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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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가의 징조는 자식이 돼가는 꼴에서 알리니 병중에도 제일 무서운 병이 이것이여서 걷잡지 못하게 되면 집안이 망해버리고만다.

몰락한 량반가문의 후손인 성진우의 아버지는 가산의 전부로 려인숙을 내온 뒤 기울어진 집안을 추켜세우려고 무진 애를 썼다.

자식이라고는 아들녀석 하나인데 서당에서 글공부를 시작하자부터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짝패들은 모두 돈과 권세가 있는 량반집 자식들로서 삼강오륜을 거치장스럽게 여기면서 사서삼경을 뜯어 연을 만들어 띄울만큼 기막힌 무리였다.

성진우는 부모들이 타이르면 동무따라 강남간다는 소리를 곧잘 줴치며 열살을 넘겨서부터 나쁜 놀음을 착실하게 골라가며 해댔다.

성진우의 아버지가 장규현과 면식이 있어 향목서원에 보내봤지만 한해도 못 가서 쫓겨났다. 고명한 이 아들은 타고난 개코여서 집안의 돈궤를 아무리 감춰도 속속이 찾아내여 투전노름에 날려보냈다. 랑비의 환락가에서 기다리는것은 질탕한 술판과 창녀들뿐이였으니 못된짓을 학문으로 숭상하며 성진우는 열심히 유흥을 수도했다.

마침내 그의 아버지는 조석으로 아들과 싸움질하다 중풍을 만나 자리에 누웠다. 숨이 넘어갈 때 성진우의 아버지는 《그녀석에게 베감투를 씌우지 마오.》 하는 유언을 남겼다.

눈먼사랑으로 자식을 대하는게 어머니의 본능인지라 아버지가 죽은 다음 성진우의 잡기는 성하는 독초같이 자라 걷잡을수 없었다.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성진우는 령전앞에서 처음으로 울었다. 얼마나 곡성을 크게 터뜨렸던지 조객들이 효자로 여길만큼 그의 행동이 눈물을 자아냈다. 그가 흘린 눈물과 곡성이 부모잃은 슬픔인지 려인숙이라는 크지 않은 재산이 전부 자기의것으로 된 기쁨이였는지는 그자신밖에 알수 없는노릇이다.

성진우는 요즘 불안한 마음을 거두지 못하면서도 자기 욕망이 부추기는노릇을 놓칠세라 지꿎게 해댔다. 그는 단순한 난봉군이 아니였다. 간계와 음모를 꾸밀줄 알았고 돈을 벌수 있는 기회만 생기면 친구의 주머니도 서슴지 않고 털어내는 인간이였으며 설사 사람을 죽여야 한대도 끄떡없이 해낼 잔인성도 갖추고있었다.

리문리려인숙이 기생집이라는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부엌일을 하던 처녀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나면서부터 손님들의 발길이 적어지니 벌이가 안되는데다 흉한 소리를 막느라 감영관리들에게 적지 않은 돈을 먹이는통에 성진우는 요즘 눈에 피발이 섰다.

대한이 물러간지 사흘째 되는 날 저녁 려인숙대문이 열리며 《진우 있나?》 하는 호기띤 목소리가 울렸다.

성진우가 문을 열고 내다보니 낯익은 사람이였다. 름름한 키꼴에 풍채좋은 저 사람을 어디서 본것 같은데…

그는 《어서 오시우.》 하고 응대하고나서 여겨보기만 했다.

《어서 오시우? 야 이눔아, 내가 양점이다.》

마루앞에 선 유양점이 눈묻은 발을 굴러서야 성진우가 껑충 놀라 일어섰다.

《양점형!》

《허허허. 진우, 그새 잘 있었나?》

《날 잊지 않으셨소그려.》

《잊다니, 리문리노랭이라면 평양일판이 다 아는데.》

《날 그렇게 부르는 놈들은 주둥이가 모로 찢어진것들이우다.》

방안에 들어온 유양점은 틀스레 올방자를 하고 산처럼 앉았다.

