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4

 

백씨네 초가집 지붕에서는 며칠째 연기가 피여오르지 않았다. 사람사는 집이지만 인적조차 없었다.

박석골안에 천냥 가진 상놈이 살고있었다는것자체가 사람들을 놀래우는 일인데다 집안싸움으로 가난뱅이는 평생 가도 만져 못볼 많은 돈이 하늘로 날아난것으로 하여 뒤말이 많이 돌았다.

《그 집 로친이 세과디 변덕스럽더니 죽어서도 액을 남겼수다.》

《무서운 상깍쟁이집안이지요. 천냥을 깔구앉은 살림이라지만 고기냄새 풍겨보는 때가 있었소, 옆집사람 먹어보라구 지짐 한짝 돌렸소? 악바리같이 벌더니 찌가 됐지요.》

《사람은 그러게 제 팔자만큼 산다니.》

흉흉한 소문에 동정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세상이란 남 잘 되는걸 배아파하고 잘돼가던 놈 코박고 넘어지는걸 고소하게 여기도록 돼먹은것인가.

백씨는 두문불출하고 자리에 누웠다.

지금같이 육신이 편안해본 때는 없었다. 살자고, 벌자고 눈에 피발이 서서 녀자몸으로 안 다녀본 고장이 없다. 가난한 그에게 있어서 제일 큰 재산은 남달리 억센 두다리이고 넘쳐나는 힘이였다.

불도 때지 않은 노전바닥에 홑이불을 덮고 누운 백씨는 맥없는 눈길을 허공에 준채 씨없는 생각만 띄워보내고있다.

울분도 원망도 다 지나가버린 감정이다. 천한 년한테 천냥이란 큰돈이 있었다는것부터가 상서롭지 못한 일이였고 오늘에 이르러 돌이켜볼 때 소견머리 좁은 녀자가 맹목적으로 번 돈을 지켜내겠다고 버둥거린게 어리석은짓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잃어버린 천냥은 정녕 무작정 번 돈이 분명하다.

돈이라는게 쇠붙이여도 사람처럼 숨도 쉬고 말도 하는 무서운것임을 지금에야 깨닫게 된다. 돈이 전란보다 사람을 더 많이 죽였으며 죽이고있다는 장규현의 말이 얼마나 지당한가. 자기만 보아도 바로 그 돈때문에 죽어가고있지 않는가.

백씨는 그지없이 고독했다. 불행을 위로해줄 혈육이 하나도 없는데다 이웃조차 무정한 등을 돌려대고있다. 인정도 품앗이라는 말이 옳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는데 옴해서 남의 고생을 진심으로 아프게 생각해본 때가 별로 없었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랴. 하다만 슬퍼해주는 곡성 한마디 듣지 못하며 이다지도 외롭게 황천길을 가는 인생도 있을가.

사흘을 굶고나니 수수지짐 한짝을 먹고도 백리길을 가던 기력이 다 빠져달아났다. 온몸은 그네우에 실린듯 하고 가물거리는 정신은 잦은 꿈속에서 그 누군가를 찾기만 한다. 내가 누구를 만나고싶어하는가? 눈앞이 맑아질 때마다 묻지만 그게 누군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오늘 아침부터는 가슴에 꽉 들어찼던 울기가 풀리면서 기력은 없어도 숨쉬기도 편하고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모질다면 나보다 모진 년이 세상에 있을가. 독하기로 이 백씨보다 더한 녀자도 아마 없을게다. 장사길에 나서서 안해본 일이 없고 당해보지 않은 멸시가 없다. 한쪼박의 동정도 못 받으며 참기 어려운 천대와 시기의 가시밭을 맨발로 걸어온 내가 아닌가. 온 육신을 다 갈아바치며 한잎한잎 정말 피나게 벌어왔다. 남에게 동정을 주진 못했어도 속여먹거나 협잡한 일은 없다. 배워준 사람은 없어도 장사도리는 지키느라 애썼다. 그 장사도리라는게 뭔지 지금도 딱히는 모른다. 다만 벌어들인 돈이 깨끗해야 한다는것만은 알았다. 돈이 없어 한을 품은 자기였기에 돈을 벌면 쓰기를 무작정 아까와했다. 벌어들였다는 천냥도 어찌 보면 행상길에 굶어지내며 남겨모은 돈일지도 모른다.

부엌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어 매캐한 연기내가 나지만 백씨는 누운채로 움직이지조차 않았다. 누가 불이라도 질러주면 좋으련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연기내에 취했던지 백씨는 스르르 잠들어버렸다.

《이보라구.》

누군가 곁에서 찾는 소리를 그는 꿈속에서 듣고있었다.

