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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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양점은 일찌기 조부의 엄한 단속을 받으며 4서3경과 유교성리학을 배운지라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고 군자의 도리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자가 사대부니라.》 하는 말뜻은 알고있었기에 젊은 나이에 현령이라는 벼슬자리에 앉았지만 세해도 못 채우고 관모를 벗어 나라에 바치였다. 한것은 탐위욕이 없어서도 아니고 천성이 대발라서는 더욱 아니였다. 벼슬길에 올라 우로 조정까지 쳐다봤댔자 현령살이가 마감자리임을 깨달았기때문이다. 감사행차에 사또가 녹아난다는 말이 있듯이 욕심사나운 웃어른들을 섬기기가 너무 베차 말이 현령노릇이지 굴욕살이였다.

량반사대부의 법도에 매워살기보다는 젊은 혈기에 가슴에 들어찬 욕망풀이나 마음껏 하자는것이 소원이였으나 그 길이란 한정없는 랑비와 방탕의 길이였다.

게걸스레 향락을 맛보다나니 조상이 물려준 가산은 거덜이 나고 남은 땅마지기로 안해와 자식들은 상놈이나 다름없이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그런대로 안해복은 있는 유양점이였다. 소문난 난봉군인 남편이지만 언제 한번 낯색을 달리하는 일없이 가사를 돌보고 자식들을 키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번에도 평양에 올라가 향목서원의 스승도 만나고 지우들과 시세를 론하다 오겠다니 장농속에 묻어두었던 엽전꿰미를 서슴없이 내주었다.

《부디 주색을 멀리하고 뜻을 키우세요.》

안해의 부탁에 유양점은 진심으로 감복하여 그러마 약속하고 올라왔지만 날이 가면서 그 언약은 가뭇이 잊고 주색잡이로 세월을 보냈다.

스승인 장규현은 유양점을 잘 아는지라 조용한 기회가 생기면 타이르군 하였다.

《그대는 마음건사를 잘하고 갈길을 살펴서 걸으라.》

제자의 허점을 깊이 들여다보고 하는 그 말을 들을 때면 고개를 들수 없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걸음은 음침한 곳으로만 돌려졌다.

이곳에서 한달이 넘도록 주색으로 날을 보내다나니 안해가 준 돈이란게 보잘것없어 잠간새에 다 불어먹고 여기저기서 진 빚이 백냥에 달하는데 그 독촉으로 요즘은 외상술 먹을 형편도 못되였다.

유양점은 하루빨리 빚을 갚고 처자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새 빚을 내여 묵은 빚을 갚는 길밖엔 없기에 방도가 묘연했다. 려인숙방에 드러누워 막연한 생각을 이리저리 굴려대고 있는데 심부름군애녀석이 손님이 찾아왔다고 알렸다.

손님이라니… 나를 찾아왔다면 행여 귀인이 아닌가?

유양점은 들썽해지는 마음을 달래며 옷차림을 바로하고 앉았다. 미닫이문이 스르르 열리며 때국이 오른 수건을 쓴 사내가 들어서자 유양점은 미간을 찡그리며 턱수염을 내흔들었다.

《어떤 사람이게 날 만나자는거요?》

괴나리보짐을 진 사내가 턱을 쳐들고 누런 이발을 드러내며 웃어보인다.

《나외다. 헤헤, 양점어른 찾기란 정말로 쉽지 않소이다.》

의주상인 도원국이다. 이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는가? 보매 먼길을 걸은 행색인데 나를 찾은 리유는 뭔가? 약삭바른데다 남의 등쳐먹는데 이골이 난 사람이라 유양점은 만나자부터 은근히 그를 경계했다.

《도가가 아닌가? 의주 갓바치 자손이 무슨 걸음이 그리도 긴가?》

유양점은 량반체모를 피우며 도원국을 시까슬렀다.

《헤헤, 이곳 오라에 묶여 집에도 못 내려간다는게 사실이우?》

벼슬도 없구 체모도 잃은 빚쟁이난봉인 주제에 아직 잘난척 량반행세야?! 네 떡이 한개면 내 떡도 한개다.

갓바치라고 꼬집어하는 말에 심사가 꿰진 도원국도 맞대놓고 야지랑스럽게 빈정대였다.

《허허- 고놈의 말버릇은 여전하군. 그래 내 빚을 갚아주자고 왔나?》

물에 빠진 놈 짚오래기에도 기대를 건다구 유양점은 도원국의 초라한 주머니까지 넘보았다.

《글쎄 이번 빚에서야 어떻게든 벗어나겠지만 양점어른이 돈걱정 안하구 살자면 혈기가 남아돌아가는 그 쟁기를 베버리는게 상책인줄 아시우.》

《뭐뭐… 어디다 대구 함부로 주둥이질이야. 그걸 놓치면 나한테 뭐가 남구 무슨 멋에 산다는건가.》

유양점은 오른다리를 꽈올리며 모로 돌아앉았다.