글공부를 했다는 자랑인지 벽마다 서예족자를 걸어놓았고 한쪽에 놓인 평상우에는 연적과 필묵까지 보인다. 바닥에 깐 초물에는 매화가 그려있어 방안의 갖춤새가 제법 선비집안같이 느껴진다.

《초물돗자리가 괜찮군.》

《이게 그 유명한 강화화문석이라는거지요. 오는 사람마다 부러워하는 물건이외다.》

《허허, 내가 그걸 모를라구. 좋은 깔개에는 좋은 술상이 따라야 걸맞는게지.》

《여부가 있소.》

성진우가 어렵지 않게 내뱉는 수작에 눈귀를 찡그린 유양점이 말했다.

《그새 나라는 사람은 여기저기 흘러다니며 토목공사일을 벌려 과히 구차하게 살지는 않는다네.》

《양점형이야 원체 대틀이니 큰돈을 벌어낼거우다.》

《오늘은 자네 집에서 하루밤 즐겨보세나.》

《반갑다, 반갑다 해도 양점형 같은 친구를 만난게 제일 반갑지요.》

성진우가 나가더니 한동안 있다가 제 나이의 두 친구를 데리고 들어와 인사를 시켰다. 도적이 도적을 잘 잡고 오입쟁이가 오입쟁이를 잘 가려낸다고 유양점은 성진우가 데려온 친구들이란게 짝지지 않는 족속들임을 제꺽 알아보았다.

《바둑이나 두실가요?》

둘중 키가 작은 사람이 치째진 눈을 들고 물었다.

바둑판에 마주앉은 유양점은 어렵지 않게 두사람을 제꼈다.

《로형의 수엔 우리는 안되겠습니다.》

《허허, 뭘 그다지… 진우와는 자별한 사이요?》

바둑판에서 금새를 달구어본 두사람이 초면인사는 치른 뒤여서 별로 꺼리지 않으며 대답했다.

《친형제간이나 같지요.》

《이 려인숙도 우리 세사람이 함께 운영합니다.》

《그러니 두분네들의 돈이 이 집에 들어있다 그 말인가요?》

《그러문요.》

그들이 이야기를 나눌 때 큼직한 상이 가운데 놓였다.

이어 남색비단치마에 자주빛공단저고리를 입은 젊은 녀자가 흰 버선발을 사뿐히 옮기며 인사부터 하고나서 음식을 차리였다. 상가운데 쪄낸 새끼돼지 통마리가 올랐다.

《진우 이 사람이 오늘은 마음먹구 내는구만.》

《우리 양점형의 덕인줄이나 알게.》

《우리 술마시는 내기를 하는게 어떻소? 술값은 지는 사람이 무는거요.》

《허허, 그럼 나두 해보지. 주량에서 나를 이길 량반이 있겠는지.》

성진우패거리들은 유양점에게 지지 않겠다고 승벽을 부리며 맞잔을 비웠지만 시간이 흐르자 몸을 지탱하지 못하는게 알렸다. 혀가 꼬부라들자 저마다 속에 품었던 생각을 되는대로 지껄였다.

《여… 진우, 회계는 바로해야 돼! 똑같이… 골고루 나누어먹어야지… 안그래?》

《옳거니, 전달도 약조한… 돈… 돈이 어데… 차례졌는가? … 밑지는 장사에 돈… 돈 밀어넣고… 녹아나는게 아닌지… 몰라…》

《이 사람들아… 철도 없지… 우리가 진 빚이 얼마지?… 자그만치 6천냥일세. … 그뿐인가. … 이 집안 떨거지들한테도 몇푼씩은 줴줘야지… 그리구 계집들은? … 쌀도 돈, 고기도 돈… 장작이나 숯은 돈이 아닌가? …》

《그… 6천냥 빚이라는게… 3년세월… 그냥 남아있네그려. 노상 밑지는 놀음을 한다는건가? …》

《우리가 이렇게… 하루저녁 먹어대는게 얼마어친지… 알기나 하나? …》

유양점의 곁에 앉은 키가 작은 사람이 고개를 돌리며 상반신을 흔들거려댔다.

