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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1481년) 9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날씨는 쾌청하였다.

여름내 푸른 옷을 입고 젊음을 자랑하던 산과 들에는 가을빛이 점차 물들기 시작하였다. 촉기빠른 단풍나무들은 때를 만난듯 새빨갛게 단장을 하면서 자기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내보이려고 한창 서두르고있었다.

황해도 신계에서 수안쪽으로 넘어가는 고개길 중턱에 누렇게 되여가는 잔디밭우에서 웬 젊은이가 쿨쿨 낮잠을 자고있었다.

하늘중천에 솟아오른 해빛이 그의 얼굴을 내려쪼였다.

먹물을 붓에 찍어서 그어놓은듯 한 눈섭, 속눈섭이 짙게 내배인 꾹 닫긴 눈, 애기주먹을 붙여놓은듯 한 뭉툭한 코, 반쯤 벌어진 입, 네활개를 쭉 편 다부진 몸매…

모든것이 굵직하게 생긴 그의 모습은 겉만 보아도 호방하고 날렵한 사내라는것이 대뜸 알리였다. 먼길을 다녀왔는지 그는 중천에 떴던 해가 서산에 기울사 했는데도 여전히 코만 골고있었다.

이따금 솔솔 불어오는 초가을바람이 그의 도드라진 이마에 내려붙은 머리카락을 살살 날려주었다.

머리맡에 서있는 단풍나무는 이제는 해가 질 때가 다되였는데도 정신없이 자고있는 그의 모습이 민망스러웠던지 어서 깨여나라고 알리려는듯 이따금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나무잎을 바르르 떨었다.

겨울나이준비로 드바쁜 개미들은 자기들의 둥지를 렴치없이 가로타고누운 그가 얄미운지 검실검실한 그의 턱수염에 붙어서 물고뜯었다. 그래도 젊은이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코만 골았다.

그때였다. 고개길쪽에서 난데없이 녀인의 비명소리가 울려왔다.

《사람 살려요. -》

그 소리에 그는 눈을 번쩍 뜨고 날렵하게 일어나 앞을 살피며 옆에 놓은 주머니를 손으로 움켜쥐였다.

그의 눈앞에는 뜻밖의 광경이 펼쳐졌다.

그가 있는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길가에서는 털벙거지를 쓴 군졸 셋이 웬 처녀를 둘러싸고 희롱하고있었던것이다.

주머니를 거머쥔 젊은이는 몸을 벌떡 일으켜 날렵하게 길 근처에 서있는 소나무뒤로 다가가 몸을 숨기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조그마한 보따리를 품에 꼭 껴안은 처녀는 자기를 둘러싼 군졸들에게 안타까이 애원하고있었다.

《나를 어서 보내주시와요. 집에서 앓고있는 아버지가 기다려요. 예?》

그앞에 선 키가 꺽두룩하고 눈이 여덟팔자처럼 축 내려붙은 녀석이 누런 이발을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이봐, 누가 가지 말라구 그랬나. 어서 나한테 몸을 잠간 빌려주구 가란 말이야. 히히…》

옆에 서있는 말라꽹이같은 놈과 몸이 통통하고 털이 부시시한 땅딸보가 처녀를 얼렸다.

《어서 하란대루 하란 말이야.》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래? 어서 태가락부리지 말구.》

처녀는 보따리를 품에 안은채 공포에 질려 서있었다.

키꺽다리가 또다시 처녀를 구슬렸다.

《이봐 봉옥이, 내 쇠부리골에 있을 때부터 너를 마음에 두고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만났으니 이거야 천생연분이 아니구 뭐야, 그러니 어서 나하구 제꺽 재미를 보잔 말이야.》

처녀는 또다시 애원하였다.

《제발 보내주시와요. 아버지의 병이 위급해서 그래요.》

키꺽다리는 말로 해가지고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옆에 있는 놈들에게 소리쳤다.

《야!》

그러자 땅딸보는 처녀에게 달라붙어 보따리를 빼앗았다.

말라꽹이는 처녀의 치렁치렁한 머리태를 거머쥐고 땅우에 자빠뜨렸다.

한창 피여나는 꽃과도 같은 처녀였다.

키꺽다리는 히물히물 웃으면서 봉옥에게 다가들어 그의 저고리를 우악스럽게 거머쥐고 잡아당겨 찢어놓았다.

처녀를 붙잡고 서있던 말라꽹이는 키꺽다리에게 봉옥을 넘겨주고 한쪽으로 물러섰다.

소나무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젊은이의 눈에서는 불이 펄펄 일었다. 그는 쥐고있던 주머니를 풀더니 그속에서 돌멩이를 꺼내들어 휙-하고 날렸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말라꽹이가 이마빡을 두손으로 싸쥐고서 《아이쿠-》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손가락짬으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보따리를 손에 든채 땅딸보는 어안이 벙벙하여 눈을 뒤룩거렸다.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가 그놈의 목덜미를 드세차게 때렸다.

