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 회)

제 3 장 어둠속의 동쪽

44

 

리기철은 자기앞에 나타난 연희를 찬찬히 여겨보았다.

《예상보다는 예쁜 아가씨로군.》

그는 간교한 미소를 띠운채 다가왔다. 연희는 그의 역스러운 모습을 쏘아보았다.

《당신이예요? 동수오빠를 살해하려고 한게?》

《동수?! 그가 누구요?》

《홍콩에서의 테로사건! 당신이 조작한게 아니예요?》

《오- 그 사고! … 그건 별문제요.》

연희에게 바투 다가선 리기철이 씹어뱉듯이 뇌까렸다.

《그녀석만 아니였더라도 오늘같이 복잡한 일은 생기지도 않았을거요. 그래 내가 요구하는건 가져왔소?》

연희의 눈에 증오가 타번졌다.

《살인마!》

리기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응수했다.

《내가 죽어 지옥에 떨어지길 원하오? 아무렇게나 욕을 하시오. 약자의 원망은 강자의 자부심이니까. 약자들은 하느님께 두손을 싹싹 빌며 구원을 청하지. 그러나 강자들은 다르오. 남들같이 예수그리스도를 숭상하고 성모마리아를 사랑하지만 래세에 천당이나 지옥이 있으리라고 믿지는 않소. 강자들에게 중요한것은 현실이지. 그게 강자를 키우는 학교이고 천당이요.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자료나 빨리 내놓고 썩 사라지오.》

연희는 앞에 선자가 더 상종할 가치도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입술을 깨물던 그가 말했다.

《김기자를 만나보고 결심하겠어요.》

연희를 빤히 주시하던 리기철은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어둡고 누기찬 긴 지하도를 걸으며 리기철은 역한 소리를 냈다.

《김기자가 그래도 녀자복이 있구만. 아마 좀전에 아가씨가 내 요구에 응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벌써 그의 목숨은 끝장이 났을텐데… 아가씨가 김기자의 생명을 연장해준셈이요. 하지만 오산하지는 마시오. 아가씨의 말 한마디에 김기자의 목숨이 걸려있으니까.》

철문을 열고 들어서던 연희는 가슴이 철렁했다. 꽁꽁 묶인채로 바닥에 쓰러져있는 사나이는 바로 다름아닌 현철이였던것이다. 연희가 외마디비명을 지르며 그에게로 달려가려는데 리기철이 날쌔게 팔을 움켜쥐였다.

《자료는?》

연희의 눈에서 불이 일었다.

《내가 당신이 원하는걸 순순히 내놓을것 같애요?》

리기철은 싸늘하게 웃었다.

《그래? 그럼 잘 지켜봐!》

그가 김현철에게로 다가가며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너의 말 한마디에 김기자의 생명이 걸려있다는 말이 롱담인줄 알았어? 난 두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리기철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절컥하고 격발기를 당기는 소리가 뢰성처럼 들렸다. 김현철의 관자노리에 총구를 들이댄 리기철이 뇌까렸다.

《거꾸로 다섯을 세지. 다섯! 넷! 셋! …》

《그만! 그만해요!》

연희가 야성에 가까운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면 그럴테지.》

리기철은 권총을 옆주머니에 찌르고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자료는?》

《을지로 지하철역의 물품보관함속에 있어요. 번호는 113450.》

《열쇠암호는?》

연희가 경멸의 눈길로 쏘아보았다. 리기철이 그 뜻을 파악하고 비꼬았다.

《그래?! 하긴 보관함열쇠를 여는것쯤은 애들 소꿉장난이니까.》

리기철은 연희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오래동안 징그럽게 훑고나서 그의 귀에 입을 가져갔다.

《아직 고백같은것도 못 들어봤지? 쯧쯧. 어리석은것! 짧은 시간이 될거다. 그동안 많이 속삭이도록 해.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연희는 소름이 끼쳐 몇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것이 재미난듯 한참이나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리기철이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연희는 김현철에게로 달려갔다.

《현철씨, 정신차려요. 정신 좀 차려봐요.》

몸을 묶은 바줄을 간신히 풀었을 때 별안간 김현철은 연희를 밀쳤다. 뜻밖에 당한 연희는 궁둥방아를 찧었다.

《여긴 왜 왔소?》

처절한 부르짖음이였다.

《왜 이곳으로 왔는가 말이요? 이곳이 함정이라는걸 정말 몰랐단 말이요? 그렇게도 어리석은가 말이요!》

김현철은 두손으로 연희의 연약한 어깨를 멍이 지도록 꽉 틀어잡고 안타깝게 흔들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소.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 무슨 일이 생겨도 상관하지 말고 내가 준 자료를 빨리 공개해버리라고! 그런데 왜? 왜 이곳으로 오는가 말이요?!》

김현철은 세차게 어깨를 들먹였다. 그 모습이 가슴을 허벼와 연희도 눈물이 솟았다. 그는 김현철에게 다가가 부축해주었다.

