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22

 

날이 어둡기 시작한무렵 삼화려각대문을 밀고 들어선 도원국은 잦은 기침소리를 앞세우며 《계시오?》 하고 주인을 찾았다.

퇴마루에 나온 려각주인이 《아이구, 의주손님이 오시는구려.》하며 반겨주는데 부엌문을 밀고 얼굴을 내민 안주인은 《쯧쯧, 꼽재기가 왔구나.》 하고 혀를 찬다.

《원, 내가 깍쟁이란 말이요?》

도원국이 머리를 저으며 화를 내자 안주인이 자라목이 되여 《귀두 밝다.》 하고는 《또 소동피우자고 오셨나요?》 한다.

《해해해, 나로 말하면 허투로 여길 사람이 아니지요. 양점이 나한테 멱살 뜯기우는걸 봤지요?》

도원국은 안주인에게 가서 메고온 중태기를 선심이나 쓰듯 내주었다.

《이건 뭐나요?》

《곱게 뵈자는거외다.》

《어서 별채로 가요.》

마루우에 선 려각주인은 대범하게 웃기만 한다.

《뭔지 왜 헤쳐보지 않소?》

《됐수다. 무슨 변변한게 있겠다구.》

《허- 내 평양에서 내려옵네다. 그속엔 마음씨 곱고도 고약한 백과부가 아주먼네한테 보내는 물건이 있수다.》

려각 안주인은 그제야 《우리 동생이 보냅디까?》 하며 서둘러 도원국이 가져온 물건을 꺼냈다. 흰 무명보자기를 펼치니 은비녀와 금가락지 한개가 나졌다.

《에구- 제 뼈 깎아 돈을 좀 벌었기로서니 이 비싼걸 장만해 보내다니.》

안주인은 눈물이 글썽해서 혼자소리를 하는데 도원국이 물었다.

《이달 스무하루날이 생신날이우?》

《됐어요. 어서 가보세요. 손님들이 별채에서 기다릴텐데.》

려각 안주인은 저고리고름으로 눈물을 찍으며 부엌문을 닫았다.

《우리 집사람하군 자별하네. 친동기나 다름없지.》

주인의 말에 도원국은 고개만 살래살래 저었다. 괘씸한 과부년이다. 다른 사람에겐 큰 인심을 쓰면서도 나한테만은 모질다 할만큼 박정하니 노상 가로본다는 소리다. 송월이의 소식을 전하면서 리자로 진 빚을 다문 얼마라도 베먹는가 했는데 앉은자리에서 고스란히 내놓았다. 그것도 한푼 곯지 않게.

《아주버니, 장사라는게 남 속여먹는 일로, 등쳐먹는 일로만 생각할게 아니예요. 신용을 잃으면 못하는 일이니까요.》

백씨의 훈시소리가 아직도 귀청을 따갑게 한다. 흠, 장사라는게 남 속여넘기는게 아니고 뭐람. 등 어루만지며 염통 뽑아내는게 장사판이 아니란 말인가. 헤이, 참으로 괘씸한 년이거든. 허줄한 보자기에 싸서 주길래 무심했더니 그속에 금가락지가 있을줄이야… 날 장님같이 여기고 놀려대는 놀음이지 뭔가. 참 모를노릇이야, 그 과부년은 어떻게 돼서 돈을 잘 버는지… 그년의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돼지같이 새끼를 얼마나 잘 낳는가. 녀자들은 대개가 장마당의 좀장사군들인데 그 과부년만은 유독 날구뛴다는 잠상들도 잡기 힘든 묵돈을 긁어들이니 귀신이 곡을 할노릇이다.

속이 바르지 못한 도원국은 시샘이 괴여올라 견딜수 없는지라 려각 별채로 가면서 퉤퉤 침을 뱉아댔다.

방안에는 유양점과 서필이 초물방석을 깔고앉아있었다.

《나타나긴 나타나는군.》

유양점이 놀리듯 말하자 서필은 어서 앉으라고 각근하게 자리까지 권했다.

