때 내게 그런 문서가 있다는것이 어찌되여 감영에까지 알려졌는가. 여긴 필경 곡절이 있다. 어떤 놈이 나를 모함하자고 송사를 한게 분명하다.

두주먹을 부르쥔 백씨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거두고 손질하여 란장판은 아니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떨어져나간 장농문이 한옆에 세워져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말썽이 된 그 문서라는걸 저기에 넣어두지 않았던가. 그러니 감영에서 찾아냈구나. 서울량반이 개화당이라면 유양점은? … 그때 그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증산에서 만났을 때 유양점이 하던 말이 번개치듯 떠올랐다. 내놓지 말았어야 할 돈이라고 했다. 그때는 바쁘니 적당히 둘러치는구나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서울량반이 의심스럽다. 애초 관상을 보매 거슬리는데가 있어 그만두려다 변놓이를 량반과 해본다는 심사로 돈을 내놓았다. 아니, 맞다들리기 쉽지 않은 큰 장사로 벌게 될 굉장한 돈에 내가 환장을 했댔나부다. 종내 일이 번져졌구나. 이제는 바로잡기 힘들다.

백씨는 아래방으로 내려와 후들거리는 두손으로 노전바닥을 짚으며 주저앉았다.

눈앞에서 얼른거리는건 도원국이다. 내가 의주잠상놈에게 물렸구나. 그놈이다. 그놈이 모함한게 분명하다. 전후사연을 다 아는건 간특한 그놈이다. 헌데 빚문서가 내 방 장농에 있었다는건 어떻게 알았을가.

여기에 생각이 미친 백씨가 불을 담고 번뜩이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들 앉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있는데 그 짬에 끼운 나리가 오들오들 떨어대는게 보인다.

《송월이년이 어데 있느냐?》

《도매점에… 찾아오랍니까?》

대답하고 조심히 되묻는 경림이다.

《내쳐둬라. 내가 여우새끼를 품에 안고 길렀구나! …》

백씨의 뼈저린 통탄이 방안을 순간에 얼구었다.

빚문서를 본 사람은 이 집안에서 송월이 하나뿐이다. 찰찰 감돌며 어미라고 달큰하게 나불대던 때가 언젠데 의주잠상놈의 자락에 말려들어 침도 채 안마른 그 주둥이로 고해바쳤으니 세상에 이보다 소갈머리가 삐뚤어진 년이 또 어데 있겠는가. 개도 닷새를 먹이면 주인을 알아본다는데 하물며 사람가죽을 쓴 년이 어쩌면 이럴수 있단 말인가. 자기를 살붙이같이 여겨온 사람의 멱살을 물어뜯자고 지독스레 덤벼드니 기막힌 일이 아니고 뭔가. 무슨 한이 그리 맺혀서 이를 갈며 죽기내기를 하자고 드는거냐.

모든 일이 깨끗하게 들여다보이자 백씨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다들 앉거라.》

마음속에 불안을 안은 젊은이들이 제나름대로 모로, 쭈그리고, 소곳이 자리를 잡자 백씨는 강잉한 어조로 말했다.

《덕동아, 아직 날이 어둡지 않았으니 떠나가거라. 경림아, 네가 함께 갔다 래일 돌아서려무나.》

방정히 앉아 두무릎우에 손을 짚은채 고개를 수그리고있던 경림이가 말했다.

《도매점은… 송월이 혼자 있는데…》

《내버려둬라.》

백씨의 목소리는 혼자말처럼 나직이 울렸다. 다만 세운 무릎을 꽉 움켜진 손이 세차게 떨릴뿐이였다. 후회막급한 심정의 뒤로 요귀를 안아키운 고통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백씨는 숨이 막힐듯 한 방안공기를 가셔내려는듯 나리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흔연스레 일렀다.

《나리야, 진주를 주자고 가져온 약이나 꺼내렴.》

이 판에 생뚱같이 무슨 약소린가. 덕동이와 경림이는 어안이 벙벙하여 마주보았다.

