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25

 

반역과 권력찬탈로 이루어진 리씨왕조의 수백년 사직이 골병든 사람처럼 가쁜숨을 몰아쉬던 갑신년도 저물어가고있었다.

김옥균과 그의 개화파는 드디여 정변을 일으키였다. 그들에게는 폭력적방법으로 수구세력을 제거하고 내정을 틀어쥐는 길밖에 없었다.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우정총국 락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임금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옮겨앉게 한 후 김옥균과 그의 개혁파들은 내정을 틀어쥐고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그들의 고심참담한 노력은 《3일천하》로 막을 내리웠다.

청나라를 등에 업은 민비일당과 수구세력의 반항과 왜놈들의 배신행위로 《갑신정변》은 실패하고 개혁파의 주동인물들과 그 련루자들은 하루아침에 대역부도죄인으로 몰려 무참히 참형당하는 정국이 초래되였다. 온 나라가 릉지처참의 란무장으로 변했으니 평양이라고 무사할수 없었다. 식자개나 있고 대세를 운운하던 선비들치고 편안히 지낼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장규현 부자도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였다.

경림이를 통해 그 소식을 들은 백씨는 너무 기겁하여 풀썩 주저앉았다.

그로서는 듣기도 처음 듣는 개화파이고 내정이 어떻구 정변이 어떻구 하는 소리가 당초 알수 없는 말들이였다. 세상이 왜 점점 이 모양으로 되여가는가. 장규현 같은 어진 선비들까지 마구 잡아들인다니… 그들이 무슨 일을 하려 했는지는 모르되 백성들에게 해되는 일은 아니였을거라고 생각되였다.

도매점에 자리를 펴고 누운 백씨는 한번씩 돌아누울 때마다 경림이를 찾았다.

《송월인 아직두 안 왔냐?》

《안 왔습니다.》

그전에 낯을 익혀둔 관리들이 몇 되는지라 장규현 부자의 일을 알아보라고 송월을 감영으로 보내고나서 소식을 기다려 속을 태우고있는 백씨였다. 죄가 있건없건 판결만 내리면 효수를 당하기 마련이니 잡힌 사람앞에 놓인것은 죽음뿐인것이다. 어쩌면 좋은가. 장사나 알았지 이런 일은 처음 겪는지라 그저 앞이 캄캄하기만 한 그였다.

《어머니, 송월동생이 옵니다.》

백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송월아, 어서 이리 오너라. 추운 날인데… 아래목에 앉거라.》

《어머니가 일러준 감영관리를 조용히 만나자니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래 뭐라더냐?》

송월의 얼굴은 파랗게 얼었다.

《그저 이렇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장규현 부자는 근거없이 가두었으나 감사의 령이 내리기 전에는 풀려나오기 어렵다, 그리구 일단 잡아들인 사람은 어떤 죄명을 씌워서라도 목을 쳐 엄함을 알리라는것이 조정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죄가 없는데두?》

《만들어내기만 하면 이번통엔 빠질 길이 없답니다.》

《세상에 이런 변도 있나? 그래 무슨 방도가 없다더냐?》

《조용히 귀띔하기를 큰돈을 먹이면 살려낼수 있다고 했습니다.》

《큰돈이라니… 수백냥?》

송월이 머리를 저었다.

《그럼 얼마나? …》

《적어도 천냥은 넘어야 할거라고 했습니다.》

백씨는 입이 쓰거워 더 말을 않고 자리에 누워버렸다. 죄없는 사람목숨을 내대구 돈을 먹자고드니 참으로 고약하고 악착스러운 량반놈들이다. 날강도나 다를바 없는 무리가 모인게 감영이고 이런 감영들우에 받들린 조정이니 무슨 정사를 바로하겠는가. 량반족속끼리 물어죽일내기니 그밑에 눌려사는 백성들이야 안중에나 있으랴.

백씨는 뙤창에서 사그라져가는 저녁해빛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해는 졌다가도 다시 뜨지만 사람목숨이란 한번 지면 다시 피여나지 못한다.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빨리 손을 쓰지 못하면 후회해도 때가 늦는다. 천냥이 큰돈이긴 하지만 사람목숨에야 비기겠는가.

날이 어둡자 백씨는 경림이와 함께 감영의 관리를 찾아갔다.

《어진 선비부자를 살려내시면 나리도 복을 받으시리다.》

《이 많은 돈으로 그들을 살려내자는 까닭은 뭔고?》

《그네같이 어진이들이 있어 우리같은 평민들이 살아가기가 한결 편하니까요. 돈보다 사람목숨이 더 귀합지요.》

《알겠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 장규현 부자는 옥고에서 벗어났다. 백씨는 한숨이 나왔다. 한시바삐 찾아가 그들을 만나고싶지만 제 돈 휘두른 생색을 내는것 같아 도매점에 들어온 송도의 인삼과 약재를 경림과 나리의 손에 들려 보내주었다.

