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20

 

리문리려인숙은 승려들이 나간 사찰모양으로 되여버렸다. 날이 밝았는데 마당쓰는 소리도 물긷는 녀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간밤에 마신 술이 깨지 않은 성진우가 이방저방 비칠거리며 문을 열어보지만 소리질러 욕해댈 그림자조차 없다. 생겨먹길 손으로 문을 열어본 일이 거의나 없는 그의 발길이 이방저방 문짝들을 들이차고 내차며 제김에 고함질친다.

《이년놈들! 다 어데 갔느냐? 아침상은 누가 차리는거냐? 이것들이 모두 뒈진게 아니야?!》

너렁청한 부엌은 더운 김은 고사하고 썰렁한 랭기만 풍긴다.

문지방에 주저앉은 그는 주린 개처럼 냄새를 맡아대다가 벽에 털썩 기대였다.

열흘전에 고향 증산으로 가버린 식모대신 밤시중들던 녀자에게 부엌일을 맡겼더니 미꾸라지처럼 빠져달아나 당초에 일을 부려먹을수가 없다.

집안꼴이 왜 이 모양으로 돼가는가. 잡일을 하던 령감은 병핑게로 집에 들어가있더니 인편으로 다른 일자리를 잡았다고 알려왔다. 게다가 밤손님들의 돈주머니를 털려고 고이 입히고 먹여준 년들까지 하나둘 꼬리를 사려 남은게 고작 하나뿐이다. 내 집에만 이런 화가 꼬리를 무니 귀신의 조화가 아니고 뭔가.

술기운이 가셔지기 시작하자 성진우는 두눈을 흡뜨고 사납게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무슨 생각이 났던지 황황히 자기 방으로 뛰여들어가 농짝문을 여니 무둑히 찬 엽전잎이며 금붙이가 보인다. 그는 이를 사려물고 《허순백이 개자식! …》 하는 소리를 신음같이 내뱉았다.

꿈에도 생각 못해본 일이다. 쌀을 싣고와야 할 허순백이 나타나 뻣뻣하게 하는 말이 그를 아연케 했다.

《쌀이나 가져와야 진우 자네의 속에 차지 않을것 같아 오늘은 여태 지고 살아온 빚을 갚자고 왔네.》

《빚을 갚다니?》

《2천냥어칠세.》

허순백의 말에 성진우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땅마지기는 있다지만 소 몇짝 가지고 제 일가식솔이 진을 뽑아가며 농사를 지어먹는 녀석이 이 많은 돈을 어데서 장만했는가. 2천냥을 올가미로 려인숙이 쓰는 쌀은 리자값만으로 해마다 백여가마니를 끌어들였는데 이젠 나자빠지자는 속심이 아닌가. 창고에 쌀이 다 떨어져서 싸전에서 사다가 하루하루 견디는 형편인데 이 녀석이 아예 명줄 끊어놓을 잡도리다.

《순백이, 이 빚을 갚는 놀음을 하자구 쌀을 보내주지 않았나?》

《지난해 농사가 안된거야 알지 않나.》

《찧지 못해 그런다더니?》

《이젠 찧을 쌀도 없네. 2천냥을 갚는게 낫지 쌀값이 하늘높은줄 모르고 오르는 때에 자네한테 눅거리로 쌀을 넘길수야 없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야 자네와 지금같이 거래해서는 죽는 날까지 빚 갚기는 글렀다는걸 알았네.》

《이보게, 빚은 빚이구 약속은 약속대로 지켜야지. 쌀없이야 려인숙을 어떻게 운영하겠나. 잘 생각해보라구.》

성진우는 허순백의 앞에서 처음 사정하는 처지에 빠졌다.

《자네 리속만 챙겨주다 난 망하라는건가? 문서장이나 만드세. 작지 않은 돈이니 남겨둬야 할게 아닌가.》

단단히 마음먹고 온 허순백에게는 아무 말도 통하지 않았다. 그가 하자는대로 해야지 별수 없었다.

식모며 잡부며 녀자들까지 다 나가고 창고에는 쌀마저 떨어졌으니 망한 려인숙이다. 이 돈마저 고스란히 제것이 될수 없다는걸 잘 아는 성진우인지라 누가 볼세라 장농쇠를 잠그었다.

그는 세모진 눈을 쪼프리며 앞일을 모색했다. 꽁지에 불이 달린게 분명하니 삼십륙계 줄행랑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평양바닥에서 거지신세가 될바에는 2천냥을 가지고 귀신도 모르게 사라져야 했다.

