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회)

제 3 장 어둠속의 동쪽

37

 

주차장에서 검은색유리를 끼운 똑같은 석대의 승용차가 동시에 출발하였다. 호텔구역을 벗어나 첫 네거리에 이른 차들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곽동수와 한차에 오른 김현철은 피로한듯 눈을 꾹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운전대는 곽동수가 잡고있었다. 그들이 탄 차는 어느새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곽동수는 주위를 살피며 가끔 휘파람을 불었다. 바다를 끼고 해안선을 달리느라니 이윽고 수림이 우거진 낮은 야산들이 다가왔다.

처음 오는 관광객들은 바다로 둘러싸인 홍콩에 무슨 산들이 있겠느냐싶겠지만 사실 홍콩의 진짜 보배는 사방천지에 널려있는 산들과 섬들이라고 할수 있었다. 서울의 대략 두배에 가까운 면적을 가진 홍콩에는 무려 200여개의 섬들이 널려있었고 섬마다 각이한 형태의 등산로가 있었으니 홍콩관광의 특징은 바다와 산을 동시에 즐기는것이였다. 산릉선을 따라 청신한 숲의 공기를 마시며 오를 때에는 가파로운 등산길에 숨을 헐떡이다가도 고개를 넘어서면 발아래로 펼쳐지는 시퍼런 바다물과 수평선을 멀리 내다보며 느끼는 그 상쾌함이란 이를데없었다. 도시라지만 시골처럼 전원풍경도 참으로 다양한 곳이였다.

그러나 지금 김현철에게는 그런것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락엽진 골짜기를 따라 한참 올라간 차가 별장지구로 들어섰다. 바로 이곳에 김현철이 만나려는 사람이 살고있었다. 그는 김춘옥살해사건이 일어난 당시 수사팀을 책임졌던 형사로서 지금은 퇴직하여 그곳에서 살고있었다. 김현철의 엄포에 놀랐던 경찰이 약속대로 그의 주소를 알려왔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연희를 안전하게 돌려보내기 위해 하루라는 시간을 바쳐야 했었다.

차는 누렇게 마른 새초사이로 기운차게 달리다가 대나무길로 들어섰다. 바람에 떨어진 대나무잎이 두툼히 깔려있었다.

정원안으로 들어서며 경적을 울리자 화단을 가꾸던 원예사가 허리를 펴며 돌아보았다. 집사인듯 한 사내가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인사를 나눈 뒤 김현철과 곽동수는 그의 뒤를 따라 안뜰로 향했다.

김현철은 집사의 뒤를 따르면서 이제 있게 될 면담에 대해 미리 생각해보고있었다. 하지만 곽동수는 껌을 질근질근 씹으면서 좌우를 둘러보았다. 만약의 순간에 피신할 장소나 은페물 같은것들을 보아두는것 같았다.

안뜰로 들어서니 머리가 희슥한 늙은이가 대나무등받이의자에 기대앉아 침착한 눈매로 그들일행을 주시하고있었다. 엷은 연회색의 천으로 지은 중국의 전통옷을 입은 로인의 눈길은 자못 날카로왔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의 거동에서 젊은 시절에 무술을 익혔고 지금도 체력을 꾸준히 단련하는 늙은이라는것이 느껴졌다.

《쉽지 않은 길을 수고로이 오셨구려.》

김현철의 인사를 받은 어제날의 형사는 자못 의미가 담긴 답례를 하였다. 한손으로 자리를 권하는데 그 동작마저 유연하면서도 절도있게 느껴졌다. 하인이 웬 서류 같은것을 들고와 탁자에 놓아주는것으로 보아 이미 련락을 받고 준비를 갖춘 모양이였다. 곽동수는 정원을 돌아보겠다고 하면서 집사와 함께 바깥정원으로 나갔다. 늙은이의 성이 왕가였으므로 김현철은 그를 왕형사라고 불렀다. 그는 우선 간단명료한 질문으로 첫 꼭지를 떼기로 했다.

《1987년에 있은 김춘옥살해사건에 대한 형사님의 고견을 듣고싶습니다.》

왕형사는 약간 턱을 쳐들며 미소를 지었다.