송월은 백씨가 무슨 일로 량반들의 신상을 그다지 걱정하는지 리해가 되지 않아 불만스럽기까지 했다. 량반이라는 말만 들어도 이가 갈리고 자다가도 일어나 앉게 되는 그였다. 어느때든 대동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리라 모진 마음먹고있는 그여서 백씨의 이번 일은 이상할만큼 반감까지 가지게 했다.

그의 이와 같은 심리는 한갈래에서 시작된것이 아니였다. 백씨의 눈길이 이전 같지 않게 자기를 지켜보는것을 느끼게 되면서부터였고 자기보다 사랑을 더 받는것 같은 경림이와 나리에 대한 시샘이 부추겨서였다.

도원국에게서 다섯냥을 받아쥔 때부터 송월은 흑심을 품게 되였고 어떻게 해서나 제 수중에 돈을 모으자고 애썼다. 도원국에게서 잠상품을 넘겨받아 몰래 파는 일까지 서슴없이 했다. 제 돈이 늘어나니 욕심도 나날이 커갔다.

도원국과 잠상품을 판 돈을 놓고 이제는 제 몫이 작다고 이악을 부려대기까지 했다.

《송월아, 너도 이젠 돈맛이 들어 어지간하구나.》

《그런 물건 판다는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기나 해요?》

《흐흐, 내 말이 그른데 있냐. 부처도 돈앞에서는 배꼽이 웃는다더라.》

《그 서울량반이 평양에도 오나요?》

번 돈에서 제 몫을 찾아쥘 때마다 느닷없이 튀여나오는 송월의 물음은 도원국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이젠 그 사람 본지도 오래다. 아마 이해중에는 평양에 올게다. 왜, 만나고싶니?》

《만나긴요. 나하구 무슨 상관있다구요.》

《알자구 할 땐 언제구 돌아앉아서 입씻기냐?》

《언제 또 오시나요?》

《네가 어미라고 부르는 녀자가 그 서울량반한테 속히워 만냥이나 떼운걸 모르지?》

《예?! …》

송월의 이마살이 꼿꼿해졌다.

《내 꾀에 넘어가 찾지도 못할 빚문서만 부둥켜쥐고있어. 흐흐.》

《정말 심보가 고약하군요. 나도 그 문서를 봤어요. 어머니 방 장농안에 있어요.》

《헤헤헤, 고이 간수하라구 해.》

그렇게 자취를 감춘 뒤 지금껏 한번도 나타나지 않은 도원국이다.

갑신년을 넘겨 을유년에도 개화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폭정은 계속되였고 형리들의 시퍼런 칼날에는 피가 마르는 날이 없었다.

대동강이 풀리기 시작하는무렵 어느날 송월은 도매점을 찾아온 한 녀인을 통하여 실로 뜻밖의 사연을 알게 되였다.

증산에서 왔다는 녀인은 리문리려인숙 식모였다. 백씨를 만나자고 찾아왔다가 자리를 비웠기에 송월과 마주앉게 되였다.

《어머닌 증산에서 사신다는데 무슨 일로 우리 어머니를 만나자고 오셨나요?》

《한번 온다온다 벼르다가 이제야 왔다네. 백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변변히 못해놔서…》

《무슨 신세라도 지셨게요?》

《신세뿐이겠나. 홀로 사는 이년에게 살길을 마련해줬지. 은혜를 갚자면 내 남은 명을 가지고는 안되네. 이 머리태를 다 베여 신이라두 삼아주고싶은게 내 마음이라우.》

눈물을 훔치며 녀인은 자기가 살아온 지나간 이야기를 옛말처럼 하였다. 리문리려인숙에서 있은 열네살 처녀의 죽음, 눈물겨운 사연에 이끌려 송월은 저도 함께 울었다. 대령강객주집에서 자기도 그렇게 짓밟히울번 했기에 더욱 그랬다.

《불쌍도 하지. 어린 가슴에 품고간 한을 생각하면 잠도 오지 않는다네. 참 귀여운 애였어. 황해도 장연에서 살았다는데 부모잃고 헤매다니다 하필이면 짐승이 도사리고있는 려인숙에 들어올건 뭐겠나…》

동정심을 안고 무심히 듣던 송월은 황해도 장연이라는 소리에 귀가 번쩍 트였다.

《장연에서 왔다구요?》

《그래.》

《이름은 뭐라구 불렀나요?》

《순애였지.》

《예?! … 순애… 성은요?》

《김가, 김순애…》

송월은 도원국이 찾던 외사촌녀동생의 비참한 죽음을 알게 되자 놀라며 다시 물었다.