나리가 무명보자기에 싼 약을 백씨앞에 펴놓았다. 그러는 나리의 볼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덕동아, 이건 내가 나리하구 송도에서 가져온 약인데 하루에 한첩씩 달여서 번지지 말고 진주에게 먹여라. 그애 다리가 나은걸 나한테 보여주려거든 명심하고 써야 한다.》

백씨가 밀어내주는 약보퉁이앞에서 덕동이는 고개를 노전바닥에 찧으며 울음을 터쳤다.

《어머니! … 어머니의 그 정성을 제 죽어 백골이 되여도 잊지 않겠사오만… 어머니신상에 변고가 있으면 이 자식도 다 삽니다. … 제발 이러지 마시고 어머니걱정부터 먼저 하십시오. …》

《덕동아, 네 마음을 내 다 안다. 사람의 목숨을 천명이라고 하지 않느냐. 너무 속썩이지 말고 어서 떠나거라.》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뜰을 나서던 두 사내가 백씨에게 다시 인사했다.

《어서들 가라, 어서!》

대문턱을 넘던 경림이가 돌아서더니 백씨에게 다가왔다.

《어머니!》

《내 걱정은 말라지 않느냐.》

《그런게 아니라 양점어른을 보았습니다.》

유양점이라는 소리에 백씨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가 평양에 와있냐?》

《예, 경상골로 올라가는걸 봤습니다.》

《알겠다. 어서 가거라.》

경림이네를 떠나보낸 백씨는 나리와 경림의 처를 집에 남겨두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빚문서가 관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면 유양점이 펀펀히 활개치며 기생집으로 돌아칠텐가. 서울량반과 유양점의 도장도 찍혀있는 문서다. 하다면 유양점이도 개화당이라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내속을 모르는 난 리자까지 밝혀 돈을 꾸어준 장사군에 불과하니 사달이 났다면 오히려 유양점이 더 크게 걸려들어 죽을판이다. 뼈심들여 큰돈을 벌어들였더니 화가 뒤쫓아올줄이야 뉘 알았겠는가.

평양감영의 라졸들은 눈이 밝고 악착하기로 소문이 났다. 온 집안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은 무리들인데 잠자코 있으니 이상한 일이다. 오늘 오면서 감영의 관리를 한둘만 만나지 않았는데 아무 내색도 없지 않은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기생을 끼고 취흥이 도도해있던 유양점이 백씨가 찾아왔다는 소리에 괴춤을 한손으로 쥔채 예나 다름없이 능청을 떨었다.

《백씨의 눈귀도 여간 밝지 않소그려. 마음놓고 재미조차 못 보게 쫓아오니 꼬리사리기도 힘들구려.》

백씨는 다짜고짜로 유양점을 기생집앞 느티나무쪽으로 끌어냈다.

《목에 칼을 차고서도 계집을 찾으시려오?》

백씨가 서리를 뿌리자 술취한 사내의 두눈이 커졌다.

《그건 또 무슨 기겁할 소리요?》

《어른은 그 개화당인지 뭔지 한 사람들과 한통속이 옳긴 옳은가요?》

《소리를 낮추오! … 망발을 함부로…》

《감영에서 당장 오라를 지우겠다는 판에 기생 주무를 경황이 있나요?》

《나를? …》

《내 말을 좀 들어보시라요.》

백씨는 자기가 송도를 다녀온 사이 생긴 이야기를 하였다. 도원국이 송월과 짜고 빚문서를 감영에서 찾아내게 했다는 사실을 듣고난 유양점의 두눈은 무섭게 번들거렸다.