《흥미있는 죽음의 진상을 알고싶단 말이지요. 죽은 녀인의 홍콩생활경위, 사람들과의 교제, 재산관계, 결혼생활과 죽음, 날자와 시간, 현장검증과 조사자료, 수사본부가 내린 당시의 중간수사결과… 례하면 이런 사항들이 필요하겠지요?》

김현철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면서도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치도 자기의 속을 다 들여다보고있는것 같았다. 왕년의 형사는 외형처럼 언어에서도 절제를 갖추고있었다. 그리고 지난 시절과 다름없이 수사관본능의 사유를 유지하고있었다. 왕형사는 오래전의 사건에 대하여 자신심을 가지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성명 김춘옥, 1982년 홍콩에 올 당시의 나이는 25살, 위장결혼으로 나타난 녀인이였기에 경찰의 관심속에 있었다. 당시 홍콩에는 김춘옥과 같이 돈을 벌기 위해 위장결혼의 형식으로 입국한 남조선녀성들이 많았다. 김춘옥도 예견하였던바대로 2년이 지나자 형식상 남편으로 되여있는 홍콩남자와의 리혼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김춘옥은 홍콩에 건너와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음식점을 내왔고 번듯한 살림집까지 갖추었다. 당시 그의 음식점에 찾아든 단골들은 대부분이 남조선에서 온 사람들이였다. 주인이라고 할수 있는 김춘옥이 그만하면 인심이 박하지 않고 손님들과의 교제도 웬만큼 능숙하게 하여 음식점은 해를 넘기면서 호경기를 이루었다. 이상한것이 있다면 수입금들이 가까운 은행에 저금되지 않는것이였다. 의문이 생긴 왕형사는 그 음식점을 몇번 찾아가보기도 했다. 그 과정에 만나본 김춘옥은 수수한 녀인이였다.

그의 말을 빌면 빚으로 내온 음식점이여서 은행에 저금할만 한 돈이 없다는것이였다. 탈세혐의 같은것은 별로 찾아볼수 없었다. 그 녀자가 결혼신청서류를 들이민것은 영업을 시작한지 서너해가 지난 1986년 1월이였다. 남편은 고국에서 자주 출장을 오는 어느 조선소의 설계기사였고 이름은 문태석인데 이들 두사람은 교제한지가 오래다는것을 왕형사는 이미 알고있었다.

그러잖아도 다난다사한 일거리들을 안고 부대끼는 홍콩경찰에게 끝내 번거로운 일이 닥쳐들었다. 김춘옥이 자기 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였던것이다. 그때가 1987년 1월말경이였다. 왕형사는 그 시기의 정황을 추억하며 이렇게 말했다.

《… 그때 아빠트에서 심한 악취가 난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문은 걸려있었습니다. 그래서 담당경찰이 두명의 이웃들의 립회하에 문을 뜯었습니다. 집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곧 녀인의 변사체를 발견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강력범죄반에서 근무하던 나와 동료들이 출동을 하게 된것입니다. 발견이 늦다보니 시체는 이미 너무 부패돼있었습니다.》

본격적인 수사팀이 무어지면서 왕형사가 이 사건을 책임지게 되였다. 사건현장에는 김춘옥이 베이징으로 가기 위해 수속한 려권과 함께 암호해득용으로 짐작되는 소책자가 있었다. 그리고 벽난로주변에서 얻은 타다만 종이쪼각을 감정한데 의하면 남편인 문태석을 싱가포르로 유인하라는 지령이 적혀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김춘옥은 부인할수 없는 이북간첩이 아닙니까?》

김현철이 묻자 왕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현장은 그렇게 설명하고있었소.》

김현철은 의문을 제시했다.

《문태석은 기자인터뷰에서 1월 2일 안해가 사라지고 자기는 처를 찾으러 싱가포르로 오라는 협박전화를 받았다고 발언하였습니다. 만일 김춘옥이 이북의 간첩이였고 죽기 전의 최종임무가 문태석을 유인랍치하는것이였다면 왜 문태석과 동행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변사체로 발견된걸가요?》

《정상적인 론거대로 한다면 기자선생의 의문이 자연스럽소.》

《김춘옥이 변사체로 나타난것만큼 그가 언제 죽었는지 알고싶습니다.》

왕형사는 이미 준비해놓은 서류중에서 당시의 법의학적인 감정결과를 기록한 문서를 꺼내놓았다. 그에 의하면 김춘옥은 1월 2일 밤 22시부터 1월 3일 1시사이에 죽은것이 확실했다. 김현철은 흥분으로 하여 입안이 말라드는것을 느꼈다.

왕형사가 차근차근 설명을 덧붙였다.