《하하하, 옳수다. 임금은 대궐에서 백성을 다스리고 양점은 귀한 그 물건 가지구 계집세상에서 헤염치질 않소.》

《걷어치우게!》

화가 치민 유양점이 푸들거리자 도원국은 간특한 천성대로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고개까지 갑신대고나서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내 서울길을 다녀오면서 양점어른께 보내는 서신 한장을 가져왔소이다.》

이건 또 무슨 홍두깨같은 소린가. 서울에서 누가 나한테 서신을 보낸단 말인가.

유양점은 도원국의 잔꾀에 놀아나는게 아닌가 의심하며 그가 내주는 종이장을 받아 읽었다.

향목서원 학우인 서필의 이름자를 보자 유양점은 《이 량반 통인으로 왜나라에 드나든다는 말은 들었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서신의 내용인즉 나라의 안팎정세와 국정개혁의 필요성을 엮어댄것인데 귀가 솔깃해지게 했다. 조정세력에 개화파가 대두한것이다. 대세를 관망할줄 아는 선비라면 국운을 걱정하여 개혁에 나서야 한다고 서필은 강렬하게 주장했고 이에 공감하면 약속하고 만나자는것이였다.

밀서나 같은 이 서신이 도원국의 손에 들려 자기한테 날아왔으니 유양점으로서는 경계심을 품지 않을수 없었다.

《서필이와는 헤여진지 하도 오래되여 삭막하네. 원체 대식가였으니 나보다도 몸집이 더 웅장할걸세.》

도원국은 가는눈을 치켜뜨고 뾰족한 턱을 흔들어댔다.

《날 떠보시우? 그 어른은 키는 보통이지만 강말랐고 계집 밝히는덴 양점에게 짝지지 않겠습디다.》

일개 장사군인 도원국이가 서필이는 어른이라고 공경하면서도 같은 량반인 자기의 함자는 어렵지 않게 불러대는통에 유양점은 은근히 속이 뒤틀렸지만 제편에서 먼저 의심했으니 이를 탓할수도 없었다. 그런즉 밀수군에 불과한 도원국이따위까지 개화파들과 손을 잡았다는 소린가? 세월이 인간세상모양을 이리도 상상밖으로 바꾸어놓았단 말인가?

《어쩌실려우?》

《뭐 말인가?》

《만나보시려우?》

《흠, 생각해보지. 경륜도 들어보지 못하고 대답할텐가.》

《들어보자니 만나야 할게 아니겠소.》

《임자 어지간히 눈이 텄네그려.》

《어서 그 서신을 태우시우.》

상놈의 갖잖은 훈시이지만 옳긴 옳은 말이라 유양점은 놋재털이를 끌어당겨놓고 도원국이 보는 앞에서 서필의 서신을 불태워버렸다.

《그럼 소인은 물러갑니다.》

도원국이 일어나려고 하자 유양점은 서둘러 손을 내뻗쳤다.

《이보게, 임자 이번 서울길에 벌이가 괜찮았겠는데 백냥만 먼저 돌려쓰세나.》

《헤헤, 어른도 아실텐데 그럽니다. 내 장사래야 좀장산뎁쇼. 워낙 배운게 없는 인간이라 벌이는 고사하고 굶고 지내기를 밥먹듯 하는 판에 무슨 돈이 있겠다구 그러시유.》

《자네 오늘만 보고 나를 지내 업수이여기지 말게.》

《무슨 말씀을… 내게 묘한 방도가 있긴 한데…》

《제 돈 아까우면 그 묘책이라도 내놓게나.》

도원국은 실눈에 얄궂은 미소를 띠우고 턱을 잘망스레 까불어대면서 수염을 내리쓸었다.

《어르신네를 도와줄 사람은 있는데 쉽게 걸음이 가내겠는지… 장담하건대 백씨만은 어른의 정상을 돌봐줄거외다.》

《하- 네놈이 감히 나를…》

량반이란게 졸지에 상놈이 들씌우는 구정물벼락을 맞은 신세라 유양점이 억이 막혀 헐떡거릴 때 도원국은 인사도 없이 뱀처럼 사라져버렸다.

부르쥔 두주먹을 돗자리우에 박은채 고개를 숙이고 앉았던 유양점은 장탄식을 하며 바람벽에 털썩 기대여버렸다.

《후유- 내가 이제 어떻게 백씨를 찾아 만난단 말이냐.》

며칠전 박석골에서 백씨를 만났을 때 그는 이상야릇한 감회로 가슴이 설레였다. 5년이라는 세월은 흘렀어도 어제날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백씨였다.

유양점의 귀전으로는 나루배의 삐걱이는 노대소리와 함께 개버들이 우거진 달밤의 대동강물결소리가 들려왔다.

방탕한 생활에 빠져사는 그에게 있어서 기억에 남는 녀자의 얼굴은 하나도 없다. 허나 백씨만은 례외였다. 절세가인이여서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요염하기란 이를데없는 기생들과는 판판 다른 한낱 과부인 그의 얼굴이며 몸매에서 미색이란 찾아볼수도 없다.

