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15

 

서해를 넘어오는 광풍이 맹수마냥 울부짖으며 달려들어 청류벽을 들이받아대면 모란봉 최승대쪽에서 설룡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솟구쳐오르는 평양의 겨울이 왔다.

왕성탄의 여울물소리도 얼어붙은 대동강의 얼음장밑에 눌려 들리지 않고 썰물때만 바위모양을 나타내던 조천석도 겨울 한철에는 볼수조차 없다.

혹한과 강바람이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던 평양을 기를 못 펴게 얼군다.

추위가 어찌나 심한지 감영의 관리들조차 내아에서 맴도는 판이지만 생계유지를 위해 몸부림하는 백성들은 돈 안들이고 대동강을 걸어서 건느는 계절이여서 모진 바람속에서도 사동, 승호, 황주쪽에서 짐나르기를 죽을 기운을 써가며 해댄다. 그렇게 이고 지고 나르는 물건의 태반은 량곡이였다. 봄이 잡히기 바쁘게 조석으로 쌀값이 뛰여오를테니 겨울철에 날라들여야 보리고개까지 연명할수 있는것이다. 생존은 평민들에게 고역을 강요하였다.

겨울철에 토지매매가 성하고 값이 오르기도 내리기도 하기에 백씨는 오늘 사동쪽에 사두었던 밭 두정보를 본전이나 겨우 받을 정도로 흥정하여 팔았다. 땅값이 지금처럼 눅거리가 되면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그다. 행상으로 벌어들이는족족 땅을 사두었으니 속에 재가 앉았다. 허순백의 말을 들은 뒤 평양의 변두리에 나가 자기 눈으로 보고서야 놀라운 변화를 알게 되였다.

순안쪽에 금전판이 생겨나 수많은 농사군들이 모여든것도 사실인데다 삼신, 사동에는 크고작은 탄광들까지 생겨나 청장년들은 돈을 벌자고 굴쟁이노릇을 하고있다.

백씨는 금전판과 탄광들에서 인부들에게 주는 품삯까지 알아보았다.

농사일은 제땅에서 허리펼새라도 있지만 인부들의 로동은 그 고됨이 형언할수 없었다. 사지판이나 같은 굴안에서 등짐으로 밀차로 버럭과 탄을 끌어낸다. 마음대로 쉬지도 못하며 하루를 일해 받는다는 품삯이란 보잘것없고 그마저 사내들은 육체의 고됨을 잊어보려고 술집에서 탕진하며 한숨만 쉬는 형편이다. 그러는 사람들속에서 제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는게 낫다는 말이 오고가는것을 백씨도 들었다. 농토를 찾아 제 집으로 돌아간 사람도 많았다.

며칠전 송산 허순백이 인편으로 전해왔는데 땅 사겠다는 사람들이 나섰는데 대소한이나 넘기고 건너오라고 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니 땅값시세는 누구보다 잘 아는 허순백이다. 백씨로서는 허순백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도매점을 내왔지만 그 일도 생각대로 잘되지 않았다. 문을 열기만 하면 돈벌이가 되리라 생각했는데 오산했다. 겨울이 되여 륙로문선창이 얼어 장사배들이 오지 못하니 물건을 넘겨받을 길이 막혔다. 대동강이 풀리기만 기다리는 형편이니 아직 몇달은 문을 닫아가지고있어야 할 형편이고 그렇게 날이 가면 갈수록 큰 빚의 리자는 불어나기마련이다.

고작해서 행상이면 큰것으로 여겨온 백씨로서 장사라는 큰길에 들어서니 그 갈래가 너무 많아 종잡기 어려운데다 배운것이 없어 통탄하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자기같은 녀자가 장사의 법도와 리치를 깨닫는다는게 아득하게만 여겨졌다. 그럴 때마다 속이 후들거려와 정신이 버쩍 들도록 제스스로가 욕을 퍼부어대군 했다.

저승에서 굽어보는 남편을 잊었느냐. 네가 만일 사람이라면 그 남편이 남겨준 고무신값을 갚아드려야지. 그게 어떤 신발이냐. 하건만 너는 고정한 남편에게 무엇을 바쳤느냐. 가난이 원쑤여서 약 한첩 써주지 못한 한을 벌써 잊었느냐. 청녀못근처에서 량반부자놈들한테 뭇매를 맞으며 짓밟히운 원한을 갚지 않고 주저앉으면 애초 이런 길에 나서지 않은것만 못하다. …

그래, 내 세상에 나서 백씨라는 성밖에 가지고 살지 못하는 비천한 녀자다만 기어코 마음먹은대로 하리라. 내 수중에 있는 땅은 돈이다. 도매점이 일을 시작하면 거기서도 돈을 벌것이다.

