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11

 

자산면 사인리에서 이틀 묵으며 평양에서 가져온 물건의 절반이상을 팔아넘긴 백씨는 사인장에서 새 상품을 사가지고 순천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수수가을하는 계절이 왔다.

멀고가까운 산들에 철이른 단풍이 불그레한 빛을 띠고 우거졌던 푸른 수림이 성기여가는게 확연히 알린다.

바람이 불어칠 때면 황토길에 먼지가 자욱히 피여오른다. 눈조차 뜨기 힘든 그속으로 백씨는 씨엉씨엉 걸어갔다.

천냥을 잃고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난지 다섯해가 되는 사이에 10년을 봉창하고도 남은 그였다. 버는족족 땅을 샀고 땅값이 오를 때를 놓치지 않고 팔아 더 많은 땅을 샀다.

행상과 함께 땅도매를 시작한 그는 점차 장사리치를 깊이 깨닫게 되였고 제나름의 치부방식을 갖추게 된것이다. 수십정보가 넘는 땅이 그의 수중에서 돈으로 되기도 하고 다시 더 넓어진 땅으로 변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부동산매매라는것을 알리 없는 백씨였다.

장사길도 열리고 돈이 많아지자 그는 륙로문거리에 도매점을 내올 궁리를 하고 큰 창고 두개가 달린 기와집 한채를 샀다. 대동강나루터가 코앞이니 배로 나르는 짐들을 넘겨받아 도매업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였다. 이번 행상길을 걷고나서는 그 일도 시작할 생각이지만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워 사람을 물색하는중이다.

도매점을 열자면 적지 않은 밑천이 있어야겠기에 송산에 있는 10정보가량의 땅을 팔자고 찾아가보니 그새 땅값이 엄청나게 떨어진데다 사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본전을 찾기는커녕 절반도 더 손해보는 일에 부닥친 백씨는 눈앞이 아뜩해났다. 여기서만도 만냥이 넘는 손해를 봐야 했다.

행상벌이는 고작해서 수백냥이 오가는 장사지만 땅도매는 이렇듯 한시에 만냥이상 돈이 수중에 들어오기도 날아가버리기도 하는 큰 장사여서 일을 그르치면 한지에 나앉게 되는 판이라는것을 때늦게 깨달은 백씨는 가슴이 활랑거렸다.

백씨는 허둥지둥 토지가 인연이 되여 가까이 지내는 허순백을 찾아갔다. 허순백도 원래 몇평 안되는 땅마지기를 가지고 밥술이나 들던 사람인데 물고기장사를 하여 번 돈으로 전답을 넉넉히 갖추고 제힘으로 살아가는 근실한 농군이였다.

집마당에서 연장을 손질하던 허순백이 백씨를 맞았다. 갑자기 뛰여든 백씨의 행색이 하도 말이 아니여서 성미가 온순한 사내는 차마 먼저 말을 뗄수 없었다.

《이 일을 어찌면 좋아요.》

백씨는 같은 말만 되뇌이다가 얼마쯤 지나서야 찾아오게 된 사연에 대하여 한숨에 섞어 이야기했다.

보습날을 갈아대던 일을 밀어놓은 허순백이 고개만 주억대며 대통에 담배를 담아 붙였다.

《순안쪽에 금맥이 터져 광주가 생겨나고 인부를 모집하니 벌이가 좋다는 소문이 났수다. 농가들에서 한다하는 장정들은 다 금전판으로 가고 늙은이만 남은데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땅을 버리고 집까지 이사했지요. …》

생계를 전답에 걸고 지주들의 등쌀에 타작마당에서조차 자식들에게 겨죽을 먹여야 하는 농사군들이 벌이가 좋다는 금전판으로 가버려 땅이 남아돌아가게 되였고 땅이 남아돌아가니 결국은 눅거리로도 팔리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된것이다.

땅도매는 어느때나 손해보지 않는 안전한 장사로만 여겨온 백씨는 뜻밖의 시세변동에 억이 막혔다. 그러니 도합 2만냥이 넘는 큰돈이 땅속에 묻혀버리는게 아닌지 모른다. 진작 형세를 내다보고 팔아치웠더라면 오늘같은 일을 당했겠는가.