하건만 백씨에게서 풍기던 그 특이한 체취만은 여직 생생히 느껴진다. 분향기도 동백기름내도 아니다. 땀내이지만 그저 땀내인것이 아니라 게걸스레 마시고 푹 취하고싶어지는 그런것이였다.

유양점은 눈을 감은채 마음의 금선을 조용히 튕겨본다.

은률에서 떠난 나루배가 삼화현을 향해 강복판을 가로지르고 있다.

한여름 좋은 계절에 명기들까지 데리고 친구들과 함께 몽금포에서 싫도록 즐기고 돌아오는 길이다. 게다가 투전놀이에서 주머니까지 불룩하게 채웠으니 기분은 하늘에 뜬 구름같았다.

흥에 겨운 유양점은 생각나는대로 시구까지 내리엮어댔다.

《대동강 푸른 물아, 네 언제부터 흘렀느뇨. 하 좋은 이 시절 너처럼 마르지 말기 바라노라.》

점잖은 풍류객의 흥타령에 사공은 신이 나서 노를 젓고 한배를 탄 녀인들까지 한수 더 읊어달라고 청했다.

《내 좋은 시구절에 홀려 청수에 몸을 던지면 나도 어쩌지 못하오.》

호방하면서도 능청스러운 유양점이 윤기도는 수염을 쓸며 이 녀자 저 녀자 여겨보고 쓸어보며 말하자 녀인들은 그런 걱정은 말란다.

유양점은 그 사람들속에서 한 녀인을 눈에 담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끌려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도 강물우로 홀로 떠가는것 같이 보이는 그 녀인의 쪽진 검은머리가 눈부시게 반짝인다. 눈길을 강물에 박은채 주위에서 오가는 객적은 한담쯤은 듣지조차 않는게 분명했다. 아무리 뜯어봐야 잘 생긴 부분이나 고운 모퉁이란 별로 찾아볼수 없는 얼굴이다. 사내들만큼이나 넓은 어깨, 무릎우에 포갠 큼직한 손, 시원스러운 한쌍의 눈동자가 가지가지 색갈로 조화를 이루었다. 울고난 뒤 웃는것 같은가 하면 성난듯 하면서도 너그러운 감정을 내비치는 눈이 류별나달가.

나루배가 기슭에 멎자 사람들은 저마끔 갈길을 찾아 가버린다.

유양점이 주시해본 녀자의 행장은 놀라운것이였다. 대두 두말들이 큼직한 가죽중태기를 등에 진데다 량손에는 보통녀인들 같으면 머리에 일 엄두조차 못낼만큼 꽤 묵직해보이는 보퉁이들을 들고도 별로 힘들어하는 기색없이 천천히 걸어가고있는것이다. 강기슭에 앉은 유양점은 녀인의 억센 육체가 눈앞에서 사라진 뒤에도 일어서지 않았다.

행상인가? 아마 그런가보다.

그는 자기 마음이 그 녀자의 무엇을 보고 끌렸는지 알수 없어 생각을 썰어댔다.

《볼품은 없는데 마음은 기울어지는구나.》

유양점은 맥락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삼화려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골손님인 그를 려각의 안주인은 반갑게 맞아들여 별채에 자리를 잡아주었다.

《며칠이나 묵으시려나요?》

《재미를 봐가면서.》

《에이구, 이 아근의 젊은 녀자들을 다 녹이실려구요?》

《로형은 어델 갔소?》

《래일이나 올거예요.》

저녁을 먹고난 유양점은 려각 안주인에게서 낚시대를 얻어들고 강으로 나갔다. 휘영청 달이 밝으니 밤낚시질생각이 났던것이다.

류두날도 멀지 않은지라 훈풍에 몸을 잠그고 앉은 유양점은 솜씨있게 대낙을 휘둘러 강심에 던지였다.

강물우의 멀고 가까운 곳에서 등불이 깜빡인다. 배타고 그물질하는 모양이다.

얼마후 툭툭 맥이 오자 유양점은 숨을 죽이고 슬며시 줄을 당겨보다가 낚시대를 휙 나꿔챘다. 달빛을 받으며 손바닥보다 더 큰 떡붕어가 허공에서 비늘을 번쩍이며 춤을 춘다.

《괜찮아! 마수걸이가… 허허…》

앉기 바쁘게 한마리를 낚아낸 유양점은 흡족하여 껄껄댔다. 이놈의 낚시질도 괴이한 인연으로 배웠다. 막역지우한테서 귀뺨을 맞으며 끌려다니던 생각이 난다.

《벼슬을 그만뒀을 때에야 무슨 뜻이 있었겠지. 계집질에 미쳐 돌아다니니 집안꼴은 뭐가 되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며 자식들을 키우는 처를 보기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어찌겠나, 공자님도 식색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은즉…》

《쯧쯧, 한다는 소리란… 이렇게 합세. 오늘부터 나하구 낚시질을 하자구. 오입질을 떼는 약은 그게 제일이라네.》

유양점의 낚시질은 이렇게 오입병때문에 시작된것이지만 원체 뿌리가 깊은 그 병을 종내 고쳐내진 못하고 한가로운 재미정도로만 남아있었다.