땅딸보는 보따리를 떨구며 목덜미를 부여잡고 아우성쳤다.

《아이구 목대야. -》

봉옥을 그러안고 헤덤비던 키꺽다리는 옆에서 울려오는 비명소리에 놀라 몸을 약간 일으켰다.

이때 또다시 날아온 돌멩이가 그놈의 코등을 맵짜게 때렸다. 대번에 그의 코를 쭉 째놓아 피투성이가 되였다. 그놈은 코를 싸쥔채 뒤로 벌렁 나가넘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숲속에서 달려나온 젊은이는 키꺽다리의 동가슴을 발로 꾹 짓밟고서서 소리쳤다.

《네놈도 사람이야! 이 짐승같은 놈아.》

젊은이의 발에 짓밟힌 키꺽다리는 피가 줄줄 흐르는 코를 감싸쥔채 가쁜숨을 몰아쉬였다. 그는 겁에 질린 눈길로 젊은이를 쳐다보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젊은이는 키꺽다리의 멱을 그러쥐고 몸을 일으켜세우더니 무쇠같은 주먹으로 그놈의 면상을 세차게 후려쳤다.

어찌도 드세차게 때렸던지 키꺽다리는 《끽》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지르며 몸이 허공중에 떴다가 저쯤 나가떨어졌다.

이때 길아래쪽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목을 그러안고 땅에 엎드려 버둥거리던 땅딸보가 펄쩍 몸을 일으켜 말소리가 들려오는 길아래쪽으로 내뺐다.

《막동이다! 막동이가 사람을 친다!》

그러자 길아래쪽에서 무슨 고함소리가 울리더니 발자국소리가 어지럽게 울려왔다.

순간 막동은 머리를 돌려 처녀에게 소리쳤다.

《어서 빨리 피하시우!》

그러자 처녀는 어쩔바를 몰라하며 몸만 바들바들 떨고있었다.

막동은 땅우에 나딩구는 보따리를 집어들고 무작정 처녀의 손을 잡아 숲속으로 이끌었다.

이때 등뒤에서 《저놈 잡아라!》 하고 소리치면서 고을군사들이 달려왔다.

처녀의 손을 잡고 숲속에 뛰여든 막동은 익숙한 동작으로 숲을 헤치면서 산우로 달렸다.

그들이 얼마쯤 달리는데 그만 처녀가 칡덩굴에 걸려서 넘어졌다.

막동은 뒤를 돌아 처녀에게 달려갔다.

이때 뒤쪽에서 고함소리가 울려왔다.

《막동이 이놈, 네놈은 포위되였다! 부질없는 생각말구 어서 나오라!》

막동은 소리나는쪽을 바라보았다. 열서너발자욱 뒤떨어진 곳에 창을 든 군사들이 서있었고 좌우에도 여러명의 군사들이 둘러싸고있었다.

처녀의 손을 잡아끌어 나무뒤에 세워놓은 막동은 주머니에서 돌멩이들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익숙한 솜씨로 돌을 날렸다.

그가 돌을 던질 때마다 군사들이 있는쪽에서 비명소리가 울려왔다.

막동은 그쪽에 대고 소리쳤다.

《이놈들아! 내가 순순히 잡힐줄 아느냐! 가까이 오기만 해라, 모조리 죽여버릴테다!》

그의 고함소리에 달려들던 군사들이 주춤거렸다.

막동은 무작정 처녀를 옆구리에 끼여안고 산우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그가 어찌도 날쌔게 달리는지 뒤쫓던 군사들은 화살 몇대를 그쪽으로 날려보내다가 그만두었다.

처녀를 옆에 끼고 단숨에 산봉우리 두개를 뛰여넘어 시내물이 흐르는 어느 골짜기에 이르러서야 막동은 걸음을 멈추었다.

막동은 처녀를 끼여안은채 뒤쪽을 살폈다.

어느덧 산골짜기에는 땅거미가 깃들어 사방이 어둑어둑해졌다.

뒤쪽에서는 인기척은커녕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안도의 숨을 내쉬던 막동은 뭉클하는 처녀의 살결이 몸에 닿는것이 느껴지자 얼굴을 붉히며 옆에 끼고있던 처녀를 땅우에 내려놓았다.

처녀는 땅에 내려놓자마자 풀썩 옆으로 쓰러졌다.

막동은 황급히 처녀의 몸을 흔들었다. 그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너무도 뜻밖의 일들을 당하다보니 기절하였던것이다.

막동은 머리에 쓴 수건을 황급히 풀어서 내가에 달려가 물을 적셔가지고와서는 처녀의 이마에 얹어주었다. 그리고 손가락끝으로 처녀의 코밑을 문질렀다.