《그러니 이 일을 어쩌면 좋나요?》

제노라하는 장사군인 백씨였지만 타산이 텅 빈 머리를 감싸쥔채 맥없이 물었다.

《어쩌겠수. 기다려야지요.》

《기다리다니요?》

허순백은 제 생각을 터놓았다. 사람들중에는 일하기 싫고 벌이가 좋은 일감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횡재를 바라는노릇인데 세상에 품들이지 않고 돈버는 재간이 어디 있겠는가. 금전판이라고 인부들에게 품삯을 먹고 남을만치 줄리는 만무하다. 농사짓기보다 못한 일이라는것을 알게 되면 농군들은 제땅으로 돌아올것이고 돌아오면 땅이 모자라는 일이 생겨나기마련이다. 땅값이 오르고내리는것은 이런 까닭에 빚어지는것이 아니겠는가.

듣고보니 그럴듯한 말이여서 백씨는 허물어질것 같던 마음을 간신히 다잡았다. 그사이 자기는 맹목적으로 땅을 팔고샀은즉 정말 우연히 돈을 번셈이다. 시세를 내다볼줄 아는 눈이 자기에겐 없었다.

《작년에만 팔아넘겼어도 지금같이 되지는 않았겠지요?》

《그 이전해부터 순안금전판이 농군들을 홀렸수다.》

《금전판이 땅값 내리게 할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나요?》

《허허, 내 눈에도 알리는데요. 일손이 어데 있나요? 백성들은 거의나 농토에 명줄을 걸고 살지 않수. 농군들이 농토를 떠나는 일이 생기면 땅은 남아돌아가고 값은 떨어지기마련이지요.》

《그럼 좀 귀띔이라도 해주실게지. …》

백씨의 나무람에 허순백은 사람좋게 웃었다. 타고나기는 두사람 다 가난을 등에 진 인간들이였다. 허순백이 제 뼈심으로 농사를 지어 자수성가했다면 백씨는 뼈를 깎는 행상길에서 돈을 모아 오늘에 이르렀기에 그들은 서로 마음이 통했다.

《나야 백씨는 막히는 일이 없는가 했지요. 허허.》

《이번엔 아예 망한가봐요.》

《땅은 다른 물건과 달라 부쳐먹으려는 사람이 꼭 나지우다. 그러니 어떻게든 본전은 잃지 않겠지요.》

백씨는 대답없이 힘겹게 일어섰다.

허순백의 말이 옳다고는 여겨지지만 도매업을 하자고 집까지 갖춘 지금 돈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어데서 돌려쓴다 해도 그 돈은 빚이다. 지금껏 장사를 하며 빚이라는 말조차 모르는 그였다.

며칠동안 궁리하던 끝에 그는 종시 용단을 내리고 2만냥 빚을 지였다. 리자까지 붙여 한해후에는 2만 5천냥을 갖다바치는 놀음을 하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도매업에서 솟아나지 못하면 망하는 판이라 그는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오늘까지도 이를 악물고 행상길을 줄달음치고있는것이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도매업이여서 사람을 물색하던 백씨는 문득 송월이생각이 났다. 그래서 이번길에 박천까지 다녀올 생각인 그였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무렵에야 백씨는 오산어구에 이르렀다. 수십리길을 쉬지 않고 걸은지라 어지간히 힘이 들어 고개마루에서 다리쉼이나 하자고 짐을 내려놓았다.

사인리로부터 여기까지는 거의나 평지길이지만 순천읍에 들어서자면 고개만도 두세개를 넘어야 한다. 참나무그늘에 자리를 잡으려던 그는 땅에 널린 도토리알들이 보이자 줏기 시작했다. 도토리 잘 열린 해에는 농사가 안된다는 말이 있다.

백씨는 자리에 앉으며 텅 비여가는 구릉지대의 밭들을 바라보았다.

척박한 땅에서 자란 수수가 벌거우리한 이삭머리를 바람결에 저어댄다. 하나같이 여윈 수수대들이 바삭바삭 말라가는게 알린다. 이밭저밭에서 농사군들이 맥없이 낫가락을 휘두른다. 흉년이니 이해 겨울을 넘길 근심이 잔뜩 실린 모습들이다.