성진우는 량반가의 후손이지만 괴이하게 생겨먹은 인간이다.

어려서는 장난이 세찼고 철이 들어서는 제일먼저 투전노름을 배웠으며 사내체모를 갖춘 뒤에는 주색잡이에 날이 가는줄을 몰랐다.

그는 천성도 모질어 도덕을 숭상하는 세월에도 제 아버지에게 말대꾸질하기가 일쑤였고 낳아키운 어미는 장난감만치 우습게 여기였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어머니의 주머니에서 돈을 앗아냈고 그것이 안 통하면 돈궤에까지 서슴없이 손을 댔다.

《어이구 얘야, 너를 키우기가 이다지 힘들줄은 몰랐구나.》

어머니의 탄식에 따른 아들의 대답은 기가 막힌것이였다.

《나야 그래두 량반세도 등등할 때 쉽게 길렀지요. 벼슬자리 하나 마련해주지 않았으니 나야말로 열곱은 더 힘들게 부모공양을 해야 해요.》

《공양은 바라지 않는데 속이나 썩이지 말려무나.》

《하긴 내가 어떻게 공양한다는거예요. 돈이 있어요? 권세가 있어요?》

망해가는 세상에 자식효도를 바란다는것자체가 어리석은 망상이다. 성진우의 부모들은 훌륭한 아들을 둔탓에 자식이 부어주는 술 한잔 바로 마셔보지 못하고 숨이 졌다.

앞일을 두고 생각을 썰어대던 성진우는 귀바퀴를 세웠다. 부엌에서 달가닥거리는 소리가 난다. 쥐새낀가. 잠시 귀를 강구고있던 그는 무릎걸음으로 고양이같이 정지문쪽으로 기여가 살며시 문을 밀었다. 억이 막힌 광경이 눈앞에 안겨왔다.

남아있다는 년 하나가 등을 돌려대고 저 혼자 아침밥을 먹어대고있지 않는가. 세상에 이보다 고약한 일이 또 있겠는가. 주인은 배가죽이 등에 붙어 아침상 들여오기를 기다리는데 저년은 제 배만 채우고있으니…

성진우는 더 참고있을수 없어 주먹으로 문지방을 내리쳤다.

《이 고약한 년!》

그전 같으면 기가 눌려 팽이돌듯 하던 년이고보면 주인의 고함질에 세길은 껑충 뛸터인데 놀라기는커녕 뉘시오 하는 식으로 눈길을 돌린다. 입에 문 밥숟가락조차 뽑지 않고 바라보는 눈이 왜 큰소린가 하는 말대꾸를 대신했다.

《이년아, 아침상도 차려놓지 않고 돌아앉아 저만 처먹어대니 그게 목구멍에 넘어가느냐?》

《옆집에서 조밥 한그릇 주기에 허기를 달랩니다.》

《무슨 말대답질이냐?》

《어쩌랍니까? 독을 여니 쌀 있습니까, 장이 있습니까? 창고엔 땔 장작도 없는데 낸들 무슨 수로 아침을 짓습니까?》

대답질을 모르던 년인데 무슨 생심을 먹고 저렇게 대꾸질인가. 욕보다는 제 배가 고파서 견딜수 없었다. 생각 같아선 저년의 손에 든 밥바리를 덮쳐내고싶지만 아직 체면은 남아있었다.

성진우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여 부뚜막에 뿌려던지며 호령했다.

《당장 가서 아침을 먹을만 한걸로 사오너라. 술도! …》

《네네.》

먹던 밥을 밀어놓은 녀자가 궁둥이를 흔들며 나갔다.

《망조가 드는구나. …》

성진우는 베개를 베고 누워버렸다. 잠간 눈을 붙이였는데 무서운 꿈을 꾸었다. 흉물같이 생긴 놈이 《내 돈을 내놔라!》 하며 두손으로 목을 조여대기에 후닥닥 일어나 앉았다. 등골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음식점에 갔던 년이 아침상이라고 들여왔다. 밥은 흰쌀밥이지만 시래기장국에 염한 조기 한마리가 접시에 놓여있다. 내여준 돈의 절반어치도 차려놓지 않은 그 속통머리가 고약하긴 하지만 빈속이 아무거나 빨리 넣어달라고 아우성이여서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움켜쥐였다.

