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9

 

백씨는 품에서 놋쇠로 손잡이를 만든 한뽐이 조금 넘는 가위를 꺼내들고 잠시 내려다보았다. 10년 가까이 행상길을 걸으며 늘 몸에 간수하고 다닌 물건이다. 천도 많이 잘랐지만 백씨의 몸에서 그것은 호신용과 같은것이였다. 머리를 푼 그는 가위로 머리카락 한줌을 쑥덕 베낸 다음 남편이 남기고간 고무신바닥에 갈라서 깔았다. 그리고나서 본래대로 기름종이에 싼 다음 땅에 묻고나서 잔디를 덮고 두손으로 꽁꽁 눌렀다. 풀어진 머리를 손질하고난 그는 남편의 무덤앞에 다시 꿇어앉았다.

여보, 가겠어요. 해마다 봄가을이면 잊지 않고 찾아올테니 그사이 외로워도 참아주세요. 당신앞에서 맹세해요. 10년간의 행상길에 쏟은 피땀인 천냥, 빼앗긴 그 천냥을 기어코 다시 채우겠어요! 돈을 벌어 봉분도 크게 만들고 비석도 세운 다음 당신이 수수지짐우에 펴주었던 그 진달래를 심겠어요. 품고가신 한을 어떻게 하나 꼭 풀어드릴테니 부디 편히 누워계셔요. …

남편에게 마음속인사를 남긴 백씨는 조용히 일어나 산을 내렸다. 한걸음 옮기면서 장사길을 생각했고 두걸음 짚으며 기어이 돈을 벌리라 마음을 굳히였다. 되돌아오는 길은 다리끊어진 강을 건너야 했다.

빈 함지를 옆에 낀 백씨는 치마가 젖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울을 찾아 첨벙 들어섰다. 이 물을 건느는것처럼 한다면 앞에 놓인 장사길이 어려울것도 없다. 하지만 지나간 10년보다 갑절이나 주먹을 부르쥐고 걸을 강심을 먹어야 했다.

강뚝에 올라선 백씨는 함지를 내려놓고 젖은 치마자락을 쥐여짰다. 날씨가 좋은데다 바람까지 부니 한참 걸으면 다 마를것이였다.

코등 기운 고무신을 신고 들꽃이 핀 뚝을 오르며 무심히 둘러보던 그는 한곳에 눈길을 멈추었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젊은 량반의 모습이 낯익어보였던것이다. 장규현의 아들 장명학이 분명했다. 그가 왜 여기에 나와 앉아있을가? 어딘가 수심에 잠긴 외로운 모습이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인품이 대바르고 례의범절이 시체량반들처럼 까다롭지 않은데다 인정많고 호방하여 무랍없이 누이라고 부르군 하여 백씨를 옹색하게 하는 장명학이다.

《낡아빠진 반상제도와 성리학이 우리 나라를 오늘의 이 지경으로 만들었어요. 나이가 우면 형님이고 누나지 별게 있어요. 난 누이가 좋고 또 그렇게 부르니 거치장스러운 량반허울을 벗어내친것 같아 기분두 좋은걸요.》

장명학은 백씨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것도 꺼리지 않았다. 두사람사이가 이쯤된것은 행상길에 나선 백씨가 그의 부탁으로 여러곳을 다녀주었기때문이다. 송도나 서울에 가면 장명학의 서신을 여러 선비들의 집에 전하기도 하고 장명학에게 책을 날라다주기도 했다. 그것이 장명학의 학문탐구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백씨는 알지도 못했다.

《게 앉은이가 명학도련님 아니시나요?》

백씨는 혹시나 해서 조심스레 물었다.

장명학이 고개를 돌리더니 반겨준다.

《누님, 어떻게 여길…》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제 몇번이나 사정했어요. 량반체면 깎인다구…》

《허허, 다 망해빠져가는 량반이 뭐가 큰사람이라구… 우리 집안은 대대로 벼슬길을 피해 살았으니 지체요 뭐요 할것도 없어요.》

《그런데 왜 이런데 나와계시나요?》

장명학은 강건너쪽을 바라보며 일장탄식을 내뿜었다.