《여보시오, … 아 형님, … 뉘신지는 모르갔소만… 좀 말씀해주시우. 저 량반 타산이… 귀에 찹니까?》

유양점은 술마신 사람 같지 않게 수염을 쓸며 조무래기 술망종을 다루듯이 말했다.

《타산인지 계산인지 그런건 난 모르네만 자네들 술먹는 모양이 글렀네. 술자리에서 하는 말이 따로 있지. 그리구 내 친구 진우는 정직한 사람일세.》

엄엄한 훈시에 기가 눌리울 사람들이 아닌지라 이번에는 유양점을 야료해댔다.

《어디서 사시는 뉘신지… 함자나 알구 지냅시다레… 치사한 두던이나 하자고 앉았소그려.》

《진우레 정직하다… 하하… 같은 뜨물이 분명한즉… 작당하러 온게 아니우?》

유양점의 얼굴이 금시 사나와졌다. 두눈이 번들거리고 살진 볼이 푸들푸들 뛴다.

《어허- 말버릇 고약하기란! 내 주먹에 목대 꺾이지 않겠거든 주둥이건사를 잘하는게 좋아!》

부르쥔 유양점의 큰 주먹이 쳐들리자 기세를 올리던 두 녀석이 풀이 죽었다.

《곱게들 마시게.》

유양점은 두손으로 갈비며 닭의 다리를 우악스레 물어뜯어 삼키면서 연방 잔을 기울였다. 그의 머리속에서는 성진우가 누구한테서 6천냥이나 되는 빚을 졌는지 알아볼 생각이 떠올랐다.

《진우 이 사람, 빚지고는 이런 집을 운영하지 못하네.》

낮은 소리로 넌지시 비치자 유양점의 힘덕을 보고있는 성진우가 귀구멍에나 겨우 미치게 대답했다.

《빚은 무슨 빚… 오히려 송산 허순백이 나한테 2천냥 빚지고 쌀을 날라다 바치오.》

《허- 그래.》

허순백이라면 유양점이 토목공사를 하면서 사귄 사람이라 고개를 끄덕댔다. 약아빠진 성진우가 친구들 돈을 모아 제 리속 채우는셈이다.

성진우는 자기 동료들이 어지간히 취한지라 말했다.

《자, 취흥도 올랐으니 우리 집 고운 새 노래가락이나 들어보지.》

《좋수다. …》

술판에서 계집의 노래를 듣는다니 모두가 들썩대는데 유양점의 맞은켠에 앉았던 놈이 《아이구, 오줌이야! …》 하고 벌렁 나가자빠졌다.

《하하하…》

《흐흐흐… 내기에서 졌으니 오늘밤 술값은 임자가 다 물어야 하네.》

성진우가 두루마기를 던져주자 키큰 녀석이 술에 취한 친구를 부축이고 나갔다.

허순백이 예견한대로 대한이 지나 립춘이 가까와오자 대동과 증산쪽의 땅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본전의 절반값도 안되게 땅값이 떨어졌을 때에는 사겠다는 사람조차 없어 수만냥이 날아나는가 했는데 이번엔 지주들과 흥정하여 손해없이 다 팔았다. 백씨로서는 3년이 되도록 묵여온 땅에서 생각보다 많은 리윤을 보아 큰 근심을 던셈이다.

룡산쪽에서 흘러내리는 순화강뚝을 따라 백씨는 허순백과 나란히 걸었다.

봄은 땅속에서부터 온다는 말이 신통하다. 양지쪽 뚝은 부풀어오르며 얼음장처럼 금이 쭉쭉 가기 시작한다. 눈이 녹으며 드러난 해묵은 풀들이 거무틱틱한게 빛을 잃은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속에서 푸른 기운을 비치는게 알린다. 해토는 이렇게 시작되는것이다.