백씨는 손에 담아쥔 도토리알들을 굽어보며 이게 농량에 큰 보탬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사람도 초목처럼 겨울 한철은 자는 법을 배웠으면 좋으련만 먹어야 살고 먹어야 봄을 맞는게 사람이다. 흉작을 준 땅을 원망하면서도 그 땅에 씨를 묻어야 생계라는것이 유지된다. 갖은 고역과 고달픔에 시달리며 늙어가는것이 평백성이다. 자기 나이도 어느덧 서른세살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시름어린 웃음을 짓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건너편 산기슭에 찔광이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생기없는 잎사이에 말라드는 열매들이 듬성듬성 매달려있다.

백씨는 찔광이열매가 눈에 뜨이자 8년전 일을 더듬기 시작했다.

순천장에서 있은 일이다.

그가 날라온 행상품은 서해의 말린 대합, 맛 같은 조개류들과 조기며 칼치 같은것이여서 제값에 다 팔았다. 흥정한 돈을 받아 전대에 넣고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손이 동전잎을 번개같이 덮쳐가기에 백씨는 그만 깜짝 놀랐다.

어느 장마당에나 소매치기군, 덮치개가 있다지만 이렇게 눈뜨고 돈떼워보기는 처음인 그여서 고개를 돌리니 붐비는 사람들사이로 몽당치마에 맨발바람인 쬐꼬만 계집애가 허겁지겁 도망치는것이 보였다. 설마 어린 계집애가? …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뼈심이 든 동전잎을 눈 펀히 뜨고 빼앗겼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사람들속을 마구 헤쳐나갔다. 걸음이 빠르고 근력이 좋은데다 장마당인파를 헤치며 사는 녀자라 백씨는 얼마 안되여 계집애의 덜미를 잡았다.

《요년, 어데서 배운 손버릇이야?!》

붙들린 계집애의 얼굴은 온통 때국물투성이인데 오목눈 한쌍이 백씨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서 내놔!》

《…》

《어서! …》

《…》

두주먹을 꼭 움켜쥔 계집애가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으며 말똥말똥 쳐다보는데 더욱 화가 난 백씨는 고사리같은 손을 꼬집어 펼쳤다. 동전 한잎이 새까만 줌안에서 나타났다.

《쬐꼬만 계집애가 도적질부터 배워?! …》

《…》

길가던 장군들이 무슨 구경거린가 해서 모여들어 보다가 혀를 찼다.

《동전 한잎에 뭘 그다지, 쯧쯧.》

《불쌍하지도 않으시우. 동냥이래도 줄텐데.》

《저 내인은 아마 자식도 없는가보우.》

보는 사람마다 백씨를 나무란다. 자식도 없는 모양이라는 말에 그는 자기도 모를 감정이 울컥 북받쳐 계집애의 귀뺨을 후려갈겼다.

《썩 사라져! …》

동전 한잎을 기어이 되찾은 백씨는 사람들의 뒤소리를 들은척도 않으며 걸음을 옮겼다.

동냥을 주라구? 누가 나한테 그런 동냥을 줬더냐. 하늘같이 믿고산 남편이 병들어 누웠을 때 내가 걸은 걸음이 동냥길이 아니였더냐!

그는 계집애의 땀에 젖은 동전잎을 움켜쥔채 솟구쳐오르는 설음을 짓씹으며 순천장을 떠났다.

한해후 박천장에서 백씨는 우연히 그 계집애를 또 보았다. 이고 지고온 짐을 황철나무곁에 내려놓고 땀을 씻으며 둘러보는데 떡장사군들의 뒤쪽에 앉아서 뭔가 정신없이 먹고있는 낯익은 계집애가 보였다. 손버릇 나쁜 애가 또 뭘 훔쳐먹는게지 하고 생각하며 다가간 그는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먹고있는것이란 찔광이였다. 계집애는 굳은 씨도 개의치 않고 마구 삼켰다.