《술!》

《옆에 있지 않습니까.》

곁에서 찰찰 붙어돌며 잔이 빌세라 부어주군 하던 년이 이젠 내놓고 괄세한다.

《사라져!》

밸이 치민 성진우는 손을 내저어 그를 쫓고나서 시래기장국에 밥을 말아 게걸스레 먹으며 술을 마셨다. 조기반찬을 안주로 삼자고 저가락을 댔던 진우는 입에 넣기 바쁘게 화를 냈다.

《너무 짜니 쓰겁기까지 하구나.》

가련한 신세가 되였다. 주지육림이 한생 기다려줄줄 알았는데 며칠사이에 바닥에 떨어진 밥알도 주어먹을 신세가 되였다. 액운이 붙지 않고서야 홀지에 이 모양이 될수 있는가. 밸이 울컥 치밀어 밥상을 걷어찬 그는 방바닥에 나딩구는 그릇쪼각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흠칫 놀라며 굳어졌다.

서슬을 먹고 쓰러진 순애의 모습이 눈앞에 보였던것이다.

그년의 원귀가 이 집안에 살아있는게 분명하다. 그년이 죽은 뒤부터 괴이하고 상서롭지 못한 일이 꼬리를 물었다는것을 생각해낸 성진우는 이구석저구석을 겁에 질린 눈으로 둘러보았다.

성진우의 부모들은 다 이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물려준 재산이란 려인숙이라는 집이 전부였다. 조상 잘못 만났다는 불만으로 사는게 불효자식이다. 성진우는 지금도 제가 저지른 죄될 일은 생각지도 않으며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부모들만 욕해댔다. 그에게서 지금의 패가는 조상탓이였다. 화를 면하자면 이 집에서 달아나야 한다고 곱씹어 생각했다.

대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후려닫는 소리가 울린다.

목을 뽑고 내다보던 성진우는 그만 아연해졌다. 고명한 친구들이 때를 놓칠세라 찾아드는것이다. 점잖은 량반차림의 소문난 난봉군, 망나니들이다.

《어서들 오게.》

성진우의 지어낸 반갑다는 말은 귀등으로 들으며 두사람이 망건을 쓴채 마주앉는데 기상이 시퍼렇다.

《진우, 술상부터 차리게!》

키꼴이 큰 친구가 우락부락 소리질러댄다.

성진우는 이놈들이 왜 찾아왔는가를 짐작하고도 남는지라 잔꾀를 부리기 시작했다.

《어랍쇼, 제법 호통인가? 술마시고프면 곰살궂어야지. 안그래?》

《너한테 발라맞출 낯이 있기는 글렀어.》

암팡지게 생긴 친구가 사팔눈을 치뜨고 노려본다.

《그렇단 말이지.》

오른다리를 꽈서 왼무릎우에 올려놓으며 성진우는 맞대들이할 기상으로 응수했다.

《고작해서 우린 술친구, 도박친구였지. 안그런가? 사람이 의리라는게 뭔지는 좀 알구 사는거네. 기승부려대는 속심을 내가 왜 모를텐가? 이 집에 들여민 돈이 날아날가봐겠지? 흠흠, 개열 씹는 맛일세. 회계하겠네. 오늘중으로! 송산에서 내 돈 2천냥이 오면 다 갚겠어! 더러운 심보들이라구야. 내 리자까지 붙여서 물어주마. 대신 내 집에서 진탕망탕 처마시고 놀아댄 값도 계산할가? 이 성진우 그런 졸부는 아닐세!》

을러메고 비웃고 둘러쳐대는 청산류수같은 성진우의 말재간에 마주앉은 두사람은 홀린듯 말을 못했다.

《이젠 친구도 아니니 임자네들이라구 부릅세. 임자네들이 내 집에 들여민 돈이래야 3백냥씩밖에는 안돼. 3백냥에 10년 신의를 칼로 베여내치세. 내 망해서 승천하는 날이 오면 귀신이 되여가지구 임자들 계집놀음 아예 못하게 고자로 만들어주지. 기다리게나. 어서 엉치 털구 가보게.》

독이 뻗친 성진우는 정신을 바싹 차리고 돈계산까지 해대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키꼴이 후리후리한 놈이 주먹으로 방바닥을 내리쳤다.

《계집년 사설질같은 수작 그만두지 못하겠나?!》

그러자 곁에 앉은 녀석이 이때라 제꺽 입을 열었다.