도원국이로서는 서필을 만나는게 잠상물건을 관가에 털리우는 놀음같이 여겨진지 오래다. 이번에 전갈을 받고도 이런저런 궁리끝에 걸음을 뗐다. 마주앉은지도 오랜데다 그새 서울형세가 어떤지 궁금했던것이다. 개화당인지 뭔지 한게 큰일을 치르면 한몫 볼 기회를 놓칠것만 같았다.

《내 말을 귀담아듣기를 바라오. 우리의 거사는 시각을 재촉하고있소.》

서두를 이렇게 뗀 서필이 대세를 괄목하여 좋은 언변으로 엮어내리기 시작했다.

일국의 수도라고 하는 서울에서 조정은 개화파와 수구파사이의 서슬진 당쟁으로 하여 혼란속에 옳바른 국책을 세우지 못하며 미궁속으로 굴러들어가고있었다.

조선반도를 둘러싼 렬강들의 각축전이 전쟁을 암시하고있을 때에야 조정의 일부 대신들과 관리들은 대세에 우려를 품고 세상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충군》이라는 담장안에서 《태평세월》의 음풍영월속에 살던 그들이 이제야 기울어가는 나라밖을 살펴보고 눈이 휘둥그래있는 기막힌 판이였다.

시국이란 과거를 놓치면 오늘에 와서 수습하기 어렵다는것을 룡상에 앉은 임금도 문무백관들도 모르고있었다. 사색당쟁의 뿌리깊은 나무는 사화라는 줄기를 끝없이 자래워 충과 역을 가려 따지기 힘든 정치란무장이 벌어지고있다. 나라에는 렬강들과 맞설 외교책략도 없었으며 렬악한 군력은 무방비상태나 같았다.

이 기회를 노려 일본이 조선반도에 검은 마수를 뻗치기 시작하였다. 청나라와 로씨야,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일본의 대조선정책에 경계심을 품고 동북아시아의 전략적요충지인 조선반도에서 저들의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있다.

혁신관리 김홍집은 수구세력들앞에서까지 서슴없이 이렇게 열변을 토했다.

《자강이란 비단 부강하게 된다는것뿐아니라 우리의 정치를 옳게 다스리며 우리 민족을 보존하며 밖으로부터의 침략에 맞선다는것이요. 이것이 자강의 첫째가는 임무라고 보오.》

렬강의 침략이 박두하고있음을 예고하는 말이기도 했다.

서필은 말허리를 끊고 유양점과 도원국의 심리를 타진하려고 잠시 살펴보고나서 말을 이었다.

《우리 개화세력은 막대한 돈을 들여 군대의 근대화도 추진하고있소. 경기도에 별군영을 설치하고 서울의 네개 영가운데서 후영의 한 부대를 골간으로 해서 임오군란시 해산된 군인들과 지방 젊은이들로 모집하여 천여명에 달하는 군대를 무었소. 이 신식군대는 훈련도 근대적방법으로 진행하여 보기만 해도 힘이 솟소.

며칠전 어느 한 자리에서 김옥균은 이렇게 말한바 있소.

<우리가 하자는 일은 력사의 요청이요, 대세가 바라는 길이니 기필코 결판을 봐야 하오. 만약… 우리가 넘어지면 이 나라의 앞날에는 울고 탄식해도 되돌리지 못할 국난이 도래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양점, 바야흐로 우리가 력사앞에 몸을 던져야 할 시각이 다가왔소.》

서필이 유양점의 이름을 찾자 도원국의 눈길이 재빨리 움직인다. 상놈인 나같은것쯤은 제쳐놓고 둘이서 수작질을 하자는게 아닌가. 어떻든 저 서울량반의 말끝엔 반드시 돈소리가 나오게 되리라고 그는 짐작했다.