행상에서 벗어난 백씨는 담이 커야 장사도 한다는것을 알게 되자 판을 크게 벌릴 생각을 하였다. 땅도매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고 여겼기에 도매점을 내왔다. 저기서 손해보면 여기서 메꾸어넣을 방도가 있어야 했던것이다. 그는 평양변두리의 가까운 곳에 자기장도 꾸릴 욕심을 부리고있다. 행상으로 다녀보니 질좋은 자기가 잘 팔리웠다. 아직은 욕망이지만 장소가 마련되고 일군이 생기면 자기장을 내올 생각이다.

대동강이 가까와오니 바람질이 더 세차진다. 무명수건으로 얼굴을 반나마 가리웠지만 볼이며 귀뿌리가 얼얼해난다. 다른 사람들은 새우등같이 꼬부리고 헤염치듯 걷지만 석탄이 든 가죽중태기를 진 백씨는 고개조차 숙이지 않고 발걸음을 다그어댄다. 행상살이를 스무해도 훨씬 더 넘겼으니 이만한 추위는 그에게서 례상사였다.

경림이와 나리에게 도매점을 맡기면서부터 마음놓고 다니게 된 백씨는 점포와 가게들에서 겨울철이여서 팔지 못하고 묵여두고있는 물건들을 눅은 값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본전만이라도 잃지 않으려고 헐값을 부르기도 했다.

도매점창고에는 가지가지 물건들이 들어찼다. 겨울 한철에는 찾는 사람들이 없지만 이제 봄이 오고 계절이 바뀌면 얼마든지 팔아낼수 있다고 그는 타산했다.

대동강우에도 눈은 무릎이 빠지게 뒤덮였다.

등에 진 비게탄이 여간 무겁지 않아 강추위속에서도 땀발이 섰다.

창고에 모아들인 물건들이 겨울 한철 변하지 않게 하자면 불을 때서 누기가 차지 않게 해야 한다. 오늘 새벽 떠나면서 경림에게 일러 불때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무슨 일을 시켜도 마음이 놓이는 경림이다. 나리도 비록 어리고 몸도 가냘프지만 집안을 어떻게나 잘 거두는지 노전바닥이며 창턱이 티 하나 없이 알른알른하다.

《우리 나리 어떤 서방 만나겠는지 털고 쓸어 껍질 벗어질게다.》

백씨가 이렇게 롱말을 던질 때면 나리는 단마디명창으로 노래하듯이 대꾸하군 했다.

《어머니, 난 죽을 때까지 어머니곁에만 있겠어요.》

대동문 아래쪽 얼어붙은 선창기슭에 올라선 백씨는 선자리에서 숨을 돌리였다.

《어머니.》

덧저고리도 입지 않은 나리가 언제 나와 기다렸는지 달음쳐 마주 왔다.

《너 이 추운 날 왜 나왔니?》

《오빠가 나가보라구 했어요.》

《네 오라빈?》

《집을 지켜야지요.》

《마중은 무슨 마중… 손 얼겠다.》

백씨는 나리의 작은 손을 한줌에 꼭 쥐고 불어대고나서 《어서 가자, 어서!》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집에 누가 왔어요.》

《어떤 사람이냐?》

《웬 엄마예요. 어머니를 만날 일이 있다면서…》

《그래 기다리니?》

《안 갔을거예요.》

백씨와 나리가 도매점뒤에 있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경림이 얼굴에 검댕이칠을 해가지고 마주 달려나왔다.

《지금 오시나요?》

《오냐, 아궁이 여럿이니 얼굴꼴이 말이 아니구나.》

백씨의 등짐을 내리워 경림이가 창고에 가져가려고 한다.

《경림아, 그건 탄이다. 저기 아궁옆에 두면 된다. 손님이 왔다면서?》

《갔어요. 후날 또 오마 하면서.》

《나리야, 점심참도 되는것 같은데 밥이나 먹자꾸나.》

《네, 내가 다 해놨어요.》

나리가 팔랑거리며 부엌으로 사라지자 수건을 벗어 옷을 턴 백씨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소반을 가운데 놓고 세사람이 점심을 먹은 뒤였다.