연거퍼 잉어 한마리에 큼직한 붕어가 걸려오는통에 아예 밤을 밝힐 잡도리였는데 차츰 미끼만 떼우는 헛낚시질이 반복되자 권태감을 느낀 유양점은 가지고나온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교교한 달빛아래 소연한 강물소리를 들으며 취흥이 도도하여 강기슭을 둘러보던 그의 눈길이 뚝 멎었다. 내가 귀신한테 홀렸는가. 눈앞에 나타난 저게 대체 뭔가.

개버들이 듬성듬성 우거진 강가에 어떤 녀인이 서있다. 금시 미역을 감고났는지 한껏 부푼 가슴을 달빛에 드러내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머리를 빗고있다. 강바람에 나붓기는 엷은 치마자락에 휘감긴 젊은 녀인의 자태는 미의 신비다. 고요히 넘쳐흐르는 육체의 탄력은 밤하늘에 그 무엇인가 호소하는듯싶다. 가볍게 머리를 흔들 때마다 검은 머리단이 비단필처럼 녀인의 어깨와 허리를 싸고 벗기고 휘감으며 흐느적인다.

얼빠진 눈으로 지켜보던 유양점은 이상한 충동으로 움쭐 일어서다 주저앉았다. 개버들사이로 젊은 녀인의 모습이 사라져버린것이다. 아쉬움을 누르지 못하며 쭈그리고 앉았던 유양점은 제 꼴이 하도 가소로와 허거프게 웃었다.

잡은 고기를 꿰여들고 유양점이 려각에 들어서니 안주인이 마당에까지 나와 맞아주었다.

《밤고기잡이를 잘하였나요?》

유양점은 쓴입을 쩝쩝 다시였다.

《먹음직한 고기는 놓쳤수다.》

《웬걸, 많이 잡았수다레.》

안주인은 고기꿰미를 받아들고 좋아했지만 유양점의 심사는 썩 좋지 않았다.

《그걸루 안주나 해서 술상을 차려주.》

《생선탕을 하리까?》

《생채로 먹어야겠소.》

《회야 내 동생이 잘 치지요. 이보라구 동생.》

안주인이 부엌쪽에 대고 소리치자 금시 목욕을 하고난듯 한 젊은 녀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달빛을 함뿍 받은 녀인의 얼굴과 자태앞에서 유양점은 또 한번 얼이 빠져 멍청히 바라봤다.

이게 누군가? 나루배에서 본 녀자다. 이상하게도 마음을 든장질하던 녀인, 젖은 머리를 매만지는 저 모습은?…

유양점의 두눈은 황황히 허둥거렸다.

옳다! 내 눈에 신비경으로 자리잡았던 녀자다!

그의 심중은 장마철 물결처럼 마구 뒤척이고있었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로다. 하늘이 준 녀자다.

유양점은 강가에서 잃은것을 집마당에서 찾은 열뜬 흥분으로 해서 숨소리까지 높아졌다.

《동생, 어서 회를 치라구.》

《네, 방금 잡았군요.》

백씨가 고기를 받으며 대답하자 자기 침소쪽으로 가며 유양점이 말했다.

《놓친 고기도 잡는걸 보시우.》

뜻모를 그 소리를 스쳐들으며 안주인이 유양점을 따라섰다.

《어르신 방에 손을 한분 더 들였어요.》

귀에 거슬린 소리에 멎어선 유양점이 퉁명스레 물었다.

《저 녀자는 누구요?》

《오- 평양에서 왔어요. 날 형님으로 믿고 자주 찾아오지요.》

《행상같은데?》

《어르신네 눈이야 속이겠나요.》

《허허, 손님을 들였다니 그건 또 어디서 온 사람이요?》

《들어가보시면 알아요.》

유양점이 려각 뒤뜰에 자리잡은 별채에 들어서니 목침을 베고 웬 사람이 이른 잠을 자고있었다.

《어험-》

유양점은 먼저 누운 사람을 깨우느라 기침을 크게 했지만 까딱하지 않는다.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 그는 노전바닥에 소리나게 주저앉으며 말했다.

《이보시우, 좀 올려눕구려.》

《자리야 넉넉한데 뭘 그러시우?》

자지도 않으며 인사불성이다.

《하루밤 같이 자는데 인사소통이라도 하면 안되오?》

《인사는 무슨 인사, 날이 밝으면 회계나 합세다.》

유양점은 눈을 크게 떴다.

오늘밤은 괴이한 일만 생기지 않는가. 강가에서 있은 일로 인한 멀미를 채 가시지도 못했는데 이건 또 어떤 녀석인가.

그러고보니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의주상인 도원국이 같은데 잔뜩 뱀같이 똬리를 틀고 모로 누워서 게정을 부리니 화가 치밀어올랐다.

