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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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진두장은 서도지방의 향시(지방시장)라지만 순천, 개천장과 어깨겨루기를 하는지라 의주와 서울, 삼남일대와 함경도에서까지 모여들어 상품교역이 활발히 진행되고있었다.

명색이 향시지 삼남지방의 각종 종이들이 박천장을 거쳐 당시 서북지구의 종교전파지며 선진교육의 앞장에 선 선천과 정주로 넘어갔고 호남지방의 죽기, 목기, 세렴(대발), 룡궁의 돗자리와 구례의 유기, 담양의 부채, 통영의 갓과 라전의 칠기, 령남의 빗, 함흥의 붓, 해주의 유매먹 같은 지방특산들이 모여 넘치는데다 청나라의 당목과 비단, 문방구류와 아라사의 직물, 털제품, 석유, 양초 같은것까지 나타나 소상인들과 행상들의 흥정은 열기를 띠였고 재력이 있는 큰 상인들은 골방에 앉아 술판을 펴놓고 일확천금을 노린 약조로 밤가는줄 몰랐다.

신사년(1881년) 여름밤, 대령강기슭의 객주집 조용한 방에 세 사나이가 술상도 없이 마주하고있었다.

차림새가 각이한 이 사람들은 저들의 말을 누가 들을가봐 저으기 경계하며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다가는 멈추고 바깥동정에 귀를 기울이군 한다.

좌중에 양복을 차려입은 사람이 경상(서울상인)이라는 외피를 쓴 서필이다. 화제의 주인은 그였다.

《일본은 <명치유신>이후 문호개방을 하였으며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급속히 진보하는데 조만간 <동아의 맹주>가 될 야심이요. 이에 비하면 우리 왕정은 보수적이고 완고한데다 우매하기까지 하여 나라의 앞날은 지극히 어둡소. 시국은 우리도 국정을 개혁하고 세계와 발맞출것을 요구하며 이 요청에 대답코저 개화세력이 <충의계>를 내온것이니 여기 모인 양점이나 원국씨도 뜻을 같이해주어 참으로 기쁘오.》

비단보료에 앉아 틀진 몸을 벽에 기댄 유양점은 서필의 말을 들을뿐 얼굴색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그의 심중은 서필이가 한쪽에서 대세를 강론하는데 자기는 듣고있는 꼴이라 속은 편안치 않았다.

서필의 사람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다. 경기도 양주군의 량반자손인 그는 다섯살때 천자문을 떼고 열살전에 사서를 통달한 신동이로 가문에서 떠받들리였으며 후날 평양의 향목서원에서 장규현의 문하에서 유양점과 함께 글을 배웠다.

머리가 총명하고 사리와 타산이 밝은 서필은 젊어서부터 세력균형에 대한 감각이 류달랐다. 그가 서있는 편은 학문에서뿐만아니라 재력에서도 강했다. 그렇다고 세도줄이 없는 참봉집안에서 그의 뒤를 든든히 대준것도 아니니 언제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강한 쪽에 가붙을줄 아는것이 서필의 타고난 기질이였다.

과거를 보았더라면 괜찮은 벼슬이 차례질수 있었던 그였지만 공짜로 챙기게 되는 다른 나라의 귀물들에 대한 욕심으로 통관길에 올라 사신을 따라다니였다. 그래서 청나라와 왜의 문물을 그만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유양점은 서필의 곡진한 요구도 있고 국정개혁은 불가피한 대사임을 인정하였기에 《충의계》에 들긴 하였으나 개화세력의 대의명분이 어떻게 이루어질것인가에 대한 확신을 가질수 없어 반신반의하며 따라걷는 형편이다.

당목바지저고리에 비단조끼까지 걸친 도원국이 그 쥐눈으로 두사람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핀다. 자기같은 상놈이, 의주 갓바치 아들이 개화파라는 세도줄과 손을 잡았으니 거사만 성사되면 벼슬은 그만두고라도 나라가 운영하는 큼직한 장사에 끼여들수 있으리라는 허욕부터 앞세우고있다. 일이 대역부도죄로 그친다 해도 머리큰 량반들이 참형을 당하거나 류배살이를 할게고 저같이 미미한 족속은 얼마든지 꼬리를 사릴수 있는것이다. 도원국은 서필의 말을 들으면서 한발을 《충의계》에 들여놓고 어떻게 하나 장사판을 크게 펴야겠다는 속궁리를 하고있었다.