백씨는 행상길에서 자기밖의 사람에 대한 동정심을 처음으로 느끼였다. 떡장사, 지짐장사들이 줄을 치고 앉아있지만 불쌍한 계집애의 정상은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다. 얼마나 무정한 세상인가. 저 조막만 한 손에서 동전 한잎마저 기어이 뺏아낸 자기다. 그때 그 돈으로 먹고싶다는것을 사서 쥐여주었더라면 지금같이 아픈 후회는 없었으리라.

백씨는 무작정 계집애의 손목을 잡고 자기 짐곁에 와서 앉았다.

《너 어데서 사니? …》

《…》

《집이 없니?》

《…》

《아버지랑, 엄마도 없구?》

《…》

고개를 옆으로 돌린 계집애는 한마디 대답도 안했다. 벙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였다.

《몇살이냐?》

《여덟살…》

그래도 제 나이는 잊지 않고 대꾸하는 계집애를 지켜보며 백씨는 빙긋이 웃었다. 보통 여물지 않았다. 집없는 떠살이가 아이를 지금같이 만들었을것이다.

《똑똑하구나, 나이를 아는걸 보면. 이름은 뭐지?》

《송월이야요.》

똑똑하다는 칭찬에 마음이 풀린 계집애가 이번에는 제대로 이름을 말하며 처음으로 백씨를 마주보았다. 옷이 람루하고 몸을 씻지 않아서 그렇지 찬찬히 여겨보니 반듯한 이마며 땀이 돋은 귀여운 코마루랑 초롱초롱한 오목눈이 참으로 사랑스럽다.

《너 내가 누군지 아니?》

《…》

송월은 고개만 가로저었다. 1년전 순천장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할리 없는 아이다.

《너희 집은 어데 있었니?》

《…》

송월은 손가락을 펴들고 알지 못할 곳만 가리키면서 대답을 피했다.

《거기에 친척들이 있겠지?》

《…》

이번에도 머리만 가로흔든다.

백씨는 송월을 강에 데리고나가 목욕을 시킨 다음 점포에서 새옷을 사입혔다. 깨끗이 차려놓으니 아이의 모습은 판판 달라졌다. 한창 부모의 손이 가야 할 나이에 길거리를 헤매니 아이꼴이 뭐가 되겠는가.

《너 뭘 먹고싶니?》

송월은 자기가 입은 새옷이 너무 신기하여 그냥 쓸어만질뿐 먹고싶은게 있다는 말은 안했다.

백씨는 송월이와 수수지짐으로 점심을 굼때고나서 그에게 짐을 지키게 하여보았는데 얼마나 이악스레 잘 지키는지 혀를 차게 했다. 멀리서 지켜보느라니 물건을 살 사람들이 와서 들여다보면 송월은 강아지새끼같이 뱅글뱅글 돌며 대답도 하고 소리도 질러댔다.

《네 엄만 어데 갔냐?》

《우리 엄마 아니야요.》

《그럼 이 짐은 누구거냐?》

《우리 아지미거야요.》

《어디 좀 보자꾸나.》

《다치면 물어놓을테야. 다치지 말라!》

백씨가 슬렁슬렁 자기 짐쪽으로 걸어오는데 이런 소리가 꼬리를 물고 들려왔다.

행상녀인이 데리고다니는 계집애가 곱기도 하거니와 하도 똑똑하고 야무져 일부러 와서 보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그러다나니 백씨의 물건들이 잘 팔릴수밖에 없었다.

백씨는 이따금 송월을 꼭 그러안으며 속삭였다.

《어쩌지? 너와 헤여져서는 못살것 같구나.》

《나 아지미하구 같이 다닐래요.》

《정말?》

《네.》

《하긴 나두 8살때부터 집안일을 혼자서 다했다.》

《나도 할수 있어요.》

《용쿠나, 우리 송월이가…》

그러나 송월의 말을 들어줄수 없는 백씨였다. 멀고먼 행상길에 어린것을 데리고다닐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전같이 길가에 버려둘수 없는 그여서 생각이 많았다.

박천쪽에서 팔고사기를 끝낸 백씨는 어느날, 행상길에 낯을 익힌 대령강객주집 주인을 찾아갔다. 남편없이 살아가는 같은 처지의 젊은 과부인것으로 하여 이 고장에서 의사소통이 그중 잘되는 녀자다. 나이는 백씨보다 여러살 우이지만 기생살이를 해서인지 몸을 깨끗이 거두어 손아래같이 보였다.