거름을 실은 달구지들이 아직은 얼어붙은 길로 천천히 움직인다. 논밭에서 농부들이 벌써 실어나른 거름을 펴는 모습도 보인다. 추위와 눈속에서 한해의 농사가 시작되고있는것이다. 한겨울 외양간에서 살진 소들도 일할 때가 왔다는것을 아는지 희뿌연 눈보라속에서 꼬리를 내저으며 《음메-》 하고 영각을 지른다.

《보시우. 한해농사가 시작됐수다. 농부의 한생은 무한이로되 춘경추수는 년년사로다 하는 말이 있지요.》

《어르신네가 이번에 절 크게 도왔어요.》

백씨는 허순백에 대한 고마움을 안고 걷는지라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담배쌈지가 매달린 대통을 문 허순백은 나이는 백씨와 어슷비슷하지만 농쟁기를 다룬 손바닥은 이기지 않은 가죽처럼 거칠다.

《농토란 말이외다.》

허순백은 백씨가 고맙다는 말쯤은 새겨듣지도 않으며 《저한테 명줄을 잇고사는 농사군들을 가려보는 눈이 있지 않소. 허허.》 하며 웃었다.

《땅에 눈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허순백은 한발을 쳐들고 대통안의 재를 두드려 털고나서 두루마기 주머니에 찔러넣고 긴 동뚝 오른켠 야산기슭에 자리잡은 송산마을 농가들을 한동안 바라다보았다.

《그러문요. 움켜쥐면 흙이지만 울기도 한다우.》

아침에 물으면 저녁때 가서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더니 허순백이 그같은 성미였다. 물어본 사람이 제 한 말을 잊어먹을 때쯤 돼서 생각해둔 말을 하는것이다.

땅에 눈이 있다는 말도 듣느니 첫소리요, 운다는 소리는 당초 믿기 어렵다. 눈이 있어 울줄 안다면 귀도 있고 말도 하지 않을텐가. 무슨 소린지.

백씨는 허순백의 성미가 하도 늘어져 묻기를 그만두고말았다.

《농사를 짓는다구 다 농군이 아니외다. 되는대로 부쳐먹다 벌이 좋은데로 가면 그 땅이 울지요. 곡식이 아니라 풀이 덮여 황무지가 되고 그렇게 버려지면 비바람에 떨며 울지요. 나같은 농군은 그 소리를 듣수다.》

땅뙈기를 자기 살점같이 여기는 사람이다. 아마도 땅을 떠나서 살라면 땅을 안고 울 진짜배기농사군이다. 백씨는 허순백의 근면한 모습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런 사람이 성진우 같은 인간 아닌 놈에게 2천냥이나 되는 빚을 지고 뜯기우며 산다니 어디 될 말인가.

《내 언제부터 백씨에게 묻자던건데…》

《뭔데요?》

《돈을 벌어 쓰지는 않고 두었다 어쩌자는건지?》

《녜?》

허순백에게서 뜻밖의 질문을 당한 백씨다. 등뒤에서 퍼부어지는 욕으로 늘쌍 들어온 말을 이렇게 마주서서 받아보기는 처음이다. 정말 기승스럽게 돈을 버는 내가 아닌가. 백과부라면 평양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으로 소문난 장사군인 내가 지금 어디에 쓰려고 아득바득 돈을 버는걸가.

쓰고 남을 돈을 가지고도 왜 그냥 더 벌지 못해 애쓰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수가 없다. 비명에 이승을 떠난 남편과 한 약속쯤 지키자면 지금이라도 그의 무덤을 어느 대감의 묘보다 더 크게 앉힐수 있다. 그것이 소원의 전부였다면 이제라도 그렇게 하고 편안히 여생을 보낼수 있건만 어떻게 된 일인지 행상으로 시작한 장사길에서 벗어날수 없다. 애초 부귀영화는 바라지조차 않는 내가 돈을 가지고 과연 무엇을 하려는걸가. …