유양점은 서필이 자기의 의견을 듣고싶어한다는것을 알면서도 지겹도록 묵묵히 앉아있다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국가란 다스리지 않으면 어지러워지고 성하지 않으면 쇠하는 법이라 했은즉, 지금 나라형세는 닭알고임우에 놓인셈이라 개화당이라고 바로잡아낼가.》

그가 이렇게 말한것은 좌석에 밉광스러운 도원국이 사리고 앉았기에 지엄한 말로 기를 눌러놓자는 심리와 함께 서필의 강론에 엇서볼 생각에서였다.

서필의 얼굴은 표표했다. 유양점처럼 너들거릴줄 모르는 독한 인간이라 말 한마디도 여간만 심사숙고하여 듣지 않았다.

《<자수자강>! 이것은 우리 민족이 받아들여야 할 필연이고 우리의 대의란 말이요. 자강을 이룩하지 못하면 백성도 나라도 보전할 길이 막히고마오.》

《옳은 말 같소만 자수도 자강도 시간을 떠나서는 이루지 못할거요. 그 시간이라는게 뭘 말하는지…》

말허리를 끊은 유양점이 눈을 감았다.

부지런히 움직이는것은 도원국의 눈알뿐이다. 날밝도록 앉아있는데도 당초에 어느 한마디 알아들을수 없는 말만 오고가니 귀구멍은 열렸어도 귀머거리나 매한가지다. 량반들이란 원체 백성이 모르는 말만 골라하는것으로 체면을 챙기는 고약한 족속들이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양점이 뭘 념두하는 말인지 내 왜 모르겠소. 시간이란 기회요. 기회란 나는 새나 같아 놓치면 대의도 개혁도 모두 끝장이요.》

《그래 웃머리 어른들은 어떤 일을 한다는거요?》

《고균(김옥균)은 일본 도꾜에 건너가 교섭을 활발히 벌리고 김홍집, 어윤중 같은 무게나가는분들은 상감마마의 가까이에서 진영을 꾸리고있소. 페하의 마음을 돌려세워야 우리도 일본과 같이 유신개혁을 할수 있소.》

조상에는 마음이 없고 팥죽에만 정신이 간다고 서필은 개화파지도인물들의 활동을 속에 없는 소리로 내리엮어댔다.

개화파의 대의명분인 《자수자강》은 봉건전제제도를 반대하고 외래침략세력에 대처하기 위하여 국력강화를 목적으로 한 진보적사상에 뿌리를 두고있었으나 부패무능한 봉건왕조와 수구파세력의 완고한 저항으로 하여 국정개혁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하고있었다.

《그러니 왜의 힘을 빌리자는거겠군?》

《그게 빠른 길이라면…》

유양점은 팔자수염을 쓸어만지며 흥심없이 말했다.

《이보라구 서형, 긴말을 하다 해뜨겠소. 하니까 우리라는건 금전이나 모아바치는 소임이 고작이겠소?》

《양점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야박한 소리 같소만 서형이 우릴 여기서 만난 까닭이 뭐겠소?》

《허허, 정치자 돈이요.》

돈소리에 도원국의 두눈은 금시 올롱해졌다.

저 서울량반이 내 주머니의 돈을 내놓으라는 소린가. 《충의계》인지 뭔지 한게 돈거둠질이나 하자는거라면 잘못 걸려든 판이렷다. 밑천 들이지 않고 큰돈 벌자고 머리를 들이민 내가 정말 우둔하지. 말귀조차 알아듣지 못하며 따라다니면서 돈까지 괴여올린다는게 뼈깎는 일이 아니고 뭔가. 제나름대로 생각하며 그는 원체 고약한 속통이 삐뚤어지고있었다.