《정신을 차리라니까.》

흔들어 깨워서야 백씨는 눈을 떴다. 안개낀 눈앞에 어떤 녀자가 앉아있다.

어머닌가? 저세상에서 그래도 딸이 보고싶어 왔는지 모른다.

《나야, 덕동이 엄마라니까.》

《아지미, 나 덕동이야요.》

백씨는 눈덕을 힘겹게 밀어올리고 쳐다보았다.

길건너 아홉째 큰골마을에 사는 낯익은 녀자다. 동갑나이로 알고있는 녀자인데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저애는 내가 자주 보던 사내애다. 이름은 덕동이였어. 설촌에서 살다 이사왔다구 했지. 장난세찬 사내녀석이라구 소문났지. 설촌에서 살 때 저보다 세살 아래인 계집애와 친해서 늘 업고다니였는데 배나무우에 기여올라가 놀다가 떨구어 다리병신 만들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설촌을 떴다구 했지. …

《사람이 맥을 놓구 아무것도 들지 않으면 죽는 길밖에 있나.》

덕동이 어머니가 한숨 쉬며 하는 말이다.

죽을 마음먹고 누운줄은 모르고 병문안이라도 온걸가? 크게 나눈 정도 없는데 이렇게 걱정해주다니…

《아지미가 나한테 엿도 사주고 돈도 줬지요?》

《내가?…》

덕동이가 더부룩한 머리를 끄덕댄다. 사내애의 머루알같은 눈동자가 고마움을 담고 반짝인다.

그런 일이 있었지. 저애가 길가에 울고 섰기에 왜 우느냐 물었더니 엄마가 앓는다고 했어. 집에는 쌀도 없어 앓는 엄마가 이틀째나 굶었다고 했지. 너무 불쌍해 몇푼의 동전을 쥐여준 생각이 난다.

《그걸 잊지 않았구나. …》

《하두 없이 사니 고맙다는 말도 못했소. 이녀석이 오늘 아지미 앓는데 가보자구 그냥 떼질하기에… 어서 좁쌀미음이라도 들라구.》

마음씨 고운 덕동이 엄마가 방금 쑨 좁쌀미음을 숟가락에 떠든다.

《그만둬요. 사람의 명도 끝나는 날이 있지 않나요.》

《너무 모진 맘 먹지 마우. 한창나이에 그런 생각하면 부모님들앞에 죄가 된다오.》

부모!… 목숨은 줬어도 무정하기 이를데없었던 부모였다. 자식이라도 딸이래서 안겨준것이 있다면 박대뿐이였다. 양자까지 집에 들여 오늘은 이 지경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백씨가 머리를 가로흔들자 덕동이 엄마는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거기선 돈냥이나 있었으니 우리같은 구차한 사람이 주는 정을 받자 할리 없겠지.》

백씨는 덕동이 엄마의 눈가에 맺히는 눈물방울을 보자 가슴이 찢어지는듯 아파났다. 그 아픔은 절망에서 현실로 돌아온 고통이였고 잃어버렸던 힘의 되찾음이였다.

《그런게 아니예요. 나같은걸 다 걱정해주어 정말 고마워요.》

《그럼 몇술 드시우.》

《먹겠어요.》

드디여 백씨의 체내에서 삶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갈라터진 입안은 쓰리였지만 인정을 물리칠수 없고 그 마음이 고마와 미음 한대접을 다 먹었다.

《덕동아, 네 손을 좀 잡아보자.》

《아지미!》

덕동의 손을 꼭 잡은 백씨는 밀려드는 식곤증으로 잠들어버렸다.

땀을 흠뻑 흘리며 꿈속에서 저승에 먼저 간 남편을 만나본 그는 소스라쳐 깨여났다.

여전히 덕동이와 엄마는 머리맡에 앉아있고 다른 두사람이 자기를 굽어보고있었다.

눈정기가 한층 맑아진 백씨는 조용히 웃어보였다.

《경림이 엄마도 왔구만요.》

덕동이 엄마와 비슷한 나이지만 병색이 짙은 녀인이다.

아직은 철이 없는 덕동이와 경림이는 방구석에서 장난질을 하고있다.

《시름시름 앓다보니 이제야 소식을 듣구 찾아왔네.》

《그 몸에 오긴…》

《내 동생 신세를 잊겠나.》

백씨에게서 경림이 엄마는 언니벌이고 박석골안에서 제일 가까이 지낸 사이였다.