얼마후에야 처녀는 호-하고 한숨을 내쉬였다.

막동은 자기의 괴나리보짐을 처녀의 머리에 고여주었다.

어느덧 사위는 캄캄해졌다.

구름속으로 흘러가던 초생달이 빠금히 얼굴을 내밀자 숲속의 삼라만상이 환히 드러났다.

나무숲사이로 비쳐드는 달빛이 처녀의 얼굴을 비쳐주었다.

그제서야 막동은 처음으로 처녀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도도록하게 솟은 이마와 나비수염같은 눈섭이며 오똑한 코와 뾰로통한 입술, 그야말로 처녀는 사내라면 누구나 탐낼만 하였다.

그의 고운 얼굴을 이윽히 지켜보는 막동의 가슴속에는 저도모르게 젊음이 피여올랐다.

그도그럴것이 그는 올해 스물다섯에 났지만 아직까지 처녀를 가까이 해본적이 없는 숫총각이였던것이다.

그의 머리속에는 이런 처녀를 안해로 삼고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순간 (아니, 몸을 피해다니는 신세에…) 하고 속으로 피씩 웃었다.

막동은 몸을 일으켜 내가에 내려갔다. 웃옷을 벗어던진 그는 커다란 손으로 물을 떠서 푸푸 불어대며 얼굴에 끼얹었다.

산골짜기로 흘러내리는 맑은 시내물은 확확 달아오른 막동의 몸을 시원히 식혀주었다.

막동은 세수를 다하고나서 처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정신을 차린 처녀는 몸을 일으키고앉아 하염없이 흘러가는 초생달을 쳐다보고있었다. 그의 두볼로는 두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려 달빛에 번뜩이였다.

처녀에게 다가선 막동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마우다. 나쁜 놈이 아니니 마음을 놓으시우.》

처녀는 찢어진 저고리자락을 손으로 감싼채 눈물만 흘리고있었다.

《내 아까 그놈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들었수다. 봉옥이라구 부른다는거랑, 아버지가 앓는다는거랑… 도대체 어떻게 하다가 그런 봉변을 당했수?》

그래도 봉옥은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지 말이 없었다.

막동은 자기의 괴나리보짐을 풀었다. 그리고는 그속에 있는 굳어진 수수떡을 꺼내서 봉옥이 앞에 내놓았다.

《난 수안 노루골에서 사는 량인 막동이라는 사람이요. 부모들이 지어준 이름은 김일동인데 집안의 막냉이라구 해서 늘 막동이라고 부르지요. 지금껏 농사를 짓고 짐승사냥을 하면서 살아오우다.》

《…》

《그런데 몇달전에 난 살인을 쳐서 숨어다니는 신세가 된 사람이요.》 하고 막동은 봉옥에게 지금껏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하였다.

… 석달전 어느날이였다.

그날 막동은 황해도감영에서 동원시키는 부역에 끌려나가 해주바다가에서 석달째 갖은 고역을 치르면서 배무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집에 들어서니 뜻밖의 광경이 펼쳐졌다.

석달전에 집을 떠날 때부터 앓고있던 아버지가 고을원의 봉물짐에 넣을 호랑이가죽을 마련하라는 아전놈의 불같은 독촉에 못이겨 앓는 몸으로 사냥하러 나섰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숨을 거두었던것이다.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의 시신을 붙들고 막동은 몸부림치며 울었다.

원래 막동의 아버지는 변방고을을 지키던 군사였다.

남달리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고 특히는 돌팔매질에 명수였던 그는 군사들속에서 인기가 대단하였다. 게다가 외적을 쳐부시는 싸움이 터지면 어찌도 날래고 용맹스러웠던지 적들도 그라면 무서워 벌벌 떨었다. 그의 남아다운 기질과 용맹으로 한갖 백성인 처지에서도 별장이라는 하급벼슬이나마 할수 있었고 나라에서 갑옷과 투구, 장검까지 상으로 받았었다.

그의 남다른 용맹과 출세를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워하던 변방의 벼슬아치들은 그가 군사들을 이끌고 정부를 전복할 음모를 꾸민다는 거짓상소를 올렸다.

이것을 빌미로 하여 옥에 갇혀 다 죽게 되였던 그는 평시에 나라를 지키는 싸움을 잘했다는 공로로 하여 죽음을 겨우 면하였다. 대신 노비신분으로 떨구어 수안 노루골로 쫓아보냈다.

이때부터 수안땅에 뿌리내린 그는 막동이와 형인 수동에게 사내는 나라를 지키는 장부가 되여야 한다고 하면서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배워주었다. 그리고 자기의 특기재주인 돌팔매질솜씨도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하여 막동의 형인 수동은 변방군사로 나가 외적을 치는 싸움에서 용맹을 떨칠수 있었고 그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때 나라에서는 수동의 희생을 기특히 여겨 노비신분인 그의 가문을 량인으로 해주었다.