《이보우, 개화당의 대의란 우리 백성들의 귀엔 방귀소리만큼도 안 들릴거요. 년년이 임금은 살아있는 페하가 아니라 백성들의 머리속에 군림한 신성불가침의 우상이요. 어지라면 몰라도 <자수자강>이라는 대의명분을 폈댔자 고개 수그릴 백성이 있을것 같소?》

《우매한 백성들이니까. 그래서 궁성안에서 개화혁명을 하자는게 아니요. 그래서 돈이 절실히 필요한게구.》

대세를 관망하며 자기대로의 일가견을 펼치는 유양점의 입에서 대답하기 힘든 물음이 튀여나올 때마다 서필은 속이 찔리웠지만 통관살이에서 배운 말재간으로 적당히 굼때며 돈소리만은 놓치지 않고 입에 올렸다.

개화파의 웃사람들은 그에게 왜나라와의 외교를 맡으라고 권고했지만 자기는 재목이 못된다고 굳이 사양하고 자진하여 자금모연사업을 맡아나선 그다. 국정개혁이 불가피하다는것을 잘 아는만큼 개화파의 권력장악이 보수세력의 도전에 부닥칠것이며 종당에는 수구, 개혁 두파의 혈투를 빚어내리라 예측하는 서필이다. 유양점과 도원국의 앞에 근엄한 표정으로 앉은 그의 심중은 입으로 한 말과는 달리 흐르고있었다.

권력과 돈, 둘중에 어느것을 가져야 옳은가. 두말할것도 없이 돈이다. 권력의 지배력이란 계절처럼 바뀌우기마련이지만 변하지 않는 힘은 돈에 있다. 지금의 왕정에서나 개혁된 정부에서나 정치를 하자면 돈을 찾게 되고 돈을 가지자면 돈있는 사람의 비위를 맞춰주어야 한다. 그러니 돈만 가지면 권력에 의한 지배감과 함께 정치가들보다 더 큰 향락을 누릴수 있다. 내가 바라는것은 이것이며 바로 그때문에 자금모연에 나선것이다. 이 서필의 현명한 속궁냥을 우둔한 유양점이나 간사한 의주잠상 도원국따위가 어찌 알텐가. 내가 지금 얼마나 천만위험한 모험을 하고있는가. 개화파에 끼여들어 대역죄를 짓고있으며 개화파의 자금모연에서 큰돈을 벌어내는 배신죄를 함께 저지르는것이다. 이 서필이로서는 다시 없는 기회이기에 두번 가질수 없는 목숨을 내대고 도박하고있는것이다. 개화파의 부르죠아혁명에 개인의 야심을 달성할 목적으로 끼여든 정치사기한이 바로 서필이였다.

《대장부로 이 세상에 한번 태여났으면 력사에 이름을 남기는것이 옳다고 생각하오. 개화파의 대의는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 할 유일무이한 길이요.》

엄숙하게 그루를 박는 서필의 말에 유양점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나서 도원국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돌렸다.

《이 사람 원국이, 이거야 어디 목이 말라 견디겠나?》

이 지방의 주인은 도원국이나 같은지라 피할수 없게 된 그는 제법 무릎까지 치며 말했다.

《양점이 대주가인걸 잊었소그려.》

갓바치 자손이 량반퇴물을 떡주무르듯 하려들기에 유양점은 기가 차서 눈을 부라리면서도 웃는수밖에 없었다. 세상 돼가는 꼴도 꼴이려니와 서울의 개화파가 저런 깍쟁이의 주머니까지 넘보고 얼리고있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도원국이 냉큼 일어났다 돌아와 앉기 바쁘게 다홍치마에 모시적삼을 받쳐입은 열댓살가량 나보이는 처녀가 술상을 차려들고 나왔다. 옥같이 희고 맑은 살결에 무척 예쁘게 생겼지만 눈꼬리가 쳐들린게 매운맛을 풍겼다.

처녀가 술이 든 놋주전자를 들자 도원국이 술상을 차린것은 자기라는 생색을 내려고 짐짓 물었다.