《술이구 계집이구 의리구 하는건 하등 필요가 없네. 돈만 내놓으라구. 오늘중이라니 언젠가?》

족제비 닭의 멱을 문것 같은 두놈의 입에서는 돈소리뿐이다.

뻔뻔스럽기로 소문난 성진우는 끄떡하지 않았다.

《송산 허순백이 오늘저녁에 건너오네. 그런즉 래일아침 일찍 찾아들 오라구. 공연히 밤에 나타나서 술상 차려내라는 비위를 내댈 생각은 아예 말구.》

《좋네. 진우, 자네와 한동아리가 됐자 손해볼것밖에 없으니까.》

《난 손해만 보는 사람이 아니야. 그새 진우네 집에서 마신 술만도 열독은 넘을걸세.》

엉뎅이 털고 일어나면서도 두놈은 제가끔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분통이 터지게 약을 올리지만 성진우는 한시바삐 쫓아버려야 할 물건들이여서 억지로 참으며 대답했다.

《내가 마음이 헤퍼서 속아지냈네. 잘들 가라구.》

친구 아닌 친구들을 무난히 쫓아버린 성진우는 제 방에 올라가서 돈이며 패물 등속을 고리짝안에 허겁지겁 옮겨넣고나서 한숨을 내쉬였다. 점심이나 먹고는 한사람만 만나고 평양바닥에서 꼬리를 감추면 된다.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섰다. 값은 이미 흥정되였다. 그 돈까지만 받아쥐면 미련없이 떠날 판이다.

성진우는 조용한 음식점을 찾아가 점심을 먹고 돌아와 집살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초조히 기다렸다. 봄바람에 기와장이 덜렁거려도 미닫이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이 큰집을 50냥에 팔다니, 애초에 값을 높이 불렀어야 했다. 시간이 급하다나니 흥정도 크게 하지 않았다. 아깝다만 큰 고기덩이를 먹겠다고 기다리다 낮에 나타났던 녀석들한테 덜미를 잡히는 날에는 본전만도 6백냥인데 리자까지 붙으면 약차한 돈을 게워놔야 한다. 그러니 밑지는 생각은 나도 50냥에 족하고 빨리 걸음을 떼야 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면서도 타산을 거듭하던 성진우는 《계시나요?》 하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녀자목소리가 아닌가. 기다린 사람이 아니여서 상심한 그는 시답지 않은 소리로 《게 누구요?》 하고 문을 열어제꼈다.

웬 청년을 등뒤에 세운 녀인이 천천히 걸어온다. 무명천일망정 깨끗한 소복차림이다. 백씨였다. 그의 눈길은 조용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뉘신데 나를 찾아오셨소?》

녀자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성진우는 모로 앉은채 고개만 돌리고 물었다.

《사람이 걸음을 했을 때야 일이 있어 오지 이 잘난 집에 뭣때문에 발길질하겠소.》

백씨는 말마디를 씹어대며 주인이 권하지도 않는데 방안에 들어와 앉았다.

《이 잘난 집이라니? … 어데서 온 아낙넨데 인사불성이요?》

성진우가 눈살이 꼿꼿해서 노려보았다.

《내 말이 곱지 못한데는 까닭이 있으니 그건 후에 들을게구 먼저 돈부터 내놓아야겠수다.》

이건 또 어디서 나타난 미친년인가. 얼굴조차 모르는 사이에 무슨 돈을 내놓으라는건가? 생각 같아서는 집에서 부리던 년놈들을 조겨대듯 하고싶지만 마주앉은 녀자의 기상에 눌려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지간히 놀랄 일일거외다.》

백씨는 가지고온 작은 보퉁이를 풀며 말했다. 리문리려인숙이 점포와 가게에 진 3백냥 빚이 있다는것을 알아낸 그는 주인들을 내세워 소동을 일으키게 하려다 마음을 돌려먹었다. 자기가 직접 성진우와 맞대면하여 받아내고싶었다. 그래서 성진우의 필적으로 된 채무증서를 리자까지 합쳐서 샀던것이다. 빚진 놈 모르게 빚받을 사람이 바뀐것이다.

《자, 이걸 보시우.》

백씨가 석장의 채무문서를 성진우앞에 내놓았다.

다섯해나 묵여온 빚이 나타나자 성진우는 어떻게 되여 이 문서장들이 낯도 모를 아낙네 손에 들어갔는지 알수 없어 보고보고 또 보았다.