《신세는 무슨 신세예요. 내 주제가 이젠 죽게 됐어요.》

《사람이 돈이 모자라 못사는게 아니라 명이 짧아 죽는거라네. 동생이야 오죽 든든하다구 아무렴 이만한 일에 숨이 끊어질텐가. 마음을 크게 먹으라니.》

고마운 두 녀인이 곁에서 성의껏 구완한데다 원체 건강한 백씨라 이틀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대로 죽고말 내가 아니였구나. 이것도 하늘이 준 목숨이겠지. 살아야 한다. 악을 쓰고 살아서 녀자라고 천대하는 세상에 보란듯이 나설테다.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은 백씨는 자기 돈으로 사둔 순안과 대동의 땅을 팔 결심을 내리고 집을 나섰다. 쓸모없는 땅이라 눅거리로 샀으니 본전을 찾는대야 기껏 쉰냥안팎일것은 뻔했다. 지금 형편에서 그 돈이나마 손에 쥐여야 엎어진 걸음을 다시 뗄수 있다.

종로를 지나 서문거리에 들어서서 순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유양점과 맞다들렸다. 풍채좋은 얼굴에 웃음을 한가득 담고 제편에서 먼저 인사했다.

《백씨, 그간 무고했소?》

어찌 보면 기막힌 사연으로 이어진 두사람이다.

녀자 녹여내는 재주를 가진 능글맞은 눈을 마주할 때면 지나간 일로 언짢은가 하면 이상스럽게 가슴이 뜨근히 달아오르기도 한다. 방탕한 량반이지만 어덴가 사내다운데가 있기도 한 유양점이다.

《평양에서 오래 머무시는군요.》

《어디 편찮소? 얼굴색이 어둡구려.》

《사람이 산다는게 어디 쉬운가요.》

《허허, 백씨야 난 녀자가 아니요.》

별로 바쁜 일은 없는지 치근치근 따라서는게 옛날버릇이 또 나오려고 하는듯싶어 백씨는 시답지 않게 물었다.

《평양에 와서 무슨 벌이라도 하나요?》

《벌이는 고사하고 빚만 졌수다.》

윤기도는 수염을 쓸며 유양점은 제풀에 한숨까지 내쉬였다.

《못된 버릇 못 고치니 별수가 있을라구요.》

백씨는 유양점이 뭔가 할 말이 있어 따라걷는다는것을 느꼈다. 돈주머니가 묵직해지기만 하면 그렇게 좋아하는 곳으로 세길네길 뛰며 달려갈 사람이 아닌가.

《백씨가 내 병을 좀 고쳐주구려.》

음충맞은 웃음을 가득 지은 유양점이 비위살 좋게 접어들었다.

《그건 못 고치는 병이예요. 경상골이 내려다보이는군요. 어서 가시라구요.》

《거긴 고사하구 집으로 내려갈 형편도 못되오.》

《그래 본댁이 보고싶지 않아요?》

《뻔뻔스럽다고 나무리지 말구 백냥만 돌려주오.》

희떠운 허세군이 주접이 든 소리를 내는걸 보면 오죽이나 급해서 하는 소리랴만 거지보고 동냥달라는 격이다. 돈을 잘 벌던 어제날의 백씨로만 여기지 그 백씨가 오늘 무슨 꼴이 됐는지 알리 없는 사내다. 그렇다고 통분한 일을 입에 담고 하소연하고싶지도 않았다.

《어른에게 돈을 드리는건 나쁜짓을 더하게 만드는 죄되는 일이예요. 나한텐 그런데 쓰라고 드릴 돈이 없어요.》

백씨는 칼로 자르듯 말하였다.

그 소리에 움찔 움츠린 유양점은 고개만 주억대다 백씨의 등에 대고 말했다.

《그대 아니면 누가 나한테 이같이 아픈 말을 하겠소.》

유양점이 돌아서서 걸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왕이면 좋은 말로 물리칠수도 있지 않았는가. 그래두 믿고 찾아와 손을 내밀었다가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는가.

후회의 밀물이 가슴을 휩쓸지만 백씨는 자기로서 달리할수 없는 일이기에 돌아보지도 않고 입술을 깨물며 걸었다.

순안 재경리의 땅은 여간 척박하지 않아 막눅거리로 샀었다. 그사이 땅임자로 있었을뿐 내버려둔채 누가 부쳐먹었는지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오늘 와서 그 땅을 팔자니 지주와 흥정을 해야 했고 자연히 그간 농사를 지어먹은 사람들도 나지였다. 세곳에 널려져있는 땅에 지금은 강냉이와 수수, 메밀 같은 작물이 한창 자라는데 그 작황을 봐서는 척박한 땅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어떻소? 한해농사는 내가 밑지는셈 치고 몰밀어 3백냥에 넘겨치우시구려.》

나이든 지주인데 서둘러 흥정하는품이 땅에 무척 욕심을 내는게 알렸다.