《무슨 술이냐?》

《한양의 유명한 <두련>입니다.》

《허? 네가 내 좋아하는걸 아는구나.》

서필이가 처녀의 등을 두드려주며 말을 건늬자 고개를 약간 수그린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살아났다.

《제가 어르신네 술맛까지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묻지도 않는 말을 해대는 처녀의 태도며 말투가 여간 반지럽지 않다.

《이년, 무슨 말버릇이…》

도원국이 제 체면 깎이는것 같아 화를 내자 유양점은 《나한텐 평양의 <감홍로>를 들여오너라.》 하는데 서필은 틀스럽게 웃으며 《<두련>이든 <감홍로>든 다 술이지.》 했다.

처녀가 술을 가지러 나가려는데 유양점이 불러세웠다.

《네 말투가 평양사람 같으니 옳으냐?》

《제가 어느 고장 사람이든 관계가 있겠습니까?》

《흠, 그럼 이름은 뭐냐?》

《아시고싶으면 주인님께 물어보시오이다.》

너무도 당돌한 처녀의 태도에 세사람은 제나름의 기분으로 웃어댔다. 서필이 독기가 있는 계집애라고 혀를 차며 허거프게 웃을 때 유양점은 저렇게 뻣뻣한 계집년을 휘여잡아야 멋이라는 생각으로 호걸스런 웃음을 터쳤고 도원국은 량반체면이 순간에 납작해진게 깨고소하여 배를 그러안고 돌아갔다.

서리찬 처녀대신 젊어 한때는 미색으로 사내들을 어지간히 홀렸음직한 객주집 녀주인이 되병에 《감홍로》를 담아들고 철지난 교태를 휘뿌리며 들어왔다.

《어르신네들이 주안상을 찾지 않아 대령하고있느라니 오금이 다 아팠습니다.》

사나이 셋을 한품에 안아 주무를 기상인 녀주인의 묘한 웃음과 아양에 유양점의 기분이 먼저 부풀어올랐다.

《<감홍로>겠다? 어서 내 잔부터 채워라.》

그의 행동에 서필을 무시하는 기색이 알리였다. 유양점의 객기를 아는 서필이라 씁쓸히 웃으며 잠자코 있었다.

객주집 녀주인을 곁에 앉히고서 왕성한 식욕으로 소갈비를 뜯으며 연방 잔을 비우는 유양점이며 음식접시가 비여갈수록 돈타산에 골머리를 앓는 도원국을 건너다보던 서필은 녀주인에게 물었다.

《항간에서 무슨 소리가 떠도는게 없나?》

마치 기다리기나 한것처럼 녀주인은 제 언변을 자랑하듯 말주머니를 터쳐놓았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지요. 백성이란 생계에 매달려 두주먹 뜀질이라 세상사엔 무관이요, 호구지책이면 그만이지만 장이 번창한 이 고장엔 앉아서 웃을수 없는 기괴한 일들이 어느 하루 그저 지나가는 때가 없답네다. …》

술기가 오르기 시작한 유양점은 호색호주가의 흐려진 눈으로 입심이 여간 아닌 녀자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뾰족한 턱의 염소수염을 꼬아쥔 도원국은 귀가 벌쭉하여 다음말을 기다렸다.

《말해보게.》

제가 물어 시작된 이야기여서 서필은 자못 흥미를 가지고 다그었다.

녀주인은 남자들한테 치울대로 치우며 사는지라 어렵지 않게 제 할 소리를 했다.

《여기 진두장이 이름이 하 좋아서 없는 물건이 없는데다 팔리지 않는 물건 또한 없으니 별별 장사치들이 다 모여들어 등치고 간 뽑히우며 횡재한 놈도 밑진 놈도 제 흥에 떠서 돌아치는데라 무슨 일인들 없겠습니까.

글쎄 오늘은 관가의 형방이란 량반이 아전나부래기들을 몰고 장거리를 털려나왔다 개망신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행상아낙네한테. 이 시골에선 벼슬아치라는 형방이 입 한번 못 벌리고 상놈의 욕설덕수를 맞았으니 가관이 아니겠습니까.》

굿타령같이 고저장단을 갖춘 말치레에 세사람은 얼이 빠진 눈들을 해가지고 들었다.