유양점은 서필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그의 소행이 치사한데는 있지만 돈 주무르는 놈이 좀 쓰기도 뒤집기놀음도 하기마련이니 이전 일들은 제쳐놓을수 있다. 평양의 취향루에서 얼마나 기름지게 망신을 당했는가. 그로서 새롭게 느끼는바는 서울형세가 몹시 급하다는것이다. 조정에 대두한 개화파세력이 공손히 물러날리는 없다. 또 그래서는 안된다는것을 유양점은 그간 시국을 살펴왔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세우지 않는다면 기필코 큰 우환이 들이닥칠것이다. 이것은 벼슬을 그만둔 량반이며 비록 오늘은 토목공사쟁이에 불과한 자기의 근심이자 김옥균의 생각과 같다고 보았다.

그로서는 서필이라는 인간을 볼게 아니라 나라를 걱정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만 개화파가 일으킬 정변의 뒤가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들의 대의명분은 옳다고 해야겠지만 거사도 때를 잘 만나야 하는것이다.

《이 자리를 같이하진 않았지만 려각주인은 서슴지 않고 천냥을 내놓았소.》

서필은 그전처럼 조여대는 본새를 버리고 호소하는 말을 던졌다.

돈소리를 듣기 바쁘게 도원국의 입에서 애햄거리는 기침소리가 나온다.

유양점은 서필의 말을 통해 개화파에게 제일 걸린것이 재정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어찌 보면 그 돈이 개화파의 성패를 좌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돈이 정변의 결정적기회를 마련할수는 없다고 여기는 유양점이다. 려각주인만큼 돈을 내놓을수도 있다. 하지만 개화파의 모연자금이라는게 어느 모퉁이로 보나 아리숭하다. 장부에 오르기를 하나 문서로 남기기를 하나… 모아들인 그 많은 돈이 어느 구멍으로 새여나가는지도 알수 없는노릇이다. 서필이가 바로 그 짬을 노리고 제 돈벌이도 하고있지 않는가.

《이보우 서필형, 좀스럽게 백냥, 천냥하지 말구 큰돈을 돌려서 쓸 방도를 생각해보지 않으려우?》

그 말에 서필의 표정도 달라지는가 하면 타산밝은 도원국의 얼굴에는 잠상군고유의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양점의 말을 따른다면 돈이 많은 사람을 찾아야 하고 큼직한 담보를 주어야 할텐데 그게 쉽겠소?》

서필은 유양점의 주머니에서 다시 돈을 꺼내기는 어렵다는것을 알기에 맥없는 소리를 했다. 아무리 바람을 불어넣어도 불이 붙지 않을 두사람이라는걸 알면서도 자리를 같이한 그였다. 이들에게 다 말할수는 없지만 개화파의 정변이 실지로 눈앞에 박두했고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돈을 수중에 넣으리라 마음먹고있었다. 그사이 개화파 큰 인물들의 눈밖에까지 났다는것을 모르지 않는 서필이지만 정변의 운명보다 자기의 치부에 온갖 신경을 썼다. 애당초 배신이라는 감투를 쓰고 뛰여든 놀음이니 수치조차 느끼지 않았다.

유양점의 말을 들은 도원국의 머리속에서는 교묘한 생각이 맴돌고있었다. 백씨의 돈을 돌려쓸 방도는 없을가. 그 무식한 년이 리자를 크게 붙인다면 내놓을지도 모른다. 후에 어떻게 되든 그야 상관할바도 아니다. 괘씸한 년의 주머니에서 돈이 날아와 버려지는걸 보는것만도 깨고소한 일이 아닌가.

《일이 되고 안되는건 찍어 말하기 어렵지만 나한테 계책이 하나 있수다.》

꿀먹은 벙어리인양 눈알만 굴려대던 도원국이 수염을 비틀며 입을 열었다.

《어서 말해보오.》

서필은 아무모로 보나 간특하게 여겨지는 도원국이지만 돈줄이 보인다면 가릴 생각이 없었다.

《큰돈을 돌려써보자는거지요.》

유양점이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누구한테서?》

《해해, 너무 목말라하지 마시우. 두 어른은 나를 따라 평양에 가기만 해주시면 되갔수다.》

백씨앞에 서필이와 유양점을 앉혀놓고 적당히 구슬려대면 일이 성사될것 같다고 생각한 도원국은 제 속심을 내비치려 하지 않았다.