《임자 상놈 팔자에 량반 알기가 무던하네그려.》

《에이구, 어델 가셨댔소? 기다리다 깜빡 풋잠이 들었수다.》

그제서야 도원국이 례절모를 자기가 아니라는듯 엉너리치며 일어나 앉았다.

궁상맞은 상판에 팽팽 도는 간사한 쥐눈을 마주한 유양점은 기분이 잡쳐 입만 다시였다. 타산이 밝기로 이를데없는 인간을 만나지 말아야 할 곳에서 마주앉았으니 앞에 있게 될 화제거리로 유양점은 대답할 말을 찾느라 머리를 쥐여짰다. 지난해 청나라 비단 열필을 날라왔기에 팔아주마 약속했는데 절반값도 주지 못했으니 저놈의 거마리같은 성화에서 오늘은 빠질 구멍이 있을것 같지 않다.

《조기철이니 벌이가 좋을텐데 양점어른이 속을 크게 써주시오이다.》

비단값은 뒤전에 놓고 조기철타령이니 장사로 짜들어먹은 도원국이 한수 더 뜨는셈이다.

《아직은 첫물이라 큰 돈벌이는 여기서도 안되네.》

유양점이 꼬리를 사리며 에둘러치자 도원국은 고개방아만 찧어댄다. 의주산골내기가 바다물계를 알리는 만무다. 약아빠진 놈일수록 작은 미끼에 홀려들기 쉽다고 여긴 유양점은 제법 큰소리를 뽑았다.

《올해 조기값이 뛰여오를게 분명해서 내 옹근 한달이나 품을 들여 해주쪽을 다녀왔네. 그곳 어부들에게 비단과 선금을 줬으니 이젠 척 앉아서 묵돈을 걷어들일 판이지.》

몽금포에 가서 보름이 넘도록 유흥에 빠져 지내고도 마치 큰 장사길이나 열어놓은듯이 희떱게 엮어대는 유양점을 도원국은 잰내비상통을 하고 말끄러미 쳐다봤다.

《장사라는게 고운 계집 끼고 재미보는 놀음 같으면 좀 좋겠소. 그래 비단값은 언제 내놓으시려우?》

드디여 도원국이 유양점의 멱을 물고늘어질 잡도리를 했다.

《이보라구, 잠긴 돈인데야 건지지 못하겠나.》

《좋시다. 내가 온건 돈보다 비단값만큼 조기를 넘겨받자는것이니 어르신이 방금 말한대로 기다립지요.》

도원국의 옹노에 걸려든 유양점이다. 해주며 조기며 하는 허망한 수작만 안했더라면 지금같이 궁지에 몰리지는 않았을텐데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것이다.

《좋네. 기다리라구. 바다조화란 나도 기약할수는 없네만 일이야 잘되겠지.》

엉큼하기는 유양점이 도원국보다 앞선 인물이라 가망이 없는 배포유한 소리도 서슴없이 지껄여댔다.

이무렵에 려각 안주인이 술상을 차려가지고 들어왔다. …

날이 밝자 도원국이 먼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앉았다.

《음음, 잠을 잔뜩 설쳤더니…》

목침을 베고 큰대자로 누워 우람찬 배로 숨쉬며 유양점이 지나가는 소리를 했다.

《골골 잘만 자던데.》

《체통은 큰데 오줌깨는 왜 그리 작으시오? 들락날락하니 어디 자겠습디까?》

저 족제비같은 놈이 밤새 내 거동을 훔쳐본게 아니야? 흥, 간밤의 내 심사를 모르니 왜 오줌발이 그리 잦게 섰는지 알탁이 있겠나.

유양점은 열적은 생각은 꼬물만큼도 없이 도원국의 수작질에 속대답을 하며 입귀를 실룩댔다.

도원국의 말대로 양점은 밤이슬에 옷이 다 젖었다. 그는 행상녀인이 사랑채에 들것이라고 짐작했다. 약골인 도원국이 곯아떨어지자 술상을 밀어놓고 달빛속을 헤맸다.

려각 안주인과 행상녀인은 안채에서 늦도록 마주앉아 이야기를 했다.

내인들의 말이란 수다스러워 꼭지도 끝도 가량하기 힘든것이여서 유양점은 별채의 제자리에 드러누웠다 일어나기를 몇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삼경이 되도록 두 녀인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에구, 동생팔자두… 아직 한창나이인데 이제라두 마음을 고쳐먹으라구.》

《나두 사람이고 계집인데 왜 생각이 없겠나요. 하지만서두 불쌍하게 죽은 서방생각을 하면 죄되는 일이예요.》

《어찌겠나. 산 사람이야 산 사람이지.》

《정을 버리면 무슨 사람이겠나요.》

유양점의 귀바퀴가 움씰댔다.

《어서 자세나.》

집안의 방등이 꺼졌다.

려각주인이 없으니 안주인과 행상녀인이 한잠자리에 드는것이였다. 유양점은 맥없이 제자리에 돌아와 누울수밖에 없었다. …

《어험, 어험.》

유양점은 주섬주섬 저고리를 입고 일어났다.