어찌되여 관가의 형방이란 량반이 행상아낙네한테서 그런 봉변을 당한단 말인가. 아무리 망해가는 량반족속이라 해도 설마 행상군인 상놈 계집한테…

《무슨 연고인지 어서 말하게.》

김이 더 오른것은 유양점이였다.

객주집 녀주인은 잔마다에 술을 채우고나서 다시 청산류수로 엮어댔다.

《형방의 성씨로 말하면 라주 원씨요, 아비되는 고명한 어르신은 강원도 어느 고을 사또를 지낸바 있는데 녀색에는 오금을 못 펴는 사람이라 감사님의 본댁까지 훔쳐먹고 파직되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피는 물처럼 내리흐르는 법이라 박천고을의 말직형방이지만 주색잡이에는 서울대감님들도 혀를 찰 인물인데다 욕심 또한 놀보를 찜쪄먹을 위인인지라 그 량반님이 들고다니는 륙모방망이를 이 고장에서는 재물 긁어들이는 곽지라고 한지가 오래고 그 원성 또한 하늘에 닿았습니다.》

조상부터 내리 풀어대는 그의 이야기에 얼을 빼앗긴 유양점은 저도 모르게 큰 엉뎅이를 들썩거렸고 한편 상스럽기 그지없는 말이 귀에 거슬린 서필이였지만 이제 와서 체면차려 그만두라 할수도 없게 되였다.

점심에 약주를 거나하게 마신 원형방이 라졸들을 거느리고 장거리에 나선 때는 파장이 가까와오는 저물녘이였다.

천성이 포악한자라 륙모방망이를 든 원형방이 장터에 나서면 장군들은 대감행차처럼 길을 비켜주고는 돌아서서 침을 뱉군 했다. 신수가 사나와 걸려들면 봉변을 당해야 했기때문이다.

오늘은 누가 또 걸려들어 욕을 당할가? 장군들의 눈길은 원형방의 객기띤 걸음만 지켜보고있었다.

초물전, 리전, 백목전앞을 지나던 원형방이 길을 비키지 않고 앞서 걸어가고있는 행상아낙네가 눈에 뜨이자 본색을 드러냈다.

《이년, 게 섰거라!》

원형방은 첫마디부터 륙모방망이를 휘두르며 고함을 질러댔다.

행상짐을 지고 인 녀인이 돌아섰다. 나이는 서른고개를 넘긴듯 싶은데 그닥 곱게는 생기지 않았지만 이목구비가 흠잡을데 없는데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붕긋한 가슴이 원형방의 병적인 욕망에 키질했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녀인은 박천고을이 다 무서워하는 형방을 조금도 겁나하는 기색없이 바라보았다.

《네 이년! 어디라구 감히 형방 행차길을 막느냐?》

생심을 먹고 막무가내로 죄를 들씌우려드는 원형방이다.

《사람이 뒤에도 눈이 있다면 나리행차를 보았을텐데… 이제라도 비켜서면 되지 않습니까.》

사리에 맞게 녀인이 대답하자 원형방은 때를 기다린듯 발을 구르며 호령했다.

《저년의 짐을 뒤져라! 행상차림으로 도적질을 일삼는 계집이 있다던데 저년이 분명하다.》

량반이 상놈에게 죄명을 씌우면 씌우는대로 가는 세월이라 항변 한마디 변변히 못해보고 영낙없이 오라를 질 녀인의 신세다.