《좋소.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래일 평양으로 올라갑시다.》

서필이 도원국의 말을 따르자 유양점은 미간에 주름을 모은채 움직이지 않았다.

백씨는 유양점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증산의 자기쟁이일가를 송산에 데려왔다. 물보공사로 땅없는 신세가 될번 했던 그들은 송산에 오기 바쁘게 자기장을 꾸리는 일에 달라붙었다.

송월이도 도매점을 맡아 일을 잘하여 점차 도매업이 활기를 띠였고 백씨가 생각했던것보다는 못해도 벌이가 괜찮게 되였다. 이악하고 약삭바른 송월이가 경림이와 의논하고 백씨의 초가를 헐어버리고 새 집 지을 생각을 했다.

아무리 막아나서야 쓸데없자 백씨는 젊은이들 하는대로 내쳐두었다. 그의 속생각은 따로 있었다. 새 집을 지으면 경림이 잔치를 할 생각으로 색시감을 물색했다. 그는 며느리감을 어지간히 까다롭게 저울질하며 골라 경림이와 맞세워보았는데 싫다는 소리가 없어 락착을 지었다.

경림이 색시감인 처녀는 룡흥면 차동에서 진주처럼 고생스럽게 살았는지라 마음이 곱고 부지런한데다 입이 무겁고 일손이 빨랐다.

경림이 잔치를 치른지 며칠 지나지 않은 날 유양점이 서필과 도원국을 데리고 온다는 소리없이 불쑥 나타났다.

《편안하셨소?》

유양점의 인사를 받은 백씨는 도원국의 뒤에 선 낯선 사람을 스쳐보고나서 《무슨 일로 이렇게… 어서들 들어오시우.》 하고 말했다. 그의 심중은 도원국이 간사하게 웃으며 삐쳐든게 마음내키지 않는데다 생소한 사람까지 나타나 저으기 의문스러웠다. 찾지도 않은 이 량반들이 꾸역꾸역 밀려온 까닭이 뭔가.

자리를 잡자 구변좋은 유양점은 입조차 열지 않고 헛눈만 팔고 밉광스러운 도원국이가 앞에 나서서 입을 나불거려댔다.

《이 어르신네로 말하면 경상(서울상인)인데 양점과 오랜 친분을 가진 막역지우라 그 말입니다. 자고로 뜻있는 량반들은 한곳에 모인다고 했은즉 오늘 이 자리도 그렇게 마련된가 봅니다.》

잠상의 주둥이에서 뜻이요, 량반이요 하는 소리가 나오기에 유양점은 굵은 손가락으로 귀구멍을 쑤셔대고 상놈의 주선을 받아서 온지라 체면이 깎이는것 같아 서필의 얼굴에도 거북스러워하는 기색이 떠돌았다.

도원국의 수작질에 속이 언짢아난 백씨는 부엌에 대고 찾았다.

《얘야!》

정지문밖에서 경림의 처가 《녜.》 하고 대답할뿐 감히 문도 열지 못한다.

《나리를 시키든지 해서 점심참두 돼오는데 국수집에 가서 랭면 네그릇만 받아오너라.》

《알겠습니다.》

손님치례를 국수나 먹여 끝내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백씨는 찾아온 사람들이 다음말을 하기 전에는 입조차 열지 않을 자세로 앉아있었다.

도원국의 눈알은 팽이돌듯 했다. 어떻게 둘러쳐서라도 백씨의 돈을 돌려쓰게 만들어야 했다. 저년이 눈은 내리깔고있지만 내 속안은 다 들여다볼게다. 별수없지. 량반님네들 낯을 깎으면서 붙어보는수밖에…

《백씨가 도매점을 내왔다는 소문이 발이 달렸는지 서울까지 알려졌수다. 이분은 선상에 미곡상까지 하구있수다. 배가 자그만치 10척이나 되구요. 올해 쌀값이 천정부지로 뛰여오를 판인데 그걸 모르시겠소? 게다가 남도의 피륙이며 종이, 자기와 잡화들을 날라다 도매점에 넘겨주면 일은 썩 잘될게 아니겠수. 이런걸 보구 횡재할 구멍을 찾았다고 말합네다.》

쉼없이 나불거리는 도원국의 말재간을 탐탁치 않게 여기며 듣던 백씨가 물었다.