나리는 부엌을 거두고 창고에 나가 일하던 경림이가 문밖에서 알린다.

《어머니, 손님이 오셨어요.》

《그래, 들어오시래라.》

백씨를 마주한 사람은 녀인이였다. 나이는 마흔고개를 넘긴듯 하고 고생살이에 주눅이 든 소심한 얼굴이다. 그 나이에 벌써 귀밑머리가 희기 시작했다.

《뉘신지?》

《나같은걸 얼굴이나 기억해두셨겠소.》

《하두 사람을 많이 만나다나니, 어서 앉으시라구요.》

녀인의 어진 눈빛이 백씨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지켜본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백씨는 상대가 장사흥정을 하자고 온 사람이 아니라는걸 짐작하며 물었다.

《날 모르시갔소?》

《글쎄…》

백씨는 종시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세월이 많이 갔지요. 리문리려인숙이야 생각나겠지요?》

백씨의 두눈이 서늘한 빛을 펀뜩 뿜었다. 그 집을 어떻게 잊겠는가. 성진우라는 이름이 가슴에 못박혔는데야.

《나다마다요.》

《내가 그 집에서 부엌데기노릇으로 스무해가 넘게 살아옵니다.》

《아이구나! … 내 미처 알아보지 못해 정말 안됐어요.》

리문리려인숙 식모였다.

《내가 이렇게 찾아온건…》

녀인은 저고리고름으로 코물을 닦아내며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무슨 욕을 당한걸가? 혹시 성진우 그놈이, 스무해 넘도록 부려먹고 무슨 일을 저지른게 분명하다.

여태 남의 일에 비쳐드는 법을 모르며 사는 백씨지만 속이 달아 다우쳐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말하시라요.》

《그 집안 돼가는 꼴이 하도 불길해서, 무슨 귀신이 붙은가보외다.》

《주인은 그대로구요?》

《사람 아닌 짐승이지요.》

《거길 내쫓던가요?》

《아니요. … 기가 막힌 일이예요. 아이구, 그 불쌍한걸, 열네살 먹은 처녀를 하루밤사이에 죽였수다.》

녀인은 두손으로 노전바닥을 짚으며 고개를 숙인채 어깨만 부들부들 떨었다.

백씨의 눈길이 한층 번쩍거리며 노기로 변했다.

《열네살 난 처녀란 누구고 하루밤사이에 죽였다는건 무슨 말이나요?》

잠시 마음을 진정하고난 녀인이 억이 막힌 소리를 했다.

《그 처년 무척 고왔어요. 고향은 황해도 장연 어드메라던지… 부모들이 다 죽자 열살때 홀몸이 됐다나봐요. 어떻게 살겠나요. 여기저기 흘러다니며 심부름이나 하면서 목숨을 이어왔겠지요. …》

백씨는 문득 송월이생각을 했다.

《그래서요?》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 주저앉은 곳이 여기 평양이였지요. 먹어야 살겠으니 종로쪽 음식점에서 부엌일을 도왔대요. 그러던걸 우리 주인… 그 짐승놈이 데려오질 않았겠어요. 한해동안은 나하구 같이 일을 시켰지요.

헌데 지난 가을부터 술상을 들리우는게 아니겠나요. 간판은 려인숙이라고 걸었지만 젊은 녀자들을 끌어다 돈벌이를 하는 집이 된지는 오랬지요. 사흘전…》

여기까지 말한 녀인은 창백해진 얼굴로 천정만 바라보았다.

《이름은 순애라고 해요. 그 마음씨 고운 처녀가 그만 죽었지요. … 그 원귀가 나를 여기로 보냅디다. … 거기서 돈 일곱냥 꾸자고 왔던 날… 짐승녀석이 한 말을 난 다 들었지요. … 순애는 죽었어요. 서슬을 먹고, 열네살 꽃나이였는데…》

리문리려인숙에서 생겨난 일은 이러했다.

성진우는 부엌일만 시키겠다고 순애를 데려왔지만 애초 속심은 다른데 가있었다.

조롱안에 갇힌 신세나 같은 순애의 운명은 본인자신이 모를뿐 이미 결정되여있었다.

성진우에게서 제일 시끄러운 사람은 부엌일을 맡아하는 식모였다.