이쯤되면 사내들도 겁이 나련만 녀인은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노려보는데 그 기품이 장거리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형방이 호령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라졸들은 녀인의 물건에 손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형방나으리, 제가 지금껏 걸은 행상길에 여기 진두장을 제 집같이 드나들다나니 모르는 사람 또한 없는데 제 물건이 도적품이라면 이곳 장에서 팔리는건 온통 도적물건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나리는 저같이 치마두른 녀자가 아니라 고을과 장마당을 잘 돌봐야 관가의 어른되신 소임을 다할줄로 압니다.》

탐욕스러운 원형방도 그 말에는 입을 열수가 없었다. 행상아낙 한테서 한바탕 훈시를 당했으니 울화가 치밀어 견딜수가 없는데다 타고나기를 포악무지한 놈이라 기광이 뻗쳐 소리질렀다.

《그년을 물건과 함께 관가에 끌고가자!》

라졸 두놈이 덤벼들자 행상녀인이 머리에 인 보짐을 내리워 부둥켜안으며 무섭게 울부짖었다.

《난 도적년이 아니요! 장안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날 때려죽이기 전에는 안된다!》

행상녀인의 그 웨침이 장거리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도적을 잡겠으면 진짜도적을 잡아라!》

《장마당 장사군 털어내는건 도적놈이 아니냐?!》

장군들속에서 분노가 터져나오자 형방은 기가 죽어 헐떡거리기만 했다. 더이상 만용을 부리다가는 모여든 이 숱한 사람들한테 밟히워죽는다는 소리가 나올 판이였다.

《내 행상길을 스무해 넘도록 다니오만 형방어른 같은 량반은 처음 보오. 박천진두장이 물산이 많아 소문나기보다 조선팔도에 보기 드문 형방나으리께서 계셔 이름이 난가보외다!》

행상녀인의 빈정거림에 장마당은 웃음판이 되고 형방과 라졸들은 황황히 꼬리를 사렸다.

시골장안에서 벌어진 희귀하다고 해야 할 이야기였다.

《허허허, 과시 배심좋은 계집일세. 그 행상의 이름자를 아나?》

유양점이 껄껄거리고나서 묻자 녀주인은 망설임없이 대꾸했다.

《아다마다요. 나같은 과부에 내 집을 친정만큼 여기는 내인이니까요.》

과부소리에 유양점이보다 더 놀란 도원국이 다우쳐물었다.

《이름이 뭐나잖아?》

《관가 망신시킨 녀자를 무던히 알고싶어합니다레. 평양 백과부외다. 이름자는 없어 그렇게만 부르면 이 박천땅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그러니 백씨가 진두장에 나타나 재물에 미친 형방녀석을 백주에 망신시켰다는 소리다.

유양점은 무릎을 철썩 치고나서 벽에 기대며 요란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형방이란 녀석이 백씨를 어수룩한 촌녀인으로 여기고 덤벼들었다가 졸경을 치른게 분명하다.

백씨… 그가 몇해전 행상으로 번 1천냥을 억울하게 떼우고 아예 주저앉았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박천진두장에 나타나 배심을 부렸은즉 보통녀인이 아니다.

유양점은 백씨의 얼굴이 그려지자 자기라는 인간은 말이 사내지 좀스러운 놈이라는 생각이 들어 낯이 뜨겁기까지 했다. 신세를 좀 진 녀잔가. 아직 2백냥이라면 2백냥, 3백냥이라면 3백냥이라고 해야 할 빚을 진 자기다. 실은 도원국에게 진 빚이지만 그 궁지에서 모면하게 해주었으니 갚아야 도리가 아닌가. 하지만 백씨가 제일 어려울 때였는줄도 모르고 돈을 꿔주지 않는다고 제편에서 좋지 않아했으니 이제 무슨 낯으로 만나겠는가.

《그… 그래 관가에서 행상년을 그냥 내쳐뒀단 말인가? …》

여윈 목을 뽑아든 도원국이 턱을 저으며 물었다.

《어서 술들이나 하세요. 난… 좀 자리를 뜨겠어요.》

녀주인이 나가자 도원국은 유양점과 서필의 안색을 번갈아 살피고나서 영문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의 심중은 유양점과 달리 몹시 불안초조해났다. 백씨가 이 고장에 나타났다니 분명 자기 행적을 알고 움직이는것 같았기때문이다. 세월이 몇해 잘 흘러 잊어먹고 산 백씨다. 뭐니뭐니 해도 그 녀자를 만나지 말아야 한다. 마주치면 발뺌을 할수 없고 발목을 잡히우는 날에는 영낙없이 많은 빚을 게워놓아야 한다.