《무정한 이 강줄기에 내 넋을 띄워보내는중이예요.》

백씨로서는 도무지 알수 없는 소리였다.

풍류객들이 찾는 청류벽아래 대동강기슭도 아니요, 량반님네들이 좋은 자리를 펴고 문루에 앉아서 굽어보는 보통문도 아닌 강뚝에 앉아 어인 일로 저리도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는걸가. 그렇다고 감히 그 심정을 물을수도 없는노릇이다.

《누님, 내곁에 앉아요. 기막힌 심사의 바람이라도 막아주시구려.》

백씨는 시키는대로 장명학과 동안을 두고 자리를 잡았다.

《저기 대동땅에 초향이라 부르는 기녀가 있었지요. 노래 잘 부르고 문장에도 따를 선비가 없는데다 허란설헌 못지 않게 서예와 그림그리기에 뛰여난 처녀였어요.》

기생이라면 량반부자들의 유흥을 돋구어주는 천한 노리개로만 여겨온 백씨라 장명학의 말이 곧이들리지 않았다. 노래부르고 춤추는것은 그들의 업이니만치 응당 잘하겠지만 문장과 서예에까지 능했다니 어디서 배운 재주란 말인가.

백씨는 장명학이 혹시 그 초향이라는 기생에게 반해서 속을 앓고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초향인 우리 향목서원 선비들과 각별한 사이였지요. 그가 지어읊던 시구절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오. 뜻을 가진 녀자였고 그 정조는 수정보다 맑고 굳세였는데 이 작은 강이 아까운 그의 목숨을 빼앗아갔어요.》

백씨는 그제야 장명학이 동뚝에 외로이 앉아 고혼이 된 초향을 그리며 슬퍼한다는것을 알고 한숨을 쉬였다.

지난해 장마비 내리는 어느날 초향은 평양감영의 기적에 자기 이름이 옮겨진탓으로 불리워가게 되였다. 불우한 인생인 기녀는 하나의 물건짝같아 용모와 재주가 알려지면 군수의 손아귀에서 감사의 무릎우로 옮겨지는 신세였다. 서글픈 마음을 안고 내키지 않는 걸음을 했던 그는 감영에서 나와 집으로 가던 길에 향목서원을 찾았다.

초향의 출현은 언제나 서원에 류다른 활기를 부어주었다. 그의 남달리 어여쁜 용모도 용모지만 왕성탄의 여울물소리같이 기백있게 울리는 가야금가락으로 하여 선비들의 마음이 숙연해지고 충의지심을 불러일으키는 시조에서 깊은 여운을 받아안군 하였기때문이다.

오래간만에 만나 즐거운 마음들이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잡고 앉자 초향은 붓과 종이를 요구했다. 유순하면서 기백이 넘치는 필체는 누구나 감동해마지 않는것이여서 제꺽 가져다주었다.

연적의 먹을 흠뻑 찍어낸 초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일필휘지로 《무의무생 지상천하》라는 여덟 글자를 남겼다. 군자는 뜻없이 살면 죽은것이나 다름없으니 높은 뜻과 인덕으로 천하를 편안케 해야 한다는것인바 선비면 누구나 잊지 말아야 할 문장이였다.

날이 어두워지려 하자 길떠나려는 그를 모두가 말렸으나 사또의 수청까지 여러번 거절했고 명절유흥터에 대령하라는것조차 사리를 따져 움직이는 초향이라 잠자리를 함부로 옮길념을 안했다.

초향이가 향목서원을 나설 때부터 비줄기는 한층 굵어진데다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댔다. 초향은 솔뫼다리를 건느다 다리 아닌 다리가 무너지는통에 여러 사람과 같이 수장되였다.

불보다 무서운게 물이라지만 평소에는 무서운줄 모르고 사는게 물이다. 아까운 청춘을 앗아간 강인데 얼마나 천연스럽게 흐르고있는가. 바로 그 강가에서 지금 아이들이 뛰놀고있다.

인간의 죽음앞에선 사람들의 슬픔도 각각이다. 인연없는 사람이 죽었다면 슬퍼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가. 제 일로 당하지 않은 불행이란 그런것이다.