김현철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지금까지는 무섭기는 해도 죽기밖에 더하랴 하는 각오로 버티여왔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연희가 이 지옥으로 날아든것이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라도 그만은 살려야 했다.

김현철은 연희의 손을 뿌리치고 가슴을 부여쥐며 일어섰다. 일전에 다쳤던 륵골이 랍치될 때 매질을 당하면서 또다시 상한것 같았다. 아픔을 참고 비칠거리며 간신히 철문으로 다가간 김현철은 문을 두드렸다. 쾅쾅하는 소리가 지하도를 울렸건만 누구도 다가오는자는 없었다. 아마도 그들이 찾아도 내버려두라는 지시를 받은것 같았다. 문을 두드리던 김현철은 기진하여 그앞에 주저앉았다. 곁으로 연희가 다가오며 말했다.

《현철씨, 난 괜찮아요.》

하지만 그는 연희의 손을 뿌리쳤다.

《이럴줄은 몰랐소. 이건 나를 위한것이 아니라는것을 왜 모르오? 이젠 모든 가능성을 잃어버렸단 말이요.》

그는 철문을 허비며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연희는 그를 꼭 그러안고 함께 흐느꼈다. 한참이 지나 다소 진정이 된 그들은 구석진 곳에 나란히 앉았다. 텅빈 공간을 응시하던 김현철이 갈린 음성으로 물었다.

《동수씨는 연희씨가 여기로 온걸 아오?》

연희는 머리를 저었다.

《그럼 동수씨와 토의도 없이 이곳에 왔단 말이요?》

《그자가 위협을 했어요. 다른 기미가 보이면 현철씨를 해치겠다고요.》

《그런다고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면 어쩐다는거요.》

《이제 와서 지나간 일을 탓해서 뭘 해요? 그저 난 현철씨를 만나서 기쁠뿐이예요.》

김현철은 그 말에 기가 막힌듯 입을 다물고말았다.

연희는 그를 안심시키려는듯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조용히 속삭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렴 제가 현철씨가 자기의 생명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자료를 악당들의 손에 넘겨주겠나요?》

《그래서 더 걱정이 된단 말이요. 이제 저자가 속았다는걸 알게 되면 어떤 미친짓을 할지 모르지 않소? 그런데 이런 함정으로 스스로 뛰여들다니…》

김현철은 타는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연희는 그에는 아랑곳없이 계속 열정적으로 속살거렸다.

《아무래도 좋아요. 난 현철씨와 함께 있고싶었어요. 영원히!》

코마루가 시큰해왔다. 그라고 연희의 그 심정을 왜 모르랴! 그러나 지금 이런 지옥같은 곳에 연희와 같이 있는것자체가 그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였고 고문이였다.

김현철은 연희의 두어깨에 손을 얹고 얼굴을 마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제 저자가 돌아오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야 하오. 아무것도 모르지만 무슨 자료를 가져와야 나를 살려준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찾아온것이라고 말하오. 홍콩에도 같이 갔었다는것을 말하면 안되오. 아니, 저자가 연희씨에게 전화를 했을적에는 이 사실까지도 다 알고있다는거요. 그러니 홍콩에는 관광을 갔다가 우연히 나와 만났고 나의 취재와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아는것이 없다고 우겨야 한단 말이요. 알만 하오?》

《꼭 그래야 하나요?》

《그렇소. 그렇게 말해야 연희씨만이라도 이곳을 빠져나갈수 있소.》

《싫어요!》

연희의 눈빛은 단호했다.

《나 혼자라면 싫어요. 나가도 현철씨와 함께 가겠어요!》

《그러면 우리가 밝히려던 진실을 어떻게 한다는거요?》

《그것도 현철씨와 함께 밝힐거예요.》

《그럴수 없다는걸 잘 알면서 왜 그리 고집이요?》

김현철이 연희를 바로 앉히려 했으나 그는 어깨를 흔들었다. 잠시후 그가 사뭇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근차근 말했다.

《현철씨, 지금 우리가 이렇게 갇혀있어도 진실은 쉬임없이 알려지고있어요. 비록 우리가 여기서 함께 죽는다고 해도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요. 나의 아버지와 강정웅신부님 그리고 라경숙수녀님, 최세진씨와 곽동수오빠… 많은 고마운분들이 우리의 원한까지 합쳐 이자들의 죄행을 반드시 만천하에 고발할거예요.》

김현철은 나직이 물었다.

《그분들도 이 사실을 알고있겠지?》

《예, 난 그분들을 믿어요. 꼭 진실을 세상에 알릴거예요.》

《나도 믿지만…》 하며 김현철은 다시 덧붙였다.

《그러나 연희씨만은 꼭 여기서 살아나가야 하오. 우린 이제부터 이것만을 생각해야 하오.》

《난 싫어요!》

연희는 김현철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혼자서는 싫어요. 이곳을 벗어나도 현철씨와 함께 가겠어요. 그렇지 않다면 함께 죽을거예요!》

김현철은 참으로 기가 막혔다. 그는 속으로 격한 눈물을 삼키며 연희를 꼭 그러안았다. 그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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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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