《왜, 무슨 의심이래두 생기시우?》

《갚아도 빚을 낸 사람을 옳게 가려 갚아야 하지 않겠소.》

성진우는 한풀 기가 죽어 말했다.

《내 그럴줄 알았수다. 거기서 빚을 낸 점포와 가게주인들은 나한테 더 큰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외다. 내 독촉이 심하고 당장은 돈이 없으니 이걸 내놓았소. 여기에 채무증서를 양도한다는 문서도 가져왔수다.》

빈틈없이 조여 빠질 구멍이 없게 만드는 백씨앞에서 성진우는 난감한 낯색을 지으며 잔꾀를 부려보았다.

《점포나 려인숙이나 벌이하기는 같은지라 당장 내놓을 돈이 없으니 어찌겠소. 한달만 아니, 보름만 말미를 주시구려.》

《무슨 말씀이시우. 돈 잘 벌기로 소문난 려인숙인데 당치도 않수다.》

《빚지지 않는 장사가 있소? 그럼 이달부터 리자를 5푼변으로 올립시다. 한달을 기한으로 꼭 갚을테니.》

《나를 녀자래서 얕잡아보시우?》

백씨의 어조에 모가 섰다.

《그럴리야 있소.》

《난 이 집에 자그만치 2천냥이 있다는걸 알고 왔수다.》

《?! …》

성진우는 깜짝 놀라면서도 그냥 엉너리를 쳤다.

《그 많은 돈이 있으면서야 왜 빚을 갚지 않겠소. 어디서 뜬소문 들은가본데 2천냥은 고사하고 지금 단돈 백냥도 없소. 봄이 왔은즉 이제부턴 벌이가 잘될거외다.》

《허허, 이 집주인이 신용이 없다는 말 들어왔는데 정말이구려. 2천냥은 있수다! 송산 허순백어른이 가져오지 않았단 말이요?!》

성진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리였다. 앞에 앉은 이년이 나를 아예 잡자고든다?! 2천냥이 들어온 사실까지 알아낸 다음 남에게 진 빚을 제가 사가지고 찾아왔을 때야 내 목을 눌러 분질러놓자는 심보가 아니고 뭔가. 기광이 뻗치기 시작한 그는 어떤 만용이든 부려서라도 바쁜 대목을 넘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건 어디서 나타난 막돼먹은 년이야?! 돈이 있느니 없느니… 장사나 해먹는게 남의 뒤조사까지 하면서 따라다녀? 빚진 놈은 오죽하겠다구 개수작이야! 5푼변으로 한달 늦추자면 늦추는거지. 네년도 장사해먹는 년이 옳으냐?!》

성진우가 엉치방아를 찧어대며 입에 담지 못할 소리로 싸움판을 벌리자고 하지만 백씨는 낯색 하나 달리하지 않으며 듣기만 했다. 상대가 하도 진중하니 객기를 부리려던 사내도 말이 모자라는지 씨근대기만 한다.

《내가 누군지 아시우?》

백씨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조용히 울렸다.

《모르오, 생면부지요.》

《나로 말하면 박석골 백과부라 부릅네다.》

그 소리에 성진우는 눈을 끔쩍거리며 마주봤다. 평양일판에서 그 이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장사를 하려면 백과부같이 하라는 말이 생겨나기까지 했다.

《초면에 안됐수다.》

《초면이라니요?!》

《? …》

《나를 모르겠소?》

《허- 낯이 있는것 같기도 하고…》

성진우는 살구멍이 나지는가부다 생각하며 얼굴에 열적은 웃음까지 띠였다.

《세월을 돌이켜보구려. 이젠 10년 하구도 8년이 지났으니 스무해전 일이나 같수다. 그때 난 이 집에서 점심참마다 삯빨래를 했소. 선창에서 짐군노릇 하던 내 남편이 중병 만나 누웠는데 돈이 없어 이 집 문턱을 넘었소. 약살 돈 일곱냥을 얻자고…》

성진우의 얼굴이 꺼멓게 죽어들어가고있었다. 자기도 지난 일이 돌이켜졌던것이다. 그때 제 입으로 한 말까지 생각났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보다 몇갑절이나 추한짓을 한것도 다 잊었는데 어떻게 돼서 이 녀자와 한 말은 되살아나는가.

《성진우! …》

백씨는 사내의 이름이지만 두려움없이 입에 올려 불렀다.