《신새벽부터 웬 행차이시오?》

속을 들여다보며 묻는것 같은 도원국의 소리에 유양점은 선하품을 하고나서 일어섰다.

《바람을 좀 쐬려네.》

《주책머리없이 량반체면 깎지 마소.》

《별 싱거운 수작을 하는군.》

유양점이 려각앞마당에 나서는데 대문이 열리며 물동이를 인 행상녀인이 들어섰다.

한손으로 동이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훔치며 행상녀인은 눈을 내려깐채 유양점의 곁을 지나쳤다. 녀인의 온몸에 넘쳐나는 힘을 느끼는 순간 유양점은 자기의 발걸음이 그쪽으로 끌려가려는것을 겨우 참고 대문을 나섰다.

려각대문을 나서니 삼화현 서리마을이 안개속에서 자태를 드러낸다. 대동강의 하구인 예서 바다까지는 30여리밖에 안된다. 논벌이 펼쳐진 가운데 듬성듬성 10여호가량 되는 작은 마을들이 있다. 농사도 잘되고 고기도 많이 잡히니 여기야말로 어미지향이라 할테지만 백성들의 살림살이란게 벼밭에서 돌피가을이나 하는 꼴이다. 조기철이 되여 장사군들이 밀려들 때 다문 몇푼이라도 벌어야 관가와 지주들의 등쌀에 견딜수 있다.

어찌되여 세상은 점점 이 몰골로 되여가는가. 글공부깨나 했다는 유양점이지만 나라가 펼치는 정사를 리해할수 없었다. 서양사람들은 증기로 차를 몰고 기관선을 띄운다는데 이 나라는 봉건의 오솔길로 달팽이걸음질만 하고있으니 앞날이 막막한것이다.

개구리 우는 논두렁을 밟고 지나 삼화천기슭에 선 유양점은 서해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돌아섰다.

물긷기를 끝낸 행상녀인이 려각마당을 쓸고있다가 대문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나루배에서 느꼈던 감정, 달밤의 강가에서 솟구치던 욕망… 그것들이 단꺼번에 합쳐지면서 녀인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유양점의 가슴을 은근히 파고들었다.

초면이라 행상녀인은 비자루를 든채 비켜서며 고개를 숙여보인다.

려각 안주인을 통해 이미 다 들었으면서도 유양점은 시침을 뚝 떼고 녀인에게 점잖게 말을 건넸다.

《나는 룡강사람인데 그대는 어디서 사시오?》

《평양서 삽니다.》

《어제 낮에 나루배에서 본 기억이 나오.》

《초라한 행상에 불과합니다.》

《녀자몸으로서는 힘든 걸음일텐데.》

《살자니 별수 없습니다.》

《사창장이나 서문장에 앉아서 벌이를 할수도 있지 않소?》

《그건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일입니다.》

상대를 무관하게 여기며 꾸밈없이 하는 행상녀인의 말에서 뭔가 다른 인품이 느껴졌다.

《어제 밤 회친 안주를 잘 먹었소.》

유양점은 녀자의 마음속을 헤치고 들어갈 심사로 정을 기울여 말했다.

《상놈이 만진 음식이니 나무람했겠습니다.》

《원, 별소릴… 나라는 사람도 한때 벼슬살이를 한 량반이지만 그게 귀찮아 량인이 되였으니 굳이 존대하지 않아도 되오.》

《사모를 벗었다고 량반이 아니겠습니까? 날 때부터 뼈가 다른 팔자니 상놈의 어깨는 낮아야 할줄 압니다.》

《허- 과시 허술히 볼 그대가 아니군. 오늘 저녁엔 말동무나 합세다.》

유양점은 본색을 드러내며 녀자의 마음을 휘저어보았다.

《행상아낙네가 다리펼 형편이 됩니까? 오늘로 짐을 갖춰야 래일은 떠날수 있습니다.》

《밤이야 길지 않나. 허허.》

유양점은 기대를 가지고 말하며 려각의 퇴돌에 올라섰다. 마루너머 미닫이문이 열리며 호방하게 생긴 려각주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양점을 본지가 어지간하오.》

《로형, 그새 편안했소.》

《뭐, 별탈 없었다오. 대동에 갔다 방금전에 짐을 풀었소.》

행상녀인은 마당을 다 쓸고나서 부엌앞에서 푸성귀를 다듬고 안주인은 아침을 차리느라 부지런히 움직인다.

《주인님은 대동에서 뭘 나르시우?》

행상녀인이 묻자 안주인은 부지런히 상을 차리며 대답한다.

《나르긴, 시부모님이 계시니 노상 다녀가지고있지.》

《극진하시군요.》

《아유, 한번 길을 떠날 땐 나를 기도 못 펴게 한다네. 이게 작다, 저게 작다… 아마 둘째며느리된게 죈가보네.》

《부실한 소리 그만하구 아침이나 들여오우.》

방안에서 주인이 소리치자 유양점이 훈수를 들었다.