이렇듯 자식들에게 엄격하고 대바르던 아버지가 졸지에 눈을 감았으니 막동의 눈앞은 캄캄하였다.

막동은 아버지의 시신앞에서 목놓아울었다.

그때 고을 아전과 사령들이 달려들어와 고인앞에 조상은커녕 당장 나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사냥을 하라고 막동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자 막동은 리성을 잃고 벽에 걸려있는 아버지의 장검을 움켜쥐였다.

그것을 본 막동의 어머니 한씨는 그의 손을 부여잡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였다.

자기의 팔에 매달려 애원하는 어머니를 보던 막동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엉엉 소리내여 흐느꼈다.

그날 사령들의 등에 밀리워 산에 오른 막동은 밤늦도록 헤매다가 노루 한마리를 겨우 잡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마을에 버티고앉아 지켜있던 고을 아전은 호랑이를 못 잡아왔다고 마구 욕설을 퍼붓고나서 래일까지 못 잡으면 집안을 도륙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막동은 피눈물을 삼키면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그날밤으로 아버지의 시신을 뒤산에 안장하였다.

그날밤 자정이 훨씬 지났을 때였다.

노루골어귀에 있는 송부자집 담장우로 웬 그림자가 얼씬하였다.

그림자는 조용히 마루우에 올라가 동정을 살폈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그의 눈이 번뜩이였다.

그는 다름아닌 막동이였다.

방안에서는 그가 잡아온 노루고기를 실컷 처먹은 아전놈이 코를 드르렁 골면서 자고있었다.

살며시 방문을 열고들어간 막동은 코를 골면서 자고있는 아전놈을 가로타고앉아 그의 얼굴을 툭툭 쳤다. 그바람에 깨여난 아전은 자기를 가로타고앉은 막동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고 기겁하였다.

막동은 더 생각할 사이도 없이 무쇠같은 주먹으로 그놈의 면상을 후려쳤다.

막동은 《이건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몫이다.》고 피타게 울부짖으며 아전을 사정없이 때려죽였다.

막동은 그달음으로 사령들이 자고있는 방으로 다가가 불을 지르고 담장을 넘었다. 그때 소변을 보러 나왔던 사령 하나가 막동을 알아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온 수안땅에서 수배를 받는 대상이 되여 지금은 이렇게 숨어다니는 처지가 되였던것이다.

여기까지 말하고난 막동은 손을 휙 내저으면서 울부짖었다.

《량반부자놈들은 모두 짐승 한가지요. 아까 봉옥이한테 달려들었던 놈두 잘사는 집자식이 아니요?》

지금껏 말이 없던 봉옥은 그제야 막동이도 자기와 같은 백성이라는것이 느껴져서인지 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우리 마을 아전인 리현손의 아들이와요. 지금 역참에서 역졸노릇을 하고있어요.》

《그러니 그놈을 이미전부터 알고있겠구만.》

《예, 마을에서는 세상에 둘도 없는 악마라고들 해요.》

《그런 놈이 감히 활개치고 돌아가니 에익…》 하고 막동이는 주먹으로 땅바닥을 쿵 하고 내려쳤다.

한동안 그들은 말없이 달빛에 번뜩이며 흘러내리는 시내물만 바라보았다.

고요한 숲속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온 시내물은 그들의 하많은 사연을 세상에 전하려는듯 쉼없이 조잘대며 흘러내렸다.

봉옥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벌떡 몸을 일으키고 서성거렸다.

막동은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

《왜 그러오?》

《난 빨리 집으로 가야 하오이다.》

《집이 어디게?》

《쇠부리마을이예요.》

《쇠부리마을? 그러니 철을 굽는 마을말이요?》

봉옥은 자기의 보따리를 품에 안았다.

《아버지가 쇠를 굽다가 온몸에 화상을 입었어요. 그래서 오소리기름을 얻으러 역참마을에 왔댔는데…》

막동은 서성거리는 봉옥에게 수수떡을 밀어놓았다.

《쇠부리마을로 가는 길은 내가 아니 마음놓으시오. 갈 땐 가더라두 이걸 먹구 가야지 이거야 어디 배가 고파서…》

막동은 수수떡 한개를 집어서 봉옥에게 내밀었다.

봉옥은 머뭇거리며 막동이 내미는 수수떡쪼각을 두손으로 받았다.

《고마와요, 어르신님.》

그 말에 막동은 껄껄 웃었다.

《내가 어르신이라? 하… 이거 배꼽떨어져 처음으로 내가 어른이라는 말을 다 듣구 하…》

그러는 막동을 바라보는 봉옥은 어쩔줄을 몰라했다.

《봉옥이, 날더러 어르신이라구 하지 말구 오빠라구 부르라구, 난 동생있는 사람이 제일 부러웠댔는데 오늘 이렇게 봉옥이를 만나고보니 내 동생으로 삼구싶어그래, 어때?》

봉옥은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수태를 머금고 물었다.