《간특한 놈! 그놈을 아예 죽여버릴테요!》

《누가 누굴 죽인다는거예요? 당장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를 판인데…》

《이런 망할 놈의 수가 있나.》

《궁리를 해보시라요. 그래두 배운게 있겠다, 벼슬을 지냈겠다… 양점어른이 의주잠상놈의 간계쯤이야 꺾어버리지 못하시겠수? 아무러면 치마두른 내 궁리보다야 얼싸할테지요.》

술기가 말끔히 가셔진 유양점은 마음을 진정하느라 수염만 쓸어내렸다. 빚문서가 분명 감영에 들어갔다면 백씨는 집문턱도 넘어서지 못했을것이다. 내가 평양에 올라온지도 사흘이 지났고 그사이 감영안의 친구들을 여럿이나 만났다.

《알겠소. 백씨는 어서 돌아가 그 빚문서가 어데 있는가를 찾아보오.》

《감영에서 가져갔다지 않나요.》

《아니요. 감영에서는 증거를 바로 쥐지 못해 우리 두사람을 아직 건드리지 않는거요. 나는 나대로 생각이 있으니 내 말대로 하오.》

백씨는 자기도 품었던 의심인데 유양점의 입에서 같은 말이 나오기에 그러마 약속하고 돌아섰다.

일찌기 벼슬길에 올라 정쟁의 풍파속을 헤쳐온 유양점은 난봉질 못지 않게 권모술수에도 능했다. 백씨에게 미친 화가 자기에게 닥쳐드는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한 그는 인편으로 평양감영 토포사를 취향루에 청하고는 문서 한통을 꾸몄다.

취향루의 제일 좋은 방에 호화로운 술상을 차리게 한 유양점은 토포사와 자리를 같이했다.

《양점이 이렇게 나를 찾는걸 봐선 긴히 할 말이 있을텐데 어서 하오.》

《나로 말하면 벼슬을 등진 사람이요, 토목공사나 해서 밥술이나 뜨는 시골내긴데 무슨 쓸말이 있겠나. 그저 만난지 하도 오래서 회포나 나누자는거지.》

토포사는 유양점이 권하는 술을 마시며 틀스럽게 웃었다.

《자네,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을 내가 못 들은줄 아나. 내 벼슬이라야 보잘것없으니 오히려 양점이 부럽구려.》

《야료를 할텐가, 허허. 내 장사길을 틔워줄가?》

《벼슬 지내며 장사판도 벌려본다? 그거 귀맛이 도네그려.》

《장사란 첫째로 밑천이 있어야 하네.》

《양점이 밑천을 대줄텐가?》

《소원이라면…》

유양점은 소갈비를 뜯어대며 토포사를 주물러대기 시작하였다.

《말하게나.》

《마음이 동한다. 좋네. 내가 줄을 놔주지. 도매점을 내온 백씨를 아나?》

《백과부말인가?》

《허술히 보지 말게.》

《흠-》

토포사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턱을 내민다.

《양점, 참 괴이쩍은 일이 있었네.》

《말하게나.》

《백과부를 송사한 놈이 하나 있는데 혹 관가를 속여먹자는 수작이 아닌지 모르겠네.》

《감히 관가를 속이다니?》

《백과부라는 년이 개화파와 련루되였다는데 그년이 없는새 집을 발칵 뒤집어보았건만 그 망할 놈이 송사한 문서가 없지 않겠나.》

유양점은 술을 연방 마셔대고나서 물었다.

《문서라는건 뭔가?》

《개화파에 돈을 대주었다는 문서지.》

두손으로 무릎을 두드리며 유양점은 흥이 나서 노래가락이나 뽑듯이 말했다.

《어느 놈이 송사질을 했나? 백과부가 개화파라? 하하하. 앙천대소할노릇일세. 어떤 시러베자식이 고자질했는지는 몰라도 그게 어디 말이 되나?》

《하긴 그렇네. 백과부야 돈밖에 모르는 계집인데 개화파와 작당을 했다니…》

《송사질한 놈이 누군가?》

《의주장사치네, 도원국이라구.》

유양점은 짐짓 놀란체 눈을 크게 떴다.