《여기 조사자료에 있다싶이 피해자의 집에 드나들었던 가정부와 그의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1월 2일 낮 피해자는 친구들과 함께 집에서 낙지볶음료리를 해먹었다고 하오. 피해자의 주검을 부검한 결과 그의 위에서 낙지를 찾아냈소. 결국 피해자는 1월 2일 밤이나 1월 3일 새벽사이 자기 집에서 죽은것으로 판명되였소.》

김현철은 이미 알고있는 자료에 의거하여 당시의 정황을 재빨리 분석해보았다. 문태석은 1월 3일 새벽에 출국을 시도하였던 기록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진짜 홍콩을 떠난것은 1월 4일이였고 싱가포르대사관에 나타난것은 1월 5일이였다. 그런데 김춘옥은 문태석이 첫 출국시도가 있은 그 시각에 이미 죽어있은걸로 판명된다.

왕형사가 김현철을 주시하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김춘옥이 북의 첩자로서 랍치현장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건 정확한 추리가 못되오. 홍콩에는 북조선사람들이 적지 않게 찾아오오. 그 녀인의 음식점에 드나들지 않았다는 담보도 없소. 필요하다면 그들중의 누군가가 문태석을 직접 유인할수도 있지 않았겠소?》

왕형사의 물음에 김현철은 잠시 침묵했다. 살해현장에 김춘옥이 베이징으로 가려고 수속한 려권이 있었다고 한다. 김춘옥은 왜 베이징으로 가려고 했을가? 베이징을 경유하여 평양으로 가려고 했을수 있다는 론거를 세울수도 있다. 채 타지 않은 지령문이 그런 추리의 여지를 주고있지 않는가. 김현철은 갑자기 머리를 기웃거리며 반론했다.

《형사님은 어딘가 정황이 너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마치도 이 녀자는 간첩이라는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듯이 사전에 전개되여있는 사건현장이 말입니다.》

《의도적인 현장조작으로 느껴진단 말이지요?》

왕형사의 눈빛이 번쩍였다. 김현철이 말을 이어갔다.

《제가 이 사건에 의문을 품은것은 모순점을 발견했기때문입니다. 랍치를 주장하는 남편과 랍치를 준비했다는 안해의 변사체. 이 모순을 풀기 위해 어렵게 이곳까지 찾아왔고 지금 형사님과 마주앉아있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석연치가 않습니다. 만일에 김춘옥을 이북의 간첩으로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왜 지령을 수행하기도 전에 죽어야 했을가요? 그 시각은 문태석이 아직 랍치되지도 않은 상태였고 또 홍콩을 떠나기 전이였습니다. 그리고 랍치혐의자는 자기 집에서 이미 죽었는데 왜 남편인 랍치대상은 제발로 이곳을 떠나갔을가요?》

왕형사가 입을 열었다.

《십분 리해가 가는 의문이요. 때문에 우리도 사건현장에서 나타난 증거뿐만이 아니라 홍콩신문들이 피해자의 남편인 문태석의 랍북미수사건을 소개한것에 주의를 돌렸소. 당시 당신네 신문만이 아니라 문태석이 홍콩교민인것으로 하여 여기 교민주간지들도 북조선에서 이 사건에 관여했을 가능성을 연방 제시했소. 그래서 여기 이 문서에서 보는바와 같이 우리도 수사령역을 확대하여 피해자와 채무관계가 있던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와 교분이 있는 북조선계사람들에게 용의점을 두고 집중조사했소. 그런데 일본에까지 가서 용의자들을 조사했으나 결과는 무혐의였소. 물론 나중에는 문태석도 주요용의자로 포착하고 용의자를 인도해줄것을 당신네 당국에 요청했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었소.》

《?》

《사건이 발생하였을 당시에 우리와 당신네 사이에는 범인인도협정이 체결되여있지 않았소. 우리는 용의자를 넘겨줄것을 요청할수는 있어도 자의대로 서울로 수사를 확대할수가 없었소. 그래서 사건이 있은지 서너해가 지나 서울로 출장을 갔던 나는 몰래 문태석의 행처를 추적했는데… 이미 심문할수 없는 상태였소.》

《그때는 이미 문태석이 정신병원에서 치료중이였다는것이겠죠?》

김현철이 묻자 왕형사는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기자선생은 벌써 문태석을 만난 모양이구려.》

김현철이 수긍을 하며 현재의 문태석의 상태와 수상한 점들에 대해 이야기하자 왕형사는 그제서야 정색을 하며 말했다.