《허허- 내 괜한 소릴 한마디 했으니 탓하지 마우.》

《어떻게 쓰면 좋겠는지 어른이 좀 말씀해주세요.》

《아, 원… 그러지 마시우. 나같은게 뭘 안다구.》

《모르긴 뭘 모르시나요. 땅속내 알듯 하면야 어려울 일도 아닐텐데…》

두사람 다 큰 허물없이 대하는 사이여서 백씨가 극성을 부려 물으니 허순백은 더욱 난감해하였다. 그도 무슨 생각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니였다. 백씨가 아직은 젊은 나이라 해야 할 녀자인데 돈은 번다지만 쓰기는 가난뱅이농군이나 다름없이 먹고 입는다니 그게 알수 없는 일이여서 해본 소리였다.

《땅물계야 내가 좀 알지요. 허허, 제 손으로 낟알 심어먹지 않는 놈이 땅을 많이 가지면 그게 우환이외다. 농토라는건 원래 농사군들에게 골고루 차례져야 하는건데 어디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줍디까. 지주 하나에 세 동네가 망한다는 소릴 못 들었소? 땅도 재물인즉 늘어나면 욕심이 커지고 그 욕심에 가난한 놈 눈물 거둘새 없지요.》

백씨는 허순백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땅이나 돈이나 같고같은것이지 뭔가. 돈도 사람한테 있을만큼 있어야지 화근을 빚어낸다는 소리다. 스쳐들을 말은 아닌데 자기 속에 꼭 차지 않는다. 큰돈을 기어코 벌겠다고 마음먹은 자기다. 그런즉 욕심대로 많은 돈을 손에 쥐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텐가. 그 돈이 없는 사람들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짓을 하지 않을가. 내가 성진우를 망하게 하겠다는 마음을 먹은게 옳은 생각인가.

백씨는 성진우이름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발을 굴러 허순백을 놀라게 했다.

《내가 백씨의 화를 돋군게 아니요?》

《화는 무슨… 어서 집으로 가시자요.》

《하긴 우리 집에 가서 점심이나 하구 떠나시우.》

사랑채와 외양간을 갖춘 허순백의 집은 마당에 새끼퉁구리와 가마니들이 가득 쌓여 여느 농가와 다름이 없다.

《농사군 허리펼새가 없수다. 그래도 겨울 한철은 좀 낫지요. 소가 외양간에서 살지는 동안은 사람도 화로불앞에서 오금을 녹이니까요.》

허순백의 안내를 받으며 백씨는 안주인과 인사를 나누고 방안에 들어갔다. 구름노전을 깐 방안은 낮인데도 어두운데다 메주 띄우는 냄새에 코가 알알해났다.

놋화로를 백씨앞에 가져다놓은 허순백이 뙤창을 조금 열어놓으니 방안으로 겨울해빛이 흘러들었다.

부저를 쥔 백씨는 화로불을 번지며 생각했다.

유양점이 알아본것이 옳을가. 빚지고 살 허순백이 아니다. 공연히 심사를 거슬리게 만들면 말하지 않은것만 못할텐데…

《이번 걸음에 쌀을 한 4백~5백가마니 살수 없을가요?》

장사는 백씨와 거래해서 등탈없다는걸 아는 허순백이지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타작전에 약조를 했어야지. 이제 와서 그 많은 쌀은 값을 올려도 얻기가 조련치 않겠소.》

《어른이 가지고있는게 없나요?》

《찧은족족 날라가야 하외다.》

《어떤델 보내주나요?》

백씨의 소청을 들어줄수 없게 된 허순백은 감추는것이 없이 말했다.

평양과 코를 마주한 송산일대에서 나는 쌀들은 미곡상들의 손을 거쳐 싸전에 넘어가기도 하지만 태반이 손님을 많이 치르는 려인숙과 음식점들이 미리 계약하여 날라가고있다고 한다. 그러니 리문리려인숙 밥줄이 허순백과 이어져있을수도 있는것이다.