성진우의 못된 버릇을 잘 아는 식모였기에 순애만은 왼심을 쓰며 늘 옆에 두고 일도 같이하고 잠도 같이 잤다.

이쯤되니 성진우로서는 욕심을 채우지 못해 발광이 날 지경이였다. 그렇다고 식모와 다투면 눈치빠른 순애가 알아차리고 집을 뛰쳐나갈수 있었다.

지키는 사람 열이 도적 하나를 막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식모가 감기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였다. 순애는 극진히 병구완을 했다. 혼자서 부엌일을 다하면서도 하루 세끼 미음을 쒀다 입에 떠넣어주고 한잎두잎 모은 돈으로 약까지 사다가 먹여주었다.

자리에 누운 식모는 미타한 생각이 들어 때없이 순애를 찾군 하였다. 무슨 일을 당할가봐 걱정돼서 그랬다.

밤손님이 많은 집이라 순애는 늦도록 부엌에서 맴돌아야 했다. 그럴 때면 물도 긷고 나무도 패며 창고도 지키는 령감이 식모대신 이일저일 도와주었다.

어찌된 일인지 그날은 령감도 없었다. 성진우가 심부름시켜 가루개쪽에 보냈던것이다.

유흥가의 밤이 깊어갈무렵 순애는 부엌에서 한가득 쌓인 그릇을 혼자서 닦고있었다.

기회를 노린 성진우가 그때 나타나서 순애에게 자기 방 술상을 치우라고 볶아댔다. 친구라는 량반들을 불러다 어느 하루 술판을 벌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술시중은 다른 녀자가 했는데 자기더러 치우라니 순애는 하는수없이 성진우의 방에 들어갔다. 함정에 찾아든셈이였다. 사정도 해보고 몸부림도 쳐보았지만 연약한 순애는 색광으로 이름난 성진우에게 짓밟히울수밖에 없었다.

식모녀인이 순애가 늦도록 들어오지 않기에 아픈 몸을 일으켜 부엌에 나가보니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참경이 펼쳐져있었다. 온몸이 만신창이 된 순애가 서슬 한단지를 다 마시고 바닥에 쓰러져있었던것이다.

식모녀인이 안아다 함께 자는 방에 눕힌 다음 의원을 부르고 약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순애는 마지막으로 정신을 차리고 죽게 된 사연을 이야기했다.

《내가 찾아온건… 거기도 젊어서 그런 치욕을 당할번 한 사람이고 제힘으로 일어나지 않았소. 아, 우리 순애의 한을 풀어줄이는 없을가. … 》

백씨의 두눈에서는 불이 펄펄 일었는데 려인숙식모가 돌아간 다음에도 한모양으로 앉아있었다.

불쌍한 남편 살리겠다고 허둥지둥 달려간 그밤, 마루우에 서서 내려다보던 사내의 모습. 그는 땅에 발을 디디고선 계집을 돈 몇잎이면 제 마음대로 주무를 노리개로 여겼다.

행상길을 다시 떠나던 날 행길에서 만났을 때에도 그는 호색한의 뻔뻔스러운 얼굴로 백씨를 되는대로 놀려댔다.

《성진우! 네가 그 이름을 가지고 사는 동안은 편안치 못한줄 알아라!》

백씨는 그때 자기가 한 이 말을 오늘까지 똑똑히 기억하고있다. 무엇을 딱히 내다보고 말한것은 아니였다. 다만 가슴에 맺힌 한이 너무 커서 죽어도 잊을수 없는 놈이기에 분기를 터뜨렸었다.

얼마나 많은 녀자들이 그 짐승한테서 물어뜯기우다 숨져가고있는가. 아, 단지 녀자라는 잘못 타고난 신세때문에 이렇게 산다니 억울한 일이 아니냐! 오늘은 순애가 열네살 나이에 목숨을 끊었다면 래일은 그뒤를 이어 또 다른 처녀들이 순정을 짓밟히다못해 세상을 저주하며 죽을것이 아닌가.

성진우, 그놈은 나 하나의 원쑤가 아니다. 살려두면 숱한 원귀를 만들게다. 이놈! 돈 일곱냥에 치욕을 당했다만 내 지금껏 번 돈을 다 내대고라도 네놈만은 그냥 두지 않을테다! …

백씨는 겨울해가 기울 때까지 별의별 궁리를 다했다. 그 짐승같은 놈을 망하게 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사밖에 모르는 백씨라 신통한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와 서뿔리 의논할 일도 못되기에 그는 혼자서 속을 끓이고있었다.