《로형, 부인만큼 마음좋구 대범한 녀인이 어데 있을라구요.》

《1고수 2명창이라고 어쩌면 그리도 장단이 잘 맞수.》

아침상을 차려든 안주인이 방안으로 들어가며 하는 말에 한바탕 웃음판이 터졌다.

부엌에서 안주인과 아침밥을 먹고난 행상녀인은 가죽중태기를 보에 싸들고 려각을 나섰다.

밤이 오자 유양점은 먹은 마음을 눅잦힐수가 없었다.

려각주인이 왔으니 행상녀인은 사랑채에 옮겨갈게 분명했기에 도원국이 잠들기만 기다렸다. 체질이 약골인 그는 저녁에 반주삼은 약주 몇잔에 노그라진것이다.

《이 사람 원국이!》

유양점은 일부러 크게 부르고나서 목침까지 바로 베워주었다. 굳잠이 든것을 확인한 유양점은 행상녀인이 든 사랑채에 갔다.

유양점은 그날 밤의 일이 방불히 눈앞에 그려져 맥없이 허허 웃으며 쓴입만 다시였다.

《내 품에 그러안았다 놓친 녀자는 백씨 하나렷다, 헛참.》

행상녀인이라 허술히 보고 덮쳐들었다 다듬이방치에 골통이 박산날번 했다. 그때 한 백씨의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어르신네는 사람을 잘못 봤어요.》

《그게 무슨 소리요?》

《상놈의 계집이라 마음대로 깔구 뭉개도 일없다고 여기는 그 속통이 바르지 않아 하는 말이예요.》

《만나자고… 약속하지 않았나?…》

《다시한번 헛손질했다간 이 다듬이방치에 골통이 부서진다는걸 알라요. 조용히 물러가면 체면도 찾고 고운 기생들을 끼고 즐길 날이 얼마든지 있을테지만 색다른 마음을 먹으면 이밤으로 끝장나고말걸요. 행상으로 막 살아가는 이년은 무서운게 없어요!》

백씨의 서슬푸른 기상에 유양점은 턱수염을 흔들며 탄식했다.

《세상에 내 임자같은 녀자는 보다 처음일세.》

《상놈은 량반과 상극이예요. 그걸 모를 어르신인가요?》

《난 량반이 아니라 하지 않았나. 량인일세.》

《뼈다귀야 량반을 닮았기에 상놈 계집쯤은 어느 집 삿자리만큼 여기는거겠지요.》

《이러나저러나 인연은 인연이니 좀 물읍세. 성씨는 어떻게 부르오?》

《백씨예요.》

《함자는?》

《비천한 녀자에게 무슨 이름이 붙었겠나요.》

《그대는 정녕 내가 마음에 안드오?》

《상놈과 자리를 같이할지언정 량반에겐 몸을 내대지 않겠어요.》

《사무친 원한이라도 있나?》

《상놈치고 량반에게 한을 품지 않은 사람이 몇이겠어요?》

《과시 녀걸이요. 사모 내친 량반퇴물의 절 받은셈 치고 술이나 한잔 부어주지 않겠소?》

여느 녀인들 같으면 술소리에 기겁했겠지만 백씨는 유양점의 객기며 행실을 조금도 탓하지 않고 청하는대로 해주었다.

쾌락은 누리지 못했어도 이상야릇한 만족을 느낀 유양점이였다.

그는 그날 밤 마주한 백씨의 모습을 오늘까지 간직하고있다. 곧게 가리마를 내여 쪽진 머리는 그의 마음처럼 깨끗하고 단정했다. 약간 기름한 얼굴엔 그 어떤 곡절을 가슴깊이 묻고사는 사람의 감정이 어려있었다. 크고 시원한 눈동자는 어덴가 먼곳을 바라보는듯 하여 보통녀인들의 흔한 웃음은 찾을 길 없고 강직하고 담대한 인상만 주었다.

그후 두사람은 여러번 만났다. 유양점도 장사길에 나섰던것이다.

만나고 헤여짐이 수없었지만 백씨는 삼화려각에서의 그 일은 없었던듯이 덮어버리고 매번 흔연히 대해주었다.

유양점은 그때마다 백씨의 남다른 점을 느꼈지만 그것이 뭐더냐 생각하면 이렇다 하고 꼭 찍어 말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쉽지 않은 녀자, 남자들보다도 그릇이 큰 범상치 않은 녀자라는 그 한가지만은 명백히 알수 있었고 그때문인지 양점의 마음속에 백씨는 류다른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지금도 백씨를 생각하느라면 도원국의 옹노에서 간신히 빠져나오던 일이 잊혀지지 않고 떠오른다.

백씨가 평양으로 떠나려는 날 아침이였다.

유양점이 든 별채에서는 싸움판이 벌어졌다.

조기철을 기다려 비단 다섯필값을 받겠다던 도원국은 당초에 꿍져둔 속심이 있었던지라 발칵 뒤집고나선것이다. 유양점의 협잡에 더이상 속을수 없으니 비단값대신 룡강집의 땅을 내놓으라는것이고 그것을 팔아버리겠다는 통첩을 거침없이 내놓았다.