백씨는 장명학의 마음을 위로할 말조차 찾지 못한채 덤덤히 앉아있다.

《누님은 어델 갔다 오시오?》

장명학의 물음에 백씨는 젖은 치마자락만 포갤뿐 대답을 안했다. 서글퍼하는 심사에 좋지 못한 말을 덧놓기 싫었다.

《대답 안한다고 내 모르겠나요.》

《오늘이 그이 생일이여서…》

《아, 사람의 정이란 끊기 어렵고 끊어지면 피눈물나는게 아니겠나요.》

《너무 마음쓰지 말아요.》

《초향인 그날이 마지막날이라는걸 알고간게 분명해요. 그래서 우리같은 허울만 남은 량반들한테 뜻을 키워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게 군자의 도리라는 글도 남겼을거예요.》

《…》

침통하게 울리는 장명학의 말을 들으며 백씨는 군자요, 고귀한 뜻이요 하는것보다 저 솔뫼다리를 활 허물어내치고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치밀었다. 썩은 기둥을 뻗치고 섰으니 그우에 다리 아닌 다리가 또 생길게 아닌가. 지난해는 명기의 목숨을 빼앗아갔지만 이해에는 어떤 재난을 빚어낼지 뉘 알랴. 차라리 다리가 없으면 큰물진 강을 건느자고 하지도 않을게고 건느지 않으면 백성들이 목숨잃는 참사는 생기지 않을것이다.

백씨는 마음이 산란한데다 량반집 자손과 너무 오래있는게 불편하여 먼저 일어섰다.

《도련님, 전 먼저 가겠습니다.》

장명학은 손우녀자가 공대하는게 싫은지 입귀에 쓴웃음을 지으며 벌떡 일어났다.

《대동에 볼일이 있어 갔다오던 길에 기구한 운명을 산 초향의 생각이 나서 앉았던거지 별다른건 없으니까요.》

장명학이 따라서자 백씨는 한층 거북해났다. 장사군으로 알려진 자긴데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행실로 보일수 있다는 걱정이 앞선것이다.

《한발 앞서가세요.》

백씨의 심중을 십분 알고도 남는 장명학이라 일부러 비꼬아 말했다.

《고삭은 량반벙거지가 귀찮아 그러지요?》

《아이구나, 무슨 그런 말씀을…》

《말동무나 하면서 가자구요.》

《남의 눈에 띄여도 그렇구… 도련님이…》

장명학은 허물없이 말했다.

《세상이라는게 남 흉보는 멋에 사는 판인데 뭐라나요. 그리구 내가 감영의 벼슬아치이기나 한가요. 뭘 그리 걱정하시우.》

도망쳐갈수도 없는노릇이니 백씨는 한숨만 내쉬였다. 그의 걸음이 조심스러운 반면에 장명학은 훨훨 팔자걸음을 했다.

《누님, 난 책속에만 박혀살다보니 눈멀고 귀먹어 영 캄캄이였수다. 아버님이 말씀해주셔서야 알구 무척 놀랐지요.》

백씨집안에서 있은 망신스러운 일을 들은 모양이다.

《어찌겠나요. 같이 살지 못할 짐승들이 한굴안에 있었으니… 설마 그런 모함을 할줄은 몰랐지요. 나라는 년은 우둔하여 머저리 한가지였어요.》

외우기 싫은 말이지만 백씨는 장규현생각이 나서 입술을 깨물며 열물 뱉듯 했다.

《그런 기미를 알아차렸어도 일이 지금같이 되지 않게 할수 있었는데…》

《어머님이 세상 뜨신것도 모르고 돈만 벌겠다고 돌아쳤으니 지은 죄에 응당한 벌을 받은거지요.》

《이젠 어떻게 하시겠수?》

장명학의 물음에 한마디로 대답하기 힘든 백씨였다.

쏟친 물은 담지 못하니 천냥돈은 날아난셈이다. 앞일은 더욱 기약할수 없다. 수중에 땅을 판 돈이 있지만 이제 또 무슨 변고를 당할지 모른다.