그때 장명학이 유양점과 함께 나타났다.

《아니, 어떻게 이런 집을 다 찾으십니까.》

백씨가 서둘러 일어나 장명학에게 인사를 하자 뒤따라 들어선 유양점이 비위좋게 말한다.

《백씨가 도매점을 내왔다기에 하도 신기해서 찾아왔소. 일이 썩 잘될테니 어서 주안상부터 차리시오.》

그저 저 입에서 찾는건 술이고 계집이다.

나리가 방석을 가져다놓자 어느새 유양점이 그를 쳐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야, 고것 실로 곱구나.》

《에그- 징그러운 소린 그만하구 어서 앉으시라요.》

백씨가 기겁한 소리를 내자 유양점은 요란하게 웃고나서 장명학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어찌된 일로 두 어르신네가 한시에 이렇게 오십니까?》

익살부릴줄 모르는 장명학은 유양점의 안색부터 먼저 살피고나서 말했다.

《난 견마잡이로 왔지요. 양점형이 제 혼자걸음으로는 누이를 만나기 딱하다고 하기에…》

《어르신넨 이런 자리에서까지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체면을 중히 여겨야지요.》

백씨는 조용히 장명학을 나무리는데 유양점이 어렵지 않게 끼여들었다.

《듣기가 좋소그려. 나두 그렇게 부르면 오라버니라 찾아줄라오?》

유양점의 입김이 볼에 와닿자 백씨는 옛날 일이 생각나 부끄러워 화가 나기도 하고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있는 야릇한 감정이 솟아나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얘 나리야, 이리 좀 오너라.》

찾기 바쁘게 문가에 나리가 나타났다.

《얼른 옆에 있는 음식점에 가서 안주감 될만 한것과 술을 한 둬되 사오려무나.》

《우린 술이나 마시자구 온게 아니요.》

장명학이 손을 흔들자 유양점이 혀를 찼다.

《꼬장꼬장하기란, 난 지금껏 살면서 백씨가 내는 술은 한번밖에 못 먹었소. 사내대장부 기가 뚝 꺾이면서 말이요. 오늘이야 마음이 내켜 주는 술인데 마시세나.》

《처음엔 내키지 않아 주는 술 마셨소?》

말꼬리를 잡힌 유양점이 《허어- 어떻게 토설한다.》 하며 백씨를 넘겨다보자 녀자쪽에서 웃어넘기기 힘든 대답이 나왔다.

《훔치려다 걸렸댔어요. 그런걸 내가 마음써서 들게 했지요.》

《하하하, 림기응변에는 녀자를 당할 사내가 없다니.》

유양점이 수염을 쓸며 웃어대자 진중한 장명학이 신통치 못한 소리라 여겨듣지 않으며 말했다.

《양점형, 어서 그 가지고온것이나 내놓소.》

백씨는 지금도 유양점이 장명학과 함께 온것이 의문스러운지라 무슨 까닭인가 하여 기다렸다.

유양점은 서두르지 않으며 그사이 자기가 펼쳐놓은 토목공사판이야기를 했다. 밑천을 마련해가지고 대동, 증산, 연안, 배천까지 오르내리며 물보(저수지)만 해도 자그만치 일곱개나 막았고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는 자랑이였다.

《내 도가녀석한테 멱살을 물리웠을 때 백씨가 도와주지 않았소. 그때 진 빚으로 말하면 순수한 빚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내 체면엔 망신스러운 일이여서 지우인 명학과 함께 왔소. 이게 본전 3백냥이고 리자는… 좌우간 3백냥으로 쳐서 6백냥을 가져왔으니 받소.》

백씨는 유양점에게서 그 돈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천냥을 하루아침에 날리고 허덕일 때 백냥만 꿔달라던 유양점의 모습이 속에 걸려있는 그다. 흔하게 눈앞에서 돌아치는 남자들은 많아도 그에게 있어서 유양점은 다른 사내가 분명했다. 미묘한 저 그림자가 일생동안 따라다닐것 같다. 그래도 싫지 않으니 이 심사는 무엇인가.

백씨는 속에서 차오르는 밀물을 누르며 웃음절반으로 말했다.

《그걸 아직도 잊지 않았다니 양점어른을 내가 잘못 보지는 않았습니다.》

《허허, 이 질긴 가죽을 벗기우는가 했는데 너그럽게 받아주니 고맙소.》

나리가 술상을 차려 들여왔다.