《정말 내 오빠가 되여주시겠어요?》

막동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 난 앞으로 영원히 봉옥이의 오빠가 되겠어. 이건 정말이야.》

봉옥은 두손을 가슴에 얹고 두눈을 반짝이며 생긋 웃었다.

《정말 고마와요, 막동오빠!》

봉옥의 그 부름에 막동의 가슴은 뭉클했다.

늘 이놈, 저놈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막동이라고 불리우던 자기가 난생처음 사람다운 부름을 받았기때문이다.

막동은 부풀어오르는 가슴을 진정하려는듯 수수떡을 한입 뚝 베여 먹었다. 그러면서 말없이 봉옥에게 어서 먹으라고 손짓을 하였다.

그러자 봉옥은 생긋이 웃으면서 수수떡을 한입 베여먹었다.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수수떡을 먹는 봉옥을 쳐다보는 막동의 눈에는 찢어진 저고리짬으로 하얗게 드러나보이는 그의 어깨가 눈부리가 아프게 안겨왔다.

막동은 괴나리보짐에서 자기의 덧저고리를 꺼내여 봉옥의 앞으로 내밀었다.

《봉옥이, 이걸 어서 입어, 그대로 숲속길을 가다가는 살이 다 찢기고말아.》

그제서야 봉옥은 저고리가 찢어진것을 느껴서인지 황급히 손으로 살갗이 드러난 부분을 감싸안았다.

막동은 그러는 봉옥에게 자기의 덧저고리를 씌워주고나서 숲속으로 들어가 칡넌출을 칼로 잘라가지고왔다.

그는 칡줄을 칼로 쭉쭉 쪼개가지고 한오리를 봉옥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어서 저고리를 입고 이것으로 허리를 동이라구, 그래야 숲속으로 갈 때 옷이 걸리지 않아.》

봉옥은 말없이 저고리를 입고 막동이 주는 칡넌출오리를 받아 허리를 빙빙 돌려감았다.

막동은 다심한 눈길로 봉옥의 차림새를 훑어보다가 그의 왼발에서 눈길을 멈추었다.

아까 숲속으로 달려오다나니 짚신이 벗겨졌는지 왼쪽발은 맨발인데다가 온통 긁히고 째여져서 험상하게 피가 내배여있었다.

막동은 옷을 쌌던 보자기를 찢어가지고 봉옥의 맨발을 감싸고 칡넌출로 촘촘히 감아주었다.

자기의 발을 정성스레 감싸주는 막동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봉옥의 눈에는 눈물이 가랑가랑 고였다.

어찌 보면 다심한 아버지같고 또 어찌 보면 친오빠같은 막동의 지성에 감동되였던것이다.

문득 봉옥의 눈앞에는 어린시절에 자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정성스레 쌍태머리를 땋아주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 이젠 발을 한번 굴러보라구.》라고 하는 막동의 목소리에 봉옥은 자기 생각에서 깨여났다.

막동이 하라는대로 왼발을 땅에 대고 굴러본 봉옥은 《고마와요.》 하고 목메인 소리로 말하였다.

《이쪽발도 마저 싸매자구.》 하며 막동은 봉옥의 오른발에 겨우 걸려있는 짚신우로 천을 감싸고 칡넌출로 촘촘히 감아주었다.

막동은 허리를 펴면서 봉옥에게 말했다.

《자, 이젠 한번 걸어보라구.》

봉옥은 마치 아버지앞에 선 어린애마냥 두발을 사뿐사뿐 들어보면서 몇걸음 걸어보았다.

《발이 아프지 않아?》 하고 묻는 막동의 물음앞에 봉옥은 목이 꽉 메여 머리만 흔들었다.

막동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듯 바위턱에 걸터앉아 칡넌출로 자기발을 감싸면서 말했다.

《산길로 다니자면 뭐니뭐니 해두 발간수를 잘해야 돼. 발이 날개거든.》

막동의 모습을 지켜보는 봉옥의 마음속에는 불쑥 (저 사람이 정말 내 친오빠라면 얼마나 좋을가. )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의 외동딸로 태여난 그에게 있어서 늘 오빠가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던것이다.

한번은 오빠가 있는 제 또래 아이들이 너무 부러워 아버지에게 우린 왜 오빠가 없는가고 묻자 아버지는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아버지에게 어서 오빠를 내놓으라고 졸라댔다.

아버지는 《오빠를 쇠물을 녹여 만들수만 있다면 만들어보겠는데 나로서는 재간이 없구나.》 하고 웃었다.

봉옥은 너무도 안타까와 아버지의 동가슴만 쾅쾅 때렸다.

그럴수록 아버지는 딸자식을 품에 안고 껄껄 웃기만 하였다.