《이대로 주저앉지는 못하겠어요.》

백씨의 말은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명백한 대답이 아니였다. 어딘가 모르게 맥빠진 소리라는걸 자기도 느끼였다

《누님, 우리 아버님이 뭐라고 말씀하시군 했는지 아시우?》

《무슨 말씀인데요.》

장규현의 말이라면 더없이 소중히 여기는 백씨다.

《우리 지우들앞에서 이런 말씀을 자주 했지요.

<나라의 페정은 뒤로 밀어놓고 지금의 우리 백성들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거라. 충과 의는 간직했다지만 세상문물에 암둔하기 이를데없는데다 얼마나 용해빠졌냐. 가난을 팔자로 여기고 권세에 짓눌리우는것을 어쩔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우리 백성이다. 문명개화란 말조차 모르는데다 오늘날에 와서 반항기백은 찾아보기가 매우 어려울뿐더러 근실함마저 잃어가고있다. >

아버님은 나라의 페정에 백성까지 무맥하면 언제든 국난이 생기기마련이라고 말씀하군 하시지요.》

그 뜻을 다는 알수 없지만 백씨가 듣기에도 옳은 말이라고 생각됐다. 뭐니뭐니 해도 뼈심을 아끼지 말고 일해야 한다. 하루 번 돈으로 사흘나흘 술집에서 헤염치는 품팔이군들도 있지 않는가. 행상길에서 그런 광경을 입에 신물이 나게 보아온 그였다. 아무리 배운게 없다한들 집에 두고온 처자생각까지야 못하겠는가. 사내들에게 있어서 주색은 필경 인생을 망쳐먹는 무서운 병마다. 그걸 모르고 사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아버님은 그런 말씀을 한 뒤에 <내가 이 평양바닥에서 바로 보는 사람은 박석골에 사는 백씨뿐이다. 여느 섬약한 녀인네 같으면 목에 바줄을 매고 죽었던가 청상과부라 집구석에 들어박혀 신세타령으로 세월을 보낼텐데 무섭게 벋디디고 일어났거든. 녀자가 행상길에 나선다는게 어디 보통 담을 가지고 할 일인가. 백씨는 볼수록 평양의 버들이야. >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답니다.》

비천하기 이를데없고 일자무식인 한낱 장사군녀인을 두고 그런 말을 했다니 백씨로서는 도저히 믿을수가 없었다.

《도련님도 역시 저를 천한 년이라고 숫보시는군요.》

《내가 누님에게 거짓말이나 할 사람같이 보이오?》

《썩은 나무등걸같은 년을 두고 버들이라 하니 그게 놀리는 소리가 아니고 뭐나요?》

백씨의 정색한 얼굴을 본 장명학은 가던 걸음까지 멈추고 열기를 뿜었다.

《아버님이 누님을 버들에 비긴것은 절대로 꺾이지 않는다는 뜻이예요. 연약한 버들가지지만 광풍에 부러지는걸 보셨수? 아버님은 또 <백씨는 잔디풀같은 녀자다. 아무리 밟아도 죽지 않구 살아나는 잔디풀같은 기품을 간직하고들 산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고 했어요. 내가 없는 소리를 지어낸다구요?》

백씨는 이 세상에 자기처럼 청승맞은 녀자도 사람값에 쳐주는 사람이 있다는것을 알게 되자 자리에 펄썩 주저앉으며 얼굴을 무릎우에 박았다. 원한이 서리서리 고인 가슴을 쓰다듬어주는 고마운 인정에 참고참아오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나왔다. 그에게서 세상이란 고역살이고 저주의 대상이였다. 명이 붙어있기에 악을 쓰며 살아보자고 헤매다니는 땅일뿐이니 아무 미련도 정도 없는것이 이 세상이다.

《누님, 일어나시우. 사람들이 보면 웃겠수다. 평양 백씨가 우는 때도 있다구 말이외다.》

백씨는 장명학이 일으켜세워주어서야 손등으로 눈굽을 훔치며 걸었다.