《그애가 누굴 찾지는 않았나요?》

《그런 말은 없었어도 의주에 가야겠다는 소리는 자주 했다오.》

분명했다. 도원국이 평양에서 순애를 찾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죽은 뒤였다. 가슴아픈 이 일을 어떻게 전하는가.

도매점에서 그와 함께 점심을 나눈 송월은 저녁무렵 백씨가 사는 집으로 갔다.

전쟁의 포로병들에게는 살길이 있지만 정쟁에서 패하면 죽어야만 한다. 정쟁의 이와 같은 가혹성은 한 나라안에서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한 정치내란이라는데 기인된다.

갑신정변에 대한 반대파세력의 보복은 미증유의 잔인성이였는바 서울은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피비린 살륙을 계속하고있었다.

개혁파의 명분을 지켜 떳떳이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도 있지만 도주와 락향, 은둔을 택한 사람들은 매일과 같이 붙들려 참형을 당하였다.

무리죽음의 시체가 쌓이는 속에서도 서필은 생명을 보존하고있었다. 그로서 통탄하는 실수는 평생 단 한번 타산없이 서두른것이다. 정변과정을 주시하던 그는 왕과 왕비가 개화파의 손에 들어오고 내정개혁이 시작되자 익은 열매따기에 뒤져서는 안된다고 결심했으며 마침내 머리를 들이밀었다. 정변 주요인물명단에 오르게 되였으니 얼마나 극성을 부렸는가를 알수 있었다.

한심한노릇을 했거든. 천천히 서두르라 했거늘… 수구파가 눌려 등뼈가 부러지는걸 확인했어야 했어. 나같이 미미한 존재가 지명수배를 당하는 처지에 놓였으니 환장한짓을 했지 뭔가.

그는 지금 세이찌로의 집 만장에 앉아서 후회막급해하면서도 신경을 도사리고 바깥동정을 살피고있다. 이렇게 숨어살기를 두달째 해온다. 개화파의 모연금중에서 1만냥어치 금붙이를 먹인것은 오늘을 내다보고 한 일이다. 세이찌로도 그때 금붙이를 받으며 지금같은 일이 생길것을 예견했을가. 어림도 없지. 이 서필의 머리를 따라앞서지는 못해. 왜나라 종자들이라는게 칼 휘두르기나 좋아하지. 사무라이는 사무라이로 제격이야.

죽을고비에 이른 놈이 자기가 저를 위안하지 않으면 누가 해줄텐가. 서필은 정신없는 생각을 향방없이 굴려댔다. 손에 칼을 쥐여준다면 교형리들보다 더 잔인할 그였다. 그의 눈빛은 이따금 무모하게 번뜩인다.

다락방 한구석에는 석유초롱이 놓여있다. 세이찌로도 모르게 감춰둔것이다. 자기를 잡으려고 라졸들이 밀려들 때는 분명 세이찌로가 밀고했을것이니 이 집과 함께 그놈과 녀편네까지 불태워죽일 작정이다. 잡혀가 대가리없는 귀신되느니 제 손으로 불에 타죽는게 낫다.

서필이 멀리 도망치지 않고 세이찌로의 집에 몸을 숨긴것은 왜인가는 함부로 뒤지지 않으리라는것을 예측했기때문이였고 지금 보면 그 결심이 천만번 옳았다. 통관으로 나라밖을 돌아본 그였기에 서울에 자리잡은 왜인가란 일본땅이나 같다는것을 알고있었던것이다. 궁성안의 보수파량반들도 왜나라에 언질이 잡힐가봐 두려워 왜인촌은 다치려 하지 않는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한정없이 이 모양으로 세월을 보낼수는 없다. 빠져나갈 방도를 아무리 생각해야 떠오르지 않는다. 도성밖으로 나가자면 어느 문이든 통해야 하고 밀로를 밟는다 해도 파수군들과 의금부의 눈을 피할수 있을것 같지 않다. 아차 실수하여 걸려들면 끝장이다.

서필은 자기의 앞일을 점쳐보았다. 제 나라 땅에서는 숨어살 곳이 없다. 개화파로 몰리기는 했지만 자금횡령이 들장나 개화파의 손에 죽을 목숨이다. 그러니 두칼이 자기의 명줄을 겨누고있는것이다. 남은것은 협잡으로 수중에 거두어들인 개화파의 자금이다. 그 돈을 위해 시종 배신의 길을 걸어왔다. 언제든지 오늘같은 위기가 생길것을 예견하고 세이찌로와 교제했고 큰돈을 먹였던것이다.

1만냥이 공짜일수야 없지. 세이찌로의 힘을 빌리는수밖에 없어. 왜인을 등에 업고 빠져나가야 해. 서필의 생각은 세이찌로를 리용해야겠다는데서 맴돌았다. 어떤 수를 써야 할가.