막동이 다가와 보따리를 빼앗아서 자기 어깨에 걸친 때에야 봉옥은 제 생각에서 깨여났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버지가 걱정돼서 그러지? 자, 빨리 가자구. 부지런히 가느라면 아침녘에는 쇠부리마을까지 가닿을수 있어.》

드디여 막동은 앞에서 숲을 헤치며 걸었고 그뒤로 봉옥이 따라갔다.

앞서가는 막동의 허리춤에서는 어느새 가득 채워넣었는지 돌주머니가 흔들거렸다.

어느덧 산봉우리를 두개 넘어서니 아까 낮에 들어섰던 길이 나졌다.

달빛에 비쳐진 길을 보는 순간 봉옥은 발걸음을 주춤거렸다.

혹시 고을군졸들이 또 지켜서있지 않는가 해서였다.

《왜, 그놈들이 또 있는가 해서 그래? 일없어. 그깐 놈들이 무슨 지랄이 났다구 한밤중에 있겠나, 마음을 놓으라구.》

그제서야 봉옥은 막동의 곁에 바싹 붙어섰다.

행길을 따라 쇠부리마을이 있는쪽으로 얼마간 걸어가던 막동은 불쑥 봉옥에게 물었다.

《아까 낮에 돌아치던 그 키다리녀석은 이름이 뭐야?》

《리악이라고 불러요. 우리 마을에선 그놈을 보구 악마라고들 해요.》

《악마? 그것 참 그럴듯 한 별명이구만.》

그러자 봉옥은 증오에 찬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놈은 제 아버지가 아전이라는걸 등대구 동네녀자들은 모두 겁탈하려들어요. 그놈때문에 우리 마을의 한 처녀는 목을 매여 자살한 일까지 있어요.》

《그러니 그놈은 악마이기두 하구 색마이기두 한 놈이구만.》

《그래서 제 아버지두 동네사람들 보기가 부끄럽다고 하면서 역참 역졸로 보냈던것이예요.》

《흥, 호랑이한테 날개를 달아준 격이군.》

《예?》 하고 봉옥은 그 말뜻을 몰라 눈만 깜빡거렸다.

《그놈이 마을에 있을 땐 마을사람들만 못살게 굴었는데 이젠 역졸이 되였으니 온 고을사람들을 못살게 굴거란 말이야.》

그제서야 말뜻을 알았다는듯 봉옥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정말 그 말이 맞아요.》

《그놈이 아마 오늘밤엔 깨진 코를 부여잡구 끙끙 앓을거야. 그렇지 않아 봉옥이? 하…》

봉옥이도 방그레 웃음을 지었다.

달빛을 받으며 걸어가는 그들사이에서는 끝없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야기는 막동이쪽에서보다 봉옥이에게서 더 많이 흘러나왔다.

보조개를 살짝 지으면서 말하는 봉옥은 처음의 인상과는 달리 여간 다정다감한 처녀가 아니였다.

봉옥은 자기가 사는 쇠부리마을 사람들모두가 인정미가 있다는 등 마을아전인 리현손은 보통 노랭이가 아니여서 마을사람들모두가 《노랭이령감》이라고 부른다는 등 자기 마을뒤산에 수리취가 많다는 등 가지가지 이야기를 다하였다.

어느덧 봉옥이의 이야기는 가지를 쳐서 자기 가정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고향마을에는 자기네와 외삼촌네가 함께 살고있는데 외삼촌은 젊어서 글공부를 해서 무과에 급제하고 낮은 벼슬을 하다가 자기 상전에게 대바른 소리를 한마디 한것이 빌미가 되여 벼슬에서 떨어져 쇠부리마을에 내려와 아버지랑 함께 일하고있다는것이였다.

그리고 3년전에는 어머니가 공물로 바칠 수리취를 뜯으러 산에 올랐다가 호환을 만나 앓다가 그만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울먹거리면서 하였다.

막동은 머리를 끄덕이기도 하고 이따금 되묻기도 하면서 봉옥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달빛을 안고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가을하늘의 반짝이는 별들도 그들이 만난것을 축복해주는듯 유난히 밝은 빛을 뿌려주었다.

류다른 인연으로 아릿다운 처녀와 함께 밤길을 걷고있는 막동은 난생처음으로 야릇한 흥분으로 하여 가슴이 설레여 얼굴은 수수떡같이 달아올랐다.

그러다나니 자연히 발걸음도 더디여지고 몸가짐도 부자연스러워졌다.

봉옥은 의아한 눈길로 막동에게 물었다.

《막동오빠, 어디 편찮으세요?》

그러자 막동은 당황했다.

《아… 아니, 그저 좀…》

《아니예요. 몹시 불편한것 같은데 좀 쉬고 가요.》

《응? … 그럴가…》 하고 막동은 길옆에 있는 풀숲우에 펄썩 주저앉았다.