장명학은 백씨의 마음을 눙쳐주려고 자기 가문의 래력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장규현의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량반가문으로 숙종왕때에는 6조에서 첫자리인 리조판서를 지낸 인물도 있었지만 사색당쟁에 말려들어 참형과 류배의 가혹한 세례를 받으며 역신가문으로까지 기울어지게 되였다. 왕정의 앞날을 내다보았는지 장명학의 조부때부터는 벼슬길을 버리고 평양에 와서 은둔한 선비살이로 대를 이었다. 부친에게서 향목서원을 넘겨받은 장규현은 실학파의 영향밑에 제자들을 키우기에 힘써왔다. 서도지방의 실학파 학자로서 장규현은 널리 알려진 인물이였다. 그런가 하면 장씨가문의 선대중에는 강원도 철원군수를 지낸 사람도 있는데 그 악정이 너무도 심하여 민란에 맞아죽었다고 한다. 가문의 수치인 그 인간에 대한 비화는 모든 악행은 탐욕에서 시작되며 선정은 백성을 혈육같이 돌보는데 있다는 리치를 깨우쳐주었다. 학식이 높고 성정이 부드러우나 대바른 장규현에게는 제자들이 많았다. 서원이 가지고있는 토지가 장씨가문 재산의 전부인데 거기서 걷어들인것의 태반은 문객들을 접대하는데 소비되여 살림이 그리 넉넉치 못한 선비가문이였다.

백씨의 마음이 얼마간 진정되자 장명학은 화제를 돌리였다.

《이젠 수일이 지났소만 양점형이 나를 찾아와 누님에 대한 좋지 않은 말을 하더군요.》

유양점의 소리가 나오자 백씨는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가 나를 탓할 까닭이 뭔가.

《무슨 소리를 했게요?》

《돈 백냥쯤 돌려달라고 말머리를 뗐다가 망신만 당했다더군요.》

그제야 백씨는 유양점이 돈을 꿔달라고 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 어른 빚이라는건 갚아줄게 못돼요. 아무래두 녀자들한테 녹아날 어른이니깐요.》

장명학은 시무룩이 웃었다.

《꿔줄 돈도 없었지요. 그땐 나도 몰랐기에 양점형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었거든요.》

《실은 그래요. 욕했겠지요. 사내가, 그것도 량반자손이 나같은것한테 손을 내밀자니 오죽했겠어요. 한이라도 품었다면… 풀어줄길이 없어요.》

《공연한 소리요. 양점형은 호방한 사람이라 그때 누님의 형편을 알게 되면 제편에서 미안해할거우다.》

《모르지요. …》

두사람은 무렬사동 장규현의 집앞에 이르러 조용히 인사를 나누고 헤여졌다.

이튿날부터 백씨는 행상길 떠날 차비를 하였다. 수중에 있는 돈을 다 털다싶이 하여 송도와 서울쪽에서 올라온 눅은 약재들과 모시천, 호남지방의 죽기와 목기, 구례의 유기, 라전의 칠기같은것을 사들여 짐을 꾸리였다. 이번에 떠나면 순천, 박천, 개천을 거쳐 의주까지 갔다올 생각이다.

떠날 준비를 다 갖춘 그는 경림이 엄마를 찾아갔다.

《동생 왔나?》

《형님, 난 떠나려우.》

병색짙은 녀인은 백씨의 두손을 잡았다.

《오래 걸리겠나?》

《의주까지 갔다오자면 달포는 지나야 할거예요.》

《아유- 그 먼길을… 로상에서 도중에 무슨 일이 없어야 할텐데.》

《도적을 만나면 털리우고 강도를 만나면 죽는거지요.》

백씨는 천리 먼 행상길을 앞에 두고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죽기보다 더하겠느냐. 목숨을 내대고 행상길에 나섰으니 무서울게 없다.

《제발 그런 말은 말라구. 그저 무사히 돌아오기만 기다리겠네.》

《약값조차 남겨두고 가지 못하니 욕하지 말아요.》

《원, 그런 걱정은 말라구.》

《우리 집을 부탁해요.》

백씨는 경림이와 나리에게 엿 한가락씩 쥐여주고나서 무거운 짐을 지고 박석골안을 떠났다. 날저물기 전에 순천에 가닿아야 하는 걸음이여서 그의 발걸음에는 불이 일었다.