《리문리려인숙 주인을 내가 좀 아는데 쌀을 살 줄이 없어하길래…》

《그게 정말인가요?》

《내가 이쪽엘 많이 다니니 부탁했겠지요.》

허순백은 한동안 궁싯대더니 대통을 입에 물었다. 성진우가 쌀을 살 줄을 찾는다니 속이 덜컹했던것이다.

《성진우가 그러던가요?》

허순백이 되묻기까지 하기에 백씨는 두사람사이에 어떤 연고가 있다는것을 짐작했다.

《려인숙을 가진 사람인데 쌀 사들일 줄이 없겠나요. 무슨… 금새가 맞지 않는다는 소리를 하는걸 봐선…》

《값은 타작전에 약조한거외다.》

백씨가 아리숭하게 둘러대자 허순백은 제풀에 화가 난 소리를 했다.

《그럼 어른한테서 받아갔나요?》

《해마다 그눔 성화에 수십가마니가 넘게 날라다 주지요. 조상때부터 못 갚은 빚이 있으니 어찌겠소.》

백씨는 허순백의 고충을 알고싶었다.

《조상이 진 빚이라니요?》

허순백은 장탄식을 하며 사연을 이야기했다.

성진우의 할아버지는 고순화면의 큰 지주였다. 그때 허순백의 일가는 그 집 땅에 붙어서 명줄을 이어갔는데 흉년이 겹치는통에 장리쌀 세가마니를 묵은 빚으로 안고 살았다. 해마다 리자가 붙어 허순백의 대에는 엄청나게 불어나 갚을 형편이 못되였다. 기세가 등등하던 성진우의 할아버지는 관가와 짜고들어 환자미를 빼내여 고리대를 벌리다 졸지에 망해 죽었다.

성진우네 아버지가 거덜이 난 가산을 정리해가지고 평양으로 들어가는통에 허순백가문의 빚은 삭막해져 거의나 잊고 살았다.

그러던것이 성진우가 려인숙주인이 되자 하루아침에 2천냥이라는 엄청난 돈으로 변해 허순백의 목을 조이게 되였다. 해마다 쌀을 달라는대로 주지만 그 2천냥의 리자나 메꾸는 판이니 가지고있는 땅을 다 팔아도 갚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된것이다.

《원, 그런 기막힌노릇이라구야!》

백씨가 놀라서 한숨 쉬자 허순백의 낯색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 삵이 같은 놈이 쌀줄을 다른데서 찾는다면 필경 2천냥으로 나를 망하게 할 잡도리가 분명하외다.》

《내 눈에도 바로 보이지 않는 놈인데 정말 고약하군요.》

《피 빨아먹고 사는 거마리족속이지요.》

《그런 놈에겐 천벌을 내려야 해요.》

《하늘에 어디 눈이 있쉐까? 허허.》

허순백의 서글픈 탄식이다.

백씨는 속에서 불이 일었다. 성진우! 이놈아, 내 네 멱살을 물어메칠테다. 나처럼 평양바닥에서 뜨물통을 지고다니게 할테니 어디 두고봐라.

《인간세상에 그냥 두어서는 안될 놈이 분명해요. 그놈의 려인숙이라는게 쌀줄을 놓치면 끝장이 아닙니까?》

《그렇소만 나라는게 빚진 몸이니 별수 있소.》

《빚을 갚으면 되겠지요?》

《그 많은 돈이 어데 있소?》

《어르신네는 나와 한두해 알고지내는 사이도 아닌데 내가 갚아드리지요.》

《그건 어떻게 하는 말이요?》

《2천냥을 내드릴테니 갚으시라니까요. 대신 그 돈은 빚이 아니라는걸 약조하면 되겠나요?》

《그럼 거저 갚아준다는거외까?》

《이번에 나를 얼마나 도와주셨나요. 그 신세갚음으로 하지요.》

《아니, 이 허순백은 제힘 들이지 않고 남의 돈을 받을 사람이 아니외다.》

허순백의 곧은 성미가 백씨의 마음에 들었다.