《도원국이라? … 내 오늘 자네를 만나자 한건 그놈을 송사하자고 해서였네.》

《아니, 송사라니?》

《개화파와 연줄을 가진 놈을 잡아들이면 자네야 공을 세우는셈이 아닌가.》

구미가 바싹 동한 토포사가 유양점의 턱밑에 코를 들이밀었다.

《어서, 어서 말하라구.》

《자네 개화파의 서필이라는 이름을 들었나?》

《듣다마다. 그놈은 전국에 지명수배된 대역부도죄인일세.》

《도원국이라는 자식이 서필과 한동아릴세. 믿기 어려우면 이걸 보게나.》

유양점은 자필로 쓴 종이장을 토포사에게 넘겨주었다. 그속에는 서필과 도원국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밝혀져있고 도원국이 넘겨준 돈의 액수와 함께 과장날조된 자료가 첨부되여있었다.

《의주장사치가 그런 놈이였소?》

《제 털이 탈가봐 남을 물어뜯는거요. 자네가 직접 취조해보게. 그놈이 개화파에 바친 돈은 그에 머물지 않을테니. 그놈인즉 아무리 상놈이래도 욕심이 굴뚝같소. 서필이라는 량반은 돈을 낚아내느라고 빈소리쳤겠지만 사실이요.》

《알겠네. 내 그놈의 주리를 틀어 사실을 밝혀내지.》

유양점은 벽에 기대며 기세를 올려 말했다.

《아예 목을 쳐야 해!》

《여부가 있나.》

도원국을 함정에 밀어넣은 유양점이 등골로는 줄땀을 흘리면서도 자못 호걸스럽게 말했다.

《자네 벼슬이 높아지면 내 덕인줄이나 알게.》

유양점이 취향루에서 음모를 꾸미고있을 때 백씨는 나리와 밤이 깊도록 불안으로 속을 썩였다.

《어머니, 아무 일도 없을거예요. 내가 속으로 점을 쳐보았는데 우리 어머니는 마음이 고와 하늘이 도와준대요.》

《허허, 계집애두.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어서 자거라.》

백씨는 나리를 꼭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튿날 평양감영에서 백씨를 데려가려고 왔다. 라장이 한발 나서더니 오라를 지우라는 호령대신 인사말을 건넸다.

《송도길을 무사히 다녀왔나?》

《덕분에… 날 데려가자고 오셨나요?》

《근심말고 갑시다.》

감영에 이르자 라장은 백씨를 토포사에게 데려갔다. 세월이 달라져 상놈들을 대돌밑에 무릎꿇리고 급창을 거쳐 죄목을 따지던 기강도 사라졌는지 토포사가 직접 백씨와 마주섰다.

백씨는 례의를 지켜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인사말을 했다.

《어르신께 문안드리옵니다.》

《백씨는 편히 앉도록 하라. 내 비록 초면이지만 양점을 통해 성씨를 들었은즉 어려워하지 말라.》

엊저녁에 유양점이 이 량반을 만난게 분명하다. 문서가 걸려들면 양점이라고 편할리 있나. 토포사라니 장규현 부자를 살리자고 먹인 돈도 종당엔 이 사람 목구멍으로 넘어갔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백씨는 한시름 놓였다.

눈을 내리깐채 앉아있는 백씨곁을 오가며 토포사는 위엄있게 말했다.

《내가 오늘 백씨를 마주하자고 함은 거짓송사로 인한 모함이 정사를 바로 펴나가기 어렵게 하기때문이요.》

백씨는 듣기만 했다.

《백씨가 서울의 개화파와 연줄을 가지고 돈을 댔다니 믿어지지 않고 무슨 문서까지 꾸며 약조를 했다니 그건 더욱 의심이 가오. 개화파는 저들이 신식량반이라며 고개를 쳐들었댔는데 백씨 같은 글모르는 내인과도 작당을 했다니 나로서는 믿을수가 없소.》

자기의 귀를 의심하며 백씨는 생각했다. 무슨 문서라고 하는걸 봐선 감영의 수중에 그것이 들어오지 않았다는것이 아닌가. 분명 내 장농의 함안에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가.