《이게 누구요? 평양 백과부가 오랜만에 내 집 대문을 넘어서는구려.》

수다스러운 주인이 부들부채를 흔들며 반가운 소리로 맞아주었다.

《편안하셨나요?》

《그럼, 헌데 요 계집애는 누군가? 절개가 굳다는 백과부가 외도질해서 만든 애라면 내가 왜 몰랐을가?》

《행상길에 번 아이외다.》

한때 행수기생살이도 한 주인은 잘 생긴 계집 고르는 솜씨가 있는지라 송월을 뜯어보다 냉큼 안아 들어올렸다.

《크면 사내들 염통을 뽑겠네.》

송월은 자기를 곱다는 사람은 다 좋은지 처음 만난 녀자의 품에 안겼어도 얌전히 있을따름이였다.

《객주집일이 잘되나요?》

《고객이 적은게 탈이지. 하루이틀 묵어가기는 하지만 푼전이 아까와 몸살하는 사내들만 기여든다네.》

《한푼한푼 버는게 돈이지요.》

《요걸 손목잡고 행상길 다니나?》

주인녀자의 목소리에는 송월이를 탐내는게 알렸다.

《얼마나 똑똑하다구요. 짐도 잘 지키는데다 곁에서 창가까지 불러 손님이 끓이게 한다우.》

《그래두 행상짐우에 올려놓고 다녀야 할걸세.》

《애가 몇근 나가겠다구요.》

녀주인이 송월의 볼에 입을 쪽 소리나게 맞추자 계집애는 캐드득 웃었다.

《이애를 나한테 맡기게나.》

《원, 무슨 말씀을… 안돼요.》

《내 잘 키워서 시집까지 보내주지 않으리. 자식없는 내가 수양딸로 삼구싶어서 그러네.》

《내가 몰라서요, 키워서 사내들 술심부름시키자는걸.》

《저렇게도 절벽이라구야. 손이 모자라면 나도 술상을 드는데 그게 무슨 큰일인가.》

백씨는 대답없이 박천장에서 산 행상짐을 정리하여 싸며 속으로 궁리했다. 그래만 준다면 좀 좋겠는가. 이 고장에 내 걸음이 잦으니 한해에 몇번씩 만나보리라. 다만 주인녀자의 속심이 걱정되여 용단을 못 내렸다.

《송월아, 어서 이리 오렴.》

백씨가 손을 내밀자 송월은 그의 품에 안겼다.

《룡강 지나서 있는 삼화려각 안주인이 무던하기에 데려가려는 길이예요.》

《그럼 내 속통머린 못돼먹었다는건가? 섭섭하구만. 난 그래도 임자를 동생같이 여기는데. …》

《그럼, 내 살붙이로 여기고 돌봐주시려우?》

《안할 걱정…》

《송월아, 너 저 엄마와 예서 살거라. 길가에 뛰쳐나오면 안돼. 알겠지?》

손가락을 입에 문 송월이가 백씨를 쳐다보는데 그 어린것의 눈에 가랑가랑 맺힌 눈물이 가슴을 찌르르하게 하였다. …

세월이 흘러 송월의 나이도 열다섯살이다. 작년에 만나보니 처녀꼴이 다 잡혀서 아이부르듯 하게 되지 않았다. 이번 걸음에는 꼭 만나볼 결심을 한 백씨는 짐을 이고 지고 일어섰다.

순천읍경내에 들어서자면 오산골짜기의 지름길을 타야 제일 빠르겠기에 백씨는 무거운 짐을 진채로 험한 산길을 톺아오르기 시작했다.

큼직한 가죽중태기에 든 놋그릇개비들이 무거운데다 잔등을 긁어댔다. 일명 《붓배기》라고 부르는 놋그릇들속에는 대접, 밥그릇, 종발, 술잔 같은것이 있어 박천장에서는 희귀한 물건으로 흥정되여 잘 팔렸다.

얼핏 바라보면 눈에도 차지 않는 야산같지만 골안은 깊고 길을 걷기가 여간만 불편하지 않다. 게다가 가파롭고 골짜기길이 길어서 백씨의 힘으로도 단숨에 넘기는 힘들것 같았다.