《그러니 우리 도매점과 짝을 뭇자는 소린가요?》

《그것 참 신통한 말이외다. 술집에도 단골손님이 있지 않소. 짝이라는 말이 듣기가 정말 좋수다.》

《허- 그렇게 합시다그려. 배만 가져다대구려. 값이 맞으면 내가 다 넘겨받지 않을라구요.》

백씨의 흥정은 단마디였다. 더이상 이러구저러구할것도 없었다.

자기를 선상까지 겹친 미곡상으로 불러댔으니 입을 열지 않으면 난처하게 된 서필이다.

《내가 이렇게 초면에 무릅쓰고 찾아온것은 도움을 받을수 없을가 해서입니다.》

《나한테 말이나요?》

《실은 배가 10척이나 된다지만 낡아서 띄우기 어렵게 된게 여러척인데 새로 무어야 할 형편입니다.》

《내 선상들을 좀 아는데 배 한척 뭇는데 한해가 걸린다더군요.》

《무은 배를 사야지요.》

백씨는 이 세사람이 찾아든 까닭을 어림짐작할수 있었다. 배를 살 돈이 없으니 변통하자고 온것이다. 장사판이 커질수록 돈을 융통해 쓰지 않을수 없는 때가 있다는것도 알게 된 그다. 행상이 돈을 꾸기 시작하면 망하고말지만 큰 장사군이 많은 돈을 변통하면 더 큰 돈을 번다.

백씨는 껴묻혀앉아서 입을 꾹 다물고있는 유양점의 거동이 이상하여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토목공사판을 벌려 괜찮게 벌이를 하는것 같은데 이제는 선상줄을 잡자는걸가.

《양점어른두 이젠 선상으로 돌아앉으시려우?》

유양점의 수염이 움씰거린다. 거북등모양으로 앉아있자니 탈바가지 쓴것 같아 오금이 저려났다. 도원국의 꾀임수에 넘어 백씨의 문지방을 넘어선 그다. 사실대로 말할수 없는 형편인지라 화가 치밀지만 도원국의 수에 놀아나는 길밖에 없었다. 사람이란 이렇게 되여 도리에 어긋나는짓을 하겠구나. 마음속으로 통탄을 하면서 그는 짐짓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배를 타자는게 아니라 한몫 보자는거요.》

쏟아놓고보니 제 한 말이 하도 뻔뻔스러운 거짓말이여서 낯이 간지러웠다. 하지만 내친걸음이니 별다른 도리가 없다. 괘씸한건 도원국이다. 잠상놈의 잔꾀에 놀아나다니…

《그러니 빚 내려고들 오셨소그려.》

심드렁한 백씨의 말에 서필은 차례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만냥… 만냥만 돌려줄수 없겠소. 대신 우리 배가 나르는 짐들은 이 도매점에 넘기겠소. 마음대로 골라잡을수 있고 수량 또한 달라는대로 하며 1년동안은 본전과 배값에 더 붙이지 않겠소. 1년에 매달 5푼변으로 하면 손해볼 일이 있을것 같지 않은데.》

장사물계에 쩌들대로 쩌든 서필은 구미가 동할수 있는 조건들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냈다.

유양점은 이 흥정이 백씨의 거절로 끝나기만 바랐다. 그렇다고 자기가 나서서 그러라고 할수는 없었다.

《그렇게 좋은 변놓이도 있나요?》

백씨가 묻자 유양점의 눈길이 슬며시 돌려지고 도원국은 턱만 까딱거렸다.