삼화려각에서 유양점과 대판들이를 한 도원국은 백씨를 따라 평양으로 올라와 잠상들이 눈독을 들이는 송도인삼을 손에 넣었다. 백씨가 흥정해주어 8백냥어치를 가지고 의주로 가서 한걸음에 세곱이나 되는 많은 돈을 벌었다.

돈이란 못된 물건이다. 없을 땐 궁색하다가도 일단 손에 넣으면 욕심이 생기고 그 욕심이 혼자 삼켜버릴 생각을 부추긴다. 큰돈을 쥔 그는 백씨와의 약속을 지킬 대신 의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잠상줄을 타고 황해도 장연쪽에 나와 여름 한철 룡연반도에서 까나리장사를 했다.

주색에는 끼여들 재목도 못되는 도원국이라 뭉치돈을 속에 품고 더 큰 장사를 꿈꾸었다. 그가 바라는것은 좋은 고기배 두세척을 사서 선주노릇을 하는것이였다. 그러자니 돈이 모자라 초라한 까나리장사군이 되여 돌아쳤던것이다.

어느날 저녁 어부들이 많이 밀려드는 음식점에서 능주 한잔에 국밥을 먹고 나서던 도원국은 문득 한 아낙네의 인사를 받게 되였다.

《아주버니, 그새 편안하셨나요?》

《엉?!》

원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의주는 천리밖인데 서해바다기슭에서 백씨와 만났다. 반년 가까이 숨어다니느라 했지만 걸려들고야만것이다. 거짓말재간은 넉넉히 갖춘지라 그는 온갖 사설로 속여넘기자 했지만 백씨는 밀수로 번 돈의 액수까지 다 알고있었다. 급해난 도원국은 약조한 리윤의 3푼변만이라도 내놓지 않으려고 갖은 구실을 다 댔다.

《좋수다. 본전만이라도 내놓으시우. 그조차 비탈질하면 나하구 임당수귀신이 되는줄 알라요.》

장산곶이 코앞이고 임당수는 그 절벽아래서 철썩인다. 백씨의 담대함을 아는지라 도원국은 사내로서 창피하지만 삼켜버리자던 8백냥을 내놓았다.

《장사란 신용이 첫째예요. 약속한 3푼변 리자는 이해안으로 갚아요. 숨어다닐 궁리는 말구요.》

《아, 그 3백냥은 양점이한테서 받으소.》

《제 입으로 한 말도 잊었나요. 의리에 벗어나면 장사는 다 해먹는거예요. 언제든 그 리자만은 받겠으니 그리 알라요.》

이렇게 백씨와 헤여진 도원국이다. 그사이 몇해 잘 흘렀지만 결코 잊을 녀자가 아니다. 도원국은 한시바삐 이 박천땅을 떠나야겠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술들도 거나한것 같은데 이젠 자지 않겠소?》

서필이 하품을 하며 묻자 도원국은 화닥닥 놀라며 일어섰다.

《난 바쁜걸음이라 이밤으로 순천쪽에 나가야 하외다.》

유양점은 제 손으로 술을 부어 마시고나서 도원국을 쳐다봤다.

《임자 낯색이 왜 그런가? 여기 형방이란 녀석한테 걸려들 죄라도 지었나?》

《당치않은 소리…》

베개를 베고 누운 서필이 말한다.

《다음번 약속된 날에는 평양에서 만납시다. 그땐 각자가 약조한대로 돈을 가지구 와야 하오.》

오금박아 말하는 그 소리를 등뒤로 흘려들으며 도원국은 자기가 무슨 올가미를 쓴것 같은 생각에 화가 치밀어 퇴마루에 내려서서 신을 신고 발을 굴러댔다.

《원국이, 밤길을 살펴가게.》

유양점의 걱정에 더욱 밸이 꼴린 도원국은 마당을 나서며 연방 침을 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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