오불꼬불한 소나무들에 휘감긴 머루와 다래넝쿨이 바람결에 흐느적인다. 이따금 참나무며 단풍나무, 고로쇠나무 같은 활엽수들이 보이지만 태반이 소나무와 노가지나무천지인데 가시돋힌 분지가 그속에 섞여있다.

고개를 쳐드니 짐작으로도 령길중턱에 이른게 알린다. 맞춤한데 자리를 잡고 쉬자고 마음먹던 백씨의 눈길이 한곳에 가서 멎었다.

스무걸음쯤 되는 웃쪽에 바위를 베고 웬 사나이가 자고있다. 갈로 엮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웠다. 인적없는 골짜기에서 사내와 마주친다는게 어딘가 께름하여 선채로 주저하던 백씨는 마침내 짐을 내리웠다. 돌아설수도 없는 길이다. 사내가 일어날 때 따라서 가는수밖에 없다.

이상한 불안감에 빠진 그는 사위를 둘러보다 등에는 바위를 의지하고 앞은 열린 곳을 찾아서 앉았다. 골짜기길로 사람들이라도 나타나면 좋으련만 골안에는 어수선한 바람소리뿐이다.

머리수건을 벗어 땀을 훔치던 백씨는 시퍼런 비수 세개가 자기를 겨눈채 번쩍거리는통에 기겁하여 소리질렀다.

《사람 살려요! …》

《이년! 여기서 소리질러야 쓸데없다. 어서 돈과 물건을 내놓고 냉큼 사라져!》

백주에 복면까지 한 세놈의 눈알이 살기를 뿜는다. 돈과 물건을 넘겨다보고 덤벼든 놈들이고보면 사정해보았댔자 소용이 있을상 싶지 않았다. 내가 이 골짜기에서 괴한들의 칼에 맞아 다 사는가보구나 하는 생각이 치받치자 백씨는 살아 눈뜬채로는 이 무리들한테 한푼도 내놓지 않겠다는 독한 마음을 먹었다.

《나라는게 행상아낙네라 무슨 돈이 있겠나요?》

《그년 주둥이질일세. 아예…》

《가만! 네년이 소문난 행상이라는걸 모를줄 아느냐? 뒈지지 않겠거든 어서 내놔!》

그러니 이놈들이 자기뒤를 한두번만 쫓지 않았을게다. 생심을 먹고 기회를 노렸으니 물러설리 만무하다.

《설사 돈이 있다 해도 너희들에게는 못 내놓는다.》

시퍼런 칼끝앞에서 백씨는 죽음을 각오하고 말했다.

《이년, 살고봐야지. 그깐 돈 몇푼에 목숨을 내놓는단 말인가?!》

《내가 죽으면 가져가라. 살아서는 못 준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이 이런짓에 재미들어 사람목숨을 걸고 더러운 벌이를 계속할게 아니냐!》

《좋다, 소원대로 해주마!》

백씨는 눈을 감고 가슴에 칼이 박히기만 기다렸다.

어디선가 숲을 헤가르는 바람소리가 들리더니 강도들의 칼이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바위돌에 부딪쳤다. 헐떡거리는 숨소리,

《얏!》 하는 소리에 잇달아 비명이 울린다.

백씨는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운채 무릎에 고개를 박았다.

사람목숨쯤은 어렵지 않게 끊어버리려들던 짐승같은 무리들이 갑자기 저희들끼리 싸움질을 벌리니 어찌된 일인가.

회오리바람이 일 때마다 급소를 맞은 괴한들이 꺼꾸러지고 나딩구는것이 얼찐얼찐 보였다.

《무릎을 꿇어라!》

벽력같은 고함소리에 놀라 백씨도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등에 삿갓을 매단 사나이가 피투성이된 강도 세놈을 마주하고 섰다.

《알만 하다. 네놈들이 순천에서 의주까지 잠상물건을 날라주는 무리였구나. 돈냥이나 있는 녀석들이 행상녀인을 털려고 하니 그 속심 실로 고약하다. 각기 제 칼을 집어들라!》

혼이 빠진 세놈의 강도들은 시키는대로 제 칼들을 찾아들었다.