《오면서 말하지 않았나요, 돈벌어 뭘하자는가구… 내 돈이 어른같은이들을 도와주면 좋은 일이 아닌가요?》

허순백의 손에서 대통이 뚝 떨어졌다. 너무도 믿기 어려운 사실에 부닥쳤던것이다. 2천냥 빚에 늘 쫓겨사는 인생인 자기가 아닌가. 그 시름만 던다면 하루 한끼를 먹어도 살로 갈것이다.

《3대를 내려오는 빚인데 그저 물어주겠나요. 겨울이 지나면 쌀값이 계속 오를테니 제가 빚받은 돈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두고봅시다. 어른이 나서서 그놈이 쌀살 구멍만 앞질러 틀어막으십시오. 난 나대로 옆구리를 조여 제 싼 똥에 주저앉게 할테니까요.》

백씨의 마음이 너무도 고마와 허순백은 그가 하라는 일은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날이 저물어서야 백씨는 도매점 본채에 들어섰다.

유양점이 먼저 와앉아 개다리소반을 마주한채 술을 마시고있었다.

《양점어른의 팔자는 정말 편안합니다.》

《땅이 풀리면 토목공사판에 나가야 하질 않소. 허허.》

나리가 냉큼 들어와 백씨의 손을 잡아 아래목에 앉히고 《꽁꽁 얼었어요.》 하며 손등을 비벼준다.

《그년 참 정들게 구는군.》

《그래 취향루주인을 만났습니까?》

《백씨는 기어쿠 그녀석을 망하게 할 잡도리요?》

《계집이라구 한입 가지고 두가지 말을 하겠습니까.》

《허- 성진우가 그렇게도 밉소?》

눈길을 내리깐 백씨는 대답을 안했다. 밉기나 하면 돌아다보지 않으면 될게다. 그는 마지막숨을 몰아쉬는 안재황의 입에 자기의 피를 떨구어주던 생각이 북받쳐오르자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허허, 취향루주인이라는게 여간한 녀석이요? 내 그래서 둬시간 주물러댔더니 제 눈으로 보고 마음에 드는 계집들은 쓰겠다오. 이왕 몸팔아 사는 신세들인데 려인숙 뒤골방에서 치르기보다 취향루가 나을거요.》

《불쌍들도 하지.》

백씨의 탄식에 열적은 웃음을 띤 유양점이 손갈구리로 볼을 긁어댔다.

《송산에 갔던 일은 어찌됐소?》

《허순백의 2천냥 빚을 내가 갚기로 했어요.》

《저런-》

유양점은 백씨의 엄청난 결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슨 심사로 그 많은 돈을 뿌리며 저리도 독을 쓰는가.

《그 세놈이 술 처마시며 한 수작질을 다시한번 외워보시라요.》

백씨의 억양에는 서리발이 끼였다.

《내 말하지 않았소. 한놈이 취한 놈을 데리고나갔다 들어오더니 어느 왕년의 일을 지껄이더라구. 밤중에 청녀못인가 하는데서 뜨물벼락을 맞은 분풀이로 어떤 젊은 계집을 밟아댔다더군. 아예 벌거벗기고 깔아뭉개지 못한게 후회된다는거요. 허허, 한다는 수작들이란 모두 추한것이 돼서 차마 입으로 옮기지 못하겠소.》

백씨는 눈을 감고 듣기만 했다. 그는 속으로 칼을 갈아댔다.

가슴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한다면 치욕을 안고 죽게 되리라. 이놈들, 원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을 못 들었느냐. 이 비천한 년이 돈을 벌어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내 다시 뜨물지게를 지는 한이 있어도 네놈들 망하는 꼴만은 꼭 볼테다.

《나리야, 너 래일 조용한 틈을 타서 리문리려인숙 식모를 만나거라. 내가 찾는다면 알게다.》

《알겠어요.》

《양점어른, 어서 술을 드시라요.》

백씨는 제 손으로 유양점의 잔에 술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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