서필이 이렇게 전전긍긍하고있을 때 집에 돌아온 세이찌로는 안해를 불렀다.

《술상을 차리오. 성의껏. 서상과 작별술을 나누어야겠소.》

나무사다리를 타고 만장에 올라간 세이찌로가 다정한 목소리로 서필에게 말했다.

《서상, 불편한것은 없소?》

《아니요, 야마다상의 신의에 탄복할뿐이요.》

《우리야 오랜 벗이 아니요.》

《고생길에 들어서니 친구가 어떤것인지 더 잘 알게 되오.》

《하하, 오늘은 함께 술이나 마십시다.》

세이찌로의 호의에도 서필은 신경을 도사렸다. 혹시 뒤에 꼬리를 달고온게 아닌지. 요즘 와서 오늘같이 살갑게 군 일은 없지 않은가.

《술이나 마실 경황이 되오? 야마다상의 신상에 루가 미칠가봐 마음이 놓이지 않소.》

세이찌로는 서필이 자기를 못 믿어 저울질한다는것을 간파하고는 조용히 말했다.

《내 만일 그대를 지켜주지 못해 참변을 당한다면 무슨 사내겠소. 그러니 지나친 마음을 쓰지 마시오.》

《고맙소, 야마다상.》

서필은 마음을 놓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왔다.

자개무늬상에 호화로운 음식과 술병이 놓여있다.

《오늘은 조선료리를 차리게 했소. 그게 더 뜻깊을것 같아서.》

세이찌로의 말에 어떤 다른 의미가 담겼다는것을 느끼며 서필은 상에 마주앉았다. 하도 이 나라 땅에 와서 오래 살다나니 왜년이 조선음식을 제법 흉내피웠다.

《자, 이것은 서울의 이름난 술 <소곡>이요.》

세이찌로는 침착한 웃음짓고 술잔을 쳐들어보였다.

《고맙소.》

술잔을 비운 서필이 노랗게 구운 닭다리를 쥐고 입에 물었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단물이 혀끝에 묻어 먼저 목구멍으로 넘어간것이다.

《오늘 서상에게 권고할 말이 있는데…》

세이찌로의 얼굴에 교묘한 웃음이 피여났다.

《충의는 충의고 인생은 인생이라지 않습니까. 시세에 밝은 서상이 아닌가요. 기업가들에게 있어서 정치사변이란 하나의 광대극입니다. 정치란 돈우에 서있고 돈은 곧 기업이고 기업가이지요.》

서필은 세이찌로가 무엇을 암시하는가를 알지만 암시 그자체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지금의 기로에서 인생의 닻을 어데로 돌릴것인가.

《야마다상, 감사합니다.》

두손을 모아잡은 서필은 속에 없는 의지를 밝혔다.

《허지만 나는 초지를 지켜 고균과 운명을 같이하려오.》

머리를 깊이 숙였다 쳐든 세이찌로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유감입니다. 당신과 같은 충의지사와 헤여져야 한다는것은 내 인생에서 큰 상실로 됩니다.》

서필은 조용하나 절절하게 자기 심정을 펼치였다.

《야마다상, 오랜 친교를 생각해서 나를 성밖으로 무사히 나가게만 도와주시오. 그다음 남쪽으로 내려가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가겠소.》

세이찌로는 한동안 생각하더니 《좋습니다. 오늘 밤 내가 인력거를 댈테니 함께 갑시다.》 하고 용단을 내렸다.

그들이 탄 인력거는 무사히 남대문을 빠져나왔다.

《서상, 안녕히.》

《야마다상, 이 은혜를 잊지 않겠소.》

서필은 세이찌로에게 인사말을 남기고 밤길을 떠났다.

어둠속에 선 세이찌로는 제 흥에 떠서 휘파람을 내불었다. 잘 가시오. 서상, 가는 길에 부디 조심하시오. 혹시 붙들리면 나를 탓하는 일은 없길 바라오. 조선궁성에 바칠 례물을 마련한 세이찌로는 타고온 인력거에 올라앉았다.

서필은 세이찌로가 가볍게 보는 그런 인물이 아니였다. 김옥균을 따라설 생각은 애초에 없던 그였다. 서필은 개화파가 망했어도 얼마든지 살아갈 길이 있다고 여기였다. 바로 여기에 마지막까지 배신의 길을 갈 그의 철면피한 심리가 있었다.

그는 남쪽이 아니라 밀선을 타고 한강을 따라 밤중으로 인천에 가닿았으며 날밝을무렵에는 청나라 화물선에 몸을 실었다. 고국은 멀어져가지만 그의 마음속은 끝없이 평온했다. 다시는 이번같은 죽을고비를 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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