3백냥이라니, 쉰냥도 되나마나하게 샀던 땅이 아닌가.

고작해서 본전이라 여겼던 백씨는 내심 깜짝 놀랐다. 지주가 이쯤 값을 흥정할적에는 땅값이 뛰여오르고있는게 분명했다. 흥정에 욕심을 지내 앞세우면 도리여 망하고만다고 생각하는 백씨인지라 선선히 응했다.

《내가 더 부르지 않을테니 지주어른, 깎을 생각은 안하시겠지요?》

《원 그럴리가 있소. 단판에 값이 이루어지긴 처음이요.》

《대신 부탁이 있어요.》

《어떤건지 말하시구려.》

《지금까지 땅을 부친 사람들에게서 이해 소작은 받지 않는다는 약속만 하면 되는거예요.》

《그야 어렵겠소. 내 앞서 말하지 않았소. 한해농사는 밑지면서 흥정한다구…》

《좋아요.》

백씨는 지주의 집에 가서 가지고있던 땅문서를 넘겨주고 매매증서에 도장을 눌렀다.

《일은 서로 의사에 맞게 잘됐은즉 우리 집에서 점심이나 같이 합시다.》

《난 원래 대접받는 자리에 앉는 성미가 아니예요. 다시 말씀드리는데 땅부친 사람들에게서 이해 소작료는 받지 말아주세요.》

《일구이언 안할테지만 그것두 문서로 남기시려우?》

《그래주면 좋겠어요.》

지주가 자기 소유로 된 땅에서 이해 소작료는 받지 않는다는 증서를 받아든 백씨는 인사를 차리고 일어섰다.

그사이 땅을 부쳐먹은 농군들이 밭머리에서 기다리고있었다. 백씨는 그들에게 지주가 약속한 증서를 나누어주었다. 주인도 모르게 땅을 부쳐먹어 죄스러워하던 사람들이 그것까지 받고서는 황송해하기가 이를데없었다.

순안읍거리에 나와 음식가게에서 수수지짐 두짝을 사쥔 백씨는 백양나무그늘아래를 찾아가 앉은 다음 천천히 먹었다. 행상길에서 늘쌍 먹어가지고산 지짐이 오늘같이 맛있어보기는 처음이다. 음식맛도 먹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것 같다. 살아갈 길이 꽉 막혀버렸다고 생각하며 죽기로 작정했을 때 덕동이 엄마가 떠넣어준 미음은 소태보다 더 쓰거웠다.

이제는 앞이 보인다. 대동군에 있는 땅까지 팔면 밑천은 든든하다. 장사도 할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늘쌍 들으며 그 일을 해왔지만 배운게 없는지라 오륙을 아끼지 않으면 돈은 번다고만 여긴 그였다. 장사에도 리치가 있음을 오늘에 이르러서야 깨닫는가부다. 땅값이 오르는것쯤은 알려고조차 안했으니 얼마나 암둔했는가. 시세에 따라 가진 땅을 팔고 되사는 식으로 했더라면 큰 리를 보았을것이다. 돈만 크게 생각하면서 동전을 한잎씩 모아 꿰미를 만들어 농짝속에 모아두기만 하는 재미로 살아왔으니 일껏 머저리노릇을 한셈이다. 장농안에 들어간 돈이란 알낳이를 못하는 암닭이나 같다. 돈에는 발이 달려야지 앉은뱅이가 되면 새끼를 못 친다. 돈이 돈을 낳게 해야 한다.

어느새 지짐 두짝을 다 먹었는가? 빈손을 내려다본 백씨는 절로 기분이 좋아 후련하게 웃었다. 그 웃음뒤로 가슴을 뻐근하게 해주며 정깊은 사람들의 모습이 안겨왔다.

장규현은 참으로 고마운 어른이다. 자기의 고충을 헤아려주었고 순안과 대동의 땅이 남아있는데 대해서도 귀띔해주지 않았던가. 헌데 그 어른들은 왜 장사길을 택하지 않을가? 량반의 체면때문인가? 유양점이 같은 사람도 생겨나는 세월이 아닌가. 아마도 하늘을 나는 고니에 비길만치 지닌 뜻이 크니 그럴테지. 세상이란 정사를 하고 법도를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어야 하지만 나같이 장사로 벌어먹는 족속도 섞여야 구색이 맞는게 아니겠는가. 갸륵한 마음씨로 나를 살려낸 덕동이 엄마와 경림이 엄마 역시 나에게 두벌 목숨을 준 은인들이다. 내 기어코 돈을 많이 벌어 그네들의 은혜에 꼭 보답하리라.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네들만 잊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사람의 도리를 하는것이다. 그조차 생전의 꿈만으로 되지 말아야 할텐데…

대동군의 땅까지 팔아 행상밑천을 갖춘 백씨는 든든한 배심으로 해저물무렵 서문장에 들렸다. 잡곡 한되 사기도 주저하던 그가 흰쌀과 물고기며 소갈비까지 사들고 경림이네 집에 들어섰다.