《범죄세계를 파고들다보면 때로 적반하장의 경우와 자주 맞다들리게 되는 법이요.》

《그 말씀의 뜻은…》 하고 왕형사를 여겨보던 김현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형사님은 이 사건의 진상을 다 알고계시면서도 빙빙 에돌고있었군요.》

《퇴직한 형사일뿐이요.》

《하지만 법률적인 량심만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고 봅니다.》

《기자이니까 말을 쉽게 하는구만. 그래, 당신은 언론의 량심을 지킬수 있소?》

김현철은 선뜻 뭐라고 말을 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량심을 지킨다는것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를 체험했기때문이였다.

그는 쉽게는 대답할수 없는 자신을 느끼며 숨을 헉하고 들이쉬였다. 그리고 심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형사님의 념려를 알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난 서울에서 온 기자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것은 오직 하나, 진실입니다. 그것이 내가 불원천리하고 이곳을 찾아온 목적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어떤 일이 있어도 오직 진실만을 전하겠다는것을 약속하겠습니다.》

왕형사는 그제서야 믿음이 가는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수굿하고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대개 이런 사건들은 미결로 남아있기가 례상사요. 하여 지금까지 미해명으로 흑막속에 묻혀온것이고… 내가 짐작컨대 문태석랍북미수사건의 씨나리오는 처음에는 아주 품들여 고안되고 치밀하게 계획되여있은것 같소. 그 최종목적이 무엇이였는지는 나로서도 알수가 없소. 자, 그럼 사건전말에 대해 함께 추상해보기요. 서울에 잠입하였던 김춘옥은 본부의 지령을 받고 홍콩으로 공작지점을 바꾼다, 위장결혼으로 닻을 내린 첩자는 공작거점인 음식점을 꾸렸으며 랍치대상인 조선소의 설계기사라는 문태석을 유혹하여 결혼까지 하였다, 능숙한 탐정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 김춘옥은 부부생활을 유지하면서 본부의 지시를 기다린다, 드디여 남편인 문태석에 대한 랍치지령이 내려진다, 그래서 그 실행을 위한 작전에 착수한다. … 여기까지가 준비된 씨나리오의 골자라고 볼수 있소.》

왕형사는 말을 멈추고 김현철의 얼굴을 뚫어질듯 바라보았다. 마치 자기의 가설에 대한 반응을 타진해보는듯 한 눈빛이였다.

《그런데 실행단계에서 예상치 못했던 일이 생겨났소. 그것이 빈틈없던 공작계획을 파격적으로 흔들기 시작한거요. 모든 론리, 모든 기성의 전례들을 파괴하는 행동들이 초래되였으며 끝내는 김춘옥의 시체가 나타난것이요. 결국 조직자들은 계획을 작성하면서 예견하였던 첫 결과에는 도달하였지만 그 어떤 불가피한 요인으로 치명적인 후과를 산생시킨것이 틀림없소. 그러니 남은것은 적당히 마무리짓고 자기들을 제외한 다른 세력의 추적이 불가능하게 모든것을 파괴해버리는것이 아니였겠소. 결국 홍콩에서 한 녀성이 죽었다는 사건만 남았고 랍치피해자인 문태석은 기자회견 이후로는 철저히 은페된것이요. 더이상 문태석이라는 증인은 필요하지 않았을테니까. 결국 난다긴다 하는 홍콩경찰들도 외국에서 사라져버린 용의자를 찾을수 없었고 후날 찾아냈다고 한들 랍치미수사건의 후과로 정신병자가 되였다는 사람을 증인석에 끌어낼수도 없었소. 결국 영원한 미해결사건으로 남게 된거요. 그런데 말이요. 이 능란한 모략가들의 오유를 얼마전에 발견했소. 죽은 사람도 말을 남긴다는것을 몰랐다는게 그들의 치명적인 실수였소. …》

왕형사의 주름덮인 눈가에서는 그 어떤 예지의 빛이 반짝거렸다. 사건서류철속에서 자그마한 수첩을 꺼내든 그는 한동안 들여다보고나서 물었다.

《새상점의 녀인을 만났다지요?》

김현철은 말없이 긍정했다.