유양점으로서는 무지한 도원국에게서 이런 기막힌 요구가 나올줄은 생각조차 못하고있었다.

두사람사이에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이 오가는것을 보다못해 려각의 주인까지 나서서 도원국을 눅잦혀보려고 했지만 워낙 생심을 먹고 달려든지라 요지부동이였다.

유양점의 룡강집이 가지고있는 땅마지기래야 얼마 되지도 않은데 땅은 땅이고 한때 벼슬살이까지 한 사람의 집이 한갖 장사치에 불과한 도원국따위의 소동에 말려들어 세상을 놀래우면 웃음거리가 될 판이였다. 비단값이래야 본전이 2백냥도 못되는데 심사가 비틀어진 도원국이 엄청난 리자까지 붙여 어벌도 크게 3백냥을 불러대는통에 유양점은 살인이라도 칠 기상이였다.

《네놈이 지난 밤에 조기철까지 기다리겠다던건 침바른 수작이였느냐?! 이놈!》

《양점아, 네가 아직 관청에 앉아있는줄 아니? 의주산골내기라구 숫보구 날 속여? 뭐, 조기? 흥, 조기타령은 말구 난봉질이나 그쳐라. 네놈이 돈벌면 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

《이놈! 이… 돈 다음에 나온 놈! 그 주둥이를 아예 박산낼테다!》

기광이 뻗친 유양점이 목침으로 내려치자 도원국은 그의 멱살을 그러쥔채 늘어졌다. 사내라는 려각주인도 기겁초풍하여 쩔쩔맸다. 인사나 하고 길을 떠나려던 백씨가 려각 안주인의 말을 듣고 달려온게 바로 그때였다.

《의주상인이 예까지 와서 웬 소동인가요? 못난짓들은 그만하고 내 말을 좀 들어요!》

백씨가 소리쳐서야 그들은 싸움질을 그쳤다.

《치마두른 내인이라 잘 모르긴 하오만 장사에도 법도와 의리가 있는줄 압니다. 한다하는 사내들이 돈 몇백냥을 놓고 세상을 웃기니… 부끄럽지들 않으시오?!》

유양점은 망신스러움을 깨닫고 먼산 보며 쓴입만 다시는데 돼먹기가 소인인 도원국은 미친증을 그냥 부렸다.

《백씨가 삐칠 일이 아니요. 저 함지같은 배속엔 남 속여먹을 흑심만 가득차있단 말일세. 내 등쳐먹기 좋아하는 량반족속인 네놈의 가죽을 벗길테다! 그걸루 고의를 해입고야말겠어.》

백씨는 입에 거품을 물고 정신없이 고아대는 도원국의 귀에 대고 몇마디 하여 진정시킨 다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봐요, 3백냥이 뭐 그리 큰돈이나요? 내 더 큰 리를 보게 해줄테니 생각을 고쳐먹지 않겠어요?》

《저 량반한테 받을 3백냥은 어떻거구?》

《장사귀가 그렇게도 어두우시나요? 내 말을 들어보구 작정하시라니까요.》

백씨가 내놓은 묘책이란 이런것이였다.

도원국이 잠상이라는것은 백씨가 잘 아는지라 평양에 가서 잠상물건줄을 잡아주는것이 첫째요, 그 부담은 자기가 한다는것이 둘째며 의주까지 잠상품을 나르는 일은 도원국이 맡으며 그곳에서 본전과 리윤의 3푼변만 받는다는것이 셋째 조건이였다.

《그 많은 돈을 백씨가 분명 대겠소?》

《녀자라구 깔보지 않는다면 약속을 지키겠어요.》

《그럼 여기 3백냥은?》

《그거야 내 돈이 돼야지요.》

타산에 밝은 도원국이지만 큰돈에 눈이 어두워 백씨에게 얼리우는것도 모르고있었다.

《그렇다면 약조한대로 합시다.》

유양점과 도원국의 화해는 백씨가 나서서 이루어졌다. 바로 그 잠상길 한행보에 도원국은 큰 밑천을 쥐게 되였던것이다.

벽에 기대여앉은 유양점은 서필의 편지내용을 더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조정에 개화세력이 대두했다는것을 모르는바 아닌 그다. 대세를 관망한 그들의 국정개혁은 봉건제도를 뒤집고 서양식으로 부르죠아정치구조를 갖추자는것이다. 나라의 페정을 가려본 옳은 방략이기도 하다. 개화파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국정에 변화가 생길것이고 무지스러운 수구파세력은 물러나야 한다. 이것은 사실상 반정이 아니라 말그대로 개혁이니 그 길이 순탄할수 없다는것은 불보듯 뻔하다. 력사의 이 요구를 외면한다면 지금까지 배운 학문은 한갖 허울로 남지 않는가.

유양점은 서필을 만나볼 결심은 하면서도 인간 서필에 대한 의심만은 지울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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