《네가 그때 한 수작을 나는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왔다. 16살에 하늘같이 믿고산 남편을 잃은 과부의 한이 어떤건지 너는 모를게다. 내 너를 이렇게 만나자고 벼르고별러 왔으니 더 큰 재앙을 입지 않으려거든 돈을 내놔라. 내 그 돈을 받아 청녀못에 처넣겠다. 네놈들이 뜨물장사군이라고 사람을 짐승같이 밟아댄 그 못가에 서서 뿌릴테다. 백과부의 한을 풀련다!》

백씨가 돈을 받아가지고 간 다음 성진우는 실신한 놈처럼 네활개를 펴고 드러누웠다. 이게 바로 악인에게 악운이 차례진다는 옛글이 그대로 옮겨진게 아니겠는가. 백씨의 서슬진 얼굴이 빙글빙글 눈앞에서 돌자 그는 미친듯이 소리질렀다.

《이건 꿈이다! …》

방안이 컴컴해나자 그는 화닥닥 일어나 앉았다. 남은 돈을 더 뺏기기 전에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성진우는 고리짝을 둘러메고 제집 마당인데도 발걸음소리까지 죽여가며 대문을 빠져나왔다. 그는 옳바로 정한 곳도 없는지라 무작정 경상골쪽을 향해 걸음을 다그쳤다. 모란봉이라는 산이 자기의 몸뚱이를 감춰줄것 같았다.

어둠속에 줄행랑을 놓던 그는 종시 왕년의 친우들한테 걸려들었다.

《이놈아, 그 주둥이로 거짓말이 난당이로구나! 뭐 래일 아침에 오면 돈을 주겠다?!》

《족제비같은 놈일세. 우리 등을 쳐서 번 돈을 통채로 삼키자고 삼십륙계를 쓰는걸 보게나.》

고리짝을 진 성진우는 너무 급하여 사정했다.

《이 사람들아, 내가 가면 어델 가겠나. … 송산 허순백이 오지 않아 찾아가는 길일세.》

《등에 진 고리짝은 뭐냐?》

《그걸 벗겨라!》

《이것만은 안되네. …》

무지한 두놈이 짐승같이 달려들어 성진우를 개패듯 두들겨댔다. 아이구, 아이구 죽는소리를 지르면서도 성진우는 고리짝만은 부둥켜안고 놓지 않았다.

《이 자식이 죽어봐야 알겠어?》

짓밟고 걷어찰 때마다 이발이 부러지는지 뼈다귀가 꺾이는지 성진우는 피를 뿜으며 나딩굴었다.

고리짝이 터지며 그속에서 엽전이 좌르르 쏟아져내렸다.

《돈이다!》

《돈… 돈…》

《이놈들아… 그건 내 돈이다. …》

《개수작말아!》

매질을 해댄 놈들이 게걸스레 서로 싸움질까지 하며 제마끔 돈을 자루에 쑤셔넣었다.

《네놈들이…》

성진우는 피묻은 두손으로 동전 몇잎을 움켜쥔채 마지막기운을 내여 소리지르고는 땅에 고개를 박았다. 그가 절명한 장소는 청녀못을 옆에 둔 길가였다.

처참하게 맞아죽은 시체옆에는 동전 몇잎이 흩어져있을뿐이였다. …

끔찍한 참변소식을 듣고 감영의 라졸들이 떨쳐나섰다. 백성들의 재산 털어내기는 식은 죽 먹기로 여기지만 죄인 찾아 잡는데서는 소경이나 같은것들이 하루새 살인죄를 지은 량반 두놈의 목에 칼을 채우는 기세를 올렸다.

도매점일을 송월과 경림에게 맡긴 백씨는 제 집에 나리와 함께 있었다.

잠에 곯아떨어진 나리가 더운 입김을 홀홀 내부는걸 지켜보며 앉은 백씨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성진우가 제 무리한테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때부터 일손도 잡히지 않는데다 마음이 산란하여 진정할수 없었다.

망하게나 하자던노릇이 사람을 죽게 만들었구나.

그는 지금 장규현의 목소리를 듣고있었다.

《…전란에 죽은 사람보다 돈에 죽은 사람이 더 많네. 그 돈이라는게 어느 하루 사람목숨을 앗아가지 않는 날이 없다네. …》

백씨는 눈을 감았다. 자기의 돈이 사람을 죽인것이나 다름없다.

《내 죽이려 하진 않았건만… 죄는 지은데로 간다는 옛말 그른데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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