봉옥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막동을 쳐다보면서 또 물었다.

《혹시 체기라도 받으신게 아니예요?》

《응? 아니, 일없어. 어서 앉아.》

그제야 봉옥은 마음이 놓였던지 막동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막동이 봉옥에게 넌지시 물었다.

《봉옥인 올해 몇살이나 됐어?》

《나말이예요? 열아홉에 났어요.》

《그… 그러니 정해놓은 서방이 있겠구만?》

그러자 봉옥은 보조개를 살짝 지으면서 말했다.

《아직은…》

봉옥이 정해놓은 서방도 없는 숫처녀라는 말에 막동의 가슴은 또다시 방망이질을 하였다.

《그… 그래두 부모들이 혹시 매파를 띄운것이라두 있겠지?》

그러자 봉옥은 한숨을 호-하고 내쉬면서 말했다.

《우리같이 비천한 철간이(쇠몰녹이는 사람들을 얕잡아부르는 말)들한테 누가 오겠다고 그러겠나요. 암만 량인이라구 해두 천민보다 더 못한 신세인데요.》

《하긴 봉옥이네나 나같은 놈이나 처지는 마찬가지야. 언제면 우리두 사람답게 살아보겠는지…》

막동은 짚신발로 발밑에 놓인 풀잎들을 툭툭 걷어찼다.

한동안 쉬고난 그들이 또다시 길을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설 때였다.

갑자기 봉옥은 막동의 손을 잡으면서 기겁해서 소리쳤다.

《아니, 저게 뭐예요?》

봉옥이 가리키는쪽으로 머리를 돌리던 막동은 흠칫했다.

그들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개중턱에서 푸른 빛을 번뜩이며 호랑이 한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걸어내려오고있었던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던 막동은 황급히 봉옥을 길옆에 서있는 소나무밑으로 피신시켰다.

《봉옥이, 저놈이 아무리 갈개두 이 나무를 꼭 붙잡고있어.》

그들을 발견한 호랑이는 먹을것이 생겼다는듯 점점 발걸음을 재게 놀리면서 달려오기 시작하였다.

막동은 이미전에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호랑이사냥을 몇번 했던차라 날래게 돌주머니를 펼쳐놓고 그안에서 돌멩이 두개를 량손에 거머쥔채 달려오는 호랑이를 쏘아보았다.

막동이와 몇발자국사이까지 다가온 호랑이는 갑자기 몸을 솟구치며 《따웅-》 하고 울부짖었다.

그러자 호랑이의 시뻘건 아가리가 막동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 순간 막동은 잽싸게 돌멩이를 내던졌다.

돌멩이는 면바로 호랑이의 아가리를 뚫고들어가 목구멍에 들어박혔다.

앞발을 쳐들었던 호랑이는 킥킥 하면서 두발을 땅에 내려놓더니 또다시 막동에게 달려들었다.

막동은 나무뒤로 날래게 몸을 숨겼다. 날아들던 호랑이는 나무에 대가리를 짓찧으며 저쯤 나가떨어졌다.

성이 난 호랑이는 잽싸게 막동이쪽으로 몸을 돌려 달려들었다.

막동은 날래게 돌을 날려 시퍼런 불이 번쩍이는 호랑이의 오른쪽눈을 때려놓았다.

호랑이는 어흥어흥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막동에게 덤벼들었다.

막동은 또다시 돌을 날려 호랑이의 왼쪽눈마저 짓찧어놓았다. 두눈을 얻어맞은 호랑이는 비칠비칠거리면서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하였다.

이것을 본 막동은 허리춤에서 짧은 칼을 빼여들더니 몸을 휙 날려 호랑이를 가로타고앉아 목덜미에 칼을 푹 박아놓았다.

호랑이는 안깐힘을 쓰면서 뒤다리를 들어 몸을 뒤챘다.

그 서슬에 막동은 그만 몸이 훌 날리여 허공중에 떴다가 저쪽 풀숲에 나가떨어졌다.

호랑이는 씩씩거리면서 몇걸음 걸어가다가 풀숲에 쿵-하고 나자빠졌다.

소나무밑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봉옥은 허겁지겁 막동에게로 달려갔다.

풀숲에 떨어진 막동은 정신을 잃고 엎어져있었다.

무작정 막동을 그러안은 봉옥은 《막동오빠! 막동오빠!》 하고 애타게 불렀다.

온 얼굴이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된 막동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당황해난 봉옥은 어쩔바를 몰라하다가 문득 어린시절에 어른들이 정신을 잃은 사람의 코밑을 바늘로 찔러주던 생각이 나서 황급히 손가락으로 무작정 막동의 코밑을 문질러주었다.