의혹은 가슴 한가득 차올랐지만 백씨는 흔연히 말했다.

《치마두른 년이라 개화당이니 개화파니 하는 말조차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하온데 장사군에 불과한 제가 무슨 일로 서울량반들과 마주하겠습니까.》

백씨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모르며 죄인이 아니라고 뻗쳐댈 결심으로 시침을 뗐다.

《조정에서 통역관을 지낸바 있는 서필이란 사람을 모르는가?》

토포사도 전혀 근거없는 소리를 하는것이 아니다. 도원국이가 생심을 먹고 다 일러바친것이 분명했다.

《저로서는 생소한 성함이고 량반과 마주하기에는 너무도 비천한 몸이옵니다.》

《우리가 알건대 서필이 유양점과도 친교가 있었다는데 양점은 백씨를 알지 않는가?》

《그 어른은 10여년전부터 면식이 있사온데 그때 벌써 장사길에 나섰기에 마주했을뿐입니다.》

토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양점은 벼슬살이보다 돈벌이에 마음을 썼으니 그럴수도 있겠구나. 양점과 장사를 같이하는가?》

《아니옵니다. 그 어른은 토목공사일을 하는줄 압니다.》

《의주장사군을 아는가?》

백씨는 의주장사군이라는 말이 튀여나오자 가슴이 후두둑 높뛰며 온 정신이 바늘끝같이 되였다.

《의주장사군이라면…》

《도원국이라구 의주잠상말이야.》

《아, 생각나옵니다. 박천, 개천, 순천장에서 만나 알게 되였는데 요즘은 저의 도매점에 잠상품을 들고다니기에 발길을 끊게 하였습니다.》

토포사는 자기 자리에 가서 앉더니 말했다.

《흠, 잠상길이 막히니 미친개 물듯 하는 격이로군. 여봐라.》

토포사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라장이 들어와 읍을 했다.

《의주장사치가 지금 어데 있느냐?》

《우리 라졸들과 함께 있게 하였습니다.》

《그놈을 당장 옥에 처넣으라. 내가 문초를 하겠다.》

《알겠소이다.》

라장이 물러가자 토포사는 백씨를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보게 백씨, 요즘 세월엔 벼슬자리나 가지고는 한집안살림하기가 어렵다네. 내 일가사람 하나가 점포를 내왔는데 밑천이 모자라 궁색한 형편이네. …》

토포사도 체면없는걸 아는지 하던 말을 삼키였다.

《나리께서 저같은 비천한 년에게 긴히 하시는 말씀인데 제 어찌 모른다고 하겠습니까. 뒤날 인편으로 알려만 주십시오.》

《허허, 내 도울 일이 있으면 주저말고 찾도록 하게.》

백씨는 일단 발을 들여놓은 상놈은 거적에 싸여나온다는 서슬푸른 평양감영을 제발로 유유히 나섰다. 그는 걸으면서도 수수께끼같은 일을 두고 머리를 쥐여짰다.

서필의 빚문서가 어데로 갔을가? 종이장에 발이 달렸다고 라졸들의 살찬 눈길을 절로 피했을수야 없지 않은가. 그것만 감영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면 재물도 목숨도 다 끝장났을것이다.

《어머니…》

감영밖 길목을 지키고있던 나리가 두팔을 벌리고 달려왔다. 온종일 기다렸을 계집애다. 눈물인들 얼마나 흘렸을텐가. 백씨는 뜨거운 감정이 북받쳐올라 나리를 와락 품에 안았다.

《너 아침부터 여적 있었느냐?》

《어머니, 아주 나왔나요?》

《허허 그래, 나왔다.》

나리는 너무 좋아 어쩔줄 몰랐다.

《어머니, 내 점이 맞았지요?》

《그래, 우리 나리 고운 맘이 이 어밀 살려낸가보다.》

나리는 백씨의 손을 잡고 춤추듯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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