《이 홍콩에서 그나마 김춘옥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그 녀자요. 가정부로 그의 집에 제일 많이 드나들었으며 같은 녀성으로서 서로가 마음을 어지간히 터놓으며 살았던 모양이요. 그 녀성에게 김춘옥이 작성한 가계부 같은것이 남아있었소. 그 녀성은 김춘옥이 죽은 후에 짐을 정리하다가 발견했는데 이래저래 겁나고 두려워 여직껏 숨기고있었다오. 그런데 서울에서 온 웬 기자가 김춘옥의 죽음과 관련하여 찾아올것이라는 련락을 받고는 겁에 질려 날 스스로 찾아왔소. 그 물건을 내놓으면서 후날 김춘옥의 가족에게 직접 전하려고 하였는데 이젠 어쩌면 좋은가고 안절부절 못하기에 내가 일단 맡아두기로 하였소. 참 때늦은 감은 있지만 여기에는 김춘옥이 자필로 남긴 글이 있소. 읽어보시오.》

김현철은 고인이 남긴 유물이라는 의미가 담겨서인지 두려움에 가까운 긴장감을 느꼈다. 색이 누렇게 변한 수첩의 갈피마다에는 온통 돈을 계산한것들이 적혀있었다. 삐뚤삐뚤한 글씨며 뭐가 뭔지 리해할수 없게 산만하게 기록되여있는것이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한 주인의 경력을 실증해주는듯싶었다. 그가운데 이따금 하소연인듯 한 문장들이 뒤섞여 나타났다.

《고향이 그립구나. 어머니가 보고싶어 못 견디겠다. 동생들은 어떻게들 지내고나 있는지.…》

《난 어찌되려는건지. 살아도 제 목숨이 아니니 이런 기막힌 인생살이도 있다더냐. 돈을 벌려고 왔건만 매일 버는 돈은 내것이 아니다. 찾아드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짐승과 같은 족속들이다. …》

탄식가락이 점점 길어지더니 마침내 한 녀성에게 강요된 운명을 련상할수 있는 문장들이 이어졌다.

《서울에서부터 나를 속여서 예까지 데려온 문태석은 음식점을 넘겨준 다음부터 이따금 나타나 할짓, 못할짓을 다 해댔다. 내가 의견을 말하니 가만있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한다. 나로서는 도저히 물리칠 힘도, 물설고 낯설은 이역땅에서 도움받을 사람도 없다. 나는 한정없이 짓밟히며 하라는대로 순종하는 길밖에는 남지 않았다. 나에게 어떤 괴이한 교육을 주려 하지만 난 싫다. 난 그들이 바라는게 싫다. 그래도 나를 위안해주는것은 술이다. 밤이면 나는 술과 함께 자군 한다. 이젠 그것을 마시지 않으면 참을수 없는 갈증을 느낀다. 이런걸 두고 알콜중독이라고 하는지…》

《… 며칠전에 문태석이 웬 사나이 두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술을 마시며 하는 수작질을 옆방에서 우연히 훔쳐들었다. 87년 설이나 쇠고는 움직여야 한다는것이다. 문태석이 나를 데리고 싱가포르의 어느 장소로 오라고 한다. 그사이 지시한대로 이북의 첩자가 산 집과 같이 꾸며놓으라는것이다. 아무리 눈치가 무딘 내라도 어렴풋이나마 넘겨짚을수 있다. 내가 그처럼 두려워하던 그 시각이 다가오는것 같다. 이제 나는 설을 넘기기 바쁘게 홍콩도 아닌 다른 나라에 가게 될것이다. 이 사람들은 나를 어떤 무서운 음모에 끌어들이려 하고있다. 이제 가면 또 어떤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나 있는지… 가고싶지 않다. 가도 어머니와 동생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싶다. 미친것들은 이전부터 나더러 북의 간첩노릇을 하라고, 그 역만 잘하면 한생을 쓰고살 묵돈을 벌수 있다고 한다. 회유가 아니라 완전한 강요이다. 하지만 한두번만 속아보지 않은 난 거절했다. 더우기 간첩이라는 오명을 쓰고 살다 죽으면 내가 어떻게 저승에서 조상을 만난단 말인가. 짐승같은것들이 나를 싱가포르로 날라가기는 식은 죽 먹기일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고싶지 않다. 싱가포르가 아니라 고향으로 갈것이다. 설마 죽이기야 하랴. 까짓거 죽일테면 죽이라지. 고향으로 가기 전에는 이 집에서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것이다! … 아, 내가 왜 한국이라는 저주받을 땅에서 태를 끊고 태여났던가. 돈이 없어 죽은 목숨이나 같이 버림받고 살자니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더럽히게 되였으니 이 얼마나 가련한 인생이냐. 나 같은것까지 간첩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나 하는 그 땅이 가증스럽기만 하다. …》

한 녀성이 가혹한 운명을 강요하는 무지막지한 세상을 저주하며 터뜨리는 원성과 태질하듯 한 몸부림이 그대로 엿보이는듯싶어 김현철은 눈을 지그시 감고말았다.