《형님, 계시나요?》

마당에서 푸성귀를 다듬던 경림이 엄마가 병색짙은 얼굴을 돌렸다.

《동생인가? 어디서 오는 길이게?》

《경림인 어델 갔어요?》

《나무하러 간게 여적 안 오누만.》

경림이 아버지는 막벌이군이여서 지난해부터 수안쪽 금전판에 가서 일하는데 몇달에 한번씩 집에 오군 한다. 그러니 열살도 안된 경림이가 사내라고 나무까지 해오는것이다.

《오빠 온다!》

어머니곁에 앉았던 세살 난 나리가 때오른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누더기나 다름없는 치마저고리를 입고있긴 했어도 여간만 곱게 생긴 계집애가 아니다. 솔가래기가 담긴 망태기를 지게에 진 경림이가 둔덕길을 올라오는게 보였다.

《오빠야!》

나리가 냉큼 일어나 달려간다.

힘에 부쳐 씩씩거리며 오는 아이를 앉아서 볼수만 없어 백씨는 나리를 따라섰다. 일없다고 우겨대는 경림의 어깨에서 지게를 벗긴 백씨는 멜끈을 한데 모아 어깨에 걸치고나서 나리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아지미, 어떻게 왔나요?》

《경림이하구 나리가 보구싶어서 왔지.》

《이젠 아픈거 다 나았나요?》

《그럼, 네 엄마가 아지밀 살려냈구나.》

경림의 머리를 쓰다듬는 백씨의 두눈에서 이슬이 번쩍거렸다. 경림이 엄마가 마주 나오며 백씨의 어깨에서 지게를 벗겨준다.

《형님, 내 오늘 애들하구 하루밤 자려는데 일없지요?》

《애들이 좋아하겠네.》

머리수건을 벗어 어깨에 얹은 백씨가 들고온것을 가지고 제 집처럼 스스럼없이 부엌으로 들어갔다.

《저녁은 내가 지을테니 형님은 앉아계시라요.》

《아니, 그게 뭔가?》

《내 손으로 애들을 배불리 먹여보구싶어서요.》

《원, 저런! 그 비싼걸 다…》

경림이가 해온 솔가래기로 백씨는 아궁에 불을 지폈다. 가난한 집안의 부뚜막에서 가마 두개가 한시에 끓어보기는 처음인지라 경림이 엄마는 눈굽을 훔치며 혀만 찼다.

《동생, 무슨 맘먹고 이러나? 전날처럼 또…》

부지깽이를 쥔 백씨가 웃는다.

《그때 형님이 뭐랬나요. 사람이 죽는건 명이 모자라기때문이라고 했지요?》

《…》

《내 다시는 맥놓고 주저앉지 않을테니 마음놓으세요.》

《그러라구. 나 먼저 죽으면 우리 애들을 부탁하네.》

경림이 엄마는 무릎우에 고개를 숙이고 소리없이 울었다. 백씨는 그 모습이 하도 측은하여 그의 두손을 당겨잡았다.

《형님, 난 며칠후엔 길을 떠나겠어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든 경림이 엄마가 정기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또 행상길에 나설텐가?》

《네.》

《자네야 마음먹은대로 하는 녀자니 내가 어떻게 말리겠나. 하지만 그 고생을 이겨낸다는게…》

《걱정말아요. 그동안 우리 집을 좀 봐주세요. 도적이 들만 한 물건은 없어도…》

《그야 어렵겠나. 경림이가 있지 않나.》

《에그- 벌써 밥이 다됐어요.》

동자질을 하는 백씨의 손에 불이 일었다. 삶아낸 소고기를 큼직큼직하게 썰어서 토기그릇에 담아낸 다음 아궁의 불을 끌어내여 얼간한 조기를 적쇠로 구웠다.

《경림아.》

백씨가 소리쳐 찾자 더벅머리 경림이가 부엌문가에 나타났다.

《어서 달려가 덕동이와 덕동이 엄마를 데려오렴.》

《야, 좋구나!》

경림이는 너무 좋아서 껑충 뛰며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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