《사내라면 죽을줄도 알아야지. 면바로 자기 염통을 찔러야 한다!》

《살려주시우… 용서하시우다!》

《그따위 담이나 가지고 이런짓을 한단 말이냐?! 더러운 놈들! 칼을 놓고 당장 사라져라!》

금시 살인칠것 같던 놈들이 놀란 짐승처럼 숲속으로 사라지자 갓 쓴 사나이는 힘도 별반 들이지 않고 강도들의 칼을 메주밟듯 하여 동강내버렸다.

얼이 나가 앉아있던 백씨는 이름없는 골짜기에서 만난 귀인과 눈길이 마주치자 놀람을 터치였다. 상투도 올리지 않은 스무살미만의 끼끗한 젊은이였던것이다.

《다시는 무인지경 이런 길로 다니지 마십시오.》

젊은이는 삿갓을 쓰자 제갈길로 가버릴 잡도리다.

《기왕 목숨을 건져주었는데 이 고개만… 함께 넘어주세요. …》

강도들의 칼끝앞에서는 두려움없이 제 할 말을 다하던 백씨가 돌연 겁을 내며 황황히 사정했다.

《갑시다.》

놋그릇개비가 든 가죽중태기를 짚검불같이 다루어 어깨에 멘 젊은이가 앞섰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데서 사십니까?》

《저 말인가요? 평양에서… 평양 박석골에서 사는 백씨라구 합니다.》

젊은이는 무슨 영문인지 고개를 쳐들고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 혼자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나도 평양에서 삽니다.》

산길에서 한고장사람을 만난 기쁨과 안도감으로 백씨는 그제야 눈굽을 훔치며 따라섰다.

《그런데 어데로 가는 길이나요?》

그 물음에 젊은이의 낯색은 금시 달라졌다. 열기띤 두눈에서 시퍼런 불이 일었다. 묻지 않을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자 백씨는 변명조로 중얼거렸다.

《내가 공연히… 남정네의 걸음을 물어서…》

《내 걸음이 남다른것은 사실입니다. 살인하러 가니까요.》

《예?! …》

백씨는 이 젊은이도 강도나 다름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 두다리가 후들거렸다. 사람죽이는 일쯤은 닭잡듯 할 그의 기상이 무서웠다.

《내 형님이 친척집이 있는 박천에 갔다가 그곳 관가의 형방이라는 놈한테 아무 죄도 없이 끌려가 매맞고 죽었습니다. 불쌍한 형수와 조카를 남겨둔채 말입니다.》

백씨는 그의 입에서 박천군 원형방소리가 나오기에 기가 막혀 한숨을 내쉬였다. 두달전 그 형방놈에게 걸려들어 자기도 욕을 당할번 하지 않았던가.

《박천 형방이라면…》

《압니까?》

《알기까지야… 그저 짐승보다 못한 놈이라는것만은…》

《내 그놈을 기어이 복수하고야말렵니다.》

백씨는 그가 죽을 각오를 하고 이 길에 나섰으며 처참한 죽음이 뒤따르게 되리라는것을 의심치 않았다. 원형방같이 탐욕스러운 놈을 없애치우면 백성들의 쌓인 원한도 풀리겠구나.

고개를 넘어서니 룡지동이 내려다보였다.

《난… 저 마을에 들렸다 가겠어요.》

《그러니 다 왔군요.》

백씨는 걸어오며 전대에서 꺼낸 돈꿰미를 청년에게 내밀었다.

《부디 조심하시고… 작아도 이 돈을 받아쓰세요. …》

청년은 백씨의 성의를 거절하며 조용히 말했다.

《우리 평양택견들은 까닭없는 돈은 받지 않습니다.》

《까닭이 없다니요? 내 목숨을 건져주지 않았나요.》

《우리 택견들은 불의와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니까요. 안녕히 가십시오.》

삿갓 쓴 청년은 바람소리를 내며 바위와 바위를 날개라도 달린듯 휙휙 날아넘어 박천쪽으로 향했다.

백씨는 자기가 만났던 귀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자리에서 움직일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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