《여기 양점도 앉아있는데 신용을 담보합니다.》

《원, 나같은것한테 그 많은 돈이 있겠어요?》

도매업이 한창 흥하는 때 선상줄을 잘 잡는것도 요긴한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백씨는 선뜻 응하기를 피했다. 유양점만 없어도 한마디로 거절하겠지만 믿음절반 의심절반이 속에서 널뛰기를 해댔다.

간사한 도원국은 백씨가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아 한다는것을 제꺽 알아차리고나서 유양점을 물어당겼다.

《백씨는 미덥지 못한탓에 저울질하니 양점이 말 좀 하소.》

좀스러운 소인한테 아이이름 불리우듯 하자 유양점은 화를 벌컥 냈다.

《뼈다귀없는 혀바닥 그만 놀리라구! 다 같은 장사군들인데 내 낯이나 보구 흥정할텐가?》

백씨는 유양점의 말에서 지금 일이 돼도 좋고 안돼도 좋다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나선다면 만냥쯤은 어데 가서든 돌려 채우지 못할리 없었다. 리자가 5푼변이라니 선상들이나 부를 돈이고 잘만 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남도의 물건을 부탁할수도 있으며 원하는대로 골라서 넘겨받게 된다. 그것도 아주 눅은 값으로 말이다. 그는 지금같은 선상줄만 잡으면 큰 리득을 볼수 있다는 타산을 했다.

《좋수다. 내 만냥을 내놓지요.》

세사람을 묶고있던 탕개가 이 한마디에 툭 끊어져나갔다.

《허허-》

유양점은 바라지 않은 일이 생긴것으로 허구프게 웃었지만 도원국은 《과시 백씨가 다르외다. 해해.》 하고 주린 개 혀바닥 놀리듯 말하며 백씨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서필도 천행인지라 기분이 좋아 웃음을 짓고 말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 말에 도원국의 눈알이 꼿꼿해났다. 다행이라구? 식자개나 있다는 량반이 장사흥정에서 속이 보이는 소리를 함부로 하다니… 이럴 때야 한번 꽈서 리자를 낮추자든가, 돈을 더 부르든가 해야지. 공자왈 맹자왈이나 외워대던 그 입으로 무슨 큰일을 치겠냐. 너희들 견마군노릇 하는 나도 운이 트이긴 그른 놈이다. 그는 백씨의 태도가 달라질가봐 속으로 서필을 욕해댔다.

《나한텐 만냥이 큰돈이니 문서 같은걸 만들어야지요?》

《그야 여부가 있겠소.》

잔뜩 도사리고 앉았던 도원국이 이젠 됐다고 쾌재를 올렸다.

《헌데 이 집엔 글 쓸만 한 종이도 붓도 없으니 어떻게 할가요?》

《걱정마시오.》

서필이 제 가방에서 종이며 붓과 먹을 꺼내였다. 밥상우에 종이를 펴놓은 그는 붓을 휘둘러 잠간사이에 문서를 꾸몄다.

《갑신년 2월 초사흘 서필…》

서필은 년월일과 자기의 이름을 읽어주었다.

《자, 보시오.》

《난 글 한자 모르는 녀자니 양점어른이 다시 봐주세요.》

유양점은 하는수없이 문서장을 넘겨받았다.

《약조한 그대로요.》

《그럼 양점어른의 말을 믿겠어요. 거기다 어르신네 성함도 써넣어주시우.》

《돈이야…》

《게서 나선 일이 아니나요.》

《세상에 견줄이 없는 양점인데 뭘 그리 꾸물대슈.》

도원국이 수염을 비틀어꼬며 부채질이다.

《젠장! …》

부아통이 터지는걸 참으며 유양점은 백씨가 시키는대로 하고나서 종이장을 도원국의 무릎우에 던지다싶이 놓았다.