행상길에 다시 나선 백씨는 10여년전 그가 아니였다. 인생의 쓰디쓴 고초를 겪었으며 무작정 헤매다니던 때와는 달리 장사물계도 제 눈으로 보고 제나름으로 깨달은것이다. 돈을 벌어 묵여둘것이 아니라 땅을 사두어야 하겠다는것을 대동과 순안의 묵밭을 팔며 느낀 그였다.

애련당앞을 지나 종로를 따라 걸음을 다그치는데 난데없이 한 사내가 막아나서며 싱거운 수작을 걸었다.

《행상, 어디서 오는 길이오?》

수건을 내려쓰고 걷던 백씨는 건방진 말투에 멎어서며 상대를 쳐다보다가 속으로 몹시 놀랐다. 이게 누군가? 리문리려인숙 주인아들놈이 아닌가. 양복을 빼입고 흔들거리는게 10여년전의 방종기가 역겹게 풍긴다.

돈 일곱냥에 녀자의 정조를 빼앗으려들었던 놈, 뜨물초롱을 걷어차며 해대던 운명적인 그밤의 수작질이 아직도 귀전에 쟁쟁하다.

《더럽네. 물에 씻는다구 때낀 거렁뱅이몸에서 썩은 내가 없어질가.》

치미는 분격을 간신히 누르며 백씨는 대답도 하지 않고 걸음을 뗐다.

《이보시오. 살만 한게 있으면 흥정하자는데 사람 말 같지 않소?》

성진우는 녀자들에게 치근대던 버릇대로 백씨를 바싹 따라서면서 제편에서 화를 내였다.

《난 바쁜 사람이요.》

《흠, 행상이나 하는 처지에 말버릇이 여간 고약하지 않은걸. 바쁜 사람이요- 아하하.》

《어르신네라구 부르지 않는다 그 소리요?》

속에 독이 뻗쳐오르기 시작한 백씨가 뚝 멎어서서 마주 노려보았다.

녀자의 기상이 하도 서슬푸르니 성진우도 한풀 죽은 소리를 냈다.

《거 뭐, 싸울거까지야 있소. … 황주쪽에서 온다면 거기에 반반하게 생긴 젊은 녀자들이 없는지 해서 묻자던거요.》

리문리려인숙 주인이 죽은 후 그 아들이 려인숙을 기생집으로 만들었다는 소리를 들어 아는지라 백씨의 눈에는 성진우가 더욱 사람같이 보이지 않았다.

《젊은 녀자들은 왜 찾으시우?》

《좋은 벌이를 시키자는거요.》

넙적넙적 잘도 지껄여댄다. 이 개보다 못한 놈아, 내 네놈한테 밟히우고 걷어채운 한을 가슴에 품고 산다. 어느때든 네놈에게 내 꼭 한풀이를 하련다.

백씨가 속으로 벼르고있는데 기웃이 바라보던 성진우가 중얼거렸다.

《어디서 본 낯인데…》

백씨의 얼굴이 초면이 아니라는 수작이다.

《나두 그 생각을 하던중이외다.》

《그럼 통성이라도 합시다그려. 나를 알아서 손해될 일은 없을테니…》

백씨는 뻗치는 힘으로 강대같이 마른 성진우의 멱살을 잡아 휘둘러메치고싶지만 백주의 행길이여서 참았다.

《필요없수다. 관상을 보니 세상 못된 일만 골라하는 위인이 분명하니 알고싶지도 않아요.》

《모르는 소리! 이 성진우는 꽃속의 제왕이요. 우리 집에서 하루 묵어가지 않으려우?》

백씨는 더이상 자기의 마음을 억제할수 없었다. 이 짐승같은 놈에게 어떤 욕을 퍼부어야 속이 풀리겠는가.

《성진우! 네가 그 이름 가지고 사는 동안은 편안치 못할줄 알아라!》

추상같이 소리친 백씨는 돌부리를 걷어차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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