《원체 린색한 년이라 차린건 없어요.》

백씨가 두사람의 잔에 술을 부었다.

마음맞는 두 사내는 권커니 작커니 하며 잔을 비웠다.

《우리 누님이 주는 술은 정말 달구려. 인생을 새기게 해주니 술이 아니라 글이요, 평양녀인의 억센 기개를 깨닫게 해주니 문장이라-》

장명학이 시조와 같은 말에 유양점이 질세라 운을 맞춰 엮어댔다.

《술은 술이로되 종아리 맞은 회초리요, 마시면 마실수록 이루지 못한 옛시절이 우는 술이로다.》

한편은 뜻을 담고 한편에선 제 심사를 읊조리는 소리다.

《아버님은 편안하신가요?》

백씨가 장명학에게 묻는다.

《네, 무고합니다. 은둔지사가 되려는지… 별당에서 고사만 읽으십니다.》

《좋은분들이 장수해야지요.》

술기가 오르기 시작한 유양점이 고개를 끄덕대고나서 수염을 쓸어내린다.

《우리 스승처럼 고결하고 청렴하신분은 자고로 드물거외다. 이 또한 평양의 자랑이지요.》

백씨는 룡산걸음을 할 때 장규현을 만나 인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생각없이 물었다.

《어르신네들은 리문리려인숙 주인량반을 아십니까?》

그 물음에 장명학과 유양점은 술잔을 내려놓고 마주보았다. 유양점의 얼굴이 먼저 찌그러지는게 알린다.

《성진우… 천치나 다를바 없는 명물이지. 그눔이 려인숙간판을 내걸고 계집팔이를 한다네그려.》

유양점이 욕을 해대자 장명학이 응수한다.

《사람 돼먹길 그런걸 어찌겠소. 향목서원을 더럽히는 개자식이요. 돈에 미쳐 포주가 되였으니 학문이 사람을 잘못 기르기도 하는가보오.》

성진우를 알아도 잘 아는 두사람이다.

마침이라고 생각한 백씨는 이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리문리려인숙에서 있은 일을 자초지종 이야기했다.

대바른 장명학은 그 조용한 성미에도 주먹으로 노전바닥을 내리쳤다.

《성진우가 살인귀로 변했구나! …》

주색으로 살아온 유양점은 제가 저지른 일같이 여겨지는지 고개를 제끼고 입만 쩝쩝 다시였다.

《내 그놈을 기어쿠 망하게 해야겠으니 어르신네들이 나를 도와주십시오.》

백씨의 말이 하도 간절하여 유양점은 이상하게 여기기까지 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드문가. 헌데 백씨가 무슨 까닭에 저렇게 독을 쓰는가. 자기가 당한 일도 아닌데…

《무슨 한이라도 품으셨소?》

《이채로 죽으면 눈감지 못할 원한이예요.》

《이야기를 해주시구려.》

《도와만 주십시오. 내 몇천냥이라도 댈테니 그놈이 거렁뱅이로 빌어먹구 사는 신세가 되게만 해주십시오.》

두사람은 백씨의 말에 놀랐다. 사람을 죽게 만든 놈이니 감영에서 끌어다 참형을 내리게 하면 될텐데 무슨 까닭에 꼭 그 많은 돈을 들여 망하게 하려 하는가.

장명학이 설명해주었지만 백씨는 머리만 저어댔다.

《꼭 내 돈으로 망하게 만들고싶어 그럽니다.》

《양점형, 뭐 무슨 수가 떠오르는게 없소?》

유양점은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감영의 힘은 내가 쉽게 빌릴수 있지만…》

백씨는 이왕 나선 걸음이라 돌려세울수 없었다.

《그놈이 려인숙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속내는 알수 없을가요? 방종한 놈인데 빚진것이 왜 없겠습니까. 그놈 속내를 알면야 무슨 방도가 설게 아닙니까?》

장명학이 머리를 끄덕대며 유양점을 바라봤다.

《양점형이 나서보는거외다.》

《내가?》

유양점은 백씨앞인지라 제 입으로 나서겠다는 말을 하기가 참으로 거북했다.

백씨가 유양점이 가져온 돈을 그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이건 받자던 돈도 아니니 그대로 가져가십시오. 려인숙에 드나드는 비용은 조금도 걱정마시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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