《의주장사치 이름도 박아넣게!》

《히야- 나같은 상놈이름두 말이요? …》

급해맞은 도원국이 여윈 어깨를 솟구며 다급히 머리를 내둘렀다. 이 량반네들이 자취를 감추면 언제든지 자기만 백씨의 단련을 받지 않겠는가. 지금껏 좀 당한 시름인가. 한푼도 에누리없는 과부년의 손탁에 다시는 걸려들고싶지 않은데다가 지금 돈이라는게 갚아줄 길이 바이없는 협잡판에 들어가는 돈이기에 생각하니 소름까지 돋았다.

《됐어요. 의주사람 도장까지 받지는 않겠어요.》

사람취급조차 안하는 백씨의 말에 이가 갈렸지만 올가미에서 벗어난지라 도원국은 과부년에게서 당하는 하대쯤은 참아내리라고 치미는 속을 눌렀다.

《문서는 꾸몄으니 돈은 래일 와서 가져가슈.》

백씨의 말을 들은 유양점과 도원국의 심리는 랑패로군 하는가 하면, 어이구 그 큰돈을 서울량반의 아가리에 종내 처넣고 마누나 하는 시기로 엇갈렸다.

《얘야, 어서 점심상 들여오려무나.》

백씨가 분부하자 무던하게 생긴 경림의 색시가 소반을 들고 들어왔다. 랭면 네그릇에 고추찬이랑 간장이랑 담긴 종발 둘 그리고 식초병이 전부였다.

《초라한 상이지만 어서들 드시라요.》

여느때 같으면 선주후면이라며 술부터 찾았을 유양점도 아무말 없이 저가락을 들었다.

《해해해, 이 평양랭면이라는게 8도에서도 손꼽히는 음식이 아니요.》

뜻대로 문서가 꾸며져 속이 가뿐해진 도원국은 듬뿍 놓인 꾸미며 고명, 양념 등을 국수에 골고루 뒤섞어가지고 후룩후룩 맛스레 먹어댔다.

제일먼저 그릇을 낸 유양점이 물러나 입을 닦았다. 도원국이도 제앞의것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입이 밭은데다 상등음식만 먹어온 서필은 랭면 반그릇을 남기였다.

《잘 먹었소.》

그래도 인사는 서필이가 차렸다.

《원, 그 아까운 음식을 남기다니요. 낟알이 얼마나 귀한지를 모르며 사시였나요?》

반나마 남은 서필의 국수그릇을 보고 혀를 찬 백씨가 경림의 색시더러 물에 씻어 저녁에 먹자고 일렀다.

제 자식 남긴 밥은 먹어도 국수는 못 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판판 모르는 사내가 먹다 남긴 국수가 아까와 먹겠다는 백씨를 보며 세 사내는 서로 다른 표정을 지었다.

백씨의 바래움을 받으며 집대문밖을 나섰을 때였다.

《세상에 저런 린색한 계집도 있소.》

서필은 자기가 남긴 국수를 먹겠다던 백씨의 모습이 떠올라 비웃음을 띤 얼굴로 말했다.

《저 녀자가 누군지 아오?》

유양점이 묻자 서필이 눈길을 돌렸다.

《몇해전 대령강객주집 주인한테서 들은 말이 생각나지 않소? 형방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그 행상녀인이요.》

《하-》

서필은 이상한 심정을 맛보며 놀란 소리만 냈다.

살금살금 고양이걸음을 하던 도원국이 서필에게 붙어서며 말했다.

《만냥을 내 수로 얻어쥐였은즉 나한테 천냥만 돌려주시우. 두달후에는 2천냥을 들여밀리다.》

유양점은 도원국의 처사가 하도 기가 막혀 고개를 쳐들고 소리없이 웃었다.

공모하여 협잡한 돈이니 서필도 제 주머니에 다 넣기가 면구스러워 유양점에게 물었다.

《양점도 그렇게 하지 않겠소?》

《여보, 치사하오. 의주 갓바치 아들놈의 입에나 물려주게.》

오지 말아야 할 길을 왔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유양점은 간사한 도원국의 멱살을 움켜쥐고 도리깨질하고싶지만 치미는 화를 내뿜고 제갈길로 가버렸다.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Google+로 보내기
evernote로 보내기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mypeople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