한참만에야 막동은 푸-하고 긴숨을 내쉬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봉옥은 저도모르게 《막동오빠!》 하고 부르면서 막동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봉옥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세상에 이런 고마운 사람도 있단 말인가. 막동오빠, 오빠는 정말 내 친오빠예요. )

사지판에서 맺은 인연이였다.

오늘 봉옥은 두번씩이나 곤경에 빠졌다가 막동의 도움으로 살아났으니 그에 대한 봉옥의 고마움은 끝이 없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킨 막동은 눈물을 흘리고있는 봉옥의 잔등을 다정히 쓰다듬었다.

《봉옥이 그만하라구, 난 이렇게 펀펀히 살아있지 않아.》

《오빠-》 하고 봉옥은 또다시 와락 막동의 품에 안겨들었다.

봉옥을 품에 안은 막동은 저도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들의 눈물은 사지판에서 살아난 기쁨의 눈물이였고 인간의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 도와주고 살펴주는 정이 고마와 흘리는 눈물이였다.

봉옥은 머리를 들고 막동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물었다.

《오빠, 어디 상한데가 없나요?》

막동은 빙그레 웃음지으며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머리를 저었다.

봉옥의 얼굴에서도 웃음꽃이 활짝 피여났다.

봉옥의 그 밝게 웃는 얼굴이 어찌도 환한지 삽시에 주위가 다 밝아지는듯싶었다.

막동은 환하게 웃는 봉옥의 얼굴을 점도록 바라보았다.

하늘중천에 높이 뜬 달도 막동의 마음을 헤아려주는듯 봉옥의 얼굴에 밝은 빛을 뿌려주었다.

막동이 무사한것으로 하여 기분이 밝아진 봉옥은 그의 두손을 잡아당겨 일으키며 어리광조로 말했다.

《아이 오빠, 어서 일어나요. 오빠가 잡은 호랑이가 큰 송아지만 해요. 어서 가봐요.》

막동은 못 이기는체 하며 봉옥의 두팔에 끌려일어나 호랑이가 자빠진 곳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였다.

호랑이와 맞받아싸울 때에는 별로 큰줄 몰랐는데 정작 자빠진것을 보니 정말 봉옥이 말대로 송아지만큼 덩지가 큰 놈이였다.

막동은 쓰러진 호랑이의 두발을 당겨눕혀놓고 목덜미에 박혀있는 칼을 뽑아들고 능란한 솜씨로 배를 갈랐다.

그는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호랑이의 내장을 와락와락 걷어냈다.

삽시에 호랑이의 피비린내가 주변에 감돌았다.

막동은 옆에서 그의 일을 거들어주고있는 봉옥이에게 도토리나무잎 몇개를 뜯어오라고 일렀다.

봉옥이가 숲에서 손바닥만 한 도토리나무잎을 몇개 뜯어오자 막동은 그것을 오무려서 호랑이의 배안에 가득찬 김이 물물 나는 피를 떠서 봉옥에게 주고 자기도 한개를 떠서 들었다.

《자 봉옥이, 이걸 마셔. 이건 우리 서로 친형제가 된다는 증표야.》 하고 막동은 단숨에 쭉 마셨다.

봉옥은 약간 주저하다가 이것이 막동과의 인연을 맺는 증표라는 말에 눈을 딱 감고 피를 한모금 물었다.

순간 목구멍안에서 비릿한 피냄새가 나오면서 속이 왈칵 뒤집히는듯싶었다.

그러나 그 모든것을 참으면서 호랑이피를 꿀꺽 삼켰다.

언젠가 아버지네들이 노루를 잡아서 그 피를 마시면서 결의형제를 맺던 일이 떠올랐던것이다.

막동은 또다시 도토리나무잎으로 호랑이의 피를 떠서 봉옥에게 내밀었다.

《봉옥이, 이걸 더 마셔. 범피는 사람몸에 제일 좋은 명약이야. 이걸 마시면 몸안에 붙어있는 잡병들이 뚝 떨어져.》

봉옥은 더 마시고싶지 않았지만 막동의 지성이 고마와 피가 담긴 도토리나무잎을 받아들고 또다시 마셨다.

호랑이의 더운 피가 봉옥의 몸안에 들어가자 아래배부위부터 훈훈해지더니 어느덧 그 기운이 온몸에 쭉 퍼지면서 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막동은 도토리나무잎으로 호랑이피를 연거퍼 두세번 떠서 맹물을 마시듯 꿀꺽꿀꺽 마시고나서 봉옥에게 물었다.

《봉옥이, 피를 마시니 어때?》

봉옥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말했다.

《온몸에 열이 나는것 같은게 이상해요.》

《그것 보라구. 자, 한번 더 마시라구.》 하며 막동은 또 권했다.

봉옥은 막동이 주는대로 호랑이피를 다 받아마셨다.

막동은 다래나무줄기로 멜끈을 만들어 잡은 호랑이를 등에 진채 봉옥이와 함께 또다시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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