이윽고 그가 상념에서 깨여나자 왕형사는 어딘가 먼곳을 응시하고있었다. 비록 이국녀성이기는 하지만 불행한 한 인간의 운명이 그에게도 충격을 준듯싶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릇 어떤 사건에나 최대의 수혜자가 있기마련이요. 그렇다면 이 랍북미수사건의 수혜자는 누구인가 하는것은 삼척동자도 알것이요. 당신이 이 나머지 자료들을 료해하느라면 대답은 절로 나올것이라고 생각하오.》

그가 넘겨준 사건수사당시의 조사자료들은 적지 않았다. 법의학적인 감정자료에는 김춘옥의 변사체를 부검한 결과 그가 죽기 전에 많은 량의 알콜을 섭취했다는것, 사인은 목을 졸라 죽인것으로 되여있는데 적어도 세사람의 흔적이 현장에 남아있었다고 밝혀져있었다. 그 녀자가 문태석과 동행하는것을 완강하게 거부하자 그를 위협하던 끝에 죽일수밖에 없었으며 당시 설을 맞이한 련휴기간이였으므로 특별경계상태에 들어간 경찰의 눈이 무서워 살인자들은 시체를 경솔하게 옮길수 없었다는것이 수사관들이 내린 결론이였다고 왕형사가 보충적으로 설명해주었다. 결국 사건현장은 김춘옥이 자살했거나 혹은 그의 동료들이 살해한것처럼 꾸며놓을수밖에 없었을것이다.

왕형사의 말에서 김현철은 지금까지 자기가 추적해온 사실들에서 미흡하다거나 모순으로 보았던 점들이 거의나 해명되고있음을 깨달았다.

《기자선생, 내가 부디 이 수첩을 보여주는 까닭은 당신네 정보기관이나 사법경찰제도가 너무도 야만스럽기때문이요. 오늘이 21세기라고 생각할 때 더욱 그렇소. 야만의 땅에서 야만을 없애기는 어려울거요.》

김현철은 심각하게 형사의 말을 받아들였다.

《형사님의 말뜻을 새겨듣습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싶은것은 인간의 정의와 진리는 반드시 악을 징벌하고 이긴다는것입니다. 그것을 굳게 약속하고싶습니다.》

왕형사는 의미가 깊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 같은 젊은이들이 많아지기를 바라겠소.》

김현철이 왕형사와 작별을 하려고 일어설 때 정원을 돌아보던 곽동수가 다가왔다. 그는 느닷없이 집주인에게 멀지 않은 벼랑턱에 아래로 내려가는 외통길이 있던데 바다로 향한게 맞는가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선창도 있는가고 다시 물었다.

《아닙니다. 내가 낚시질을 좋아하니 아들녀석이 철장들을 박아 절벽에서 기슭까지 낚시길을 낸 이 별장을 골랐습니다. 오래된 길이라 불편합니다.》

그러자 곽동수는 히쭉 웃고는 누구에겐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김현철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아슬아슬한 벼랑길은 아직도 이슬에 젖은 이끼들이 덮여있어 몹시 미끄러웠다. 김현철은 영문도 모른채 곽동수의 뒤를 따라 안전쇠바줄을 잡고 비틀거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출렁거리는 바다우로 어느새 작은 고무배가 다가오고있었다. 거무스레한 바위우에 올라선 곽동수는 김현철에게 말했다.

《어쩌면 나를 신의가 없다고 욕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것입니다.》

김현철은 지금에 와서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영문을 알수 없었다.

고무배가 다닿자 그는 김현철을 거기에 올려태웠다. 의아해하는 김현철에게 그는 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노를 잡고있는 사내에게 어서 떠나라는 손짓을 했다. 물에 젖은 이끼를 밟으며 돌층계를 올라가는 퇴직형사와 곽동수의 모습이 차츰 멀어져갔다. 어리벙벙해있던 김현철은 순간 자기가 잘못하지 않는가 하는 후회감에 사로잡혔다. 문득 서울에서 자기를 배웅하던 최세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누구도 믿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하지 않았던가! 김현철은 멀어져가는 곽동수의 모습에서 오래도록 눈길을 떼지 못했다.

(저 사람의 마지막말의 의미는 무엇일가? 신의가 없다고 욕할수 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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